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서전 어록’ 대선 앞두고 화제
어린아이 화법, 따스함이 없는 인간미, 비민주적 관행 혹평
“한나라당은 ‘나의 당’, 청와대는 ‘나의 집’, 대통령은 ‘가업’”

 

전여옥 전 한나라당(현 새누리당) 의원이 지난 1월 출간한 자서전 〈i 전여옥〉이 대선을 앞두고 누리꾼 사이에서 다시 화제다. 전 전 의원은 이 책에서 박 후보에 대해 “대통령감이 아니다”고 평가 절하했다. 전 전 의원은 2005년 당시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 시절 대변인으로서 박 후보를 보좌한 바 있다.

 

전 전 의원은 “박근혜 후보. 내가 당에 들어와 지난 3년 동안 지켜봐 왔다. 가까이서 2년을 지켜보았다. 그래서 나는 잘 알고 있었다. 대통령 감은 아니라는 것을. 그녀가 과연 대통령직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을까? 그에 대한 나의 답은 이미 정해졌다. 아니다. No였다. 대통령이 될 수도 없고 또 되어서도 안되는 후보라고 생각한다”라고 적었다.

 

전 전 의원은 박 후보에 대해 실망했던 경험들을 열거했다. 전 전 의원은 박 후보의 집에 방문했던 경험을 떠올리며 “박근혜 의원의 서재는 날 감동시키지 못했다. 서재라고 부르기도 좀 그랬다. 나는 언론에서 맨날 박근혜고 안철수고 ‘대권 공부’를 한다는데 그런 기사를 접할 때마다 짜증이 난다. 공부가 끝났어도 시원찮은데 말이다. 교수들에게 특별과외를 받는 것도 사실 웃기는 일이다”라며 김종인 새누리당 행복추진위원장(당시 비상대책위원)의 말을 이어 전했다. “옛날에 비하면 엄청나게 나아진 거지요. 그런데 아직 초보 수준이고 자기가 얘기하는 것이 다 알고 얘기하는 것 같지는 않고 옛날보다 나아진 것은 있지요.” 전 전 의원은 또 “거의 교과서를 암기하고 족집게 과외 공부하는 수준이라면 이 나라 국민이 곤란하지 않는가?”라며 박 후보를 힐난했다.

 

그는 또 박 후보의 화법을 어린아이에 비유하며 혹평했다. 전 전 의원은 “박근혜는 늘 짧게 답한다. ‘대전은요?’, ‘참 나쁜 대통령’, ‘오만의 극치’. 그런데 이 단언은 간단명료하지만 그 이상이 없다. (중략) 국민들은 처음에는 무슨 심오한 뜻이 있겠거니 했다. 뭔가 깊은 내용과 엄청난 상징적 비유를 기대했다. 그런데 거기에서 그쳤다. 어찌 보면 말 배우는 어린아이들이 흔히 쓰는 ‘베이비 토크’와 다른 점이 없어 보인다”고 평가했다.

 

이어 박 후보의 인간미에 대한 평도 덧붙였다. 전 전 의원은 “박근혜는 너무 어둡다. 사람에 대한 따스함이 없다. 박근혜는 국내선 비행기를 타면, 널리 알려졌듯이 이코노미를 탄다. 그런데 박근혜의 이코노미석 옆은 대개 블록이 되어 있다. 옆에 사람이 앉지 않게 하는 것이다. 비행기가 만석일 때 빼놓고는 옆에 사람이 앉지 않는다. 이코노미 타는 이유가 뭔가? 사람들과 섞이기 위해 아닌가? 한정된 좌석의 비즈니스클래스를 타면 볼 수 없는 것, 만날 수 없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 장점이건만-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다”고 적었다.

 

전 전 의원은 박 후보의 비민주적 업무지시 관행도 지적했다. 전 전 의원은 “친박 의원들 사이에서는 박 전 대표의 뜻을 헤아리느라 우왕좌왕하는 것이 이미 널리 알려진 일이다. 그러면 박 전 대표는 ‘제가 꼭 말을 해야 아시나요?’라고 단 한마디 한다고 한다. 말하지 않고 어떻게 아나? 정치는 말로 하는 것이다. 정치인은 최선을 다해 말로 자신의 원칙과 소신을 유권자와 국민에게 설명하고 호소해야 한다. (중략)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해라’ 하는 것은 그 자체가 비민주적이다”고 비판했다.

 

전 전 의원은 2005년 한나라당에 막 들어와 박 후보의 시중꾼 노릇을 했던 경험도 적었다. 전 전 의원은 “경상북도 대구에서 있던 행사로 기억된다. 그날 앞쪽에는 박근혜 당시 대표가 앉아 있었고 바로 뒷줄에는 나와 대구 경북 지역의 의원들이 줄줄이 앉아있었다. 그런데 비가 주르륵 내리기 시작했다. (중략) 옆에 있던 김태환, 이해봉 의원이 내게 말하는 것이었다. ‘전 대변인 뭐하고 있나? 대표님 머리 씌워드려야지’. 순간 나는 당황했다. 아니, 자기 우비의 모자는 자기가 쓰면 되는 것 아닌가? (중략) 박근혜는 내가 씌워주기를 기다렸다. (중략) 나는 박근혜 대표 커다란 올림머리가 비에 젖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우비모자를 씌워주었다. 박근혜 대표는 여전히 한마디도, 미동도 없었다”고 말했다.

 

전 전 의원은 또 ‘박근혜 신격화하기에 동참하지 못한 친박 의원들’에 대해 적었다. 전 전 의원은 “김무성 의원도, 진영 의원도 친박의 울타리를 떠났다. 이 두 사람은 박 전 대표에게는 매우 중요한 그리고 가까운 인물들이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김무성 원내대표는 ‘2인자’를 두지 않는 박 대표와의 미묘한 갈등 속에서 떠났다. 진영 의원도 ‘친박으로서 충성도 부족’이라는 질타를 견디지 못해 떠났다. 그들은 공통적으로 ‘박근혜 의원을 신격화해도 모자라는데 우습게 본 사람들’이란 다른 친박 의원들의 손가락질을 받으며 결별선언을 했다”고 적었다.

 

박 후보의 권력의지에 대한 평가도 눈길을 끈다. 전 전 의원은 “그녀는 대통령이 되고 싶어했다. 나는 그런 속내를 알고 있었다. (중략) 박근혜의 권력 의지는 대단했다. 나는 그녀를 관찰하면서 아 저렇게 까지 대통령이 되고 싶을까 싶었다. 그러면서 몇 가지 사실을 알게 됐다. 그녀에게 있어서는 권력이란 매우 자연스럽고 몸에 맞는 맞춤옷 같은 것이라는 것, 그리고 더 나아가 그녀에게는 생활 필수품이라는 것을 말이다”라고 적었다. 이어 “박근혜에게 한나라당은 ‘나의 당’이었다. 대한민국은 우리 아버지가 만든 ‘나의 나라’였다. 이 나라 국민은 아버지가 긍휼히 여긴 ‘나의 국민’이었다. 물론 청와대는 ‘나의 집’이었다. 그리고 대통령은 바로 ‘가업’이었다”고 주장했다.

