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탄불 고고학박물관 (Istanbul Archaeology Museum) 


대부분의 전시실은 소규모 신전 또는 주거용 건축물로 이용되던 공간이다. 

다음 전시실에는 고대 리키아 기념물과 아나톨리아 건축물 등이 전시되어 있다. 


‘아나톨리아와 트로이의 역사(Anatolia and Troy Through the Ages)’ 및 ‘이웃한 아나톨리아, 사이프러스, 시리아, 

팔레스타인의 문화(Neighbouring Cultures of Anatolia, Cyprus, Syria and Palestine)’ 전시는 위층에서 진행된다. 

그리스 로마 이전의 헬레니즘, 로마, 비잔틴, 오스만 제국의 역사를 해당 지역의 유물을 통해 조명하는 

‘이스탄불의 역사(İstanbul Through the Ages)’ 전시도 있다.





오케아노스 (고대 그리스어: Ὠκεανός Ōkeanós)


오케아노스는 고대 그리스와 고대 로마에서 대지를 둘러싼 거대한 강을 말하며 

이를 의인화한 신의 이름으로 티탄족의 일원인 포세이돈 이전의 2세대 바다의 신을 말하기도 한다. 

현대 영어를 비롯한 많은 언어에서 바다를 뜻하는 단어(Ocean)의 어원이 된 이름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지구를 평평한 땅으로 상정했고 그 지구를 거대한 강이 둘러싸고 있다고 믿었다. 

티탄족 오케아노스는 프로토게노이인 우라노스와 가이아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로 

상반신은 긴 수염을 한 인간의 모습이고 하반신은 비늘이 달린 물고기의 모습으로 묘사된다. 

오케아노스는 역시 티탄족의 일원인 아내 테튀스와의 사이에서 모든 바다와 강, 연못과 호수를 낳았으며 

오케아니스라고 부르는 3,000여 명의 물의 요정들, 님프들을 낳았다고 전해진다. 

오케아노스는 티탄족에 우두머리, 수장, 왕, 조상이라는 말이 있고 

아내 테튀스와 함께 티탄계의 1세대 왕과 여왕자리를 앉았다고 한다.


후기 히타이트의 더블 스핑크스 (B.C 8세기)



그리스, 로마 시대의 대리석 조각품들 - 살아 움직이다 굳은 거 같다.


Hermaphroditus 대리석상 : Hermes와 Aphrodite 사이의 아들로 양성을 모두 갖춘 신


그리스 아테네 아크로폴리스 에레크테이온의 카리아테이드 (女像柱) 원본


그리스 아테네 아크로폴리스 에레크테이온의 카리아테이드 (女像柱) 원본


그리스 아테네 아크로폴리스 에레크테이온의 카리아테이드 (女像柱) 이미지


Group of KORES and KOUROS


사랑과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 대리석상


아폴론 신 대리석상


아폴론 신 대리석상


아폴로 신과 그의 근육, 즉 영감의 원천을 묘사한 이 조각상은 고대 도시 밀레투스(Miletus)의 파우스티나(Faustina) 욕장에서 발견되었다.

Faustina는 로마 황제 Antoninus Pius의 딸이자 Marcus Aurelius 황제의 아내였다. 

그녀의 죽음 이후, 밀레투스의 유명한 목욕탕 그녀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이 조각상 그룹에서 빛과 지혜와 이성의 신인 아폴로는 근육질의 젊은이로 묘사된다. 

그는 받침대에 놓인 거문고를 연주하고 있다. 그의 몸은 우아하고 균형이 잘 잡혀 있다. 

마치 연주를 시작하기 전에 현을 가지고 노는 것처럼 거문고의 주둥이를 잡고 있다. 

이런 종류의 신의 묘사는 "아폴로 시타로에 두스"또는 "거미 아폴로 연주"로 알려져 있다.


바다의 신 포세이돈 대리석상 (God of Sea)


Ancient Greek exhibition of the museum


Icon with relief Virgin Mary at prayer


Statue of Emperor Valentinian II


Statue of Alexander the Great


Puzur Ishtar, governor of Mari


아테나 여신상


다이아나 (아르테미스) 여신상. 옷 주름 하나하나가 섬세하다. 


토르소와 여러가지 조각상. 중간은 승리의 여신 니케, 맨 오른쪽은 역시 다이아나 여신 


사포(Sappho BC 612~)의 머리상


호메로스와 함께 BC 610~580년경 그리스 문학의 가장 초기에 레스보스(Lesbos)섬에서 활동한 유명한 여류 시인인 사포의 머리상

귀족집안 출신으로 재능과 용모가 뛰어난 그녀는 최초의 여류 시인이다. 

그녀의 시어는 세속적이고, 시구는 간결하고 직접적이면서도 회화적이지만 원초적인 감정의 힘을 결코 잃지 않았다. 

방대한 작품을 쓴 것으로 추정되나, 완전한 형태로 전해지는 시는 28행 짜리 한 편 뿐이고, 

700여 행에 이르는 인용이나 단편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사포와 관련하여 그녀의 시와 함께 동성애자를 일컽는 '레즈비언 Lesbian'이라는 말이 따라다닌다. 

레즈비언은 사포가 태어난 레스보스(Lesbos) 섬의 사람이란 뜻. 

그래서 레스보스와 적대적 관계에 있던 아테네에서는 사포를 가리켜 

'몇 명의 여자에게 빠져서 정신없이 허우적거리는 이상한 사람'이라고 몰아 붙이기도 했고, 

그 시가 음란하다고 해서 후세에 기독교인들이 시집을 파기해 버려 지금은 몇 개의 시만이 전해내려 온다.


사랑의 시를 짓고 있던 사포는 어느 날 신전에서 미와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에게 바칠 시를 쓰고 있었다.

그런데 같은 시각 아프로디테를 찾아온 파온이란 늙고 추한 이방인 청년이 사포를 보고 첫눈에 반해버렸다. 

너무나 황홀한 사포의 모습에 넋을 잃고 바라 보던 파온은 

자신이 무엇 때문에 신전에 왔는지 조차 잊어 버리고 아프로디테에게 마법을 청한다. 

젊고 잘생긴 청년의 모습으로 보이도록 하는 특별한 향을 부탁한 것. 

아프로디테는 안쓰러운 마음에 간절히 비는 청년의 청을 들어주었다.


며칠 후 신전으로 찾아온 사포를 본 파온은 그 향을 신전 한구석에 몰래 피워둔다. 

그리고 향로 옆에 서서 그녀를 바라본다. 

사포는 향기에 취해서 무의식 중 아프로디테의 마법에 걸려들었다. 

결국 사포는 파온이 지닌 본래의 추한 모습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그를 오랫동안 꿈꿔 온 이상적인 배우자로 생각하게 된다.


그때를 틈타 파온이 사포에게 다가가자 환각에 취한 사포는 그에게 얼굴을 기대고 사랑을 고백한다. 

그러나 이 사랑은 이미 비극적인 결말이 예고되고 있었다. 

한창 사랑을 고백하던 중 향로의 연기가 사라져 사포는 결국 파온의 정체를 알게 된다. 

사포는 마음이 갈기갈기 찢어진 채 그만 충격으로 실신해 버린다. 

나중에 정신을 차렸지만 사포는 이상하게 파온을 포기할 수 없었다. 

자신이 사랑했던 거짓이 사라져 버리자 절망한 사포는 55세에 사랑을 노래하며 

'연인들의 투신 바위'라고 불리는 레우카스 절벽에서 몸을 날려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산 채로 가죽이 벗겨지는 마르시아스(Marsyas)


마르시아스(Marsyas) 상은 터키 중남부 고대도시 타르수스(Tarsus)에서 발견되었으며

헬레니즘 시대의 조각으로 추정된다.


마르시아스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사티로스로, 그의 죽음과 관련해서 두 가지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리스 신화에서 마르시아스는 아폴론에게 음악 대결을 신청한다.

그는 피리로, 아폴론은 리라로 연주했으나 승부를 가리지 못하고 비겼다.

아폴론은 악기를 거꾸로 들고 연주해 보자고 했고, 여기에서 마르시아스가 패배한다.

그러자 아폴론은 마르시아스를 소나무에 묶어 두고 산채로 가죽을 벗긴다.


또 다른 이야기는 레아 키벨레와 연결되며, 프리기아의 케라이나이의 신화 기록가들은 

사행천(멘데레스 강)의 원천을 설명할 때 그의 이야기를 전하였다.


마르시아스는 계보 상으로 올림포스(헤라클레스와 에우보이아의 아들, 테스피오스의 딸), 

또는 오이아그로스, 히아그니스의 아들로 전해진다.

올림포스의 경우, 마르시아스의 아들이나 제자로도 전해진다.


알렉산더 대왕 (Alexander the Great) 두부상


기원전 356 년에서 323 년 사이에 살았던 마케톤 왕 알렉산더 대왕이 왕위에 올랐을 때 그는 20 세도 되지 않았다. 

33 세의 나이로 죽은 알렉산더 대왕은 단기간 동안 대제국을 건설하고 그리스, 로마의 문화를 전파하여 헬레니즘 시대를 열었다.


그는 페르시아 제국을 정복하고 마케도니아에서 인도까지 큰 제국을 세웠다. 

알렉산더가 정복한 도시들은 나중에 군사 기지가 문화 및 상업 중심지로 바뀌면서 

고대 그리스 문화를 인도로 전파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알렉산더 대왕 시대는 고전 예술과 헬레니즘 예술 시대 사이에 대 전환기였다.

알렉산더 대왕의 두부상은 페르가몬 (베르 가마)의 아고라에서 발굴되었다.

이 두부상을 조각한 리시포스(Lysippos)는 알렉산더 대왕을 위해 일했으며 알렉산더 대왕의 유일한 조각가이기도 하다.

사자의 갈기처럼 흐트러진 곱슬머리, 두꺼운 눈썹과 둥근 눈, 이마의 깊은 주름 등 알렉산더 대왕의 특징을 잘 담아내고 있다.


비체의 봉분에 있던 투구


터키 키르클라렐리 지방의 비체에 있는 무덤에서 발견된 투구. 1세기 것으로 추정된다. 

젊은 남자의 모습을 본딴 투구이다. 투구의 이마 부분이 경첩으로 마스크와 연결되어 있다.

쿠구의 앞 부분에는 오디세우스의 배를 박살냈던 바다 괴문 실라의 모습이, 뺨 부분에는 전리품을 든 승리의 여신 니케가 새겨져 있다.


에페보스(Ephebos)의 모습


이것은 에페보스(Ephebos), 즉 십대 남성의 동상이다. 

아마도 그는 운동 선수로 방금 운동을 마친 후 직사각형의 긴 기둥에 대고 휴식을 취하고 있는 모습이다. 

그의 작고 둥근 머리가 동상의 가장 중요한 구성 요소이다. 


눈이 크고 입술이 약간 열려 있으며 속눈썹이 진하다. 

신, 여신, 황제 뿐만 아니라 이름 없는 평범한 소년이 고대 시대에 조각상으로 묘사되어 있었기 때문에 

오늘날까지 발견된 독특한 고대 유물 중 하나이다. 아마도 체육관을 장식하는 데 사용되었던 듯하다. 


마차를 모는 포르피리오스상


이 상은 토카프 궁전의 제2정원에서 발견되었으며 5세기의 것으로 추정된다.

이 상은 콘스탄티노플의 히포드롬 광장에 서 있던 기둥의 일부였다.

마차를 모는 포르피리오스가 각 면마다 새겨져 있다.


게제르 달력 (Gezer Calander)


이 석관에는 월별 이름과 수확 시기가 새겨져 있어 기원전 10세기 달력으로 추정된다. 

히브리어로 쓰인 것 중에 가장 오래된 것에 포함된다고.


고대 해시계


이 해시계는 사우디 아라비아의 유적지 '마다인 살레'에서 발견되었다. 

12개의 방사형 선으로 분할되어 있으며, 고대 아람어가 새겨져 있다. 

중앙에 막대기를 수직으로 세워 두면 해의 움직임에 따라 그림자가 표시되고, 그 그림자의 위치를 보고 시간을 읽었다.




이스탄불 고고학 박물관 (Istanbul Archaeology Museums)


이스탄불 고고학 박물관은 세계 5대 박물관에 꼽힐 정도로 중요 유물을 많이 가지고 있다. 

1881년 오스만 함디 (Osman Hamdi Bey) 관장으로 임명되어 건물을 신축, 확장하고 박물관으로 발전시켰다.


고고학 박물관, 에나멜 키오스크 박물관, 고대 아시아박물관 등 세 박물관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백만 점에 달하는 유물을 소장하고 있다. 


이스탄불 구시가지 구글 지도


톱카프궁전과 이스탄불 고고학 박물관

이스탄불 고고학 박물관 (Istanbul Archaeology Museum)


위 '고고학 박물관', 아래 왼쪽 '고대 동양 박물관', 아래 오른쪽 '에나멜 키오스크 박물관'

세계 5대 박물관 중 하나로 고고학박물관 (Archeology Museum), 고대아시아박물관(Ancient Eastern Works Museum)과 

에나멜 키오스크박물관(Enameled Kiosk Museum) 등 세 개의 박물관으로 이루어져 있다. 


주 건물인 고고학 박물관은 화가 오스만 함디 베이(Osman Hamdi Bey)에 의해 1881년에 건축되었고, 1908년 오늘날의 박물관으로 완성되었다

이곳에는 이스탄불과 인근 지역 그리고 그리스, 로마 유물 등 고고학 자료들이 100만 점 이상 소장되어 있다.


주요 소장품으로는 알렉산더 석관(Alexander Sarcophagus), 비탄에 잠긴 여자 석관, 80만 점의 오스만투르크제국 시기의 동전 및

카데시전투현판 등 그리스·헬레니즘 및 로마시대 등 다양한 예술작품들을 소장하고 있다. 


고고학 박물관은 2개 층에서 전시하고 있는데, 지하층에는 알렉산더 석관(the Alexander Sarcophagus) 등 유명한 석관들을 비롯해

로마시대의 사포의 두상(The Head of Sappho), 헬레니즘시대의 마르시아스 상(The Statue of Marsyas) 등 

고대부터 로마시대까지의 조각상들이 전시되어 있다. 


위층에는 이슬람과 비이슬람 지역의 보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1998년에 문을 연 새로운 빌딩에 있는 ‘이스탄불 주변의 문화’ 전시 공간에는 주변 지역에서 출토된 

비티니아(Bithynia)와 비잔티움(Byzantium) 등 다양한 시대의 고고학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아나톨리아(Anatolia)와 트로이 유물, 시리아, 팔레스타인, 키프러스에서 출토된 유물들은 새 빌딩 1층에 전시되어 있다. 


'고대 아시아박물관'은 1883년 오스만함디베이에 의해 건축되었고, 

1935년에 박물관으로 개관되었다가 복원과정을 거쳐 1974년 재개관 되었다. 

고대 아시아 박물관에는 메소포타미아, 고대 이집트, 아랍 반도 등에서 출토된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7만 5000여 개의 쐐기문자판도 소장하고 있다. 


'에나멜 키오스크 박물관'은 1472년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술탄 메메드2세(Mehmed II)에 의해 건축되었고, 

이스탄불에서 가장 오래된 건축물로 오스만투르크제국의 시민건축양식을 잘 보여준다. 

1875년과 1891년에는 황제박물관으로 사용되었고 1953년에 터키이슬람 예술박물관으로 

대중에게 개관되었으며 이후 현재의 이스탄불고고학 박물관으로 통합되었다. 

박물관 자체가 하나의 유적인 셈이며 이곳에는 11세기부터 20세기까지의 셀주크와 

오스만제국 시대의 기와, 타일 장식, 도자기 등 예술품 2,000여 점을 전시하고 있다.


이스탄불 고고학박물관 (Istanbul Archaeology Museum) 입구

귈하네 공원에서 톱카프궁전으로 가는 길목에 자리잡고 있다. 


이스탄불 고고학박물관 (Istanbul Archaeology Museum) 정문


이스탄불 고고학박물관 (Istanbul Archaeology Museum) 정문


이스탄불 고고학박물관 (Istanbul Archaeology Museum) 정문


이스탄불 고고학박물관 (Istanbul Archaeology Museum) 안내도


이스탄불 고고학박물관 (Istanbul Archaeology Museum)


이스탄불 고고학박물관 (Istanbul Archaeology Museum)


박물관 정문으로 들어가서 왼쪽에 마주하는 건물이 고고학 박물관, 오른쪽에 마주하는 건물이 고대 동양박물관,

그리고 안쪽으로 에나멜 키오스크 박물관이 있다.


이스탄불 고고학박물관 (Istanbul Archaeology Museum)


안뜰 맞은편에 인상적인 신고전주의 건축물이 들어서 있다. 

고대 그리스 로마 조각상과 석관, 이스탄불 역사를 조명하는 유물들이 뒤섞여 보관되어 있다. 


시돈의 공동묘지와 주변 지역에서 발굴한 석관이 보관되어 있는 전시실이 하이라이트로 꼽힌다. 

석관은 1887년 오스만 함디 베이(Osman Hamdi Bey)가 시돈(오늘날 레바논의 Side)에서 발굴한 것이다. 

알렉산더의 석관(Alexander Sarcophagus)과 우는 여인의 석관(Mourning Women Sarcophagus)이 특히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다음 전시실에서는 시리아와 레바논, 테살로니키, 에페수스의 석관을 볼 수 있다. 

죽음을 숭배했던 고대에 제작된 석관을 자세하게 살펴볼 수 있어 좋다. 


그 다음 전시실에는 AD 140~270년 세밀하게 제작된 석관이 보관되어 있다. 

아나톨리아의 원주가 있는 석관(Columned Sarcophagi of Anatolia)도 이곳에 있다. 

전시실 다수는 소규모 신전 또는 주거용 건축물로 이용되던 공간이다. 

코니아(Konya)에서 가져온 시다마라 석관(Sidamara Sarcophagus)도 볼 수 있다.


다음 전시실에는 고대 리키아 기념물과 아나톨리아(Anatolia) 건축물 등이 전시되어 있다. 

‘아나톨리아와 트로이의 역사(Anatolia and Troy Through the Ages)’ 및 ‘이웃한 아나톨리아, 사이프러스, 시리아, 

팔레스타인의 문화(Neighbouring Cultures of Anatolia, Cyprus, Syria and Palestine)’ 전시는 위층에서 진행된다. 

그리스 로마 이전의 헬레니즘, 로마, 비잔틴, 오스만 제국의 역사를 해당 지역의 유물을 통해 조명하는 

‘이스탄불의 역사(İstanbul Through the Ages)’ 전시도 볼 수 있다.


이스탄불 고고학박물관 (Istanbul Archaeology Museum)


화가 오스만 함디 베이(Osman Hamdi Bey)에 의해서 18810년에 건축되었고

1908년 오늘날의 박물관으로 완성된 고고학 박물관이다.


오스만 함디 베이(Osman Hamdi Bey 1842~1910)


본관의 로비에 이스탄불 고고학 박물관의 설립자인 오스만 함디 베이의 흉상과 기념패가 있다.

오스만 함디 베이는 이스탄불과 파리에서 법학을 공부하던 중 미술을 하기로 결심하고 프랑스의 오리엔탈리즘 화가인 

장 레옹 제롬(Jean-Leon Gerome. 1824~1904)과 구스타브 블랑거(Gustave Boulanger, 1824-88) 밑에서 미술교육을 받았다.

당시 유럽에서는 그의 스승이던 제롬과 블랑거를 주축으로 오리엔탈리즘이 유행했는데

그 화풍을 수용해서 오스만 함디 베이는 터키 고유의 이미지를 몽환적인 분위기로 그렸다.


터키는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곳에 위치한 지리적 위치 때문에 역사적으로 동서양의 문화가 교류하는 교량 역할을 하며

18세기에 예술도 동서양이 만나 독특한 분위기의 터키 예술을 탄생 시켰다.

그 중추적인 역할을 했던 터키 근대 회화의 거장인 오스만 함디 베이의 화풍은 오리엔탈리즘의 세밀화에 속한다.


화가이면서 고고학자이기도 하였던 오스만 함디 베이는 파리 생활을 끝내고 터키로 돌아와

1881년 이스탄불의 고고학 박물관 초대 관장이 되었다.

1882년에는 미학 및 예술 기법을 가르쳐주는 미술 아카데미를(Academy of Fine Arts) 설립했다.


1884년에는 터키 유물을 해외로 밀반출하는 것을 금지하기 위한 법률을 제정했는데

이는 터키 유물 보존을 위한 법적 기틀을 마련하는데 중요한 초석이 되었다.

19세기 유럽의 권력자들은 오스만 제국의 역사적 가치를 지닌 유물을 밀수입했는데

오스만 함디 베이가 법률을 제정을 통해 밀반출을 막은 것이다.


