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om of still lifes.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05.
405번 홀은 주로 정물화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Room of still lifes.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05.

 

Room of still lifes.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05.

 

Flowers in a clay vase, 1883. by Henri Fantin-Latour. oil on canvas. 23 x 29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05.

 

앙리 팡탱-라투르(Henri Fantin-Latour 1836-1904)는 프랑스 화가이다. 
유명한 초상화가였던 아버지로부터 그림의 기초를 배웠다. 
어린시절 루브르 박물관에서 거장들의 작품을 접하고 큰 감동을 얻었으며, 
티치아노와 베로네세 등의 르네상스 화가나 다이크와 같은 17세기 프랑드르 화가, 
와토와 같은 18세기 프랑스 화가들의 작품을 모사하면서 그림 공부를 헀다.

후에 르코크 드 부아보드랑 학교와 메콜 데 보자르에서 그림 공부를 했다. 
프랑스 살롱전에 작품을 전시했으며, 1863년에 또한 그것에 반발한 '살롱 데 르퓌제'에도 출품했다. 
처음에는 쿠르베에게 마음이 끌렸으나, 마네의 작품을 알고 영향을 받아 게르보아의 집회에도 출석을 했다. 
인상파에는 참가하지 않지만, 작품은 명암을 깊게 하여 정확히 신중한 묘사를 하고 있다.

 

Roses and nasturtiums in a vase, 1883. by Henri Fantin-Latour. oil on canvas. 28 x 36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05.

 

초상화가였던 앙리 팡탱 라투르는 세련된 배색 효과를 이용해 다수의 정물화를 그렸다. 
또한 음악에 조예가 깊어 꿈과 음악에 대한 자신의 느낌을 캔버스와 석판화에 담곤 했다. 
'접시의 장미꽃'에서는  단순히 주제를 묘사하면서 그 속에서 

섬세함과 매우 짧게 지속되는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그는 점점 늘어가는 애호가들과 영국 수집가들을 위해 

우아하고 절제된 그림을 제작해 깊은 인상을  주었다

팡탱 라투르는 모순으로 가득찬 사람이었다. 
그는 대가들에게 크게 영향을 받은 그림을 그렸던 반면에
당대의 혁신적이고 새로운 젊은 화가들과 잦은 교제를 가졌다. 
음악에도 조예가 깊어 꿈과 음악에 대한 자신의 느낌을 캔버스로 옮겨 환상적이고 

몽환적인 그림을 그리길 갈망했지만 정작 그의 대표적인 주제는 꽃 그림이었다.

결국 팡탱 라투르는 미천하다고 여긴 그림에만 관심이 집중되는 상황에서 좌절감과 

중압감을 느꼈으며 어쩔 수 없이 그렸던 그의 꽃 그림들에는 권태로움이 묻어난다. 
앙리 팡탱 라투르는 초상화가로 황동하였지만 사실 

그를 유명하게 하고 수입이 되었던 것은 정물화였다.

그는 꽃과 과일 등의 정물들을 생생하고, 아름답게 표현할 수 있는 특별한 재능을 갖고 있었다. 
그의 그림 속의 꽃들은 화려한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고, 
과일들은 언제나 달콤한 향기와 과즙을 뿜어 낼듯한 싱싱함을 느끼게 해준다.

특히 그의 정물화는 고전적 표현 요소를 갖고 있었고, 그로 인해 대중들의 사랑을 받았지만 
한편으로는 사물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모던아트적인 모습도 담고 있다. 
경제적인 이익을 포기할 수 없었던 그는 대상을 부드러운 빛과 함께 
아름답게 묘사한 이런 종류의 그림을 오랫동안 그렸다.

비록 그 자신은 양쪽 어디에 속하는지 갈피를 잡을 수 없지만 팡탱 라툴르는 
사실주의화가들과 인상주의 화가들 사이의 간극을 이어주는 작품들을 남겼다.  
팡탱 라툴르는 위대한 사실주의 화가인 귀스타브 쿠르베의 제자였고, 
후에 인상주의 화가들의 스승인 에두아르 마네와 함께 생활하고 작업하는 
일련의 화가들의 모임에 정식회원이 되었다. 
또한 그는 낭만주의 화가인 들라클루아의 작품과 창조력으로부터도 커다란 영향을 받았다. 

그의 초기 작들은 사실적이고, 후기로 갈수록 보다 인상주의적이며 

빛을 색이 아닌 색조로 표현했지만, 그러한 차이가 단순히 시간이 흐름에 따라 

생겨난 것, 즉 전후 관계라고만은 할 수 없다. 
오히려 그는 이러한 두 가지의 회화 양식, 즉 사실주의와 인상주의 사이를 
자유로이 넘나들며 자신만의 양식에 맞게 혼합하여 그렸다.

그는 고대 거장의 화풍을 연구하며 고전적 요소도 받아들였고, 

19세기 후반 아방가르드와 교류하면서 혁신적인 시도도 받아 들었던 화가로 

진정 유연한 사고와 태도를 가진 혁신적인 화가였던 것이다. 
팡탱 라투르는 초상화와 정물화에서도 확실하지 않은 화풍으로 작업했다.

