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om of Paul Cézanne.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09.

 

폴 세잔(Paul Cézanne 1839~1906)은 프랑스의 대표적 화가로 현대 미술의 아버지이다.
세잔가는 서부 Piedmont에 있는 Cesana라는 마을에 살았다. 
그들의 성 세잔은 본래 이탈리아에서 유래된 이름이다. 
폴 세잔은 1839년 1월 19일, 남프랑스에 있는 액상프로방스에서 태어났다. 
태어나고 약 한달 뒤인 1839년 2월 22일에는 그의 할머니를 대모로, 
삼촌인 Louis를 대부로 성당에서 세례를 받았다. 

그의 아버지인 루이스 아우구스테 세잔(Louis-Auguste Cézanne 1798~1886)은 
한 은행의 공동창업자였는데, 이 은행은 폴 세잔이 살아있는 동안 번영하여 
폴의 경쟁자들에겐 불가능했던 경제적인 지원을 지속적으로 받을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폴은 큰 유산을 상속받을 수 있었다. 


그에겐 매일 초등학교를 함께 다니던 매리(Marie)와 로즈(Rose), 두 여동생이 있었다. 
폴이 열살이 되던 해에 그는 Aix에 있는 성 요셉 학교에 입학했다. 
1852년, 그보다 낮은 학년에 있던 에밀 졸라를 비롯하여 Baptistin Baille를 만났던 
Collège bourbon(지금은 Collège Mignet)에 입학했다. 

1861년, 폴 세잔은 그의 미술적 발전을 위하여 그의 아버지가 원하는 
법학을 버리고 아약스를 떠나 파리로 갔다. 
파리에서 세잔은 인상파 화가였던 카미유 피사로를 만나게 된다. 
처음 1860년대 중반 세잔과 피사로의 친분은 스승과 제자의 관계였는데, 
이로 인해 피사로는 세잔에게 중대한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Louveciennes와 Pontoise에서 10년이 넘게 함께 풍경화를 그리면서 
둘의 관계는 합작하는 평등한 관계로 발전하였다. 

 

Jas de Bouffan, the Pool, 자 드 부팡의 수영장, 1876. by Paul Cézanne. oil on canvas. 

46.1 x 56.3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09. 

세잔의 초기 작품들은 풍경화가 많았는데 그 중에는 특히 상상으로 그려진 중후하고 큰 풍경화도 있었다. 
나중 그의 작품들은 직관적인 관찰과 빛을 이용한 화풍을 띠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성숙된 작품들에서는 거의 건축에 가까운 굳어진 스타일을 추구하였다.

 

Girl at the Piano (Tannhäuser Overture), 1868. by Paul Cézanne. oil on canvas. 
92.5 x 57.8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09. 

 

많은 예술가들이 바그너의 위대한 오페라 작품의 서사적이며, 정신적이고 회화적인 암시에 
전율했지만 가장 열정적이고 원칙주의자였던 화가는 세잔과 반 고흐였다. 
세잔은 바그너의 음악을 시각적으로 재현하고자 같은 주제로 세 편의 그림을 완성한다. 
그 중 마지막 작품만이 지금까지 전해지는데, 1868년 파리에 간 세잔은 바그너의 오페라 
<로엔그린> 서곡뿐 아니라 <탄호이저>와 <방황하는 네덜란드인> 연주회에 참석한다. 
그 한달 후 세잔은 액상프로방스로 돌아와 다시 이젤 앞에 섰다.

긴긴 밤에 바느질하는 엄마와 피아노 치는 딸의 모습을 그린 어느 시골 가정의 모습은 
그 설명적인 제목으로 인해 전혀 다른 분위기로 바뀐다. 
직선적인 구도와 충돌하며, 벽과 의자 주위에서 불안정한 기운을 조성하는, 
시각적으로 다소 산란스러운 문양에서 감성적인 교류를 포착할 수 있다. 
세잔은 친구에게 자신을 위해 연주해 줄 것을 부탁하며 
'리하르트 바그너의 음악으로 청각 신경을 자극시켜 달라' 고 말했다.

