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 다시 찾은 세민약국

 

 

실제로 혜숙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성령의 은사를 받아
암세포가 완전히 없어지고 깨끗하게 병 고침을 받았다고 믿었다.

의심의 여지없이 확신하고 있었다.
나도 마음 속으로 점점 믿음이 생겼다.

언뜻언뜻 마음 한구석에 불안한 감이 없지 않았지만 점점 자신감이 더해 갔다.
확신하는 마음으로 굳어져 갔다.

교회에서는 한달이 시작되는 첫째 주일마다
'박혜숙 권사의 건강을 위한 특별 기도회'를 갖었다.

낮 예배를 마치고 조승혁 담임 목사님의 인도로
전 교인이 다함께 참여하는 기도회다.

나는 1989 년 2 월
감리교 서울 종로지방회에서 장로로 안수 받았다.

기도회는 혜숙이 수술한 지 5 년 되는 날까지
무려 5 년을 작정하고 계속해 갔다.

혜숙은 별탈없이 건강을 유지해 갔다.
몸무게도 점점 늘어 50 Kg 까지 올라 가기도 했다.
우리는 주말마다 여행을 계속했다.

수술한 지 4 년 반 쯤 지나자
혜숙은 약국을 운영하고 싶어 했다.
약국을 다시 차려 달라고 내게 졸라댔다.

1991 년 가을 추석 무렵
그로부터 4 년 여 전에 넘겼던 세민약국을 다시 찾았다.
혜숙은 전에 없던 열성으로 신명나게 일했다.

매일 아침 8 시에 셔터문을 열고 밤 10 시에 문을 닫는다.
상담하러 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정성으로 들어 준다.

동네 사람들의 상담역인 혜숙은 동네 사람들을
종우 엄마, 재헌이 아빠, 재경이 할머니라 부르면서 스스럼 없이 대한다.

동네 분들도 혜숙이 암을 이겨 내고
다시 약국을 차리게 된 것을 다행스럽고 고맙게 여긴다.



손님을 대하는 자세와 태도 역시 그 전과는 사뭇 달라졌다.
이제 거듭난 삶으로, 새로운 삶으로 혜숙은 프로 약사가 되고 싶어 했다.

약사라는 직업을 통해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사를
혜숙은 주위 분들에게 돌려 주어야 한다고 여겼다.

오고가는 사람들에게
박카스랄지 드링크제를 대접하는 인심도 후해 졌다.

생활이 어려운 이들이나 할머니 할아버지들께는
돈을 받지 않고 약도 그냥 잘 지어 준다.

학문적인 노력에도 열심이었다.
자연 건강법과 한약에도 관심을 쏟았다.

일주일에 3 일은 새벽 5 시부터 8 시까지
한약학을 배우러 다녔다.

새로운 의학 지식을 익히느라 열심이고
새로운 삶에 대한 감사와
일에 대한 열정이 남달랐다.

 

 

 

102. "사랑이 뭐길래"

 

 

약국을 다시 시작한 지 한 달 쯤 지나서다.
손님들이 몰려 들고 혜숙은 눈코 뜰새없이 바쁘다.
하루 매상도 예전에 비해서 꽤나 많다.

MBC 텔레비전에서 제의가 들어 왔다.
일반적으로 텔레비전을 많이 보게 되는 가을에서 다음 해 봄까지
시청율을 높이기 위해서 프로그램을 개편한단다.

이 때 텔레비전 회사마다 사운을 걸고 프로그램 경쟁을 하게 되는데
MBC 에서 주말 드라마 프로그램으로 큰 야심을 갖고 기획하는 작품이 있단다.

그 작품의 일부를 세민약국에서 촬영하고 싶은데 허락해 줄 수 있겠느냐는 거다.
촬영은 언제쯤인지... 시간은 얼마나 걸리는지 물었다.

일주일에 2 회를 촬영하게 되고 1 회분 촬영에 소요되는 시간은 일정하지 않다고 했다.
최소한 6 개월 동안은 계속해야 하고 사정에 따라서는 몇 달 더 연장될 수 있단다.

촬영할 때마다 두 시간 이내로 끝나면 사용료로 5 만 원을
두 시간이 넘으면 10 만 원을 지불한단다.

우리는 쾌히 승락했다.
처음에는 무슨 내용을 촬영하려고 그러나 했다.

방영이 시작되고 보니 MBC 주말 연속극 "사랑이 뭐길래"다.
줄거리 가운데 탤런트 최민수가 대발이 역으로 등장하고
그 상대역으로 하희라가 출연한다.

대발이 부모 역으로 이순재와 김혜자가,
처제 역으로 신애라가 약국을 운영하는 친구의 관리 약사 신분으로 등장한다.

이 대목에서 등장하는 약국 장면을
우리 세민약국에서 촬영하겠다는 거다.

약국 장면의 주요 등장 인물인 신애라를 비롯해서
윤여정, 여운계, 강부자, 사미자, 이재룡, 김찬우 등등
탤런트들이 일주일에 두 번씩 세민약국에서 촬영을 한다.

촬영이 있는 날이면 약국 앞 네거리는
그야말로 인산인해를 이룰 정도였다.

더우기 MBC 에서 사운을 걸고 기획한 작품인만큼
이 드라마는 우리 나라 TV 역사상 전무할 정도로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하는 공전의 화제작이 되었다.

"사랑이 뭐길래"가 방영되는 날은 길가에 행인들의 발길도 뚝 끊길 정도였다.
인기 있는 스포츠 중계보다도 더 높은 시청률을 보였다.

시청률이 가히 폭발적으로 올라 가면서
세민약국은 인근 일대에서 유명한 명소가 되었다.

지금까지도 인근에서는
"여기가 '사랑이 뭐길래'를 촬영했던 세민약국" 이라며 구전되어 전해 지고 있다.

 

▲ 문화방송 주말연속극 "사랑이 뭐길래"에서 약사 역 신애라

 

생각지도 않던 뜻밖의 상황도 더러 벌어졌다. 
제약회사마다 비상이 걸린 것이다. 

TV 에서 자주 비춰 지는 약품 진열장 부근에 자기 회사 제품을 진열해 달라면서 
광고비 댓가로 2 백 만 원을 주겠다 3 백 만 원을 주겠다 하는 등으로 
치열하게 경쟁하며 혜숙에게 달려 들었다. 

우리는 상황이 이렇게까지 진행될지 
전혀 예상치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무척 당황했다. 

처음에는 그래도 되는 건지 판단이 서지 않아 정중하게 사양했다. 
그러면 그럴수록 각 제약회사 광고부에서는 더욱 안달이 나는지 
액수를 더 크게 올려주겠다고 난리다. 

특히 경쟁 업체끼리 서로 치열하게 다투며 대드는 모습은 
그야말로 가관이었다. 

멀쩡하게 진열되어 있는 약품들을 
자기 회사 제품으로 바꿔 놓지 않을려면 공평하게 치우라는 거다. 

 

MBC 본사에도 이런 내용의 터무니없는 항의가 빗발쳐 들어오는 바람에
너무 선명하게 비치는 약품은 회사와 제품명을 종이로 가리기도 하고
자주 비칠 수밖에 없는 약품들은 어느 회사 제품인지 시청자가 느끼지 못하도록
흐릿하게 촬영하느라 애를 먹어야 했다.

참으로 복에 겨운 시달림이었다.
다시 찾아 시작하자마자 세민약국은 예상치 못한 행운이 따르고 있던 것이다.

우리는 뭔지 모르게 이제 고통과 고난의 짐을 벗고 앞으로
하나님의 축복과 은총이 따르는 게 아닌가 여겨지면서 희망과 기대를 갖게 되었다.

혜숙은 피곤한 줄 모르고
하루하루를 더욱더 신명나게 살아 간다.

 

 

 

103. 암으로부터 해방되던 날

 

 

암 수술을 받은 지 이제 만 5 년이 되었다.
생존 가망성 15 퍼센트 뒤집어 말하면 십중팔구에 해당하는

85 퍼센트는 사망한다는 의학적 생존율...

5 년이 지나면 암에서 해방된 것으로 본다는 바로 그 5 년을
기적같이 살아서 맞이하는 날이 온 것이다.

혜숙은 이제 성령의 은사로 뿐만 아니라
의학적으로, 과학적으로 온전히 암에서 해방된 것이다.

1992 년 4 월 첫째 주일
나는 혜숙의 가까운 친구들을 교회로 초청했다.

김근태의 부인 인재근(국회의원) 여사,
조성우(민화협 사무총장)의 부인 홍현실 선생
실천문학사 대표를 맡고 있던 이석표의 부인 이희순 여사
한국기독교장로회 소속 임희일 목사 등이 참석했다.

앞서도 말했거나와 교회에서는 지난 5 년 동안 모든 교우들이 합심해서
매 월 첫째 주일마다 빠짐없이 혜숙의 건강을 위한 특별 기도회를 가져 왔다.

조승혁 목사님을 비롯한 모든 교인들은 지나간 5 년 동안 다함께 합심해서
간절한 마음으로 드린 기도를 하나님께서 받아 들이시고 응답하시어서
건강하게 지켜 주신 은총에 감사하는 특별 예배를 드렸다.

혜숙은 이 날 5 년 동안의 투병 생활과 파란만장했던 체험들을 특별 간증으로 발표했다.
나는 혜숙이 무슨 말을 어떻게 할까 궁금했다.
간증 설교문을 준비하는 것 같았지만 혜숙은 나에게 보이고 싶지 않아 했다.

무슨 천기라도 누설하는 것인양 내가 낌새라도 차릴새라 굳이 감추려 들었다.
혜숙이 그러는 눈치인데 내 쪽에서 굳이 좀 보자고 하기도 민망스러웠다.

나름대로 계면쩍기도 했겠고
기도 중에 하나님과 단 둘이서 다짐한 내용들도 있을 터였다.

혜숙이 강단에 올라 서자 나는 한가롭게 궁금할새 없이 온 몸으로 긴장감이 몰려 왔다.
아마도 예배에 참석했던 이들 모두 그랬던 듯 싶다.

혜숙은 처음에 차분한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그러더니 차츰차츰 목이 메여 갔다.

점점 울먹이더니 눈물을 흘리며 간증을 했다.
초청된 친구들은 연신 손수건으로 흐르는 눈물을 닦아 내느라 바쁘다.

교인들도 모두 감동과 감사의 눈물을 흘린다.
지나간 일들이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친다.

감옥에서 출소하자마자 혜숙이 위암으로 쓰러져 있다.
그 와중에서 각계각층의 분들을 모시고 어머니의 고희연을 차려 올린다.

