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om of Auguste Renoir.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07.

407 ~ 408번 홀은 오귀스트 르누아르(Auguste Renoir)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오귀스트 르누아르(Auguste Renoir 1841~1919)는 프랑스의 대표적인 인상주의 화가로, 
여성의 육체를 묘사하는 데에 있어 특출난 표현을 선보였으며 풍경화에도 뛰어났다. 
인상파 중에서 세잔의 엄격에 대비되는 가장 아름답고 뛰어나게 화려한 멋을 보인 것은 르누아르이다. 
세잔이 풍경 속에 자연의 정신을 품듯이 르누아르는 여인을 그려서 미의 도취를 자아내고 있다.

르느와르는 1841년 2월 25일 플아스의 리모즈에서 출생하였다. 
석공인 아버지와 재봉사인 어머니 밑에서 가난하게 자란 그는 
4살에 파리로 이사와 7살에 기독교 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가난이 더 심해져 더 이상 르느와르를 학교에 보낼 수 없었던 부모님은 
13살의 그를 학교에서 데려와 도자기에 그림을 그려 넣는 기술 훈련소에보냈다. 

그가 담당한 일은 도자기의 윗그림 그리기였다. 
이 작업이 결국 평생화가로서의 길을 걷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그는 17세가 될 때까지 이 훈련소를 다녔는데, 낮에는 이 곳에서 기술을 배우고, 
저녁에는 무료로하는 드로잉 수업에 가곤 했다. 
르느와르는 그 때부터 아주 뛰어난 재능을 보였는데, 그의 애칭이 루벤스였다는 것과 
그를 제자로 삼겠다고 자청했던 이가 있었다는 것이 이를 잘 나타내 준다. 

그의 부모님은 심각하게 고민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의 아들의 재능을 살려주고 싶었지만, 
당시 화가라는 직업이 가난으로 직통하는 확실한 지름길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림에 남다른 재능과 열정을 가지고 있던 르느와르는 결국 
부모님의 어려운 선택에 힘입어 20세가 되던 1861년에 
국립 에콜 데 보자르에 들어가 글레르의 아틀리에에서 정식으로 그림을 배우게 되었다. 
화가가 되기로 그와 그의 가족이 결심을 굳힌 것이었다. 
그러나 노동자계급의 아들로 태어난 그에게 그 길은매우 힘든 일이었다. 
그림을 그리기 위해 기본적으로 필요한 도구를 살 수도, 모델을 살 수도 없었고, 
먹을 것을 사는 것에도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Lady in black, 1876. by Auguste Renoir. oil on canvas. 55.5 x 65.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07. 

블랙 레이디 (Lady in black) 초상화는 '르누아르 형' 여성의 서정적 

이미지를 만들어내어 자연스러운 조화와 여성스러움을 사로 잡는다. 
인상파의 전성기에 그려진 이 작품은 주로 검은 드레스 이미지에서 복잡한 색상 뉘앙스를 보여준다. 
가벼운 공기 환경의 영향으로 음영이 변하는 검은 색은 넓은 범위에 걸쳐 다채로운 비율로 전달된다.
흰색 커프스와 칼라의 색상 반사 작용은 훌륭하게 보여진다. 

얼굴이 더 부드럽고 세밀하다. 
르누아르 초상화의 특징인 이 기법은 자유로운 진동 브러시 스트로크와 결합됩니다. 
이 작품의 모델은 유명한 음악 출판사 사장의 아내인 마담 아트만 (Madame Artmann)라고 한다. 

 

Portrait of the actress Jeanne Samary, 1878. by Auguste Renoir. oil on canvas. 
105 x 174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07. 

