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om of Vincent Van Gogh.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3.

빈센트 반 고흐(Vincent Willem van GogH, 1853~1890)는 네덜란드 화가로 
서양 미술사상 가장 위대한 화가 중 한 사람으로 여겨진다. 
그는 900여 점의 그림과 1100여 점의 습작 등 그의 작품 전부를 측두엽 기능장애로 
추측되는 정신질환을 앓고 자살을 감행하기 전의 단지 10년 동안에 만들어냈다. 
그는 생존 기간 동안 거의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사후에 비로소 알려졌는데, 
특히 그가 죽은 지 11년 후인 1901년 3월 17일 파리에서 
71점의 반 고흐의 그림을 전시한 이후 그의 명성은 급속도로 커졌다.

반 고흐는 흔히 탈인상주의 화가로 분류 되며, 또한 인상파, 야수파, 초기 추상화, 
표현주의에 미친 영향이 막대하며 20세기 예술의 여러 다른 관점에서 보일 수 있다. 
암스테르담에 있는 반 고흐 미술관은 반 고흐의 작품과 그의 동시대인들의 작품에 바쳐졌다. 
네덜란드의 또 다른 도시인 오테를로에 있는 크뢸러-뮐러 박물관도 
상당히 많은 반 고흐 그림을 보유하고 있다.

 

Room of Vincent Van Gogh.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3.

반 고흐가 그린 몇몇 그림들은 세상에서 가장 비싼 그림들 사이에 순위가 매겨지기도 한다. 
1987년 3월 30일에 반 고흐의 그림 '아이리스'가 뉴욕의 소더비즈에서 
5390만 미국 달러라는 기록으로 팔렸다. 
1990년 5월 15일에 그의 '가셰 박사의 초상'(첫째판)이 크리스티즈에서 
8,250만 달러에 일본의 다이쇼와제지 명예회장 사이토 료에이(당시 74세)에게 
팔림에 따라, 새로운 최고가 기록을 세웠다. 
당시 사이토가 지불한 8,250만 달러는 낙찰가 7,500만달러에 경매가 구전 10%가 가산된 금액이다. 
이후 '가셰 박사의 초상'은 미국의 수집가에게 4천 400만 달러에 다시 팔렸다.

 

Memories of the Garden at Etten (Ladies of Arles), 1888. by Van Gogh. oil on canvas, 
73 X 92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Room Number 413.

 

이 작품은 반 고흐(Vincent van Gogh)가 프랑스 남부 도시 아를(Arles)에서 그렸지만 
그 동기는 부모님 집 정원이 있는 북부 고향과 관련이 있다. 
이 당시 반 고흐는 고갱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고 고갱 역시 반 고호에게

영향을 받았다고 전해지는데, 특히 이 작품은 고갱의 영향과 반 고흐가 

에밀 베르나르(Émile Bernard)와 함께 발전시킨 종합적인 상징주의 형식과 신인상주의와 

자포니즘(Japonisme) 그리고 심볼리즘(Pont Aven Symbolism)의 융합적 결과물이다.
당시 반 고흐와 고갱과의 예술적 교류에 대해 15년 뒤 고갱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당시 내가 아를(Arles)에 당도했을 때, 반 고흐는 신인상주의에 심취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문제에 봉착한듯 보였으며 좌절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추구한 화법이 잘못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참을성 없고 의존성 강한 성격과는 맞지 않았습니다. 
반 고흐가 그린 보라색 위에 노란색을 입히는 것과 그의 서로 보완하는 색채의 비체계적인 형식은 
그저 단순한 모노톤의 부드러운 불완전한 조화를 보여주었습니다; 뭔가가 빠져있었지요.
저는 그에게 방법을 알려주기로 했습니다. 
모든 것은 고유의 특성을 나타내듯이 반 고흐는 두려움도 없었고 주저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날 이후부터 반 고흐는 놀랄만한 발전을 보였습니다; 
그는 자신 안의 가능성을 발견하였고 그의 해바라기 작품들에서 빛을 발하였습니다."
- 폴 고갱

평론가들은 실제로 반 고흐는 고갱이 아를(Arles)에 당도하여 함께 작품 활동을 하기 이전에 
이미 자신의 화충이 절정에 달해 있었으며, 고갱이 오고나서 한동안 고갱의 이론에 영향을 받았으며, 
특히 이 작품 'Etten 정원의 추억(Memory of the Garden at Etten)'은 
반 고흐가 고갱의 화풍을 의식하여 그린 그림이라고 한다.
하지만 반 고흐는 곧 사실주의로 돌아간다.
반 고흐는 당시 고갱의 회화 이론을 간단하게 

실험적으로 사용하였지만 자신에게 맞지 않는다 생각했다.