선후배 동료들의 관심과 위로...

광주로 끌려가 자연 건강 훈련을 받는다.
경제적인 곤란까지 겹쳐 맨손으로 인쇄소 골목에 뛰어 든다.

혜숙은 점점 죽음의 문턱으로 다가간다.
부채를 갚고 사업체를 세워 낸다.
집을 헐고 새로 짓는다.

병마가 다시 찾아 오고 혜숙은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 나온다.
약국을 되찾고 삶을 다시 시작한다.

이제 혜숙이 생명을 완전히 되살리고
눈물을 흘리며 감동어린 간증을 하고 있다......

그 날로 우리 교회에서는
'박혜숙 권사의 건강을 위한 특별기로회'를 5 년 만에 마감했다.

조승혁 목사님은 마지막 예배라고 생각하고 우리 집에서

혜숙을 위해 안수 기도 드릴 때 말할 수 없는 통증을 느꼈다고 했다.

특히 배와 등뼈에 견디기 힘든 통증이 순간적으로 전해져 오더라는 것이다.
그리고는 신열로 몸살을 앓듯 온몸으로 땀이 철철 흐르더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박혜숙 권사가 간증으로 밝혔듯이 성령이 임하셔서 암세포를 내쫓고
몸의 병을 깨끗이 치유하는 은사에서 나타나는 현상이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총이 조 목사님을 통해서 박혜숙 권사에게 나타나
병 고침을 받은 것이 분명하다고 했다.

조승혁 목사님은 조화순 조지송 목사님과 함께
산업 현장, 노동 현장에 직접 뛰어 들어 선교 활동을 한 분으로 유명하다.

한국 교회가 노동 운동에 관심을 가지고
참여하도록 이끌어 온 장본인이다.

조 목사님의 산업 선교, 노동 선교 활동은 한국교회사에 중요한 획을 긋고
분기를 이루는 역할로 평가되면서 기록되어 있다.

조승혁 목사님은 혜숙에게 간증 집회를 같이 다니자고 제안했다.
그 후로 혜숙은 종종 암 환자를 위한 기도회에 조 목사님을 따라다니며 간증을 했다.

때로는 혜숙이 여러 교회들에서 초청을 받아
간증 예배 설교를 맡기도 했다.

암으로부터 해방되던 날...
그 날은 온전히 하나님의 은총으로
생명의 소생함을 얻은 혜숙을 위한 날이었다.

특별한 음식을 마련하고
온 교인들이 다함께 감사의 잔치를 벌였다.

목사님과 교인들. 혜숙의 친구들에게 나는 거듭거듭 감사의 인사를 드리면서
하루를 마음껏 축제와 감사의 날로 보냈다.

이제 혜숙이 그날 밝혔던 간증 내용과
그 후 여러 교회들로부터 초청을 받아 간증한 내용을 정리해서 여기에 덧붙인다.

 

 

 

104. 간증 ㅡ 하나님의 은총으로 / 박혜숙

 

 

(1) 먼저 드리는 말씀

오늘 본 교회 목사님을 비롯한 여러 성도님들을 만나 뵙도록 인도해 주신
하나님께 우선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특별히 제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신앙 체험을 귀한 예배 시간을 통해서

간증할 수 있도록 허락하신 목사님과 성도 여러분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저는 3 기에서 말기로 진행 중이던 위암과 중증 근무력증에 따른 호흡 마비 증세로
두 번을 죽음의 문턱에까지 갔었습니다.

지금도 그 당시 일을 되돌아 볼 때마다 죽음의 사선을 넘고 소생의 길로 들어 서서
이처럼 건강한 몸으로 여러 성도님들 앞에서 간증할 수 있게 된 것을
저는 오로지 하나님의 은총이라고 믿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별로 내세울 것도 없이 평범하게 살아 가는 저에게
귀한 은사를 세 번이나 내려 주셨습니다.
그리고 한 번은 마귀의 형상이 나타나서 저를 혹독하게 시험하고 갔습니다.

처음에 하나님은 달콤하고 산뜻한 향내음으로 제게 향기로운 은사를 주셨습니다.
그러자마자 샘을 내고 시기해서인지 시멘트못 형상을 한 마귀가 나타나서
저를 혹독한 시험에 빠뜨립니다.

다음으로 위암 수술을 받고 죽음의 문턱에 들어 선 제게
하나님의 형상이 나타나셔서 암세포를 깨끗이 씻어 내 주십니다.

그리고 제가 호흡마비 증세로 중환자실에 입원해서
차라리 죽음의 사신을 달콤하게 그리워하고 있을 때
예수님의 형상이 나타나서 저를 천국 가는 길로 인도해 주십니다.

저는 오늘 이 시간 하나님의 은사가 과연 어떤 모양으로
어떤 형상으로 우리에게 나타나 보이시고
한편 마귀는 어떤 형상과 모양을 띠고
우리를 시험하고 있는가 하는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저의 신앙 체험을 바탕으로 성도 여러분께 간증드릴 때
다함께 은혜 받는 귀한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신앙을 가지게 된 배경

우선 먼저 제가 신앙을 갖게 된 배경에 대해서 잠깐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본래 유교를 지키는 집안에서 태어나고 자랐습니다.

그러다가 기독교 계통인 정신여중에 다니게 되었는데
그때 다른 학생들은 별로 좋아하지 않던 성경과목을 저는 참으로 흥미있어 했고 좋아했습니다.

성경 구절 암송대회. 성경 퀴즈대회에 나가서 상도 많이 받았습니다.
감수성이 한창 예민할 때여서인지 정서적으로 기독교 신앙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고등학교는 공립학교인 경기여고를 다녔는데
그때 저는 성경 과목이 없는 것을 무척 아쉬워했습니다.

1972 년 이화여대 약대에 입학하자마자
저는 대학생들 사이에서 일반적으로 KSCF 라고 불리는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에 가입해서 활동했습니다.

이 단체는 당시 전국적으로 거의 모든 대학에서
활동하고 있던 기독학생회 모임의 연맹체입니다.

요즘에는 대학마다 기독학생회 단체가 여러 성격으로 나뉘어 있습니다만
그 당시에는 한국 기독교계 단체와 지도자 그리고 기독학생들이 학원 사회에서까지도
교파와 교권으로 분열되어서는 안 되겠다고 의논하고 합의해서 다함께 통합하기로 결의했습니다.

그래서 YMCA와 YWCA에서 대학생부를 없애고
기존의 기독학생회와 더불어 초교파적 통합체로 KSCF를 구성한 것입니다.

제가 대학에 입학하던 1972 년 가을에 계엄령이 선포되고 유신헌법이 제정되었습니다.
그 때, 대학 사회는 물론 온 나라 전체가 두려움과 공포 분위기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지식인들은 물론 온 국민들도 잔뜩 겁을 먹고 있었습니다.
이때 우리 기독교계 목사님들과 교수님들이 독재 권력을 우상화하고 신격화하는 데
앞장서서 반대하고 나섰습니다.

한국 사회에 합리적이고 양심적인 지식인들 가운데 특히 우리 기독교계 인사들이
제일 강건하게 비판하고 저항해서 수많은 분들이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하지만 이런 신앙적 결단과 행동으로 말미암아 유신체제는 결국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한국 교회가 이처럼 우리 사회의 민주화에 큰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 역시
저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대적 정치사회적 배경 속에서 저는 기독학생회 활동을 하다가 목사님과 교수님을 비롯한
여러 동료 대학생들과 함께 1974 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되었습니다.

여학생의 몸으로 저는 100 여 일 동안 남산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혹독한 조사를 받고

서대문 구치소에 갇혔습니다.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 부회장으로 활동하면서 여기 앉아 계신 최민화 장로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결혼하기 전에 3년 동안 민주화 운동을 함께 하고 서로 사귀기도 하면서 학교를 다녔습니다.

그 사이에 최 장로님은 민주화 운동과 관련해서 두 차례 구속되었습니다.
졸업 후에 결혼하고서부터는 장로님을 따라 서울 회원교회에 다녔습니다.

장로님은 결혼 후에도 두 번을 더 감옥에 가게 되어서 첫 애 낳을 때만 제 곁에 있었고
둘째 셋째 애는 남편이 감옥에 있는 동안에 낳았습니다.


(3) 향기로 주신 첫 번째 은사

저는 졸업과 함께 결혼하자마자 약국을 개업했습니다.
그러다보니 경험도 없고 실력도 모자라서 제대로 감당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1 년 여 만에 약국을 정리하고 종로 5 가에 있는 대형 약국과 제약회사에 다니면서
3 년 여 동안 경험을 쌓고 모자라는 실력도 키워 나갔습니다.

그러다가 이제는 어느 정도 감당할 수 있겠다 싶어서
1984 년에 다시 개업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 고등학교와 대학 동창으로 믿음이 돈독하고 절친한 친구가 있었는데
제가 약국을 다시 개업한다니까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고 시작하라고 권면했습니다.

저는 친구를 따라 처음으로 순복음교회 기도원에 가서
하나님께 간절한 기도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친구의 안내로 시무하시는 목사님께 특별 안수 기도를 받았는데
저는 그때 이상한 향내에 도취되었습니다.

아카시아향 같기도 하고 박하사탕에서 나는 향내 같기도 한데
달콤하고 생그러운 맛과 산뜻한 향내음이 제 코에 스며드는 것이었습니다.

순간적으로 저는 '순복음교회 목사님들은 박하사탕이나 껌을
입에 물고 기도해 주시나보다' 하고 생각했습니다.

집으로 돌아 와서 저는 기도원에서 지낸 일들을 시어머님께 말씀드렸습니다.
제 시어머님은 경건하신 초대교회 목사님의 따님으로 신앙심이 깊고 돈독하신 분입니다.

어머니께서는 함께 안수 받은 제 친구는 그 향내를 맡지 못했을 수도 있었을 꺼라면서
한번 확인해 보라고 하셨습니다.

그 친구는 제 곁에 바로 붙어 있었는데도 향내를 전혀 맡지 못했다고 합니다.
어머니께서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사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선택하고 저에게만 내리신 특별한 은사라는 겁니다.
은사를 받고 나면 마귀가 샘을 내고 시기해서 시험에 드는 수가 있으니 조심하고
더욱 열심히 기도하라 하십니다.

어머님의 말씀을 듣는 순간 저는 온 몸이 떨려 왔습니다.
성령이 역사하시는구나 하고 느끼면서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연약하고 보잘 것 없는 저를 택하셔서
은총을 허락하시니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 제게 내리신 사명으로 믿고 열심히 살겠습니다.
약사라는 전문직을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증거하라는
계시임을 믿고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4) 마귀의 시험

며칠 후에 정말로 마귀가 찾아 왔습니다.
어머님의 말씀대로 어김없이 찾아 온 것입니다.