 

누리꾼들은 전여옥 전 의원의 어록을 트위터 등에 퍼나르며 저마다 한 마디씩 남기고 있다. 고종석(@kohjongsok)씨는 자신의 트위터에 “전여옥이 문재인의 가장 큰 우군이 될 줄이야”라고 썼고, 누리꾼 @myworld***은 “전여옥도 앙심을 품은듯. 그래도 보는 눈이 정확한 듯”이라고 평가했다. 누리꾼 @mettayoon은 “여러분! 한번 속으면 속인 사람이 나쁜 놈입니다. 그러나 두번 속으면 속은 사람이 바보입니다. (‘MB의 추억’ 마지막에 나오는 전여옥의 말)”이라고 적었다.

 

허재현 기자catalunia@hani.co.kr

 

 

 

출처 : 트위터 이용자 @BeanPole2000이 12월2일 트위터에 연재한 내용임

 

▶전여옥 어록 1

 

“박근혜 위원장은 자기의 심기를 요만큼이라고 거스리거나 나쁜 말을 하면 절대로 용서하지 않는다. 그가 용서하는 사람은 딱 한 명 자기 자신이다.”

 

▶전여옥 어록 2

 

“하루는 어머니들과의 대화를 위해서 패스트푸드점을 찾았는데 박근혜 위원장이 햄버거를 먹지 않고 있기에 ‘왜 먹지 않냐’고 물었더니 대답이 없더라. 보좌관이 포크와 나이프를 들고 오니 그제야 먹었다.”

 

▶전여옥 어록 3

 

“박근혜에게 한나라당은 ‘나의 당’이었다. 한국은 아버지가 만든 ‘나의 나라’였다. 국민은 아버지가 긍휼히 여긴 ‘나의 국민’이었다. 물론 청와대는 ‘나의 집’이었다. 그리고 대통령은 바로 ‘가업’(my family‘s job)이었다.

 

▶전여옥 어록 4

 

”친박 의원들이 박근혜 대표의 뜻을 헤아리느라 우왕좌왕하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면 박 대표는 ’제가 꼭 말을 해야 아시나요?‘라고 단 한 마디 한다. ’내가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해라‘하는 것은 그 자체가 비민주적이다.“

 

▶전여옥 어록 5

 

”박근혜는 늘 짧게 대답한다. ’대전은요?‘, ’참 나쁜 대통령‘ 등. 국민들은 처음에는 무슨 심오한 뜻이 있겠거니 했다. 그러나 사실 아무 내용 없다. 어찌 보면 말 배우는 어린애들이 흔히 쓰는 ’베이비 토크‘와 다른 점이 없다.“

 

▶전여옥 어록 6

 

”박 대표 바로 뒷줄에 앉아 있었다.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의원들이 말했다. ’대표님 머리에 우비 모자 씌워드려야지.‘ 나는 당황했다. 자기 우비 모자는 자기가 쓰면 되는 것 아닌가? 내가 씌워드렸지만 박 대표는 한마디도 없었다.“

 

▶전여옥 어록 7

 

”박근혜는 전당대회에서 “한나라당은 부정부패 연루자를 보호하지 않으며, 기소되면 당원 자격을 정지시키고 유죄가 확정되면 영구 제명하겠다”고 말했는데 부정부패로 유죄가 확정돼 2년반 콩밥을 먹은 사람을 당을 쇄신할 비대위원으로 임명했다”

 

▶전여옥 어록 8

 

“박근혜는 대통령 될 수도, 되어서도 안 된다. 정치적 식견ㆍ인문학적 콘텐츠도 부족하고, 신문기사를 깊이 있게 이해 못한다. 그녀는 이제 말 배우는 어린 아이 수준에 불과하다.”

 

▶전여옥 어록 9

 

“영등포에 손가락이 잘린 분들이 많은데 유신독재 시설 공장에서 각성제를 먹고 졸면서 일하다가 사고를 당한 사람들이다. 산업화의 영웅은 그들인데 꽃다발도 없고 명예도 없다.”

 

▶전여옥 어록 10

 

“박근혜는 공천 승복하는 것이 정도라고 얘기하지만 정작 박 위원장 본인은 승복하지 않았다. 친이계에 공천 승복하라고 말하는 것은 자기모순이다.”

 

▶전여옥 어록 11

 

“보좌관이 박근혜 위원장의 쓸 샴푸를 사야 하는데 단종이 돼 아무리 찾아도 못 찾았다. 왜 최근 나온 제품들을 안 쓰고 옛 제품만 고집하는지 이유를 모르겠다.”

 

▶전여옥 어록 12

 

“박근혜 위원장은 클럽에 갈 때에도 왕관을 쓰고 갈 것 같다.”

 

▶전여옥 어록 13

 

“박근혜 위원장의 자택 서재를 둘러보고 박 위원장의 지적 인식능력에 좀 문제가 있다 생각했다. 서재에 일단 책이 별로 없었고 증정 받은 책들만 주로 있어 통일성을 찾기 어려웠다. 그래서 ’여기가 서재인가‘하는 생각을 했다.”

 

▶전여옥 어록 14

 

“여러분, 한 번 속으면 속인 사람이 나쁜 놈입니다. 그러나 두 번 속으면 속은 사람이 바보입니다!”

김근태 평전/[6장] 엉터리 재판 5년 징역형 선고

2012/08/02 08:00 김삼웅

 

피의자에 대한 변호사의 접견과 가족의 면회는 법으로 보장된 정당한 권리다.
그럼에도 서울구치소 당국은 김근태가 수감되고 3개월여 동안이나 변호사의 접견을 막은 것은 물론 가족 면회까지 차단했다. 국가기관이 공공연하게 위법을 저지른 것이다. 남영동의 가혹한 고문사실이 알려지면서, 이 실상이 세상에 백일하에 드러나는 것을 덮자는 수작이었다.

홍성우ㆍ황인철ㆍ신기하 등 변협 소속 변호사들이 1985년 10월 14일부터 수차례 서울구치소에 찾아와 김근태의 접견을 신청했으나, 그때마다 검찰출정을 이유로 거부당했다. 변협의 보고서다.

△ 본인들은 1985. 11. 30. 9시 30분 서울구치소에 가서 집견원을 제출하였던 바 벌써 검찰에 출정하였다는 이유로 접견을 거절하므로 구치소장을 찾아가서 항의하였더니 구치소장은 피구속자 김근태는 매일 아침 일찍 검찰에 불려갔다가 오후 5시 이후에야 돌아오기 때문에 도저히 접견이 불가능하다고 말하므로 어쩔 도리없이 접견을 못하고 돌아왔음.

