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부 / 4. 하얀 얼굴 하얀 장발머리에 하얀 긴 수염


읍내에 장이 서는 날이면 얼마 전부터인가
싸전마당 한복판에 높은 연단이 세워지고
전봇대마다 확성기가 매달려져 있었다.

"이승만 박사..." 운운
"이기붕 선생..." 운운 하던 소리가
장꾼들의 흥정을 방해하면서
귀청을 울리고 있던 적이었다.

지낼만한 이웃 어른들 중에는
자유당이라고 적힌 완장을 팔뚝에 걸치고
장꾼들을 불러 모으는 이도 있었다.

정 부통령 선거를 이틀 앞둔 1960 년 3 월 13 일
오산 장날에 나는 희안한 행렬 끄트머리를
또래들과 더불어 신명나게 따라다녔다.

낯익은 동네 형들이 앞장을 서서
검은 교복으로 우글거리는 학생들을 이끌고 있었다.

"부정 선거..."
"공명 선거..." ... 등
상기된 모습으로 구호를 외치며 장바닥을 휩쓸고 다녔다.

장꾼들도 행렬 가장자리에서 웅성거리며 구경하고 있었다.
더러는 손벽을 치는 이들도 있었다.

선생인지 면사무소 직원인지 순사인지 싶은 어른들이
행렬 속으로 뛰어 들어 학생들을 붙잡고 끌어내고 하였다.

한참을 그러더니 행렬은 점점 흩어져 갔다.
동네 어른들 중에는

"제 애비는 자유당 완장차고 유세하고 다니는데...
자식 놈이 제 애비보다 백 번 낫구먼..."

하며 대견해 마지않는 이들도 있었다.
1960년 3. 15 부정선거를 이틀 앞두고 있었던
오산중고등학교 학생 가두 시위는
마산과 대구에 이어 전국에서 세 번째로
더우기 3월 15일 이전에 일어난 역사적인 거사로
4. 19 혁명사는 기록하고 있다.

저녁나절 파장될 무렵 쯤 되자 한 사람은 리어카 위에서
양쪽으로 확성기를 단 나무사다리를 어깨에 짊어지고
다른 한 사람은 끌고 또 다른 한 사람은 마이크를 잡고

"조병옥 박사..."
"장 면 박사..." 운운하며 세 사람이서
잔뜩 상기된 모습으로 유세하고 다녔다.

이런 분위기 적을 전후로
경기도 오산 시골 구석 씨알에게까지 퍼져 오가던
함석헌 선생의 담대한 필력에 관한 이야기들과
사설만큼씩한 분량으로 신문지상에 여러 날 연재되면서
글머리 밑에 씌어진 "함석헌"이라는 친필 함자가
초등학교 5 학년에 지나지 않던 나의 머리 속에
기억으로 남아 있었던 것이었다.

내가 함 선생님을 직접 뵙기로는
연세대에 입학하고서다.

연세대 기독학생회에서 함 선생님을 연사로 모신
강연회가 있었다.

강연장에 들어 선 나는
하얀 얼굴 하얀 장발머리에 하얀 긴 수염
거기에다 하얀 한복을 단정하게 차리고서
연단 위에 곱상히 서 계신 함 선생님의 모습이
전혀 낯설어 보이지 않았다.

"내가 좀 일찍 오게 돼서...
이 학교 교정을 한번 둘러 보았소...
참 크고 훌륭해. 좋은 교정이요.
아름다운 꽃도 많고 나무들도 좋고...
한참을 이런 생각 저런 생각 하면서 봤어...
그런데 젊은 학생들이 왜들 그 모양이야 ! ! !"

청중들이 모여들면서부터 자리를 마련한 학생들은
한창 부산하게 움직거리며 애를 태우게 된다.

한 5 분에서 10 분 가량을 여유로 남기고
맞춤하게 도착해서 좋을 함 선생님은
그 날 강연 시간보다 무려 2 시간 가량을
미리 도착하셨다는 것이다.

강연장에 둘러 보니 청중은 고사하고
준비하는 학생도 하나 없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교정을 이리저리 둘러 보았단다.

그런데 제 나라가 어찌 되어 가는 판국인지도 모르고
배우는 학생들 머리 속에
'생각'이란 게 도무지 없다는 것이다.

젊은이는 쉬 늙어 버릴 사람이고
배움은 이루기가 힘든 것이어서
한시도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되는데
봄날 날씨 좋다고 교정에 앉아 정신 못 차리고
단꿈만 꾸다가는 마지막에 가서
제 망하고 나라 망한다는 것이었다.

"... 이 사람들이 도대체 나라를
어디로 끌고 갈려고 이러는 게요?...
도적질한 죄수한테서나 받아 두는 지문을
선량하고 착한 백성들한테
뭣하러 몽땅 찍어 둘려고 그러는 게야!!! ...
이 백성들이 무슨 죄가 있어서 그래!..."

정치라는 건 본래 더러운 것이라 했다.
정치하는 사람들은 모두 도둑이라는 것이다.

주민증을 바꾸는 속셈도 필경
도둑의 심보에서 나온 것이라 했다.



훌륭했을 법한 가문에서 남달리 귀하게 자라신 교수님들,
살기 좋은 외국에서 많은 학문을 쌓고 돌아오신 교수님들,
제 나라에서는 내놓고 자랑해도
뒤질데 없이 존경받을 체면에도 불구학고
앞에 나서거나 크게 주장하는 법 없는 교수님들,
조용한 목소리, 겸손한 표정으로
선진국 이론이나 엮어 전수하는 점잖고 으젓한 교수님들...

이들에 대한 인격적 감상에 젖어 있던 나는
그럴 법한 부류의 상징이어서 마땅할 함 선생님의 첫 모습에서
적지아니 혼돈을 갖게 되었다.

고작해서 한 발자국도 안 되는 탁상과 칠판 사이에 끼어
한 두 시간이라야 손가락으로 세기에 족할만큼
개념적인 어원만을 간단히 메모하는 것 외에
탁상 위에 펼쳐 있는 노우트를 보기 위해서
손에 쥔 안경이 눈가로 잠깐 옮겨지는 습관을 제하고 나면
거의 구두 밑굽만 떼었다 놓는 정도로 마감되는
조심스런 자태가 전혀 아니었다.

이런저런 이론들을 엮어서
역사적인 맥락을 깔끔하게 꿰어 내고
반론을 한다거나 재해석하는 따위로
논리정연한 것도 아니었다.

그리고는 도대체가
음성이 조용한 것도 아니었다.

 

 

 

1 부 / 5. 봉원산거


처음의 만남이 이렇듯 심상치 않은 인연이었던가?...

 

나는 유신 계엄이 선포되고 대학은 휴교를 하고
정국은 절망과 공포로 주눅들면서 쥐죽은 듯 고요하던 때에
함석헌 선생님이라면 나만큼이나 아니 나보다도 더
치떨리는 심정으로 몸서리를 치고 계실 것만 같았다.

 

함 선생님은 우리 일행을 퍽 자상하게 맞아 주셨다.
뜻밖에도 신촌 봉원동 산거에 조용히 모여서
공부할 수 있는 장소를 주선해 주셨다.

 

우선 연세대에서 뜻을 같이할 학생들을 찾았다.
서울대, 고려대, 이화여대, 한국신학대 학생들도 함께했다.

 

'간디사상연구모임'을 만들었다.

봉원산거에서 매주 화요일 저녁
모이는 차례로 조용히 가부좌를 하고
턱을 15 도 쯤 위로 치킨다.

 

눈을 감고 고요히 명상에 잠긴다.

한 소리를 만나 귀속에 담고
명동(鳴動) 깊숙히 파묻히기도 하고
한 생각을 만나 머리에 이고
돌이킬 수 없는 미로(迷路)에 빠지기도 한다.

 

얼추 모였다 싶으면
적당한 헛기침 소리에 맞춰 자리를 가다듬는다.

 

간디 자서전 (Gandhi's Autobiography; The Story of My Experiments wiht Truth)
을 펴서 차례지어 돌아 읽고 뜻을 푼다.

 

옛적부터 오랜 세월 이 땅의 서원 분위기가
바로 이러했을 것이었다.

 

공부를 시작하기 전 모이는 차례로
조용히 무릎을 꿇고 앉아
턱을 15 도 쯤 아래로 떨구고 있을 것이었고

 

스승은 표정을 삭이고 비스듬히 앉아 장죽대를 빨면서
모여드는 제자들을 맞이하고 있을 것이었다.

 

고금에서 동서에 이르는 함 선생님의 말씀이
한 주일 동안에 생긴 일들과 어우러지고
간디의 삶과 이어져서 가이없이 펼쳐진다.

 

수줍은 미소와 겸양어린 표정으로
들릴듯 말듯 더듬으며 시작해서
차츰차츰 미소가 사라지고 표정이 굳어진다.

 

더듬던 '말씀'이 서둘러 지고 또렷해 진다.
안색이 변하고 눈에는 핏발이 선다.
손이 오르내리고 몸이 움직인다.

 

혈색이 벌겋게 물들어지고 감정이 북받쳐 오른다.
그리고는 온 몸을 치흔들어 분노하며 외친다.
내키는 대로, 내키는 그대로를 '말씀'으로 쏟아 놓는다.

 

다시 수줍고 겸양어린 모습으로 되돌아
고금에서 동서에 이르는 억 겹 올에서 한 가닥 두 가닥
섬세한 솜씨로 뽑아 내어 이리저리 휘젓다가 어느새...

 

둘러 앉은 젊은이들은 올마디를 좇아 겨를없이 헤맨다.
휘저이면서 이리저리 떠 돈다.

 

한참을 지나서야 동(東)으로
또 한참을 지나서야 (西)로 옛날로...
제 자리로...
염주처럼 꿰어진다.

 

이런 모양으로 한 해 남짓을 어울려 공부하다가
이듬해 소위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되어
우리는 대부분 구속되거나 지명수배를 당했다.

 

그 후 1975년에 다시 모임을 갖고
인도 경전 바가받기타(Bhagavadgita)를 공부하면서
1970년대 후반까지 모임을 계속해 나갔다.