르누아르에게 있어서 여성은 언제나 사랑스러운 매력과 

직접적이고 신선한 지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모네가 풍경화에서 그랬던 것처럼, 르누아르는 초상화에서 

어떤 하나의 순간의 느낌을 전달하려고 노력한다. 
그렇기에 르누아르의 작품 속 모델들은 포즈를 취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생생함과 자연스러움을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여배우 프랑세스 잔느 사마리를 모델로 하고 있는 이 작품은 

잔느 사마리가 19세기 후반의 특징적이지만 다소 무미건조한 듯한 

인테리어를 배경으로 드레스를 입고 있는 전신상으로 묘사되어 있다. 
전체적으로는 약간 수줍은 듯한 자세를 취하고 있는 그녀의 모습, 
장갑을 끼고 포개어 놓여 있는 두 손, 가볍게 안쪽으로 살짝 굽혀져 있는 몸, 
매력적이만 다소 경직된 그녀의 미소 등은 그녀가 대중들 앞에 서 있고, 
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느끼게 해준다.

여기서 대조를 이루는 것은 배경으로 등장하는 응접실과 바로 잔느 사마리이다. 
배경이 되는 응접실의 분위기는 화려하지만 무거운 듯한 느낌이 깃들여져 있고, 
이와는 대조적으로 잔느 사마리는 밝고 가벼운 미소를 머금고 있다. 
또한 분명 어두운 배경 하에서 묘사된 분홍색 드레스의 

아름답고 거품처럼 부드러운 효과와 잔느 사마리의 자연스러운 자태와 

밝은 미소의 결합이 관객들에게 사랑스러움을 느끼게 하는 작품이다.

 

Girl with a Fan, 1880. by Auguste Renoir. oil on canvas. 50 x 6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07. 

부채를 들고 있는 소녀는 여러 차례 르누아르를 위해 포즈를 취했다. 
그녀는 르누아르도 그렸던 La Grenouillere 바 주인의 딸이었다. 
그녀의 아름다움은 고전적으로 배열된 특징이 아니라 젊음의 매력, 그녀의 얼굴의 생생한 색, 
그녀의 눈의 빛, 르누아르가 항상 그의 주제에서 추구했던 그 자질들에 있었다. 
따라서 얼굴이 더 매끄럽게 그려지고 여기에서 세부 사항을 선택할 수 있으며 
손, 드레스, 심지어 부채는 대략적으로 묘사되고 있다.

 

Woman Combing Her Hair, 1887. by Auguste Renoir. oil on canvas. 65.3 x 54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07. 

르느와르는 당시 글레르의 밑에서 함께 수학하며 촉망받던 의학도이자 
부유한 화가 지망생인 바지우의 아파트에서 얹혀 살면서 
모네도 그들과 잠자리를 같이 했고, 시슬리도 얼마 후 같은 건물로 이사오게 된다. 

르느와르는 모델료가 들지 않는 자연을 직접 그리는 데 몰두하였는데, 
이것이 그를 훗날 외광파의 일원으로 묶게 된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르느와르의 운명이 그를 자연에만 몰두하도록 두지는 않았는데, 
운 좋게도 Lise란 18세 소녀를 친구를 통해 알게 된 것이다. 
이 후 그녀는 그가 31세가 될 때까지 그의 작품의 모델이 되어 주었다. 
그의 전기 작품에 자연과 함께 등장하는 여인은 거의 전부가 그녀이다. 

글레르의 스튜디오를 나와 바티뇰에서 함께 살던 르느와르와 그의 친구들에게 
화가 지망생으로의 생활은 매우 힘든 것이었다. 
매일매일 배고픔과 싸워야 했으며, 자기가 칠하고 싶은 물감을 살 돈이 없어, 
온갖 색으로 그들의 캔버스를 물들일 순 없었지만, 그들은 꿈을 가지고 있었고, 
자연에 대한 관찰의 즐거움을 공유하고 있었기에 즐거운 나날을 보낼 수 있었다. 
햇빛이 쏟아지던 숲 속에서 캔버스를 펼쳐 둔 르느와르와 그의 친구인 모네, 
시슬리에게 자연은 시시각각 그 모습을 달리하는 경외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당시의 젊은 화가들이 화가로서 인정을 받는 것은 살롱에서 그들의 작품을 인정받는 것이었다. 
그러나 다른 인상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르느와르의 그림은 
고전과 신화로 가득한 심사위원들의 마음을 녹일 수가 없었다. 
르느와르는 분개했지만 이런 이유로 자신의 기법을 바꾸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Young Girl in a Hat, 1892. by Auguste Renoir. oil on canvas. 41.3 x 32.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07. 

