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om of Maurice Denis.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4.

414번 홀에는 나비(Nabis)파의 창시자이자 주요 이론가 중 한명인 
모리스 드니 (Maurice Denis 1870-1943)의 작품 "The History of Psyche"(1907-1909)가 전시되어 있다. 
이 작품들은 1908년~9년 사이 러시아의 사업가이자 예술계의 유명한 후원자였던 
이반 모로조프(Ivan Morozov)가 자기 집에 장식을 의뢰한 벽화 작품들이다.
푸시케(Psyche)와 에로스(Eros)의 사랑에 관한 신화 이야기로 7부작으로 구성되어 있다.

모리스 드니는 1870년 프랑스 노르망디 지방에 있는 해안 마을에서 
소작농인 아버지와 재봉사 어머니 슬하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모리스 드니의 관심은 종교와 예술로 14살 때인 1884년부터 매일 일기를 쓰기 시작했는데, 
루브르 박물관을 자주 찾았던 모리스 드니는 이듬해인 1885년 15살 때 일기에 지역 교회에서의 예배, 
색상, 양초 빛에 대한 존경심을 나타내면서 자신이 가야할 화가의 길에 대하여 정의하기를 
'하느님의 기적을 표현하는 크리스천 아티스트'라고 생각하였다고 한다.

파리의 아카데미 쥘리앙에서 미술을 공부했으며, 
1890년의 샹젤리제의 살롱(앙데팡당 전)에 등장해 점차 그 실력을 인정받았다.
그는 많은 근대적인 회화의 밑바탕에 깔려 있는 원리로 종종 인용되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남겼다.   

"그림은 군마(軍馬)나 누드 또는 어떤 일화이기 이전에 본질적으로 
어떤 질서에 따라 배열된 색채로 뒤덮인 평면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나 나중에 이탈리아를 방문한 뒤, 14세기와 15세기에 살았던 
위대한 이탈리아 프레스코 화가들의 작품에 크게 영향을 받았고, 
그때부터 주제와 전통적인 원근법과 입체감에 중점을 두기 시작했다. 

모리스 드니는 이론적 박식함에 순수함과 세련된 감수성을 겸비한 인물이었다.
1908년 아카데미 랑송이 설립될 때 교수가 되어 1919년까지 학생들을 가르쳤다.
후년에는 스스로 신전통주의라고 부른 고전주의에로의 회복을 시도하여 고전적이고
카톨릭의 종교적인 장식성을 가미한 독자적 양식을 만들어 내었다.

그가 제작한 웅장한 벽화는 공공 작품 중 1912년 샹젤리제 극장
(Theatre des Champs-Elysees)의 천장에 그린 그림이 가장 중요한 그림이다.  
종교적 신앙이 깊었던 드니는 종교화를 혁신하고 부흥시키는 일에 전력을 쏟았다.  
1917년 제네바의 생폴 성당(Church of St. Paul)의 벽화를 그렸고, 
1924년에는 파리의 the Petit Palais의 돔을 장식했으며 1928년에는 the Senate Building, 
1936년과 1939년 사이에는 제네바의 the Palais des Nations 등의 수많은 프레스코화를 완성하였다.  

1919년 제1차 세계대전 중 아들이 사망하자 종교 미술에만 전념한
조르주 데스발리에르(George Desvallieres:1861~1950)와 함께 종교 미술
아틀리에(Ateliers d' Art Sacre)를 세웠으며 프랑스 종교 미술 부활에 원동력이 되었다.  
그는 종교 미술에 관한 많은 이론을 남겼는데, 1920년에 <이론(Theories) 1890~1910>, 
1922년에 <새로운 이론(Nouvelles Theories)>, 1939년에 <종교 미술사(Histoire de l'Art religieux)>, 
1943년에 <세뤼지에의 생과 작품 (Serusier, sa vie, son oeuvre)>을 출간했다.

'상징파' 화가로 꼽히는 작가는 처음에 세잔(1839∼1906)과 고갱(1848∼1903)의 영향을 받있으며, 
이후 세뤼지에(1863∼1927) 등과 19세기 말 고갱의 작화사상에 공명하여 모인 반인상주의 화가들의 그룹인
'나비(Nabis)파'를 결성해 신선한 색채 감각을 이어받으면서 나아가 
고갱의 평면적인 표현에 새로운 착상을 담는 표현을 하였다.

