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om of Paul Gauguin.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1.

411, 412번 홀에는 포스트 인상파의 주요 대표자 중 한 명인 
폴 고갱(Paul Gauguin, 1848~1903)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폴 고갱(Paul Gauguin)은 파리에서 태어났다. 
생전에는 그리 평가받지 못하였으나 오늘날에는 인상주의를 벗어나 
종합주의 색체론에 입각한 작품을 남긴 화가로 널리 인정받고 있다. 
생의 마지막 10여 년을 타히티를 비롯한 프랑스령 폴리네시아에서 생활하며 
작업하였고 이 시기 작품이 그의 대표작이 되었다.

고갱의 작품은 파블로 피카소나 앙리 마티스와 같은 프랑스 아방가르드 작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고갱 사후 파리의 아트딜러 앙브루아즈 볼라르는 
두 번의 유작전을 파리에서 개최하였고 그제서야 명성을 얻게 되었다. 
고갱은 상징주의를 대표하는 인물 가운데 하나로 회화뿐만 아니라 
조각, 판화, 도예, 저술 등의 다방면에서 작품을 남겼다. 
고갱의 화풍은 클루아조니즘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으며 

대표작들의 주제는 원시주의에 바탕을 두었다.

폴 고갱은 1848년 6월 7일 파리에서 아버지 클로비스 고갱과 어머니 알린 샤잘 사이에서 태어났다. 
당시 유럽에서는 1848년 혁명이 한창이었다. 
그의 아버지 클로비스는 당시 34세로 오를레앙에서 이주한 

사업가 집안 출신의 자유주의 언론인이었다. 
클로비스는 신문에 낸 기고문 때문에 프랑스 당국으로부터 추방령을 받았다. 
어머니 알린은 당시 22세로 인그레이빙 작가였던 앙드레 샤잘과 

사회주의 활동가였던 플로라 트리스탕의 딸이었다. 
트리스탕은 앙드레 샤잘의 폭력과 학대 때문에 결별하였다.

폴 고갱의 외할머니였던 플로라 트리스탕은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는 유명한 구호를 최초로 제안한 사람이다. 
귀족의 사생아였고 그로 인해 페루와 인연이 있던 트리스탕은 

혁명 강연을 다니다 보르도에서 1844년 병사하였다. 
폴 고갱은 외할머니를 이상화하여 흠모하였으며 그녀의 저술을 평생 가지고 다녔다. 
1850년 프랑스에서 더 이상 살 수 없게 된 클로비스는 장모인 트리스탕의 연줄을 통해 
페루에서 언론인 경력을 계속 쌓고자 하였다. 


클로비스는 가족을 동반하고 여행길에 올랐으나 심장마비로 사망하였고 
페루에는 아내 알린과 18개월 된 폴 고갱 그리고 2살 반이었던 누나 마리만이 도착하게 되었다. 
다행이 페루에서 알린을 맞이한 외종조부는 

차기 대통령직이 확실한 정치인이었고 알린과 식솔을 환대하였다. 
훗날 고갱은 페루에서의 시기를 그의 생애에서 가장 풍족하고 행복한 때로 회상하였다.

 

Room of Paul Gauguin.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1.

1854년 후견자가 실각하자 알린 가족은 더 이상 페루에 머무를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그녀는 아이들을 데리고 남편의 조부인 기욤 고갱이 살고 있는 오를레앙으로 갔다. 
그러나 오를레앙은 알린의 어머니와 배다른 귀족 형제인 트리스탕 모스코소 가문이 
영향력을 행사하는 곳이었고 알린은 이들의 괴롭힘을 피해 다시 파리로 돌아갈 수 밖에 없었다. 
알린은 파리에서 바느질을 하며 생계를 유지하였다. 

고갱은 지역의 학교 두어 곳을 옮겨 다니다 명문으로 평가되던 
루아레의 라 사펠-상-메스밍에 있는 카톨릭계 신학 소학교로 편입하였다. 
고갱은 이 학교에서 3년을 보낸 뒤 파리에 있는 해군 예비학교인 로리올 학원에 입학하였다. 
얼마 후 고갱은 다시 오를레앙의 리시 잔 다르크 학교로 편입하여 그곳에서 졸업하였다. 
졸업 후 구한 직업은 상선 해병을 위한 도선사였다. 
3년간 도선사 생활을 한 고갱은 프랑스 해군에 입대하여 2년 동안 복무하였다. 
1867년 7월 7일 어머니 알린이 사망하였으나 고갱은 누나 마리가 
인도까지 달려와 알려주기 전까지 몇 개월 동안 그 소식을 알지 못했다. 