그는 과학적 정보에 기반을 둔 터키의 첫 고고학 연구팀을 지휘하고

1887년 시리아 시돈(Sidon)의 왕실 지하묘실에서 발굴한 호화로운 석관은 세계적인 유물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1891년 그의 지도 아래 이스탄불 고고학 박물관(Istanbul Archeology Museum)이 공식적으로 문을 열게 되었다.

오스만 함디 베이는 박물관 및 아카데미 디렉터로 일하며

자신의 스승이었던 제롬과 블랑거의 화풍을 살려 작품 활동도 꾸준히 했다.


변호사와 모델 그리고 거북이 조련사로도 활동하며 다재다능했던 그는

터키 문화의 기틀을 마련한 화가이면서 뛰어난 고고학자로 추앙받고 있다.


고고학 박물관의 석관


고고학 박물관의 석관


레바논 시돈(Sidon) 인근의 네크로폴리스(Necropolis)에서 발견된 석관


레바논 시돈(Sidon) 인근의 네크로폴리스(Necropolis)에서 발견된 석관


고고학 박물관의 석관들


알렉산더의 석관 (Alexander Sarcophagus) - B.C. 330년 경 제작. 


1887년 시리아의 시돈 왕실 지하묘실에서 출토한 호화로운 석관. 

'알렉산더의 석관'이라고 전시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시돈왕이 된 아브달로니모스를 위해 만든 관으로 밝혀짐.


몸체가 두 덩어리인 커다란 펜테리콘 산 대리석으로 신전형으로 만들어졌으며, 보존상태가 좋고 아름다운 채색을 남기고 있다. 

몸체의 긴 측면 부조 가운데 알렉산더 대왕의 모습을 한 조각이 있어 '알렉산더의 석관'으로 명명하였지만

알렉산더 대왕의 유해를 모신 석관은 아니다. 

B.C. 332년 알렉산더에 의해서 시돈의 사트랍(satrap, 封侯)이 된 아브달로니모스의 유해를 모시기 위해 만든 관으로 밝혀짐.


뚜껑 양쪽 페디멘트 부분은 전투 장면을 나타내고 석관 4면은 장단(長短)으로 각각 전투와 수렵 장면을 나타낸다. 

부조는 환조(丸彫)에 가깝고 장식은 이오니아식이다. 그리스인이 제작한 것으로 추측된다. 


알렉산더 대왕의 조각이 새겨져 저부조로 장식된 기원전 4세기 말 헬레니즘 시기의 석제 사르코파구스(Sarcophagus)이다.

놀라울만큼 잘 보존되어 있고 높은 심미학적 작품으로서 칭송을 받고 있다. 

이스탄불 고고학 박물관의 가장 뛰어난 소장품이다.


알렉산더의 석관은 두 개씩 짝을 이루는 장식이 새겨져 있는 4개의 사르코파구스 중 하나이며, 

1887년 레바논 시돈(Sidon) 인근의 네크로폴리스(Necropolis)에서 

그리스계 오스만인 오스만 함디 베이와 아르메니아계 오스만인 예르반트 보스칸에 의한 발굴 작업 중에 발견되었다. 


이수스(Issus) 전투가 끝나고 바로 알렉산드로스가 임명한 시돈의 왕 아브달로니모스의 석관으로서

카를 셰포트가 리시포스 양식의 영향을 받지 않은 고전기 양식임에 비추어 아브달로니모스가 죽기 이전의 것으로 증명되었다. 

발데마르 헤켈은 이 석관이 페르시아 귀족이자 바빌론 총독이던 마자에우스의 것으로 만들어졌다고 주장했다.


석관은 다색의 흔적을 가지고 있는 펜텔리콘 대리석으로 그리스 신전 양식을 따 만들어졌다.

셰포트에 의하면 아티카 양식이 사용됨을 들어 이오니아인 조각가들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여기는 한편 

밀러는 시돈에서 작업된 로도스인 작업장에서 만들어졌을 것이라 추정했다.


석관의 긴쪽에 있는 조각들은 알렉산더 대왕이 이수스(Issus) 전투에서 페르시아군과 싸우는 걸 묘사했다. 

폴크마르 폰 그라에베는 나폴리의 유명한 알렉산드로스 모자이크와 견주었고, 

에레트리아의 필록세노스의 소실된 공통의 원안에서 두 작품이 전래되었다고 결론지었다. 


알렉산더 대왕은 머리에 사자 가죽을 쓰고 말을 탄 채 페르시아 기병을 향해 창을 던지려는 준비를 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폰 그라에베가 동의한 조각들의 “역사성”은 신화적 전투나 왕실의 사냥이기보다 덜 강조된 카를 셰폴트의 것으로 보이며, 

일부 학자들은 가운데에서 가까운 두 번째 말을 탄 마케도니아인 조각상이 알렉산더 대왕의 오랜 절친 헤파에스티온을 나타낸다고 믿는다. 

세번째 말을 탄 마케도니아인 조각상은 자주 페르디카스로 여겨진다.


반대편의 긴 면에서는 알렉산더 대왕과 마케도니아인들이 아브달로니모스와 페르시아인들과 함께 사자를 사냥하는 모습을 보인다.

짧은 면의 끝은 눈을 신화 속의 사자를 사냥하는 모습으로 향하게 하는데, 

한쪽 짧은 면은 아브달로니모스가 표범을 사냥하는 장면을 묘사하고, 다른 짧은 면은 가자 전투같은 장면을 묘사하는데, 

이 페디먼트 위에 있는 쪽은 페르디카스의 죽음을 보여준다. 

지붕 위의 페디먼트는 교전 중에 아브달로니모스를 나타낸다.


알렉산더의 석관 (The Alexander Sarcophagus) 부분


말을 물어 뜯는 사자, 그 사자와 싸우는 그리스 군인들의 모습이 생생하다. 

한 명은 도끼로, 또 한 명은 창으로 사자를 찌르고 있다. 

현재 창은 없지만 오른손은 확실히 창을 쥐고 있는 형상이다. 

이미 창 끝이 사자의 왼쪽 앞발을 찌른 흉터(붉은 원)가 있고, 사자의 뒷다리를 무는 사냥개의 모습 또한 용맹스럽다.


알렉산더의 석관 (The Alexander Sarcophagus) 부분


이수스(Issus) 전투 (BC333)에서 페르시아군을 패퇴시키는 알렉산더 대왕의 그리스군. 

석관 맨 왼쪽에 있는, 사자 탈을 머리에 쓰고 말을 탄 사람이 알렉산더 대왕이다. 

창을 높이 치켜든 채 적을 찌르려 하고 있다. 

말은 앞발을 힘껏 들어올려 적을 향하고 있다. 

이 석관 면에만 18명의 사람과 6마리의 말을 등장시켜 치열한 격전을 치르는 장면을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1887년 알렉산더 석관의 발굴 장면


Ayaa 네크로폴리스 묘지 발굴의 횡단면. 

알렉산더 석관은 하단 가운데


알렉산더의 석관 짧은 면 중 하나의 색상 재구성

석관의 짧은 쪽 중 하나를 채색본으로 복원한 모습


알렉산더 석관에서 Achaemenid 기병대의 색 재건


알렉산더 석관에서 Achaemenid 보병의 색 재건


알렉산더의 석관 (The Alexander Sarcophagus) 부분


아직도 석관 위쪽에는 흐릿하게나마 색감이 남아 있다. 

붉은색이 주조를 이루었음을 짐작하게 해준다.


알렉산더의 석관 (The Alexander Sarcophagus)


본래는 이처럼 대리석에 색을 입힌 모습이었는데,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점점 빛깔이 바래어 완전히 탈색되다시피 변해버렸다. 

복원된 부조에는 창도 또렷이 표현되어 있다.


슬피 우는 여인들(Mourning Women) BC 350년 작품


고고학 박물관 알렉산더 석관 묘 바로 뒤에 전시돼 있는 또 하나의 걸작. 

인간의 슬픔을 가장 아름답고 비애스럽게 표현한 작품으로 다가온다. (BC 350년 작품 )


사랑하는 연인 시돈(Sidon) 왕의 죽음을 슬퍼하며 애도하는 여인들의 모습이 보는 이로 하여금 슬픔에 잠기게 한다. 

사면의 조각에 섬세하게 전신으로 새겨진 여인들의 표정이 놀랍게도 각양각색으로 표현돼 있어 

하나하나 뜯어보려면 오랜 시간을 서 있어야 한다.


슬피 우는 여인들(Mourning Women) 부분


슬피 우는 여인들(Mourning Women) 부분


슬피 우는 여인들(Mourning Women) 부분


이스탄불 고고학 박물관의 석관


이스탄불 고고학 박물관의 석관


시다마라 석관(Sidamara Sarcophagus)

터키의 코니아(Konya) 지방에 있는 소아시아의 고대 도시 시다마라(Sidamara)에서 가져온 석관


시다마라 석관(Sidamara Sarcophagus)

터키의 코니아(Konya) 지방에 있는 소아시아의 고대 도시 시다마라(Sidamara)에서 가져온 석관


아나톨리아의 원주가 있는 석관(Columned Sarcophagi of Anatolia)


로마 석관에서 시다마라(Sidamara) 유형의 석관은 그림이 조각된 기둥으로 분리되어 

배경에 묘사된 작은 키오스크에 배치되는 건축틀로 조각되었다. 

키오스크에는 페디먼트 또는 끈으로 장식되어 있으며 종종 반각으로 장식된 천장으로 덮여 있다.


아나톨리아의 원주가 있는 석관(Columned Sarcophagi of Anatolia)


레바논 시돈(Sidon) 인근의 네크로폴리스 (Necropolis)에서 발견된 석관

(Lycian sarcophagus of Sidon in Parian marble from the Sidon necropolis)


레바논 시돈(Sidon) 인근의 네크로폴리스 (Necropolis)에서 발견된 석관


팔미란 무덤실


팔미란인들의 무덤실이다. 

실제 무덤은 시리아의 팔미라 무덤 계곡에 있고, 전시를 위해 박물관 내에 다시 만들어졌다. 

지하 가족 무덤은 1~2세기에 팔미란 상류층에서 사용되던 방식이었다.


그리스 아테네 아크로폴리스 파르테논 신전 상단부의 부조화 원본


그리스 아테네 아크로폴리스 파르테논 신전 상단부의 부조화 원본


그리스 아테네 아크로폴리스 파르테논 신전 상단부의 부조화 원본


그리스 아테네 아크로폴리스 파르테논 신전 상단부의 부조화 원본


Pediment and shafts of a temple


[KBS 영상] 세계 5대 고고학 박물관 (Archeology Museum)




하렘 (Harem) 입구는 제2 중정 서쪽, 정의의 탑(Tower of Justice) 아래에 있다.
토프카프 궁전을 방문한 이상 놓쳐서는 안되는 궁전의 하이라이트이다.




하렘(harem) 출입구


톱카프 궁전 제2 정원 한쪽에 있는 하렘의 입구 수레의 문.

오스만제국은 규모가 크고 관리가 잘된 하렘(harem)으로도 유명하다.


술탄은 왕비를 비롯해 많은 후궁을 두었는데, 모든 여성들 혹은 그들이 생활한 규방을 흔히 하렘이라 불렀다.
하렘은 술탄의 모후가 통제했는데, 모후 아래에 왕자를 생산한 왕비들이 있었고,
다시 그 아래에 후궁들과 젊은 여성들이 있었으며, 여성 노예도 있었다.


놀라운 일은 아니지만, 술레이만 1세가 죽고 나서 제국이 흔들리면서 하렘은 정치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이전에 하렘은 별다른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고, 또한 고립된 곳에서 생활했다.


하렘의 수장인 모후는 궁궐의 실제 관리자로서 하렘 여성들과 술탄의 관계를 통제하고,
메카와 메디나에 보낼 종교기금도 관리했다.


초기에는 코카서스 출신의 백인 환관들이 하렘을 수비했으나 16세기 말에 이르러
나일강 상류 출신의 흑인 환관들이 하렘을 지켰다.
흑인 환관들은 이스탄불로 실려 오는 도중에 거세되었다고 한다.


보통 궁궐 내의 후궁이나 가정의 내실을 가리킨다.
하렘은 금단(禁斷)의 장소를 의미하는 아랍어 하림(harīm)이 터키어풍으로 변한 말이다.


이슬람의 풍습 ·관습에는 아라비아의 것이 계승된 것이 많은데,
여성이 베일로 얼굴이나 기타 다른 부분을 덮는 풍습도 이슬람 이전부터 있었다.


그러나 하렘은 특히 이슬람시대부터 엄격하게 지켜져 남녀간의 풍기를 규제하였다.
《코란》에도 이슬람교도의 예언자(무함마드)의 집, 특히 아내들에 대한 수칙이 기록되어 있다.


예언자의 아내들에게 무언가 물을 경우에는 장막 뒤에서 해야 하고,
예언자의 아내들이 맨얼굴을 보여도 죄가 되지 않는 경우는 그들의 아버지나 자녀들,
형제 자매, 가까운 친척 및 같은 여신자들과 자신의 노예에게 뿐이다.


이것은 예언자의 아내들뿐만 아니라 이슬람사회 일반에까지 미쳤다.
이러한 가르침을 바탕으로 중세 이슬람 사회의 여성들은 하렘에서 격리된 생활을 하면서
가정이나 종교 행사에 참여하고 하마무(목욕탕)에 가는 것 외에는 외출을 피하였다.


하렘은 왕후귀족 ·부호의 가정에서 두드러졌는데, 환관으로 하여금 하렘의 여성을 돌보게 하거나 단속토록 했다.
환관은 대개 흑인이나 백인 노예였는데 거세수술(去勢手術)은 유대교도 또는 그리스도교도가 담당했다.


이러한 하렘의 풍습은 오스만투르크 제국을 방문한 유럽인이나

《천일야화(千一夜話)》 등의 작품을 통해 세계에 알려졌다.


1909년 오스만제국의 술탄 압둘하미트 2세가 퇴위하자 하렘에 있던 여성들은

가족들에게 되돌아가고 하렘은 사실상 폐쇄되었다.

하렘(harem) 출입구. 톱카프 궁전 내 금남의 구역인 하렘.


술탄과 왕자를 제외한 그 어떤 남자의 출입도 허락되지 않았던 하렘은

술탄의 여자들과 어머니, 가까운 친족들만 지내는 곳이었다.


하렘에서는 새로 들어온 여인들의 교육을 담당 했고, 거세된 흑인 내시들이 시중을 들었다.
하렘에는 300개 이상의 방과 9개의 목욕탕, 모스크, 병원, 학교, 도서관, 부엌, 창고, 정원, 황제의 홀,

지하 감옥까지 갖춰져 있었고 300~500여 명이 살았다고 한다.


폐쇄적 삶을 사는 왕의 여인들의 공간으로 내부는 굉장히 화려했다고 한다.
대리석으로 장식된 공중목욕탕인 하맘은 수도꼭지까지 황금빛이었을 정도라고.


1909년 오스만 제국의 마지막 술탄인 압둘하미트 2세가 퇴임하면서

자연스레 하렘도 폐쇄되었다고 한다.


하렘은 왕의 여자들이 기거하는 곳이다.
왕의 어머니도 이 곳에 살았고 왕의 간택을 받을 궁녀들도 여기 살았다.


오스만제국은 규모가 크고 관리가 잘된 하렘(harem)으로도 유명하다.

술탄은 왕비를 비롯해 많은 후궁을 두었는데,
모든 여성들 혹은 그들이 생활한 규방을 흔히 하렘이라 불렀다.


하렘은 술탄의 모후가 통제했는데, 모후 아래에 왕자를 생산한 왕비들이 있었고,
다시 그 아래에 후궁들과 젊은 여성들이 있었으며, 여성 노예도 있었다.


놀라운 일은 아니지만, 술레이만 1세가 죽고 나서 제국이 흔들리면서 하렘은 정치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이전에 하렘은 별다른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고, 또한 고립된 곳에서 생활했다.


하렘의 수장인 모후는 궁궐의 실제 관리자로서 하렘 여성들과 술탄의 관계를 통제하고,
메카와 메디나에 보낼 종교기금도 관리했다.


초기에는 코카서스 출신의 백인 환관들이 하렘을 수비했으나 16세기 말에 이르러

나일강 상류 출신의 흑인 환관들이 하렘을 지켰다.
흑인 환관들은 이스탄불로 실려 오는 도중에 거세되었다고 한다.


The Gate of Carts entrance. 제2 중정에 위치한 하렘 입구.

원래 물자를 수송하거나 하렘의 여인들을 태운 마차가 드나들던 곳이다.


하렘(harem) 출입구. 톱카프 궁전 내 금남의 구역인 하렘.


보통 궁궐 내의 후궁이나 가정의 내실을 가리킨다.
하렘은 금단(禁斷)의 장소를 의미하는 아랍어 하림(harīm)이 터키어풍으로 변한 말이다.


이슬람의 풍습 ·관습에는 아라비아의 것이 계승된 것이 많은데,
여성이 베일로 얼굴이나 기타 다른 부분을 덮는 풍습도 이슬람 이전부터 있었다.


그러나 하렘은 특히 이슬람시대부터 엄격하게 지켜져 남녀간의 풍기를 규제하였다.

《코란》에도 이슬람교도의 예언자(무함마드)의 집, 특히 아내들에 대한 수칙이 기록되어 있다.


예언자의 아내들에게 무언가 물을 경우에는 장막 뒤에서 해야 하고,
예언자의 아내들이 맨얼굴을 보여도 죄가 되지 않는 경우는 그들의 아버지나 자녀들,
형제 자매, 가까운 친척 및 같은 여신자들과 자신의 노예에게 뿐이다.


이것은 예언자의 아내들뿐만 아니라 이슬람사회 일반에까지 미쳤다.
이러한 가르침을 바탕으로 중세 이슬람 사회의 여성들은 하렘에서 격리된 생활을 하면서
가정이나 종교 행사에 참여하고 하마무(목욕탕)에 가는 것 외에는 외출을 피하였다.


내시의 뜰 (The Court of Eunuchs)


내시의 뜰 (The Court of Eunuchs)


높은 담벼락 아래에 있는 하렘으로 내려가는 길


공간이 왠지 폐쇄적이고 답답해 보인다.

서양 사람들은 하렘을 매우 방탕하고 음란한 곳으로 생각했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고 한다.


왕의 여자가 될만한 수양을 기르기 위해 여자들을 교육하기도 했고

교육이 끝난 후 본인이 원하면 하렘을 나갈 수도 있었다.


하렘에 들어오는 여자들은 오스만제국인이 아니었는데

왕의 외척 세력이 커지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입구에 있는 주방 겸 내시들이 일을 하던 공간.


창문 하나하나마다 창살로 덮여 있는 하렘 내부.


하렘 입구쪽에 여인들의 시중을 들던 내시들의 모습을 재현해 놓았다.


하렘 입구쪽 내시들의 공간 이슬람 양식 천장


내시들의 공간 이슬람 양식의 천장.


내시의 뜰 (The Court of Eunuchs)


흑인 내시들이 주로 머물던 공간으로 그들의 주된 임무는 하렘 입구를 지키고, 출입하는 사람을 확인하고,
출입이 허용되지 않는 사람이 들어왔는지를 파악하는 것이었다고.


주변에 흑인 내시들의 기숙사와 왕자들의 학교가 있었고

내시들을 위한 교육시설도 갖추고 있었다고 한다.


내시의 뜰 (The Court of Eunuchs)


내시의 경우 중앙아프리카 출신의 흑인 아이들과 아바시니아(에티오피아의 옛이름) 출신의 어린이들 중에서
선발한 다음 엄격한 검증 과정을 거치고 교육을 받은 후 하렘에 배치되었다고.


내시의 뜰 (The Court of Eunuchs)





하렘(Harem)으로 들어가는 메인 게이트


하렘(Harem)으로 들어가는 메인 게이트


내시의 뜰을 지나면 하렘으로 가는 메인 게이트가 나온다.
하렘의 메인 게이트로 하렘 내 세 곳의 주요 장소와 연결되는 문이다.


아치가 있는 돔형 현관이라고 보면 되는데 왼쪽에 있는 문은 첩과 아내들이 있는 곳,
중앙의 문은 어머니가 지내는 곳, 오른쪽 문은 술탄의 개인 거처와 연결된다고.


이렇게 생긴 길은 황제와 황제 어머니, 황후만이 걸었다고 한다.


Hall of the Ablution Fountain


푸른 타일로 장식된 통로


푸른 타일 장식이 매우 아름답다.


여기에도 사하다가 써 있다.


푸른 타일 장식이 매우 아름답다.


İznik tiles decorate the interior



술탄만이 걸을 수 있었던 길.