 

Flowers in a Blue Vase, 1873. by Paul Cézanne. oil on canvas. 46 x 55.2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09. 

이 작품은 세잔이 인상주의와 가장 밀접한 관련이 있는 시기에 그려졌다. 
세잔의 그림은 60년대의 그림에 비해 더 가벼워졌다. 
작업은 빛의 반사와 진동을 전달하고, 질감은 뛰어난 이동성을 획득했다. 
동시에 형태의 명확성과 회화의 밀도는 자연의 순간적인 인상을 포착하고 
변하지 않는 특성을 드러내는 데 큰 역할을 하지 않는다. 


인상파 전시회에 참가한 세잔은 그들의 친구였다. 
그러나 인상파 시대의 작품에서 이미 드러난 세계에 대한 다른 비전은 
세잔을 친구들의 방식에서 멀어지게 했다. 
미래에 그는 그의 "고전적인" 태도에 의해 결정된 길을 따랐다.

 

Self-portrait in a cap 모자를 쓴 자화상, 1872. by Paul Cézanne. oil on canvas. 
39.7 x 53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09. 

 

이 그림은 폴 세잔이 인상파, 특히 피사로(Pissarro)와 가장 가까운 시기에 그려졌다. 
작품의 구성은 피사로의 자화상 (Musée d' Orsay, Paris)과 비슷하다. 
인상주의와 함께 캔버스는 자유 획과 관련이 있으며 

조명 효과에 대한 관심이 있지만 글씨의 스케치 성과 윤곽선의 

흐릿함에도 불구하고 세잔의 형식은 더 큰 확실성과 밀도를 유지한다. 
세잔은 그의 외모의 특징인 그의 나이보다 나이가 들었다. 
그 이유는 아마도 수염뿐만 아니라 세잔이 끊임없이 경험한 내면의 긴장과 외로움 때문일 것이다.

 

Room of Paul Cézanne.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0.

세잔은 평생동안 그가 실제 눈에 보이는 것에 가장 가깝게 표현할 수 있는 
화법을 찾아 가장 현실적으로 표현하려고 노력했다. 
결과적으로 그는 구조적으로 간단한 형태와 간단한 색채를 사용하였다. 
그는 “나는 무언가 단단하고 박물관 속 미술처럼 오래가는 인상(impressionism)을 만들고 싶다.” 

라고 말한 것과, 그가 Poussin의 “After Nature”를 재구성하는 것은 

그가 전통적인 구성과 자연을 관찰하는 것을 통합하고 싶어하는 열망을 강조했다.

1852년 세잔은 친구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던 가난하고 병약한 소년을 

구해주었는데 그가 곧 훗날의 소설가 에밀 졸라였다. 
이후 두 사람은 어린 시절을 함께 보냈고 30여 년간 편지를 교환하며 예술을 논했다. 
죽마고우였던 에밀 졸라와의 관계는 그가 대표작 <루공 마카르 총서>의 열 네 번째 소설 
〈작품(L'oeuvre)〉 속에 등장시킨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재능 없는 화가 클로드의 모델이 
세잔이라는 이야기가 나오면서 파국을 맞았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화가의 상황이 세잔 본인과 비슷했고 다른 등장 인물들 또한 
졸라를 비롯한 실제 인물들과 유사했기에 세잔은 큰 충격을 받았다. 
졸라가 보내준 소설을 읽은 세잔은 1886년 4월 그에게 "이렇게 훌륭히 추억을 담아주어 감사하다~"

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 30여년의 우정에 결별을 선언하고 다시는 그와 만나지 않았다. 
그러나 세잔은 졸라가 죽었을 때 크게 슬퍼했다고 한다. 
두 사람의 우정과 갈등은 훗날

<나의 위대한 친구, 세잔(Cezanne et moi, Cezanne and I, 2015)>이라는 영화로 만들어졌다.

 

Room of Paul Cézanne.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0.