1871년 파리로 돌아온 고갱은 증권회사에 취직하였다. 
가족과 친한 지인이었던 구스타프 아로사가 마련해 준 자리로 취직 당시 고갱의 나이는 23세였다. 
고갱은 성공한 파리지앵 증권 중개인이 되어 11년을 근무하였다. 
1879년 고갱의 수입은 연간 3만 프랑으로 

2008년 기준으로 환산할 때 12만 5천 달러 정도가 된다. 
1억 5천만 원이 넘는 거액이다. 
고갱은 미술품 거래에서도 많은 돈을 벌었다. 
그러나 1882년 파리 증권시장이 붕괴하면서 그는 더 이상 증권 거래로 
수입을 얻을 수 없게 되었고 전업 화가가 되기로 결심한다.

1873년 고갱은 덴마크 출신의 메테-소피 가드(1850년 – 1920년)와 결혼했다. 
이후 10년 동안 살면서 둘은 다섯 명의 자녀를 두었다. 
1884년 가족은 코펜하겐으로 이주했다. 
그는 생계를 위해 방수포 판매를 했지만 실패했다. 
고갱은 덴마크어를 하지 못했고 덴마크 사람들은 프랑스제 방수포를 사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내인 가드가 외교관을 위한 프랑스어 수업을 하면서 가족의 생계를 떠안았다. 

 

Room of Paul Gauguin.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1.

11년간 이어져 오던 중산층의 결혼 생활은 고갱이 전업 화가가 되면서 주저 앉았다. 
살림이 급격히 기울자 아내는 고갱에게 떠나달라 요구하였고 고갱은 1885년 파리로 돌아갔다. 
부부가 마지막으로 만난 것은 1891년이었고 1894년에 가드는 결별을 선언하였다.

증권회사에 입사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던 1873년 고갱은 취미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당시 그는 파리 9구에 살고 있었는데 근처에 종종 인상파 화가들이 모이는 카페가 있었다. 
고갱은 카미유 피사로와 친분을 맺고 이들과 어울렸다. 
고갱은 일요일에 피사로를 방문하여 채소밭에서 그림을 그렸다. 

1877년 고갱은 "다리를 건너 빈곤층이 사는 신시가"인 
보지라르 구역에 화실이 딸린 집을 마련하고 이사했다. 
그는 여기서 전직 증권 중계인이자 화가로 전업한 에밀 슈페네커와 친밀한 사이가 되었다. 
고갱은 <보지라르의 채소밭>과 같은 그림을 1881년과 1882년 
인상파 전시회에 출품하였으나 멸시를 당했다. 
하지만 이 그림은 오늘날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1882년 주식시장 붕괴는 미술시장 역시 위축시켰다. 
당시 인상주의 화가들의 작품을 취급하던 아트딜러 가운데 
가장 큰 손이었던 폴 뒤랑 루엘 역시 큰 타격을 입었고 
고갱과 같은 신규 작가의 작품을 구입할 여력은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고갱은 2년간 전속 계약을 맺고 작업하였으며 
느리긴 하지만 차츰 인지도를 쌓게 되었다. 

2년 동안 고갱은 피사로와 함께 작업하였으며 간간히 폴 세잔과도 작업하였다. 
1883년 10월 폴 고갱은 피사로에게 자신이 어떠한 댓가를 치르고서라도 
전업 화가의 길을 걷기로 결심했으니 도와달라는 편지를 썼다. 
이듬해 1월 고갱은 가족들과 함께 루앙으로 이사했다. 

루앙은 파리보다 집값이 싸지만 멀지는 않아서 고갱은 여름이 오면 
피사로를 만나러 갈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였다. 
그러나 이런 모험은 그해 말 메테가 아이들을 데리고 코펜하겐으로 가면서 끝났다. 
고갱은 1884년 11월 자신의 작품과 도구를 코펜하겐으로 보내고 곧이어 자신도 아내에게 갔다. 
이때 보낸 작품들 몇 점은 아직도 코펜하겐에 소장되어 있다. 
앞서 서술한 것처럼 그들의 코펜하겐 삶은 녹녹치 않았고 1년여 만에 고갱은 파리로 돌아갔다. 