그 당시 저희 집은 한옥이었습니다.
곤하게 자고 있는데 시멘트못 형상을 한 마귀가 대청마루 유리창을 통해서

방으로 마구 쳐들어 오더니 제 오른팔에 무수히 꽂힙니다.

저는 어머님 말씀을 듣고 어느 정도 대비하고 있었지만
막상 당하고 보니 기도가 입으로 터져 나오지 않았습니다.

저는 다급하고 초조한 마음에 주기도문을 외우고 또 외쳤습니다.

외치면서 입으로 악악거리고 토해 내자
오른팔에 박힌 시멘트못 형상이 하나 둘 빠져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아! 이것이 바로 마귀의 형상이로구나!
겁내지 말고 물리쳐 이겨 내야지!'

용기를 내고 희열을 느끼며 열심히 소리쳐 기도하니까
마귀들이 거의 다 빠져 나갑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마지막 남은 하나가
미처 빠져 나가지 못하고 있을 때 대문에서 벨소리가 울립니다.

깨어 일어나 대문을 열어 보니 남편이 들어 옵니다.
그 바람에 저는 이 하나를 미처 뽑아 내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제게 은총을 내리시어
사랑을 베풀고 계시다는 것을 보여 주신 겁니다.

또한 이를 믿고 매사에 항상 하나님을 섬기고
경외하라는 메시지요 계시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얼마 후 저는 이 메시지를 잊어버리고
세상 일에 매달려 아둥바둥 살아갔습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경외하는 생활을 소홀히 한 것입니다.


(5) 위암 수술

어리석은 저는 제가 스스로 잘나고 유능해서
약국 운영도 잘 되는 줄 알고 교만을 떨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저에게 계속 메시지를 보내셨습니다.

1987 년 제 나이 34 살 때 일입니다.
그 당시 남편은 네 번째로 감옥에 갇혀 집에 없었습니다.

제 몸은 점점 말라가고 얼굴은 핏기없는 색으로 변해 갑니다.
온몸으로 통증이 몰려 옵니다.
척추가 부러질 것 같은 통증을 견딜 수 없어 등과 가슴에 파스를 더덕더덕 붙입니다.

진통제 약을 집어 먹고 영양 주사를 맞으면서
남편이 감옥에서 출소할 날만 기다렸습니다.

남편이 얼마 안 있으면 만기 출소하니까
그때까지만 참고 기다리자고 이를 악물었습니다.

하지만 남편이 출소하기 보름 전인 1987 년 3 월 말에
저는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통증이 너무 심해 마구 뒹굴었습니다.
친정 오라버니와 여동생이 달려 들어 억지로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습니다.

초록색 수술복으로 갈아 입고 수술용 침대 위에 누어 있는데
저는 이 환한 세상을 과연 다시 볼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에 온몸이 떨려 왔습니다.

저는 눈을 감고 하나님께 두려움을 떨치고
이겨 낼 수 있는 용기를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마음 속으로 찬송가를 불렀습니다.
'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 십자가 짐같은 고생이나...' 찬송가 364 장 입니다.

십자가를 진 고생의 길이 아니라 주님께 좀 더 가까이 가고
주님을 가까이 느끼기 위해서 부른 것입니다.

저는 무슨 수술을 받는 건지 잘 몰랐습니다.
그저 위궤양이 심해서 위를 좀 잘라 내야 하는 것인 줄로만 알았습니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은 제가 위암 말기 상태로
수술이나 제대로 받을 수 있겠는지 염려하고 있었습니다.
앞으로 3 개월에서 6 개월 정도밖에 못 살꺼라고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보름 후에 남편이 감옥에서 출소했습니다.
저는 주치의를 만나 본 남편을 통해서

제가 위암 3 기에서 말기로 진행하는 중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암 세포가 이미 위 전체로 다 퍼져 있고
위 주변의 임파선까지 전이되어 있는 상태였다는 겁니다.

수술을 해도 별 소용이 없거나
수술 자체가 아예 불가능할 지도 모를 상태였다는 겁니다.

그나마라도 부탁하고 사정해서 위를 다 잘라 내고
위에 가까이 붙어 있는 비장과 췌장도 일부를 잘라 냈다고 합니다.


(6) 십중팔구는 죽을 병

암에 걸렸을 때 죽지 않고 살아날 수 있는 가망성을 의학적으로 5 년 생존율이라고 하는데
제 경우에는 5 년 생존율이 15 퍼센트 정도라고 합니다.

바꾸어 말하면 제가 살아날 수 있는 가망성은 15 퍼센트, 죽을 확율이 85 퍼센트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십중팔구는 죽을 꺼라는 얘깁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저는 실감이 나지 않았습니다.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당시 서른 네 살의 젊은 여자, 세 아이의 엄마...
막내는 아직 첫돌이 마악 지난 상태였는데...
죽으리라는 생각조차 하기를 거부했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항암제와 방사선 치료를 받으면서 직업이 약사인 저는

과학적 현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머리카락이 뭉텅뭉텅 빠져 버립니다.
얼굴이며 살갖은 핏기와 탄력을 잃고 누렇게 변합니다.

온 몸은 앙상하게 뼈가죽만 남고
앉아 있기조차 힘듭니다.

빨갛고 시퍼런 항암제 주사를 맞고 있자니
그것이 바로 제 생명의 줄을 쥐고 있는 하나님입니다.

방사선 치료를 받기 위해 기계 밑에 누어 있으면
그 빛이 바로 하나님이었습니다.

위에 붙어 있는 횡경막이 없다보니까
창자에 있는 분비물이 목으로 코로 사정없이 넘어 옵니다.

이렇게 넘어 올라 오는 쓰디쓴 쓸개액과 침액과 구토물로
저는 고통을 못 이겨 몸부림쳐야 했습니다.

식도와 코는 망가지고 헐고 진물이 나서 얼마나 쓰라리고 아프던지
방바닥에 마구 뒹굴어야 했습니다.

수술 후 석 달 가량을
저는 거의 아무것도 먹지를 못했습니다.

주치의는 체중이 34 kg 이하로 떨어지면 위험하니까
죽음을 준비하고 있으라고 제 남편에게 말했습니다.

체중이 34 kg 으로 떨어집니다.
남편과 가족이 거의 반 쯤은 포기하고 준비합니다.
저 역시 살기를 제 생명을 반 쯤 포기합니다.

이제 끝이로구나...
이렇게 살다가 가는 것이로구나...
참 별것도 아닌데 아귀다툼하고 살았구나...
단지 남은 가족보다, 다른 사람들보다 좀 먼저 갈 뿐인데...
하는 생각에 빠집니다.

숨이 멈출 때까지 그저 무력하게
남아 있는 숨만 쉬고 누어 있습니다.


(7) 뜨거운 안수 기도

이 때 교회 담임 목사님과 교인들이
마지막 심방으로 여기고 찾아 와 주셨습니다.

목사님이 우리집 대문으로 들어서자마자
저는 일어나 앉았습니다.

이제 깨어 있는 정신으로 마지막 보게 될 교인들과 목사님 앞에서
저는 눈물 콧물 할 것 없이 줄줄 흘리면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목사님께서는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온몸에 땀을 흠뻑 흘리시면서
저를 위해 뜨거운 안수 기도를 해 주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왜 이 여인을 데려 가시려는 겁니까?
오랜 세월 한국 사회의 민주적 발전을 열망하며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의로운 길을 걸어 온 이 여인이
왜 민주화 되는 세상, 좋은 세상을 못 보고
이다지도 고통스럽게 죽어야 하는 겁니까?...
하나님 아버지시여! 이 나라 이 백성을 위해서
고난과 역경을 감당해 온 남편을 뒷바라지 하고
어려운 동료들을 보살펴 온 당신의 귀하고 의로운 따님을
주님! 데려 가시면 안 됩니다...
앞으로도 주님을 위해서 해야 할 소중한 일들이
많이 남아 있사오니, 할 일 많은 이 여인을
주님! 살려 주시옵소서...
하나님 아버지!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꼭 살려 주셔야 합니다.
주여! 살려 주시옵소서......"

교인들도 모두 합심해서 통성으로 울부짖고 통곡하며
보잘 것 없는 저의 생명을 위해서 간구해 주셨습니다.

목사님께서는 안수 기도 중에
온몸으로 심한 통증을 느끼셨다고 하십니다.

통증을 견디다 못 해
기도 소리가 더욱 더 커졌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이 때 제 가슴 속에서
'죽으면 죽으리라...' '죽으면 죽으리라...'

하는 말씀이 뜨겁게 전해져 옵니다.

'죽으면 죽으리라...' 이 말씀으로 말미암아
불안과 초조가 서서히 걷히고 마음이 평온해 집니다.
숨쉬기가 훨씬 수월해 지기 시작합니다.

목사님과 교인들이 다녀 가신 그 다음날부터
제 몸에서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배고프다'는 신호가 위에서 뇌로 전달되는 겁니다.
먹고 싶다는 의욕이 마구 솟구치는 겁니다.

저는 이때부터 음식을 먹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먹은 것을 도로 토해 내기 바빴지만 저는 토해도 먹고, 먹고 토하기를 반복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저의 교만함과 방자함을...
인간적인 사리사욕을 하나님께 회개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제까지 저지른 허물들을 수첩에 일일이 적어 가며
회개 기도를 시작한 것입니다.


(8) 두 번째 은사 ㅡ 성스러운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을 진정으로 경외하며 회개 기도를 드린 지 닷새 후에
하나님께서는 저에게 다시 나타나셔서 기적을 보여 주셨습니다.

깊은 잠에 들어 있는데 하나님의 성스러운 형상이 제게로 다가 오십니다.
측은한 모습으로 저를 내려다 보십니다.

그리고는
"여인아! 이제 네 뱃속이 깨끗해 지고 네 몸속에 병이 다 나았으니 걱정하지 마라"
하십니다.

저는 약사로서 전문 지식이 있어선지

의심 많은 도마처럼 믿지를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아직은 그럴 때가 아니고 더 열심히 치료하고 노력하면서 기다려야 하는데요?"
하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랬더니 성스러운 하나님 형상께서는
"여인아! 내가 네 배를 열어 보여 주리라"
하시면서 제 배를 십자가 모양으로 갈라서 열어 보여 주시는 겁니다.

그리고는 "보아라! 네 몸 속에 암세포가 없어지고

깨끗하게 다 낫지 않았느냐" 하십니다.