세잔은 자연을 단순화시킬 때 기하학적 모양으로 변하는 사실에 흥미를 느꼈다. 
그는 자연을 원기둥, 구, 그리고 원뿔로 다루고 싶어했다. 
예를 들어 통나무는 원기둥으로, 사과와 오렌지는 구로 인식하는 것처럼 말이다. 
게다가 지각의 진실을 포착하고 싶어하는 세잔의 욕망은 
두 눈으로 관찰하는 것을 생생하게, 혹은 살짝 다르게 해석하여 
관객이 이전의 이상적인 관점과는 다른 심미적 경험을 느낄 수 있도록 이끌었다. 
세잔의 혁신은 비평가들로 하여금 그의 다양한 설명들을 병든 망막, 맑은 시각, 
그리고 증기 기관차의 영향이라고 평가하게 만들기도 했다.

 

Bank of the marne, 1888. by Paul Cézanne. oil on canvas. 81.3 x 65.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0. 

 

나무로 둘러싸인 전용 센터가 있는 그림의 구성은 닫혀 있고 안정적이다. 
물체의 모양에 배치된 스트로크는 단순한 기하학적 몸체에 접근하는 일반화된 볼륨을 조각한다. 
색상의 색조는 나무의 녹색과 공기의 파란색에 의해 결정되며 작가의 의지로 압축된다. 
세잔이 밝힌 물질 세계 구조의 명확성은 자연의 위대함을 강조한다.

 

Smoker, 1890~1892. by Paul Cézanne. oil on canvas. 73.5 x 92.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0. 

 

세잔의 창의적인 아이디어는 종종 앉아 있는 사람들의 이미지와 관련이 있었다. 
움직이지 않는 자세의 인물은 그에게 더 이상 물건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의 도움으로 캔버스에 관심 있는 문제의 컬러 솔루션을 전달할 수 있었다.

흡연자(Smoker)에 묘사된 농민의 모습은 차분하고 확고한 성격, 전체적인 특징이 부여된다. 
작가가 결코 사람의 개별적인 특성을 전하려는 의도는 아니지만, 
인물의 사회적 또는 심리적 초상화를 그려 내려고 했지만 
그의 작품 속 사람들은 사회의 상황에 관계없이 거의 기념비적이다.

흡연자의 눈 대신 페인트의 어두운 점만 있지만 구성이 
일상 생활과 사소한 소란에서 분리되는 것을 분명히 나타낸다.
흡연자(Smoker)의 등 뒤에는 세잔의 병과 사과가 있는 정물이 보인다. 
"무엇보다도-나는 관습을 어기지 않고 늙어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좋아합니다." 
이것이 바로 이 작품의 특징이다.

 

Big pine near Aix, 1895~1897. by Paul Cézanne. oil on canvas. 91 x 72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0. 

 

인상주의가 포착하려고 했던 것은 ‘순간적 인상’이었다. 
한 순간도 동일하지 않은 빛과 이 빛이 빚어내는 불규칙한 색채에 의해 
사물의 윤곽은 깨지고, 형태는 해체된다. 
빛으로 채색된 인상주의자들의 화면은 회화사의 빛나는 순간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영광은 오래가지 못했다. 
첫 전시가 있은 지 불과 10년 후, 르느와르는 인상주의가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음을 토로하며 
고전주의 거장들의 가르침으로 돌아갔고, 피사로는 과학을 통해 
인상주의 화면의 허약함을 넘어가려 했던 신인상주의에 주목했다.

그리고 세잔은 인상주의 화면에 ‘솜방망이’ 같은 비전 대신 
“박물관에 있는 미술처럼 단단하고 지속적인” 것을 집어넣고 싶어했다. 
‘경이적인 눈’을 가진 모네의 그림에 단단한 골격을 부여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생트-빅트와르로 향했다. 
“루브르 박물관은 좋은 참고서입니다. 

그러나 자연이라는 다양한 그림이야말로 실재하면서도 경탄을 금치 못할 연구 대상입니다.” 
그는 자연을 통해 다시 고전주의에 이르고자 했다.