고갱과 함께 있을 당시 그린 아를의 여인, 반 고흐는 테오에게 
“병에 걸려 있을 때 고향인 쥔데르트(Zundert) 집에 있는 모든 방을 보았다"라고 말했던 것처럼 
이 그림의 배경은 반 고흐의 부모님이 머물던 네덜란드 에텐(Etten) 목사관이며, 
화면 앞 쪽에 그려진 두 여인은 그의 어머니와 누이인 빌이다. 

고흐는 평생 외로움에 시달렸지만, 그 쓰라린 외로움 속에서 자기만의 작품 세계를 창조해 냈다. 
피카소는 현대미술의 출발점에 고흐를 위치시키면서, 
'고흐 이후' 화가들이 처한 어려움에 대해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 

'예술의 목적'에서 피카소는 이렇게 말한다. 
"반 고흐 이후, 우리는 모두 독학자들이다. (…) 
예술의 전통이 아카데미즘으로 몰락해버린 상황에서, 우리는 모든 언어를 새로 창조해야 한다. 
오늘날의 화가는 저마다 이 새로운 언어를 A부터 Z까지 재창조할 권리가 있다." 

피카소가 고흐에게서 바라본 새로움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예술의 규범성'이 '예술의 창조성'보다 우위에 있던 시대의 종말이 아니었을까.
미술을 배워보겠다고 학교나 스승을 찾았을 때마다 '너는 처음부터 다시 배워야 돼'라든가, 
'이 학생은 다른 학생들에게 나쁜 영향을 끼칩니다'라는 식으로 악평을 들었던 고흐가 
인생을 걸고 지켜내야 했던 '자기다움'을 피카소 이후의 화가들은 비로소 
'새로운 창조성'으로 인정해주었던 것이다. 

'반 고흐 이후, 우리는 모두 새로운 예술의 언어를 창조하는 독학자들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피카소의 내면에는 어떤 불안도 싹트고 있었다. 
기존의 모든 전통에서 벗어나 '나만의 새로움'을 만들어간다는 것, 
마침내 그것을 해낸 고흐처럼, 우리도 그래야 한다는 압박감을 느꼈던 것이다.
고흐 이전의 화가들은 어떤 아카데미에 속하거나 어떤 유파에 속함으로써 
어느 정도 안정감을 얻을 수 있는 경우가 많았다. 

특정한 유파에 속하지 않거나 살롱이나 아카데미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지 못하는 경우, 
아무리 실력이 뛰어나도 그 재능과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다. 
고흐는 바로 이런 유파나 아카데미즘의 안정감과 소속감에서 해방됨으로써 
그림 속의 색채와 형태를 '자기만의 세계'로 만들었던 것이다. 
피카소는 고흐의 이런 면이 그의 위대성이긴 하지만, 
이후 현대 화가들에게는 활동의 제약이 될 수도 있음을 간파했다. 

"화가에게 어떤 기존의 판단 기준을 적용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어버렸다. 
이제 기존의 정해진 규칙들이 힘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이것은 해방이지만, 그러나 동시에 

이러한 해방은 화가에게 엄청난 제약이기도 하다." 

예술가가 자기만의 개성을 가진다는 것, 그것은 어떤 규칙이나 
질서에도 의존할 수 없는 절대적 고독의 상태에 도달하는 길이기도 했던 것이다.
이것은 단지 고흐가 독학자였기 때문은 아니다. 
고흐는 '자기만의 세계'를 창조해낸 매우 희귀한 예술가였다는 점을 피카소가 간파했고, 
평생 규범화된 전통과 싸워 온 고흐를 바라보면서 후대의 예술가들은 부담감을 느꼈던 것이다. 
이렇게 되면, 끊임없이 자기만의 새로움을 찾아내기 위해, 
화가는 자기 자신의 새로움과도 싸워야만 한다. 
방금 전에 창조한 새로움을, 이 다음 작품에서는 

또 다른 새로움으로 격파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끝없이 새로워진다는 것은 끝없는 자기 파괴이기도 했다. 
이것은 희열과 고통이 뒤섞인 창조의 모순적 감정이었다. 
하지만 이런 '새로움에 대한 강박'은 예술가들에게 창조의 밑거름이 되어주기도 했다. 
전통은 더 이상 따라야만 할 규범이 아니라 창조적으로 극복해야 할 대상이 되었다. 
고흐는 자신이나 다른 화가들의 새로운 시도를 '광기'와 '비정상'으로 규정해버리는 사회와 
끝까지 싸웠고, 그것은 후대의 예술가들에게 커다란 용기와 영감을 주었다.