제 눈으로 직접 보니까 정말로 깨끗했습니다.
암세포가 깨끗하게 없어진 겁니다.

저는 그 발 앞에 얼른 무릎 꿇고 엎드려 감사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 후로 저는 감사하는 기도 생활을 계속했습니다.

화장실에서도 꿈속에서도 저는 마냥 즐거웠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몸 안에 모시고 하나님과 함께 생활하는 저는 갓난 어린아이처럼 마냥 즐거웠습니다.

매일매일 찬송을 부르고 하나님을 찬양하며 기도하는 생활에 매달렸습니다.
그리고 저는 암으로는 절대로 죽지 않을 꺼라는 믿음과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9) 견딜 수 없는 고통 ㅡ 중증근무력증

그 후로 저는 찬송과 기도와 감사의 생활로 1 년 여를 보냈습니다.
하지만 저에게는 또 한번의 혹독한 시련이 남아 있었습니다.

의학적으로 설명 드리자면 위와 비장, 췌장을 잘라 내고
항암제와 방사선 치료 등으로 몸이 허약할대로 허약해 진 상태에서
저는 중증근무력증에 걸리게 되고 그로 인해서 호흡이 마비되는 증세가 온 것입니다.

근무력증은 세포와 세포를 이어주는 신경이 마비되는 병입니다.
의식은 있어도 몸 전체가 마비되는 병입니다.
심한 경우 호흡이 마비되면 순식간에 사망으로 이어지는 무서운 병입니다.

저는 가슴 부위가 마비되어 제 힘으로는 숨도 쉴 수 없었습니다.
병원 중환자실 산소호흡기에 의지해서 1 달 여 동안 있었습니다.

항암 치료로 피가 혼탁해져서 대 여섯 차례에 걸쳐
온 몸의 피를 걸러 내야 했습니다.

앞 가슴 갈비뼈를 톱으로 절단해서 쫘악 벌려 놓고
그 안에 있는 흉선을 제거하고는 다시 갈비뼈를 붙이는 대수술을 받았습니다.

맥박이 30 ~ 40 까지 떨어지고
쇼크로 사망할 뻔하기도 했습니다.

제 몸에는 기관지를 절제해서 기계 호흡에 사용하는 줄,
소변 줄 등등... 호스 줄이 8 개나 달려 있었습니다.

저는 참으로 너무나 견딜 수 없고 고통스러워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드렸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어찌하여 저에게
이처럼 견딜 수 없는 고통을 주시나이까?
저는 도저히 더 이상 견딜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정말로 저를 위하고 아끼신다면
제가 잠들어 있을 때, 영원히 이 눈을 뜨지 말고 잠들 수 있도록 도와 주옵소서...
저를 제발 평안한 마음으로 주님의 곁에 갈 수 있도록 인도해 주옵소서..."

내일이면 이 중환자실의 기계들을 보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통증에서 빨리 벗어 나게 해 달라고 매달렸습니다.
하루 빨리 하나님의 품에 안기게 해 달라고 애원했습니다.


(10) 세 번째 은사 ㅡ 예수님의 형상과 천국 가는 길

그러던 어느 날 예수님의 형상이 다시 나타나셨습니다.

사진에서 늘 보았던 거룩하고 밝은 모습이 아니라
"저 여인을 어찌해야 하나..."

 하고 고뇌하면서 애처러워 하는 표정이었습니다.

"이제 내 힘으로는 안 되는데...
어떻게 하면 편안하게 해 줄까?..."
하는 모습... 안타깝고 불쌍해 하는 모습으로 저를 부르십니다.

"혜숙아~~~!!! 이제 나랑 같이 가자~~~"

저는 아무런 주저 없이 따라 갔습니다.
금보라빛으로 덮힌 그 길은 참으로 고즈넉했습니다.

그 길을 끝까지 따라 갔습니다.
마지막 끝에 계단과 문이 있습니다.

이제 이 문으로 들어서기만 하면
천국으로 가는 거로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순간...
집에 있을 아이들 생각이 뇌리를 스칩니다.

"주님! 저 조금만 있다 가면 안 될까요?
집에 좀 가 봐야 되겠는데... 다음에 다시 올 께요"

저는 되돌아 왔습니다.
며칠 후에 예수님의 형상이 또 나타나십니다.

그 때에도 예수님은 한없이 애처롭고 안타까운 모습으로 저를 보듬어 주시면서
'이 여인을 어찌해야 좋을꼬...' 하시며 위로해 주십니다.

저희 교회 담임 목사님께 이 말씀을 드렸더니
그 안으로 들어 갔으면 그 날로 천국에 가는 건데 되돌아 와서 다시 소생하게 된 거라고 하십니다.

저는 지금도 천당 가는 길이 눈 앞에 선명하게 떠오릅니다.
반짝반짝 화려하거나 호화로운 건 아니지만 금보라빛이 무척이나 따스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의 모습도 생생하게 떠오릅니다.
이 여인을 어떻게 위로해야 하나... 하는 모습
고뇌하는 인간적인 모습이었습니다.
그 인간적 예수의 모습을 보고 깨어났습니다.

암 수술보다 더 큰 수술을 받고 저는 다시 퇴원했습니다.
그리고 가정으로 돌아 왔습니다.


(11) 맺는 말

그 후 저는 제가 운영하던 약국을 다시 인수해서
오늘날까지 열심히 운영하고 있습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제게 내려 주신 은혜에 보답해야 한다는 의지와 믿음으로
지역 주민들과 상담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저에게
향기로운 은사를 내려 주셨습니다.

제 배를 십자가 모양으로 갈라 보이시며
암 세포를 깨�하게 없애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형상으로 나타나셔서
따스한 금보라빛, 천국 가는 길을 보여 주셨습니다.

시멘트못 형상을 띠며 온 몸에 달라붙는 마귀를
물리쳐 주셨습니다.

저는 문득문득 하나님께서 저의 생명을 구해 주신 뜻이
과연 무엇인가? 어디에 있는가? 하고 헤아려 봅니다.

이 세상에 응답하실 일이 셀 수 없이 많고 많을텐데
어찌해서 보잘 것 없는 저에게까지
이처럼 각별한 관심을 가지시고 은총을 내리셔서
하찮은 생명을 연장시켜 주신 걸까 생각해 보게 됩니다.

그럴 때마다 저는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저와 같이 마음이 연약한 이들
세상 만사에 흔들리며 갈등을 겪고 살아 가는 이들
믿음이 없는 사람들
암으로 또는 다른 병고로 고통 받는 이들에게

하나님이 살아 계시고 역사하고 계심을
저로하여금 증거케 하기 위해서였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하잘 것 없는 저의 생명을
구원해 주신 것이라고 믿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이처럼 살아 계십니다.
하나님은 역사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 가운데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명을 주관하고 계십니다.

이제 오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귀한 은총이
우리 모두와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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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 에 필 로 그

 

 

혜숙이 암으로부터 해방되고 중증근무력증 증세도 점점 호전되면서
병마는 이제 우리 곁을 멀리 떠난 듯했다.

하지만 혜숙은 그 후 2 년 만에 또 쓰러졌다.
이번에는 서너 가지가 연속적으로 들이 닥쳤다.

근무력증 치료를 위해서 2 년간 꾸준히 약을 복용하고
이제는 다 나았다고 안심하던 때였다.

약국은 전에보다 손님들도 많아 관리 약사를 두고 운영도 잘 되었지만
그만큼 더 신경을 쓰게 되고 피로가 누적되었던 것 같다.

두 번에 걸친 큰 수술로 위와 비장과 췌장뿐만 아니라
흉선까지 제거한 상태이다보니 면역과 조절 기능이 크게 떨어져 있었던 것이다.

94 년 4 월 혜숙은 갑상선 기능 저하로 다시 병원에 입원했다.
갑상선 질환은 수술해서 고치는 병이 아니라
평생동안 약을 복용하면서 기능을 조절해야 하는 병이란다.

그 후로도 혜숙의 몸은 자꾸 야위어 갔다.
그동안 50 kg 까지 늘었던 몸무게가 38 kg 으로 다시 줄어들었다.

혜숙은 고등학교와 대학에 다닐 때 60 kg 에 이를 정도로 몸집이 뚱뚱했다.
그 때 찍은 사진들을 보면 안경 밑이 달걀처럼 부풀어 있고
눈은 얼굴살에 가려 지금보다 조그마했다.

바지를 입으면 허리와 몸통을 구분하기 어려운데도 꼭 벨트를 차고 있어서

가까운 친구들이 '드럼통에 중간 표시를 하고 다닌다' 고 놀려대곤 했었다.

그러던 몸집이 몇 번의 병마를 겪다보니

왜소하게 말라버린 것이다.

갑상선 치료약을 계속 복용하던 중에
혜숙은 1 년도 채 지나지 않은 95 년 3 월 또다시 입원했다.

신경외과에서는 갑상선 비대와 심장 저하로 보았는데
검사 결과 의외로 당뇨병에 초기 결핵이 합병증으로 왔다는 진단이다.

급히 호흡기질환 격리 병실로 옮기고 무려 두 달 여 가량을 입원해 있었다.
퇴원 후에도 혜숙은 당뇨병으로 주머니에 설탕이나 사탕같은 것을
항상 지니고 다녀야 했고 마실 물을 늘 곁에 준비해 두어야 했다.

그 후 1999 년 연말까지 한 해에 두어 차례는
잠을 자다가 혹은 주위 친지 집에서 모임을 갖다가 혈당이 갑자기 저하되어
그야말로 시도때도 없이 119 앰블런스 편에 병원 응급실로 급히 실려가곤 했다.

2000 년에 들어 서서도 이런저런 증세로 한 두 해에 두어 번은 입원을 하게 되고
윗니 아랫니 합해서 반 이상은 상하고 다쳐서 틀니를 하고 생활한다.

우리 가족과 가까운 동료들은 혜숙을 '종합병원'이라고 부른다.
평생동안 한 가지 병만 지니고 살아 가기도 힘든데
세상에 못 된 병을 두루 돌아가며 앓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의학적으로도 싸이클 현상이란 게 있단다.
염주목걸이처럼 한 번씩 돌아가며 병치레를 겪는 현상이란다.

한양대 병원에서는 혜숙을 의학적으로
희귀한 임상 대상으로 삼아 연구하고 있단다.

그래선지 혜숙이 오랜 만에 외래 진료를 받으러 가면 주치의가 놓아 주지 않고

며칠 만이라도 입원해서 검사를 받아 보자고 굳이 권면하고 부탁한다.