투시도법에 의해 구축된 전통적 회화 공간은 존재하는 것들로부터 변화를 제거한다. 
이 경우 회화 평면은 하나의 점 (소실점)을 중심으로 질서화됨으로써 
공기의 원활한 흐름을 통제하며, 회화의 모든 요소는 대상과 공간에 종속된다. 
이와 반대로 인상주의의 캔버스는 모든 것이 변화인, 변화가 모든 것인 공간을 만들어낸다. 
그럼으로써 빛과 대상은 해방되었지만, 안타깝게도 화면은 해방되는 순간 
바로 사라져버리는 잔상(殘像)들, 흔적들의 무덤이 되었다. 

세잔은 이 모두를 넘어선다. 그에게 자연은 우선적으로 ‘진동’이며 ‘흐름’이다. 
그러나 진동은 덧없이 사라지고 마는 순간들이 아니라, 
순간 속에 새겨지는 우주적 힘이자 동일성을 생산하는 차이의 장(場)이다.
그러나 이런 진동을 포착하기란 쉽지 않다. 
화가는 이미 너무나 많은 이미지들과 견해들에 물들어있기 때문이다. 
화가는 관습과 제도가 양산하는 온갖 클리셰에 맞서 싸우는 동시에 
세계를 감각하는 ‘민감한 판’이 되어야 한다. 
세계의 삶 속에서 순간이 지나간다. 
화가는 모든 것을 망각한 채 ‘바로 그 순간’이 되어야만 클리셰가 아닌 리얼리티를 그릴 수 있다.

 

Still life with drapery, 1895. by Paul Cézanne. oil on canvas. 74.5 x 5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0. 

 

커튼이 있는 정물화(Still life with drapery)는 정물 장르에서 세잔의 가장 뛰어난 작품에 속한다. 
옛 거장들과 달리 세잔은 사물의 질감을 전달하지 않는다. 
경쾌한 색상으로 표현되어 전체 구성의 역동성과 긴장감을 갖게 한다. 
동시에 그림은 형태와 색상의 균형으로 물질 세계의 무결성과 안정성을 갖게 한다. 

화가 ‘ 모리스 드니’는 이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사과는 바로 ‘폴 세잔’의 사과라고 말했다. 
서구 문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알아야 할 세 가지의 사과가 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세잔의 사과이다. 


세 가지의 사과 중 첫 번째 사과는 이브의 사과다. 
이는 유럽 사회를 지탱하는 힘, 성경을 이해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두 번째는 뉴턴의 사과로 합리적 사상과 과학적 사고방식의 근원을 이야기한다. 
마지막은 바로 세잔의 사과인데 세잔은 고흐처럼 많이 알려진 화가는 아니지만, 
그의 사과는 과거 전통적인 사고방식의 미술에서 대상을 바라보는 것과 
다르게 바라볼 수 있는 새로운 예술의 가능성을 개척한 사과로 유명하다. 

 

Still Life with Apples, 1890. by Paul Cézanne. oil on canvas. 35.2 x 46.2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0. 

 

세잔의 사과가 왜 유명한지 조금 더 자세히 알아보자.
세잔의 아버지는 은행원으로 경제적으로 여유로웠던 사람이었다. 
자신의 재력으로 아들을 마음껏 공부시킬 수 있었기 때문에 세잔이 법과대학을 가기를 원했다. 
세잔은 아버지의 권유로 할 수 없이 법과대학에 진학했지만 마음은 늘 다른 곳에 있었다. 
그림에 대한 열망이 있었기에 법 공부는 지루하기만 했다. 
그런 아들의 모습을 지켜본 세잔의 어머니는 아버지를 설득하였다. 
마침내 1861년 세잔은 법 공부를 그만두고 그의 의지를 받아들인 아버지와 함께 
파리로 가 ‘아카데미 쉬스’를 다니면서 본격적으로 그림 공부를 시작했다.