 

Flower Still-Life, 1863. by Gustave Courbet. oil on canvas. 65 x 54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05.

귀스타브 쿠르베(Gustave Courbet 1819-1877)는 19세기 프랑스의 사실주의 화가이다.
쿠르베는 1819년 프랑스 프랑슈콩테 주 오르낭 시에서 부유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고향에서 중등학교 (Collège)를 나온 후, 1837년 브장송(Besançon)의 
왕립 고등학교 (Lycée)에 입학함과 동시에 근교에 있는 사립 미술학원에서 그림을 배웠다. 
리세 졸업 후 1840년 쿠르베는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할 계획으로 파리로 간다. 
그러나 곧 법학 수업을 포기하고 그림 그리기에 전념하여 화가가 되기로 결심한다. 

1847년 네덜란드를 여행한 후, 렘브란트의 화풍, 베네치아 화파 
그리고 에스파냐 화풍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연구, 분석한다. 
1850년을 전후로 하여 쿠르베는 자신의 고유한 화풍인 

사실주의 색채를 띤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그의 철저한 사실주의는 천사를 그리라는 주문에 

"천사를 실제로 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그릴 수 없다"
라고 딱 잘라 거절했다는 일화에 잘 나타나 있다. 
또한 예술 활동에 숨기보다는 파리코뮌에 참여할 정도로 사회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58살에 짧은 생을 마감했다.

 

Landscape with a bridge, 1870. by Stanislas Lepin. oil on canvas. 26 x 39.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05.

 

스타니슬라스 레핀 (Stanislas Lepin 1835~1892)은 풍경, 
특히 센 강의 풍경을 전문으로하는 프랑스 화가였다.
레핀의 예술적 형성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던 것은 
1859년 노르망디에서 만난 코로였고, 이듬해 그의 학생이 되었다.

레핀이 가장 좋아하는 주제는 센(Seine) 강이었다. 
그는 인상파로 간주되지는 않지만 1874년 최초의 인상파 전시회에 참가했다. 
그의 그림은 분위기가 차분하고 일반적으로 규모가 작다. 
레핀은 1889년 박람회에서 최우수상 메달을 수상했다. 
그는 1892년 파리에서 갑자기 사망했다.

 

Room of Alfred Sisley and Camille Pissarro.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06.

406번 홀에는 인상파 풍경화가 알프레드 시슬리(Alfred Sisley)와 
카미유 피사로(Camille Pissarro 1830~1903)의 작품이 있다.

 

Room of Alfred Sisley and Camille Pissarro.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06.

 

Boulevard Montmartre in Paris, 1897. by Camille Pissarro. oil on canvas. 92.8 x 74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06. 

카미유 피사로(Camille Pissarro 1830~1903)는 덴마크계 프랑스인 인상주의 화가다. 
가장 훌륭한 근대 풍경화가 가운데 한 사람이며, 
섬세한 감정과, 초기 농원(農園)의 연작(連作) 또한 아름다운 매력이 있다.

이 작품은 파리의 대로 몽마르트(Boulevard Montmartre)를 묘사하는 풍경화이다. 
이 작품을 만들기 위해 카미유 피사로(Camille Pissarro 1830~1903)는 파리의 대로 
몽마르트가 보이는 그랜드 호텔(Grand Hotel de Russy) 방을 임대했다. 
피사로는 같은 지점에서 다른 시간과 다른 날씨에 13점의 그림을 그렸다. 
화가의 빠른 붓놀림으로 설득력 있게 구현된 도시 생활의 역동성은 의식적이지 않고 
공식적이지 않으면서 흥분되고 활기찬 현대 도시의 이미지를 만든다. 

피사로의 작품에는 온기가 통하는 듯 따스한 감정이 충만하다. 
인상파의 이론을 실천하여 섬세한 터치로 색채를 쌓음으로써 

색채는 아로새기듯 빛나는데, 피사로는 단지 색채를 물체의 빛깔 이상으로 보는 

자기의 감정의 언어로 하여금 섬세하게 감정을 펴고 있다.

 

French Theater Square in Paris, 1898. by Camille Pissarro. oil on canvas. 81.5 x 65.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06. 

이 그림은 프랑스 극장 (Comedie Francaise) 근처 파리의 한 구석을 묘사하지만 
극장 건물 자체는 캔버스 밖에 남아 있다. 
카미유 피사로는 그의 작업의 주요 주제가 된 도시의 일상 생활에 관심이 있었다. 
전경에는 당시의 대중 교통 수단이었던 말이 끄는 트레일러와 사람들이 주위를 맴돌고 있다. 
자유롭고 분리된 스트로크는 인물과 어린 나무 잎의 움직임을 모두 전달한다. 
햇살이 가득한 봄의 분위기는 도시에 활기찬 매력을 더한다. 
클로드 모네처럼 피사로는 여러 주에서 같은 도시 풍경을 여러번 그렸다. 

 

Windy day in Venyo, 1882. by Alfred Sisley. oil on canvas. 81 x 60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06. 