혜숙이 입원해 있는 동안에도 전문의 수련 과정에 있는 의사들이
시도때도 없이 찾아와서 정중하고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기회를 달라고 요청한다.

그러면 혜숙은 자신이 약학을 전공한 때문인지
어려워 하지 말고 궁금한 게 있으면
뭐든지 물어 보시라면서 친절하고 편안하게 대해 준다.

의학적으로 볼 때 혜숙의 몸은 살아 있는 것 자체가 신비하단다.
생명의 오묘함이요 기적이란다.

혜숙은 자신의 병력을 굳이 감추거나 숨기려 하지 않는다.
수련의에게 뿐만 아니라 주변 분들에게도 필요하면 적나라하게 드러내 보인다.

혜숙은 가끔 스스로 생각해도 자기 몸이 기이하고 오묘하다면서
죽으면 시신을 의학 실험용으로 기증하는 게 어떻겠느냐고
조심스런 표정으로 내게 묻기도 한다.

여학생의 몸으로 서슬퍼런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갖은 고초를 당하고

감옥에 갇히기도 하면서 이 땅의 민주화를 위해 싸워 온 세월...

경제적 사정으로 어려움을 겪으면서
남편을 뒷바라지하고 가정을 지켜 온 세월...

혜숙이 이처럼 모진 세월을 극복하고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사랑이라는 희망이라는 불씨를 가슴 속 깊이

소중하게 간직하고 살아 왔기 때문이라고 나는 감히 생각해 본다.

이 땅의 민주화에 대한 믿음과 희망...
남편과 가정에 대한 지극한 책임과 사랑이 없었다면

아마도 가능하지 않았으리라......

그렇다! 혜숙과 나에게는 사랑과 희망이야말로
그 어떤 고통과 좌절, 절망과 죽음도 극복할 수 있는
고단위 항암제요 치료제였다.

지금도 내 아내 혜숙의 건강이
온전하다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앞으로도
자신의 의지와 확신으로
사랑과 희망의 불씨를
가슴 속 깊이 간직하고 살아 간다면

몸과 마음의 병은
치유될 수 있을 것이다.

 

 

 

106. 글을 마치며


인생에서 가장 큰 시련을 꼽으라면
나는 주저없이 내 아내 혜숙이 암으로 쓰러지고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면서 투병했던 일을 무엇보다 첫 번으로 삼는다.

내 자신이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 네 번씩 실형 언도를 받고
적지 않은 세월 감옥에 갇히고 했지만

그보다는 죽어 가는 아내를 곁에서 지켜 보는 일이야말로
내게는 더할 수 없는 고통이었다.

1991 년 2 월 조금은 민주화 된 세상에서
나는 대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고 이 일은
"민주화 운동가...
제적과 징집, 복학과 구속과 제적을 거듭하다가
22 년 만에 연세대학교 졸업..."
이란 제하와 내용으로 각 일간지와 교계 신문에 크게 보도되었다.

1993 년 7 월 월간 <행복이 가득한 집>에
우리 부부의 기사가 특집으로 꾸며져 가족 사진과 함께 게재되었다.

1996 년 3 월 나는 그동안 살아 온 이야기를 정리하여 <우리는 하나>라는 제목으로

도서출판 현암사에서 책을 출판하게 되었다.

그때는 글을 시작하고 마무리하기까지
사정이 너무 촉박해서 미처 가다듬을 사이없이 졸속을 무릅쓰게 되었다.

그리고 후일 차분한 마음으로 여유를 가지고
다시 정리할 수 있는 날을 기약했다. 

여기 홈페이지에 실린 <우리는 하나>는 그 책의 제 1 부에 해당하는 내용이다.
기약한 바대로 차분히 가다듬다보니 분량이 열 배 이상으로 늘어 났다.

2000 년 1 월 도서출판 한울에서 <사랑과 희망으로>라는 제목의 책을 출간했고
이 책은 출간되자마자 많은 언론사에서 신간 안내나 서평으로 다루는 등 주목을 받기도 했다.

조선일보의 종합여성지 월간 <feel> 은 2000 년 2 월호에서
<시한부 인생 아내를 암에서 구해 낸 한 사회운동가의 감동 외조 & 민족의학의 실체>
라는 제목의 특집을 꾸며 게재했다.


같은 해 2 월 3 일에는 KBS TV 아침마당 저자와의 대화 코너에

우리 부부가 함께 출연해서 생방송으로 35 분간 방영되기도 했다.


이상의 자료들은 본 홈페이지 언론방송 자료방에서 볼 수 있다.


이제 세월이 흘러 <우리는 하나>와 <사랑과 희망으로> 모두

절판이 된지 오래이다.


늦은 나이에 홈페이지를 제작하고 영상작품을 만드는 일에 취미를 붙인 나는

위 두 책에 실렸던 내용을 중심으로 당시의 언론 보도와 사진 등

역사적이고 사실적인 자료들을 추가 보충하고 검증하여

직접 제작한 나의 홈페이지에 공개해서 올린다.

*

*
예로부터 아내와 아이들, 집안 이야기는

자랑이든 허물이든 밖에서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했다.

특히 아내에 대해서는
더더욱 그렇다.

이를 일컬어
팔불용(八不用)이요 팔불출(八不出)이라 했던가...

하지만 어리석은 소치임을 알면서도
이렇게 만시리에 공개하는 까닭은
모든 사람들이 다함께 사랑과 희망의 불씨를
가슴 속 깊이 간직하고 살아갔으면 하는 뜻에서다.

이 땅에 민주화된 세상을 이루기 위해서

관심을 가지고 헌신해 온 이들


병마로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며

고통당하는 이들

그리고 경제적 형편으로

절박한 어려움을 겪는 모든 이들에게

이 글이 조그마한 위로가 될 수 있다면
더 이상 바랄 게 없겠다.

*
*

( 추신 )

내 아내 혜숙은 <사랑과 희망으로>를 펴내고 4년 여

암 수술을 받은 후로는 17년 6개월 여가 흐른 뒤
2004년 9월 3일 유명을 달리했다.


우리 가족은 선후배 동지들의 간곡한 뜻에 따라

마석 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 묘역에 혜숙을 안장했다.


나는 삼오제가 되는 날
비문을 작성하고 무덤 앞에 새겨 두었다.

(전면)
민주화운동 관련자
故 박혜숙의 묘

(후면)

故 박혜숙은 1972년 경기여자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이화여자대학교 제약학과에 입학하자마자
박정희 독재 권력에 대항해서 학생운동을 펼치다가
1974년 중앙정보부에 연행되어 여학생의 몸으로

갖은 고문과 공포 속에서 조사를 받고
소위 민주청년학생총연맹 사건으로 서대문구치소에 구속 수감된 이후에도

뜻을 굽히지 않고 수사 당국으로부터 수차례

지명수배와 연행 조사를 당하는 등 계속 활동해 오다가
1978년 이화여대 약대를 졸업하고
학생운동의 동지인 최민화와 결혼한 이후로는 세민약국을 경영하면서
모두 네 차례에 걸친 남편의 옥바라지는 물론이거니와
민주화운동청년연합 민중문화운동협의회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민주화실천가족협의회
이화여자대학교민주동우회 등 단체의 결성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해 오다가
1987년 위암 수술을 받고 병마와 치열하게 싸워오던 중
2001년 8월 28일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에서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결정하여 증 제2224호로 민주화운동관련자 증서를 수여받고
2004년 9월 3일 02시 21분에 일기를 마치니
남아 있는 동지들의 간절한 뜻으로
여기 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 묘역에서 고이 잠들다

2004 년 9월 7일 삼오제에 남편 최민화 올림

 






 



최 민 화 치열하게 다정한 군자(君子) / 김정환

 

 

1

 

참 온화한 사람이다......

 

그를 처음 만났을 때

난 그렇게 생각했었다.

 

1983 년 민청련을 창립하기 위해

열 두 명인가가 모였을 때다.

 

난 나이로 보나 연륜으로 보나

또 투사 정신으로 보나

한데 어울릴 자리가 아니었다.

 

그는 민주화 운동의 신화였고

난 데뷔한 지 얼마 안 되는

일개 문사였다.

 

참으로 어둠이 너무도 위세당당하고

그게 어느새 당연한 것처럼 보이던 때다.

 

광주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참살을 당한 그 경악과 분노

 

그리고 무엇보다 두려움이

우리의 전신을 휘감고 덜덜 떨게 만들면서

우리를 집요하게 길들이던 때다.

 

회의가 진행되고 나는 오래지 않아

내 본분을 알게 되었다.

 

... 이를테면 글깨나 쓰는

서기로 불려 온 셈이었다.

 

당연하지......

... 투사는 아니니까......

 

나는 무척 안심하면서

아주 비겁하고 편안하게

 

가장된 겸손으로

내 비겁을 감싸면서

 

쟁쟁한 선배들이 하는 말에

귀를 기울였다.

 

 

회의는 당연히 갑론을박이었다.

공개 운동이라니 !

 

야수가 휘두르는 철권에

계란같은 머리를

스스로 들이미는 일 아닌가...

 

그러나 그렇다고

우리가 우리의 본분을

포기할 것인가...

 

회의 분위기는

자못 험악해 졌다.

 

그런데 쉬쉬하며 험악해 질수록

암담해 지기 마련인

그 당시 회의 모양새의 한 귀퉁이가

이상하게도 밝은 거다.

 

그게...

그가 실실 흘리는 웃음이라는 것을 아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그는 자기 의사를 말했으되

상대방의 의견 중

장점을 키워 주는 방식으로 말했다.

내내 웃음을 잃지 않으면서...

 

... 저것... 저게 뭐지?...

그때 나는 상당한 충격을 받았다.

 

그렇다.

상대방의 장점을 제 것으로

제 온화함으로 바꾸어 내면서

자신을 보충하고

 

그렇게 완성된 자신의 의견을 겸손하게...

그러나 치열하게 추진하는 능력!

 

그것은 민주화 운동을 추구하는 데

가장 필요한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가장 드문 능력이다.

 

고생은 흔히

사람을 그악스럽고

완전한 권위주의에

사로잡히게 만들기 때문이다.

 

역사상 모든 혁명가는

사랑으로 시작하였으되

 

편협한 아집과 증오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런데 저게 뭐지?

... 저런 사람도

우리나라에서 가능하구나!

 

나는 그때

비로소 내가...

 

나도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힘을 얻었다.

 

그러나 그것이

모든 것을 감싸안는 그의 웃음이

 

얼마나 크고 간절한 위력을 발휘할 것인지

그때는 내가 다 깨닫지 못했다.