하지만 고흐에게 있어 전통이라는 것이 무조건적인 파괴의 대상은 아니다. 
고흐의 새로움과 창조성 또한 '전통과의 대화와 소통, 교감과 분석'을 

통해 나왔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고흐는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끊임없이 렘브란트, 밀레, 

들라크루아 등의 화가들에 대한 자신의 존경심을 표현했고, 

모네, 고갱, 피사로 등 동시대의 화가들의 그림에 대한 언급을 잊지 않는다. 
고흐는 단지 새로움을 위한 새로움, 파괴를 위한 파괴가 아니라, 
전통과 동시대성과의 적극적인 소통 속에서 자기만의 것을 만들어갔다. 

미술뿐 아니라 문학과 철학을 통해 받은 영감도 
그의 창조성을 일구어가는 데 있어 커다란 원동력이 되었다. 
셰익스피어, 디킨스, 공쿠르 형제, 졸라, 니체 등을 통해 고흐가 받은 영감은 
고흐의 편지뿐 아니라 작품 속에서도 드러나곤 한다. 
그는 전통 자체를 경계한 것이 아니라 아카데미즘으로 축소되어버린 전통을 경계했던 것이다.

고흐의 새로움은 단지 기법적인 측면에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고흐의 진정한 새로움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의 참신함이었다. 
힘겨운 노동을 버텨낸 사람들의 하루를 상징하는 신발들, 

하루 종일 뙤약볕 아래서 일하는 농부들, 똑같이 반복되는 동작을 

몇 시간이고 묵묵히 해내는 직공들의 모습을 이토록 성스럽고 아름다운 대상으로 

격상시킨 것도 고흐 이전에는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현상이다. 

특히 인물화의 대상이 주로 '화가들에게 돈을 지불할 수 있는' 후원자들 
또는 그 후원자들의 취향을 대변할 수 있는 아름다운 모델 중심이었던 
과거의 관습이 고흐로 인해 거침없이 파괴된 셈이다. 
그는 '그림을 살 수 있는 경제적 능력이 있는 사람들'의 취향에 호소하지 않았고 
그 때문에 평생 가난에 시달렸지만 끝까지 타협하지 않았다. 
화가들의 경제적 어려움과 작품 유통의 어려움을 개선하기 위해 
'예술가들의 공동체'를 만들자는 생각 또한 고흐의 창조적 아이디어 중 하나다. 

그는 당시 공상적 사회주의자로 알려져 있던 샤를 푸리에의 공동체 모델에서 영감을 받아 
예술가들도 서로 외따로 떨어져 홀로 고통 받기보다는 함께 모여 서로의 결핍을 보살피며 
'연대'할 수 있다고 믿었고 그 믿음을 직접 실천한 최초의 예술가였다. 
고흐는 주어진 환경 내부에서 제한된 새로움을 창조한 것이 아니라 
주어진 세상의 작동원리 자체를 바꿀 수 있는 완전한 새로움을 원했던 것이다.

 

Bush, 1889. by Van Gogh. oil on canvas, 73 X 92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3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 1853~1890)의 작품 중에서도 최고에 속하는 부시(Bush)는 
생 레미에 있는 생폴 드 무솔 요양원에 입원한 5월에 그려졌다.
정신병의 흔적은 보이지 않고 약동하는 봄을 싱그럽게 표현했다.
병원 정원에서 라일락 덤불을 묘사하고 있다. 
부분적으로 분리된 붓놀림과 진동하는 모양은 인상주의의 교훈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인상파의 그림은 그러한 공간의 역학을 알지 못했다. 

반 고흐는 강력한 활력과 극적인 표현으로 가득찬 덤불을 가지고 있다. 
생명을 주는 자연의 힘은 정원 식물의 파편에 구체화된다. 
인상주의를 거부한 반 고흐는 자신만의 예술적 언어를 만들어 
예술가의 낭만적이고 열정적이고 깊이 있는 세계관을 표현했다.

 

Huts, 1890. by Van Gogh. oil on canvas, 59 X 72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3

 

이 작품은 반 고흐가 사망하기 직전 아우버스(Auvers)에서 그렸다. 
농부 오두막을 모티브로 한 작업은 반 고흐를 반복적으로 매료시킨다. 

“내 생각에 건축 분야에서 내가 아는 가장 놀라운 것은 
초라한 초가 지붕과 그을음 난로가 있는 오두막입니다.”
라고 반 고흐는 그의 편지 중 하나에서 썼다. 