1890년대에 르누아르는 모자를 쓴 젊은 여성의 주제를 자주 그렸다. 
세기 말의 멋진 여성용 모자는 르누아르의 관심을 더욱 불러 일으켰다. 
르누아르는 때때로 그의 모델을 위해 특히 특이한 모자를 주문했다. 
19 세기 후반에 유행했던 모자인 샬럿은 그 기간 동안 여러차례 
그림과 석판화에서 르누아르에 의해 묘사되었다.

 

Young Woman in a Flowered Hat, 1892. by Auguste Renoir. oil on canvas. 41.5 x 33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07. 

여성은 사상자나, 행동이나 가정 주부, 혹은 자연의 창조물로 그려진 것이 아니라, 
자연의 창조자이거나, 혹은 그 장식품으로 그려져 있다. 
그러므로, 자연의 가장 활기찬 색깔, 풍부한 정원 꽃들은 여기서 꽤 적절하다. 
이 작품에서 대표되는 여성은 보통 부드럽고 타원형인 얼굴과 
작고 동그란 코를 가진 여성의 일반적인 르느와르 타입과는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다. 
아마도 이것은 모델이 아니라, 초상화를 의뢰한 여성일 것이다. 
캔버스가 구식이라는 사실은 모델들의 규칙적인 사진들이 

날짜가 맞지 않았기 때문에 시사하는 바가 많았다.

 

Woman head, 1876. by Auguste Renoir. oil on canvas. 38.5 x 36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07. 

르누아르의 작업에서 초상화는 주요 장르가 되었고, 
주인공은 살아 있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의인화하는 여성이다. 
이 모델은 헤어 스타일의 외모와 성격 모두에서 
이번 아티스트의 작품에 등장한 여러 캐릭터와 유사하다. 
이 모델은 안나(Anna)라고 한다. 
스케치는 이미지가 서정적이고 여성스러운 매력으로 가득 차 있다. 
별도의 붓놀림의 자유와 유연성, 색상 관계의 부드러운 뉘앙스 및 
가벼운 공기 환경에 대한 관심은 최근 르누아르 그림 스타일의 특징이다.

 

Woman on a Staircase, 1876. by Auguste Renoir. oil on canvas. 167.5 x 65.3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07. 

1870년 기병대로 2년 간의 프러시아전쟁 기간을 보내고 파리로 돌아온 르느와르는 
동료들과 자신들만의 협회를 조직하여 전시회를 열 것을 제의하였고, 
그의 총감독 하에 1874년 첫 번째 전시회를 열게 되었다. 
그러나 결과는 너무나 참담한 것이었다. 
그들은 비평가들로부터 미쳤다는 소리를 들었고, 

관람객들은 매우 적었으며, 재정적인 실패를 맛보아야 했다. 


결국 이듬해 재정적인 곤란을 해소하기 위하여 자신들의 작품들을 

경매에 부쳤지만 반응은 매우 냉담할 뿐이었다. 
그들의 재정적인 힘이 되주었던 부유한 바지유의 전시와 더불어 이 사실은 
그들에게 앞으로의 인생을 심각하게 재고해야만 할 것을 강요하였다. 