 

 

 

2

 

누구는 국회의원이 되고

누구는 그에 못지 않은 정치적 명망가로 되고

 

심지어 대학 총학생회장조차

신문지상에 스타로 부상하는 동안 내내

그가 맡은 일은 허다한 단체의 재정.

 

우리가 모두 알다시피

80 년대에 숱한 운동 단체들이

서로 다른 지향점을 갖고

 

때론 부딪치고 때론 격려하면서

명멸해 갔다.

 

그 단체들이 왜

똑같은 정치적 지향점을 갖지 않았는가에 대해

우리가 아쉬워 할 필요는 없다.

 

그도 같은 생각이었을까?

 

그 숱한 단체 중

그의 재정적 후원을 받지 않은 단체는

손꼽을 정도다.

 

따스한 격려를 받지 않은 단체 관계자는

아마 거의 없을 게다.

 

그는 단순한 통합론자인가?

아니다.

 

그는 분열을

스스로 제 가슴에 상처로 품고

 

그 상처가

비단 아물 뿐 아니라

 

더 질 높은

총체적인 육()의 정신으로 재생되기를

믿고 추구하는 사람이다.

 

그가 아무리 어린 후배라도

누구한테 이래라 저래라

왈가왈부하는 적은 드물다.

 

그러나 그를 만나고 나서

' , 내가 좀 더 잘해야겠구나'

라고 깨닫지 않는 경우 또한 드물었다.

 

 

 

3

 

그와 같은 시기에

똑같은 연세대를 다녔을 강은교 시인의 시에

 

" 그가 돌아오고

식구들은 이제 안심한다 "

 

라는 명구절이 있다.

최민화에게 딱 들어맞는 말이다.

 

세상에 제 살 베어 주며

그것으로 자기 마음을 살찌운 한 넉넉한 사내가

 

저 하나 믿고 가정을 꾸리다가

쇠꼬챙이 몸 위암 3 기로

사형 선고를 받은 아내의

 

지상에서의 마지막 소원을

또 어떻게 들어 주었는가

 

그리고

그의 정성이

 

어떻게 아내를

이 땅에

다시 서게 했는가

 

그러는 동안

아내는 또 얼마나 눈물겨웠는가에 대해서는

 

이 책에 담긴 그의 육성이 너무도 절절해서

남이 보태봐야 췌언이거나 중언부언

아니면 한갓 미사여구에 불과할 게다.

 

다만 우리는

가장 찬란한 빛을 이루는 것은

순정한 한 방울의 눈물이라는 것을

 

그의 가족사 앞장에

미리 적어 두면 되리라.

 

그러나 안심하는 것은

그의 가족뿐만 아니다.

 

그는 자신이 어려울 때

되도록이면 사람들 앞에 나타나지 않는다.

 

그래서 그가 나타나면

사람들은 일단 안심한다.

 

그가 괜찮다는 것은

최소한 우리의 주변이

 

그가 돌봐 주고 있는

우리가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이

괜찮다는 뜻이고

 

그가 싱긋 웃으면

아직은 괜찮다는 뜻이고

 

의미심장하게 웃으면

잘 될 것 같다는 뜻이고

 

예의 그 실실 웃는 웃음을 흘리면

잘 될 것이 틀림없다는 뜻이다.

 

술자리에서 사람들은

그가 있어야 안심한다.

 

마음놓고 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취해서 정신을 잃고 뻗거나

횡설수설하거나

심지어 폭언을 일삼는 선배 후배조차

 

그가 그냥 두고 가는 것을

나는 보지 못하였다.

 

팔잔가?

어쨋거나, 그래서...

 

그를 고대하며

그가 와야만 안심하는 경우는

무엇보다 장례식 때다.

 

어깨를 함께 결으며

온갖 고난을 무릅쓰고

미래를 향해 나아갔던

동지들의 죽음을 맞는 일은

 

경악스럽고 한꺼번에 깜깜절벽이

가슴에 들어 차는 경험이다.

 

옥중에 있는 동료의 부모가

세상을 뜨는 일은

 

안타깝고

무엇보다 억울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전자의 경우

너무 충격적이라

슬픔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면

 

후자의 경우는

주먹만한 눈물이

펑펑 쏟아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막막하기는

모두 마찬가지다.

 

이럴 때 우리들은

최민화가 와야 안심한다.

 

그리고

이런 경우만큼은

 

그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지고

 

굉장히 엄혹한 표정이

대신 들어선다.

 

모두가 다

슬픔에 탐닉할 수만은 없지 않은가.

 

누군가가 장례 절차를 짜야 하고

장지를 잡아야 하고

문상객 접대 준비를 해야 하고

당장 영정부터 모셔야 할 것 아닌가.

 

그는 호통치고

우리는 슬픔을 다스리며

 

산 자와 죽은 자의 할 일을

비로소 구분하게 된다.

 

암담했던 시절

문인들이 앞장서는 일에는 소설가 이호철이

장례식에는 소설가 이문구가 필요했다.

 

이호철이 앞장서지 않으면

아무도 앞장서지 않았고

 

이문구가 없으면

장례 절차가 꾸려지지 않았다.

 

최민화는

그 둘을 합한 사람이다.

 

확실히... 그는

민주화 운동권 출신의

김근태나 장기표 정도의 명망가는 아닐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렇게 되기를

그 자신이 누구보다 원했고

 

그렇게 일을 추진했고

그의 뜻대로 되어 왔다.

 

그들은 그가

그리도 끔찍하게 위하는 선배며

 

그가 원했던 것은

그 둘의 배경이 되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는

본의 아니게

배경에 머무르지 않았다.

 

토대로 되었던 것이다.

 

 

 

4

 

나는 지금

그의 사진을 앞에 두고

가만히 들여다 보고 있다.

 

그의 얼굴이 온화하다고 해서

그가 역경을 겪지 않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는 가장 가혹한 시련을 겪었고

가장 온화한 지도자로 성장했다.

 

그게 얼마나 격동적이고

서사적인 과정을 겪었을 것인지를

애써 상상해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로써 그는

민주화 운동을 괴롭히던

가장 근본적인 모순...

 

적을 미워하다가

적을 닮아 버리는 모순을 극복했다.

 

~~~! 그랬던가...

 

그가...

이제까지 내 곁에 있었던가...

 

~~~ ...

정말...

형님도...

 

형님이 이제 나서야 하겠습니까?

아비규환의 정치판이

형님을 기어이 부릅디까?

 

그 상처는 어찌하시려구요...

 

이제까지 주욱 그래 왔으니

이번에도 형님 말이

맞을 테지요마는......

 

그의 표현대로

그는 이제 전방에 있고

나는 후방에 있다.

 

후방에 있으면

전투에 지친 고단한 사람들이

 

이따금씩 와서

위로해 달란다.

 

그때 우린

의견 차이도 접어 두고

 

춥고 배고프지만

똘똘 뭉쳤던 옛날이 더 좋았다며

 

이상이 정치판에 농락당하는 것에 대해

가끔

 

눈물도 그렁그렁대고

그런다.

 

그것은 내게

참으로 죄송하고

행복한 경험이다.

 

 

최민화...

 

이제 배경이자 토대였던 그가

우리 앞에

빛 한가운데 섰다.

 

그러나 난 오늘도 유독

그의 품에 안겨서

 

울고 싶다.

 

 

  1-6.jpg

김정환(金正煥)

 

1954년 서울에서 출생하여 서울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1980년 계간 <창작과 비평>에 시 "마포 강변동네에서" 등으로 등단.

1982년 첫시집 <지울 수 없는 노래> 이후 <황색예수전> <사랑, 파티>

20 여 권의 시와 소설, 평론집을 간행



 

1 부 / 1. 포기는 성공의 아버지


1969 년 3 월 나는 연세대학교 신학과에 입학했다.
대개가 그러했겠지만 당시 사회 경제적 사정이라는 게 대학을 다니기가 그리 만만치 않았다.

더욱이 시골 살림의 형편과 사정에서는 서울과 지방의 학력 차이가 극심할 때였을 뿐 아니라
국 공립 대학도 아니고 사립대에 진학하기란 여간 부담스러운 게 아니었다.

그 적만 하더라도 농촌이었던 경기도 오산에서 자라 초 중 고등학교를 마친 나는
대학을 서울로 유학해야 했다.

이런저런 까닭에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에서 나는

개교 이래 두 번째로 연세대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그러니만큼 대학교에 동문 선배와 친구가 있을 턱이 없어
나는 동아리 모임에 참여하면서 열심으로 활동했다.

친구와 선배들을 사귀고 교수님들을 가까이 모시면서
학교 생활에 열심이었다.


▲ 1969년 연세대 교정에서 나의 영원한 스승 김찬국 교수님과 함께


아름다운 캠퍼스와 화려한 계절의 낭만에 묻히기도 하고
미래의 꿈을 키우기도 하던 참이었다.

그러는 가운데 대학에 입학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3 선 개헌 파동'이라는 정치적 상황과 맞닥뜨리게 되었다.

그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4 년 중임제 헌법으로 재선된 지 불과 1 년 여가 지났을 뿐
임기도 넉넉하게 남겨 둔 싯점이었다.

연초부터 집권당인 공화당에서는
갑자기 조국 근대화와 민족 중흥의 역사적 과업을
차질없이 완수해야만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나왔다.

그러기 위해서는 국가 안보를 더욱 튼튼히 다져야만 한다고
강조해마지 않았다.

그러더니 이를 위해서는 대통령 임기가 4 년씩 두 번
그러니까 8 년으로 제한되는 중임제 헌법 내용을
위대한 영도자이신 박정희 대통령 각하에 한해서
3 선까지만 연임할 수 있도록 바꾸어야 한다고 했다.



그 당시 합리적 이성과 양식으로 뿐만 아니라
일반인의 상식으로도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억지 주장에
정국은 벌집을 쑤셔 놓은 듯 뒤숭숭했다.

야당과 재야 종교계 학계 시민 사회계 등 지식인들은
박정희 1 인을 위한 장기 집권 음모요 정권 야욕이라고 비판하며 들고 일어섰다.

그 해 새 학년 새 학기가 시작되고 시간이 흐르면서
전국의 대학은 물론 일부 고등학교에서까지
3 선 개헌 음모를 반대하고 저지하기 위한 학생들의 시위가 연일 터져나왔다.


▲ 삼선개헌결사반대 시위


그 해 6월 29일 나는 격렬했던 연세대 3 선 개헌 반대 시위에
가담한 혐의로 전국에 지명 수배되었다.