초가 지붕은 언덕, 들판 및 하늘처럼 자연의 일부이다. 
실생활의 언덕이 많은 부조는 화가에게 
공간의 역동성을 드러내고 향상시킬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긴장되고 부분적으로 물결 치는 선과 선은 
기복을 전달할 뿐만 아니라 색상 대비로 강화된 표현을 만든다. 
이 그림은 작가의 불안한 영혼, 그의 극적인 시야를 표현한 붓으로 만들어졌다.

 

Morning: Peasant Couple Going to Work, 1890. by Van Gogh. oil on canvas, 73 X 92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3

고흐는 밀레와 동시대 화가이지만 밀레를 한 번도 만나보지 못했다.
"고흐는 밀레의 그림을 자신의 색깔로 다시 그렸으며 
밀레의 그림 속 언어를 자신의 색채로 번역해 냈다."

그는 밀레의 <장 프랑수아 밀레의 삶과 예술>이란 책을 읽고 밀레의 
겸손하고 검소한 삶을 진심으로 존경하며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밀레를 존경하는 마음으로 밀레의 그림을 수없이 따라 그린 
고흐의 독특한 그림은 또 다른 감동을 주면서 밀레의 그림까지 돋보이게 한다. 

결혼한 농부 부부는 여유롭게 일상 생활을 시작하기 위해 

들판을 가로 지르는 길을 따라 산책한다. 
바구니를 든 농부는 마른 체형의 당나귀 등에 앉아 가고, 

남편은 갈퀴를 어깨에 메고 뒤에서 걸어간다.

태양은 오랫동안 떨어지는 그림자의 밝고 푸르고 차가운 색 때문에 더욱 빛을 발하고, 
따뜻하고 옅은 노란색조는 들판과 인물의 얼굴을 채색한다. 
농부 여성의 잠겨 있는듯한 얼굴은 태양쪽으로 바로 향하게 된다. 
동적인 선은 파스텔과 결합하여 동시에 밝은 색상으로 사진을 빛, 대기 및 공기로 만든다.

 

 Spectators in the Arena at Arles, 1888. by Van Gogh. oil on canvas, 73 X 92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3

 

프랑스 프로방스에서 그린 그림은 투우가 열렸던 고대 원형 극장을 묘사한다. 
투우 참가자가 있는 경기장은 거의 윤곽이 잡히지 않았다. 
주요 "캐릭터"는 좋아하는 쇼를 위해 모인 청중, 잡색의 사람들이다. 
관중 중에는 다른 작품에서 그에 의해 묘사된 예술가의 지인이 있다. 

그림이 만들어지는 동안 고갱은 아를에서 반 고흐와 함께 작업하였다. 
이는 공간의 평탄화, 브러시 스트로크를 넓고 어두운 윤곽선으로 둘러싸인 
일반화된 색 반점으로 대체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회화의 표현은 반 고흐의 강렬한 기질, 그의 극적 시선에 의해 주어진다. 
인상주의에 대한 열정에서 살아남은 반 고흐는 강렬한 예술적 언어를 만들었다.

아를로 간 반 고흐는 이상할 정도로 꼼꼼한 필촉(筆觸)과 

타는 듯한 색채로 반 고흐 특유의 화풍을 전개시킨다.
고흐는 재빠르게, 즉흥적으로 그리고 나중에 커다랗게 수정을 하지 않은 채로 그림을 그렸다. 
신속하게 그리는 그의 화법은 한편으로는 그의 창작욕에서 나오는 것이고, 
다른 한 편으로 아주 의식적으로 그것을 표현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그것이 그의 그림에 더 많은 생기와, 강렬함과 직접성을 부여한다고 했다. 

또한 그는 좀 더 커다란 전체 효과를 위해서 소재를 단순화했다. 
비록 그가 재빠르게 그림을 그리기는 했지만, 

충동적으로 그리거나 도취해서 그리지도 않았다. 
그림을 그리기 전에 그는 머릿속으로 그려보거나 

여러 장의 스케치를 통해서 준비를 했다.
거의 언제나 그는 소재를 눈 앞에 두고서 그림을 그렸다. 
그가 기억이나 생각에 의존해서 그림을 그리는 경우는 드물었다. 
눈으로 본 것을 종종 심하게 변행을 시키기는 했지만, 그는 여전히 

자연에 충실한 상태였고, 추상으로 통하는 경계선을 넘어서지는 않았다.