세잔은 그곳에서 일생의 친구인 ‘카미유 피사로’와 ‘아르망 기요맹’을 만나게 된다. 
이후 그는 프랑스 유일의 국립 미술 학교인 ‘에꼴 드 보자르’에 들어가기 위해 
입학시험을 치렀으나 낙방하여 다시 고향 엑상프로방스로 내려가 아버지의 일을 돕게 된다. 
하지만 그림에 대한 꿈을 포기할 수 없었던 그는 1년 뒤 
은행 일을 그만두고 다시 파리로 돌아가 그림에 몰두하였다.

피사로, 기요맹과 함께 그림을 그리며 1863년부터 1866년까지 꾸준히 살롱전에 

출품하였으나 낙선하였고, 바로 낙선전에 참여하였으나 그마저도 주목받지 못하였다. 
이 무렵 낙선전에서 <풀밭 위의 점심 식사>로 유명세를 탄 ‘ 에두아르 마네’를 
친구 소개로 만나게 되면서 인상주의 화가들과 교류하기 시작했다.

기존의 그림에서는 유화물감을 섞어서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인 방법이었다. 
그와 달리 인상주의 화가들은 물감을 섞지 않고 순수한 색으로 대상을 표현하려 했고 
세잔은 그런 새로운 기법에 흥미를 느꼈다. 
하지만 그는 인상주의 화가들이 빛과 색에 지나치게 집착하여 
형태가 또렷이 보이지 않는 그림을 그리는 것이 늘 아쉬웠다. 

인상주의 화가들은 야외에서 해가 지기 전, 즉 빛의 양이 변하기 전에 그림을 완성하려 했고, 
그러다 보면 유화물감의 성질상 짧은 터치로만 붓질을 하게 되어 
외곽선과 깔끔한 면은 표현할 수 없었다. 
따라서 그들의 그림은 항상 형태가 일그러져 보이게 되었던 것이다. 
인상주의 화가 모네의 <해돋이 인상>을 보면 그는 붓 터치로만 해가 뜨는 파리의 풍경을 
표현하려 했고, 결국 그림의 대상이 무엇인지 명확히 알아볼 수 없게 된 것을 알 수 있다.

세잔은 빛에 대한 색의 표현도 중요하지만 그림을 그리는 대상의 변하지 않는 견고한 형태와 
안정적인 구도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인상주의 화가들과 깊게 교류하지는 못했다. 
그는 파리를 떠나 고향 엑상프로방스에 작업실을 차리고 그 변하지 않는 근원을 찾기 시작했다.

 

Still Life Peaches and Pears, 1888~1890. by Paul Cézanne. oil on canvas. 46.2 x 55.3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0. 

세잔은 유독 사과나 오렌지 등의 과일 정물화를 많이 그렸는데 모델이 고정된 포즈를 
오랫동안 취해야 하는 인물화나 날씨의 영향을 많이 받는 풍경화와 달리 
정물은 시간과 날씨에 구애받지 않기 때문이었다. 
정물은 내가 마음대로 위치를 바꿔도 괜찮은 대상이기 때문에 

그의 생각을 담기에 가장 적합한 소재였다.

세잔이 그린 사과가 우리 앞으로 데굴데굴 굴러떨어질 것 같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윤곽선도 그림자도 진하게 그리지 않았다. 
세잔 이전의 사과는 붉은 색채를 기본적으로 사용하고 빛과 그림자, 반사광 등을 넣어 
사과처럼 보이게 하는 정해진 방법으로 그렸다. 

그러나 세잔은 사과를 입체적이고 둥글게 표현하기 위해 

물감을 섞지 않고, 순색으로 붓질을 하였다. 
붓질의 방향이나 터치로 생긴 자연스러운 반짝거림으로, 
보는 사람이 더 직관적으로 사과라고 느낄 수 있게 했다. 
다시 말해 사과라는 ‘구’(동그라미) 형태를 짧은 터치가 아닌 
면과 붓질로 더욱 구처럼 보이도록 풀어내려 한 것이다.