하렘 복도 내부에 걸려 있는 호화찬란한 초대형 거울


The Golden Road


하렘 내부에서 메인 로드 역할을 한 황금의 길(Altın yol)의 모습.
이 길을 중심으로 좌우로 하렘 내 직급에 따라 여인들의 방이 배치되었으며,
하렘의 입구에는 환관장의 방이 있었다


The Courtyard of the Eunuchs


Courtyard of the Apartments of the Queen Mother (Valide Sultan Dairesi)
가운데 도로는 황제의 길


Courtyard of the Concubines


이제 후궁의 복도(Corridor of the Concubines)로.


이 복도의 돌 위에 빈 접시를 두면 내시들이 후궁과 겹치지 않는 시간대에 와서 치웠다고.

복도는 창이 작고 창살로 덮여 있어 어두운데다가 좁은 길이 미로처럼 얽혀 있어
자유롭게 출입할 수 없었던 공간이었음이 조금은 실감이 난다.



술탄의 어머니인 '발리테'가 기거했던 곳.


술탄의 어머니인 '발리테'가 기거했던 곳.


술탄의 어머니인 '발리테'가 기거했던 곳.


술탄의 어머니인 '발리테'가 기거했던 곳.



술탄의 어머니인 '발리테'가 기거했던 곳.


술탄과 어머니가 차를 마시는 테이블


Exhibit representing the Queen Mother and her attendants in her apartments


술탄과 어머니가 차를 마시는 테이블


술탄의 어머니인 '발리테'가 기거했던 곳.


첫 번째 방은 왕의 어머니인 '발리테'가 기거했던 곳이다.


술탄의 어머니인 '발리테'가 기거했던 곳이다.


술탄의 어머니인 '발리테'가 기거했던 곳.


술탄의 어머니인 '발리테'가 기거했던 곳.


술탄의 어머니인 '발리테'가 기거했던 곳.


안내문


술탄(왕)은 매일 아침 어머니의 방을 찾아 차를 마시며 대화를 나눴다.
이때 어머니는 술탄에게 짝지어 줄 여자를 골라 차를 내어 오도록 시켰다고 한다.


여자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른 여자를 요구하고 마음에 들면

그 여자가 계속 차를 내 왔으면 좋겠다는 식으로 어필했단다.


화려한 천장 장식.
2층이 술탄의 어머니 침실인데 들어갈 수 없게 되어 있다.


술탄의 방으로 통하는 하렘의 복도


술탄의 방으로 통하는 하렘의 복도


술탄의 방으로 통하는 하렘의 복도


술탄의 방으로 통하는 하렘의 복도



Baths of the Sultan with gilded grill

술탄의 전용 목욕실


술탄의 방 (Imperial Hall).  술탄의 방으로 통하는 하렘의 복도를 지나면 화려한 방이 나온다.


정복자 메흐메트가 콘스탄티노플 정복 후 서거(1481년)할 때까지 이 궁전에 기거했으며
그 이후 술탄들은 이곳에 살다가 19세기에 보스포루스 해협 인근에 새로 건축한 아름다운 유럽식 궁전으로 이주했다.

술탄의 방 (Imperial Hall)


Imperial Hall with the throne of the sultan


각종 연회 및 축하연과 중요한 의식을 이곳에서 개최했다고 한다.
수세기에 걸친 보수 및 수리를 거쳐 현재의 모습으로 남아 있다고.



술탄의 방 (Imperial Hall)




술탄의 방 (Imperial Hall) 화려한 천장 장식.





세면대


푸른색 타일로 꾸며진 술탄의 방 (Imperial Hall)





후궁들이 술탄의 방 (Imperial Hall) 연회를 숨어서 지켜보던 방


술탄의 방 (Imperial Hall)에 시계도 있다.


터키 관광지를 돌아 다니다 보면 멈춰진 시계를 많이 볼 수 있다.

그런데 대부분 9시 5분을 가리키고 있다.


가이드의 말에 따르면 터키 국민들이 가장 존경하는 독립 영웅이자 초대 대통령

아타튀르크가 죽은 시각이 9시 5분이라고 한다.

그래서 대부분의 관광지 시계를 거기에 맞춰 멈춰 있게 했다고 한다.


푸른 타일은 원래 터키의 지역 특산물이었다.


유럽 사람들도 이 푸른 타일에 매료되어 많이 사 가기도 했는데

나중에는 네델란드 등에서 이 기술을 많이 따라 잡았다고 한다.
술탄의 방에 있는 파란 타일도 네델란드 산이라고 한다.

술탄의 방 (Imperial Hall) 거울
술탄의 방에는 큰 거울이 하나 걸려 있는데 거울에 반사되게 찍으면 돔까지 한 프레임에 찍을 수가 있다고 한다.

푸른 복도를 지나




다음 방 술탄 무라드 3세의 방 안내


다음 방은 술탄 무라드 3세의 방인데 방 주인보다 이 방을 만든 건축가 미마르 시난이 더 유명하다.
미마르 시난은 오스만 제국의 전성기에 활동한 건축가이며 미켈란젤로도 그를 존경했다고 한다.


아야 소피아가 무너지지 않고 버틸 수 있었던 것도 미마르 시난의 보수 공사 때문이라고 한다.

그 외 술레마니에 모스크, 셀리미예 모스크 등을 건축하여 큰 돔돠 첨탑을 특색으로 하는 오스만 특유의 양식을 완성시켰다.


The Fruit Room with painted walls


술탄의 개인 처소와 전용 목욕탕인 하맘 사이에 위치한 임페리얼 홀은 하렘에서 두 번째로 큰 돔형 공간이며
톱카프 궁전에 남아 있는 문서와 그림 등을 통해서 유추해 봤을 때 오스만 제국의 12대 술탄인
술탄 무라드 3세 때인 1580년대에 만들어졌다고 추측하고 있다.


Interior of the Circumcision Room






The fountain of the Privy Chamber of Murat III






Stained-glass windows decorate the interior


이 방은 술탄 무라드 3세가 공적 업무도 보고 사생활도 즐기던 곳인데 오스만 건축 중 가장 뛰어난 곳이라고 한다.


아름답고 웅장한 돔.


술탄 무라드 3세 (Privy Room of Murad Ⅲ)의 방


술탄 무라드 3세의 개인 거처로 1579년에 당대 최고의 건축가 Sinan이 디자인 하고 건축했다고 한다.
16세기에 유행했던 이즈닉 타일로 덮여 있다.


Audience given by Ahmed III in the Audience Chamber, painting by Jean-Baptiste Vanmour (September 1727)


술탄 무라드 3세 (Privy Room of Murad Ⅲ)의 방


Ottoman "arma" symbol (military)


Photograph of the last Sultan Mehmed VI

오스만 투르크 마지막 술탄 메흐메드 6세


한때 유럽을 떨게 했던 오스만투르크 제국에도 황혼이 찾아왔다.
1299년 창건, 메메드 2세, 셀림 1세, 술레이만 1세를 거치며 지중해를 장악하는 등
전성기를 구가했지만 16세기 후반 이후 쇠퇴기에 접어들었고 제1차 세계대전 때
영국과 동맹국 등 유럽 열강들에 의해 영토를 유린 당하며 결정적 타격을 입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18년 즉위한 메메드 6세(1861~1926)는 36명의 황제 중 마지막 황제로
제국의 종말을 지켜볼 수 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그는 유럽 열강에 분노한 민족주의자 무스타파 케말이 이끄는 '투르크 대국민회의'가
1922년 황제가 겸임하던 술탄(황제)과 칼리프(이슬람교 최고 지도자)를 분리하고 술탄제를 폐지함으로써 폐위됐다.


그의 폐위와 함께 623년 역사의 오스만투르크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됐다.
무스타파 케말은 다음해 터키 공화국을 수립하고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메메드 6세는 말타로 추방됐다가 이탈리아에서 말년을 보냈으며 휴양지 산레모에서 66세를 일기로 숨을 거뒀다.
황제 집안의 핏줄을 타고 났지만 그는 평범한 능력의 소유자였고 비범했다 해도
역사의 거대한 물결을 거스를 수 없었다.



메흐메트 6세


압둘 하미드 2세인 '붉은 술탄' 의 뒤를 이은 이름만인 술탄 자리는 이복 동생인 와히뎃딘(Vahideddin)이었다.
이 사람이 메흐메트 6세(Mehmed VI; 1861∼1926)이다.


아버지인 압둘 메지드 1세는 1861년 6월 38세 나이로 결핵으로 세상을 떠났으나, 35명의 자식을 두었었고,
마지막 술탄이 된 메흐메트 6세는 아버지가 죽기 4개월 전인 1861년 2월에 태어난 것이다.
메흐메트 6세는 한동아나 돌마바흐체 궁전에 살았으나, 이을드즈 궁전으로 거처를 옮겼다.


케말의 투쟁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그리스의 협상국은 오스만제국을 완전 해체하려고 전쟁 중에 비밀 조약을 맺은 상태였다.
1919년 5월 15일 협상국을 등에 업은 그리스 군은 '대 비잔틴 부활'을 내세워
에게해에 펼쳐진 옛날 그리스인들 비잔틴 제국의 재건을 시도했다.


아나톨리아 각 지역에는 많은 그리스인들이 살고 있기 때문에 이미 그리스 영토라고 생각했다.
이것은 엔웨르 파샤의 '범튀라니즘'과도 통하는 사상이다.
그리스 군은 영국의 지원을 얻어 이즈미르에 상륙하여 점령지를 확장하고자 했다.


이 때 전쟁 영웅인 무스타팔 케말이라는 장군이 북부 지방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관례에 따라 취임인사를 하기 위하여 이을드즈 궁전으로 향했다.
압둘 하미드 2세가 세운 추밀원 2층에서 무스타파 케말은 메흐메트 6세와 만난 것이다.


1919년 5월 16일 케말은 이을드즈 궁전을 뒤로하고, 흑해의 삼순항으로 떠났다.
케말이 탄 배가 이스탄불을 출발한 몇 시간 후, 메흐메트 6세는 경찰 측으로부터 무스타파 케발에 관한 보고서를 들었다.


케말이 아나톨리아의 혁명 지하 조직과 연락을 취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이미 출발한 케말에 대해 메흐메트 6세는 항만관리 당국에 체포령을 내렸다.


케말이 제9군 감찰관의 자격으로 삼순항에 상륙한 것은 5월 19일로 혁명은 이날부터 시작되었다.
현재 이 날은 10일 후인 5월 29일의 메흐메트의 정복자의 날보다 훨씬 더 중요한 공화국의 기념일이 되었다.


삼순에 상륙한 날은 비바람이 불었다고 한다.
술탄은 체포령을 내렸으나 아무도 이것을 실행하려 하지 않았다.


영국 점령군은 술탄의 명령에는 따르지 않고, 그저 케말을 미행하는데 그쳤다.
케말은 터키군이 와해된 상태에서 연합국과 이스탄불 정부에게 투쟁을 선언하고,
민병대를 조직, 무장 투쟁 준비에 착수하였다.


종전 협상으로 이스탄불 일부를 점령하고 있던 협상국은 1920년 3월에는 점령지를 확대하고,
튀르크 민족주의자들을 체포하였다.


연합국의 괴뢰가 된 이스탄불의 술탄 정부에 맞서 케말은 1920년 4월 앙카라(Ankara)에서 '대국민회의'를 결성하였다.
이 의회는 술탄이 이교도의 손에 있다고 단정하고 외세를 축출하는 것이 이슬람교도의 의무라고 선언했다.


술탄의 축출과 투르크 제국의 멸망


1920년 8월 10일 세브르(Sevre) 조약을 오스만 제국의 술탄에 강요하여 체결하였다.
내용은 오스만제국의 영토 가운데 아르메니아와 히자즈는 독립시키고,
메소포타미아와 팔레스타인은 영국의 위임 통치 하에, 시리아는 프랑스의 위임통치 하에 두고,
이집트는 영국의 보호국으로 삼는다는 것이었다.


더구나 아르메니아는 아나톨리아의 광대한 지역을 차지하며,

그리스는 에게해의 섬들과 이즈미르 지역을 차지하는 것이었다.


이 조약이 실행되면 오스만제국은 이스탄불 일대와

아나톨리아의 일부만 영토로 하게 되어 사실상 망국의 길을 걷는 것이었다.


이 가혹한 조약의 체결은 어느 정도 예상된 것이었으며 튀르크 국민의 술탄에 대한 반감이 높아지게 되었다.
대국민의회는 1921년 1월 기본법을 제정하고 주권은 국민에게 있음을 선언하였다.


국명은 투르키예(Turkiye, 영어로는 Turkey)로 하고 국가 운영은 집행위원회가 하도록 하였다.
그리스 군이 이즈미르를 거점으로 앙카라까지 진격해 오자

1921년 8월 케말이 지휘하는 민병대는 사카리아(Sakarya) 전투에서 격퇴하였다.


1922년 9월에는 '바다로 쓸어 넣기 작전'을 실시하여

그리스 군을 이즈미르에서 축출하고, 문자 그대로 바다로 쓸어 넣었다.


그리스 군 포로는 6만이 넘었다.

1922년 11월 1일 대국민회의는 술탄제도 폐지를 결의하였다.


오스만 제국의 마지막 황제 메흐메트 6세는 11월 17일 돌마바체 궁전에서 영국 배를 타고 영국으로 망명했다. 
이로서 오스만 투르크 제국은 멸망했다.


The Courtyard of the Favourites


The Courtyard of the Favourites


The Courtyard of the Favourites


The Courtyard of the Favourites


The Courtyard of the Favourites


Outside view of the Twin Kiosk


Open recess (iwan) of the Yerevan Kiosk


View towards Baghdad Kiosk


Terrace Kiosk


Tower of the Head Tutor / Chamber of the Chief Physician


Grand Kiosk


Terrace Mosque


Upper terrace with fountain, İftar bower and Baghdad Kiosk


Panoramic view of the Marmara Sea from the palace


2006. 3. 13. 톱카프 궁전 방문 인증샷.


톱카프 궁전 정원에서 바라보는 마르마라 해의 아름다운 광경

오른쪽 아래로는 톱카프 궁전을 둘러싸고 있는 테오도시우스 성벽이 살짝 보인다.


[영상 KBS 걸어서 세계속으로] 톱카프 궁전 (Topkapi Palace)



참조 ; https://ljhoi.blog.me/221363753799
https://blog.naver.com/fightclub/221380539496
https://blog.naver.com/ahnys0/221229580348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387694&cid=43079&categoryId=43079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160465&cid=40942&categoryId=31600
https://ko.wikipedia.org/wiki/%ED%86%B1%EC%B9%B4%ED%94%84_%EA%B6%81%EC%A0%84

https://en.wikipedia.org/wiki/Topkap%C4%B1_Palace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lsw24001&logNo=221340043579

http://blog.naver.com/lsw24001/221340933281 

https://lonelyplanet.co.kr/guide/cities/istanbul/spots/topkai-palace#btn-mapClose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lsw24001&logNo=221340933281&parentCategoryNo=&categoryNo=&viewDate=&isShowPopularPosts=false&from=postView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lsw24001&logNo=221340043579
https://en.wikipedia.org/wiki/Topkap%C4%B1_Palace

https://blog.naver.com/ahslxj42/220985008995





지복의 문


‘바쉬스 싸데(Bâbüssaâde 또는 Bab-üs Saadet)’라 불리는 세 번째 지복의 문은 군주와 군주의 측근만이

통과할 수 있는 문으로, 이 문 뒤에 있는 제3중정(III. Avlu)에서는 군주의 즉위식이 성대하게 열렸다.


이곳에서는 남성출입금지 구역으로 알려진 하렘이 있는데, 하렘 건물에는 약 250개에 이르는 방이 있다.
오스만 제국 전성기에는 쉴레이만 1세 시대에는 하렘에 사는 사람들의 수가 1,000명에 이르렀고,
군주가 마음에 드는 여인이 있는 곳으로 가는 비밀 통로도 만들어졌다.


지복의 문 바로 뒤쪽에는 외국 사절을 접견하는 알현실이 있다.

또한, 이곳에는 오스만 제국 시대의 각종 보석과 보물을 전시한 보석관이 있다.


수없이 많은 다이아몬드와 에메랄드가 박힌 선물들이 즐비하다.
성물관(聖物館)에는 1517년 셀림 1세가 이집트를 정복하고 가져왔다는 무함마드의 수염과 이빨,
그가 들었던 군기, 그의 발자국 주조물 등이 전시되어 있다.


이집트를 정복한 술탄 셀림 1세는 1516년 8월 칼리파직을 이양받음으로써 이스탄불이 이슬람 세계의 중심지가 되었다.
칼리파란 이슬람 세계의 최고 통치자의 칭호인데, 이전에는 바그다드와 카이로가 이슬람 세계를 통치하는 주요 도시였다.


최근에는 이슬람 과학과 기술을 설명한 이슬람 과학관이 개설되었다.

도자기관에는 특히 14~19세기 중국과 일본산 자기들이 많이 전시되어 있다.


톱카프 궁전은 중국산 자기 1만 2,000점과 일본산 자기 800여 점을 소장하고 있다.

중국산 자기는 원, 명, 청 시대의 것으로 청자기와 백자기가 주를 이룬다.


중국산 도자기는 9~10세기경 중동 지역에 수출되기 시작하였는데,

오스만 조정에서는 중국산 자기를 대량 수입하여 즐겨 사용하였다.


일본 자기는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 초반에 들여온 것으로 큐슈 지방의 아리타에서 생산된 것인데,
선적한 곳의 이름을 따 붙인 이마리 도자기가 대부분이다.

일본산 자기 중에는 오스만 군주가 특별 주문하여 제작된 것도 있다.


제4중정에는 오스만 조정 근위대의 지휘관과 관리를 양성하기 위한 궁전 학교가 있었다.
‘엔데룬’이라 불리는 궁정 학교는 톱카프 궁전 안에 설립된 관리 양성 교육 기관이었다.


궁전 학교에서 교육을 받는 사람들은 주로 데브쉬르메 제도에 따라 기독교에서 이슬람교로 개종한

그리스도인 가정 출신의 젊은이들이었으나 오스만 고위 관리의 자제들도 입학하였다.


그들은 터키어, 아랍어, 페르시아어는 물론 꾸르안, 역사, 수학, 음악 등을 배웠다.
엄격한 체력 단련을 통해 기마술과 무기 다루기에 능했으며, 궁중 내 예의범절도 익혔다.


궁전학교를 졸업하면 무사이면서 학자와 신사의 면모를 겸비하게 되었고,
건전한 무슬림인 동시에 나라에 충성하는 헌신적인 신하가 되었다.


궁정학교 출신들은 주로 오스만 조정의 행정관리로 배치되었고,

그들은 능력과 공적에 따라 고위직으로 승진하였다.


지복의 문


디완(diwan)에서 나와 정원 끝에 보면 단층 건물의 입구처럼 생긴 제3의 문이 있다.
'바쉬스 싸데(Bab-üs Saadet)'라 불리는 세 번째 지복의 문은 군주와 군주의 측근만이 드나들 수 있었다.
지복의 문 바로 뒤에는 외국 사절을 접견하는 알현실이 있다.


지복의 문


뒤로는 '백인 내시의 정원'이라고 부르는 제3  정원을 건물들이 장방형으로 둘러싸고 있다.
이곳은 술탄의 사적 공간이었는데, 알현실 다음에 작은 도서관이 있고,
오른쪽 끝에 있는 방은 술탄의 보물창고이다.


Painting of Sultan Selim III holding audience in front of the Gate of Felicity

과거 이곳에서는 황제의 대관식이 열렸다.


제3 정원에 위치한 보물관은 톱카프 궁전 관람의 하이라이트다.


술탄이 사용하던 왕좌, 갑옷과 투구, 무기 등 호화로운 보석으로 장식된 물건들이 가득했다.
황금과 에메랄드, 다이아몬드로 장식된 톱카프의 단검도 유명하다.
술탄과 그가 선택한 특정 인물들만 제한적으로 출입할 수 있었다고 한다.


Arz Odası, the Audience Chamber


제3 정원


The Conqueror's Pavilion (Fatih Köşkü) houses the Imperial Treasury


제3중정에 위치한 정복자의 정자(Fatih Köşkü) 모습.
이 건물은 톱카프 궁전에서도 가장 오래된 것으로 1460-1462년 사이에 세워졌다.


현재는 보물관 1,2,3,4로 쓰이고 있는데 여름에는 바다가 훤히 보이는 베란다를 개방하고 있다.
전망이 탁 트여서 매우 아름답다.


Hallway of the Conqueror's Pavilion


Main entrance to the Audience Chamber, with the small fountain of Suleiman I to the right, and the large gifts window to the left

Door to the Imperial Treasury (Hazine-i Âmire)


제3 정원



제3 정원


Library of Ahmet III / Enderun Library



이곳에는 남성 출입 금지구역으로 250여 개 의 방이 있고, 술탄은 비밀 통로를 통하여 마음에 드는 여자를 품었다고 한다.

제3 정원 보물 전시실 입구



톱카프 궁전 지복의 문을 들어서면 250여 개의 방 중에 보석을 저장하는 "보석방","성물관",

"도자기 관" 등이 있고 지금은 박물관 구실을 하고 있다.