△ 본인들은 1985. 12. 2. 오전에 서울지방검찰청 검사장 정구영을 찾아가서 대한변호사협회 인권위원회의 고문실태조사에 협력해 달라고 하면서 피구속자 김근태의 접견을 요청하였던 바, 검사장은 위 피구속자는 지금까지 묵비권을 행사하고 있어 그의 진술을 얻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의 진술을 듣고자 매일 아침 일찍 검찰에 출정시키고 있으며, 아직 사선 변호인들에게도 접견을 시키지 아니하였는데 사선 변호인들보다 먼저 대한변협의 조사위원에게 접견을 시킬 수는 없지 않겠느냐고 하면서 머지않아 사선 변호인들에게 접견의 기회를 주고자하니 대한변협의 조사위원은 그 다음에 접견을 해달라고 말하므로 그대로 돌아왔음.

△ 이상과 같은 경위로 피구속자 김근태에 대한 고문실태조사는 못하고 말았는 바, 그동안 18회에 걸친 사선 변호인들의 접견을 허용하지 아니하고 본 조사위원들의 접견 또한 허용하지 아니한 처사는, 고문 여부는 잠시 제쳐놓더라도 그 자체가 묵과할 수 없는 중대한 인권침해이며, 신체고문에 대하여도 매우 짙은 의심을 갖게 하는 것임.
(주석 6)

전두환 정권은 국민의 인권이나 법질서 따위는 안중에 없었다. 비판자에 대한 탄압과 보복으로 권력 유지에만 혈안이 되었다. 출범 과정에서부터 정통성이 없는 정권의 도당적(徒黨的) 행태였다. 검찰은 김근태를 국가보안법(국보법) 위반혐의로 기소하고, 매일 검찰청에 호송하여 조사하였다. 남영동에서 받은 조사가 되풀이 되었다. 김근태는 변호사 접견을 막는 한 진술을 거부하겠다고 말하고 이를 지켰다.

민청련을 이적 단체로 규정한 김근태의 공소장은 다음과 같다.(요지)

1985년 3월 하순 경기도 시흥군 소재 속칭 작은자리 건물 회의실에서 민청련 간부들과 만나 1985년도의 정세전망 및 사회운동권 단체 통합문제에 관한 토의를 하였다. 피고인은 보고를 통하여 운동단체 통합과정에서 CD(시민민주주의), ND(민족민주주의), PD(민중민주주의) 등의 이념적 차이를 드러냈는데 CD와 PD의 입장을 절충하는 ND의 이념이 가장 적절하다는 취지로 설명하여 전원이 이에 동의, 위 이념을 민청련 지도이념으로 함으로써 반국가단체인 북한을 이롭게 하는 단체를 구성했다.
(주석 7)


검찰의 공소장대로라면 “CD와 PD의 입장을 절충하는 ND의 이념이 가장 적절하다”는 취지의 설명이 북한을 이롭게 하여 국보법 위반이라는 것이다. 알려진대로 국보법은 제정과정에서부터 ‘반대세력 제거용’이라는 비판이 따르면서 그동안 수많은 민주인사들을 괴롭혀왔다. 이것이 김근태를 묶는 쇠사슬이 되었다.

전두환 정권의 하수인들은 김근태를 간첩으로 몰고자했다. 그래서 민청련 등 민주화운동단체들이 북한과 접선된 불순단체로 색칠을 하려한 것이다. 김근태와 민청련에서 함께 일하다가 구속된 문용식의 공판기록이다.

그들은 고문을 하며 어거지로 질문했는데 “7월 이후 도피하여 평양으로 갔지? 접선장소는 어디였어?” 이런 질문을 하며 옷을 발가벗겨 칠성판 위에 눕힌 후 안전벨트로 손가락, 발가락만 움질일 수 있도록 묶고 실신할 때까지 물을 부어 마치 몸을 묶고 물 속에 빠뜨려 놓은 상태에서 "DJ를 만나 지시받았지? 장기표를 만나 삼민투지시를 받았지?" 등 어처구니없는 질문을 퍼부었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만약 김대중 씨를 한 번이라도 만났더라면 “네, 그랬습니다”하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수없이 실신하고 똥물까지 게워낸 후 하룻밤이 지나 인내가 극히 한계에 다다를 때 "김근태 의장 만났지, 지시 받았지" 하고 물어 “네, 지시받았습니다.”라고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김 의장 얼굴을 제가 아는 게 죄였겠지요. “만나서 뭐했어?” “개인적으로가 아니라 집단적으로 총회 때…”, “네 이놈, 이제 풀렸어”하며 고문하면 “네 2~3번 만났습니다”로 됩니다. 그리고 그들 마음대로 날짜가 정해집니다. 또한 미문화원 전에 김근태 의장을 만나 5월투쟁과 미문화원 점거 지시를 받은 걸로 조서가 작성 됩니다.…그리고 그들은 계속 “김근태는 간첩이다. 이북에 있는 형이 남파되어 접선했는데 너도 그것을 알았지?” 라는 엄청난 질문을 해 저는 “자금을 받은 적이 없다. 그가 간첩인지 몰랐다”고 밝히는 데 급급했습니다.

자신이 희미하게 아는 것을 글로 쓸 때는 명확히 쓰게 되었습니다. 즉 치안본부에서 자술서를 쓸 때마다 틀려져서 논리적으로 살이 붙게 되었는데 역설적으로 표현하면 CNP는 치안본부에서 비로소 성립된 것입니다.
(주석 8)


주석
6> 대한변호사협회, <1985년 인권보고서>, 60쪽.
7>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ㆍ민족민주운동연구소편, <80년대 민족민주운동 10대 조직사건>, 84쪽, 아침, 1980.
8> <민주화운동청년연합의장 김근태씨 제8차공판기록>(1986년 2월 17일), 문용식의 변호인반대신문사항,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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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평전/[6장] 엉터리 재판 5년 징역형 선고

2012/08/01 08:00 김삼웅

 

옛 서대문형무소(현 서대무형무소역사관)와 그 너머로 인왕산이 보인다. 사진은 보림재블로그에서.

 

김근태는 남영동에서 모지락스런 권력의 하수인들로부터 잔인한 고문을 당하고 서대문 서울구치소에 수감되었다. 의병ㆍ독립운동가ㆍ통일운동가ㆍ민주화운동가들이 거쳤던 ‘정규과정’이었다. 한말 이인영 의병대장, 총독암살 미수의 강우규 의사를 시작으로 3ㆍ1운동 민족대표. 유관순 열사, 의열단원, 서로군정서, 대한광복군 등 수많은 지사들이 수감되고 더러는 처형되었다.