 

Room of Maurice Denis.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4.

프랑스의 상징주의 화가인 모리스 드니(Maurice Denis)는 예술가로서의 
예민한 감수성과 열정을 가톨릭 신앙을 통해 승화시킨 독특한 작품들로 유명하다.
모리스 드니는 나비파(les nabis)의 일원이기도 하였는데, 히브리어로 예언자를 뜻하는 ‘나비’는 
표피적 아름다움만을 추구하는 인상주의를 거슬러, 인간과 우주의 본연의 아름다움과 
종교성을 나타낼 수 있는 새로운 표현방식을 창조하자는 의미로 사용된 것이었다. 

그는 이미 열다섯 살이 되던 해, “그래, 나는 그리스도교 미술가가 되어야 해. 
그리스도교의 모든 신비를 기념하는 그림을 그려야 해”라는 다짐을 노트에 옮겨놓을 정도로 
종교와 예술에 남다른 사명감을 가지고 있었고, 훗날 조르주 데발리에르(Georges Desvallieres)와 함께 
아르 사크레 아틀리에(les Ateliers d’art sacre)를 만들어 종교미술의 혁신과 발전에 큰 공헌을 했다. 


저작가이기도 했던 그는 <모던 아트와 아르 사크레에 관한 새로운 이론(1922)> 등의 책을 통해 
입체파와 야수파, 그리고 추상미술의 탄생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예술론을 펼쳤는데, 
순수한 선과 평면적인 형태, 그리고 단순하고 조화로운 색채가 화면에서 이뤄내는 질서는 바로 자연의 
성화를 나타내는 것이며, 이를 통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기쁨을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신념이었다.

그는 병원으로 사용되던 건물을 매입해 ‘작은 수도원’(Prieure)이라 이름 짓고 그곳에서 작업했는데, 
내부에는 직접 벽화를 그려 장식한 성당을 마련하기도 했다. 
지금은 모리스 드니 박물관으로 일반에 공개되며, 함께 활동했던 나비파 작가들의 작품들도 전시돼 있다.

 

Panel 1 : Flying Cupid amazed at the beauty of Psyche, 1908. by Maurice Denis. oil on canvas, 
394 X 269.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4

프시케의 아름다움에 놀란 플라잉 큐피드(Flying Cupid amazed at the beauty of Psyche).
큐피드(에로스)는 수많은 사랑 주제의 그림에 약방의 감초처럼 등장한다.
하나의 장면으로 모든 것을 말해야 하는 회화는 

등장 인물들 사이의 사랑 이야기를 구구절절 설명할 수 없다.
하지만 큐피드를 그려 넣으면 그 사랑 이야기를 보다 쉽게 전할 수 있다. 
그런 까닭에 주로 화면 귀퉁이에 자리할망정 

이 사랑의 신만큼 미술 작품에 많이 등장한 신화의 캐릭터도 없다.
자연스레 큐피드에게는 ‘주연보다 더 빛나는 조연’이라는 상찬이 주어졌다. 
신화 속의 지위는 낮아도 미술 속의 지위는 매우 높은 신인 것이다.

수많은 선남선녀를 사랑에 빠지게 했던 큐피드, 그 자신도 사랑에 깊이 빠진 적이 있다. 
프시케와의 사랑 이야기가 바로 그 사례다. 
예로부터 전해져 오던 큐피드와 프시케의 사랑 이야기는 서기 2세기 로마의 문인 
아풀레이우스에 의해 아름다운 철학적 동화로 진화했다. 
그 글을 토대로 수많은 화가들이 큐피드와 프시케의 사랑 이야기를 그렸다. 
얼마나 많이 그려졌는지 그림책을 만든다 하면 

각 장면마다 필요한 그림들을 선택적으로 고를 수 있을 정도다. 