지금 돌이켜 보더라도 아직 미성년의 티를 벗지 못한 나이에 수배자가 되어
일정한 거처 없이 동가숙 서가식하면서 배회해야만 했던 그 시절의 기억을 나는 잊을 수도 지울 수도 없다.

방학을 맞이하고 한여름으로 접어 들면서
그래도 잠자리를 고민해야 하는 걱정만은 조금이나마 덜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유전 무전 여행도 할 수 있었고
서울 근교 산과 고향 인근 저수지 등에서 텐트를 치고 거처(?)를 마련해서 생활하기도 했다.


경찰 집계에 따르면 6월 27일부터 7월 3일 사이에

12개 대학에서 3만 2천 여 명이 시위에 참가했고 학생 541명과 시민 35명이 연행되었다.


7월 7일의 시위는 전국에서 벌어졌고 경찰의 진압도 강경했다.

전국의 각 대학교에는 거의 휴교령이 내려졌고 고등학교도 조기 방학에 들어갔다.


▲ 3선개헌반대 시위에 퍼부어지는 경찰 곤봉세례


대학이 휴교에 들어가자

고등학생들의 시위가 더욱 두드러졌다.


이미 많은 고등학교에서 휴교에 들어가기도 했지만

7월 10일 대구에서만하더라도 대구고 학생 500여 명

대륜고생 300여명, 경북고생 300여 명이 선언문을 낭독하고

교문을 박차고 나와 3선개헌 반대시위를 벌였다.


이어 11일에는 안동고 학생 1천 여 명, 계성고 학생 1천 여 명이 개헌반대성토대회를 열었고

7월 12일에는 김천중고등학교에서 1천 여 명이개헌반대성토대회를 열었다.


고등학생들의 3선개헌 반대시위는 대학이 휴교로 봉쇄된 상태에서

투쟁을 이어나갔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했다.


고등학교 학생들이 대규모로 반정부 시위에 가담하는 사례는

1970년대에 접어들면 그리 많지 않다는 점에서

고등학생들의 3선개헌반대투쟁은 또 다른 의미를 지닌다.


6월부터 7월까지 학생들의 격렬한 3선개헌반대투쟁이 벌어지고 난 후에야 비로소

야당인 신민당과 재야의 3선개헌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범투위)가 본격적으로 가동하기 시작했다.


7월 17일 제헌절을 맞이해서 야권에서는 범투위 발기인대회를 열고

위원장에 김재준 목사, 고문으로 윤보선, 유진오, 함석헌, 이재학,

박순천, 장택상, 이희승, 김상돈, 정화암, 임영창 등을 추대했다.

그러는 동안 각계각층의 양심적 지식인들은 삼선개헌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를 결성해서
강연과 집회 시위 등으로 저지 운동을 적극 전개했다.

당시 제 1 야당인 신민당은 7월 19일 서울에서 시작하여

7월 26일에는 군산 등 전국에 걸쳐 반대유세를 시작했다.


신민당은 원내외에서 동시에 투쟁을 전개한다는 전략하에

원내에서는 개헌 저지선 확보를 위해 노력하는 한편 개헌안 발의 자체를 차단하고

원외에서는 개헌반대유세를 전국적으로 벌이려고 했다.


하지만 7월 29일과 30일 신민당 소속 성낙현, 조흥만, 연주흠 의원이

느닷없이 3선개헌을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해서 세간을 놀라게 했다.


중앙정보부 개헌공작의 성과인 일부 야당 의원들의 개헌지지는

온 국민들의 공분을 샀고 도처에서 변절의원 화형식이 벌어지기도 했다.

 
신민당이 삼선개헌안의 국회 통과를 강력하게 저지하고 나서자 

이효상 국회의장은 본회의 보고를 생략한 채 8 월 9 일 개헌안을 정부로 직송하였고
박 정권은 국무회의에서 전격적으로 의결하여 공고해 버렸다.

그리고는 삼선개헌 반대운동을 저지하고 탄압하는 내용을 포함한
국민투표법안을 8 월 30 일 기습적으로 통과시켰다.


▲ 3선개헌안을 변칙통과시키고 국회별관을 도망치듯 빠져나가는 여권 의원들


새 학기가 들어 서기 직전 공안 기관에서는 시위 주동 학생들을 대대적으로 검거하고
수백 여 명을 강제로 군에 입대시켰다.

그리고 9 월 14 일 일요일 새벽 공화당 의원들이 야음을 틈타면서 삼삼오오 국회 제 3 별관에 모여
개헌안을 단독 날치기로 통과시켰다.

이런 형국이었던만큼 가을 학기에 접어 들자마자
학생들의 시위는 더욱 고조되면서 전국적으로 번져 나갔다.

나는 지명 수배로 피신하고 있던 중에도 기독학생회 회원들과 계속 모임을 갖고
삼선개악 반대투쟁을 적극 전개해 나가기로 결의하는 한편 연세대학교 학생 시위에도 직접 가담하였다.


9월 3일 4일 5일에는 연세대 학생 1천 5백 여 명을 비롯,

고려대, 서울공대, 성균관대, 그리고 대전대와 영남대 계명대 부산법대, 전남대 의대 등 전국에 걸쳐 학생시위가 벌어졌다.


9월 11일 전국의 38개 대학이 무기휴교 중이었지만 개헌 반대는 시위의 무풍지대였던 여자대학으로까지 번졌다.

이화여대생 4천 여 명은 검은치마와 흰 웃도리로 복장을 통일하고 성토대회를 열기도 했다.

같은 날 숙명여대생 1천 여 명이 3선개헌반대 결의대회를 열었다.


9월 14일 개헌안이 기습적으로 통과되면서 각 대학에서는 이를 규탄하는 집회가 연일 계속되었다.

9월 15일에는 대학 뿐만 아니라 경기고등학교 등 일부 고등학교에서도 시위가 벌어졌다.


이러한 와중에서 나는 수배된 지 2 개월 여 만인 1969 년 9 월 21 일
오산 고향집에 잠깐 들렀다가 잠복 중이던 서대문 경찰서 정보과 형사대에 체포되었다.


당시 연행되어 조사받은 일은 지금까지도 경찰 기록으로 남아 있다.
난생 처음으로 경찰서에 끌려가 우중충하고 너저분하기 짝이없는 보호실에서
무슨 파렴치하거나 흉악한 죄를 짓고 들어 온 듯한 사람들 십 여 명과 함께 쌀쌀한 밤을 지새우는 동안 내내
나는 그야말로 참담하기 이를데 없는 심경에 젖어 있었다.



그 때 30 대 쯤으로 보이는 분이 내 곁에 바싹 붙어 앉아 정성과 열정을 기울여가며 내게 들려 준 이야기 가운데
내가 평생동안 잊지 않고 귀감으로 삼고 있는 대목이 있다.

그 분의 말인즉슨 자기도 연세대를 나왔고 학교 다닐 적에 학생 운동에도 열심히 가담했는데
졸업 후 누군가와 사업을 함께하다가 동업자가 부도를 내는 바람에 자기가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들어 오게 되었다면서
학교 동문 선배 입장에서 인생을 살아가는데 자기처럼 실패하지 않고 성공할 수 있는 비결을 내게 알려 주겠노라고 했다.

나는 그 분이 실제로 연세대를 나온 선배인지 아닌지 억울한 누명을 쓰고 잡혀 들어 와 있는 건지 아닌지
하는 등등의 내용에 관심이나 호기심을 갖고 있을 분위기도 아니고 그런 이야기를 귀담아 들을 심경도 아니었다.

하지만 내 곁에 바짝 붙어 앉아 간절하고도 진지한 표정으로 열변을 토하는 그 분의 말을
못들은체 외면만 하고 있거나 매정하게 거절할 주변머리도 없는 나로서는 그냥저냥 조용히 듣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 분은 내게 성공의 비결은 빨리 포기하는 데 있다고 했다.
경제가 안 좋고 사정이 안 좋아 질 때, 사업이 잘 안 되고 점점 어려워져 갈 때
자기도 일찌기 정리하고 포기했더라면 이렇게까지 크게 망하지 않고 충분히 해결할 수 있었다고 했다.

사업에 집착을 하고 어떻게 해서든지 버티고 일어서야 한다는 욕심이
결국은 사업을 돌이키기 어려운 지경으로 몰고 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란 말이 있지만 포기야말로 성공의 아버지라고 했다.
사업에서나 인생에서 집착을 버리고 포기할 줄 알아야
결국은 성공할 수 있다고 그는 내게 강조해 마지않았다.

그 당시 나는 이 대목에서 생생하고도 신선한 느낌과 감동을 받았던 것 같다.

그 후로 나는 그야말로 파란만장한 인생의 길을 걸으면서 그 어떤 지식이나 신념에서보다도
바로 이 대목에서 깨우침과 위안을 얻으면서 내 자신을 지켜 온 바가 적지 않았다.

죽음보다 더 한 공포 분위기에서 고문을 당할 때
나는 그 때 그 자리에서 내 자신이 비굴해지지 않도록
비굴하기보다는 차라리 내 생명을 기꺼이 포기할 수 있도록
내가 섬기는 하느님께 기도하면서 의연하게 내 자신을 지킬 수 있었다.

감옥에서 사색하고 명상 훈련을 하는 과정에서 나는 인도 철학이나 불교에서 말하는 선(禪)의 세계
무심(無心) 무아(無我)의 경지야말로 바로 자기의 마음을 버리고 자기를 버리는 세계
즉 집착하지 않고 포기하는 훈련에 다름아니라는 깨달음을 얻기도 했다.


창세기 43 : 13 "네 아우도 데리고 떠나 다시 그 사람에게로 가라"

야곱은 이미 죽은 줄로 아는 사랑하는 아들 요셉과 요셉의 동생 베냐민을 떠나보내야 했다.


야곱은 그렇지 않아도 욕심이 많았던 터라

아들을 포기하는 것은 그에게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다.


이와같은 일은 할아버지 아브라함에게도 있었던 일이다.

100세에 얻은 아들을 포기하는 일이었다.

제단에 올려졌던 이삭은 이미 생명마저 포기했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포기하면 새로운 소망이, 떠나면 더 좋은 곳에 이르도록 인도하시니 말이다.

서대문 경찰서에서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조사를 받던 나는
당시 학생처장 이근식 교수님이 경찰서로 찾아오셔서 

간곡한 부탁과 보증으로  군에 입대할 것을 약속하고 불구속 입건 처리로 풀려났다.

당시 정법대 학생회장이던 노길남과 함께...

 

1 부 / 2. 운전교육대에서


그 후 1970년 11월
나는 논산 훈련소에 훈련병으로 입소했다.