세잔의 그림에서는 또 한 가지 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테이블보로 가려져 얼핏 보면 모를 수 있지만 사과가 놓인 탁자의 왼쪽 부분과 
오른쪽 부분의 높낮이가 맞지 않다는 점이다. 
그는 그림을 그릴 때 원근법이나 시선의 높낮이 등은 신경 쓰지 않았다. 

세잔은 하나의 완성된 그림에서 여러 시점을 동시에 표현하고 있는데 
대상이 가장 그 대상같이 보이는 시점으로 서로를 조립하는 기법을 구사한 것이다. 
다시 말해 접시는 보다 접시다워 보이는 위에서 바라본 모습으로, 생강 단지는 
속이 빈 둥근 항아리 본연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시점으로 그려내는 것. 
즉 대상이 가지고 있는 형태와 성질을 가장 잘 나타낼 수 있도록 표현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의 그림에서 고정된 시점이 아닌 다시점으로 형태의 본질을 
색으로 표현하려 했던 세잔의 시도는 당시에는 인정받기 힘들었지만 그의 사후, 
그에게 영향을 받은 많은 화가들에 의해 세잔의 위대함과 존재감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Apples, Peaches, Pears and Grapes, 1879~1880. by Paul Cézanne. oil on canvas. 
38.5 x 46.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0. 

순수한 색 면으로 대상의 형태를 견고하게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기법은 
동시대 화가 ‘고갱’을 거쳐 야수주의 ‘마티스’에게, 
본질적으로 변하지 않는 형태와 각각의 대상들이 보여주는 다시점은 
입체주의 ‘브라크’와 ‘피카소’에게 영향을 주었다. 

 

Mont Sainte-Victoire. 1896~1898. by Paul Cézanne. oil on canvas. 99 x 78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0. 

 

1880년대 초반 세잔의 가족이 프로방스 지방에 정착한 후 
얼마동안 체류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그 지역에서 계속 살았다. 
이 이동은 파리 중심적이던 인상파들이 세잔의 고향이 있는 
남쪽으로 중심을 옮기는 역할을 하였다. 

호텐스(Hortense)의 형제 중 에스타크(Estaque)에 
생트-빅투아르 산(Montagne Sainte-Victoire)이 보이는 집을 소유하고 있었다. 
1880~1883년 사이에 산을 배경으로 그려진 그림들과 1885~1888년 가단느(Gardanne)에서 

그려진 그림들은 종종 ‘건설기’(The Constructive Period)라고 불리기도 한다. 
1886년에는 세잔의 가족들에게 터닝포인트가 되는 해였다. 
세잔은 호텐스(Hortense)와 결혼하였다.

이 해에, 또한 세잔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세잔에게 

1859년에 산 사유지를 남겼는데, 그의 나이 47세였다. 
1888년에 가족은 편리를 제공하는 넓은 땅이 있는 대저택 Jas de Bouffan으로 옮겼다. 
이 저택은 현재 땅이 줄어들었지만 시 소유로 공공을 위해서 개방되어 있다. 
또한 이 해에 세잔의 친구이던 에밀 졸라(Émile Zola)와의 친분도 깨어졌다.

 

Mount Sainte-Victoire, 1897~1898. by Paul Cézanne. oil on canvas. 81 x 100.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Room Number 410. 

 

세잔은 말한다.
"나는 그 산에 때때로 올라가보곤 했다. 
팔레스트로에서부터 벌써 숲이 나타난다. 벌써 공간의 시작이다.
산타크루스로 인도하는 오솔길을 따라가면서 우리들은 벌써 

어떤 위대한 정적이 심신을 파고드는 것을 느낀다.
도시 안에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서 소란을 피운 뒤고 보면 더욱 그러하다.
애써 나는 쾌락으로 들떠서 빠르게 뛰는 가슴의 고동소리며 숲의 넓고 깊은 호흡을 듣는다.
이처럼 음악도 때로는 '스타카토'로부터 '레가토'로 과도기의 과정없이 뛰어넘는 수가 있다.
우리들의 사고(思考)는 곡식단처럼 묶여있다가 이 지점에 오면 매듭이 풀려 기쁘게 개화(開花)한다.
어쩌면 나는 이런 순간만을 살도록 태어난 것인지도 모른다." 