해방 뒤에는 조봉암과 인혁당 간부들이 처형되었다.
함석헌ㆍ장준하ㆍ김대중ㆍ리영희ㆍ송건호 등이 거쳐가고 민청학련사건의 학생들에 이어 김근태도 1985년 9월 26일 이곳에 수감되었다. 일제가 침략하면서 이곳에 감옥을 지을 때는 경성감옥이었다. 1912년 서대문감옥, 1923년 서대문형무소로 명칭이 바뀌고, 해방되던 해 서울형무소로, 박정희가 쿠데타로 집권하면서부터 서울구치소가 되었다. 1987년 서울구치소가 경기도 의왕시로 이전하면서 서대문구 현지동 101번지, 민족의 한이 서린 이곳은 서대문독립공원으로 불리게 되어 오늘에 이른다.

김근태가 수감될 당시의 이름은 서울구치소였다. 5공권력의 핵심에 찍힌 김근태는 수감번호 14번을 달고 서대문구치소 중에서도 가장 추운 외진 방에 수감되었다.

나는 병동 아래층 맨 끝 북쪽 방에 밀어 넣어졌다. 방의 북쪽 벽에는 얼음이 빙판처럼 깔리고 저녁 형광등 불이 껌뻑거리며 들어오게 되면 얼음은 비수처럼 새파랗게 곤두서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매트리스 밑은 흥건하게 습기가 차 한겨울에도 곰팡이가 슬고, 두 겹 비닐로 막은 창문은 매서운 칼바람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습기가 차다고 감옥 간부들에게 얘기해 봐야 헛일이었고, 그것은 우이독경일 뿐이었다. 칼날처럼 매섭게 얼어 붙은 벽을 가리켜도 그것은 한낱 엄살일 뿐이고 마이동풍이었다. 그 사람들에게는 처음부터 아무 소리도 없었던 것과 진배없었다. 내 얘기는 처음부터 귀를 꼭 틀어막도록 지시를 받았거나, 의논하여 합의 결정한 것으로조차 보였다.
(주석 1)

김근태가 이처럼 감옥 중에서도 가장 추운 곳에 수감된 것은 권력핵심의 지침과 아울러 검찰청사에서 잠깐 만난 부인에게 전한 남영동의 고문사실이 알려지게 된 때문이다. 대한변호사협회(변협) 인권위원회 소속 홍성우ㆍ황인철ㆍ신기하 변호사 등이 진상규명 활동에 나서면서 김근태는 가족 면회와 변호사 접근이 금지되고, 가장 추운 방으로 수감되는 보복으로 나타났다. 변협 소속 변호사들의 활동은 뒤에서 상술하기로 하고, 서울구치소의 실상을 더 살펴본다.

남영동에서 만신창이가 되어 서울구치소에 수감된 김근태는 몸을 제대로 가누기도, 식사를 하기도 어려운 상태였다. 물고문과 전기고문을 받은 뒤에는 “이가 모두 흔들리고 아파서 씹을 수도 없었고, 소화도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  (주석 2) 그래서 간수에게 죽을 부탁하여 오랫동안 천천히 먹었다. ‘먹었다’기 보다는 그냥 삼켰다.

그나마 남영동에 비하면 크게 나아진 편이었다. 며칠 뒤부터는 간신히 삼켰던 죽도 들이지 못하게 막았다. 상부 지시라 했다. 굶어죽으라는 처사였다.

별안간 밥이 나와 소지에게 사정을 물었더니 담당에게 이야기 해 보라는 것이었다. 나는 거의 애걸하다시피 죽을 달라고 매달리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없다고 차갑게 거절하는 것이었다. 밥을 먹을래야 먹을 수가 없어서 국물만 좀 마시고 짬밥으로 고스란히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이 지시받은 담당은 복도 내방 옆에 몰래 붙어서서 밥을 먹나 숨어서 지켜보고, 식구통으로 나오는 짬밥에 손이 갔는지 확인하는 숨길이 확연하게 느껴졌다. (주석 3)

김근태는 자신이 수감된 건너편 7방이 비어 있는 것을 알고 간부에게 전방(轉房)을 요청했다. 8방은 하루종일 햇볕을 볼 수 없으나 7방은 오후가 되면 햇빛이 비쳐왔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비어 있는 방인데도 전방을 거부하고 굳이 9방으로 옮기라고 했다. 9방은 얼마 전까지 징벌을 받던 사람이 살던 곳이었고, 정신질환자를 수감하느라고 쇠철판으로 작은 창문을 밀봉해 놓은 상태였다. 김근태는 12월 말경에 쇠철판을 뜯어내고 바람이 통하는 창문을 내는 조건으로 9방으로 옮겼다.

지금도 여전히 병사(病舍) 9방의 내 매트리스 밑에는 습기가 고이고 곰팡이가 피어나지만, 이곳 큰 체 하는 간부들이 말하는 특별권력관계가 작용하는 곳이니까, 여기는 사회가 아니니까 그까짓 습기, 그 정도 곰팡이는 더불어 같이 살기로 결심을 했고, 그 심정 탄탄히 지켜내고 있는 중이다. (주석 4)

김근태에 대한 권력의 학대는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났다. 이 해 12월 중순 경부터 서울구치소 위층 15~16개 방에는 모두 조그만 구공탄 난로를 하나씩 피워 주었다. 그런데 유독 김근태 방만은 제외시켰다.

아픈 분들 방에 나롯불을 놓은 것은 좋은 일이다. 하지만 그 중에서 유독 나만 빼놓은 이 서러움, 그 옆에서 어느 순간 번쩍하는 숨겨진 적대감을 보곤 내 가슴의 추위는 더 매서워져 갔다. 사람이 계속 바뀌어서 정신질환자들이 7방 또는 8방에 들어왔는데 그 사람들과 나는 지난 겨울 내내 영원히 저주받은 동토의 나라에서 살았다. 어느 땐가 꼭 두번 나도 난로 좀 놔달라고 간부들에게 요구를 했다. 모 계장은 이렇게 말했다.

“난로는 병약자들에게만 놓아주는 것이다. 당신같이 건강한 사람까지 놓아 준다면 전 사동(舍棟) 재소자들에게 다 놓아주어야 하는데, 우리에게는 그런 예산이 없다.”
(주석 5)

혹독한 고문으로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부축이 없이는 걷지도 못한 상태의 중환자, 그래서 서울구치소의 병동에 수감하고서도 딴소리를 하는 것이다. 차별 대우는 변호인 접견과 가족 면회에서도 그대로 나타났다.


주석
1> 김근태, <이제 다시 일어나>, 105쪽, 중원문화사, 1987.
2> 앞의 책, 108쪽.
3> 앞과 같음.
4> 앞의 책, 106~107쪽.
5> 앞의 책, 10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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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평전/[5장] 남영동 인간도살장에서 당한 모진 고문

2012/07/31 08:00 김삼웅

 

1985년 당시 민주화운동청년연합 의장이었던 고 김근태 의원이 '고문기술자' 이근안으로부터 살인적인 물고문, 전기고문 등을 받았던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현 경찰청 인권센터) 515호 조사실앞에 14일 오후 조화가 놓여 있다.ⓒ권우성

 

마지막 고문은 9월 20일 저녁 8시경부터 밤 10시 반경까지 전기ㆍ물고문의 합동고문이었다. 김수현ㆍ김영두ㆍ정현규ㆍ박병선ㆍ최상남, 또 한 사람이 고문에 가담했다. 이제까지의 ‘자백’과 ‘번복’의 되풀이였다. 민청련이 반국가단체라는 것을 인정하라는 고문은 정말 견디기 어려웠다. 김근태는 “아, 죽게 되는구나. 이렇게 해서 죽는 것이구나” 절망하고, 마구 눈물을 흘렸다.