논산 훈련소 여러 연대 가운데서도
가장 춥고 배고프고 고달프다던 30연대에서 훈련을 마치고
나는 가평 1군단 운전교육대에서 운전 교육을 받게 되었다.

그 당시에는 대학을 다니다 입대한 이가
한 내무반에서 4~5 명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저런 이유에서였는지
나는 교육생 구대에서 학생장을 맡게 되었다.

학생장은 함께 교육 받는 교육생들을
자치적으로 지도하고 통솔하는 것이었지만
그보다는 같은 동료들을 강요하고 협박해서
돈을 뜯어다가 고참병인 구대장에게 바쳐야 하는
악역을 맡아야 했다.

처음에 한 두 번 시도는 해 보았지만
나는 양심이나 이성으로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었다.

우선 내가 가지고 있던 돈을 다 털어서 바치고 나니까
나에게는 매일 무서운 매질이 퍼부어졌다.

그때 어금니가 부서진 것을 나는 어디다 하소연도 못 하고
평생을 안고 살아야 했다.

설상가상으로 내가 학생장으로 있는 구대에서
휴식 시간 중 교육생 가운데 한 명이
탈영하는 사건이 벌여졌다.

부대 전체가 발칵 뒤집혔다.
부대장을 비롯한 모든 간부들이 긴급 소집되고
모든 병력을 동원하여 인근일대를
샅샅이 수색하는 작전에 돌입했다.



탈영한 교육병은 제주도 출신이었다.
그는 군에 입대하기 전에는
육지에 발을 들여 놓은 적이 없었다고 했다.

난생 처음으로 기차라는 것을 실제로 구경하고
훈련소에서 전방 운전교육대로 이송될 때 비로소
직접 타 보았다는 순박하기 이를 데 없는 사람이었다.

가정 형편과 사정은 어떠했을지 모르겠지만
드넓은 바다와 높게 치솟은 한라산 자락
평온하기 그지없는 아름다운 섬에서
대자연과 더불어 마음껏 숨쉬고 자랐을 그가

군복을 입고 군모를 쓰고
엄격한 규율에 따라 제식 훈련을 하고
사격 연습을 하는 모습은 아무래도 어울리지 않을 뿐더러
적응하기도 몹시 힘들었을 것이었다.

더우기 낯설고 물설은 전방에 갇혀서
협박당하고 기합받아가며 극심한 훈련을 견디어 내기란
그야말로 평온한 천국에서 생활하다가
지옥의 나락으로 떨어져 버린 것같은 심사였을 것이었다.

그의 탈영 사실을
나는 불과 15 분 여 만에 확인해서 보고했다.

그리고 CP라고 불리는 부대 본부로 가서
일어난 정황을 자세히 보고했다.

나는 그 당시 계급이 상병인 구대장에게
온갖 협박과 강요와 구타를 당하면서
그야말로 견디기 힘들만큼 주눅들어 있던 참이었다.

그런데 내가 학생장으로 있는 구대에서 탈영병이 발생했고
이제까지 얼굴도 보지 못한 부대장에게 불려가게까지 되었으니
나는 이제 초죽음을 면치 못하게 되나보다 하는 불안과 두려움으로
온 몸이 떨려 왔다.

야전 잠바 양쪽 어깨와 군모에
대위 계급장을 단 하늘같은 부대장은
지휘봉을 든 채 열중 쉬엇 자세로 꼿꼿하게 서 있었다.

부대장은 내게 탈영 전후의 정황을 보고받고
몇몇 사실을 확인한 다음
탈영 사건 후 내가 어떻게 조치했는가를 물어 왔다.

그리고는 출신 학교 등 나의 신상에 대한 일까지
이것저것 심문하듯 물어 왔다.

나는 두려움에 떨면서 부대장이 묻는 말에 대답했다.
한동안 침묵이 흐르고 하늘같은 부대장이 내 앞으로 다가왔다.

나는 모든 신경세포가 바짝 긴장되는 것을 온몸으로 느끼면서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부대장은 내 어깨를 툭툭 두드리더니

"신속하게 확인하고 보고해서 다행이네...
멀리 도망가지 못했을테니까 곧 잡을 수 있을꺼네..."

하면서 격려를 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순간 갑자기 긴장이 풀리면서 어안이벙벙했다.
중대장은 입술을 내 귀 가까이에 대고
작은 소리로 내게 속삭였다.

"나도 3년 전에 연세대학교를 졸업했네...
정법대 학생회장으로 활동했었지...
애로 사항이 있나? 있으면 뭐든 얘기해 보게"

그 때 나에게 가장 절실한 애로 사항은
학생장의 직분에서 벗어나는 일이었다.

"저...... 부탁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구대장님을 통해서 드릴 수 있도록 해 주십시요..."

"알았네..."


탈영병은 부대장의 말대로 3 시간 여 만에 붙잡혔다.
붙잡힌 탈영병은 두려움과 공포에 질려
마치 혼절해버린 사람 같았다.

부대장은 탈영병에게 어떠한 기합이나 구타도
일체 가하지 못하도록 모든 부대원들에게 명령을 했다.

특별히 나에게도 탈영병이 소위 '고문관'으로
따돌림당하지 않도록
한 내무반에서 각별하게 보살펴 줄 것을 당부했다.

그는 결국 우리와 함께 운전교육 전과정을 무사히 마치고
제대할 때까지 근무해야 할 부대로 무사히 배속되었다.

나는 학생장의 직분을 다른 교육생에게 물려 줄 수 있었고
오랜 관행으로 이어져 내려온 범칙과 비리도 어느정도 시정되었다.

교육 훈련을 마치고 중앙선 지평역 옆 1군 50병기대대 수송부로 배치되어 복무 중이던

1971 년 개악된 헌법으로 치러지던 대통령 선거에서 난생 처음으로 투표권을 행사하게 된 나는
감시의 눈길도 아랑곳없이 당당하게 야당 후보에 기표했다.


▲ 중앙선 지평역 옆 1군 50병기대대 연병장에서


▲ 50병기대대 수송부에서

도대체가 헌법을 자기 권력 야욕의 도구로 일삼는 박정희 후보를
자유로운 형편에서 편안한 마음으로
부담없이 찍는 사람들의 심사는 뭘까 하고 생각하면서......



 

제 1 부 / 3. 다가오는 운명의 곡절


1972년 4 월 나는 제대하자마자 연세대에 복학했다.
함께 입학한 동기들은 4 학년이거나
아직 군 복무 중에 있었다.

경기도 오산에서 서울까지 기차로 통학하고 있던 나는
후배들과 한 반에서 공부해야 하는 처지였던만큼
학업이 뒤쳐지지 않을까 저으기 걱정스러웠다.

그러니만큼 무엇보다도 학업에 열심이었다.
아마 고등학교 적 대학 입시 준비를 하던 때 만큼이나
긴장하고 열심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당시의 정치 사회적 상황은
내가 학업에만 열중하고 있도록 놓아 두지 않았다.

국내는 물론이거니와 국제적으로도
상당한 부담을 감수하면서까지 무리하게 개헌을 하고
뒤이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부정선거를 자행하면서
목적한 바대로 마지막 임기 3선에 당선된 박 대통령은
취임하고 보니까 한참 남아 있는 4년 임기조차도
도무지 성에 차지 않았던가 보다.

해가 한 번 바뀌었을 뿐 임기도 한참을 남겨 둔 상태에서
이번에는 아예 원없이 영구 집권할 요량을 부려 댔다.

그 해 10월 17일 느닷없이 비상계엄령을 발동하고
'10월 유신'을 선포했다.


우리 백성이 조선조 말엽이나
일제 시대에 들어 보던 말이다.

한글로 국어를 삼은 이래 해방된 조국에서는
금시초문이던 말이다.

정확하게는 1867년 우리나라로는 고종 황제 적에
일본의 메이지(明治) 천황이 분립된 권력을 완전히 빼앗아
왕권을 복고시키고 개혁을 단행해서 새롭게 뜯어고쳤다는
'메이지 유신(維新)'을 본받자는 거였다.

일본이 유신을 단행했기 때문에
우리 땅 한반도를 정복할 수 있었고
만주국을 건설했으며
나아가 대동아 공영권을 구축할 수 있었다던
그 100 여 년 전 일본의 원대한 정신과 기상을
우리가 거울삼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국회를 해산하고 헌법을 정지시켰다.
유신 헌법을 공고했다.


당시 국회의사당에 진주한 계엄군 ( 현재 서울시 의회 건물)

대통령 임기는 6년으로 하고
평생을 연임할 수 있도록 했다.

국회의원도 3분의 1은
대통령이 마음대로 골라서 지명하게 했다.

통일주체국민회의라는 꼭둑각시를 만들어서
대통령 후보도 아무나 나서지 못하게 했다.
대통령은 꼭둑각시 대의원들이
체육관에 모여 선출하게 했다.

유신 헌법을 통과시키기 위해서 할 수 없이
국민 투표를 통해 찬반을 묻겠지만
모든 국민은 찬성한다거나 반대한다는 의사를
방송이나 언론은 물론 타인에게 표시할 수 없도록 했다.

그러면서 유신 헌법을 적극 찬성해서
통과시켜야 한다는 선전만이
방송이나 언론, 공공기관 단체를 통해
온통 난무하게 했다.

10월 유신을 찬성하지 않으면
사상이 의심스럽고 불순분자이고
북괴를 이롭게 하는 반국가적이고
빨갱이고 그랬다.

'10월 유신' 비상계엄령 치하에서
온 나라 백성은 눈과 귀와 입을 틀어막힌 채
공포와 두려움으로 주눅들어 있었다.




그 때 민주주의의 죽음과 장례식으로 표현되는
그 숨막히던 절망과 공포 속에서
나는 남은 대학 생활과 나의 전체 운명이
순탄치 않은 곡절을 겪게 되라라고 예감했다.

외국으로 떠나버리기라도 했으면 했다.
그것도 최소한 동의하지 않는 침묵적 저항일 것 같았다.
실제로 그런 이들이 있었다.

마음을 가다듬었다.
양심을 지켜야 했다.
두려움을 떨쳐야 했다.
다가오는 운명의 곡절과 고통을 이겨내야 했다.

나는 용기를 내어 함석헌 선생을 찾아 뵙고
고민을 말씀드렸다.

그 당시 함석헌 선생은
정신적 지성과 양심적 행동을 겸비하신 상징으로
우리 백성의 가슴 속에 자리하고 있었다.

나 역시 마음 속으로 늘 존경해 마지않던 터였다.
내가 함석헌 선생님의 함자를 기억하기는
초등학교 5 학년 경인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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