프시케는 매우 아름다운 소녀였다.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미의 여신 비너스마저 시기할 정도였다. 
자존심이 상한 비너스는 아들 큐피드에게 프시케를 

아주 무가치한 사람과 사랑에 빠지게 만들라고 시켰다. 
그러나 프시케를 찾은 에로스는 오히려 그녀의 아름다움에 반해 그녀를 깊이 사랑하게 되었다. 
모리스 드니는 공중에서 프시케를 바라보던 큐피드가 화들짝 놀라는 모습을 그렸다. 
얼마나 아름다운지 중심을 다 잃을 정도다.

 

Panel 2 : Zephyr brings Psyche to the Island of Bliss, 1908. by Maurice Denis. oil on canvas, 
395 X 267.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4

신화가 말하는 프쉬케는 그 놀라운 아름다움으로 뭍 남성들을 두렵게 하였다. 
그의 아비는 신탁에 묻고 딸고 결혼 예복을 입혀 바위 위에 버렸다. 
산의 정상에 홀로 버려진 푸쉬케는 갑자기 바람에 실려 어딘가 잡혀가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어느 계곡에서 깊이 잠이 들었다. 
잠이 깨어 보니 어느 화려한 왕궁 침심이었다. 
매일 밤 남편이라고 주장하는 자가 찾아와 

자기를 보려고 하지 말라는 주장을 하고 사랑을 나누어 주고 떠났다. 
자기를 보려고 하면 자기를 잃게 될 것이라는 경고를 주고 

사랑을 남기고 떠나는 남자에 대한 호기심이 발동한다.

 

Panel 3 : Psyche discovers that her mysterious lover is Cupid, 1908. by Maurice Denis. oil on canvas, 
395 X 274.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4

어느 날 밤 호기심을 누르지 못한 푸쉬케는 등불을 밝혀 

잠에 취한 신비한 남편을 보고 그 정체를 알게 되었다. 
사랑의 신 에로스의 용모에 떨린 푸쉬케의 등잔에서 

기름 한방울이 떨어져 젊은 에로스의 몸에 흘렀다. 
놀라 도망가버린 에로스를 바라보며 푸쉬케는 절망에 빠진다. 

 

Panel 4 : Psyche, opening a box with dreams of the underworld, plunges into sleep, 1908. 
by Maurice Denis. oil on canvas, 395 X 272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4

 

패널 4. 언더 월드의 꿈으로 상자를 여는 프시케는 잠에 빠진다
프시케는 그리스 왕과 왕비의 막내 딸이었다. 
그녀에게는 두 명의 언니가 있었다. 
그녀는 형제 자매 중에서 가장 예쁘고 여신처럼 보였다. 
그녀는 사제를 포함한 사람들이 그녀를 사랑과 아름다움의 그리스 여신 
아프로디테와 비교했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사람들이 프시케를 숭배하기 시작하여 아프로디테의 사원이 버려졌을 때 여신은 격분했다. 
처벌로 그녀는 그녀의 아들 에로스를 보내서 프시케가 
사악하고 끔찍한 사람과 사랑에 빠지게 만들었다. 
그러나 큐피드는 그녀를 보고 사랑에 빠졌고 어머니의 분노에서 그녀를 구하기로 결정했다.

그녀의 언니들은 그녀의 아름다움을 질투했다. 
그녀의 자매는 결국 왕과 결혼하여 남편과 함께 남았다. 
아무도 프시케에게 결혼을 요구하지 않았다. 
남자들은 차라리 그녀의 아름다움에 감탄였다. 
그녀는 혼자 남겨졌다. 
그녀의 아버지는 필사적으로 델파이의 오라클에 답을 구하기로 결정했다.

그녀의 아버지인 왕은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 델파이 오라클에 문의했다. 
여사제 내부에서 아폴로가 직접 말했다. 그는 
"당신의 딸은 신들이 두려워하는 짐승과 결혼할 것입니다. 
그녀를 장례식 옷을 입고 왕국에서 가장 높은 바위 첨탑으로 데려 가십시오. 
그곳에서 그녀는 그녀의 운명을 맞이할 것입니다." 