그러나 다행히도 이 무렵 그의 인생에 큰 전환점이 되어준 

화상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가 바로 뒤랑-루엘 이었다. 
그는 프러시아 전쟁기간에 런던에서 처음 모네와 시슬리를 알게 되었는데, 
르느와르는 아마 모네를 통해 알게 된 것으로 보인다. 
뒤랑-루엘을 통해 르느와르는 다른 여러 화상들을 만나고, 
자신의 후원자들을 조직하게 되면서 커다란 힘을 얻게 된다. 
즉 재정적인 어려움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게 된 것이다.

 

Man on a Staircase, 1876. by Auguste Renoir. oil on canvas. 167.5 x 65.3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07. 

이후 르느와르는 살롱에 다시 한 번 그의 작품들을 출품하게 되는데, 
1878년과 79년 두 차례 모두 살롱의 심사를 통과하게 된다. 
특히 79년 그는 <샤르팡티에 부인과 자녀들의 초상>으로 살롱에서 엄청난 찬사를 받게 된다. 
이때부터 그려진 작품들은 소위 살롱의 검증하에 출품되는 것으로 인식되어져 
세계적으로 뻗어나가게 되어, 르느와르에게 부와 명성을 허락하게 된다. 
자신만의 스튜디오를 파리에 갖게 되고 르느와르는 

편안하게 작품 활동에만 몰두할 수 있게 되었다.

40세가 다 된 르느와르에게도 이 무렵에 사랑이 찾아왔는데, 
무려 19살이나 연하인 20세의 모자상 Aline Charigot가 그 주인공이었다. 
1880년 처음 만난 그들에게서 5년 뒤 그들의 아들 Pierre가 태어나고, 10년 뒤 결혼하게 된다.

젊은 화가 지망생을 굶주림과 싸워야 했던 그에게 이제 더 이상의 시련은 없는 것처럼 보였다. 
사랑하는 아내와 세 아들, 남부러울 것이 없는 그의 명성은 
그의 지난날의 고생을 모두 잊게 해줄 만한 것이었다. 
그의 작품 또한 여러 가지 전개 과정을 거쳐 발전과 성숙, 완성미를 모색하게 되는데, 
여기에는 알제리, 이탈리아 등으로의 여행이 힘이 되주었다. 

그는 아탈리아로의 그림 여행을 통해 라파엘과 앵그르의 작품들을 자세히 관찰하게 되고, 
그 결과 자신의 작품에 형태를 잡아 줄 보다 많은 윤곽선을 넣고, 
색조를 좀더 차갑게 해야만 한다는 것을 느꼈다. 
물론 어떤 이들은 르느와르의 작품의 이러한 변화를 달갑게 여기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이 때부터 그려진 그의 작품들은 따라서 인상주의 작품이라기보다 고전주의 작품에 가까웠다. 
물론 그의 그림이 가지는 사랑스러운 질감과 보풀거리는 듯한 느낌을 잃어버린 것은 아니었지만, 
좀더 어두워진 색조와 분명해진 윤곽선은 이전과 분명 구별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르느와르의 새로운 시도는 그리 성공하지 못하였다. 
비평가들이나 후원자들에게는 낯선 것이 분명했고, 그

들은 이런 르느와르의 변화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결국 르느와르는 새로운 변혁을 시도하여 짙은 색조를 화면에서 격감시켰지만, 
고전에 대한 선망은 죽는 날까지 감해지지 않았다고 한다. 
이는 그가 드가를 평생 찬사했음에서 보여진다.

 

In The Garden, 1885. by Auguste Renoir. oil on canvas. 170.5 x 112.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07. 

그림의 주인공은 맑은 날에 조용한 화려한 정원에서 쉬고 있는 어린 소년과 소녀다. 
연한 회색의 한 청년이 손으로 소녀를 부드럽게 붙잡고 다른 한 손은 허리에 있다. 
그는 목이 마른 표정으로 그녀의 달콤한 얼굴을 보고, 그녀의 아름다움에 감탄한다. 
그 반대의 소녀는 보는 사람을 바라본다. 그녀의 눈은 조금 사려 깊다. 
왜냐하면 그녀는 방금 그녀의 사랑하는 아내가 될 제안을 받았기 때문에, 
그녀의 모든 생각은 이것으로 가득 차 있다. 
그림에는 뽑은 꽃, 관능적인 외모, 부드러운 감동 등등으로 로맨스가 묻어 있다.