고갱은 6살난 아들 클로비스와 함께 파리로 돌아왔다. 
다른 아이들은 코펜하겐에서 메테가 키웠다. 
파리의 미술계는 다시 돌아온 고갱을 반기지 않았다. 
겨울이 닥치자 고갱은 밑바닥 일들을 하며 혹독한 빈곤을 겪었다. 
클로비스가 병을 앓게 되자 고갱은 누나 마리의 돈으로 아들을 기숙 학교에 입학시켰다. 

1885년 한 해 동안 고갱은 몇 점 밖에 그림을 그릴 수 없었다. 
1886년 8회차이자 마지막이었던 인상파 전람회에 고갱은 19 점의 그림과 목판화를 출품하였다. 
이 때 전시된 작품은 대부분 루앙이나 코펜하겐에서 그린 것으로 새로 작업한 것이라곤 
예전에 그렸던 <목욕하는 여인>의 누드 위로 옷을 덧입힌 것이 고작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펠릭스 브라크몽이 고갱의 작품 하나를 샀다. 
이 전시회는 당대 아방가르드의 선두로 평가받던 조르주 쇠라의 작품도 전시하였는데 
고갱은 쇠라의 신인상주의니 점묘법이니 하는 것을 경멸하였다. 
이는 인상주의 전람회를 주선하고 쇠라를 초대한 피사로와 

의견 대립으로 이어졌고 결국 둘은 절교하였다. 

 

Room of Paul Gauguin.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1.

고갱은 1886년 여름을 브르타뉴 반도의 퐁타벤에서 보냈다. 
고갱이 이곳을 고른 이유는 무엇보다 물가가 쌌기 때문이다. 
그러나 얼마지나지 않아 이곳에 젊은 화가들이 몰려든다는 것을 알아챘다. 
고갱은 다혈질에 권투와 펜싱을 즐기는 사람이었지만 
이 느긋한 휴양지에서 새로운 친분을 쌓는데는 어려움이 없었다. 

이 시기 고갱은 주로 풍경화를 그렸다. 
퐁타벤의 화가 모임을 주도하는 사람은 찰스 라발로 고갱에게 
파나마와 마르티니크의 이국적 풍광에 대해 이야기하는 걸 즐겼다. 
이 여름에 고갱은 제8차 인상파 전람회에 출품하였던 피사로 화풍의 
누드화를 찢어버리고 대신 <브르타뉴의 양치는 소녀>와 같은 풍경화를 그렸다. 

당시 퐁타벤에는 영국의 랜돌프 칼데콧이 그린 삽화를 사용한 브르타뉴 여행 안내서가 
돌아다니고 있었는데 고갱은 이 안내서의 그림들을 의도적으로 따라 그렸다. 
그러면서 새로 사귄 화가들 처럼 자신의 작품도 보다 원색을 많이 쓰는 화풍으로 
변화를 시도하면서 브르타뉴 지역의 소녀를 소재로한 그림들을 그렸다. 
이때의 습작들은 나중에 파리로 돌아와 
<네 명의 브르타뉴 여성>과 같은 작품을 제작하는 바탕이 되었다. 

고갱은 라발의 권유대로 파나마와 마르티니크를 여행하였고, 
여행 뒤엔 다시 찰스 라발, 에밀 베르나르, 에밀 슈페네커를 비롯한 
여러 화가들과 함께 퐁타벤을 방문하였다. 
이들은 상징주의를 내세우고 퐁타벤 화파를 결성하였다. 
고갱은 유럽의 전통적 화풍, 특히 인상주의가 상징주의의 입장에서 볼 때 
너무나 부족하다고 여겼고 아프리카와 동양의 미술이 갖는 강렬함에 끌렸다. 
당시 유럽에선 특히 일본의 채색판화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었다. 

 

Miraculous Spring (Nave nave moe), 1894. by Paul Gauguin. oil on canvas, 74 X 100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1.