이 말을 듣고 왕은 상심했다. 
그러나 그는 아폴로(Apollo)로부터 직접 주문을 받았기 때문에 주문한대로 했다.
그는 그녀를 장례식 옷을 입고 왕국에서 가장 높은 바위 첨탑으로 데려갔다. 
프시케는 짐승이 오기를 기다렸지만 오지 않았을 때 자신의 손으로 문제를 해결했다. 
그녀는 첨탑에서 뛰어내렸다. 왕국의 모든 사람들은 그녀가 죽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리스 서풍의 군주인 제피루스는 그녀를 죽음에서 구했다. 
그는 그녀를 에로스의 궁전으로 데려가 에로스가 돌아올 때까지 밤새 기다렸다. 
그곳에서 그녀는 궁전이 매우 크고 각 찬장이 금으로 채워져 있는 것을 보았다. 
에로스가 돌아 왔을 때 그는 완전히 어둠 속에서 프시케에게 그를 보지 말라고 말했다. 
그녀는 그를 보려고 해서는 안되며 그는 그녀에게 그의 이름을 말할 수 없다. 
그렇지 않으면 모든 것을 망칠 것이다.

Psyche가 궁전에서 생활한 첫 몇 주 동안은 훌륭했다. 
그러나 그녀는 자매들이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들었다.

 

Panel 5 : In the presence of the gods, Jupiter bestows immortality on Psyche and 
celebrates her marriage to Cupid, 1908. by Maurice Denis. oil on canvas, 399 X 272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4
 패널 5. 신들 앞에서 주피터는 프시케에게 불멸을 부여하고 큐피드와의 결혼을 축하한다.

 

그리스의 여신 푸쉬케는 에로스를 찾아 세상을 헤메다가 수많은 시험과 역경을 거쳐 
올림푸스 산에 신의 자리에 오르고 에로스와 결혼을 하게 된다. 
이 이야기는 인간의 영혼이 신의 자리에 오르는 메타포를 보여준다. 
푸쉬케는 그리스 언어로 영혼을 가리킨다. 
푸쉬케의 역경은 우리 영혼이 가야 할 길을 보여주고 있었다. 

 

Panel 6 : Relatives leave Psyche at the top of the mountain, 1909. by Maurice Denis. oil on canvas, 
200 X 27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4

 

어느 왕국의 세 공주 가운데 막내가 미모가 빼어나

미의 여신 비너스(그리스신화의 아프로디테)의 질투를 받았다. 
비너스는 아들인 사랑의 신 큐피드(그리스신화의 에로스)에게 프시케를 이 세상에서 
가장 혐오스러운 사람의 품에 안기게 하라고 시켰다. 
그러나 큐피드는 프시케의 미모에 빠져 부부가 되었다. 
큐피드는 프시케에게 완전한 어둠 속에서만 만날 수 있으며, 
자신의 모습을 보려고 하면 영원히 헤어지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동생을 시기한 두 언니는 프시케에게 남편이 괴물일지도 모르니 

밤에 그의 얼굴을 확인해 보라고 부추겼다. 
마음이 흔들린 프시케가 등불을 밝히고 살펴 보니 

침상에서 잠자는 사람은 바로 아름다운 사랑의 신이었다. 
이 때 등불의 기름이 어깨에 떨어져서 잠에서 깨어난 큐피드는 

프시케의 불신(不信)을 꾸짖고는 떠나버렸다.

 

Panel 7 : Cupid brings Psyche to heaven, 1908. by Maurice Denis. oil on canvas, 
180 X 26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4

프시케는 남편을 찾아 각지의 신전(神殿)을 돌아다니다가 비너스가 있는 곳에 이르렀다. 
비너스는 여러 종류의 곡식이 섞인 곡식더미를 하룻밤 사이에 한 알씩 가려 내라거나, 
황금으로 된 양털을 가지고 오라는 등의 시련을 주었다. 
비너스는 프시케가 갖가지 시험을 통과하자 하데스의 아내이자 지하세계의 여왕인 
페르세포네의 처소로 가서 아름다움이 담긴 상자를 가져 오라고 시켰다.

