나는 아프지 않아야 한다고 단단히 결심을 했다.

몸이 아파서 쓰러지는 것은 정치군부에 대한 두 번째 패배가 될 것이다.

남영동 고문에 불복한 것에 뒤이은 또 다른 패배가 될 것이다.

나는 두 발로 버텼다. 나는 자생력을 믿었다.

 

봄과 함께 내 몸과 마음의 건강은 눈에 띄게 회복되었다.

앞으로 더욱 그렇게 되리라고 믿는다.

이제 남은 것은 심하게 옭죄는 두통이다.

이와 관련이 있는 것은 제대로 숙면을 취하지 못하는 것. 감기 기운이 떨어지지 않는 것뿐이다.

 

지난 4월초 구치소 의무과는 스크린 테스트(개략검사)로 가슴과 머리 사진, 피검사, 소변검사를 했다.

의무과장은 이상이 없다고 말해 주었다.

우선 다행스런 일이다.

 

그렇다면 이 견딜 수 없는 두통은 무엇 때문인가?

내가 엄살을 부리고 있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만약 그렇게 하고자 했다면 타이밍을 놓쳐 버린 것일 게다.

 

보다 엄밀한 진료와 검사가 필요한 단계라고 나는 생각한다.

죄어 오는 아픈 머리와 푸석하게 부은 두 눈으로 이 글을 써내려간다.

그러면서 나는 은근히 걱정한다.

이 두통과 부조화들이 정신적 외상으로 인한 신체적 반응 증상은 아닌가 하고.

 

전기와 물고문의 그 고통, 공포와 혼란으로 입은 정신구조의 깊은 상처가 아직도 아물지 않고 피를 흘리고 있는 것인가?

그래서 혹시 이을호씨가 앓고 있는 그것을 나도 부분적으로 가슴 앓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제 나의 가슴앓이를 지그시 누르면서 또한 박영진 형제의 가난한 죽음 앞에, 경원전문대의 한 학생의 분신,

그리고 서울대의 두 학생의 활활 타오르는 분노와 항의에 부끄러운 옷깃을 여미면서, 울컥 치솟는 뜨거운 것을 꾹꾹 누르면서,

내 얘기를 내 사건이라는 것을 이것저것 따져 보고 짚어 나가겠다.

 

정치군부는 재판에 끊임없이 간섭하고 장애를 조성했다.

그렇게 하여 재판부 판사들에게 심리적 압박을 가하였고 판결에 영향을 미쳤다.

 

85년 12월 19일 첫 공판 기일 이래 매 공판 때마다 법원구내와 주변에 많은 정, 사복 경찰병력을 배치시켜

삼엄한 분위기를 고의적으로 만들었고, 문익환 선생을 비롯한 민주인사들을 불법적으로 자택에 감금시켜 방청하지 못하도록 했다.

 

미국에서 급거 날아온 두 명의 변호사 역시 기만과 강박으로 인해 방청을 봉쇄당했다.

한 사람인 에이미 영 미법률가협회 총무는 공판기일에 법원 구내까지 들어왔다가 방해받아 방청하지 못했다.

구치감 앞에 머문 지프차에서 내리는 나를 먼 발치서 바라보고 난 후 곧 강압적으로 어디론가 안내되었다.

자칭 미대사관 직원이라고 하는 건장한 사내들에 의해 사실상 끌려간 곳은 공안연구소장 김경한 검사 앞이었다.

김 검사는 말했다고 한다.

 

"남영동에 있을 때 변호인 접견이나 조력을 요청하지 않았다. 고문 받지 않았다.

만일 고문 받은 사실이 판사에 의해 인정되면 석방될 것이다.

필요하다고 요청하면 물론 자기의 외래의사 진료와 치료를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아프지 않다."

 

부끄러운 줄을 모르는 이 뻔뻔한 거짓말 중에 그래도 꼭 하나 사실과 맞는 얘기가 있다.

그렇다. 나는 변호인의 조력과 접견을 요청하지 않았다. 못했다.

 

그러나 어떠했을까?

만일 그렇게 했더라면 아직도 정신을 못차린 한심한 작자라고 구박받으면서 한 차례 더 전기고문, 물고문이나 당하지 않았을까?

 

재미동포들과 우리의 미국 친구들을 대신해 대표로서 이들이 찾아왔다.

비열한 고문행위에 항의하고 재판을 방청하려 했던 인권 변호사들의 목적은 효과적으로 막혀졌다.