이 작품은 고갱이 폴리네시아를 처음 여행한 후 파리에서 만들어졌다. 
오세아니아의 이국적인 세계는 원시적 자연성을 보존한 분위기로 고갱을 사로잡았다. 
이 작품은 타히티의 기억과 만물의 조화에 대한 낭만적인 꿈을 모두 구현했다. 
타히티 여성의 이미지는 삶의 여러 단계를 상징한다. 
수면에 잠긴 그녀의 머리 위로 빛나는 젊은 섬사람은 처녀 순결의 화신이다. 
두 번째 소녀는 과일을 손에 들고 이브처럼 그와 함께 먹을 준비가 되어 있다. 
풍경의 깊숙한 곳에서 원주민들은 신비한 고대 신인 우상 주위에서 춤을 춘다. 

고갱은 타히티 (1891-1893)에 처음 머무르고 돌아와 거의 2년 동안 파리에서 이 작품을 그렸다. 
오세아니아의 이국적인 세계는 원시적 단순함의 보존으로 보았던 
인간과 자연의 조화로 작가의 상상력을 포착했다. 
이 작품은 타히티에 대한 그의 기억과 지구상의 모든 사람의 조화에 대한 그의 낭만적인 꿈을 담고 있다. 

타히티 소녀들은 삶의 여러 단계를 상징한다. 
머리 위에 후광이 있는 젊은 섬 사람은 깊은 잠에 빠진 처녀 순결의 화신이며, 
손에 과일을 들고 있는 두 번째 소녀는 이브와 같다. 
풍경 깊은 곳에서 섬 주민들은 신비한 고대 신인 우상 주위에서 춤을 추고 있다. 
캔버스는 선과 같이 하나의 리듬에 종속된 일반화된 평면 영역에 
순수한 색상을 적용하여 작가의 개성있는 스타일을 보여준다.

 

Tahitian Pastorals, 1892, by Paul Gauguin. oil on canvas, 87.5 X 113.7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1. 

타히티 섬에서 작가가 그린 그림은 자연스러운 "원시적" 삶의 짧은 서사시를 구현한다. 
이 세계의 조화를 찾아 고갱은 폴리네시아로 갔다. 
이국적인 자연의 인상, 섬 주민들의 독특한 외모, 자연의 은혜, 
신비한 신념과 관습이 결합된 낭만적 인 꿈, 타히티 소녀 중 한 명이 플루트를 연주한다. 
원주민들은 이 음악을 달의 여신인 히나에게 바쳤다. 
그림은 히나를 기리기 위한 의식 춤과 음악의 시간이 일몰과 함께 시작된 저녁 시간을 묘사한다. 

 

Tapera mahana (Late Afternoon), 1892. oil on canvas, 72.3 X 97.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1. 

빈센트 반 고흐가 이십 대를 훌쩍 넘은 나이에 화가의 길로 들어섰다면 
그의 절친한 친구 고갱은 한술 더 떠 서른다섯 살에 미술계에 입문한 늦깎이 화가다. 
고갱은 화가가 되기 전에 증권 브로커 일을 하면서 아마추어 화가지망생 신분으로 
그림을 그리거나 인상파 화가들과 교류하며 그들의 컬렉터가 되기도 했다.

화가가 되기 직전 고갱의 그림 실력에는 다소 애매모호한 부분이 있었다. 
아마추어 화가 지망생 치고는 수준급의 회화 실력을 갖추고 있었지만 
직업을 그만두고 기성 화가가 되기에는 여러모로 부족했다. 
가뜩이나 고갱은 이미 삼십 대를 훌쩍 넘긴 한 집안의 가장이었다.

고갱은 결국 직업화가로의 길에 들어서지만 현실은 그리 녹록치 않았다. 
생활은 날로 궁핍해져 갔고, 작품 활동도 아마추어로 그림을 그리는 것 하고는 차원이 달랐다. 
그의 그림을 찾는 컬렉터는 거의 나타나지 않았고 이로 인한 절망감은 헤아릴 수 없이 컸다.

 

Conversation (Les Parau Parau), 1891. by Paul Gauguin. oil on canvas. 90.3 x 70.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1. 

이 작품은 폴리네시아에서 그려졌고, 고갱은 유럽과는 다르고 
자연의 조화를 보존한 세계에 대해 낭만적인 인상과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작품에 작가가 붙인 제목은 섬 주민들의 언어에서 "험담" 혹은 "흉보기"으로 번역된다. 
원 안에 앉아 있는 여성들은 대화에 참여하지만 줄거리의 일상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에 대한 수수께끼의 느낌을 방해하지 않는다. 