르누아르는 인상주의의 가장 유명한 대표자이자 설립자이기도 하다. 
그는 초상화와 예술을 자연스럽게 묘사했으며 여성의 아름다움에서부터 
자연의 장엄함에 이르기까지 아름다움의 진정한 감정가였다.

르누아르는 작품 속 인물들의 매혹적인 아름다움으로 청중의 동정을 얻었다. 
섬세하고 아름다운 여아를 묘사한 많은 수의 그림은 

그 당시 어떤 남자도 무관심하게 만들 수 없었다. 
르누아르의 많은 그림은 밝은 느낌을 묘사한다. 
그 주된 것은 의심 할 바 없이 사랑이다. 

이 그림을 그릴 때, 르누아르는 인상주의 화가의 표준 규칙에서 조금 벗어났다. 
이번에는 그림이 단지 초상화가 아니며 저자가 항상 보여주지 않으려고 시도한 스토리가 있다. 
이 작품은 영혼을 해치고 관객을 움직이기 위해 고안된 것이 아니라 평온의 정신을 담고 있다. 
인상주의 화가들은 엄숙하게 회화 작품을 특정 회화 장르의 틀 속에서 만든 것으로 간주했다.

 

In The Garden, 1883. by Auguste Renoir. oil on canvas. 54.5 x 65.3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07. 

순수한 풍경이 비교적 드물게 만나는 르누아르의 작업에서 이 그림은 특별한 장소를 차지한다. 
1883년 여름, 르누아르는 라만체 해안의 작은 휴양지이자 어촌인 이포트로 갔다. 
그의 친구의 추천으로 르누아르는 Yport 시장인 Alfred Nunès의 집에 머물면서 
그의 아이들의 큰 초상화 한 쌍을 그렸다. 
목가적이지는 않지만 평화로운이 두 캔버스와는 달리 작가는 자신을 위해 현재의 그림을 그렸고, 
일반적으로 작가와는 무관한 낭만주의 색조로 완전히 다른 맥락에서 실행된다.

 

Party in the Country at Berneval, 1898. by Auguste Renoir. oil on canvas. 60.3 x 73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07. 

기지에 넘치고 날카로우며, 독설적이 성격의 소유자 르느와르는 
유달리 라이벌 의식이 강했지만, 드가에게만은 예외였는데, 
이는 그가 매우높이 평가한 앵그르의 기법을 드가가 충실히 재현하여 발전시켰기 때문이었다. 
르느와르 이상으로 드가를 찬미한 사람은 없었다고 한다. 

결국 르느와르는 다시 한번 새로운 변혁을 꿈꾸게 되는데, 
자신의 작품에 보다 많은 빛과 밝음, 기쁨을 집어넣은 것이었다. 
고전적 기법과 결합한 그의 이런 새로운 변혁은 매우 성공적이었다. 
그는 그의 작품에 대해 살롱 뿐 아니라 정부의 인정을 받았고, 
심지어 그림에 문외한인 사람들에게조차 찬사를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심각한 관절염은 그를 행복 속에만 있게 두지 않았다. 
날이 차가워지면 그는 나갈 수도 없었고, 흐리거나 비가 오는 날은 그를 괴롭게 했다. 
르느와르가 그의 노년을 아내와 프로방스 지방의 칸에서 보낸 것은 아마도 이 영향이 컸을 것이다. 
강수량이 매우 적은 프로방스지방의 일기는 르느와를로 하여금 작업에 몰두할 수 있도록 해주었고, 
손에 묶어 흔들리지 않게 한 붓은 예전 같은 붓의 터치를 어느정도 가능하게 해주었다.

