풋내기 자유인

 

고교시절 한일회담 반대 시위가 거세게 일었습니다.

경기고 전체가 들고 일어나서 가두 시위에 나서다시피 했습니다.

 

그런데 묘하게도, 나는 5·16 쿠테타로 인해 정년 단축이 되어

아버지가 퇴직하시고 가정 형편이 어려워지긴 했어도

박정희 권력을 지지하는 쪽이었습니다.

 

미국에서 돈을 빌어라도 오겠다는 윤보선보다는

“자립 경제”를 외치는 박정희의 경제개발 계획에 얼마쯤 동조했던 것입니다.

 

경기고등학교 때 열심히 공부하면서

가정 살림에 보탬이 되려고 2학년 때부터 입주 과외를 했고

학원사에서 6년 동안 장학금을 받았습니다.

 

아버지는 내가 의대나 법대를 가기를 원하셨습니다.

“적록 색약”이어서 의대는 포기했고

법대는 일거에 출세하기를 바라는 사람이나 가는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다 버트란드 러셀의 책을 읽게 되었습니다.

경제가 참으로 중요하며 경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인류의 구원이 없다고 힘주어 말하는 그 책은

한창 경제 발전을 부르짖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뭔가 내게 호소해 오는 것이 있었습니다.

 

결국, 서울대학교 상대 경제학과를 간 것은

경제학 교수가 되어 국민을 계몽하고 싶다는 순진한 생각에서였던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그 때 나는, 참, 풋내기 자유인이었습니다.

대학에 들어가서 박정희에 대한 생각이 바뀌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교정을 올라오면서 노랗고 빨갛고 한 꽃들이 새삼스럽게 아름답게 느꼈습니다.

잠시나마 동숭동에 있던 서울대 교정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애잔한 감정이 스며들기도하고, 또 짙은 상념에 잠기기도 합니다.

아름다운 나라와 사랑을 낭만적으로 꿈꾸던 시절이었습니다.

폭풍처럼 번졌던 데모 후의 휴교령으로 굳게 닫힌 교정을 바라보면서도

여유와 낭만을 잃지 않았던 것이 특히 기억에 남습니다.

경제학 교수를 희망하던 한 평범한 학생이

민주화 운동의 대열에 서서 서른 해를 살았고,

어느 순간 정치인이 되어 또 몇 해를 보냈습니다.

돌아보면 아쉬운 점도 많지만,

그래도 제가 진실과 일관성을 믿으며 살 수 있었던 것은

서울대 경제학과에 입학하고 나서부터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미래는 좀더 나을 것이라는,

내가 미력한 힘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한번도 잃지 않았다는 것이

아마도 저를 이 자리에 서게 한 것이라고 믿습니다. …

 

                                 2000년 5월 7일, 서울대 경제학과 강연중에서

 

출처: 김근태 의원 후원회 소식지 [푸른내일]호외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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