바깥사회와 완전히 차단되었던 나는 정치적 사정이, 정치군부가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위해서 본인의 생명의 말살을 절대로 요청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심각한 사태가 전개되고 있다고 단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끔찍한 고문, 말도 안 되는 각본을 만들어 낼 수는 없는 것이라고 믿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는 결심했습니다. “그래, 죽을 수도 있다. 40년을 살아왔다. 유관순도, 윤동주도, 그리고 김주열도, 80년 광주의 숱한 선량한 시민들도 그렇게 살해당하지 않았는가. 추하게 정치군부 너희들에게 굽신거리지는 않겠다. 절대로 휘청거리지 않을 것이다”라고 마음을 추스렸습니다.
(주석 33)

이후에도 고문과 모욕은 그치지 않았다. 반주검 상태가 된 김근태는 9월 26일 오후 3시경 인간 도살장 남영동 5층 15호실을 떠나게 되었다. 악마들은 ‘자백’을 통해 일건 서류를 충분히 마련했고, 더 오래 잡아두었다가 사망하기라도 하면 사후 처리문제가 귀찮았을 것이다.

9월 4일 남영동에 끌려가서 고문을 당한 지 22일 만이었다. 한 달이 채 안 되는 이 기간, 김근태는 인간이기를 포기한 야수들에게 도합 열 차례의 혹독한 고문을 당하면서, 생사의 고비를 넘나들었다. 고문자들은 상처를 남기지 않고, 죽이지 않고 고문하는, 고도의 기술자들이었다.

26일 오후 3시경 남영동 5층 15호실을 떠나기에 앞서 나는 김수현과 백남은을 찾았습니다. 잠시 책상을 사이에 두고 김수현과 방에서 앉아서 얘기했습니다. 별 의미있는 얘기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말하고 싶은 것이 많이 있었습니다. 내가 악수를 청했습니다. 그러면서 나는 속으로 울었습니다. 눈시울이 뜨거워지더군요.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었습니다.

“나는 당신에게 처참하게 고문을 당하고 간다. 일방적으로 당하고 간다. 이러고도 속수무책인 것이 원통하다. 더구나 너무 끔찍하게 당해서 분노하기조차 두려운 것이 한스럽다. 떠나는 지금도 내놓고 욕 한 마디 할 수 없고 그런 용기조차 생기지 않는 것이 말이다. 이 저주받을 인간들이, 악마같은 자들이 내 생사 여탈권을 가진 것처럼 군림하였으며 그에 아양조차 떨어야 했던 이 끔찍한 지옥을 All Mighty처럼 덮쳐왔던 것을….”
(주석 34)

지난 5월29,30일 열린 태안아버지학교에서 이근안씨는 특별강사로 초청돼 자신의 재소자시절을 얘기했다.


남영동에서 김근태에게 살인적인 고문을 총지휘한 자는 90kg이 넘는 거구의 이근안이다.
처음에는 가명이어서 몰랐으나 뒷날에야 그가 이근안임을 알았다. 이근안은 공군 헌병 출신으로 1970년 경찰에 입문하여 1972년부터 대공분야에 근무하면서 악질적인 ‘고문기술자’의 역할로 특진과 승진을 거듭하여 1984년에는 경감에 올랐다. 그에게서 고문을 당한 인사들의 증언대로 “눈에 핏발이 서 있었다”고 할 정도로 가학성을 지닌 인물이다.

1979년 <조선일보>가 청룡봉사상을 준 것을 시작으로 1981년 내무부장관 표창, 1982년 육군 제9사단장 표창, 1986년 전두환 정부에서 옥조근정훈장을 받았다. 김근태는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고문을 당하면서 이를 지휘하는 이근안의 인상착의를 입력했다가 뒷날 이재오ㆍ이선근ㆍ박문식 등 그로부터 고문을 받은 피해자들과 함께 사진 속의 인물이 이근안임을 밝혀냈다.

김근태의 고문사실이 알려지면서 민주화운동 진영에서는 규탄과 진상규명운동이 전개되었다.
10월 17일 민청련에서는 ‘고문 철폐를 위한 투쟁위원회’와 ‘민주화운동에 대한 고문수사 및 용공조작 저지 공동대책 위원회’(고문 공대위)가 결성되고, 민통련ㆍ민추협ㆍ신구교 성직자ㆍ불교 승려ㆍ주요 사건 구속자 가족 등이 참가했다. ‘고문 공대위’는 정부의 고문만행을 규탄하는 성명을 발표하고, 이어서 11월 11일에는 김대중ㆍ김영삼 등 60여 명이 참석하는 농성에 들어갔다.

김근태는 남영동을 떠나게 되었지만 그러나 풀려난 것이 아니었다. 9월 26일 오후 검찰청 구치소로 이감되었다. 이날 검찰청에서 호송되는 순간 부인 인재근을 만났다. 그동안 남편의 행방을 찾아다니다가 당일 검찰로 이송된다는 소식을 듣고 기다리던 중 해후한 것이다. 짧은 순간에 부인에게 발뒤꿈치의 고문당한 상처들을 보여주었다. 이 기적 같은 일이 김근태의 고문실상이 세상에 밝혀지는 계기가 되었다. 기적이었다.

계단을 경찰 한 사람과 본인의 처가 부축해 내려가면서 나는 망설이고 망설였습니다. 그러다가 나는 말했습니다. 불과 1분여 동안이었습니다. 그 고문은 나 개인에 국한될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때문에 얘기했습니다. 고문 얘기를 듣고 처가 괴로워할 것을 생각하고 그만둘까도 생각했지만 그럴 문제도 아니었고 도무지 원통해서 견딜 수가 없었기에 나는 말했습니다.

목소리가 떨리지 않도록 침착하게 말하면서 신고 있었던 양말을 벗었습니다. 발뒤꿈치의 상처들과 발등의 꺼멓게 탄 부분을 보여 주었고, 팔꿈치의 상처도 보여 주었습니다.