 

당시 모임을 갖고 함께 어울려 공부한 이들로는
남학생으로 강경헌(태학관 관장) 강용현(판사) 
김형기(경주 중앙교회 목사)
박경수(한국공항관리공단) 박재순(씨알사상연구회 회장)
부길만(동원대 교수) 신대균(사회운동)
이도성(동아일보 편집부국장) 이원희(목사)
임지순(서울대 물리학과 교수) 임유식(사업)
조성완(재미 목사) 허우성(경희대 교수) 등등과

 

여학생으로 강인선(성공회대 교수)

김은희(전 조선일보 문화부)  유영림(목사)
전경림(성악가) 정진성(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등이 있다.


 참고 사진 : 1964년 봉원산거 퀘이커 모임집 광경




 

제 1 부 / 6. 1973년 가을



한편 나는 '한국을 새롭게'라는 슬로건 아래
정치적 민주화와 경제적 평등, 사회적 정의의 실현을
강령으로 내세운 기독학생회 운동에 참여했다.

 

당시에도 각 대학마다 총학생회가 있었지만
일반 학생들로부터 신뢰와 호응을 크게 받지는 못했다.

 

오히려 정보 기관이 깊숙이 개입되어 있어서
경계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유신 체제가 등장한 이후부터는 이러한 현상이 더욱 심해졌고
감시와 탄압이 극심해짐에따라 학생 운동의 지도부는
고도의 자기 희생을 결단하지 않으면 진실을 외치기가 매우 힘든 시대였다.

 

학생 운동은 주로 서울대와 연세대, 고려대를 비롯해서
경북대, 부산대, 전남대 등 몇몇 대학이 주축을 이루었다.

 

이들 대학에서 동아리 활동으로 명맥을 이어오던 모임이
학생 운동의 지도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따라서 전국적인 학생 운동의 연계는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다만 각 대학마다 전통과 맥을 가지고 유지되고 있는 학생 서클의 지도부들끼리
간헐적으로 연대하여 대응해 나가는 수준이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다른 서클에 비해 상대적인 보호와 혜택을 받으면서
전국적으로 가장 많은 대학에 연합 조직을 갖고 있는 단체가
바로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이었다.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은 이 땅에 기독교가 전래된 이래 조직된
YMCA와 YWCA, 그리고 KSCM이라는 기독교 학생 단체를 모두 통합하여

1968년 연맹체로 구성한 대표적 기독 학생 단체이다.

 

당시 전국에 걸쳐 어지간한 대학에는
거의 뿌리를 두고 있는 기독학생회(SCA, SCM 등)의 연합 조직인 것이다.
 
KSCF는 서울 지구, 영남 지구, 호남 지구 등
전국을 3개 지구로 나누어 활동하고 있었는데
나는 그 가운데 서울과 경기, 인천, 충청도와 강원도를 포함하는
서울지구연합회장으로 선출되어 활동했다.

 

유신 정권이 들어서자마자 3 개월여 만인 1973년 봄
남산 부활절 예배 사건으로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KSCF) 임원 5명이
보안사 대공분실에 연행되어 갖은 고초를 겪은 끝에
25일 간의 구류처분을 받았다.

 

이 사건으로 박형규 권호경 목사 등 4 명은
국가내란예비음모 혐의로 구속되었다.

 

그해 10월 2일에는 서울 문리대 학생들이
풍문으로만 나돌던 김대중 선생 납치 사건의 진상을 밝힐 것과
유신헌법을 철폐하고 중앙정보부를 해체할 것 등을 주장하는 선언문을 낭독하고

2시간 여 동안 시위를 벌였다.

 

그러자 출동한 경찰이 서울 문리대 교정에 난입하여
시위 학생 180 여 명을 강제 연행해서 그 중 20명을 구속하고
57 명을 즉심에 회부하여 구류 25 일에 처했다.

         ▲ 10. 2 서울문리대 학생 선언문

 

서울대 10.2 데모를 주동한 강영원 나병식 정문화 황인성 등은
KSCF의 학사단 운동 출신 임원들이었고

이들 이외에도 대부분의 서울대 소속 KSCF 회원들이

구속되거나 구류 처분 또는 지명 수배를 당했다.

 

유신 초기 공포와 절망으로 주눅든 분위기 속에서 일어난
이와 같은 일련의 사건들로 이 땅의 비판적 지식인 운동과 학생 운동,
그리고 기독교의 사회 참여 운동은
서로 연대하고 결합할 필요를 더욱 절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 10.2시위로 서울문리대 교내로 들어온 경찰들에게 마구잡이 연행되는 학생들

 

서울대 10.2 데모 사건은
유신 계엄령 이후 침묵하고 있던 당시의 전국 대학가에 큰 충격을 안겨 주었다.

 

이를 시발로해서 구속 학생에 대한 석방을 요구하는 시위가
전국적으로 번져 나갔다.

 

10월 16일 서울법대 최종길 교수가 친동생과 함께

중앙정보부에 자진 출두하여 조사를 받던 중

조사 3일 만인 10월 19일 새벽에 중정 건물 앞에서

담당수사관에 의해 사체로 발견되었다.


다음날 중앙정보부는 최종길 교수가 구속되어 조사를 받던 중

간첩혐의를 자백한 뒤 7층 심문실에서 창밖으로 투신 자살했다고 발표했다.


25일 중앙정보부는 유럽을 거점으로 하는 공무원과 교수 등

54명의 유럽 거점 대규모 간첩단을 적발하였다고 발표하면서

최종길 교수도 이 간첩단에 포함시켰다.


이는 고조되고 있는 학생운동의 분위기를

북한과 연계된 반국가적 행위로 몰아가려는

박정권의 상투적인 수법에서 나온 것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연세대 기독학생회 이재웅(72학번, 정외과) 등과 함께 시위와 철야 농성을 이끌었다.
서울 시내 주요 대학 학생들과의 모임도 계속했다.


11월 27일 연세대 학생시위의 열기는 대단했다.

나는 학생회관 1층 로비로 학생들을 이끌고 밤샘 농성에 돌입할 것을 제안했다.


더불어 당시에 이미 신촌의 명배우로 유명했던 명계남을 만나서

철야 농성에 사회를 맡아 이끌어 줄 것을 부탁했다.


학생회관 로비에는 400 여 명의 학생들이 꽉 들이차 있었다.

6시 경 초저녁에 시작된 농성의 열기 또한 식을 줄 몰랐다.


통행금지가 있던 시절이어서 밤 12시를 넘기는 것이

당면한 문제가 되었다.


하지만 재치가 넘치고 유려한 명계남의 사회는

지루하지 않고 시간 가는 줄 모르게 계속되었다.

새벽 5시까지 400 여 명의 학생들이 철야농성을 계속했다.


나는 명계남에게 약간의 도피 자금을 쥐어 주고

수사기관에 검거되지 말고 잘 피해 있을 것을 부탁했다.


그날 이후로 나와 명계남은 수사기관의 수배를 받아야 했다.


▲ 가두로 진출한 학생 시위


구속 학생에 대한 석방 운동이 전국의 대학으로 번지고
정국이 어수선하게 돌아가자
유신정권은 모든 대학에 휴업할 것을 명하고
이어서 대학은 휴업과 함께 조기 방학으로 들어갔다.

 

한편 유신체체 이후 처음으로 서울 문리대에서 반대 시위가 벌어지고
전국의 대학이 데모로 소용돌이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일련의 사태를 신문과 방송에서 전혀 사실대로 보도를 못 하자
언론사 기자들은 언론자유수호선언을 발표하고
기자협회에서는 사실 보도를 다짐하는 결의문을 발표했다.

 

12월 7일 들어서면서 박 정권은 10월 2일부터 학원사태와 관련하여
구속된 학생들을 모두 석방하고 학사처벌을 백지화할 것을 지시했다.

지명수배 조치도 해제했다.

 

이 과정에서 나는 10월 12일과 11월 30일 두 차례에 걸쳐
서대문 경찰서에 연행되어 혹독한 심문과 함께 조사를 받고 나오기도 했다. 


그 후 나는 정보 기관에 요시찰자로 분류되고 감시의 대상이 되었다.
 

▲ 1973년 당시 서대문경찰서


 

1 부 / 7. 개헌청원 서명운동과 1974년 1월

 

1973년 12월 13일 김관석(NCC 총무), 김수환(추기경), 김홍일(전 신민당 당수),
백낙준(연세대 명예총장), 유진오(전 고려대 총장), 윤보선(전 대통령),
이병린(전 대한변협 회장), 이인(전 법 무장관), 이정규(전 성균관대 총장),
이희승(전 서울대 문리대 학장), 한경직 (목사), 함석헌(민수협), 김재준(민수협), 천관우(민수협)
등이 모여 시국간담회를 개최하고


“현 시국은 민주주의체제를 근본부터 제도적으로 회복하여
국민의 자유를 소생시키지 아니하고는 중대한 민족적 위기를 초래할 위험이 있으므로,
이에 대한 각하의 적절한 조처를 기대”하며,
이를 위해 국민 기본권 보장, 3권분립체제 재확립,
공명선거에 의한 평화적 정권교체의 길을 열 것 등을 요청하는 건의문을 발송했다.


12월 24일 시국간담회 참석자들이 중심이 되어 헌법개정청원 운동본부를 구성하고
서울 YMCA 2층에서 ‘개헌청원백만인서명운동’ 선언문을 발표했다.
 ‘개헌청원운동 취지문’은 이 운동을 주도한 장준하 선생이 낭독했다.


“오늘의 모든 사태는 궁극적으로 민주주의를 완전히 회복하는 문제로 귀착된다.

경제의 파탄, 민심의 혼란, 남북 긴장의 재현이란 상황 속에서

학원과 교회, 언론계와 가두에서 울부짖는 자유화의 요구 등

이 모든 것을 종합하면 오늘의 헌법 하에서는 살 수가 없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그러나 오늘의 헌법은 그 개정의 발의권이 사실상 대통령에게만 속해 있는 것이다.

이에 우리 국민은 이와 같이 헌법 개정 발의권으로부터의 소외를 극복하고

우리들의 천부의 권리를 제시하는 방법으로

대통령에게 현행 헌법의 개정을 요구하는 백만인청원운동을 전개하는 바이다.

이 운동은 우선 우리들 모두의 내 집안에서부터 시작하여

학원과 교회 그리고 각 직장과 가두에서 확대될 것이다.”