고흐는 물감을 희석하지 않은 채 걸죽하게 칠했으며, 

가끔씩 물감을 튜브에서 짜서 직접 화폭에 바르기도 했다. 
물감을 두껍게 칠하는 것을 인해서 그의 붓자국이 입체적으로 보였고, 
고흐 특유의 붓놀림을 통요시키는 것에 아주 적합했다. 


매끄럽고, 윤곽선이 둘러쳐진 일본풍의 채색면 이외에도 반 고흐는 이미 파리 시절에 
색을 짧은 선 모양으로 나란히 칠하는 기술을 개발했다. 
자신의 그림을 좀 더 생생하고 살아있는 것처럼 형상화하기 위해서 

그는 생 레미 시절에는 이런 선을 율동적으로 구성하고, 물결 모양, 

원 모양, 나선형 모양으로 배열하기 시작했다. 
1889년에 제작된 자화상이나 1889년에 그려진 

〈별이 빛나는 밤〉이 그것을 보여주는 예들이다. 
반 고흐는 각각의 화법을 소재와 연관지어서 선택했다.

눈에 보이는 현실을 단순하게 재현하는 것이 고흐의 목표가 아니었다. 
오히려 소재가 지닌 본질과 특성 그리고 자신이 그것에 대해서 
느끼는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그에게는 더욱 중요했다. 
그래서 그는 외젠느 보쉬(Eugène Boch)의 초상화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나는 이 그림에 내가 그에 대해서 느끼는 경탄을, 사랑을 담고 싶었어. 
머릿속으로 나는 무한한 것을 그렸어. 나는 내가 지금까지 성취했던 것 중에서 
가장 진한과 인상적인 파랑색으로 간단하게 배경을 그렸어. 
그리고 이 간단한 구성을 퉁해서 빛나는 짙은 파란색을 배경으로 삼고 있는 금발의 머리는 
짙푸른 하늘에 떠 있는 별처럼 수수께끼와 같은 것을 지니게 되었어. ”

후기에 제작된 오베르의 풍경화에 대해서 그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흐른 하늘 아래 한 없이 넓은 밭이 있고, 

나는 슬픔과 극단적인 고독을 표현하려는 시도를 주저하지 않았지.”

 

The white House at Night, 1890. by Van Gogh. oil on canvas, 59.5 X 73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3

화면을 거의 다 차지하고 있는 붉은색 지붕의 하얀 집 앞의 출입구에는 
이 집을 방문하려고 온 두 여인이 기다리고 있고 큰 길에는 여인 한명이 
무슨 보따리를 들고 밤길을 걸어가고 있다. 
그런데 이 그림은 1890년 6월 16일 빈센트 반 고흐가 말년에 지냈던 파리 근교 
오베르라는 곳에서 그린 것으로 밤 하늘에는 밝게 빛을 발산하고 있는 노란 별이 한개가 떠 있다. 

이 그림은 제 2차 세계 대전 중 혼란기에 
독일의 나치 정부에 빼앗겨서 한동안 행방 불명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1995년이 되어서야 페테르부르그에 있는 에르미타주 박물관의 
전쟁 전리품 예술 전시회에 등장한 것이 고흐의 그림으로 밝혀진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미국의 천문학자들이 오베르의 오천 여 가구 중에 이 그림 속에 있는 하얀 집과 
똑같은 집을 찾아 내어 그 당시 그 위치에 떠 있었던 밝게 빛나는 별을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통하여 역 추적해 본 결과 1890년 6월 16일 19시경에 
정확히 그림과 동일한 위치에 금성이 밝게 빛나고 있었음을 밝혀 내었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아 고흐가 그 자신의 작품에 대하여 
얼마나 세심한 주의를 기우리며 그림을 그렸는지 알 수 있는 증거를 제시하고 있다.

 

Portrait of Madame Trabuc, 1889. by Van Gogh. oil on canvas, 63.7 X 48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3

'아를레지엔’ 이라는 단어는 반 고흐의 시대에는 훨씬 더 그랬을 것인데 

즉각적으로 조르주 비제가 1872년에 작곡하기도 했던 알퐁스 도데의 

마치 진짜 주인공이 운명 그 자체였던 것처럼, 보기드문 간결함으로 

사랑과 죽음을 그린 비극적인 이야기 <아를의 여인> 을 생각나게 한다.
반 고흐의 그림 속에 등장하는 아를의 여인들은 종종 

도데의 소설에서 발견되는 것과 동일한 힘을 전달해 준다.

이 연작의 주인공은 카페 드 라가르의 주인이었던 지누 부인(1848~1911)으로, 
그녀는 고대 조각을 연상시키는 강한 이목구비의 소유자였다.

 

[영상] Vincent van GogH in The State Hermitage Museum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