보석관 진열품


이 보물창고에서 가장 큰 보석은 3.26킬로그램짜리 에메랄드 원석이란다.

이렇게 대단한 보석들이라면 그림자만 지나가도 경보가 울리는 삼엄한 분위기에서
현란한 조명을 받으며 위용을 뽐내야 할 것 같은데, 이 보물창고는 비교적 조용하다.



황금과 에메랄드, 다이아몬드로 장식된 보석관 진열품.


보석관 진열품.


황금과 에메랄드, 다이아몬드로 장식된 톱카프의 단검


술탄이 사용하던 왕좌


86캐럿짜리  다이아몬드.


이곳의 백미는 무려 86캐럿이나 되는 다이아몬드이다.
세계에서 다섯 번째인가 일곱 번째인가 큰 것으로 주위에 49개의 큼직한 다이아몬드로 장식하고 있다.


이 다이아몬드는 '스푼 다이아몬드'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는데,
이 보석을 건진 어부가 세 개의 스푼과 맞바꾸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궁전 키친 진열품


The Golden Way


골든 로드는 하렘에서 가장 길고 오래되고 중요한 통로.
안쪽의 궁정 마당으로부터 하렘을 분리시키는 목적의 아치형 도로로 골든 로드라는 이름은 도로의 모습에서 나온게 아니라
특별한 날 술탄이 이 길을 통과할 때 하렘의 주민들을 위해 금화를 뿌렸다고 해서 붙여졌다고.

하렘(harem)의 모스크


화려하고 엄청난 규모의 다른 모스크에 비해 아담하면서도 소박하다.
하렘의 여인들은 주로 이교도 식민지에서 끌려오거나 조공으로 바쳐진 여인들이다.
이슬람 율법에서는 이슬람 교도들을 노예로 둘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렘(harem)의 모스크


국적과 종교가 제각각인 여인들이 하렘에 들어오면 이슬람으로 개종하고

언어와 음악, 춤, 화장법 등을 배워 술탄을 즐겁게 하는 여인으로 거듭난다.


술탄의 개인 재산으로 간주되었던 이들은 술탄의 눈에 들기 위해 부단히도 노력했다고.
술탄의 눈에 띄어 아들을 낳게 되면 하세키 술탄(Haseki Sultan)이 되고, 그의 아들이 술탄에 오르면
하렘의 최고 지위를 가진 발리데 술탄(Valide Sultan)이 되어 권력과 돈을 손에 쥐게 된다.


하렘(harem)의 모스크


오스만 제국에는 술탄의 장자 계승 제도가 없었기 때문에 누가 낳은 아들이든

능력만 인정되면 술탄이 될 수 있었고하렘 여인들의 권력을 향한 의지와 술탄을 차지하기 위한 몸부림은

우리나라의 장희빈이나 중국의 양귀비 저리가라 할 정도였다고.


실제로 하렘의 여인들 중 최초로 노예에서 발리데 술탄까지 올랐던 인물이 있었는데
그녀가 바로 16세기 오스만 제국의 최전성기를 이끈 쉴레이만 대제를 사로잡은 우크라이나 출신의 록산나라고 한다.


제 4정원은 술탄과 가족들을 위한 휴식 공간이다.
이 곳에는 여러 개의 쾨시퀴(Köşkü, 일종의 정자)들이 있다.


Apartments of the Sultan's Favorites and the Mabeyn Corutyard
내시의 뜰과 달리 건물 벽 사이에 완전히 둘러쌓여 있지 않고 한쪽 면이 열려 있는 것이  특징이다.


테라스


원래 술탄은 자신에게 위협이 될 수 있는 모든 남성을 죽인다고 한다.
자신의 형제에서부터 자식까지 위협이 될만하면 모두 죽였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죽이지 않고 가두어 둔 채로 살았는데

그 감옥같지 않은 감옥을 새장이란 이름으로 불렀단다.


테라스


후에 술탄이 몸이 약해 자신의 후계가 걱정이 되어 형제들을 죽이지 않은데서부터 존속 살인이 끝났지만
갇힌 채로 세상 물정도 모른 채 궁중 교육만 받았던 왕족 남자들이 술탄이 되면서 결국 술탄의 세력 약화를 불러오게 되었다.
그 결과 술탄을 지키던 군사들이 반란을 일으키고 술탄을 죽이기까지 한 것이다.


이 곳에 있는 정자들은 오스만 제국이 여러 도시를 정복할 때마다 그 기념으로 세운 것이다.
그래서 정자 이름이 다른 나라의 도시에서 따 온 것이 많았다.


보스포루스 해협을 바라보는 전망이 너무 아름다우니까 사람들이 모여 있다.


보스포루스 해협 건너는 아시아 지역이다.


무슨 ~ 정자


가운데 분수가 있다.


여긴 바그다드 정자 (Baghdad Kiosk) .


바그다드 정자 (Baghdad Kiosk)


오른쪽 바그다드 정자 (Baghdad Kiosk), 정면 작은정자 (Iftaree Pavilion)



바그다드 정자 (Baghdad Kiosk)  내부


여러 정자들이 있는데 규모는 그리 크지 않고 내부는 대부분 타일로 꾸며져 있다.


바그다드 정자 (Baghdad Kiosk) 내부



작은 정자 (Iftaree Pavilion)


이 테라스에 보이는 저 금색 지붕의 작은 정자는 라마단 기간에 술탄이 금식 후 첫 끼니인 이프타르를 먹는 곳이었다고 한다.
이슬람에서는 이슬람력 9월을 신성한 달이라고 여겨 일출에서 일몰 기간 동안 금식을 하고 기도를 드린다.
술탄은 라마단 기간 일몰 후 이곳에 와서 금식을 마치고 첫 만찬을 즐겼다고 한다.

작은 정자 (Iftaree Pavilion)에서 바라보는 풍경


Gate of Felicity


Imperial Council


Imperial Council


Imperial Council


Library of Ahmet III / Enderun Library


One of the hollow trees, in the Third Court



톱카프 궁전에서 바라보는 갈라타 타워


톱카프 궁전에서 바라보는 보스포러스 해협

아래로는 톱카프 궁전을 둘러싸고 있는 테오도시우스 성벽이 보인다.


2006. 3. 13. 경관이 너무 좋아서 인증샷 한번 더.
오른쪽 아래로는 톱카프 궁전을 둘러싸고 있는 테오도시우스 성벽도 살짝 보인다.


참조 ; https://ljhoi.blog.me/221363753799
https://blog.naver.com/ahnys0/221229580348
https://blog.naver.com/fightclub/221380539496
https://blog.naver.com/beryu1/110189481389

https://blog.naver.com/wrinklecat/155792808




톱카프 궁전(Topkapı Sarayı)


톱카프 궁전(Topkapı Sarayı)은 15세기 중순부터 19세기 중순까지
약 400년 동안 오스만 제국의 군주가 거주한 궁전이다.


이스탄불 구시가지가 있는 반도, 보스포루스 해협과 마르마라 해,
금각만이 합류하는 지점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세워져 있다.


현재는 박물관으로 이용 중이다. 총 면적은 70만 평이며, 벽 길이만도 5km나 된다.
톱카프 궁전은 유럽의 다른 궁전과는 달리 화려하지 않은 것이 특색이다.


그러나 건축학적인 면에서 관심을 두고 볼 것이 많고,

특히 자기, 무기, 직물, 보석 등 볼거리가 많은 곳이다.


구글 지도


톱카프 궁전은 터키 이스탄불 구성곽 동쪽에 위치해 있다.
메흐메트 2세 시기인 1478년에 세워져 1856년, 술탄 압뒬메지트가 돌마바흐체 궁전으로 이궁하기까지
약 300여년간 오스만 제국의 정궁이자 디완 회의의 의사당이었으며
제국의 인재들을 길러내는 고등교육기관이었다.


톱카프 궁전 주변 모형도


또한 궁전 제1정원에는 조폐소(Darphane)가 있어서 제국의 화폐를 찍어내기도 했으며,
재무부 건물에는 보물관이 있어 황실의 보물과 기록을 보존했다.


이후 1922년에 오스만 제국이 멸망하고 나서 수립된 터키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된
케말 아타튀르크가 1924년 4월 3일에 톱카프 궁전을 박물관으로 공개해 오늘날에 이른다.

톱카프 궁전 주변 모형도


전체 부지면적은 약 70만㎡로 도중에 여러 차례 증축과 개축이 이루어졌지만
오스만 제국시기에 세워진 각종 모스크, 학교, 목욕탕, 상가, 대상들의 숙소 등의 공공건축에 비하면
정말로 소박한 양식으로 지어졌으며 유럽 각국의 궁전들과 비교해 보아도
전성기 오스만 제국의 위용에 비해 터무니 없을 정도로 작고 단촐하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톱카프 궁전 내 카페에 전시된 톱카프 궁전 전체 풍경 사진


이 작은 궁전 주인은 세계 수준의 보물 컬렉션을 보유하고 전 유럽을 짓밟았다는게 첫 번째 함정이라면
그 작은 궁전이 중국의 자금성이랑 비슷하다는 것이 두 번째 함정이다.


궁의 면적을 단순 비교하기 위해 사례를 들자면,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조의 궁궐인
빈의 쇤브룬 궁의 전체 면적이 약 186 헥타르(186만 제곱미터)이다.


The Seraglio Point, 1838


군사상의 이유로 공터로 남아 있었으며 군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이후 콘스탄티누스 1세 시기에 로마 제국이 비잔티움으로 천도하자 이곳에는 바실리카와 지하 저수조가 들어섰고
지금의 궁전 위치에서 서남쪽으로 조금 떨어진 위치에 부콜레온 궁전(Βουκολέων)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톱카프 궁전 자리에는 지금까지 남아있는 성 이리니 성당(Aya İrini)을 제외하고는
군사상의 이유로 공터로 남아 있었으며 군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Partial view of Seraglio Point with Topkapı Palace and Incirli Kiosk, 1559


원래 동로마 제국의 황제가 거주하던 정궁은 현재 술탄 아흐메트 모스크 부지에 존재하던
콘스탄티노플 대궁전(Μέγα Παλάτιον/Büyük Saray)으로 330년 콘스탄티노플 천도부터
1081년 콤니노스 왕조 설립까지 종종 다른 궁전을 이용한 기간을 제외하면 690년 넘게 정궁으로 이용되었다.


하지만 콤니노스 왕조 이후 동로마 황제는 거처를 별궁으로 쓰던
블라헤르네 궁전(Βλαχέρναις Παλάτιον)으로 완전히 옮겼다.


그후 대궁전은 버려졌고 1204년 제 4차 십자군 이후 도시를 장악한 라틴 제국은
황제의 거처로 부콜레온 궁전을 쓰면서 블라헤르네 궁전도 버려지게 된다.


톱카프 궁전 모형도


1261년 팔레올로고스 왕조가 콘스탄티노플을 수복하면서 라틴 제국을 통치하던 십자군은 달아날 수 밖에 없었는데
이때 대궁전과 블라헤르네 궁전의 보물들을 털어가면서 크게 훼손되었지만
팔레올로고스 왕조는 블라헤르네 궁전은 수리해 정궁으로 썼으나
대궁전은 여전히 버려져 감옥으로 쓰는 신세가 되었고
라틴 제국이 쓰던 부콜레온 궁전 또한 버려지면서 훼손 상태가 심해진다.

톱카프 궁전 내에 전시된 톱카프 궁전의 모형


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때 블라헤르네 궁전마저 전란과 약탈과 방화로 파괴되어버리자
도시를 장악한 메흐메트 2세는 지금의 이스탄불 대학 자리에 임시 거처로 목조 궁전을 세우고 그곳에서 거주했는데,
일화에 따르면 톱카프 궁전 자리를 둘러본 메흐메트 2세가 북쪽으로는 갈라타 탑이 보이고,
동쪽으로는 보스포로스 해협 건너 위스퀴다르가 보이고,
서북쪽으로는 금각만이 보이는 경치에 반해 이곳에 궁전을 세우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동로마 제국 시절에는 공터였던 부지에 궁전이 들어섰다.
처음에는 이전에 세운 목조궁전은 구 궁전(Eski Saray), 새로 세운 이 궁전은 신 궁전(Yeni Saray)이라고 부르다가,
궁전의 정문에 대포 두 문을 배치한 것을 보고 대포 문(Topkapı)이라는 이름을 창안해 오늘날까지 이어졌다고 전한다.

보스포루스 해협에서 바라보는 톱카프 궁전


톱카프 궁전은 크게 4개의 중정(Avlu)으로 구분되는데,
예니체리 마당(Yeniçeri Meydanı)이라는 별칭이 붙어있는 제1중정은 황제의 문(Bâb-ı Hümâyun)을 통해 입장하며,
내부에는 예니체리들의 주거지와 훈련장, 무기고, 제국 조폐소, 병원,
황실이 사용할 일상용구들을 제조하는 공방 매표소등이 들어서 있었다.


이곳은 일반 백성들도 자유롭게 들어갈 수 있었는데,
특히 매주 금요일날 아야 소피아 사원으로 행진하는 황제를 만나기 위해 군중들이 대기하곤 했다.
이때 백성들은 자유롭게 황제에게 청원할 수 있었으며,
황제는 백성들과 직접 접촉할 수 있는 몇 안되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한편 이곳에 위치한 성 이리니 성당은 1846년 궁중 보물 박물관으로 일반인에게 공개되기도 했다.
박물관이 다른 곳으로 이전된 1978년부터 각종 콘서트나 축제를 위한 장소로 활용되고 있다.


보스포루스 해협에서 바라보는 톱카프 궁전


톱카프 궁전의 전체 규모는 원래 크기보다 상당히 축소된 상태이다.
본래의 규모는 오늘날의 시르케지 철도역과 귈하네 공원을 포함하면서 마르마라 해 방향의 아래쪽까지 분포했다.


비록 구조적으로는 메흐메트 2세 때의 기본 설계를 간직하고 있지만,
불규칙적으로 넓게 퍼져 있는 건축물의 집합한 형태라서 특별한 건축적 특징을 보여주고 있지 못하다.


톱카프 궁전 황제의 문 - 임페리얼 게이트(The Imperial Gate) 첫 번째 입구.


톱카프 궁전은 새롭게 술탄이 될 때마다 모두 필요에 의해서 공을 들였고,
대화재 사건이 네 번이나 일어나면서 당시에는 존재했을지도 모르는 건축적인 조화를 거의 보존하지 못했다.


톱카프 궁전 단지는 비룬(외정)과 엔데룬(내정) 그리고 하렘 세 곳으로 나뉘어 있다.
제각각 안마당이 여러 개 마련되어 있는데,
이 안마당을 연결하여 많은 문을 만들어 복잡하게 조성된 미로가 갖춰져 있다.



톱카프 궁전 임페리얼 게이트(The Imperial Gate) 첫 번째 문 앞에 있는 정자.


이 정자는 외국인들이 궁전에 들어갈 때 술탄의 승인을 받기 위해 대기하던 곳이라고 한다.
오스만제국의 국민이라면 여기 대기할 필요 없이 통과할 수 있었다고.


궁전의 정문 ‘황제의 문’(The Imperial Gate)


톱카프 궁전은 세 개의 문과 그에 딸린 네 개의 넓은 중정(中庭 Courtyards, 정원)을 가지고 있다.
궁전 안으로 들어가는 첫 번째 문은 ‘바브 휘마윤(아랍어: Bâb-ı Hümâyûn)’이라 불리는 황제의 문 또는 술탄의 문(Saltanat Kapısı)이다.


문의 바깥쪽에 새겨진 글은 메흐메트 2세가 이 궁전의 건축을 1478년에 완공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황제의 문은 메흐메트 2세 이후의 군주들이 손을 많이 대는 바람에 원래의 모양으로부터 많이 변형되었다.


톱카프 궁전 임페리얼 게이트(The Imperial Gate) 첫 번째 문 앞에 캘리그라피가 있다.


이 궁전을 완공한 메흐메트 2세가 방문객을 환영한다는 의미의 싸인.

오스만 제국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한 1453년 이후에 최초로 지은 궁전이 있던 곳은 현재의 바예지드 지역이다.


당시 군주 메흐메트 2세는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한 후 현재의 이스탄불 대학교가 있는 자리를 황궁 터로 정하고 궁전을 지었다.
궁전은 세 번째 언덕에 세워졌다.


First Courtyards (제1 정원)


황제의 문을 들어서면 첫 번째 마당인 제1중정(I. Avlu or Alay Meydanı)이 있다.
이곳에 들어서면 오스만 군주와 궁전을 수비하는 예니체리코트(Court of the Janissaries)
또는 퍼레이드 코트(Parade Court)라 불리던 안뜰이 나온다.


First Courtyards (제1 정원)


일반 백성은 이곳까지만 자유롭게 다닐 수 있었다.
이 때문에 조정의 관리나 조정에서 일하는 시종들은 일반 백성들이 드나드는 제1중정을 궁전 마당으로 여기지 않았다.


제1중정에는 진료원, 장작 저장소, 제빵소 등이 있었으나,

현재는 동로마 제국 때 지은 하기아 이레네 성당과 화폐 제작소 말고는 남아 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


2006. 3. 13. 톱카프 궁전 첫 번째 정원을 지나며 방문 기념 인증샷.


뒤로 낯익은 첨탑이 살짝 보이는데 그곳은 바로 성 소피아 성당이다.
톱카프 궁전과 성 소피아 성당은 이처럼 가까이 있다.

왼쪽에는 아야 이리니(Aya İrini)라 불리는 하기아 에이레네(Hagia Eirene) 비잔틴 성당이 서 있다.


하기아 이레네 성당 (The Hagia Eirene church)


하기아 이레네 성당은 6세기경 동로마 제국의 유스티니아누스 1세 때 건립되었다.
건축 재료와 구조 면에서 볼 때 전형적인 비잔틴 건축물이다.
오스만 제국이 동로마 제국을 정복한 후에도 모스크로 사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건축물의 원래 형태가 그대로 남아 있다.


하기아 이레네 성당 (The Hagia Eirene church)


오스만 제국은 하기아 이레네 성당을 전리품과 무기 저장소로 사용하였다.
그러다가 1846년에 오스만 제국 최초의 박물관으로 사용되었다.


하기아 이레네 성당 (The Hagia Eirene church) 내부 모습


동로마 제국 시절에는 성당으로 사용되다가 오스만 제국 시절에는
무기고, 박물관 등으로 쓰인 아야 이리니 성당의 내부 모습.
성상 파괴 운동 시절에 지어진 건물이라 안에는 십자가만 덜렁 그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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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학 박물관


이 지역에 지은 궁전은 이후에 지은 톱카프 궁전과 구별하고자 구 궁전(舊宮殿)이라는 뜻으로
‘에스키 사라이(Eski Sarayı)’라고 불렀는데, 지금은 흔적도 남아 있지 않다.
술탄이 사용하지 않은 구궁전은 빛이 바랜 하렘의 여인들이 여생을 마치는 곳으로 사용되었다


톱카프 궁전 제1 정원에서 잔듸밭 사이로 "보스포루스"해협이 보인다.


톱카프 궁전 제1 정원에서 잔듸밭 사이로 "보스포루스"해협이 보인다.


두 번째 문. 경의의 문 (Gate of Salutation : Middle Gate ). '예절의 문'이라고도 한다.


제1중정을 지나면 ‘바뷔스 쎌람(Bâb-üs Selâm)’ 또는 디완 광장(Divan Meydanı)이라 불리는 두 번째 문인 경의의 문이 있다.
첫 번째 문과 중정은 일반 백성도 드나들 수 있는 곳이지만, 경의의 문부터는 일반 백성의 출입이 금지되었다.


경의의 문(Middle Gate; Ortakapı)이나 바뷔스 셀람(Bab-üs Selâm)을 통해 국정 운영을 담당했던 제2 중정으로 들어갈 수 있다.
오스만 제국 시대에는 술탄과 술탄의 어머니만 말을 타고 이 경의의 문을 통과할 수 있었다.
수상을 포함한 다른 사람들은 모두 말에서 내려 이곳을 통과해야 했다.


경의의 문 (Gate of Salutation : Middle Gate )


경의의 문 양쪽으로 웅장한 원추형의 망루가 있다.
망루의 오른쪽에는 사형 집행자의 칼과 피 묻은 손을 씻는 우물이 있고

참수된 사형수의 시체를 놓던 대리석이 두 개 있었다고 한다.


경의의 문 (Gate of Salutation : Middle Gate )


감옥시설이 있다는 첨탑아래 문처럼 나 있는 공간은

처형된 죄수의 머리를 걸어 두던 곳이었다고.