1916년 그의 아내가 죽고 3년 후 그가 사망할 때까지 그는 칸에 살았으며, 
80세가 넘도록 작품 활동을 계속했다고 한다.

 

Room of Auguste Renoir.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08.

408번 방은 1883년에서 1917년 사이에 유명한 인상파 화가 
르누아르(Auguste Renoir 1841-1919)의 풍경화, 정물화 등을 전시하고 있다. 

1858년 르누아르는 17살의 나이로 생활비를 벌고자 
문장조각가로 일하던 형 앙리를 통해 부채나 장롱을 채색했다. 
1862년 르누아르는 파리 국립고등미술학교 경쟁 시험에 합격했으며 
샤를 글레르의 공방에 들어가는데, 공방에서 그는 클로드 모네, 
프레데리크 바지유와 알프레드 시슬레를 만나게 된다. 
퐁텐블로 숲에서 자주 그림을 그리며 그들 네 명은 굳은 우정을 나눴다.

르누아르와 글레르와의 관계는 점점 악화되면서 막을 내렸으며, 
1864년 글레르가 은퇴하자 르누아르는 보자르를 그만 둔다. 
그 와중 르누아르는 살롱에서 작품을 공개하는데, 이 처녀작(에스메랄다 1864)은 
확실히 성공을 거두었지만 그는 전시회 이후 이 작품을 파괴한다. 
이 시기 작품들은 초상화 쪽에서는 앵그르와 드오당크의 영향이, 
또 특히 정물화 쪽에서는 귀스타브 쿠르베의 영향이 돋보이지만 
몇몇 주제에서는 외젠 들라크루아의 영향 역시 볼 수 있다.

 

Room of Auguste Renoir.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08.

르누아르는 1881년 이탈리아를 여행하며 라파엘로에 경탄하고, 

특히 폼페이의 벽화에 감명을 받았는데, 그 후는 데생의 부족을 생각하여 

형상을 나타내는 작품으로 제작 경향을 바꾸었다. 
그러나 그것도 나중에는 이전보다도 한층 빛에 용해되어 리드미컬한 제작으로 변하지만, 
후기는 오로지 나부(裸婦)를 추구하여 여인의 육체에 한없는 아름다움을 찾고서는 
그 빨간 색조로 순화된 작품을 남기고 있다. 

르누아르는 빨강, 노랑, 파랑, 초록 등의 색깔을 선명하게 칠하여 색채 화가라 불리었고, 
특히 적색의 표현에 뛰어나 근대 최대의 색채 화가로 알려져 있다. 
르누아르의 생애는 평온했으나 말년을 심한 신경통으로 고생하고, 
1899년부터는 남프랑스 해안으로 옮겨 살았다. 
이어 카뉴에 정주하여 오로지 제작만을 계속, 최후에는 영광을 누리며 홀로 들어앉아, 
의자 위에서 화필을 쉬지 않고 아름다운 나부의 제작을 계속했다. 
주요 작품으로 〈해수욕장의 풍경〉, 〈대수욕〉, 〈목욕하는 여인들〉, 〈큰길〉 등이 있다.

In the garden, 1885. by Auguste Renoir. oil on canvas. 112.5 x 170.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08. 

르느와르는 마흔 가까이에 18살 어린 여인을 만나 가정을 이룬다.
형편상 결혼식은 포기했고, 첫아들이 4살이 되던 해 공식 혼인한다.
르느와르의 부인은 헌신적이어서, 꽃 그리기 좋아하는 남편을 위해서
새벽에 정성들여 예쁜 꽃을 골라 사오고, 자신의 지병을 숨길 정도였다고 한다.

르느와르는 자그마치 5,000여 점의 작품을 남겼다.
르느와르는 생생한 빛, 강렬한 색조 표현, 자유로운 붓 터치로 채색해 
인물에게 초점을 맞추어 솔직하고 친근한 구성으로 그림을 그렸다. 