고갱은 끊임없는 삶의 흐름과 함께 영원한 세계의 
이미지를 창조하는만큼 구체적인 현실을 그리지 않는다. 
인상주의 시대를 거친 고갱은 이 방식을 떠나 자신만의 스타일을 발전시킨다. 
선의 리듬을 사용하고 공간을 단순화하여 
색상 반점의 음질 조합을 만들어 강조된 장식성에 도달한다.

 

At the foot of the mountain, 1892. by Paul Gauguin. oil on canvas. 92 x 68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1. 

이 작품 '산 기슭에서(At the foot of the mountain)'는 낭만적인 이국주의와 
자연의 조화로 고갱을 매료시킨 폴리네시아 타히티 섬에서 그려졌다. 
이 풍경의 주요 구성 요소가 된 산기슭의 큰 나무는 고갱의 다른 작품에도 등장한다. 

 

Still Life with Mig and Carafe, 1882. by Paul Gauguin. oil on canvas. 54 x 65.3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1. 

이 정물에서 사물의 조합은 매우 드문 일이지만 형식적인 병치의 논리뿐만 아니라 
주제별 고려 사항에서도 나온 것 같다. 
예를 들어 중앙의 레몬은 전체 구성이 걸려 있는 밝은 점이지만 
테이블의 다른 항목과 마찬가지로 그 로그를 준비하는데도 필요하다. 
따라서 레몬 옆에는 매우 강한 와인 한 병, 각설탕, 
뜨거운 물 잔, 혼합용 숟가락 및 큰 머그잔이 있다. 

고갱은 정교하게 조각된 병과 가장 단순한 형태의 거대한 머그잔이라는 
아이러니 한 메모와 함께 두 개의 물체를 나란히 배치했다. 
현재의 정물은 빛을 재현하는 인상파의 관심뿐만 아니라 강한 구성으로도 유명하다.

 

Woman holding a fetus (Eu haere ia oe),1893, by Paul Gauguin. oil on canvas, 
92.5 X 73.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2.

이 작품 역시 고갱이 타히티에 머물던 시대에 속한다. 
유럽과는 달리 수수께끼로 가득한 이국적인 세계에서 오세아니아의 밝은 색과 
무성한 초목의 인상, 타히티인들의 모습과 삶 등은 화가에게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 
섬 주민들의 삶의 평범한 에피소드에서 작가는 
삶의 영원한 리듬, 인간과 자연의 조화의 구체화를 본다. 

손에 과일을 들고 전경에 서 있는 타히티 여인은 이 토착 낙원의 이브이다. 
전통적인 회화의 규칙을 버리고 인상주의적인 방식으로 고갱은 자신의 스타일을 만들었다. 
공간의 평탄함, 선, 모양 및 색 반점의 리드미컬 한 반복, 
큰 배열로 놓인 순수한 페인트는 장식 효과를 증가시킨다.

 

Month of Mary (Te avae no Maria), 1899. by Paul Gauguin. oil on canvas, 96 X 74.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2.

이 작품은 타히티 섬에서 일어난 고갱의 생애 말년에 폴리네시아에서 그렸다. 
작품의 주요 주제는 봄 자연의 개화이다. 
기독교 이전의 유럽에서는 5월 초에 깨어남을 위한 이교도 명절이 있었다. 
가톨릭 교회에서 5월 예배는 성모 마리아 숭배와 관련이 있다. 

오세아니아의 이국적인 세계와 고대 동양 문화에 대한 작가의 인상에서 탄생한 
삶의 자연스러운 리듬은 선과 색의 조화로 캔버스에 구현된다. 
노란색은 동양 미술에서 특히 중요하다. 
여성의 포즈는 자바 섬에 있는 사원 부조의 모습을 닮았고, 
그녀의 흰 가운은 기독교인과 타히티인 모두에게 순결의 상징이다. 
다양한 종교적 사상과 신념을 결합한 작가의 상상력은 원시적 삶의 이미지를 창조했다.

 

Pie (Te vaa), 1896. by Paul Gauguin. oil on canvas, 95.5 X 131.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2.