경의의 문(Gate of Salutation : Middle Gate ) 캘리그라피


캘리그라피는 이슬람 신앙 고백인 '샤하다'이며 '알라 이외에 다른 신은 없으며 무함마드는 그 분의 사도이다'라는 뜻이라고.
모스크 곳곳에 이 글귀가 적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처음 보는 단두대가 신기하여 인증샷을 해 본다.


제2 정원 (Second Court)


제2 중정은 아름다운 공원처럼 꾸며져 있다.
하나의 큰 건물에 외딴 정원이 여러곳 들어서 있으며 전형적인 유럽 궁전과는 달리
톱카프에는 담장 주변으로 여러 건물과 부엌, 막사, 알현실, 숙소가 자리해 있다.


제2 정원 (Second Court)


제2 정원 (Second Court)



구 궁전을 세우고 몇 년이 지난 후, 동로마 제국의 성곽이 있었던 첫 번째 언덕 북쪽 끝에 새로운 궁전을 지었다.
이 궁전이 바로 톱카프 궁전이다. 톱카프 궁전이 자리한 지역에는 동로마 제국이 세운 건축물이 있었으나,
톱카프 궁전이 들어서면서 모두 사라지게 되었다.



톱카프 궁전은 신 궁전(新宮殿)이라는 뜻으로 처음에는 ‘예니 사라이(Yeni Sarayı)’라고 불렸으나,
궁전 입구 양쪽에 대포가 배치된 데 연유하여 톱카프 궁전으로 불리게 되었다.


‘톱’은 대포라는 뜻이고 ‘카프’는 문이라는 뜻이다.
톱카프 궁전은 19세기 마흐무트 2세 때까지 약 380여 년간 오스만 제국 군주의 정궁이었다.
1475~1478년에 지어진 톱카프 궁전은 1850년대까지 계속 증축되기도 하고 보수되기도 하였다.




제2 정원 (Second Court)


제2 정원의 나무


제2 정원의 고목 사이로 새 나무가 자라 속에서 뚫고 나온 모습.​


부엌 궁전 (Saray Mutfakları)


경의의 문 뒤에 있는 넓은 마당은 제2중정(II. Avlu)으로 이곳에는 대신들이 국사를 논의하던 디완 건물과
거대한 황실 주방인 부엌 궁전(Saray Mutfakları)이 자리하고 있다.


부엌 궁전 (Saray Mutfakları)


마당 오른쪽에 있는 부엌 궁전은 군주를 비롯해 궁전 안에 있는 사람들의 직분에 따라 열 개의 별도 주방을 갖고 있었다.
하루에 두 번 궁중음식이 준비되었고, 해가 긴 여름철에는 해지고 두 시간 후쯤 군주와 하렘의 황실 가족들에게 음식이 제공되었다.


주방에서 만들어진 음식은 200여 명의 사람이 줄을 서서 접시를 손에서 손으로 전달하는 방식으로 식탁에 올려졌다.
궁전의 주방에서는 주로 양고기를 포함한 육류가 준비되었는데, 하루에 양 200마리가 소비되었다고 한다.
생선은 원하면 요리할 수도 있었으나, 거의 먹지 않았다.

주방이 있던 자리


주방으로 샤용되었던 곳으로 굴뚝의 규모를 보면 당시 톱카프 궁전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겠다.
지금은 도자기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는데 전시된 도자기가 무려 12,000여 점에 이를 정도로 방대하다.


정의의 탑 (Tower of Justice)


디완과 하렘 사이에 위치한 정의의 탑은 궁전에서 가장 높은 건물로 부정에 대항하는

술탄의 영원한 경계를 상징한다고 하는데 높이 14m의 이 탑은 내부를 감시하는 망루로 쓰였다고 한다.


정의의 탑 (Tower of Justice)


이곳 제2 중정 마당에서는 처형된 죄인의 목을 걸기도 했으며,
이 문 안쪽에는 사형집행인이 칼에 묻은 피를 씻었다는 우물이 남아 있다.


오스만 제국의 대신들의 국정회의인 디완(Divan)을 주관하던 건물에 바로 붙어 있으며

궁궐 내에서 집행된 모든 처형, 처벌들은 이 사진이 찍힌 제2 중정 마당에서 이루어졌다.


황제는 저 탑 위에 올라가서 사형집행 윤허 여부를 전달하고 집행을 지켜보았는데,
터키 드라마 무흐테솀 유즈이을을 보면 꽤 자주 볼 수 있다.


디완(diwan)


경의의 문 뒤에 있는 넓은 마당은 제2중정(II. Avlu)으로 이곳에는 대신들이 국사를 논의하던 디완 건물과
거대한 황실 주방인 부엌 궁전(Saray Mutfakları)이 자리하고 있다.


제2 중정 왼쪽(서쪽)에 아름다운 제국 대회의실(Imperial Council Chamber; Dîvân-ı Hümâyûn)이 있다.
대신들이 국정을 논의하던 곳으로, 술탄이 이따금 벽 상부에 설치된 황금 창살을 통해 회의 내용을 엿들었다고 한다.


오른쪽 공간에는 궁전의 시계가 전시되어 있다.
북쪽의 외부 금고(Outer Treasury)에서는 오스만 제국 및 유럽의 무기와 갑옷을 볼 수 있다.


디완(diwan) 내부.


디완은 오늘날의 내각(內閣)을 말하는 것으로, 조정의 주요 업무가 이곳에서 논의되고 결정되었다.
디완 건물을 ‘쿱베알트’라고 부른다. 콥베는 ‘돔’이라는 뜻이고, 알트는 ‘아래’라는 뜻이다.


내각회의는 톱카프 궁전 초기에는 매일 열렸으나, 점차 시간이 흐르면서 줄어들다가
18세기 초에 이르러서는 일주일에 하루만 열리게 되었다.


디완 회의 초기에는 군주가 직접 회의에 참여하였으나,

얼마 안 있다가 디완 회의는 총리대신이 주재하게 되었다.


긴 소파가 있다.


디완(diwan)은 터키어로 '소파'라는 뜻인데 여기에서

각료들이 소파에 앉아 국가의 중대사를 결정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원래 신하들의 회의에 왕도 참관했는데 나중에는 동석하지 않고 벽 뒤에 숨어서 지켜봤다고 한다.


오스만 제국의 관료들이 디완 회의를 했던 건물 내부의 모습.


사진 우측 중앙을 보면 황금 창살로 막혀 있는 창문이 보이는데 이곳을 통해
황제가 직접 회의를 관찰하거나 대리인을 보내 관찰하게 했다.


한편 황제는 회의 자체에는 참여하지 않았지만
디완 회의 이후 대재상(Vezir-i âzam)을 불러 접견을 통해 자신의 의중을 전달했다.


술탄이 가끔 이 뒤에 숨어서 지켜 봤다고 하는 창문.


왕이 이 뒤에 있을 때도 있고 없을 때도 있어서

신하들은 맘 편하게 회의를 하지 못했다고 한다.


디완의 화려한 천장 장식.


외부 금고(Outer Treasury)에서는 오스만 제국 및 유럽의 무기와 갑옷을 볼 수 있다.


참조 ; https://ljhoi.blog.me/221363753799
https://blog.naver.com/fightclub/221380539496
https://blog.naver.com/ahnys0/221229580348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387694&cid=43079&categoryId=43079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160465&cid=40942&categoryId=31600
https://ko.wikipedia.org/wiki/%ED%86%B1%EC%B9%B4%ED%94%84_%EA%B6%81%EC%A0%84





루멜리 히사리(Rumeli Hisari)


메흐멧 2세가 1452년에 콘스탄티노플(현 이스탄불)을 정복하기 위하여
당시 보급 물자의 항로였던 보스포루스 해협에 건설한 요새이다.


흑해와 마르마라해를 연결하는 보스포러스해협의 유럽 쪽에 지어진 요새.
1452년 당시 보스포루스 해협을 관할하던 비잔티움제국 함대가 북쪽 동맹국과 교통하는 것을 막기 위해,
오스만 제국의 메흐메드 2세가 해협의 폭이 가장 좁은 700m 병목구간에 건설했다.


석공 1만 명과 인부 1만 명을 동원하여 139일 만에 지었다는 전설적인 성채로,
계단식 성곽으로 되어 있으며 5~15m에 이르는 거대한 첨탑 5개가 서로 연결되어
어느 탑에 오르더라도 전체를 다 돌아볼 수 있다.


보스포러스 해협 건너편의 아시아 쪽에 있는 아나돌루 히사리와 함께

서로 해협을 지나는 모든 선박들을 감시하고 대포로 공격하기도 했다.


1453년에는 양쪽 요새에서 보스포루스 해협을 타고 들어오는 비잔틴 제국의 함선을 협공함으로써
콘스탄티노플(지금의 이스탄불) 함락에 성공했다.


원래의 요새는 1509년 지진으로 크게 파괴되어 일부를 복구했으며,
1953년에 이스탄불 정복 500주년을 기념해 현재의 모습으로 완전히 복원하였고

 지금은 박물관으로 일반인에게 공개한다.


매년 여름 루멜리 페스티벌이 열리며,

요새 가운데 뜰에 있는 소규모 공연장에서는 음악회와 포크댄스 등 각종 공연이 열린다.


보스포루스 해협(Bosphorus Straits)에서 보는 루멜리 히사리(Rumeli Hisari)


보스포루스 해협은 이스탄불의 아시아와 유럽을 구분하는 경계선이다. 해협의 동쪽이 아시아, 서쪽이 유럽이다.
유럽 지역은 보스포루스 해협의 출구인 골든 혼을 기준으로 다시 남쪽의 구시가와 북쪽의 신시가로 나뉜다.
이 해협은 예로부터 국제 무역의 중심지였다.


보스포루스 해협(Bosphorus Straits)에서 보는 루멜리 히사리(Rumeli Hisari)


보스포루스 해협은 흑해와 지중해, 마르마라 해를 연결하는 수로로서 지리적 가치가 높아
중세의 교통로와 무역 거점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냉전 시대에는 지중해로 진출하기 위해 남하하던 소련을 막는 마지막 보루였다.


보스포루스 해협(Bosphorus Straits)에서 보는 루멜리 히사리(Rumeli Hisari)


보스포루스 해협은 양쪽 기슭을 따라 펼쳐지는 아름다운 경치가 매우 인상적이다.
돌마바흐체 궁전, 루멜리 히사르 요새 등 이스탄불의 유서 깊은 건축물들과

고급 주택, 오래된 목조 별장이 늘어서 있다.


해변에는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과 카페도 많다.

식사를 하거나 차를 마시며 여유롭게 주변 풍광을 즐기기에 좋다.


2006. 3. 14. 보스포루스 해협 유람선에서 루멜리 히사리를 배경으로 인증샷.


마르마라해(Sea of Marmara)란 터키 북서부의 유럽과 아시아 사이에 있는 바다를 말한다.
북동쪽은 보스포루스 해협으로 흑해로 통하고, 남서쪽은 다르다넬스 해협으로 에게 해에 통한다.

동서 길이 1,150km. 남북 최대 길이 610km. 면적 41만 3,000km2. 최대수심 2,212m.
유럽 지중해(海)의 에게해와는 보스포루스 해협·마르마라해·다르다넬스 해협으로 이어져 있다.

유라시아에서 마르마라 해(Sea of Marmara)의 위치


남쪽은 터키, 서쪽은 유럽의 터키·불가리아·루마니아,

북쪽과 동쪽은 우크라이나·러시아 연방·조지아에 둘러싸여 있다.


북부는 크림 반도가 돌출해 있는 것을 제외하면 해안선이 비교적 단조로우며,
해저 지형은 북반부에 대륙붕의 발달이 현저하고 남반부는 비교적 깊다.


북쪽은 케르치 해협에서 아조프해에, 남서쪽은 보스포루스 해협에서 마르마라해에 이어지고
다시 다르다넬스 해협에서 지중해로 연결된다.


하천은 북부로부터 드네프르강(江)·드네스트르강이, 서부로부터 도나우강이 유입하여 유입량이 많은 데다가
비가 많아 표층은 18% 내외의 저염분(低鹽分)이다.


유라시아에서 마르마라 해(Sea of Marmara)의 위치


마르마라 해(Sea of Marmara)의 지명은 그리스 어로 '대리석'이라는 뜻이다.
고대 페르시아와 그리스의 해전이 있었던 곳이다.


흑해(Black Sea)의 표층은 보스포루스 해협에서 유출하는데

저층수(低層水)는 에게해로부터 강한 조류가 되어 유입한다.


표면 수온은 겨울철 6℃, 여름철에는 23℃ 내외가 된다.
예전에는 카스피해와 이어져 있었으나 제3기(紀) 말의 지각운동에 의하여 분리, 지중해와 이어졌다.

유라시아에서 마르마라 해(Sea of Marmara)의 위치


마르마라 해(Sea of Marmara)는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교통의 요지로,
기후가 온화하여 섬과 연안에는 휴양지가 발달하였다.
이 곳에 있는 마르마르 섬은 대리석 산지로 알려져 있다.


흑해(Black Sea)에서의 어업은 주로 얕은 북해안에서 행해지는데, 어족은 108종에 이르며
청어·고등어·철갑상어·정어리·넙치·꼬치고기·농어·도미 등이 잡힌다.


예로부터 수상교통상 중요한 역할을 해왔으며, 해외로 통하는 바다로서 몇 개 안 되는 부동항이 있기 때문에
제정 러시아 시대에는 남방 진출의 기지가 되었다.

러시아·루마니아·불가리아·우크라이나 등도 무역에서 흑해에 대한 의존도가 높다.


주요항으로는, 우크라이나의 오데사·니콜라예프·헤르손·세바스토폴, 러시아의 노보로시스크·소치,
조지아의 바투미, 루마니아의 콘스탄차, 불가리아의 부르가스·바르나, 터키의 삼순·시노프·트라브존 등이 있다.


참르자 언덕에서 보는 이스탄불과 보스포루스 해협

참르자는 터키의 이스탄블 전체를 볼 수 있는 높은 곳을 지칭하는 말이다. 

보스포루스 제1대교


보스포루스 해협에는 아시아와 유럽을 연결하는 자동차 전용 다리가 2개 뿐이다.
차량 이동이 불편하기 때문에 두 지역을 통근하는 이스탄불 시민들은 주로 연락선(바푸르)을 이용한다.


2006. 3. 14. 보스포러스 해협 유람선에서 루멜리 히사리를 배경으로 인증샷.


보스포루스 해협의 푸른 물결을 가르며 이스탄불의 시가지를 둘러보는 보스포루스 크루즈 투어는 매우 인기 있다.
이스탄불의 일몰부터 야경까지 감상할 수 있는 저녁 시간에 맞춰 탑승하는 것이 좋다.


투어의 종류는 다양한데 에미노뉴(Eminonu) 선착장에서 출발해

보스포루스 제2교까지 올라갔다가 되돌아 내려오는 코스가 일반적이다.
그 밖에 에미노뉴에서 흑해 입구로 향하는 크루즈, 오르타쾨이에서 출발하는 왕복 크루즈 등이 있다.


에미노뉴 선착장을 이용할 경우, 항구의 별미인 고등어 케밥(발륵 에크멕)을 꼭 맛보아야 한다고.
보스포루스 크루즈선이 드나드는 선착장 주변에 작은 배에서 고등어 케밥을 만들어 내는 가게들이 성업 중이다.

루멜리 히사리(Rumeli hisarı)


루멜리 히사리(Rumeli hisarı)는 메흐메트 2세가 비잔틴 제국을 정복하기에 앞서, 동맹국과 교류를 막기 위해
보스포루스 해협의 가장 좁은 부분에 설치한 두 성채 중 하나이다.


보스포루스 해협을 기준으로 왼쪽은 유럽, 오른쪽은 아시아라고 이야기하는데,

루멜리 히사리는 유럽 쪽에 지어진 성채이다.
반대쪽인 아시아에는 아나돌루 히사리(Anadolu hisarı)라는 이름의 성채가 있다.


보스포루스 해협과 보스포루스 제1대교에 가까이 붙어 있는 루멜리 히사리(Rumeli hisarı)


루멜리 히사리(Rumeli hisarı) 다소 복잡한 주차장


루멜리 히사리(Rumeli hisarı) 들어가는 길


루멜리 히사리(Rumeli hisarı) 매표소


루멜리 히사리(Rumeli hisarı) 매표소를 지나서 입구


루멜리 히사리(Rumeli hisarı) 입구


요새를 지키던 대포를 진열해 놓은 듯.


요새를 지키던 대포를 진열해 놓은 듯.


루멜리 히사리(Rumeli hisarı) 첨탑


 루멜리 히사리는 군사 목적으로 건설된, 특히 대함전을 주력으로 한 성채라서

해협을 따라 성벽과 첨탑이 줄지어 서 있다.
모든 첨탑이 연결되어 있어 전쟁시 유기적으로 응전할 수 있었다고.

루멜리 히사리(Rumeli hisarı) 성벽과 첨탑

하지만 아쉽게도 성벽이나 첨탑으로 오르는 길은 모두 막혀 있어서 접근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루멜리 히사리(Rumeli hisarı) 성벽과 첨탑


루멜리 히사리(Rumeli hisarı) 성벽과 첨탑


루멜리 히사리(Rumeli hisarı) 성벽과 첨탑


루멜리 히사리(Rumeli hisarı) 성벽과 첨탑


루멜리 히사리(Rumeli hisarı) 성벽


루멜리 히사리(Rumeli hisarı) 성벽과 첨탑


루멜리 히사리(Rumeli hisarı) 성벽과 첨탑


루멜리 히사리(Rumeli hisarı) 성벽과 첨탑


루멜리 히사리(Rumeli hisarı) 성벽과 첨탑


루멜리 히사리(Rumeli hisarı) 성벽과 첨탑


루멜리 히사리(Rumeli hisarı) 성벽과 첨탑


루멜리 히사리(Rumeli hisarı) 성벽과 첨탑


루멜리 히사리(Rumeli hisarı) 성벽과 첨탑


루멜리 히사리(Rumeli hisarı) 성벽과 첨탑


루멜리 히사리(Rumeli hisarı) 성벽과 첨탑


루멜리 히사리(Rumeli hisarı) 성벽과 첨탑


루멜리 히사리에서 보스포루스 해협 건너 아시아쪽 해안이 보이는 풍경
보스포루스 해협의 아시아쪽 방면에 있는 저택들은 터키 금수저들의 별장들이라고 한다.


루멜리 히사리에서 보스포루스 해협 건너 아시아쪽 해안이 보이는 풍경


루멜리 히사리(Rumeli hisarı) 성벽과 보스포루스 제1대교가 보이는 풍경.


루멜리 히사리(Rumeli hisarı) 성벽 사이로 보스포루스 제1대교가 보이는 풍경.


루멜리 히사리(Rumeli hisarı) 첨탑 사이로 보스포루스 제1대교가 보이는 풍경.


루멜리 히사리(Rumeli hisarı) 첨탑 사이로 보스포루스 제1대교가 보이는 풍경.


루멜리 히사리(Rumeli hisarı) 성벽 사이로 보스포루스 제1대교와 유람선이 보이는 풍경.


루멜리 히사리(Rumeli hisarı) 성벽과 첨탑


루멜리 히사리  성벽 안에 있는 소공연장.
여기서는 매년 축제가 개최된다고 하니 때를 잘 맞추면 볼 수도 있을 듯하다.


루멜리 히사리  성벽에 붙어 있는 소공연장.


루멜리 히사리  성벽에 붙어 있는 소공연장.


루멜리 히사리  성벽에 붙어 있는 소공연장.


루멜리 히사리  성벽 안에 있는 소공연장.


소공연장 옆의 나가는 길에 버려져있던 유물들.


루멜리 히사리(Rumeli hisarı) 성벽과 첨탑


[영상 KBS 걸어서 세계속으로] 루멜리 히사리 (Rumeli Hisari)


메흐메트 2세(Mehmet II, 1432년 3월 30일 ~ 1481년 5월 3일)


메흐메트 2세는 오스만 제국의 제7대 술탄이며,

처음으로 카이사르와 칼리프의 칭호를 쓴 인물이다.


1444년부터 1446년까지 짧은 기간 통치하다가 퇴위되고

나중에 1451년부터 다시 즉위하여 1481년에 죽을 때까지 집권하였다.


그는 젊은 나이에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하고 동로마 제국을 멸망시켰으며
오스만 제국의 판도를 대폭으로 넓혀‘정복자(Fatih)’란 별명으로 불렸다.


메흐메트 2세는 술탄 무라트 2세의 4남으로 세르비아 출신의 크리스트교도 여자 노예인
휘마 술탄(1410~1449) 사이에서 태어났다.


태어난 지 2년 만에 메흐메트는 맏형이 총독으로 있던 소아시아의 도시 아마시아(Amasya)로 옮겨갔다.
3년 뒤 메흐메트가 다섯 살이 되었을 때 맏형이 죽자 뒤를 이어 아마시아의 총독에 임명되었다.