 

Roses and Jasmine in a Delft Vase, 1880~1881. by Auguste Renoir. oil on canvas. 
81.5 x 6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08. 
장미와 쟈스민이 담긴 델프트 화병

 

roses in a vase, 1910~1917. by Auguste Renoir. oil on canvas. 61.5 x 50.7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08. 

 

Landscape. Le Cannet, 1902. by Auguste Renoir. oil on canvas. 14 x 19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08. 

 

이 작품은 1902년 르누아르가 정착한 코트 다 쥐르에서 제작되었다. 
이 그림은 칸 교외 르 칸에 있는 예술가의 집을 묘사한다. 
풍경은 초상화 또는 장르 작품의 구성 요소뿐만 아니라 독립적인 주제로도 
르누아르의 작업에서 두드러진 위치를 차지한다. 

르누아르는 도시와 특히 시골 풍경을 모두 그렸다. 
모든 인상파와 마찬가지로 그는 자연의 순간적인 상태를 전달하면서 야외에서 일했다. 
르누아르는 풍경을 그리는 특별한 스타일의 자유롭고 유동적인 화법을 개발했다. 
변덕스러운 붓놀림과 감미로운 색채 배합은 창의력 후반기에 
르누아르를 바꾸지 않은 쾌활한 모습을 표현한다.

 

Harbor in Marseille, 1907. by Paul Signac. oil on canvas. 55 x 46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08. 

408번 홀에는 르누아르 이외 다른 화가의 작품도 전시되어 있다.
폴 시냐크(Paul Victor Jules Signac, 1863~1935)는 프랑스의 화가이다.
처음에는 모네의 영향을 받아 인상파 화가로 출발하였다. 
그 후 쇠라(Georges Pierre Seurat)와 함께 신인상주의의 지도적 존재가 되었다. 
점으로 그리는 '점묘법'을 사용하여 그림을 그린 것으로 유명하며, 

단순하고 신선한 수채화도 많이 남겼다. 

그는 작품 심사 없이 누구나 출품할 수 있는 '앙데팡당 전람회'의 창시자이기도 하다. 
작품으로 <생트로페 항>, <마르세유 항> <크리우르 항> 등이 있다. 
저서로 신인상주의의 이론서가 된 <들라크루아부터 신인상주의까지>가 있다.

 

Port Manech, 1896. by Henry Moret. oil on canvas. 60.5 x 73.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08. 

앙리 모레 (Henry Moret 1856~1913)는 프랑스 인상파 화가였다. 
프랑스 지도에서 퐁타방(Pont-Aven)을 지나가는 강을 따라 

내려가다 보면 바다와 만나는 곳에 마네끄 항구가 있다.
온갖 색이 다 사용된 것 같은 작품을 보다가 문득 퐁타방에 모여 있던 화가들의 

오색 숨결이 이곳까지 흘러온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언덕에는 꽃들이 무리를 지어 눈을 어지럽게 하고 있고 

바다도 이에 질세라 다양한 색으로 몸을 바꾸고 있다.
건너편 봉우리에는 계절이 오고 가는 바다를 지키는 등대가 긴 점으로 서 있다. 
다음 계절은 어디쯤 오고 있는지 물어 보고 싶다.

모레의 상관인 빌레트는 모레를 부대가 주둔하고 있던 

로링앙 지역의 화가인 에르네스트 코롤러에게 소개한다.
코롤러는 주기적으로 파리 살롱전에 출품을 하는 아카데믹 기법의 화가였다. 
그는 전통 기법뿐만 아니라 외광파 기법도 모레에게 가르쳤다.