30인의 서명자 : 장준하(통일당 최고위원), 함석헌(종교인), 법정(불교인), 김동길(연 세대 교수), 김재준(전 한신대 학장),

유진오, 이희승, 김수환, 백낙준, 김관석, 안병무(한신대 교수), 천관우(전『동아일보』주필), 김지하, 지학순, 박두진(시인),

문동환(한신대 교수), 김정준(한신대 학장), 김찬국(연세대 신학대학장), 문상희(연세대 교수), 백기완(백범사상연구소장),

이병린, 계훈제(『씨을의 소리』편집인), 김홍일, 이인, 이상은(고려대 교수), 이호철(소설가), 이정규, 김윤수(이화여대 교수),
김숭경(의사), 홍남순


장준하 선생은 선언문 발표와 더불어 ‘개헌청원운동본부’가 발족되었음을 공포했다.


▲ 1973년 12월 24일 서울 YMCA 2층에서 "개헌청원 100만인 서명운동" 을 발표하는 장준하


12월 26일 밤, 국무총리 김종필이 라디오와 텔레비전에 나와

장장 1시간 40분에 걸쳐 ‘특별연설’을 했다.


유신체제에 대한 본질적 차원에서의 도전은

우리나라의 국가적 안전이 허락할 수 있는 자유의 한계선을 벗어난 행위라고 전제하고

세상을 시끄럽게 하거나 선동하거나 어지럽히는 행위는 다스리지 않을 수 없다고 경고하면서

개헌운동을 즉각 중지하지 않으면 강력히 처벌하겠다는 엄포가 주된 내용이었다.


사흘 뒤인 12월 29일에는 박정희가 직접 ‘특별담화’를 발표했다.


“그동안 나는 유신체제의 불가피성을 누누이 설명하고

절대로 경거망동이 있어는 안 되겠다는 점을 간곡히 호소한 바 있다.

... ... 이제라도 늦지 않으니 소위 헌법개정 백만인 청원운동을

즉각 중지할 것을 엄중히 경고해 두는 바이다.”


12월 26일부터 29일까지 KSCF에서는 광주에서 동계 전국 모임을 개최하고
박 정권의 독재와 독점 경제 정책을 규탄하는 한편
한국 교회가 회개하고 민주 사회를 건설하는 데 앞장서서 나서 줄 것을 요청하는

기독학생 선언문을 채택했다.

 

이처럼 대학이 방학으로 접어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심상치않은 정국 분위기는 전혀 사그러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한편으로 재야인사들과 시민들의 적극적인 동참에 힘입어

‘개헌 청원 서명’ 운동은 일파만파로 번져 나갔다.


이 운동이 시작된 지 8일 만인 1974년 1월 1일 서명자가 5만 명을 넘어섰고,

오랜 관습으로 자리잡아 온 신년 하례 인사 등을 통해서  

불과 10일 만인 1월 4일 개헌청원운동본부는 서명자 수가 30만 명을 돌파했다고 발표했다.


5일에는 민주통일당이 개헌청원운동의 적극적 참여를 정무위원회에서 의결했다.


1월 7일에는 이희승 · 백낙청 · 이호철 · 박태순 등 문학인 61명이

지지성명을 내고 서명운동에 동참했다.


광주 지역에서는 성직자 41명이

 자유민주체제로의 복귀를 주장하는 시국선언을 발표했다.


같은 날 공화당의 초대 총재이자 당 의장을 역임한 정구영이

전 사무총장 예춘호와 함께 공화당을 탈당하는 일이 벌어졌다.


정구영은 유신체제를 ‘삼권귀일(三權歸一)체제’로 평가하며

재야 인사들과 함께 행동하겠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이 소식을 들은 박정희는 격노한 채 어쩔 줄을 몰랐다.


“미래의 한국 문단과 사회에 새로운 풍토를 조성하기 위해 개헌 서명을 지지한다”고 하였다.
문인 및 지식인 61명이 서명한 성명을 발표했다. 이들은 성명에서


“대다수 동포들이 빈곤과 압제에 시달리며,
민족의 존망 자체가 위태로운 이 어려운 시기를 맞이하여
문학인들은 더 이상 침묵할 수 없다”며

“미래의 한국 문단과 사회에 새로운 풍토를 조성하기 위해 개헌 서명을 지지한다”고 하였다.


1월 8일, 제1야당인 신민당은 개헌을 위해 진력하겠다고 발표했다.


▲ 무장경찰에 둘러쌓여 "개헌만이 살 길이다" 고 외치는 신민당 의원들


개헌지지 열풍이 전국적으로 번져나가자,

위기감을 느낀 박정희는 마침내 사태를 진압할 초강수를 두었다.


1974 년 1월 8일 박 정권은 유신 헌법을 비방하고 반대하는 것은 물론
국민의 기본권인 헌법 개정을 발의 제안 청원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하고,

이를 어긴 자는 군법회의를 통해서 15년 이하의 징역형에 처한다는 내용으로 된
대통령 긴급조치 1호를 선포했다.

 


긴급조치 1호 주요내용은 다음과 같다.


1. 대한민국 헌법을 부정, 반대, 왜곡 또는 비방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한다.
2. 대한민국 헌법의 개정 또는 폐지를 주장, 발의, 제안, 또는 청원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한다.
3. 유언비어를 날조, 유포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한다.
4. 전 1,2,3호에서 금한 행위를 권유, 선동, 선전하거나 방송, 보도, 출판, 기타 방법으로
이를 타인에게 알리는 일체의 행위를 금한다.
5. 이 조치에 위반한 자와 이 조치를 비방한 자는 법원의 영장없이 체포, 구속 또는 압수수색하며
15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 이 경우에는 15년 이하의 자격정지를 병과할 수 있다.
6. 이 조치에 위반한 자와 이 조치를 위반한 자는 비상군법회의에서 심판, 처단한다.
7. 이 조치는 1974년 1월 8일 17시부터 시행한다.



그리고는 일주일 뒤 개헌청원서명운동을 주도한 장준하 백기완 선생을 전격 구속하고
속전속결로 진행된 군법회의 재판을 통해서 징역 15 년과 12 년을 각각 선고했다.


대통령긴급조치 1호 위반으로 군법회의 법정에서 재판을 받고 있는 장준하 선생과 백기완 선생

 

그 사흘 후에는 긴급조치를 반대한다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함께 구국기도회를 가진 개신교 전도사 이해학 김진홍 김경락 인명진 이규상 박윤수 등을
전격 구속하고 역시 같은 절차로 징역 15 년과 12 년씩을 선고했다.


다시 일주일 뒤에는 대학이 휴업과 조기 방학으로 이어지면서
수업 과정이 부족함에 따라 임시 개강을 할 수밖에 없었던 서울대 의과대학에서

개강 첫 날 유신 반대 시위를 벌이자 의대 본과생 김영선 이근후 김구상 등을 전격 구속하고
같은 절차로 각각 징역 7 년에서 5 년을 선고했다.

 

그 닷새 후에는 연세대 의과대학에서

같은 사정으로 개강하는 첫 날 유신 반대 집회를 벌이자
의대 본과생 고영하 황규천 이상철 문병수 김석경 김 향 서준규 등
7 명을 전격 구속하고 각각 징역 7 년에서 3 년까지 선고했다.

 

이렇듯 유신 정권은 전쟁 상황에서라야 취할 수 있으리라 여겨졌던 대통령 긴급조치를
민주인사와 종교인과 학생들을 대상으로 발동해서 마구잡이로 휘둘러댔다.

 

긴급조치 1호 위반으로 군사법정에서 재판을 받고 있는 장준하 백기완 선생과

연세대 의대 본과생 고영하 황규천 이상철 문병수 김석경 김 향 서준규


연세대 의과대학 학생 시위 사건은 내게 크나큰 충격을 안겨 주었다.

그날 이후 나는 구속되고 감옥 가는 일이 바로 내 앞으로 서서히 다가 오고 있구나 하고 확신했다.

 

마음 한 켠에서는 피할 수만 있다면 벗어 나고 싶은 생각도 간절했다.

잠을 못 이루고 날밤을 새운 적이 한 두 번 아니다.
어쩌다 새벽녘에 잠이 들더라도 악몽에 시달리다가 식은 땀을 흘리며 소스라쳐 깨어 나기도 했다.

 

춥고 긴긴 밤을 지새우며 드넓은 오산 운암뜰을 하염없이 걷기도 했다.

 무섭고 두려운 생각을 떨치느라 그야말로 심한 몸살을 앓아야 했다.

 

마음 속으로 다짐하고 결단을 내리느라
내가 섬기는 하느님께 눈물을 쏟으며 간절히 간구하기도 했다.

 

지금은 흘러간 과거 역사로 잊혀져 가는 시절...

그 때 그 시절 사회적 분위기를 김지하의 시 '1974 년 1 월'로 다시금 되새겨 본다.

 
 ◁ 1974 년 1 월 ▷ 
  
 1974 년 1 월을 죽음이라 부르자
 오후의 거리, 방송을 듣고 사라지던
 네 눈 속의 빛을 죽음이라 부르자
 
 좁고 추운 네 가슴에 얼어붙은 피가 터져
 따스하게 이제 막 흐르기 시작하던 그 시간
 다시 쳐 온 눈보라를 죽음이라 부르자

 

 모두들 끌려가고 서투른 너 홀로 뒤에 남긴 채
 먼 바다로 나만이 몸을 숨긴 날

 

 낯선 술집 벽 흐린 거울조각 속에서

 어두운 시대의 예리한 비수를  등에 꽃은

 초라한 한 사내의 겁먹은 얼굴

 그 지친 주름살을 죽음이라 부르자

 

 그토록 어렵게 사랑을 시작했던 날
 찬바람 속에 너의 손을 처음으로 잡았던 날

 

 두려움을 넘어
 너의 얼굴을 처음으로 처음으로 바라보던 날 그날

 그날 너와의 헤어짐을 죽음이라 부르자

 

 바람 찬 저 거리에도
 언젠가는 돌아올 봄날의 하늬 꽃샘을 뚫고 나올

 꽃들의 잎새들의 언젠가는 터져 나올 그 함성을
 못 믿는 이 마음을 죽음이라 부르자

 

 아니면 믿어 의심치 않기에 두려워하는 두려워하는
 저 모든 눈빛들을 죽음이라 부르자

 

 아아 1974 년 1 월의 죽음을 두고
 우리 그것을 배신이라 부르자

 

 온몸을 흔들어
 온몸을 흔들어
 거절하자

 

 네 손과 내 손에 남은 마지막
 따뜻한 땀방울의 기억이 식을 때까지

 

 (이상 '1974년 1월' 전문)

 

 

1 부 / 8. 1974년 4월 구속이 맺어 준 인연


당시의 상황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이 땅에 민주화를 이루어 내기 위한 열망은 식을 줄 모르고 오히려 열기를 더해 갔다.