나중에 둘째 형이 아마시아 총독이 되었고 메흐메트는 마니사(Manisa) 총독이 되어
관습에 따라 2명의 선생과 함께 마니사로 이동했다.


1443년 둘째 형이 죽자 메흐메트는 술탄의 계승자가 되었으며
이듬해 부왕으로부터 에디르네(Edirne)에서 술탄의 자리를 물려받았다.


이때 무라트 2세는 아들에게 여러 선생들을 붙여주었는데,
이들로부터 받은 이슬람 교육은 메흐메트의 삶에 큰 영향을 미쳤다.


비잔티움 마지막 황제 콘스탄티누스 11세(1404~1453)


콘스탄티노스 11세 드라가세스 팔레올로고스(1405년 2월 8일 - 1453년 5월 29일)는 동로마 제국의 마지막 황제이다.
1448년부터 치세가 시작되었으며 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함락 때 전사하였다.


콘스탄티노폴리스(콘스탄티노플)에서 마누일 2세 팔레올로고스와
마케도니아 지방 드라가슈 가문 출신의 세르비아인 아내 헬레나 사이에서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보냈으며,
1443년 모레아의 황제 소유영지를 통치하고 라틴인들을 완전히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1448년 형인 요한네스 8세 팔라이올로고스가 자녀 없이 죽자,
다른 형제인 데메트리오스와 제위를 놓고 분쟁이 벌어졌는데
오스만 제국의 술탄 무라드 2세에게 중재를 요청한 결과,
콘스탄티노스가 결정되어 미스트라에서 황제로 즉위했다(1449년).


1451년 오스만 제국의 술탄이 된 메흐메트 2세가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대한 위협을 가해오자,
콘스탄티누스는 동방 정교회와 로마 가톨릭의 재결합에 동의함으로써
서유럽의 지원을 얻어내려고 노력했으나 끝내 무산되었다.


결국 가브리엘로 트레비사노가 이끄는 소수의 베네치아 공화국 함대와,
주스티니아니 롱고가 이끄는 제노바 공화국 용병의 지원을 받아
독자적으로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방위조직을 갖추는 등 갖은 노력을 다했지만
결국 메메드 2세가 이끄는 오스만 제국의 군대의 침공하는 것을 막아낼 수는 없었다.


1453년 5월 29일 일화로, 사석포(우르반 대포)를 동원한 메흐메트 2세의 오스만 군이
테오도시우스 성벽을 마주보며 서있었을 때, 황제는 백마를 타고 3중 성벽을 지키는 8천 병사를 시찰하고 있었다.


메흐메트 2세는 백마를 탄 그의 모습을 보고 '황제는 백마를 타는가?'라고 하며
타고 있던 흑마를 물리고 백마로 갈아탔다고 한다.


후에 메흐메트 2세가 스스로를 로마의 황제로 칭한 것을 생각나게 한다.
4900명 정도의 그리스인들(무기를 들 수 있는 남성에 수도승까지 모두 포함한)과
2000명의 자진해서 잔류한 외국 용병들이 메메드 2세를 맞아 싸웠다.


황제는 전선에 직접 나섰으며, "활을 쏘고 창을 던져라,
저들에게 로마인들의 후예와 싸우고 있다는 것을 알려라!" 라며 사기를 북돋았다고 한다.
그리고 메흐메트 2세의 항복 제안에 대해서는 이런 말을 남겼다.


"당신에게 도시를 넘겨줄 권리는 나에게도, 이 곳에 사는 그 누구에게도 없소,
우리 모두를 위해서, 상호간의 이해에 따라, 우리 생명을 아끼지 않고 자유 의지에 따라 죽을 것이오."


콘스탄티노플은 그 뒤에도 테오도시우스 성벽의 강력한 방어력을 바탕으로
몇번의 파상공세를 6천 남짓한 병사를 바탕으로 이겨낸다.


메흐메트 2세는 계속되는 실패로 원정을 지속할 지를 참모들에게 묻는다.
참모들은 딱 한 번의 총공세 이후에 황제와 평화 협정을 맺자고 제안하고 메흐메트 2세는 수긍한다.


마지막 공격지점은 외부 성벽 중 가장 약한 곳, 리쿠스강이 흘러드는 지점이었다.
황제는 첩자를 통해 공격지점을 들었지만, 방비를 단단히 하는 수 밖에 없었다.


바시-바주크에 의한 1차 공세, 정규군에 의한 2차 공세, 심지어 예니체리 군단의 3차 공세까지
모두 막아냈지만 비어있는 통로를 따라 올라간 오스만 병사가 탑에 오스만 군기를 세움으로써
성이 함락되었다고 생각해버린 병사들이 전의를 상실한다.


설상가상으로 방어전을 지휘하고 있던 용병대장 주스티니아니가 투르크군의 사격에
부상을 입고 방어선에서 이탈하여 배로 도망간다.


배로 옮겨진 주스티니아니는 회복하지 못하고 며칠 후 바다를 건너던 중 배 안에서 사망하고 만다.
주스티니아니가 부상으로 후송되자 방어군의 사기는 떨어졌다.


황제가 근위대와 함께 최후의 저항을 하고있는가운데 수비군이 열려있는 비밀문을 잠그지못했고
그 문을 통해 오스만 군대가 난입해오면서 결국 성은 함락되고 만다.


당시에 "로마 제국은 창시자와 이름이 같은 황제의 치하에서 멸망한다"는
예언이 있다는 소문이 떠돌았는데 이 소문은 들어맞고 말았다.


흥미롭게도 서로마 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플라비우스 모마일루스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도
로마의 첫 번째 왕 로물루스와 로마의 첫 번째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이름을 함께 가지고 있었다.


시신을 찾지 못했기 때문에 이후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게 된 그리스에서는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함락 당시 천사들이 내려와 콘스탄티누스 11세를 구하여 대리석상으로 만들었으며,
투르크의 지배가 무너지고 그리스가 해방될 날 다시 부활하여 앞장서게 될 것이다.'라는 전설이 생겨났다.

다르다넬스 대포


메흐메트 2세(Mehmet II)는 뛰어난 군사지도자로서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켰고
이후 4세기 동안 오스만 제국의 중심지가 된 아나톨리아와 발칸을 정복했다.


메흐메트 2세는 술탄 무라트 2세의 4남으로 세르비아 출신의 크리스트교도 여자 노예인
휘마 술탄(1410~1449) 사이에서 태어났다.


태어난 지 2년 만에 메흐메트는 맏형이 총독으로 있던 소아시아의 도시 아마시아(Amasya)로 옮겨갔다.
3년 뒤 메흐메트가 다섯 살이 되었을 때 맏형이 죽자 뒤를 이어 아마시아의 총독에 임명되었다.


나중에 둘째 형이 아마시아 총독이 되었고 메흐메트는 마니사(Manisa) 총독이 되어
관습에 따라 2명의 선생과 함께 마니사로 이동했다.


1443년 둘째 형이 죽자 메흐메트는 술탄의 계승자가 되었으며
이듬해 부왕으로부터 에디르네(Edirne)에서 술탄의 자리를 물려받았다.


이때 무라트 2세는 아들에게 여러 선생들을 붙여주었는데,
이들로부터 받은 이슬람 교육은 메흐메트의 삶에 큰 영향을 미쳤다.

콘스탄티노플을 침공하는 메흐메트 2세


첫 재위 기간에 메흐메트 2세는 대내외적으로 커다란 위기를 맞았다.
헝가리, 교황, 비잔티움 제국, 베네치아 등은 어린 왕자가 오스만 제국 술탄으로 즉위한 상황을
적극적으로 이용하려는 생각에서 십자군을 조직했다.


또한 당시 에디르네에서는 강력한 권한을 행사하는 대(大) 와지르(총리) 찬다를리 할릴 파샤(?~1453)와
자가노스 파샤(?~1462)·시하베딘 파샤와 같은 와지르(각료) 사이의 대결이 격렬하게 전개되었다.


와지르들은 각기 어린 술탄의 권리를 보호한다는 구실을 내세우고 있었다.
1444년 9월 십자군이 도나우 강을 건넜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에디르네에서는 크리스트교의 영향을 받은 후루프파에 대한 학살이 일어났고
공포와 방화가 도시를 휩쓸었다.


어린 술탄은 아버지가 다시 돌아와 헝가리군과 싸워주길 바랐는데 아버지 무라트는 처음에는 거절했지만
술탄이 "당신이 술탄이시거든, 돌아와 당신의 군대를 이끌어주소서.
만약 내가 술탄이라면 나 지금 당신에게 명령하노니, 돌아와 나의 군대를 이끌어주시오."
라는 편지를 보내자 무라트는 급히 돌아와 군대를 지휘했다.


1444년 11월 바르나(Varna)에서 무라트가 거둔 승리로 위기는 가라앉았다.
메흐메트 2세는 에디르네에서 계속 제위를 유지했고 무라트는 전쟁이 끝나자 마니사로 다시 은퇴했다.


이때부터 자가노스 파샤와 시하베딘 파샤는

어린 술탄에게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 정복을 부추기기 시작했다.


이에 대해 1446년 할릴 파샤가 예니체리로 하여금 반란을 일으키게 하고
무라트를 에디르네로 불러와 술탄 자리에 복위시켰다.


할릴 파샤와 메흐메트는 서로 반목했다고 전해지며 나중에 할릴 파샤는 메흐메트가 다시 정권을 잡고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할 때 비잔티움 측으로부터 뇌물을 받은 죄로 처형당했다.


퇴위당한 메흐메트는 새로이 선생으로 임명된 자가노스 파샤·시하베딘 파샤와 함께 다시 한번

마니사로 보내졌으며, 그곳에서 남색과 여색을 불문하고 난행에 젖어 지내는 것으로 이름을 날렸다.


오스만군을 수송하려는 메흐메트 2세


1451년 2월 부왕이 죽자 메흐메트는 에디르네에서 다시 권좌에 올랐다.
그의 마음은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할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 계획에 대해서 유럽과 비잔티움은 그의 전번 재위 때의 상황을 생각하면서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의 권위는 제국 내에서도 여전히 확립되지 않았다.


그러나 얼마 안 있어 술탄 즉위 때 관례상 내리는 하사품이 늦었다는 이유로 항의하는 예니체리를
가혹하게 처벌함으로써 자신의 권위를 과시했다.


그는 군조직을 강화해 앞으로의 정복전을 준비했다.
또한 콘스탄티노플 정복에 필요한 외교적·군사적 준비에 모든 열의를 쏟았다.

우선 베네치아와 헝가리를 중립 상태에 남아 있도록 만들기 위해 그들에게 유리한 조약을 맺었다.


그리고 1452년 대부분의 시간을 보스포루스 해협을 통제하기 위한
보아즈케센(뒤에는 루멜리 히사리)의 요새화 작업과 31척의 함대 건조 및
대구경 신형 대포를 주조하는 데 보냈다.


그는 헝가리인 총포제조기술자 우르본에게

유럽에조차 아직 알려지지 않은 크기의 대포(다르다넬스 대포)를 만들게 했다.


그러나 한편으로 할릴 파샤는 이런 계획들을 계속해서 반대했으며
콘스탄티노플의 포위기간(1453. 4. 6~5. 29) 동안 결정적인 순간에 소집된 2번의 전시 회의에서 반대 소리가 높아졌다.
반면 자가노스 파샤는 포위를 풀자는 제안에 격렬히 반대했다.


자가노스 파샤가 마지막 총공격의 임무를 부여받았고 총사령관 메흐메트 2세 자신은 총공격을 개시한 날,
신형 대포로 파괴한 성벽의 돌파 작전을 직접 지휘했다.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된 날 할릴 파샤는 체포되어 곧바로 에디르네에서 처형되었으며,
이미 메흐메트 2세의 장인이 되어 있었던 자가노스 파샤가 대 와지르 자리에 올랐다.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기 전에 메흐메트 2세는 병사들에게 그 도시에 대한 3일 간의 약탈을 마지못해 허락했지만
점령 첫날 저녁에 자신의 명령을 철회했다.


진주 행렬의 선두에 서서 입성한 메흐메트 2세는 곧바로

성 소피아 대성당에 가서 그곳을 모스크(아야 소피아)로 바꾸었다.


이후 풍부한 기금을 조성하고 모스크의 유지와 운영을 위해
매년 1만 4,000두카트(중세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 발행된 주화) 금화를 그곳에 보내주었다.

콘스탄티노플에 입성하는 메흐메트 2세


메흐메트 2세가 마음에 품었던 과업 중 하나는 지금은 일반적으로 이스탄불로 불리는 이 도시를
세계적인 제국의 수도에 걸맞게 재건하는 일이었다.


조세를 재확립해 갈라타(콘스탄티노플의 상업지구)에 살다가 피난 간
그리스인과 제노바인들에게 돌아올 것을 권유하고 그들의 가옥을 돌려주었으며 신변의 안전을 보장했다.


도시의 인구를 늘리기 위해 아나톨리아와 발칸의 이슬람교도와 크리스트교도를 강제 이주시켜
콘스탄티노플에 정착하도록 했다.
밀레트(Millet) 제도를 시행해 다양한 종교와 문화의 개체성을 인정해주었으며


1454년 1월에는 도시 안에 그리스 정교회 총대주교구를 복원하고
유대교의 대랍비와 아르메니아 총대주교를 두었다.


또한 콘스탄티노플의 중심가에 그 자신이 먼저 이슬람 학술기관과 상업시설을 설립하고
와지르들에게도 이와 같이 하도록 격려했으며 파괴된 비잔티움 제국의 건물들을 복원시켰다.


이러한 핵심기관을 중심으로 콘스탄티노플은 다시 발전했으며 1478년의 한 조사에 따르면
콘스탄티노플과 인근 갈라타 지역에는 1만 6,324채의 가옥과 3,927개의 상점이 있었다고 한다.
50년 뒤 콘스탄티노플은 유럽 최대의 도시가 되었다.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함으로써 메흐메트 2세는 더없는 영광과 명성을 얻었고 커다란 권위를 얻었다.
그는 점차 스스로를 로마 황제의 후계자이고 성전에서 승리를 거둔 이슬람의 패자(覇者)라고 생각했다.


정복 계획을 미리 세워두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는 로마 제국의 부활과 그 영역을 역사상 최대로 확장하는 일에 몰두했다.


1454년 세르비아 군주 듀라드 브란코비치(1377~1456)가 공물을 거부하자
메흐메트 2세는 에디르네에서 출발하여 세르비아 문제에 개입해 첫번째로 세멘데르(Semender)를 공략했다.


1456년 스메데레보를 점령하고 듀라드 브란코비치에게 연공 납부와
유사시 오스만 제국에게 지원군을 보낸다는 조약을 강요했다.
더 나아가 동유럽으로 진격한 메흐메트 2세는 벨그라드(Belgrad)를 포위했으나


1444년에 바르나에서 부왕에게 패했던 후녀디 야노시(1400~1456)의 기습공격을 받아
부상을 입고 포위를 풀어 에디르네로 물러났다.


듀라드 브란코비치는 일시적인 독립을 획득했으나 그해 사망했고,
그의 미망인과 세 아들들 사이에서 권력 다툼이 일어났다.


이듬해 막내아들 라자르 브란코비치(1421~1458)가 어머니를 살해하고 두 형제를 몰아내었으나
그도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


라자르의 추방당한 형 스테판 브란코비치(1417~1476)가 세르비아 군주로 즉위했으나 1459년 3월 추방당했다.
1459년 6월 메흐메트 2세는 스메데레보를 다시 한 번 공격해 벨그라드를 제외한 세르비아 전역을 합병했고
이로써 벨그라드가 점령될 때까지 스메데레보는 헝가리 공략의 중심지가 되었다.

메흐메트 2세와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겐나디오스 2세(1400~1473)


에게 해의 작은 모레아(Morea) 공국 토벌을 위해 메흐메트 2세는
대 와지르 마흐무트 파샤(1420~1474)를 파견했고 자신도 2차례의 원정을 감행했다.


1460년 5월, 늘어나는 공물을 더 이상 감당하지 못한 모레아 공국의 사람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메흐메트 2세는 이를 기회로 삼아 모레아 공국을 침공했다.


콘스탄티누스 11세의 동생 데메트리우스(1407~1470)는 사로잡혀 수감되었고,
또 다른 동생 토마스(1409~1465)는 도망쳤다.


여름이 지나갈 즈음 모레아는 사실상 오스만 제국에게 점령당했으나,
모넴바시아(Monemvasia)를 점령하고 있던 카탈루냐 해적들과 모레아 남쪽 마니(Mani) 반도는
베네치아의 지원 속에서 계속 저항했다.


모레아 북서쪽의 살메니코(Salmeniko)가 가장 오래 저항했으나
1461년 이곳마저 함락당하며 그리스 전역이 오스만 제국에 병합되었다.


모레아 점령은 베네치아를 비롯한 지중해 해상 세력과의 맞대결에서 오스만 제국에게 유리한 입지를 제공해주었다.

모레아 점령 이후 메흐메트 2세는 아나톨리아 주변에 대한 정복 사업에 착수했다.


특히 아나톨리아 북부를 감싸고 있는 흑해 연안의 도시들은 전통적으로 제노바의 식민 도시로 전락해
동서 교역의 막대한 이익이 제노바의 손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메흐메트 2세는 보스포루스와 골든혼 내해의 갈라타까지 독점 교역권을 확장하려는 제노바의 제의를 거절하고,
제노바의 흑해 교역 중심지인 아마스라(Amasra)를 공략했다.


마흐무트 파샤의 오스만 함대가 아마스라로 진격했고 술탄 자신도 아나톨리아 내륙 도시 볼루를 거점으로
아마스라를 육지에서 공격해 1461년 아마스라는 오스만 영토에 병합되었다.


아마스라 정복의 여세를 몰아 메흐메트 2세는 또 다른 흑해 중부의 교역 중심지 시노프에 대한 정복을 단행했고
시노프를 지배하던 잔다르 공국의 왕 이스펜디야 베이는 항복했다.


다음으로 메흐메트 2세는 비잔티움 제국의 잔존세력인 트라브존 항을 공격했고
1461년 10월 트라브존 황제 다비드 콤네누스(1408~1463)는 오스만 제국에게 항복했다.


이어서 내륙 평정에 착수한 메흐메트 2세는 카라만 공국을 공략했고
아나톨리아에서 오스만 제국의 적대 세력은 악코윤루조만 남게 되었다.

메흐메트 2세가 묻힌 이스탄불의 파티 모스크


세르비아 토벌 이후 왈라키아 공국의 군주 블라드 체페슈(1431~1476)가 오스만 제국에 대한 조공 납부를 거부하고
세르비아와 불가리아를 약탈하자 메흐메트 2세는 그에 대한 응징에 나섰다.


블라드는 기습 공격으로 오스만군에 상당한 피해를 입혔으나 특유의 잔혹함과 화전 전술로 인해 인기가 없었고,
오스만군을 피해 헝가리로 피신했다.


헝가리는 봉신의 예를 지키지 않았다는 핑계로 블라드를 추방했고,
블라드는 결국 오스만군에 의해 살해당했다.


오스만군은 왈라키아의 수도 트르고비슈테(Targoviște)를 함락시켰고,
메흐메트 2세는 친(親) 오스만파인 블라드의 동생 라두(1435~1475)를 왈라키아 공작으로 세우고 철수했다.
이로써 왈라키아 또한 오스만 제국에게 귀속되었다.


이어서 몰다비아 군주 스테판 3세(1432~1504)가 조공을 바치는 것을 거부하고 왈라키아에 대한 간섭을 시도하자
루멜리 지역의 사령관 하딤 쉴레이만 파샤(?~1490)​를 몰다비아 원정대장으로 파견했다.


그러나 1475년 10월 하딤 쉴레이만 파샤는 바슬루이(Vaslui) 전투에서 스테판 3세에게 대패했다.
이에 메흐메트 2세는 직접 몰다비아 원정에 나서, 불리한 전황 끝에 아크데레 근교에서 스테판 3세를 격퇴하고

1476년 몰다비아도 오스만 제국에 편입시켰다.


관심을 보스니아와 헤르체고비나로 돌린 메흐메트 2세는 마흐무트 파샤를 보내
보스니아의 수도 아이차를 포위해 정복했고 클리티에 성에 피신해 있던 보스니아 왕이자 세르비아 군주인

스테판 토마셰비치(?~1463)가 항복함으로써 1463년 보스니아도 오스만 제국에게 복속되었다.


보스니아의 점령으로 오스만 제국은 지중해를 통한 베네치아와의 경쟁에서 유리한 고지를 확보했고
동시에 헝가리에 대한 견제 효과도 얻었다.


이어서 메흐메트 2세는 헤르체고비나 왕국으로 진입해

스테판 카소로비치(1404~1466)를 패주 시켜 항복시켰다.