이 만남은 정말 기적 같은 것이었습니다. 더구나 관례와는 달리 늦은 오후에야 도착한 본인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은, 그리하여 정치군부의 고문과 그 은폐행위가 폭로되고 국내외적으로 맹렬한 비판을 불러일으키게 된 이 만남은 본인에 대한 영원한 기적일 것입니다.
(주석 35)


주석
33> 앞의 책, 83쪽.
34> 앞의 책, 86~87쪽.
35> 앞의 책, 87~8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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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평전/[5장] 남영동 인간도살장에서 당한 모진 고문

2012/07/30 08:00 김삼웅

 


9월 11, 12, 13일 오후까지는 ‘무사’히 지나갔다.
육체적인 고문이 없었다는 뜻이다. 13일 저녁식사가 들어와 막 숟가락을 들고 두번인가 먹을 때 복도에서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리더니, 정현규가 들어와 밥그릇을 빼앗아갔다. 다시 고문을 가하겠다는 신호였다.

김수현은 본인을 고문대 위에 묶어 놓고는 말했습니다. 오늘이 금요일이고 13일이다. 무슨 날인지 알겠느냐라고. 이에 대해 악마의 날이라고 하니까 조소하면서, “서양에서는 오늘을 최후의 만찬이라고 한다. 너의 최후의 만찬날이다. 각오하라” 하였습니다. 고문기술자는 8일 이후 본인의 사건에 이렇게 깊이 개입해 오지는 않았었는데 13일 이날은 팔 걷고 나섰습니다. 그야말로 최후의 만찬이었습니다. 새벽 2시 반까지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계속하여 가했습니다. 마음은 물론 몸도 도무지 견뎌 낼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고문기술자는 기승을 부리며 고문을 하고 김수현은 퍼렇게 핏대를 세우고 끊임없이 모욕하였습니다. (주석 30)

김근태는 그동안의 혹독한 고문으로 허위자백까지 하면서 한번도 의식을 잃지는 않았다. 그런데 ‘최후의 만찬’에는 이미 기력을 잃고,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가해도 발버둥을 치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다.

그 때마다 고문은 중지되고, 찬물을 머리에 붓고 가슴을 손바닥으로 쳐 댔습니다. 점차 아슴프레해 가는 의식 속에서 아, 이제 내가 정신을 잃겠구나 하는 순간이 되면 고문은 중지되었습니다. 고문기술자들은 아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13일 고문 이후 남영동에서는 물론 구치소에서 생활해나가는 것이 어려울 정도로 참으로 나빠졌습니다.

그날 이후 지금까지 밥을 먹고 소화해 낼 수 없었으며, 보행을 제대로 할 수 없습니다. 두통이 걷잡을 수 없는 최악의 상태에 다다른 것은 물론이구요. 어떤 한계점, 분수령이었습니다. 일단 13일 고문은 이튿날 새벽 2시 반에 끝났습니다. 그러나 김수현은 남아서 박명선과 또 한 사람을 데리고 14일 새벽 3시경부터 5시 반경까지 또 고문을 해댔습니다. 이 새벽녘 고문에서 김수현은 또 다시 문용식의 NDR과 학생운동의 배후로서 민추위를 이미 알고 있었다고 자백하라고 요구했습니다. (주석 31)

수사가 막바지에 이르면서 악마들은 민청련의 재정문제에 대해 더욱 잔혹성을 보였다. 앞서 소개된 재미 교포 언론인 신기섭이 한국민주화운동의 성금으로 준 기금을 기독교교회협의회가 인권위원회를 통해서 민청련에 전달된 것을 불순자금의 유입으로 엮으려 한 것이다.

김근태는 자포자기한 상태에서도 진실을 밝히고자 마지막 의지를 가다듬었다. 회원들의 월회비 160~180만 원과 지도위원 40여 명의 월 2만원 이상씩 60~80만 원이 민청련 재정의 골격임을 사실대로 말했다.
악마들은 이를 믿지 않았다. 불순자금의 실상을 밝히라고, 다시 물고문, 전기고문을 가했다.

13일, 이날은 김수현의 말대로 본인의 최후의 만찬이었습니다.
그 고문의 강도는 8일의 경우보다 못하지 않았나 싶기도 하지만, 이 13일 이후 본인은 결정적으로 균형상태를 잃어 버렸습니다. 이튿날인 14일부터 남영동을 떠나는 26일 점심 때까지 본인은 밥을 못 먹었습니다. 국물과 두어 숟가락 정도의 밥을, 그것도 오래 씹어서 겨우 먹을 수 있었습니다. 요기는 주로 햄버거빵을 우유에 녹여서 채웠고, 즉석라면에 물을 부어서 그 국물과 약간의 라면줄기로 허기를 메웠습니다.

김수현은 이러한 본인을 보고 단식투쟁을 하는 것이냐고 묻더군요. 참 어이가 없더군요. 그런 의사가 약간이라도 통할 수 있는 사람들로 내가 자신들을 생각하리라고 믿었던 것일까요. 목은 붓고 쉬어서 말을 제대로 못하고, 머리는 깨어져 나갈 것 같고, 온몸이 산산이 부서져 나가기 직전 같았습니다. 말하고, 쓰고, 베끼고, 손도장 찍고, 또 찍고 하면서 26일까지 갔습니다.
(주석 32)


주석
30> 앞의 책, 75쪽.
31> 앞의 책, 76쪽.
32> 앞의 책, 7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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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평전/[5장] 남영동 인간도살장에서 당한 모진 고문 2

012/07/29 08:00 김삼웅

 

 

1985년 당시 민주화운동청년연합 의장이었던 고 김근태 의원이 '고문기술자' 이근안으로부터 살인적인 물고문, 전기고문 등을 받았던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현 경찰청 인권센터) 515호 조사실앞에 14일 오후 조화가 놓여 있다.ⓒ권우성

 

일곱번째 고문은 9월 10일 저녁 7시경부터 10시경까지 자행되었다.
이번 고문은 처음 행한 방법이었다. 전기봉고문인데 양쪽 발등에 무슨 장치를 하고 진동을 일으켜 고통을 가하는 방법이었다. 지휘자는 김영두이고 김수현이 뒤에서 조종하였다. 박병선ㆍ최상남ㆍ정현규ㆍ경북출신의 경찰이 번갈아가며 고문을 하였다.

전기봉고문은 이렇습니다.
대단히 빠른 진동 때문에 발등에는 심한 통증이 옵니다. 상처가 생기고, 깊이 파이는 것 같은 느낌조차 옵니다. 피가 흐르는 기분도 듭니다. 그러나 이 전기봉고문은 그래도 받을 만하다고 할까. 상쾌하다고나 할까. 아니 양념고문이었다고 할까요. 원체 심한 고문을 당해서 그런지 이날 같기만 하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조차 했었습니다. 더구나 물고문도 이날은 하지 않았습니다.
(주석 28)

악마들은 교묘한 방법으로 김근태를 압박했다. 일종의 심리전이다. 고문을 가할 경우에는 밥을 주지 않았다. 그래서 끼니 때가 되어도 밥을 주지 않으면서, 곧 고문의 순간이 도래한 것처럼 인식케 하여 심리적 불안을 가중시키는 방식이었다. 악마들은 다른 무슨 자백을 받아내거나 자신들이 무슨 일로 기분이 좋지 않을 때면 어김없이 이 방식을 썼다.