2월에는 구속된 분들의 입장을 지지하고
석방을 요구하는 호소문을 전국 교회에 발송한 혐의로
권호경 김동완 목사와 이대 의과대학 본과에 재학 중이던 김매자
이대 대학원에 재학 중이던 이미경(현 국회의원) 차옥숭(교수)
그리고 김용상(목사) 박주환(목사) 박상희(목사) 등 8 명이 구속되고
같은 절차로 각각 징역 15년에서 3년까지 선고받았다.


이어 2월 25일 서울지검 공안부는 문인 간첩단 사건을 발표하고

이호철, 임헌영, 김우종, 장을병, 장병희 등을 간첩 혐의로 구속했다.



구속 당시에는 이호철과 임헌영에게 형법상 간첩죄가 적용되었으나,
1974년 2월 25일 구속·기소 당시에는 이 부분이 제외되었다.


같은 해 6월 28일에 있었던 1심공판에서 이호철과 임헌영에게 실형이 선고되었고,
10월 31일에 있었던 항소심 공판에서 이들에게 집행유예가 선고됨으로써 일단락되었다.

새학년 새학기가 시작되는 3월에 들어서자 대학은
대통령 긴급조치 1 호의 발동에도 아랑곳없어 했다.

한신대와 경북대 서강대 등에서
민주구국선언을 발표하는 학생 사건이 터져 나왔다.

정보 기관에서는 4월 3일을 기해
서울 시내에서 일제히 가두 시위를 계획하고 있다는 정보에 따라
3월 말 경부터 요시찰 학생들을 대대적으로 검거해 연행하기 시작했다.


1974년 4월 3일 박 정권은 학생 시위 주동자와 그 배후 세력들이
대한민국을 폭력 혁명으로 전복시키고
공산주의 정권을 수립하기 위해 일제히 궐기하려 했다면서
대통령 긴급조치 4호를 선포했다.



[대통령긴급조치 4호]


1. 전국민주청소년학생총연맹(민청한련)과 이에 관련되는 단체를 조직 하거나
또는 이에 가입하거나, 그 구성원과 회합, 또는 통신 기타 방법으로 연락하거나,
그 구성원의 잠복, 회합·연락 그밖의 활동을 위하여 장소·물건·금품 기타의 편의를 제공하거나,
기타 방법으로 단체나 구성원의 활동에 직접 또는 간접으로 관여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한다.


2. 단체나 그 구성원의 활동에 관한 문서, 도화·음반 기타 표현물을
출판·제작·소지·배포·전시 또는 판매 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한다.


3. 제1항, 제2항에서 금한 행위를 권유, 선동 또는 선전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한다.


4. 제1항, 제2항에서 금한 행위를 한 자는 1974년 4월 8일까지 그 행위내용 전부를

수사 정보기관에 출석하여 숨김없이 고지하여야 한다.


5. 학생의 정당한 이유없는 출석 수업 또는 시험의 거부...

학교 내외의 집회, 시위, 성토 농성 기타 일체의 개별적 집단적 행위를 금한다.


6. 이 조치에서 금한 행위를 권유, 선동 또는 선전하거나
방송·보도·출판 기타 방법으로 타인에게 알리는 일체의 행위를 금한다.


7. 문교부장관은 대통령긴급조치에 위반한 학생에 대한 퇴학 또는 정학의 처분이나
학생의 조직, 결사 기타 학생단체의 해산 또는 이 조치 위반자가 소속된 학교의 폐교처분을 할 수 있다.
학교의 폐교에 따르는 제반 조치는 따로 문교부장관이 정한다.


8. 제1항 내지 제6항에 위반한 자, 제7항에 의한 문교부장관의 처분에 위반한 자 및 이 조치를 비방한 자는
사형, 무기 또는 5년이하의 유기징역에 처한다. 유기징역에 처하는 경우에는 15년이하의 자격 정지를 병과할 수 있다.
제1항 내지 제3항, 제5항, 제6항 위반의 경우에는 미수에 그치거나 예비, 음모한 자도 처벌한다.


9. 이 조치에 위반한 자는 법관의 영장없이 체포, 구속, 압수, 수색하며 비상군법회의에서 심판 처단한다.


이 조치에 따르면 유신헌법과 긴급조치에 대해
비판적인 생각을 머리 속에 두고 있는 사람은 물론이거니와
그런 움직임 그런 모임 그런 사람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관계 당국에 신고하지 않은 사람까지
모두 5 년 이상 사형에 처하도록 되어 있었다.

온 국민을 상대로 선전포고하는 것에 다름아닐 뿐더러
참으로 천인공노할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조치로 말미암아 수 천 명이
쥐도새도 알게모르게 연행되어 고문당했다.

조직적인 기반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해 왔던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에서는 26 명이 구속되어 중형을 선고받았다.

한편 간디사상연구모임 회원 역시
대부분이 구속되거나 전국에 지명 수배되었다.

특히 함께 공부했던 서울대 김은희 김인성 정진성 등 여학생들도
봉원산거 모임집에서 등사기를 몰래 가져다가

민청학련 선언문을 필경하고 등사해서 운반 배포한 혐의로 구속되고

봉원산거 또한 샅샅히 수색당하는 난리가 벌어졌다.

윤보선 전 대통령과 장준하 선생 등 재야 정치 지도자와
박형규 목사와 가톨릭의 지학순 주교 등 성직자,
연세대 김찬국, 김동길 교수와 김지하 시인 등을 포함해서
종교인과 지식인, 청년 학생들이
그야말로 마구잡이로 연행되어 구속 기소되었다.

구속된 이들은 모두 남산 중앙정보부 6국과 서빙고 보안사 대공분실에서
무려 2 ~ 3 개월 동안 상상할 수 없는 고문과 조작 수사로 치를 떨어야 했다.

그리고는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 사건' 이라는 죄목으로 한두름에 엮어 졌다.


▲ 남산 예장자락에 있는 옛 중앙정보부. 앞에 보이는 낮은 건물이 중앙정보부 6국(학원수사담당) 건물이다.



나는 3 월 28 일 경기도 오산에서
서대문 경찰서 정보과 형사대에 검거되어
곧바로 중앙정보부 수사국으로 이첩되었다.

그당시 이화여대에서 학생 서클을 이끌고 있던
박혜숙이 나보다 먼저 검거되었다.

중앙정보부 6국으로 끌려간 박혜숙은 모진 협박과 공포 분위기에 빠져
누구로부터 지시를 받았느냐는 추궁에 견디다 못한 나머지
"최민화로부터였다"고 내 이름을 진술했단다.

나는 연세대. 이화여대. 서강대. 숙명여대. 홍익대 등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 서울지구와 인천지역 대학의 기독학생 지도부를

총괄하고 있었기 때문에 비단 박혜숙이 아니라도

누군가가 내 이름을 댈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녀가 나보다 먼저 검거되고 나로부터 지시 받았다는 진술을 했으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있던 나는 지시한 사실이 절대로 없노라고 계속 부인했다.

중앙정보부 지하실에서 협박과 고문을 당하던 나는

계속 마음 속으로 다짐하고 기도하기를
스승이나 여학생은 절대로 끌어들이지 않기로 작정했다.

나는 수사관에게 내가 군대까지 갔다 온 마당에
이처럼 엄혹하고 신변이 위험천만한 상황임을 모르는 바도 아닌데
어떻게 한창 발랄하고 나이 어린 여학생을 끌여 들여
사지로 몰아 넣는 짓꺼리를 할 수 있겠느냐면서
다만 여학생들은 우리가 구속되면
차후에 구속 인사들에 대한 석방 운동을 전개하기로 하고
이번 사건에서는 빠지기로 한만큼
이번 일을 의논하거나 도모한 사실이 없다고 극구 부인했다.

구속이 맺어 준 인연인가?...
비단 박혜숙이 아니었더라도 어쨋든 나는 이 땅에 사나이로 태어 나서
내가 고등학교 3 학년 때 쯤 중학교 2 학년밖에 안 되었을 천진한 여학생을

내 입으로 실토해서 물고 들어 갈 수는 결코 없는 일이라고 다짐했다.

그런 일로 말미암아 내가 핍박을 당하고 온갖 수모를 당해도
그것은 오히려 내 자신이 비굴하지 않고 한 여학생을 위해서나마 내가 떳떳하게
나의 명예를 지켜 내는 일일 꺼라는 의협심이 나를 감싸고 있었다.




1 부 / 9. 남산 지하실



중앙정보부에서 당시 가장 악명을 떨치던 6 국장 이용택이

순시 중 내 취조실에 들어와 철제 책상을 내리치면서

이 놈이 사실대로 자백할 때까지 혼좀 내 주라면서 고문을 지시하고 나갔다.


나는 곧바로 수사관 3명에 이끌려 문 밖으로 나갔다.

계단을 내려가 건물 쪽문을 열더니 건물 뒷편 지하 계단으로 내려갔다.


철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습기가 가득 차 있고 천장에는 형광등 불빛이 희미하게 비추고 있다.

하얀색으로 칠해진시멘트벽은 군데군데 누렇게 변색되어 우중충한 분위기다.


▲ 서울 중구 예장동 4-1번지 옛 중앙정보부 6국(학원수사 담당)의 지하 취조실


넓은 공간에 가구도 없고 캐비넷도 없이 그저 썰렁하다.

다만 철제 책상이 가운데 하나 덩그러니 있고 양쪽으로 의자가 놓여 있을 뿐이다.

안쪽으로 경찰서 유치장같은 철망 안에 역시 철제 책상과 앞뒤로 의자가 놓여 있다.


의자에 앉자 앞에 앉은 수사관이 조용히 묻는다.


"너 여기가 어딘 줄 알아?"

"... ..."


저들은 철제 책상을 꽈~앙 내리치더니

"야 임마~!! 너 여기가 어딘 줄 알아?" 하고 소리를 친다.

"... ... 지하실 같은데요~"


저들은 어이가 없다는 듯 허~어 하면서 서로 쓴웃음을 짓는다.