스테판이 죽은 후 헤르체고비나는 오스만 제국의 루멜리 사령부에 편입되었고
스테판의 어린 왕자는 이슬람교로 개종해 후일 아흐메트 파샤(?~1517)로 알려져 대 와지르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파티 술탄 메흐메트 다리


1466년 봄 메흐메트 2세는 대군을 이끌고 알바니아를 침공했다.
알바니아는 스칸데르베그(1405~1468)의 지도 아래 저항하며 베네치아에 도움을 요청했다.


스칸데르베그는 오스만 제국이 베네치아와 전쟁을 하는 것을 이용하여 독립을 유지하려 했다.
베네치아는 두라조(Durazzo), 스쿠타리(Scutari)를 내어주며 알바니아를 지원했다.


이에 메흐메트 2세는 원정을 떠나 엘바산(Elbasan) 요새를 지어

스칸데르베그를 남쪽의 베네치아와 분리·고립시켰다.


1467년 초 스칸데르베그는 알바니아 사령관인 발라반 파샤를 격퇴했고 오스만군의 크루저(Krujë) 포위를 풀어냈다.
이어서 엘베산 요새까지 공격했으나 점령까지 하지는 못했다.


메흐메트 2세는 다시 알바니아 원정을 떠나 알바니아를 고립시켜 맹공을 퍼부었지만 실패했고,
겨울에 전염병이 돌자 물러났다.


그러나 1468년 1월 스칸데르베그는 베네치아의 레즈헤(Lezhe) 요새에서 사망했고,
메흐메트 2세는 10년에 걸쳐 알바니아를 잠식해 들어갔다.
1478년 슈코드라(Shkodra) 포위전을 끝으로 알바니아는 오스만 제국에 귀속되었다.


콘스탄티노플의 점령 이후 로마 교황을 중심으로 오스만 제국에 대한 유럽의 십자군 결성이 본격화되었다.
이에 오스만 제국은 베네치아와 연대해 유럽의 공격에 대비하고자 했다.


베네치아 역시 교역로의 새로운 주인인 오스만 제국과 우호적인 관계를 희망했고

오스만 제국 또한 베네치아 공략에 필요한 해군력의 약화로 공략보다는 공존을 택하려 했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의 발칸 반도 및 동지중해에서의 급격한 팽창 정책은 베네치아를 직접적으로 위협했고
오스만 제국의 해군력 또한 꾸준히 증강되었다.


이에 베네치아는 아나톨리아 동부와 남부 지중해의 반(反) 오스만 세력인 악코윤루조의 통치자 우준 하산(1423~1478)과

동맹을 맺고 카라만 공국의 카심 베이에게 군사 지원을 하면서 오스만 제국을 협공했으며 이즈미르를 공격했다.


이에 메흐메트 2세는 1473년 6월 마흐무트 파샤에게 군대 지휘를 맡겨 아테네 근처 베네치아의 교역 거점인
유보아 섬을 공격하게 했고 자신은 육로로 그리스 남부의 테르모필레를 넘어 유보아 성채에 도착해 17일 만에 성을 점령했다.


아나톨리아로 돌아온 메흐메트 2세는 1473년 8월 에르진잔의 바슈켄트 전투에서 우준 하산을 격파했고
아나톨리아와 발칸 지방의 지배를 확고히 했다.


동맹세력을 잃은 베네치아는 1474년 오스만 제국에 사절을 파견해 1년간의 상호 불가침 조약을 체결했다.
당시 오스만 제국도 크림 반도에 대한 해상 원정에 치중했기 때문에 1년 동안 양국 간의 충돌이 잃어나지는 않았다.


그러나 상호 불가침 조약이 만료되자 베네치아 함대는 아나톨리아 해안 지역에 대한 공세를 강화했다.
이에 오스만 함대는 베네치아 무역 거점들에 대한 원정을 시작해


1477년 사령관인 하딤 쉴레이만 파샤가 코린트 해협 북부의 레판토를 공격했다.
동시에 알바니아 총독인 알리 베이가 크루저를 공격했고 메흐메트 2세의 친정으로 크루저는 1478년 정복되었다.


이어 스쿠타리를 포위한 후 맹포격을 가해 점령했다.
결국 1479년 베네치아는 오스만 제국과 콘스탄티노플에서 평화 협정을 체결했다.

메흐메트 2세가 사용했던 검


1475년 대 와지르 게디크 아흐메트 파샤(?~1482)가 300척의 함선과 4만 명의 군사로
흑해 북부를 공격해 제노바의 무역 거점인 케페를 점령한 후 아조프 해로 진입해 아조프 성과 멘퀴브 성을 차지했다.


크림 칸국의 멩글리 기라이(1445~1515)는 생포되어 콘스탄티노플로 압송되었고
흑해는 오스만 제국의 내해가 되어 육·해상 실크로드의 중개지로서 오스만 제국의 통제 아래에 놓이게 되었다.


흑해에 이어 다시 에게 해와 지중해 통제 정책으로 전환한 메흐메트 2세는 메시히 파샤를 보내 1479년 로도스 섬을 공격했다.
그러나 로도스 섬은 1522년 메흐메트 2세의 증손자 쉴레이만 1세 대에서 정복되었다.


베네치아와 평화 협정을 체결 한 이후 메흐메트 2세는 이탈리아 공국들의 내분을 이용하여
게디크 아흐메트 파샤로 하여금 이탈리아 남부 오트란토(Otranto)를 공격하게 했다.


1480년 7월 오트란토 해협에 상륙한 아흐메트 파샤는 이탈리아 남부의 브린디시와 타란토를 정복한 후
파죽지세로 이탈리아 내륙까지 진격해 들어갔다.


그러나 이듬해 봄 메흐메트 2세는 콘스탄티노플에서 25km 떨어진 훈카르차이리(Hünkârçayırı)에서 사망했고
오스만 제국의 이탈리아 원정도 중지되었다.
메흐메트 2세는 죽기 전 며칠 동안 예전부터 앓아오던 통풍으로 심하게 고통받았으며, 독살의 흔적도 남아 있었다.


말년에는 맏아들 바예지트가 항상 그의 지시를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부자간의 관계가 매우 나빠졌다.
재위 말기로 갈수록 메흐메트 2세의 재정정책에 대해 국내 전반에 불만이 커졌다.


특히 종교재단과 지주 귀족에게 속해 있던 2만여 부락과 농장을 군사 봉토로 할당했을 때가 가장 심했다.
따라서 메흐메트 2세가 죽자 불만을 품었던 사람들은 술탄이 총애한 아들 젬을 버리고 바예지트를 즉위시켜
메흐메트 2세의 정책에 대한 반동을 시작했다.

루멜리 히사리


메흐메트 2세는 오스만 정부를 재조직했고 최초로 형법과 신민에 관한 법률들을 하나의 법전에 집대성하고
헌법을 또 하나의 정교한 법전으로 마련해서 이 두 법전을 모든 하위 법률의 핵심으로 삼았다.


메흐메트 2세의 극히 독재적인 성향에서 오스만 술탄의 전형이 생겨났다.
그는 자신의 포고령이나 법령을 어긴 사람들에 대해 극히 잔인하게 처벌해 당시 사람들조차 지나치다고 할 정도였다.


그러나 메흐메트 2세는 역대 술탄들 중 가장 편견 없고 자유로운 사고를 지닌 사람이었다.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한 후 그는 이탈리아의 인문주의자들과 그리스 학자들을 궁전으로 불러 모았다.


그는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겐나디오스 2세에게 정교회 신조를 쓰게 하고 그것을 오스만 투르크어로 번역하게 했으며
궁정 안에 그리스어와 라틴어 서적 도서관을 만들었다.


그리고 베네치아에서 젠틸레 벨리니(1429~1507)를 초청해 자신의 초상화(현재 런던 내셔널 갤러리 소장)를
그리고 궁전의 벽을 프레스코 화법으로 장식하게 했다.


그가 세운 장대한 모스크 주위에는 8개의 대학을 설립했는데,
이 대학들은 거의 1세기 동안 오스만 제국 내에서 이슬람 과학의 수준 높은 교육기관의 역할을 담당했다.


그는 가끔 '울라마'(원로 이슬람 학자)를 모아 자신이 직접 참석한 가운데 신학 논쟁을 벌였다.
그의 치세 동안 수학, 천문학, 이슬람 신학은 어느 오스만 시대보다 높은 수준에 이르렀다.


메흐메트 2세 자신도 1권의 디완(오스만 고전문학의 전통적 문체로 쓴 시집)을 남겼으며,
무슬림 남성에게 존재하던 남색을 애호하여 인질로 있던 크리스트교국의 젊은 왕자나 귀족의 영애들을 사랑하였다.

아나돌루 히사리(Anadolu hisarı)


보스포루스해협의 아시아 대륙에 지어진 요새이다.
오스만 제국의 바예지드 1세(재위 1389~1403)가 수도였던 콘스탄티노플을
수비하기 위한 방어벽 구축 사업의 일환으로 건설하였다.


해협의 중간 지점, 600m폭의 좁은 병목구간에 위치하며, 약 7,000m² 부지에 축조되었다.
다섯 개의 망루로 이루어져 있으며, 상층부에서 바라본 모습은 불규칙한 오각형 형태이다.
요새의 중앙에 있는 중심 타워는 25m이며 전체적으로 전통 오스만 제국의 건축 양식을 따르고 있다.


건너편의 유럽 대륙 쪽에 있는 루멜리 히사리와 함께
보스포루스해협을 지나는 선박들을 감시하고, 외부 침략에 대비하였다.


1991년부터 1993년까지 터키 문화부의 주도로 손상된 부분을 복원하였고,
현재 일반인에게 공개되고 있지 않다.


[영상] Panorama 1453 History Museum


[영상] Istanbul 1453 Panorama Museum OFFICIAL HD



참조 ; https://cafe.naver.com/aqob/5773
http://harenstyle.com/221385549864
https://cafe.naver.com/gorekorea/48475
https://blog.naver.com/item35/220213994601
https://blog.naver.com/mi2591/140134331473
https://blog.naver.com/ylj1407/130105356672
https://blog.naver.com/choemhwa/221406700684
https://blog.naver.com/choemhwa/221408416362

https://blog.naver.com/wrinklecat/157255756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279383&cid=40942&categoryId=40099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963678&cid=42864&categoryId=50859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156457&cid=40942&categoryId=34706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2696460&cid=51736&categoryId=51736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3339496&cid=40942&categoryId=33084
https://ko.wikipedia.org/wiki/%EB%A9%94%ED%9D%90%EB%A9%94%ED%8A%B8_2%EC%84%B8




단체 버스를 타고 시내에서 장소를 이동하다보면 오래된 성곽의 흔적이 곳곳에서 보인다.
곳에 따라 내려서 둘러 보기도 하고 차창 밖으로 스쳐 보기도 했던 성벽과 첨탑들을 인터넷 자료를 모아 정리해 본다.


테오도시우스 성벽(Theodosius Suru)


테오도시우스 성벽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방어하는 삼중의 성벽이다.
콘스탄티노폴리스가 난공불락의 도시로 불리게 된 데에는 이 성벽의 도움이 컸다.


아르카디우스 황제의 사후 그 아들 테오도시우스 2세는 7살의 나이로 즉위하게 되었다.
그러자 당시 가장 훌륭한 행정가이자 외교가인 민정총독 안테미우스는 섭정으로 일하게 되었다.


당시 콘스탄티노플에서는 이미 고대부터 이어져 온 성벽과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직접 세운 성벽이 있었으나,
시가지가 너무 커져 이 성벽들로는 시가지를 충분히 방어할 수 없는 상태였다.


따라서 안테미우스는 시가지를 보호하고 방위하기 위해 서기 413년부터 성벽을 건설하게 되는데,
이후 테오도시우스 법전과 더불어 테오도시우스 2세의 가장 위대한 업적 중 하나로 남게 된다.


테오도시우스 성벽(Theodosius Suru)은 해자를 갖추고 있으며, 해자 뒤의 흉벽과 너비 2미터 높이 5미터인 내성벽,
너비 5미터 높이 12미터인 외성벽의 삼중 구조로 이루어져 있었다.


특히 내성벽과 외성벽에는 각각 96개 씩의 망루가 설치되어 있어 적을 견제하기에 용이했다.
이 성벽은 콘스탄티노폴리스 전체를 감싸고 있었는데, 육로에 면한 6km정도만이 앞서 설명한 구조로 되어 있었고'
해안가의 성벽은 보통의 단일 구조로 되어 있었다.


성벽의 위력은 매우 강력해서 제국이 외세의 침략을 받아 수도 면전까지 영토가 유린되었다 해도
이 성벽을 넘어 수도를 점령할 수 있었던 군대는 14세기까지 아무도 없었다.


1453년 투르크군도 15만에 달하는 대군을 몰고 왔으나 성내의 7천 남짓한 군대를 상대로 한 달 반 가량을 고전해야 했으며,
간신히 넘어 제도를 장악하긴 했으나 그마저도 성벽을 넘어온 것이 아닌 다른 이유로 가능했다.


테오도시우스 성벽(Theodosius Suru) 지도


톱카프 궁전 가장 안쪽에서 내려다보이는 성벽으로, 413년 비잔틴 황제였던 테오도시우스가 세웠다.
95개의 탑이 있는 성벽은 이중으로 되어 있는데,
바깥쪽 성벽의 높이는 10m, 두께는 5m로 튼튼하게 지어졌으며 구시가지를 감싸고 있다.


테오도시우스 성벽(Theodosius Suru) 단면도


테오도시우스 성벽은 3중 성벽으로 콘스탄티노폴리스 서쪽으로는 마르마라해부터
골든 혼(콘스탄티노폴리스의 내항)까지 이어진 육중한 성벽이다.


이 성벽 건설의 결과 과거 콘스탄티누스 대제때 건설한 성벽으로 방어할 수 없었던
넓어진 시가지를 방어할 수 있게 되어 더욱 난공불락의 요새가 되었다.


테오도시우스 성벽(Theodosius Suru) 조감도


성의 건설 년도를 기준으로 볼 때 가히 세계 역사상 최고의 요새라 할 수 있는 성벽이라 하겠다.
이렇게 건설된 성벽 방위력은 매우 강력해서 동로마 제국이 약화되어 수도가 침략을 받았을 때조차
정공법으로 이 성벽을 넘어 수도를 점령할 수 있었던 군대는 14세기까지 아무도 없었다.


바다와 맞닿아 있는 테오도시우스 성벽(Theodosius Suru)


이 성벽은 그 유명한 훈족의 아틸라가 성벽만 보고서는 공략할 엄두를 내지 못한 채 퇴각하게 만들었고,
수도를 포위해 쳐들어온 아랍 군대를 모조리 토양의 양분으로 만드는 등 여러 위대한 업적을 쌓았다.


그러나 영원히 적의 침입을 허락하지 않을 것만 같았던 이 성벽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두 대륙에 걸친 신흥 강국의 새로운 수도로 삼고자 했던
21살의 젊은 술탄 마흐메트 2세의 야심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고,
1453년 4월5일부터 시작된 대 공방전 끝에 마침내 5월 29일 결국 콘스탄티노플도 함락,
2천 년 역사의 로마 제국은 멸망에 이르고 만다.


콘스탄티노플을 둘러싸고 있는 테오도시우스 성벽(Theodosius Suru)


이스탄불 고고학 박물관에 가면 윗 이미지 아래와 같이 1453년 콘스탄티노플 공방전에서 오스만 제국의 해군이
골든혼으로 진입하지 못하도록 테오도시우스 성벽의 외벽(왼쪽: 오늘날 구시가지)과
골든혼 맞은편에 있는 성벽 (오른쪽: 오늘날의 신시가지) 사이를 바닷속으로 가로막았던 쇠사슬이 전시되어 있다.


이는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께서 울돌목에서 300 여척의 왜선을 격파할 때 사용했던 전법이랑 비슷한 거였다.
전쟁 당시 비쟌틴 제국의 군대는 불과 7천명 정도였고 오스만 군대는 8만명 정도였다고 한다.


오늘날 이스탄불의 구시가지와 신시가지를 가르는 골든혼 방어가 중요했던 이유는
외부로부터 전쟁물자를 조달하고 구원군을 요청할 때 이 골든혼 안쪽에 있는 비쟌틴 해군이 배의 숫자는 많았지만
상대적으로 해전에 약한 오스만 해군의 해안 봉세를 뚫고 밖으로 나갔다 들어올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기 때문이었다.


반면에 만약 오스만 해군이 이 골든혼 안쪽으로 진입하게 된다면,

콘스탄티노플은 그야말로 고립무원에 빠지게 된다.

콘스탄티노플을 둘러싸고 있는 테오도시우스 성벽과 세계 전쟁사에 남을 골든혼 전투 장면도


파랑색 배는 오스만 제국 해군의 함선이고, 빨강색은 비쟌틴 제국 (동로마 제국)의 함선이다.
골든혼 입구에 그어진 선이 바로 바닷속 쇠사슬이다.


오스만 해군이 이 쇠사슬을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통과할 수 없다고 판단한 술탄 마흐메트2세는
오늘날 갈라타 타워 뒷쪽의 나즈막한 언덕 위로 함선을 끌어올려 골든혼 진입에 성공하고
비쟌틴 제국 해군을 궤멸시킴으로써 콘스탄티노플을 완전히 봉쇄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이어진 최후의 공성전에서 승리하여 서로마 시대부터 이어진 2,000년 역사의 로마 제국은

역사 속에서 사라지게 된다.

오늘날 비교적 원형에 가깝게 남아 있는 테오도시우스 성벽(Theodosius Suru)


세워졌을 당시에는 성벽의 총 길이를 합치면 22.5km에 이를 정도로 큰 규모였다.
하지만 지진과 여러 가지 요인으로 인해 상당 부분 파손되어 7~8세기에 페르시아 군과 아랍 군,
그리고 9세기에 불가리아 군과 러시아 군으로부터 콘스탄티노플을 지켰다는 것이 상상이 되지 않을 정도다.


1453년에도 테오도시우스의 성벽은 투르크 군으로부터 도시를 지켜냈으며,
당시 공격에 의해 단지 금만 갔을 정도로 튼튼했다.


오늘날 비교적 원형에 가깝게 남아 있는 테오도시우스 성벽(Theodosius Suru)


성벽이 견고함에도 불구하고 콘스탄티노플은 함락되었고, 투르크에 의해 점령되었다.
투르크의 공격이 있을 때, 한 병사가 실수로 쪽문(크실로케르코스 문)을 닫지 않는 바람에
도시가 손쉽게 투르크의 손에 넘어가게 되었다고 한다.


그 후 오랜 시간 방치되었던 테오도시우스의 성벽은 현재도 터키 정부의 허술한 관리로 인해 많은 부분이 사라지고 있다.
유네스코에서 많은 지원을 하고 있지만, 아쉽게도 그나마 상태가 좋은 곳이 바로
톱카프 궁전 안쪽에서 볼 수 있는 레기움 문이나 메트로 톱카프 역 근처의 성벽이다.


바닷속 쇠사슬로 가로막힌 골든혼에 진입하기 위해 야산 위로 오스만 해군의 함선을 끌어 올리는 장면 (상상도)


테오도시우스 1세의 죽음으로 로마 제국은 다시 반으로 갈라졌고 동로마는

열여덟 살이 채 못 된 큰아들 아르카디우스, 서로마는 겨우 열 살인 작은 아들 호노리우스가 통치하게 되었다.


Panorama 1453 박물관에 극사실화로 돔 천정에 그려진 전쟁터 장면


테오도시우스 1세는 세상을 뜨기 전에

어린 두 아들의 후견인 역할을 해줄 인물들을 지명하는 승계 작업을 해놓았다.


아르카디우스의 후견인은 동로마 근위대장 루피누스, 호노리우스의 후견인은
반달족 지도자의 아들이며 이탈리아의 군사령관 스틸리코였다.
이 두 후견인은 자신들의 지위를 이용하여 부와 권력을 키웠으며 제국에 손해를 끼쳤다.

Panorama 1453 박물관에 극사실화로 돔 천정에 그려진 전쟁터 장면


스틸리코는 398년 호노리우스를 자신의 딸 마리아와 혼인시켜 세력을 더욱 공고히 했다.
10년 후 마리아가 죽자 그는 호노리우스를 마리아의 동생 테르만티아와 재혼시켰다.


Panorama 1453 박물관에 극사실화로 돔 천정에 그려진 전쟁터 장면


한편 루피누스 역시 황제의 인척이 되려는 야심을 품고

자신의 딸을 아르카디우스에게 시집 보내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나약한 어린 황제에 대한 지배력을 잃고 싶지 않았던 환관 출신의 시종장
에우트로피우스의 계략으로 그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다.


Panorama 1453 박물관에 극사실화로 돔 천정에 그려진 전쟁터 장면


루피누스가 안티오크에 가 있는 틈을 노려 에우트로피우스가 황제에게

에우독시아라는 아름다운 처녀의 초상화를 보여준 것이다.