폴리네시아에서 제작된 이 그림은 섬 주민들의 가족을 묘사하지만 그 아이디어는 
프랑스 예술가 피에르 퓌뷔 드 샤반 (Pierre Puvis de Chavannes 1824~1898)의 
"가난한 어부(Poor Fisherman)"의 그림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갱의 낭만적인 상상력은 타히티의 인상뿐만 아니라 
고대 문화의 기념물인 다른 거장들의 작품에 의해 영향을 받았다. 

원주민의 포즈는 고대 이집트 그림의 인물인 
어깨의 정면 이미지와 다리의 프로필 이미지와 비슷하다. 
코코넛 껍질에서 마시는 타히티 인의 몸짓은 의식적인 성격을 띤다. 
불행히도 그림의 색상은 되돌릴 수 없는 변화를 겪었으며 
이로인해 색상이 어느 정도 원래의 사운드를 잃었다.

 

Scene from the life of the Tahitians, 1896. by Paul Gauguin. oil on canvas, 89 X 124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2.

이 작품은 폴리네시아에서 그렸는데, 그곳에서 고갱은 깨끗한 세계에 대한 꿈을 이끌었다. 
섬 주민들의 삶의 에피소드는 수수께끼로 가득 차 있다. 
참가자들이 이미지 외부에 남아 있는 일종의 종교적 행동을 보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 
저녁 시간은 신성한 의식을 위한 시간이다.  

원주민의 고대 숭배를 연구한 작가는 종종 마오리족의 
신념과 관련된 모티프와 상징을 그의 작품에 도입했다. 
일부 캐릭터의 포즈는 파르테논 프리즈의 인물과 비슷하다. 
고대 문화의 공통성을 감지한 주인은 이집트와 골동품 기념물로 눈을 돌렸다. 
고갱은 원래의 자연 생활의 이미지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재현했다. 
소리가 나는 색상의 일반화된 반점, 공간의 평평함, 
선의 리드미컬한 반복은 탁월한 장식 효과를 만든다.

 

Baby (Christmas), 1896. by Paul Gauguin. oil on canvas, 67 X 76.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2.

없는 순수함 속에는 꿈이 있다. 거기에는 시(詩)가 살아 있다. 
고갱은 1887년 봄에 남미로 건너가고, 다시 마르티니크 섬으로 가지만 병으로 인한 고뇌로 귀국한다. 
그리하여 이듬해 퐁 타뱅으로 다시 가 거기에서 젊은 화가들과 만나 새로운 회화의 이론을 주장한다. 
이어 빈센트 반 고흐의 초대로 아를에도 가지만 그 우정은 깨져버려, 재차 순수함을 그리워한다. 
그 염원을 달성한 것은 1891년으로, 고갱은 태평양의 타히티 섬 민중들의 
순수한 삶과 개성에 감동하여 수많은 작품을 그려 낸다. 


고갱은 한번 파리에 돌아오지만, 1895년에는 타히티에 돌아간다. 
그러나 그림 제작하는 것 외에는 궁핍과 병과 싸우는 생활이고, 
1901년에는 Hiva Oa 섬으로 옮겨 가서 고독한 생애를 마친다. 
그는 세잔 · 고흐 등과 함께 후기 인상파의 한 사람인데, 
세잔은 객관적 또는 공간적인 것을, 고흐는 주관적인 것을 제재로 하였으나, 
고갱은 장식적인 것의 부활을 주로 하였다. 
그의 강렬하고도 새로운 장식풍의 그림은 후세 그림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Landscape with two goats (Tarari Maruru), 1897. by Paul Gauguin. oil on canvas, 
92.5 X 73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2.

이 작품은 고갱의 생애 마지막 몇 년 전 폴리네시아에서 그려졌다. 
작품의 주제는 아마도 타히티인들의 종교적 신념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원주민의 관습, 생활 및 신념은 자연과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있다. 
모든 생명체는 하나의 영원한 리듬을 따른다. 
전통적인 표현 수단을 포기한 고갱은 이국적인 세계의 

이미지를 전달하는 개별 스타일을 개발했다. 
어두운 색은 수수께끼의 작품을 제공한다. 
자연 그대로의 오세아니아는 작가의 상상력을 자극하여 "약속된 땅"의 의인화가 되었다. 

 

Idol, 1898. by Paul Gauguin. oil on canvas, 73.5 X 92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2.