"여기까지 내려와서 조사받는 놈 치고 싸질러 놓고 다닌 죄 불지 않는 놈 없엄마~!!"

"조사하는 분들 힘들게 하지 말고... 서로 힘쓰게 하지 말고... 알았찌?"

"네~!!"


"우선 힘 안들이는 걸로 간단하게 주사나 한방 맞고 시작하자~"

하고는 앞에 앉은 수사관이 일어나 밖으로 나간다.


그러자 다른 수사관이 앞에 앉는다.

"주사를 맞는다고 별다른 부작용이 있는건 아닌데... 남성 역할에 쪼옴 지장이..."

하면서 걱정어린듯 표정을 짓는다.


영화에서나 볼듯한 으스스하고 살기도는 분위기에

난생처음으로 끌려와 고문을 당하는게 이런거로구나 생각하니

온 몸이 얼어붙는 느낌이다.


"너 정상복(목사, 당시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 간사)이 알지?"

"네~!! 압니다 !!!"

나도 모르게 기합이 잔뜩 들어있다.


"정상복 지금 어디에 있는지도 알지?"

"... 글쎄요. 모르겠습니다."


"얌마~!! 정상복이 어디에 있는지 네가 알고 있는 줄 우리가 뻔히 알고 있엄마~!!"

"솔직히 털어 놤마~!!"


"알고 있으면 솔직히 이실직고하겠는데... 정말 모릅니다." 


"야~ 임마! 정상복 지금 평양에 있엄마!!"

"평양에서 서울로 왔다갔다 하다가 지금 김일성 품에 있엄마~!!"

"너도 정상복하고 평양에 갔다 왔자넘마~!!


그제서야 나는 정신이 번뜩했다.

수사관은 안 되겠다 싶었던지 박혜숙과 대질 신문을 한다고 했다.

박혜숙은 이미 다 불었는데 아무 것도 아닌 것 가지고

이렇게 막무가내로 아니라고만 하니 자기만 윗사람에게 혼이 난다는 거였다.
박혜숙을 당장 데리고 오겠다고 했다.

그쯤 되어서야 나는
'아! 정말로 박혜숙이 먼저 잡혀 들어와서 진술을 했나 보구나'
하고 깨닫고는 이내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그러는데 내가 생각하기에도
평양 가서 김일성 만나는 걸 봤다고 진술한 것도 아니고
여기까지 온 마당에 별로 중요한 것 같지 않으니
사실이던 아니던 여부를 떠나서 내가 지시했다고 진술하겠습니다..."

나는 다섯 살이나 어린 후배인 박혜숙과 대면하게 되면
혜숙은 여학생의 몸으로 이런 공포 분위기를 감당하기도 힘들텐데
거기에다가 혹시라도 내 앞에서 배신자가 된 기분으로
더욱 비참한 분위기에 빠져 들게 되지나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오히려 혜숙이 안쓰러웠다.

이 사실에 대해 비밀을 유지하면서 절대로 없었던 일로 하자고 서로 다짐을 했지만
기왕에 상대방이 진술을 한 것이고 어차피 사실인바에야 대질 신문까지 해 가며
그녀 마음에 상처를 안겨 주기가 싫었다.


남산 지하실과 전생에 무슨 인연이 있던건지...

연행되어 오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수사할 장소가 모자랐던지

그 이튿날부터 나는 하루 24시간을 매일 지하실에서 조사를 받았다.


1975년 4월 3일 긴급조치 4호가 발동되던 날 저녁

나는 연행된지 6일만에 전격 구속되어 서대문구치소로 송치되었다.


연행되는 학생들이 차고 넘쳐서인지

다음날부터 나는 서빙고 보안사 대공분실로 거의 매일 출정 조사를 받았다.


나를 담당한 수사관은 알고 보니

함께 구속된 박형규 목사님의 사촌 동생이었다.

덕분이었는지 나는 비교적 여유있는 분위기에서

한달 여 동안 조사를 받을 수 있었다.


한국기독학생회 총연맹 소속으로 구속된 학생들과

연세대학교 소속으로 구속된 학생들은 대부분

보안사 대공분실에서 조사를 받았다.

훗날 박혜숙과 결혼하여 살면서도

나는 한동안 그 일을 이처럼 자세하게 말하거나 고백하지 못했다.
그렇지 않아도 나에 대한 부담이 있을텐데...


기껏해야 출소한 이후 만났을 때

긴급조치 4호 발동 이전에 연행되고 구속되어 내 죄명은 긴급조치 1호 뿐이었는데  
내가 혜숙에게 지시했다는 사실을 자백하지 않고 자수기간인 4월 8일까지 숨긴 죄로
긴급조치 4호와 국가내란예비음모 죄까지 뒤집어쓰게 됐다고
우스갯소리 삼아 언급하고 넘어간 정도다.

하지만 그녀는 이 일로 나에게 미안하다거나 죄송하다는 생각보다는
인간적인 감동을 받았다고 했다.

당시 박혜숙은 이화여대 학생으로는 유일하게 구속되었고
김옥길 총장의 헌신적인 노력과 지원으로 4개월 만에 석방되었다.



 

1 부 / 10. 징역 5년 이상 사형 언도


민청학련 사건과 관련해 검거된 대학생의 수는
1024명이라는 사상 초유의 인원이었다.


유신 독재권력은 연행된 대학생들을 고문하고 조작 수사하여

간첩과 빨갱이로 둔갑시켰다.


연행된 이들 중 무려 253명을 긴급조치 4호를 위반한 죄목으로

구속하고 군법회의에 회부하였다.



구속된 이들은 재판을 받을 때까지 가족들에게
접견은커녕 어디에 가 있는지 알려 주지도 않았다.

3월에 잡혀간 내가 7월 말까지 아무런 소식이 없으니
오산에 계신 부모님으로서는
내가 도대체 어디에 가 있는 건지
죽었는지 살아 있는지 궁금하실게 당연했다.

구속된 학생들의 숫자가 너무 많아
서울구치소에서는 수용 능력이 턱없이 부족했다.

그래서 많은 학생들이 4개월 여 동안
서울 시내 각 경찰서 유치장에 분산 수감되기도 했다.

서울구치소에서는 두 방에 1명 씩을 분산해서 수용했는데
나는 지금도 서대문 공원에 유물로 보존되어 있는
12사동 상층 절도범 방에 수감되었다.

한 방에 있는 절도범들은 모두
하루에 한 차례씩 가족이나 친지들을 접견할 수 있는데
민청학련 사건 관련자인 나만 접견이 불허되었다.

나는 가족이 매일 접견하러 오는 한 절도범과 상의한 끝에
그의 아내를 내 누이가 간호부장으로 근무하고 있는
오산기독병원으로 찾아 가게 해서
내가 서울구치소에 수감되어 있다는 기별을 전해 주고
읽을 책과 영치금을 우편으로 보내 주도록 부탁하기로 했다.

그 후 나는 누이에게 내 소식이 전해 지고
또 누이로부터 기별이 오기를
이제나 저제나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소식이 닿으면 바로 연락이 오련만
아무리 기다려도 도무지 기별이 없다.

나중에 알고 보니 어떤 여인네가 누이를 찾아가서
내가 보냈다고 하면서 소식을 전하고 돈을 받아 갔는데
그 돈을 중간에서 가로채 버린 것이다.

군법회의 재판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재판이 진행되면서 학생들을 공산주의자로 몰기 위해
각종 고문과 조작 수사가 자행되었다는 사실이
부분적으로 외부에 알려지게 되었다.



서울상대에 재학 중이던 김병곤은 사형이 구형되자

최후진술에서 재판부를 향해 일갈했다.


"아무것도 한 일이 없는 저에게까지
이렇게 사형이라는 영광스러운 구형을 주시니 정말 감사합니다.
사실 저는 유신 치하에서 생명을 잃고 삶의 길을 빼앗긴 이 민생들에게
줄 것이 아무 것도 없어 걱정하던 차였습니다.
그런데 이 젊은 목숨을 기꺼이 바칠 기회를 주시니,
고마운 마음 이를 데 없습니다. 감사합니다."


학생들을 변론하던 강신옥 변호사는 법 절차를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강행하는 군법회의 재판을 비판하면서

박 정권을 나치 정권에 비유하고,
피고인들의 투쟁을 정당한 국민 저항운동이라고 변호하던 끝에
"지금 나의 심정은 피고인석에 있는 저들과 함께 앉아 있고 싶다"라고 했다.


이것이 대통령 긴급조치 4 호를
비방하고 위반했다 해서 법정 구속이 되기도 했다.


강신옥 변호사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변호사로서 법정에서 변론하던 발언을 문제삼아

바로 구속된 전무후무한 선례를 남기게 되었다.


▲ 구속 수감 후 1975년 2월 17일 석방되는 강신옥 변호사


나는 최후 변론대신 숨이 막힐 듯 얼어붙은 법대를 향해

"무릎을 꿇고서 사느니 보다는 서서 죽기를 원한단다"

노래를 힘차게 불러제켰다.


참으로 박 정권의 탄압은 무지막지했다.
7월 13일 1 심 판결을 받은 53명에게
사형 14명, 무기징역 15명, 징역 20년 18명,
징역 15년 6명이라는 어마어마한 형량이 선고되었다.


급조된 군법회의 법정에서
구속된 이들 가운데 204 명이 징역 5년 이상 사형을 선고받았다.


나는 1심에서 징역 15년을 선고 받았다.

여기에는 민청학련 조직에 자금을 지원했다는

윤보선 전대통령과 박형규 목사님도 포함되어 있다.


한편 김지하를 통해서 자금을 지원한 지학순 주교가
1974년 7월 6일 귀국길에 공항에서 중앙정보부에 연행되어 구속되고
비상보통군법회의에서 15년 형을 언도받았다.


이 사건으로 가톨릭은 반독재 저항운동에 본격적으로 나서게 되고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이 결성되는 계기가 되었다.


▲ 1974년 지학순 주교의 재판소식을 알리고 있는 <가톨릭시보>와 구속 중이던 김지하 시인.


▲  1974년 지학순 주교가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돼 구속됐다.

이에 전국의 가톨릭 사제와 신도들이 원주 원동성당에 모여 정부규탄과 지 주교 석방을 촉구하는 가두행진을 진행했다.
"주여, 이땅에 정의를!", "부정부패 뿌리뽑아 사회정의 이룩하자" 구호가 적힌 현수막이 보인다.