 

View of the Church of Santa Maria degli Angeli, near Assisi, 1909, by Henri Edmond Cross. oil on canvas, 
73.5 cm X 92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08

앙리 에드몽 크로스(Henri Edmond Cross, 856-1910)는 프랑스 화가이자 판화가였다.
신인상주의(Neo-Impressionisme)파 화가로 분류되는 에드몽 크로스의 그림 세계는 
본래 사실주의 화풍이었는데, 모네를 만나면서 밝은 빛이 가득한 인상주의 화풍으로 바뀌었다.
앙리 에드몽 크로스는 1856년 5월 20일, 프랑스의 두에(Douai)에서 

영국인 어머니와 프랑스인 아버지 사이에 태어났다. 
10살 때부터 릴(Lille)의 보(Beaux) 예술학교에서 공부했으며, 데생과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1876년 파리에 나와 활동하면서 마네(Edouard Manet, 1832-1883)의 영향을 받았으며 
1881년에는 크로스(Cross)라는 영어 이름으로 첫 전시회를 개최했다. 
1883년 프랑스 남부로의 여행과 모네(Claude Monet)를 만난 뒤로 
특히 사실주의의 어두운 색채에서 인상주의의 밝은 화풍으로 바뀌게 돤다.

1884년 쇠라(Georges Pierre Seurat)와 시냐크(Paul Signac)를 만나 
교류하면서 신인상주의의 점묘법에 몰두하게 되었다. 
이때 '독립예술가협회(the Société des Artistes Independants)'의 일원으로 
앵데팡당전에 출품한 그의 작품에서 이미 점묘주의 회화를 볼 수 있다.

신인상주의 풍경화가 크로스는 1904년 생트로페(Saint-Tropez)에서 시냐크와 함께

여름을 보내면서 마티스(Hemi Matisse)를 알게 되었고, 그에게서

점묘주의의 영향을 받으면서 화려하고 온화하면서도 쾌락적인 화풍을 창조하게 된다. 

이후로 신인상주의를 이끌어가는 대표자들 가운데 하나가 되었고, 특히 프랑스 남부와 베니스,

이태리 등의 이탈리아의 도시와 숲, 바다 근처의 풍경을 주로 그렸다. 
직감적인 성격의 소유자로 색체 감각이 뛰어나고, 수채화를 잘 그렸으며, 
표현주의적이며, 상상력이 풍부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앙리 크로스는 이탈리아로 여행하는 동안 페루자와 아시시의 여러 풍경을 제작했다. 
이 작품을 제작하는 데 사용되는 기법인 점묘법은 작은 페인트 점에 색을 적용하여 
작가가 복잡한 색조를 순수한 색으로 나누고 멀리서 눈으로 결합하는 페인팅 방법이다. 
이런 스타일은 종종 분열주의 또는 신인상주의로 묘사된다. 
인상파는 자연에 대한 경험적 태도를 보였고 신인상파는 빛과 색에 대한 
과학적 이론을 바탕으로 자신 만의 방법을 만들었다. 
여기에서 캔버스에 동일한 붓놀림을 꼼꼼하게 체계적으로 적용하여 

장식용 컬러 모자이크 효과를 만들어 냈다.

 

In the living room, 1900. by Étienne Moreau-Nélaton. oil on canvas. 60 x 50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모로우 넬라퉁(Adolphe Étienne Auguste Moreau-Nélaton 1859~1927)은 
프랑스 화가, 미술 수집가 및 미술사 학자였다. 
그의 대규모 컬렉션은 오늘날 프랑스 국립 박물관에서 전체적으로 소장하고 있다.
모로우 넬라퉁은 파리에서 태어나고 죽었다. 

1882년 모로우 넬라퉁은 고등사범학교(École Normale Supérieure)를 

방문한 후 화가가 되기로 결정했다. 
1885년 그는 Salon de Paris 에서 처음으로 전시회를 열었다. 
가족 장면이 그의 주요 주제였지만 그는 또한 여러 풍경도 그렸다. 

 

[영상] Auguste Renoir in Hermitage Muse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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