타히티 섬에 그려진 우상(Idol)은 신비한 이국적인 세계를 묘사한다. 
아이돌은 유기적인 부분으로 문명에 영향을 받지 않으면서 
삶의 구체적이고도 신비한 생물처럼 동상이 아니다. 
그림의 실루엣은 나무 줄기의 긴장된 곡선에 반영된다. 
우울한 색상은 기분의 불안을 증가시킨다. 
이 아이돌의 이미지는 고갱의 작품에 반복적으로 등장했다. 

우상은 섬 주민들이 숭배한 폴리네시아의 달의 여신 히나와 많은 공통점이 있다. 
이 생물에는 자연의 힘이 구체화되어 생성하고 죽인다. 
고갱은 자연스럽고 원시적인 삶에 대한 낭만적인 꿈에 따라 폴리네시아로 옮겨졌다. 
아이돌은 이 삶의 흥미진진한 신비 중 하나의 구체화이다.

 

Women by the sea (motherhood), 1899. by Paul Gauguin. oil on canvas, 95.5 X 73.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2.

이 작품 바다의 여성 (모성)은 고갱이 타히티 섬에서의 생애 말년에 그렸다. 
생명이 자연의 흐름을 보존하는 이국적인 오세아니아 세계에서 고갱은 유럽 문명을 떠난다. 
모성이라는 주제는 마스터 작업의 폴리네시아 시대에 두 번 이상 발생했다. 
이 작품의 등장은 특정 사건과 관련이 있다. 

타히티인으로 고갱의 사랑을 받는 파후라는 1899년 아들을 낳았다. 
실제 장면은 신성한 의식의 특징을 취한다. 
이 구성은 유럽 종교 그림에서 전통적으로 아기를 숭배하는 장면과 비슷하다. 
접힌 손에 꽃을 든 여성의 중심 인물이 특히 중요해 보인다. 
장식 효과는 리드미컬하게 구성된 색상 배열과 
고갱의 개별 스타일의 특징인 윤곽선의 반복으로 만들어진다.

 

Three Tahitian women on a yellow background, 1899. by Paul Gauguin. oil on canvas, 
68 X 73.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2.

노란색 바탕에 세 타히티 여성(Three Tahitian women on a yellow background)은 
고갱의 생애 말년 폴리네시아에서 그려졌다. 
타히티와 고대 문화의 인상을 결합한 작가의 상상력은 
이국적인 세계의 신비하고 상징적인 이미지를 만들었다. 
이러한 이미지는 항상 해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아마도 이 작품은 미해결의 상징적 의미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동시에 색 반점과 리드미컬한 선의 조화를 이루는 장식적인 그림이다. 
여성의 포즈-특별한 우아함과 가소성, 원주민 여성의 중심은 
자바 섬의 보로부두르 사원 부조에 묘사된 그림과 유사하다. 
"야만인"의 세계는 문명화된 유럽이 잃어버린 자연의 조화를 보존한다.

 

Sunflowers, 1901. by Paul Gauguin. oil on canvas, 73 X 92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2.

해바라기(Sunflowers)는 고갱이 그의 생애 말년에 폴리네시아에서 그렸다. 
그 주제는 태양의 상징인 해바라기의 모티브가 특별한 자리를 차지한 
반 고흐의 작품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888에 두 예술가는 아를(Arles)에서 작업했으며 반 고흐(Van Gogh)는 해바라기로 정물을 그렸다. 
고갱은 프랑스에서 그에게 보낸 씨앗을 오세아니아에서 재배했다. 
배경의 꽃 중앙에 펼쳐지는 눈은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그것은 기독교 교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든 것을 보는 눈"과 유사하다. 

 

Two sisters, 1892. by Paul Gauguin. oil on canvas, 90.5 X 67.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2.

두 명의 타히티 소녀인 자매는 고갱의 가장 훌륭한 아이들 이미지일 것이다. 
아마도 그의 어린 딸에 대한 기억을 반영한 것이 아닌가 한다. 
이 작품의 신비한 배경은 어린이 피규어의 단순한 실루엣과 대조를 이룬다. 
고상한 단순함은 어린 시절 특유의 섬세함과 결합된다. 

 

Bouquet, 1884. by Paul Gauguin. oil on canvas, 65.3 X 54.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2.

 

Man Picking Fruit from a Tree, 1897. by Paul Gauguin. oil on canvas, 92.5 X 73.3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2.

 

[영상] Paul Gauguin in The State Hermitage Muse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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