재판 결과는 국내외적으로 큰 충격을 안겨 주었다.
가을 학기에 들어서자마자
반정부 학생 시위가 전국으로 들불처럼 번져 나갔다.


한편 이와 같은 일련의 사태를
비교적 상세하게 보도해서 발단이 된
동아일보 광고 탄압 사건과 함께
전국민적인 반정부 저항 운동으로 번져나가기도 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유신 체제 권력의 무지막지한 횡포와
탄압의 잔악성이 전세계로 번져
국제 사회에서도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어떤 이유로도 침해될 수 없는 인간의 존엄성이
국가 권력에 의해 비인도적이거나 비열한 처우 또는
잔인한 처벌로 침해당할 때
인류 세계는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인간의 존엄성과 권리를 지켜내야 했다.

반인권적 국가 권력에 대한
국제적 경제 제재 조치가 검토되고
진상 조사와 항의 방문 등이 잇따랐다.
급기야는 전세계적인 정치 외교 문제로 비화되었다.

이 와중에 8 월 15 일에는
육영수 여사가 저격당한 사건이 발생했다.

전대미문의 법으로 권력을 휘둘러서
민주화 운동을 막으려던 박 정권은
국내외의 비난과 저항에 부닥치게 되자
채 1년도 견디지 못하고 물러서야 했다.

사면초가에 몰린 박 정권은 2심 형량을 낮췄고
민청학련 사건이 일어난 지 10개월 여 만인 1975년 2월 15일
구속자 대부분인 148명을 석방시켰다.

그러나 학생 신분이 아닌 민청학련 관계자 4명과
배후 세력으로 몰린 여정남 도예종 등
인혁당 관계자 21명은 제외되었다.

인혁당 관계자 가운데 사형을 언도받은 8명에게는
1975년 4월 9일 새벽 전격적으로 교수형이 집행되었다.

박 정권이 8명에게 교수형을 집행하던 1975년 4월 9일
우리나라를 제외한 전세계 모든 언론들은
그야말로 경악을 금치 못하면서 이 사실을 대서특필했고
국제 사회는 이 날을 역사상 최악의
"사법 살인의 날"로 선포했다.

 

 

1 부 / 12. 연행 여행과 미인계 사건


때로 외국 국가 원수나
국제적인 인권 단체에서 방한하게 되면
우리는 아예 수도권을 벗어나서
지방 먼 곳으로 강제 연행되어 잠적해 있어야 했다.

대통령이 외국 순방길에 오를 때도 그랬고
대통령이 국가 경축 행사에 참석할 때도 그랬다.

1975년 3월 29일 나는 강의실에서 수업받고 있던 중
경찰서 정보과 직원에 의해 강제로 연행되었다.

 

 ▲ 동아일보 1975.04.02



그 당시 한국의 민주화에 많은 관심을 보여온
미국 의회의 프레이저 의원이 이끄는
아시아태평양지역 소위원회가
민청학련 사건의 고문과 조작의 진상을 파악하기 위해서
한국으로 조사단을 파견했다.

또 영국에 본부를 두고 있는 국제사면위원회(엠네스티)에서도
같은 목적으로 대표단을 보내왔다.

그들이 만날 만한 30 ~ 40명의 명단이
중앙정보부에 입수되자 공안 기관에서는
명단에 든 인사들이 조사단과 접촉하지 못하도록
전원을 강제 연행해서 지방으로 보내게 했다.

이른바 "강제 연행 여행"이라고 부르는 이 수법은
박정희가 사망하는 1979년까지 계속 이어졌다.

나는 당시 화성군 오산읍에서 살고 있었기 때문에
수원 지역 정보 기관에서 나를 담당해서
강제 연행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틈을 타서 잠시 함석헌 선생님이 계시는 봉원산거를 찾았다.
여남은 이들과 인도 경전 바가받기타를 공부하고 있던 함 선생님은

"그런 데를 끌려 가게 되면 여자를 조심해야 될 거야"

하고 염려를 주셨다.
함 선생님의 말씀을 가슴에 새기고
이튿날 수원에서 온양으로, 수덕사를 거쳐, 장항으로,
다시 군산을 거쳐, 전주로 정신없이 끌려 다녔다.

자정을 넘어서야 전주 복판쯤으로 여겨지는 곳에 위치한
여관장에 들어서 자리에 누울 수 있었다.

피곤도 겹치고 해서 선잠에 빠져들 즈음
잠결에 등어리 바짝으로 뭉클하고 뜨뜻한 체온이 느껴져 왔다.

이상한 감촉에 잠을 설치고 깨어 돌아 보니

동행한 기관원은 간 데 없고
스물 두어 살 쯤으로 보이는 웬 여자가
완전히 벌거벗은 채 나와 한 이불 속에 누워 있었다.

순간 함석헌 선생님의 말씀이 뇌리를 스치면서
벌떡 일어나 불을 켜려고 벽을 더듬었다.

그러자 그 여인은 왜 이러시느냐고
조용히 한번 놀자고 하면서 내 팬티를 잡고 늘어졌다.

나는 털썩 주저 앉아 벗겨진 팬티를 다시 가려 입고
주인장을 부르며 마구 소리를 질러 댔다.

그러기를 두 세 번 계속하자 그녀는 조용히 하면 불을 켜 주겠다고 하면서
일어나 불을 켜고는 이불 속으로 다시 들어 와 내 목을 잡고 끌어 당겼다.
20 여 분 동안 실랑이를 벌이다가 틈을 타서 밖으로 뛰쳐 나왔다.

내친 김에 서울로 올라와
명동에 위치한 전진상 교육관 위층의 수녀원으로 가서
수녀들의 보호를 받으며 숨어 있었다.

그러자 지학순 주교님과 신부님들이 찾아 오시고
박형규 목사님과 이 철 어머니, 김지하 어머니, 김 윤 어머니가 오셨다.

마침 한국의 인권 문제를 취재하러 왔던

영국의 BBC 방송 텔레비전 제작팀들이 찾아와

여러시간 인터뷰를 했다.

윤보선 함석헌 김대중 세 분이 공동의장으로 이끌던
민주회복국민회의에서는 대변인 함세웅 신부 명의로
진상을 알리고 항의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한편 광고 탄압 사건으로 박 정권과
한창 심각하게 마찰을 빚고 있던 동아일보에서는
"...프레이저 미 하원의원과 엠네스티 국제위원회가
한국 인권문제를 조사하려 할 때
당국은 그들이 만나려는 민주인사들을 관광여행을 시켰으며
특히 연세대 최민화 군의 경우 기관원이 어린 학생에게
미인계(美人計)를 쓰는 등 불미한 사례에 접해
분노와 서글픔을 억제치 못한다고 밝혔다" 고
함 신부의 기자회견문을 보도하기도 했다.

 

▲ 동아일보 1975.04.05

 

당시 시국과 관련해서 일어난 집회와 시위 등 소식은 방송에서는 전혀 볼 수 없었고

신문에서 1단 짧은 기사로 보도되는 것이 고작이었다.

 

재야에서 발표한 성명서를 5단 기사로 보도한다는 건

그야말로 보기드문 톱기사에 다름 아니었다.

영국 BBC 방송에서는 순수한 학생을 강제로 연행해서
인간적으로 타락시키고 파멸시키려는 반인륜적 행위로 미인계 사건을 소개하면서
유럽과 캐나다 호주 등에 텔레비전으로 생생하게 방송했다.

그 주간에 있었던 구속자 가족 목요기도회에서 함석헌 선생님은

"인면수심도 유분수지...
어떻게 맑고 순진한 학생들을 강제로 연행해다가
창기를 집어 넣어 타락시키려는 일을 저지를 수가 있단 말이오!
정부에서 하는 짓거리가 이 지경인데도
우리가 비폭력만 하고 있어야 되겠소?
갑시다! 도끼들고 나갑시다.
치안본부로 가서 다 때려 부수어야지..."

하시며 울분을 이기지 못해 하셨다.

마하트마 간디도 아들이
누군가가 아버지를 폭력으로 살해하려 한다면
그런 상황을 목격하면서도
그 괴한에게 비폭력으로 대해야 하느냐고 물었을 때
'괴한의 폭력으로 아비가 죽게 되는 상황에서는
폭력으로 맞대응해서라도 괴한의 행동을 저지시키는 것이
자식된 도리'라고 대답했다는 말씀을 소개하면서
함 선생님은 나가야 된다고, 도끼라도 들고 여관으로
치안본부로 몰려 나가야 된다고 말씀하셨다.

비폭력주의자인 함석헌 선생이 평생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폭력적 저항을 언급하신 대목이다.

 

한편 연세대 교정은 문교부의 계고장과 박대선 총장의 정면대립으로
대규모 학생시위가 연일 이어지고 있었다.

 

1975년 4월 3일 소식을 전해 들으신 나의 아버님은
김지하 모친, 이 철 모친, 김 윤 모친 등 구속자 가족 분들에 이끌려
함께 연세대로 향했다.

 

이날은 마침 전교생 7천 명 중 6천 여 명이 참여하고

음대 악단이 공대 옥상에서 진군나팔소리로

시위대를 고무하는 가운데 벌어진
개교 이래 최대의 학생시위가 있던 날이었다.

 

신문 보도를 통해 나의 강제연행과 미인계 사건을 전해 들은 학생들은
구속자 가족분들 방문 소식에 대강당으로 모이고
아버님은 대강단 연단에 올라 2천 여 명의 학생들 앞에서
내가 연행된 경위와 천인공노할 미인계 사건에 대해서
일장 연설을 하셨다고 한다.

 

이 광경을 지켜본 당시 교목실장 이계준 교수는 훗날 나를 만나자
"그날 대강당에서 아버님이 명연설을 하셔서 열기를 한껏 돋구었다" 고
분위기를 전해 주셨다.

 

1975년 4월 6일 나는 새문안 교회 주일 예배와 대학생부 모임에 참석했다가
잠복 중이던 정보기관 형사에게 검거되었다.

그리고는 부산으로 포항으로 경주로 또다시 연행 여행을 떠났다.

 

▲ 연행 여행 중 경주에서 정보과 형사와 함께. 박박머리로 감옥에서 출소하여 모자를 쓰고 있는 모습.