상자를 손에 넣은 프시케가 호기심에 상자를 열자 그 안에 들어 있던 죽음의 잠이 프시케를 뒤덮었다. 
이 때 큐피드가 나타나 구출한 뒤 주피터(그리스 신화의 제우스)에게 
어머니를 설득하여 노여움을 풀어 달라고 간청하였다. 
주피터는 비너스에게 이들의 결합을 설득하였고 마침내 비너스도 둘의 결혼을 허락하였다. 
프시케는 신들의 음료인 넥타르를 마시고 불로불사(不老不死)의 생명을 얻었으며, 
큐피드와의 사이에서 희열을 상징하는 볼룹타스라는 딸을 낳았다.

 

Room of Maurice Denis and Edouard Vuillard.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5.

415번 방은 모리스 드니(Maurice Denis 1870-1943)와 
에두아르 뷔야르(Edouard Vuillard 1868-1940)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모리스 드니는 앞서 살펴 보았고, 에두아르 뷔야르는 프랑스의 화가이자 장식 예술가, 판화가이다. 
1891년부터 1900년까지 에두아르 뷔야르는 나비파의 주요 일원이었으며, 

일본 판화의 영향을 받아 순수한 색의 영역과 내부의 장면을 조합한 그림을 제작하였고, 

주제는 색과 패턴에 혼합시켰다. 

뷔야르는 또한 극장의 세트와 실내 장식을 위한 패널에 채색을 하거나 
접시와 스테인드 글라스를 디자인하는 장식 예술가였다. 
1900년 이후 나비파가 해체되었을 때 그는 보다 사실적인 스타일을 채택하여 
화려한 디테일과 생생한 색상으로 풍경과 실내를 그렸다. 
1920년대와 1930년대에는 프랑스 산업과 예술계에서 
저명한 인물의 초상화를 그 인물에게 익숙한 공간을 배경으로 하여 그렸다.

에두아르 뷔야르는 1868년 11월 11일 손에루아르주 퀴조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다. 
뷔야르의 아버지는 은퇴한 해군 보병 대장이었으며, 제대 후 세금 징수원으로 일했다.
아버지는 어머니 마리 뷔야르보다 27살이 많았으며, 어머니는 재봉사였다.

1877년 아버지가 은퇴한 후, 뷔야르의 가족은 파리에 정착하였다. 
어머니의 재봉 작업장이 있던 Rue Daunou로 이사한 후, 

마리스타교육수사회가 운영하는 학교에 입학하였다. 
뷔야르는 장학금을 받아 명문 리세 퐁텐(Lycée Fontaine)에 입학하였고,
수사학과 예술을 공부하면서 미켈란젤로의 작품과 고전 조각을 드로잉하였다.
리세에서 뷔야르는 미래에 나비파가 되는 케르 자비에 루셀, 모리스 드니, 작가 피에르 베버, 
그리고 미래의 배우이자 무대 감독이 되는 오렐리앵 뤼네포를 만났다.

 

Room of Maurice Denis and Edouard Vuillard.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5.

1889년 말에 뷔야르는 모리스 드니와 다른 리세 출신 친구들과 함께 
반비밀주의이자 반신비주의 모임인 나비파를 만들고 자주 모임을 갖기 시작하였다. 
1888년에 젊은 화가 폴 세뤼지에는 브르타뉴를 여행하면서 폴 고갱의 지도에 따라 
색의 영역으로 구성된 추상에 가까운 항구 그림을 그렸다. 
이것은 최초의 나비파 작품인 <부적 The talisman>이 되었다. 

세뤼지에와 그의 친구 피에르 보나르, 모리스 드니, 폴 랑송은 예술을 
그 토대로 환원시키는 데에 전념한 최초의 나비파 작가였다. 
1890년 드니를 통해 뷔야르는 랑송의 스튜디오나 

Passage Brady의 카페에서 만나던 모임의 일원이 되었다. 
모임의 존재는 이론적으로는 비밀이었고 회원들은 암호화된 별명을 사용하였다. 
뷔야르의 별명은 그의 군 복무로 인하여 나비 주아브(Nabi Zouave)가 되었다.