이 고문, 이 사건에 대한 국제적인 주시, 비판을 정치군부는 여러가지 방법을 동원하여 아주 능률적으로 차단해 버린 것이다.

 

정치군부는 협조라는 이름으로 신문사 사주, 편집국장을 협박하여 남영동 짐승들의 고문에 관한 것은 전혀 기사화되지 못하도록 조치했다.

공판정에서는 많은 기자들이 열심히 메모를 하는 데도 고문에 관한 것이나 중요한 쟁점은 보도되지 않았다.

 

이는 언론자유를 침해한 것일 뿐 아니라 재판의 공개주의를 훼손시켜 버린 것이다.

개개인의 방청자유는 물론 현재 대중사회에서는 재판에 대한 보도자유가 보장됨으로써만

국민은 재판이 성실하게 행해지는지의 여부를 감시하고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사건에서 공개주의 원칙은 지켜지지 않은 것이다.

 

어용보도기관인 KBS와 연합통신을 동원하여 사실을 왜곡, 날조함으로써 사전에 관제여론재판을 강행하려 시도했으며,

그로써 판결에 영향을 미쳤다.

고문 사실의 일부가 노출된 이후 KBS등은 더욱 기승을 부렸는데,

이것은 맞붙어 자름으로써 고문은폐 효과를 거두고 의도된 정치보복을 최종적으로 완수코자 한 것이었다.

 

서성 판사는 공판정에서 이 사건이 신문, 방송에서 보도된 것과는 다르다고 말했다.

그것에서 만들어진 편견에서 해방되느라고 무척 힘들었다는 의미의 발언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말뿐이고 사실은 정치군부와 관제언론에 의해 만들어지고 강요된 편견 속을 헤매었으며,

남영동에서 각색된 피 묻은 서류에 파묻혀 영원히 가라앉아 버린 것이다.

서성 판사를 비롯하여 재판부 전원이 아주 깊숙이 침몰돼버린 것이다.

 

1심 재판에는 예단과 편견배제의 원칙을 저버리고 공정성을 잃어버림으로써 판결에 영향을 미쳤다.

연합통신 제공으로 반 강요된 기사가 각 일간신문에 획일적으로 크게 보도되었고,

KBS 뉴스시간에 여러 번, 거기다가 2회에 걸쳐 40여분짜리 나 개인에 관한 특집 기획물까지 만들어 방영했다.

 

이것은 정치군부 보복의지가 얼마나 강렬한가를 나타내 주는 것이다.

이른바 이 사건이라고 하는 것은 사실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군부 보복의지 강도의 문제이다.

이 우렁차게 선포된 강고한 의지 앞에 재판부는 뼛속까지 얼어 버렸던 것으로 추정된다.

 

서성 판사는 공소제기일로부터 제1회 공판기일까지 근 두달여 동안 단독결정으로 가족면회를 금지시켰다.

검찰에서 묵비고수 때문이라는 것이다.

묵비권 행사가 죄증을 인멸할 염려가 있다고 인정할 만한 상당한 이유가 아닌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정치군부가 고문증거를 인멸할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 그 진정한 이유다.

공소제기 전, 경찰, 검찰수사 단계에서도 역시 두 달 가까이 가족은 물론 변호인까지

서로의 만남이 완전 봉쇄되었던 것을 잘 알면서도 내린 이 결정은 잔인한 것으로서 그 자체가 무효다.

 

사람은 사회적 존재로서 친밀한 인간적 만남 속에서 비로소 존엄성와 가치를 누릴 수 있으며, 행복을 추구할 수 있다.

서성 판사의 이러한 결정은 나를 도와줄 수 있는 모든 사람으로부터 차단당하고 만 것으로 바로 헌법 제9조 위반이다.

그러나 뭐 위반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은 것이었다.

처음부터 논리나 양식 그런 문제는 전혀 아니었기 때문이다.

 

서성 판사는 제1회 공판기일부터 공연히 방청권을 발행하여 가족과 민주인사들의 재판 방청을 사실상 방해했고,

그럼으로써 고문을 규탄하고 항의하는 분위기를 삭히는데 누구보다 노력했다.

 

아무런 이유없이 방청인 수를 대폭 제한하였으며, 그나마 절반정도는 기관원 또는 그렇게 동원된 사람들에 의해 점거되게 했다.

이렇게 하여 오히려 일정한 긴장을 유발시켜 놓고도 방청에 제한당한 사람들이 소란을 피운다는 명목으로

법정 경찰권을 동원해서 잔인하게 제지를 가하는 결과를 빚어지게 만들었다.