 

포항에 머물고 있던 4월 8일에는
고려대학교만을 대상으로 한 긴급조치 7호가 발동되었다.

 

4월 9일 경주에 머물고 있을 때

인혁당 사건 관계자 8 명에 대한 사형이 전격적으로 집행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 인혁당사건으로 비상고등군법회의에서 재판을 받고 있는 피고인들

 

▲ 1975년 4월 9일 대법 확정판결 후 전격적으로 사형이 집행된 8분 - 왼쪽위부터 시계방향으로

김용원(당시 39·경기여고 교사) 도예종(51·삼화토건 회장) 서도원(52·전 대구매일신문 기자) 송상진(46·양봉업)

하재완(43·양조장 경영) 이수병(37·삼락일어학원 강사) 우홍선(45·한국골든스탬프사 상무) 여정남(31·전 경북대 학생회장)

그 날 경주는 새벽부터 먹구름이 끼고
부슬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참으로 을씨년스런 날씨였다.

빈 속에 아침 식사를 하면서 나는 평소 좋아하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던 막걸리 한사발을 단숨에 들이켰다.
그리고는 이내 위 속에 있는 모든 찌꺼기들을 한꺼번에 토해 버렸다.

 

이틀 후 4월 11일 서울대 농대 시국성토대회에서 세번째 연사로 등장한 김상진은

정열적인 어조로 학내문제를 설명하고 죽음을 택하게 된 양심선언문을 읽은 후 할복 자결한다.

 

그날 연행 여행을 마치고 저녁 늦게 수원경찰서에 들어서자

서울농대에서 학생 시위가 벌어지고 김상진 열사가 자결한 일로 경찰서 분위기가 어수선했다.

 

중앙정보부에서는 전주에 있는 여관장과

벌거벗고 내 침대에 누어 있던 여인을 직접 취조하고

정황과 사실을 샅샅이 파악했다.

나에 대한 미인계 사건과 이런저런 일이 겹치고 겹쳐서 

수원경찰서장 이하 정보 과장 계장 담당자 등 모두가 징계를 받게 되었다.

경찰서장과 간부들이 모두 오산 집으로 찾아와

부모님 앞에서 무릎을 꿇고 용서해 달라고 빌었다.

그들은 어머니께 같은 공무원의 입장에서
어쩔 수 없던 일로 너그럽게 이해하고 부디 용서해 달라고 간청했다.
어머님은 내 처분만 바라보고 계셨다.

 

중앙정보부 학원담당 과장과 간부 두 분이 집으로 찾아와

부모님 앞에 무릎을 꿇고 사과하면서

아랫사람들이 시키지도 않은 일을 자발적으로 저지른 짓이라면서

엄하게 질책하겠다고 했다.

결국 과장 이하 담당 직원들은 징계를 받고  
수원경찰서장은 시말서를 썼는데 그 후 다른 사건과 겹쳐 몇달 후 직위 해제되었다.

 

강제 연행여행은 그 후로도 1979년 박정희가

김재규의 총탄에 쓰러질 때까지 계속되었다.

 

매 해 31일 삼일절,  4.19혁명기념일인 419, 815일 광복절과

외국의 주요 사절이 방한할 때, 민주적인 집회가 예정되어 있을 때 등에는

서울을 떠나 지방으로 강제 소개되어 연행여행을 다녀야 했다.

 

훗날 인혁당 관련자는 재심을 통해서

2007년 1월, 32년 여 만에사형 집행을 당한 분들을 포함하여 모두 무죄 판결을 받았다.

 

나는 이 사건의 재심을 통해서

2009년 09월 11일, 35년 여 만에 무죄 판결을 받았다.

 

 

 

제 1 부 / 13. 전지전능한 '말씀'



유신 정권은 우리들의 석방 조치를 통해
국내외로 비화된 비난을 모면하면서
한편으로 민주화의 요구를 막아보려고 애썼다.

 

하지만 별다른 효과를 얻지 못하고
오히려 민주화에 대한 열기가 대학 사회뿐만 아니라
종교계 언론계 등으로 확산되면서 여의치 않게 되자
또다시 강경책을 구사할 수 있는 대책을 마련하기에 급급했다.

 

이때 미국이 월남에서 패망한 소식은
유신 정권에게 오히려 돌파구를 열어주는 계기가 되었다.

 

관변 단체뿐 아니라 욱박지르고 회유할 수 있는 단체는 모두 다 총동원해서
연일 신문과 방송에 성명서와 광고를 내게 했다.

안보 궐기 대회를 대대적으로 가지면서 법석거리고 야단이었다.

 

이렇게 분위기를 잡아가더니 얼추 올랐다 싶었던지 1975년 5월 13일
'국가 안전과 공공 질서의 수호를 위한 대통령 긴급조치 9호' 를 선포했다.



이른바 '긴조 9호'로 불리는 이 조치는 유신 헌법을
신성불가침한 성역으로 감싸고도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유신 헌법에서조차도 보장할 수밖에 없는 국민의 기본권들을
사실상 제한하고 박탈하여 그야말로 헌법 위에 군임하는
'신(神)의 말씀'으로 되어 있었다.

 

모든 국민들은 권력자의 비위에 거슬리기만 하면
언제든지 어디서든지 영장 없이 체포 구금될 위협에 노출되어 있었다.

 

누가 그러한 부당한 처우를 받게 되었는지를
전해 듣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았다.

 

더우기 이 조치를 위반하였다고 판단하여 내려진 형벌에 대해서는
법의 심판 대상에서조차 제외되어 이의를 달 길도 없었다.

 

그야말로 '말씀'은 전지전능한 절대 권력이었던것이다.

정국은 또다시 꽁꽁 얼어붙는 분위기로 돌변했다.


긴급조치 9호는 이제까지 모든 긴급조치의 종합판으로
대학교를 완전히 병영화하고 철저한 감시체제 하에 두는 것이었다.

유언비어 유포, 유신헌법에 대한 일체의 행위를 금지했다.


위반자에게는 1년 이상의 유기징역과 10년 이하의 자격정지를 부과하고
위반자가 소속된 학교나 단체의 장에게 해당자의 해임이나 제적을 명령할 수 있었다.

심지어는 휴업, 휴교, 정간, 폐간이나 승인, 등록, 취소도

주무 장관의 재량하에 심사할 수 있었다.


관제 반공궐기대회가 연일 기승을 부리는 분위기와 함께
정국은 꽁꽁 얼어붙어 버렸다.


하지만 이런 분위기를 아랑곳하지 않고
1975년 5월 22일 서울대 관악캠퍼스에서 대규모 학생시위가 일어났다.


서울대 복학생 그룹과 탈춤패, 문학패, 야학패 등이 주도하여
김상진 열사 추도식으로 거행된 기습적인 거사로
1천 여 명이 참가한 대규모 시위였다.


5월 22일에 발생하였다고 해서<오둘둘>로 불리는 이 사건은

전지전능한 말씀과 절대 권력의 권위에 일대 타격을 안겨주는 시발이 되었다.


경찰과 학교 당국의 시위 대응은 강경 일변도로 급변하였다.
시위 중 80여 명의 학생이 연행되었는데 그 중 60명이 즉시 구속되었고

학교 당국은 이중 53명을 무더기로 제명했다.


또한 이 시위 사태에 책임을 지고 서울대 총장이 사임하고
사전에 진압하지 못한 책임을 물어 치안본부장과 남부경찰서장,
정보과장, 정보계장 등 정보라인이 무더기로 경질되었다.


이후 경찰과 중앙정보부 기관원들이 대학교 내에 상주하면서
학생담당 교직원과 협력하여 학생 시위를 원천봉쇄하는 것이
대학가의 일반적인 풍경이 되었다.


1975년 7월 16일 긴급조치 9호 선포 2개월 여 후

이번에는 사회안전법 (社會安全法)이 법률로 제정되었다.


이는 특정범죄를 다시 범할 위험성을 예방하는 한편,
사회복귀를 위한 교육개선이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자에 대해 보안처분을 함으로써

국가안정과 사회안녕을 유지한다는 명목으로 제정된 법률이었다.


보안처분 대상자는
①형법상의 내란죄·외환죄
②군형법상의 반란죄·이적죄
③국가보안법상의 반국가단체구성죄, 목적수행죄,
자진지원·금품수수죄, 잠입·탈출죄, 찬양·고무죄,
회합·통신죄, 편의제공죄를 지어 금고 이상의 형을 받고
그 집행을 받은 사실이 있는 자들로 규정되어 있다.


보안처분은 검사의 청구에 의해
법무부장관이 보안처분심의위원회의 의결을 거쳐 결정하며,
기간은 2년이지만 경신할 수 있다.


이 법은 정권에 의해 사상범 또는 공안사범으로 규정된 사람들이
형기를 마치고도 사회에 복귀하는 것을 원천적으로 봉쇄한 악법으로
위헌시비의 대상이 되었다.


이 법에 따르면 나는 주소지인 오산에서 군계나 도계를 벗어나 출타를 할 때

사전에 정보기관에 신고하여 허락을 얻어야 하고 다녀와서도 신고를 하게 되어 있다.


월남인으로 반공 의식이 몸에 배어 있는 지학순 주교님은

빨갱이로 구속되어 처단된 전적이 있는 박정희부터 솔선수범해서 실천하라.

나는 박정희에 비해 관찰 대상이 될 수 없으니만큼 전면 거부하겠다고 선언했다.


나와 함께 석방된 이들 모두 사회안전법을 전면 거부하겠다고 선언하고

실제로 그렇게 행동했다.


긴급조치 9호와 사회안전법으로 나는 중앙정보부 남산 수사국과
서빙고에 위치한 보안사 대공분실을 뻔질나게 드나드는 신세가 되었다.

 

어디에 있었느냐, 어디를 갔느냐에서부터 누구를 만났느냐, 무엇을 했느냐 등
개인적인 일상 생활을 시시콜콜 뒤져내더니 만나는 사람들을 참견하려 들고
다니는 곳을 제한하려 들었다.

 

학교는 물론이고 기독교 기관 단체나 교회에도 나가지 말라는 거다.

 재야 인사는 물론이고 친구나 선후배 심지어 교회 목사를 만나서도 안 된다는 거다.
도서관에 나가서 혼자 책을 보아서도 안 된다는 거다.