그런데 고문자들은 9월 13일 이후 심리적인 압박을 가하는데, 이 밥을 안 주는 것과 고문을 가하는 것을 연관시켜 매우 잘 사용하였습니다. 즉 고문자들이 뭔가 불만이 있으면 밥을 안 주고, 그러면 본인은 고문이 박두했음을, 위험이 다가오고 있음을 깨닫고 파랗게 질리곤 하였습니다. 이때 고문자들은 무엇인가를 요구하고, 덜덜 떨면서 나는 시키는대로 하구요. 고문, 그것은 마음내키는 대로 하는 것이 아니고 나름대로 과학적이고, 많은 경험을 통해서 정리된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뿐만 아니라 고문의 시점, 방법 등에 대해서는 정말 사장급 이상의 회의에서 여러 가지로 검토하고 결정하는 것이 틀림없이 분위기로 전달되었습니다. (주석 29)

수사기관은 양심수나 확신범을 체포해다가, 언제부터 언제까지의 기간에 지내온 일을 빠짐없이 기술하라고 다그친다. 몇 차례 되풀이 하여 쓰고 나면 우선 기가 빠진다. 나중에는 왜 앞의 내용과 다르냐고 후려친다. 아무리 기억력이 좋은 사람도 수년 전의 일시, 만난 사람이 일치하기란 쉽지 않다. 김근태에게 대학시절, 제대 뒤 복학 때의 친구 관계, 크리스천 아카데미에서 행한 행사 등을 캐묻고, 빛바랜 사진을 들고 와서 자신과의 관계를 쓰라고 겁박했다.


주석
28> 앞의 책, 69쪽.
29> 앞의 책, 6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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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평전/[5장] 남영동 인간도살장에서 당한 모진 고문

2012/07/28 08:00 김삼웅

 

악마들은 김근태에게 ‘자백’할 것을 강요하면서 고문을 계속했다. 정권 핵심에서 내려보낸 시나리오대로 간첩과 접선한 것으로 만들려는 각본이었다. 처음에는 배후를 대라고 족치고, 다음에는 간첩으로 남파된 형들로부터 돈을 받았다는 것을 자백하라고 고문하였다.

“남민전 이재문이 어떻게 죽은 지 알아? 전노련 이태복 얘기 너도 들었을 거다. 이재문이는 여기서 당해서 이미 속이 부서져서 감옥에서 병사한 거야. 너도 각오해”하고 협박을 하였습니다. 이날은 남영동에서 고문받았던 중에서 최악의 고통스러운 날이었습니다. 가장 혹독하고 긴 고문을 받았습니다. (주석 23)

유신이나 5공체제에서 고문을 당해 본 사람들은 쉽게 수긍이 가는 일이지만, 밀폐된 수사기관에 갇혀 저승사자들에게 몇 차례 가혹한 고문을 당하다보면 항우 장사라도 ‘자백’하지 않을 수 없다. 나중에 삼수갑산을 가더라도 당장 연옥에서 벗어나고 싶다. 이것은 어쩔 수 없는 인간의 한계다.

남한 사회에서 ‘간첩’은 곧 죽음을 의미하는 데도 수사관이 불려준대로 자신이 간첩이었다고 진술서에 서명하게 된다. ‘살기 위해 죽을 짓’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법원은 이 ‘자백’을 근거로 사형 등 중형을 선고한다. 재판정에서 아무리 아니라고 호소해도 판사는 받아들이지 않고 ‘자백’만을 근거로 제시한다. 근래에 재심을 통해 더러는 무죄가 밝혀지기도 하지만, 억울하게 한을 품고 죽은 사람도 많았다.

김근태는 결국 ‘자백’을 했다.
야수들은 심지어 월북한 사실을 자백하라고 다그쳤다. 어떻게 월북했느냐고 추궁하니까 삼천포에서 배를 타고 갔다고 했다. 80년 광주사태 당시 어느 동지가 삼천포에서 일본으로 밀항하려 했다는 얘기를 들은 기억이 나서였다. 남파된 형들에게 돈을 받았느냐니까, 받았다고 했다.

“간첩과의 접선은 본인에게 죽음을 가져온다는 것을 알면서도 덮쳐 누르는 전기고문과 물고문의 고통을 우선 모연하기 위해서입니다.”
(주석 24)

억지로 ‘자백’을 받아낸 악마들은 구체적인 설명을 요구했다. 상부 보고용, 재판에 필요한 대본이 필요한 것이다.

그랬더니 그것을 합리적으로 설명하기를 요구하면서 증거를 요구하더군요. 돈을 받았느냐고 해서 100만원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74년도에 쌍문동 집 근처에서 한번 만났고 84년도에 역곡에서 한번 만났다고 했습니다. 이 고문자들 참 좋아하더군요. 좋아서 미쳐 날뛰기 일보직전인 것 같았습니다. 김수현은 합리적 근거를 대라고 요구했습니다.

이들의 분위기는 달밤에 먹이를 앞에 놓고 질질 침을 흘리고 있는 털 빠진 승냥이들의 모습이었습니다. 이렇게 저렇게 말을 만들어서 얘기를 하니까 고문자들이 거들어 주고 수정을 하고 해주었습니다.

고문대 위에 놓여진 본인과 고문자 사이의 협력과 토의수정이 진행되어 나가는 것이었습니다. 한참을 이렇게 해 나가며 각본을 만들어 나갔습니다.
(주석 25)

김근태는 ‘자백’을 하자 악마들이 히히덕거리며 너무 좋아하고 분위기가 다소 풀린듯 하자, 용기를 내어 “사실은 그런 일이 없었다”고 번복했다. 그랬더니 고문자들은, 악귀가 되어 날뛰면서 다시 고문을 시작하고, 김근태는 또 ‘고백’하는 일이 몇 차례 되풀이 되었다. 이때 김근태는 “정말 무서운 것은 비극이 아니라 희극”이라고 생각했다.

부정했지만 결국은 또 인정하게 되구요. 도대체 몇 번을 이렇게 왔다 갔다 하도록 고문하고 강요했는지 모릅니다. 거기다 또 말이 왔다 갔다 한다고 고문을 해대고 말입니다. 아. 이처럼 눈물나는 희극이 세상에 없을 것입니다.

정말 무서운 것은 비극이 아니라 희극이구나.
희극의 시대이구나. 이 저주받을 희극의 시대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일입니다. 하여튼 월북과 간첩과의 접선 얘기는 대충 이렇게 끝났습니다. 이후에는 필요할 때는 위험수단으로 사용했지만 이 문제에 관한한 어떤 진지함을 고문자들은 갖고 있는 것 같지 않았습니다.
(주석 26)

악마들은 김근태가 자주 ‘자백’을 번복하자 ‘악질’로 단정했다.
그리고 더 가혹하게 고문을 자행했다. 8일 오후 1시 반경에 오전의 고문을 끝냈다가 저녁 7시경 또 전기고문을 시작해서 밤 12시까지 계속되었다.