나비파는 언제나 다른 스타일을 가지고 있었지만 예술에 대한 공통된 생각과 
이상을 공유했으나, 1900년 전람회 이후 각자의 길을 걸었다. 
프랑스 사회를 분열시킨 드레퓌스 사건(1894-1908)에 의해 나비파의 해체는 더욱 심화되었다. 
드레퓌스는 유태인 프랑스 육군 장교로, 반역죄로 기소되었으며, 
면죄되기 전에 유배지로의 추방이 선고되었다. 
나비파에서 뷔야르와 보나르는 드레퓌스를 지지한 반면, 

드니와 세뤼지에는 프랑스 육군를 지지하였다.

1900년 나바파가 해체된 후 뷔야르의 스타일과 주제는 변화하였다. 
나비파와 함께 할 때에 바야르는 아방가르드의 선봉에 있었다. 
그는 점진적으로 1900년 이전에 그렸던 밀폐되고 붐비는 어두운 실내를 버리고 
자연광이 비치는 야외를 더 많이 그리기 시작하였다. 


뷔야르는 계속해서 실내를 그리긴 했으나, 실내는 더 밝고 깊어졌으며 
색채는 더 다채로워졌고, 얼굴과 이목구비가 더 선명해졌다. 
빛의 효과는 주제가 실내이든 파리의 공원과 거리이든 뷔야르 작품의 주요 구성 요소가되었다. 
뷔야르는 점차 자연주의로 돌아가, 1908년 11월 Gallerie Bernheim-Jeune에서 개최한 
개인전에서 다수의 새로운 풍경화를 발표하였다. 
그는 한 반모더니즘 비평가로부터 "체계적인 변형에 대한 우아한 항의"라는 찬사을 받았다. 

 

Mother and child, 1895. by Maurice Denis. oil on canvas, 45 X 38.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5

 

Visit of Mary Elizabeth, 1894. by Maurice Denis. oil on canvas, 103 X 93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5

 

Martha and Mary, 1896. by Maurice Denis. oil on canvas, 77 X 116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5

 

Holy spring in Gidel, 1905. by Maurice Denis. oil on canvas, 156.5 X 178.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5

 

Figures in a Spring Landscape (Sacred Grove), 1897. by Maurice Denis. oil on canvas, 
39 X 34.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5

 

Bacchus and Ariadne, 1907. by Maurice Denis. oil on canvas, 81 X 116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5

 

술의 신 바쿠스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크레타 왕 미노스의 딸인 아리아드네를 그린 작품이라 한다.
신화 속의 이야기를 현대적으로 해석한 듯하다.

 

Wedding Procession, 1892. by Maurice Denis. oil on canvas, 81 X 116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5

 

Children in the room, 1909. by Edouard Vuillard. oil on canvas, 84.5 X 77.7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5

 

방에 있는 아이들
프랑스 화가 에두아르 뷔야르 (Edouard Vuillard, 1868 - 1940)는 

15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바느질로 생활하는 어머니 손에서 자랐다. 
1888년 아카데미 쥘리앙에 들어가 피에르 보나르를 알게 되었으며, 
그와 함께 나비(Nabis)파의 일원으로 출발하였다.

인상파의 영향을 벗어나 고갱의 화풍을 따랐고 그의 그림은 
형태의 단순화와 색면(色面)의 장식적 배합을 지향하였다. 
작품은 어머니와 자식의 정경(情景)이나 실내의 정물과 같은 
신변의 평범한 일상생활을 소재로 삼았으며, 깊이 있는 배색과 
애정 깊은 터치는 앵티미즘(Intimism)의 대표적 작품으로 인정받고 있다.

그의 작품은 임의적인 분할, 대담한 생략, 넓게 칠한 단색, 검은 테두리, 
원근감을 버리고 얻은 이분법적 화폭의 장식성, 채색의 섬세함 등이 특징이다. 
동시에 고갱의 구획주의와 종합주의에서 받은 영향이 드러나기도 하며, 
피에르 보나르의 작품에서와 마찬가지로 일본 취향 역시 드러나고 있다.

 

In the room, 1899. by Edouard Vuillard. oil on 카드보드, 52 X 79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5

 

[영상] Maurice Denis in The State Hermitage Muse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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