이 과정에서 나의 처 인재근은 경찰의 폭행으로 졸도하기까지에 이르렀다.

 

제1회 공판조서의 기재내용이 지나치게 부실하여 이에 대해 변호인도 나도 이의제기를 하고 시정을 요구했지만 거절당했다.

그 이유는 이랬다.

 

"다른 사건에서는 피고인이 이익되는 진술을 30여 분 해도 고작 한 두줄 정도로 기재하는 것이 현행 관례다.

개선되어야 할 관례지만 이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충실한 편이었다"고.

 

나는 첫 공판기일에 남영동에서 당한 고문을 아주 짧게 줄여서 말했다.

그런데 그것을 극도로 줄였을 뿐 아니라 모호하고 추상적으로 기재하여 고문사실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을 정도였다.

거절을 수긍할 수는 없었지만 갈 길이 멀고 멀어서, 또 고문을 참혹하게 하고서는 그것을 은폐하기 위해

무슨 짓이라도 하는 정치군부를 의식한 판사들이 안되어 보여서, 그 정도로 하고 지나치기로 했다.

 

증인 심문 단계 중간쯤부터 서성판사는 공정성을 저버리고, 유죄를 예단케 하는 도발적인 질문을 증인에게 두서없이 던졌으며

나에게도 같은 질문을 했다.

집시법 부분에서 거론한 최민화 씨 증언시에 서성 판사는 다음 같이 증인에게 물었다.

 

"왜, '민주화의 길'의 논설을 의장만 쓰는가? 그렇게 하면 영향력이 의장에게 집중되지 않느냐."

 

당시 서성판사의 뉘앙스까지 합쳐보면 민청련 운동은 거의 나 혼자 해온 것처럼 인상을 지우면서

동시에 사건을 은폐하려는 저의가 있는 것 같은 분위기를 조성하기까지 했다.

이것은 예단이니 편견배제니 그런 것을 넘어선 도전적이고 적대적인 것이었다.

 

나는 울컥 분노가 솟아오르는 것을 누르면서 '참자, 또 참자' 고 자신을 억누르면서

'논설은 의장단이 써아 하는데 다른 사람들이 글을 쓰지 않아서 결국 나에게 부담으로 돌아온 것" 이라고 대답해 주었다.

'학생들처럼 엎어버리지는 말아야지, 말아야지...' 하면서 '참고 넘어가 주자' 고 하며 그냥 지나간 것이 지금에서는 몹시 억울하다.

점잔을 뺀 것이 되어 여러 사람들에게 미안하게 되었고 다른 한편으로 시쳇말로 쪽은 쪽대로 팔려 버렸으니......

 

서성 판사는 내가 제출한 탄원서에 대한 변호인의 열람을 거짓말로 따돌렸다.

활용할 수 있는 마지막 시간까지 힘을 다해 남영동 고문을 생생하게 기록했었다.

탄원서라는 이름의 서류에.

3월 4일. 선고 날 이틀 전에 아마 재판부에 도착했을 것이다.

 

선고가 있은 후 닷새째 날인 3월 11일, 변호인은 이 탄원서의 열람을 요청했다.

이에 대해 서성 판사는 "이미 소송기록을 보냈다"고 하면서 따돌렸던 것이다.

앞뒤 사정을 봐도 그렇고 검찰의 말을 들어 봐도 그렇고, 이미 소송기록을 갖고 있었던 것은 분명한데, 거짓말로 열람요청을 방해한 것이다.

 

이것은 작전이었다.

그 작전을 모른 채 이리저리 끌려 다니다가 패대기쳐진 것이다.

완전히 해낸 것이었다. 치밀하게. 그리하여 훌륭하게 여러가지 현실적인 고려를 하고 대처하여 서성 판사는 승리했다.

 

 

본래 이 사건에 대한 의혹과 고문에 대한 광범한 분노를 잘 읽고,

형식 또는 절차는 주고(그것도 앞에서 본 바와 같이 고문사실은 안되고), 내용은 완전히 꼴깍 먹어치운 것이다.

 

그럼으로써 '짱' 박아두었던 '충성'이 매우 빛을 발하게 되었으며 정치군부의 승리를 남영동. 검찰에 이어 또 한번 튼튼하게 확인한 것이었다. 그러니 이 공로에 대한 보답이 있을 수 밖에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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