이번에는 민청련 조직의 배후를 대라는 것이었다.
배후 같은 것은 없고 자생적인 조직이라면 다시 고문을 하였다. 결국 재야 운동권과 종교계 인사들의 이름을 대라고 하여 되는 대로 이름을 댔다. 결국 함세웅 신부와 권호경 목사로 압축되는 시나리오였다. 이들에게는 참으로 안 되는 일이지만 악마들의 각본을 인정해주어야 했다.
(주석 27)

 

주석
23> 앞의 책, 62쪽.
24> 앞의 책, 63쪽.
25> 앞의 책, 63쪽.
26> 앞의 책, 64쪽.
27> 앞의 책, 6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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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평전/[5장] 남영동 인간도살장에서 당한 모진 고문

2012/07/27 08:00 김삼웅

 

미친 여자의 긴 머리카락이 얼굴을 휘감고 그 희번덕거리는 눈동자가 내 눈속으로 파고 들어오는 환상이 공포와 광란의 소용돌이로 닥쳐왔습니다. 이것은 슬픔이라든지 뭐 외로움이라든지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잔인한 파괴 그 자체였습니다.

담요는 땀에 흥건하게 젖는데, 물을 쏟아부었던 몸의 각 부분은 금방 말라 버리고, 특히 머리털은 곧 말라서 물고문을 또 수시로 해야 했습니다. 이 고문기술자가 내 가슴에 올라타고 쿵쿵 굴리는 데도 전혀 무게를 느끼지 못하였습니다. 운동화 발바닥으로 얼굴을 슥슥 문대면서 경멸적으로 걷어차도, 그것은 별 문제가 되지도 않고 심리적 거부감이 일어날 여지가 전혀 없었습니다.

완전히 지쳐 늘어지기 시작할 때, 이날의 주제가 제기되고 추궁되었습니다.
(주석 20)

김근태는 9월 4일 남영동에 끌려온 이래 며칠 동안 한숨도 잠을 자지 못했다. 고문자들은 잠을 재우지도 않았고 밥도 주지 않았다. 물고문, 전기고문에 잠을 재우지 않아 허기진 육신은 처절하게 허물어졌다. 그런데 웬일인지, 9월 6일에는 점심 식사를 주었다. 음식을 보고 배가 고픈데도 몸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거의 먹지 못했다. 그럼에도 마음이 안정되었다. 이것으로 악몽과 같은 고문이 끝난 것으로 지레 짐작한 것이다. 하지만 식사는 ‘미끼’였다. 이 부문은 뒤에서 설명하겠다.

고문자들은 미국 워싱턴에서 신문기자로 활동하는 신기섭에 대해 캐물었다. 그는 1985년 2월 김대중이 귀국할 때 함께 동행할만큼 미국에서 한국민주화를 위해 애쓴 사람이다. 그가 서울에 왔을 때 민청련 사무소를 들렸는데, 그를 간첩으로 엮으려는 의도를 간파할 수 있었다. 김근태가 그와의 관계를 거부하자 대화에서 별로 소득이 없다고 판단한 것인지 다시 고문을 시작했다.

격렬한 전기고문을 길게, 아주 길게 가하여 온몸이 고문대 위에서 오그라들어 버리는 것 같았고 핏줄은 물론 모든 살이 마침내 다 타버려 누리끼리한 살가죽과 뼈만 남아 버리는 것 같았습니다. 쉬지 않고, 조금도 쉬지 않고 이튿날 새벽 1시경까지 계속했습니다.

고통을 못 이겨 소리소리 질러 목 안에서는 피냄새가 역하게 올라오고 콧속에서는 단내가 계속 피어올랐습니다. 물고문으로 인해 속이 빈 위는 계속 헛구역질을 해대고, 처음에 나는 저항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결과는 예정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고문자들의 요구에 굴복하는 것 그것뿐입니다. 이들에게 살해당하는 것을 각오하고 저항을 하지만 고통과 공포에 짓눌리게 되면 곧 그럴 필요까지는 없지 않은가 하는 내면의 외침에 - 이것은 고문자들의 또 다른 협박이며 유혹이 내면화된 것이지만 부딪히게 됩니다. 아, 이대로 죽을 수는 없다. 원통해서 이렇게 개죽음을 할 수는 없다. 내가 저항을 하면 이들은 정말 죽일 수도 있는 것이 아닐까.
(주석 21)

고문자들은 인간의 탈을 쓴 악마였다. 이성이나 인간성은 어디에서도 찾기 어려웠다. 고문을 하다가 제풀에 지치면 김근태의 생식기를 가르키며 히죽거렸다. “야 이렇게 작은 것도 X라고 달고 다니냐. 너희 민주화운동하는 놈들은 다 그러냐”는 등 인격모독을 일삼았다. 히틀러의 비밀경찰도 이러지는 않았다.
9월 8일 일요일 오전 10시경부터 또 고문이 시작되었다. 잡혀와서 3일째 되는 날이다.

지옥에서 온 나찰 같은 얼굴을 한 윤재호가 방에 들어섰습니다. 잠시 후 김수현, 백남은, 김영두, 고문기술자 정현규, 박병선, 최상남, 또 한 사람 허만조 등이 방을 꽉 메웠습니다. 윤재호는 책상을 사이에 두고 본인의 맞은편에 앉자마자 소리를 질러 댔습니다. “너 이새끼, 배후를 안 대? 콧구멍에 고춧가루를 처넣어서 폐기종을 만들어 죽여 버리겠다. 안 댈 거지? 그거(고문대) 들여와, 이 새끼 내가 직접 고문할께”라고 윤재호는 소리쳤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조금 당황한 듯하면서 모두 서 있었고 김수현, 백남은, 고문기술자들이 굽신거리며 저희들이 하겠으니 나가시라고, 나가시라고 애원 겸 정중하게, 말하더군요. 그동안 고문대를 정현규와 최상남이 들고 들어왔습니다.

이때 그 고문대 구조를 명확히 볼 수 있었습니다.
윤재호는 분기탱천해서 나가고, 김수현과 백남은은 상급자가 저러니 자기들로서는 도리가 없다고 하고, 고문기술자는 여러 가지 협박을 해왔습니다.

이렇게 고문은 또 시작되었습니다. 주제는, 아니 메뉴라고 할까요. 배후, 정치적으로 아주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는 불순한 모종의 배후, 이것이었습니다.

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나이 사십인데 누가 배후가 될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당신들이 말하듯이 민주화운동에서 책임있는 사람들 중의 하나이고 오늘의 이 결과를 가져오게 한 역할을 해냈는데, 내가 누구에게 조정을 당하겠느냐고 말했습니다.
(주석 22)


주석
20> 앞의 책, 53쪽.
21> 앞의 책, 58~59쪽.
22> 앞의 책, 6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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