알프레드 시슬레(Alfred Sisley 1839~1899)는 잉글랜드인으로 

프랑스에서 활동한 인상주의 풍경화가이다.
시슬레는 파리에서 부유한 영국인 부모인 윌리엄 시슬레(William Sisley)와 

펠리시아 셀(Felicia Sell)에게서 태어났다. 


1860년대 초에 그는 마르크 샤를 가브리엘 글레르의 작업실에서 공부했다. 
여기에서 그는 프레데리크 바지유, 클로드 모네와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 등과 친하게 된다. 
그들은 순간적인 빛의 효과를 사실적으로 포착하기 위하여 야외에서 풍경을 그렸다. 
당시에는 혁신적이었던 이런 접근법으로, 좀 더 색채가 풍부해졌고 
일반 대중들이 익숙해진 시각보다 더 넓게 그려졌다. 
그 결과로 시슬레와 그의 친구들은 처음으로 자신들의 작품을 전시하거나 팔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시슬레의 학생 시절 작품들은 유실되었다. 
사람들에게 알려진 작품들 중 가장 오래된 것은 1864년경 그려진 것으로 보이는 
"작은 마을 인근의 오솔길"(Lane near a Small Town)이다.

이 작품은 알프레드 시슬레(Alfred Sisley 1839~1899)가 

Ile-de-France에 위치한 Veneux-Nadon 마을에서 그렸다. 
프랑스에서 이 지역의 성격은 시슬레의 작업에서 주요 주제가 되었다. 
흐린 날씨는 밝은 색조를 유지하면서 그가 전달한 가벼운 공기 환경을 특별한 상태로 매료시킨다. 
유연한 자유 스트로크는 바람의 방향을 따라 가며 나무의 흔들림과 구름의 움직임을 전달한다. 
인상파의 민감한 눈은 자연의 상태를 결정하는 하늘의 삶에서 미묘한 뉘앙스를 식별한다. 

1866년 시슬레는 브르타뉴 지방 출신인 Eugénie Lesouezec과 결혼하여 2명의 자식을 두었다. 
1870년 아버지의 사업이 실패하면서 재정적 지원이 끊겨, 

시슬레는 자신의 작품을 팔아서 혼자 생계를 꾸려갔다. 
이후 시슬레는 궁핍한 삶을 살았다. 
그의 작품은 그가 사망한 이후에야 금전적 가치가 있다고 인정을 받았다.

 

The town of Villeneuve-la-Garenne, 1872. by Alfred Sisley. oil on canvas. 80.5 x 59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06. 

작은 지방 도시는 인상파 화가들의 작업에서 매력적인 소재가 된다. 
Villeneuve-la-Garenne 마을 역시 마찬가지이다. 
알프레드 시슬레(Alfred Sisley)는 이 소박한 자연의 매력과 
섬세한 아름다움을 느끼고 전달할 수 있는 소중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주로 인상파 화가들을 매료시킨 살아있는 햇빛은 

자연의 다양성에 민감한 시슬레 작품의 주제가 되었다.

1880년에 시슬레 가족은 19세기 초부터 바르비종파 화가들이 작업하던 
퐁텐블로(Fontainebleau) 숲 인근에 있는 모레쉬르루앙(Moret-sur-Loing)으로 이주하였다. 
미술사학자 안 풀레(Anne Poulet)는 당시의 사정을 다음과 같이 평했다.
"이곳의 조용한 풍경과 끊임없이 변화하는 공기는 그의 재능과 완벽하게 맞았다. 
모네와는 달리 사나운 대양이나 코트 다쥐르(Côte d'Azur)의 빛나는 색채의 풍경을 찾으려 들지 않았다."

1857년에서 1961년 사이의 런던에서 지낸 시기와 1874년, 1881년 그리고 1897년 
잉글랜드로 여행한 것을 제외하면 시슬레는 전 생애를 프랑스에서 보냈다. 
인상주의자들 사이에서 시슬레는 비록 시슬레가 덜 표현적이고, 
더 작은 규모로 작업하기는 했지만 서로 그림이 비슷했던 모네의 그림자에 가려졌다. 

미술사학자인 로버트 로젠블룸(Robert Rosenblum)에 따르면 
"보편적인 특징의, 완벽한 인상주의 회화의 비개인적인 교과서적인 발상"을 가졌던 
공기와 하늘에 호소하는 그의 작품은 매우 인상적이다. 
풍경에 집중했던 그는 다른 인상주의자들보다 훨씬 일관적이었다.
시슬레는 그의 부인이 죽은 지 몇 달 뒤에 59세의 나이로 Moret-sur-Loing에서 사망했다.

 

Riverbank at Saint-Mammes, 1884. by Alfred Sisley. oil on canvas. 50 x 6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06. 

인상주의의 방법을 통해 시슬레는 날씨 상태, 
변경 가능한 조명, 진동하는 빛을 작업에 구현할 수 있다. 
하늘은 살아있는 자연의 주요 구성 요소 중 하나이다. 
시슬레의 그림에서 좁은 강에서 흐름이 느껴지고 물 표면에 하늘의 반사가 부서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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