 

상식적 기준으로나 헌법, 기본법적 근거로나
무슨 절차로나 도대체가 이해할 수 없는 세상에서
유신 정권은 이 뿐만 아니라 나에게
그들이 원하는 대로 길들여질 것을 강요했다.

 

이목구비를 틀어 막고
잠자코 있으라고 강요했다.

 

정신적으로 수긍할 수 없었다.
옳지 않다고 말해야 했다.
아니라고 거부해야 했다.
신변의 위협을 무릅쓰고 저항해야 했다.

 

나는 그러면 그럴수록 틈만 나면 친구와 후배들을 만났다.
틈을 내어 목사님 신부님을 찾아 뵈었다.

 

봉원산거를 찾아 함 선생님과의 모임도 계속했다.
김동길 교수와의 민립대학 강좌 수업도 계속해 나갔다.



 

1 부 / 14. 장준하 선생


장준하 선생은 일제 말 학병으로 강제 징집되었다가
만주에서 극적으로 탈출하여 광복군에 참여한 애국 지사다.


▲ 해방 직전인 1945년 8월 중국 산동성 유현의 어느 사진관에서 (왼쪽부터) 노능서와 김준엽, 장준하가 찍은 사진.


그러나 선생의 명성은 독립군의 이력보다도
독립된 이 나라에서 펼친
반독재 민주운동과 통일운동의 거목으로
우리 뇌리에 남아 있다.

선생은 이승만 정권 하에서
일제로부터 독립한 나라의 지도층이
온통 일제의 압잡이들로 구성된 것에 대해
민족 정기를 저버리는 일이라고 울분을 금치 못하셨다.

더욱이 군사 쿠데타로 권좌에 오른 박정희 대통령이
일제의 압잡이인 관동군 중위 출신이라는 데에 이르러서는
적이 비분강개하셨다.

장준하와 박정희...
이 두 사람은 이렇게 출신 성분에서부터 확연히 달랐다.

특히 박정희 대통령은 모든 면에서
장준하 선생에 대한 콤플렉스가 심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같은 시대에 비슷한 연배로 만주라는 같은 공간에서
한 사람은 일본군에 강제로 끌려갔지만
결국은 천신만고 끝에 탈출하여
독립운동의 상징인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서
우리 민족이 해방되는 날까지 일제에 저항한 반면

또한 젊은이는 멀쩡한 교사직을 버리고
오로지 입신양명을 위해 자발적으로 지원해서
일제에 가장 충직스런 군 장교로
독립운동가들을 섬멸해야 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결국 일본이 패망하고 해방된 조국에서
일제의 장교인 박정희 중위는
패잔병이자 전범자로 처벌을 받고
독립 운동을 이끈 장준하는 민족 지도자로
이 나라를 이끌어 가는 역할을 맡아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현실은 오히려 정반대 상황으로 진행되어 왔다.

이처럼 대조적이고 모순적인 현상은
한국 사회를 지배해 온 권력과
그에 저항하는 민주화 통일 운동 세력의 성격을
가장 상징적으로 나타내 주는 것이기도 하다.

대통령 박정희로서는 장준하라는 존재가
감추고 싶은 자신의 과거를
더욱 선명하게 부각시키는 것이어서
그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또한 이런 관계는 훗날 장준하 선생이
박 정권 하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하는 운명을
비극적으로 시사하는 것이기도 하다.

앞에서도 서술한 바 있거니와
1973년 12월 장준하 선생이 재야 인사를 대표해서
유신헌법에 대한 '개헌 청원 서명운동본부'를 제안 발의하자
이 운동은 전국적으로 선풍을 일으키면서 전개되어 갔다.

이 운동을 막기 위한 조치로 박정희는
대통령 긴급조치 1호를 발동하기에 이르렀고
이에 굴하지 않는 장 선생을 처음으로 구속하였다.

그 직후 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된 우리 학생들과 함께
감옥 생활을 하던 장준하 선생은
74년 12월 건강 악화로
수감 생활을 더이상 지속할 수 없다고 판정되어
'중통'으로 형집행정지 처분을 받고 석방되었다.

75년 2월 15일 석방된 나는 4 월 말 경
나병식(민주화기념사업회 상임이사) 황인성(사회운동)등과 같이
장준하 선생을 찾아뵈었다.

민청학련 사건으로 석방된 학생들이 찾아온 것이 처음이어서인지
장 선생은 우리를 무척 반가이 맞이해 주셨다.

선생님이 등산을 좋아하는 분이어서
우리가 모시고 함께 산행을 했으면 한다고 말씀을 드렸더니
장준하 선생은 기다렸다는 듯이 흔쾌히 승낙하셨다.

"내가 지금 몸이 좀 좋지 않지만 귀한 분들 요청인데......
함께 갈 수 있도록 찾아 줘서 고맙소."

장 선생님은 어린아이처럼 좋아하시며
당신이 잘 아는 코스 중에
우리에게 꼭 안내해 주고 싶은 곳이 있다고 하셨다.

5월 초 우리는 선생을 모시고 치악산을 향해 떠났다.
상원사에서 하루를 묵고 치악산 능선을 따라
비로봉을 거쳐 구룡사로 하산하는 코스였다.

내게는 치악산 등반이 초행길이라 무척 힘이 들었다.
만만치않게 어려운 코스였다는 기억이다.

그러나 선생은 중통으로 석방된 분 같지 않게
젊은 우리보다도 산행을 훨씬 잘 하셨다.

심근경색증을 앓고 계시던 선생은
빨간 약봉투를 우리에게 보여주시며
당신이 갑자기 쓰러져서 혼수상태에 빠지면
약 두 알을 즉시 입에 넣어달라고 하셨다.

그러면서도 산을 어찌나 노련하게 오르시는지
장 선생을 따라 오르는 길이 나에게는 적이나 힘에 벅찼다.

우리가 장준하 선생과 오랜 시간 많은 대화를 나누면서
이처럼 가까이서 체취를 느껴보기는 처음이었다.

정갈한 선비 같다고나 할까...
조용조용하고 말씀도 극히 절약하는 분인데
가까이서 봐도 뒤에서 봐도 옆에서 봐도
참으로 흠잡을데 없이 잘 생겼다는 생각이 들만큼
귀공자 풍의 미남이었다.


▲ 장준하 선생


살결은 퍼런 빛이 도는 듯한 느낌을 줄 정도로
희디희고 곱디곱다.

둘째 날 비로봉 정상을 거쳐 구룡사에 도착했다.
구룡사 주지 스님은 반색을 하며
장 선생과 우리 일행을 반갑게 맞이했다.

장 선생은 매우 대견하고 자랑스러우신 표정으로
주지 스님께 우리를 소개했다.


▲ 치악산 구룡사


주지 스님은 1950 ~ 60년대
우리나라 지식인 사회의 대표적 종합 월간지이자
장 선생이 펴내신 <사상계>의 애독자이셨단다.

그때부터 장 선생의 뜻을 존경해 왔다면서
불교신도 회장 등 여러분을 우리에게 소개했다.


그 분들 역시 존경하는 분들을 직접 뵈었다고 반가워 했다.
우리 일행은 주지 스님이 주시는 차를 마시며
늦도록 세상 이야기 등을 나누기도 하고
그윽한 산사의 풍경 속에 등산의 피로를 풀면서
옥고의 여독을 씻어 내기도 했다.

기독교 집안에서 자라 사찰과는 별로 인연이 없던 나로서는
그 날 난생처음 절에서 정식 공양을 하게 되었는데
그 정갈하고 깨끗한 맛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이튿날 아침 공양을 하면서 주지 스님은

"... 1년에 뚜껑을 한 두 번밖에 안 여는 귀한 곡차가 있는데
한잔 대접하겠습니다"

하면서 찻잔에 차를 따라주시는데
색깔이 맑고 고운 핑크빛이었다.

한 입 대어 마셔보니 은은하게 취해 오는 느낌이 든다.
알고 보니 산사에서 복분차라고 부르는 산딸기 발효주였다.

맛이 너무 좋았던지 황인성이 불쑥
"저... 한 잔만 더 주십시오" 했고
나병식도 뒤따라 웃으면서 "저도..." 하며
한 잔을 더 받는다.

나 역시 한 잔을 더 부탁했다.
두 잔을 마시고도 우리가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니까
스님이 한 잔씩을 더 주신다.

석 잔 째 마시니 취기가 약간 도는 것 같다.
알딸딸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장 선생은 한 잔밖에 안 드셨다.

"장준하 선생이 우리 절을 찾아준 것만도 큰 영광인데
이렇게 귀한 분들까지 함께 찾아주셨으니
방명록에 이름을 좀 남겨 주시지요..."

주지 스님의 요청으로 방명록에 서명하려고 보니
바로 앞장에 이후락 김성곤 김종필 등의 이름이 씌어 있었다.

상호 대치점에 서 있는 사람들의 이름이
종이 한 장 차이로 이어져 있어 묘한 감정이 머리를 스친다.

우리 다음으로 방명록에 서명하는 사람들은
이것을 보고 무슨 생각이 들까 궁금하기도 했다.
주지 스님은

"이왕 오셨으니 가 볼만한 곳 한군데를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저기 계곡 쪽으로 가면 세상 사람들이 잘 모르는 샘이 있는데
물이 아주 좋고 시원한 곳이니 산수도 즐기시고
그 샘물로 점심을 해 자시고 내려가십시오"

하시며 안내하는 분을 붙여 주셨다.
우리는 그 샘터에서 점심을 해 먹고는
냇가 계곡물에서 등물을 했다.

번갈아 서로 등을 밀어 주는데
장 선생의 등을 내가 밀어 드리게 되었다.

장 선생의 살색은 눈으로 바라보던 것보다도
훨씬 하얗다 못해 퍼런 기가 돌며 매우 고왔다.

여자의 살결이라도 이보다 더 보드랍고
윤기가 돌 것 같지 않을 정도다.

오후에 우리는 원주 시내 가톨릭 원주 교구청에 들러
지학순 주교님을 만나뵈었다.


▲ 지학순 주교와 김지하

장 선생님은 매우 대견하고 자랑스러우신 표정으로
우리를 지학순 주교님께 소개했다.

지 주교님도 우리를 아주 반가이 맞이해 주셨다.
신부님 수녀님 등과 만찬을 함께 했는데
헤어질 때 우리에게 격려금이랄까 

금일봉을 주신 것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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