 

Bathers, 1890~1891. by Paul Cézanne. oil on canvas. 54.2 x 66.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0. 

 

세잔의 작품 Bathers는 유럽 예술의 유서 깊은 전통을 이어 갔지만 
동시에 화단의 학문적 누드에 대한 공개적인 도전이었다. 
Bathers는 잃어버린 시대에 대한 아이디어를 구현한다. 
그는 학교 친구들과 함께 Arc River에서 수영을 즐기는 시골로 갔던 기억에서 영감을 받았다. 

세잔은 관습적인 공식을 따르지 않고 자신의 감각을 표현하려고 애썼기 때문에 
그의 그림은 "원시적"인 그림처럼 "어색하게" 되었다. 
현재의 그림을 포함한 그의 그림은 역동적인 세계가 살아남을 수 없는 
견고함을 표현하는 단단한 피라미드 구조이다.

 

Self Portrait 자화상, 1880~1881. by Paul Cézanne. oil on canvas. 55.5 x 45.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0. 

어느날, 세잔은 밭에서 그림을 그리던 중 폭풍에 갇히고 말았다. 
폭우가 쏟아지는 상황에서 2시간 그림을 그리고 
집으로 가기로 결정했으나 집으로 오는 도중에 쓰러지고 말았다. 
세잔은 지나가던 마차에 발견되어 집으로 돌아왔다. 
그의 집에서 일하는 늙은 집사가 팔과 다리를 주물러 원래 혈색으로 돌아왔다.

이튿날, 그는 계속해서 그림을 그리러 나갔으나 얼마 후에 다시 쓰러졌다. 
그와 함께 일하던 모델이 도움을 요청하여 침대로 돌아왔지만 세잔은 이후로 일어나지 못했다. 
몇일 뒤, 1906년 10월 22일 그는 숨을 거두었다. 
사인은 폐렴이었으며, 그의 고향 Aix-en-Province에 있는 공동묘지에 잠들어 있다. 

 

Blue landscape 푸른 풍경, 1904~1906. by Paul Cézanne. oil on canvas. 82 x 100.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0. 

풍경은 인상파들이 가장 좋아하는 모티브로, 물 속의 진동하는 반사는 보이는 세계의 다양성을 상징한다. 
세잔의 작품에서 반사는 움직이지 않고 물은 얼어 붙은 거울과 비슷하다. 
인상파와는 다른 세계관은 예술가를 그들의 방식에서 멀어지게 했다. 
세잔은 자연에서 순간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하고 변하지 않는 것을 추구했다. 

 

Houses Along a Road (Maisons au bord d'une route) 길가의 주택들, 1881. by Paul Cézanne. 
oil on canvas. 60 x 73.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0. 

 

도로가 회전하는 모티브는 1870년대 후반과 1880년대 초에 
세잔의 그림에서 특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를 통해 작가는 자신의 인상을 표현적이고 간단하게 포착하는 동시에 
그림을 구성하는 효과적인 수단으로 사용할 수 있었다.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도로는 작업 내에서 다양한 평면을 연결한다. 
도로의 굴곡은 세잔에게 자신을 전경과 중간 지대로 제한하는 편리한 방법을 제공했다. 
풍경에는 사람이 없지만 인간 활동의 영역과 관련이 있다. 
통로를 따라 있는 작은 집과 돌담은 사람들이 이 벽 뒤에 남겨진 느낌을 준다.

 

Lady in blue, 1900. by Paul Cézanne. oil on canvas. 73.5 x 90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0. 

세잔의 마지막 여성 초상화 중 하나인 이 작품의 모델은 브레몽 부인(Madame Brémond)이다. 
작품의 색조, 모양 및 색상에서 포비즘과 입체파 기법을 엿볼 수 있다.

 

[영상] Paul Cézanne in The State Hermitage Muse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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