에우독시아는 프랑크족 장군과 로마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콘스탄티노플의 귀족 집안에서 성장했다.


Panorama 1453 박물관에 극사실화로 돔 천정에 그려진 전쟁터 장면


아르카디우스 황제는 에우독시아와 사랑에 빠져 그녀를 신부감으로 선택했고
루피누스가 돌아오기 전에 결혼 준비가 모두 끝났다.


대포와 포신은 그림이 아니라 실제 장면을 묘사한 조형물이다.


에우독시아는 아르카디우스가 동로마 황제 자리에 오른 지 석 달 만인 395년 4월 27일에 그와 혼인했다.

401년 4월 10일 콘스탄티노플에서 탄생한 이 아들이 테오도시우스 2세이다.


포신과 대포알은 그림이 아니라 당시에 사용했던 실제 무기 조형물이다.


테오도시우스는 탄생 이듬해 1월 10일 공동 황제로 임명되었으며

그 직후에 이루어진 그의 세례식은 국가적인 축제였다.


이에 대해 가자(현재 이집트와 이스라엘 사이에 위치한 지중해 주변의 도시)의

프로코피우스 주교는 이렇게 기록했다.


“어린 테오도시우스는 왕자로 태어났으며 탄생과 동시에 황제로 선포되었다.
도시 전체가 축제 분위기였고 이 기쁜 소식을 알리기 위해

제국의 도시들에 황제의 하사품과 선물을 든 사절단이 파견되었다.”


대포알과 전쟁물품 등은 그림이 아니라 당시에 사용했던 실제 무기 조형물이다.


당시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는 요하네스 크리소스토무스로 설교의 달인이라

‘황금의 입’을 지닌 성인으로 불렸다.


그는 설교 중에 자신의 헌신적인 추종자들인 보통 시민들의 가난함에 대조되는 궁전의 사치를 비판했다.
또 극장 무대에 올려지는 외설적인 공연들도 비난했다.



동로마 군대는 가이나스의 지휘 아래 있었는데 가이나스는

고트족 출신으로 황실 군대의 장군 자리에까지 오른 인물이었다.


그는 지휘권을 잡자마자 군대를 이끌고 콘스탄티노플로 향했으며

395년 11월 27일 헤브도몬에 도착했다.


가이나스는 그곳에서 아르카디우스와 루피누스를 만났는데

루피누스는 군대가 자신을 공동 황제로 추대할 것을 바란 듯했다.


하지만 병사들은 루피누스를 죽였으며 조시무스에 따르면

그 일은 스틸리코가 계획하고 가이나스가 실행에 옮긴 것이었다.


가이나스는 400년 초 고트족 군대를 이끌고 콘스탄티노플로 들어가 그곳을 장악했다.
그러나 조시무스에 의하면 콘스탄티노플 시민들이 폭동을 일으켜 고트족 7,000명을 죽였으며
가이나스는 북쪽의 트라키아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결국 훈족의 왕 울딘에게 체포되었고 울딘은 400년 12월 23일에 그를 죽이고
그의 목을 아르카디우스에게 선물로 보냈다.


에우트로피우스가 399년 죄인으로 몰려 처형당하자 황후 에우독시아가 막후의 실력자로 부상했으며
400년 1월 9일 아르카디우스는 그녀에게 아우구스타(여제)의 칭호를 내렸는데
콘스탄티노플 건립 이후 첫 두 세기 동안 아우구스타의 칭호가 내려진 건 좀처럼 없었던 일이었다.



에우독시아는 남편 아르카디우스에 대한 존경심이 부족했던 듯하며 따로 몇 명의 애인이 있었고
특히 황제의 수석 고문 요하네스의 경우 테오도시우스의 진짜 아버지라는 소문까지 돌았다.


에우독시아의 잘못된 행실은 결국 황실의 부도덕성에 대해

비판하는 설교를 하던 크리소스토무스와의 불화로 이어졌다.



404년 6월 20일 둘 사이의 알력이 절정에 이르자 아르카디우스는 크리소스토무스를
폰투스(현재 터키 북동부 흑해 연안에 위치한 도시)로 추방했으며

크리소스토무스는 그곳에서 3년 후 세상을 떠났다.


사랑하는 총대주교가 추방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콘스탄티노플 주민들은
대궁전 문에 모여 폭동을 일으켰으며 불을 질러 원로원과 하기아 소피아를 파괴했다.



크리소스토무스가 추방된 후 에우독시아는 승리의 기쁨을 오래 누리지 못하고
404년 10월 6일 출산 중에 죽었으며 성사도 교회에 묻혔다.


콘스탄티노플 주민들은 에우독시아의 때 이른 죽음을 콘스탄티노플의 위대한 성인 중 하나로 받들어지던
요하네스 크리소스토무스를 무자비하게 내친 것에 대한 하늘의 벌로 해석했다.



아르카디우스는 에우독시아보다 3년 반을 더 살고 408년 5월 1일 서른 한 살의 나이로 세상을 하직했으며
성사도 교회의 아내 옆에서 영면에 들었다.



일곱 살의 테오도시우스가 아버지 아르카디우스의 뒤를 이어 황제 자리에 앉았다.
재위에 오른 뒤 첫 6년 동안 테오도시우스 2세는 죽은 아버지가 가장 신임했던 동로마 근위대장

안테미우스를 후견인으로 삼았으며 안테미우스는 414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섭정으로 제국을 통치했다.


테오도시우스 2세 두상


테오도시우스 2세의 섭정 기간 동안 404년에 화재로 소실된 하기아 소피아를 대신할 대성당이 건축되었고
이 건축물은 현재 테오도시우스 교회라고 불린다.


테오도시우스 성벽(Theodosius Suru)


안테미우스가 죽자 섭정의 역할은 황제의 살아남은 세 누이 중 제일 맏이인 풀케리아 공주에게 돌아갔는데
그녀는 당시 15세로 황제보다 겨우 두 살 위였다.

테오도시우스 성벽(Theodosius Suru)


풀케리아는 아우구스타의 칭호를 받고 테오도시우스가 성년에 이른 416년까지 섭정을 맡았다.
그리고 그 이후에도 10년동안 계속 막후 실력자로 행세했다.


테오도시우스 성벽(Theodosius Suru) 출입문


풀케리아는 16세에 순결 서약을 하였으며 대궁전의 그녀의 처소에는 남자의 출입이 금지되어
그녀의 섭정 기간 동안 궁정은 수녀원을 방불케 했다고 한다.


그녀는 동생의 교육을 감독했으며 누나의 영향을 받은 테오도시우스는 평생 신학 뿐 아니라
과학에도 흥미를 갖게 되었고 정사보다 학문에 더 뜻을 두게 되었다.


테오도시우스 성벽(Theodosius Suru)


테오도시우스는 여가 시간이면 글쓰기에 매달렸고 필체가 아름다워 역사가들 사이에서
‘달필가 테오도시우스’로 불리기도 했다.


그는 체구가 작아서 성인이 되어서도 ‘작은 테오도시우스’라고 불렸으며
연대기 작가 요하네스 안티오케누스는 “그는 궁전에서 갇혀 지냈기에 크게 자랄 수가 없었다.”고 썼다.

테오도시우스 성벽(Theodosius Suru)


테오도시우스는 때가 되자 누나 풀케리아에게 마땅한 신부감을 구해달라고 부탁했다.
풀케리아가 찾아낸 신부감은 아테네 철학자 레온티우스의 딸인 아름답고 학식도 높은 아테나이스였다.


아테나이스는 혼인하면서 기독교적인 이름인 에우도키아로 개명했으며
테오도시우스에게 아들 하나와 딸 하나를 낳아주었다.


아들 아르카디우스는 어린 나이에 죽었고 딸 리키니아 에우독시아는 열다섯 살 때
서로마 황제 발렌티니아누스 3세와 혼인했다.


테오도시우스 성벽(Theodosius Suru)


발렌티니아누스는 호노리우스 사후 2년 만인 425년

여섯 살의 나이로 황제 자리에 오른 인물이었다.


그는 455년까지 서로마를 통치했는데 그 대부분의 기간 동안
막후에 그의 어머니이자 테오도시우스1세의 딸 아우구스타 갈라 플라키디아가 있었다.


그녀는 아들이 황제가 되자 라벤나(이탈리아 북동부의 도시)로 옮겼으나

콘스탄티노플에 궁전을 그대로 갖고 있었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테오도시우스 성벽


새 성벽은 콘스탄티누스가 쌓은 성벽보다 트라키아 안으로 약 1.5킬로미터 정도 더 들어갔으며
마르마라(흑해와 에게 해를 잇는 바다. 흑해 쪽은 보스포러스 해협, 에게 해쪽은 다다넬즈 해협을 통해 연결되었다.)부터
골든혼(세계 각지의 귀한 물건들이 집결하는 항구이며 뿔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까지 6킬로미터 이상을 뻗어 나갔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테오도시우스 성벽


성벽 축조의 첫 단계인 성탑이 군데군데 있는 외겹의 벽은 근위대장 안테미우스의 지휘 아래 413년에 완성되었다.
그러나 447년 일련의 대지진이 일어나 성벽의 많은 부분이 파괴되고 57개의 성탑이 무너졌다.


공교롭게도 때맞추어 훈족 아틸라 왕이 황금군단을 이끌고 콘스탄티노플을 치러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하여 동로마의 새 근위대장 콘스탄티누스의 지휘에 따라 즉시 성벽의 재건 작업이 시작되었다.


히포드롬의 모든 정파들이 작업에 참여했고 두 달도 안 되어 성벽은 전보다 더 튼튼하게 재건되어
결국 아틸라는 로마 제국의 서쪽 지역으로 공격 방향을 바꾸어야만 했다.

테오도시우스 성벽(Theodosius Suru)


이 시기에 서로마와 동로마는 그 어느 때보다 유대가 돈독했는데 바로 437년에
발렌티니아누스가 콘스탄티노플로 와서 테오도시우스와 에우도키아의 딸 리키니아 에우독시아와 혼인했기 때문이다.


당시 신랑의 나이는 열여덟, 신부가 열다섯 살이었다.
딸 리키니아 에우독시아를 낳고 딸이 황후가 되면 예루살렘으로 성지 순례를 떠나겠다고 서약했던

에우도키아는 이듬해에 서약을 실행에 옮겼다.


테오도시우스 성벽(Theodosius Suru)


이 시대의 새로운 종교적 논쟁은 예수의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에 관한 것이었다.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네스토리우스의 추종자들은 예수에게 그 두 가지 본질이 공존하며
성모 마리아는 신의 어머니가 아니라 단지 예수의 어머니라고 믿었다.

테오도시우스 성벽(Theodosius Suru)


431년 6월 7일 에페소스(현재 터키 서부 에게해 연안의 도시 에페스)에서 열린 제3차 공의회에서
네스토리우스파는 이단으로 결정되었으며 그 결과에 따라 테오도시우스는 네스토리우스를 이집트로 추방했다.
네스토리우스는 452년경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테오도시우스 성벽(Theodosius Suru)


황후 에우도키아는 439년에 예루살렘에서 돌아왔으나 그후 얼마 안 되어 테오도시우스 황제에게서 버림받았다.
황제가 그녀와 자신의 절친한 친구 파울리누스가 간통을 저질렀다고 의심하게 된 것이다.


그 이야기는 자세히 알려져 있진 않지만 파울리누스는 443년에 처형당하고
그 이듬해에 에우도키아는 예루살렘으로 떠나 다시는 돌아오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테오도시우스 성벽(Theodosius Suru)


테오도시우스는 재위 말기가 그리 평안하지 못했다.
누나 풀케리아와도 사이가 멀어져서 그녀는 대궁전을 떠나 헤브도몬에서 살게 되었다.


당대의 연대기 작가들은 황제가 에우도키아와 풀케리아와 단절된 것을 재위 말기에
황제에게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 환관 크리사푸스 탓으로 보았다.


그러던 중 447년에 일련의 지진이 도시를 강타하여 테오도시우스 성벽이 무너지자
많은 이들이 세상의 종말이 왔다고 생각했다.

테오도시우스 성벽(Theodosius Suru)


이를 계기로 테오도시우스와 풀케리아는 화해했고 풀케리아는 프로클루스 총대주교와 함께
콘스탄티노플 주민들을 이끌고 지진을 막아달라는 기도를 올렸다.


이윽고 땅의 요동이 멈추자 모두들 감사의 찬송가를 불렀다.
그때 특별히 작곡된 예수를 찬양하는 성가도 있었는데 그 노래는 지금도 그리스정교회 예배식에서 불리고 있다.

테오도시우스 성벽(Theodosius Suru)


테오도시우스 2세의 군대는 아리우스주의를 신봉하는 외국 용병들의 수가 지배적이었는데
특히 고트족과 알라니족이 주류를 이루었다.


그의 재위 마지막 30년간 그의 군대를 이끈 군사령관은 알라니족 아스파르 장군으로
423년에 이탈리아에서 요하네스가 일으킨 폭동을 진압했고,
431년에는 함대를 이끌고 반달족과 싸웠으며, 441년에는 훈족 왕 아틸라와 전투를 벌였다.

테오도시우스 성벽(Theodosius Suru)


아스파르는 막강한 권력을 지녔지만 아리우스주의를 신봉하는 야만족이었기에 아우구스투스 자리에 오를 수 없었으므로
테오도시우스에게 위협적인 존재가 되지 못했다.


그리하여 아스파르는 자연스럽게 풀케리아와 연합했고
테오도시우스 재위 말기에 두 사람은 콘스탄티노플의 궁정에서 힘의 균형을 이루었다.

테오도시우스 성벽(Theodosius Suru)


에페소스에서 열린 공의회는 테오도시우스 재위기의 마지막 사건으로 남았다.
말을 타고 콘스탄티노플을 벗어나 리쿠스 강을 따라 달리던 중 낙마한 테오도시우스가
450년 7월 28일 세상을 하직한 것이다.


그는 성사도 교회에 묻혔고 황후 에우도키아는 10년 후 예루살렘의 성 스테파누스 교회에 안장되어
부부는 죽어서도 영영 만나지 못했다.

테오도시우스 성벽(Theodosius Suru)


오늘날 테오도시우스 2세는 천년 이상 콘스탄티노플을 지킨 테오도시우스 성벽으로 그 이름이 기억되고 있다.
그 성벽은 이제 폐허만 남았지만 여전히 장엄함을 간직하고 있으며
끝도 없이 이어진 성탑들과 흉벽들은 비잔티움의 영원한 상징 가운데 하나이다.



발렌스 수도교(Valens Aqueduct)

발렌스 수도교(Valens Aqueduct)


터키어로는 '회색 매의 아치'라는 뜻의 'Bozdoğan Kemeri'라고 한다.
구시가지에 있으며, 378년 로마제국의 발렌스 황제 시대에 지어졌다.


오스만투르크 시대까지 주변에 있는 물을 끌어다가 궁전에 물을 공급하는 역할을 했다고 한다.

처음 세워졌을 때는 길이가 1km나 되었지만 지진이나 비바람 등으로 무너져 내리고 지금은 800m 정도만 남아 있다.
높이가 26m로 규모가 매우 크며 현재는 사용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 올라가는 것도 금지되고 있다.


발렌스 수도교(Valens Aqueduct) 안내판


발렌스 수도교(Valens Aqueduct)
물을 궁전으로 끌어다줬던 발렌스 수도교. 도로와 공원을 가로지르는 큰 규모의 발렌스 수도교


발렌스 수도교(Valens Aqueduct)
가까이서 보면 26m의 높이로 상당히 높다. 차들이 아치문 사이로 지나다니는게 신기하다.


발렌스 수도교(Valens Aqueduct)


발렌스 수도교(Valens Aqueduct)


발렌스 수도교(Valens Aqueduct)


발렌스 수도교(Valens Aqueduct)



참조 ; https://trustyyyy.blog.me/221374455884
http://blog.daum.net/woodbine/11784509
https://blog.naver.com/gampo20/220899731584
https://blog.naver.com/kehsara2/221295126880
https://blog.naver.com/ilsong1226/221350914898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87XX41000031
http://cafe.daum.net/shogun/Mq7W/410?q=%ED%85%8C%EC%98%A4%EB%8F%84%EC%8B%9C%EC%9A%B0%EC%8A%A4%EC%9D%98+%EC%84%B1%EB%B2%BD&re=1
http://cafe.daum.net/callalilies/Cn1c/76?q=%ED%85%8C%EC%98%A4%EB%8F%84%EC%8B%9C%EC%9A%B0%EC%8A%A4%EC%9D%98+%EC%84%B1%EB%B2%BD&re=1
https://ko.wikipedia.org/wiki/%ED%85%8C%EC%98%A4%EB%8F%84%EC%8B%9C%EC%9A%B0%EC%8A%A4_%EC%84%B1%EB%B2%BD
https://www.tripadvisor.co.kr/Attraction_Review-g293974-d2161587-Reviews-Walls_of_Constantinople_Istanbul_City_Walls-Istanbul.html
https://www.tripadvisor.co.kr/Attraction_Review-g293974-d2161587-Reviews-Walls_of_Constantinople_Istanbul_City_Walls-Istanbul.html#photos;aggregationId=101&albumid=101&filter=7&ff=340729316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279384&cid=40942&categoryId=33739

https://blog.naver.com/njung425/220981784997




예레바탄 지하 궁전 (Yerebatan Basilica Cistern)


이스탄불에서는 예레바탄 사라이(Yerebatan Sarnıcı)라고 한다.

예레바탄 지하 궁전은 6세기 비잔틴제국의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건설했다.


이스탄불 구시가의 중심인 성 소피아 성당 인근에 있다.
궁전으로 불리지만 실제 용도는 지하 저수지였다.


건설에만 무려 7,000여 명의 노예가 동원되었다고 전해지는 이 저수지는
길이 143m, 폭 65m, 높이 9m에 달할 정도로 어마어마한 크기를 자랑한다.
최대 8만 톤의 물을 저장할 수 있는 규모다.


전쟁이 끊이지 않았던 이스탄불은 안정적인 물 공급이 중요했다.
그래서 도시 곳곳에 물을 저장해 둘 저수지가 많이 지어졌는데,
예레바탄은 그중 규모가 가장 컸을 뿐만 아니라 매우 아름다웠다고 한다.


저수지의 물은 이스탄불에서 북쪽으로 약 20km 떨어진 베오그라드 숲에서 끌어와
궁전과 성당 등으로 공급되었다.


저수지로 사용된 이곳이 지하 궁전이라 불리게 된 것은 화려한 문양이 새겨진 대리석 기둥 때문이다.
저수지 천장을 지탱하고 있는 아름다운 기둥 336개는 각지의 신전에서 운반해 온 것들이다.
저마다 다양한 문양이 새겨진 대리석 기둥들이 지하에 빽빽이 늘어선 모습이 신비롭다.


1885년에는 저수지 보수 공사를 거쳐 조명과 음향 시설을 설치하고 관람객을 위한 보도가 조성되었다.
레스토랑, 카페, 기념품 가게 등이 들어서고 때때로 공연도 열려 현지인과 관광객 모두 즐겨 찾는 명소로 자리 잡았다.


보수 공사 당시 바닥에 쌓인 진흙을 파던 중 저수지의 기둥 받침대로 추정되는 ‘메두사의 머리’ 조각 2개가 발견되기도 했다.
어디에서 운반된 것이며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메두사의 머리 하나가 거꾸로 놓인 채 발견된 이유는

메두사의 눈과 마주치면 돌이 되어 버린다는 전설 때문이라고 한다.
메두사의 머리는 지하 저수지의 가장 안쪽에 있다.


예레바탄 사라이(Yerebatan Sarnıcı) 구글 지도


예레바탄 사라이(Yerebatan Sarnıcı)는 성 소피아 성당에서 맞은편 방향으로 디반 욜루의 맨 위쪽 부근에 위치해 있다.
지하 궁전은 1987년에 수백 년 동안 쌓인 진흙과 폐물을 제거하는 작업을 벌이면서 복원되었다.


본래 황실 수도 공급을 원활히 하기 위한 목적으로 콘스탄티누스 대제 때에 공사를 시작하여
유스티니아누스 1세 때인 532년까지 진행되었다고 한다.
지하 궁전의 위치는 본래 황궁에서 가까운 곳에 위치했었지만 오스만 제국 시대에 폐쇄되었다.


예레바탄 사라이(지하 궁전, Yerebatan Sarayı) 입구


예레바탄 사라이는 ‘땅에 가라앉은 궁전’이란 뜻이다.
바실리카 시스턴(Basilica Cistern)이라는 이름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지하 궁전은 현존하는 동로마 제국의 저수지 가운데서도 이곳이 가장 최대라고 한다.
오늘날에는 이스탄불 역사지구의 한 축으로서 세계유산에 등록되어 있으며, 일반에 공개하고 있다.


입구에 들어서면 계단이 보인다.


이곳을 내려가면 코린트양식 등 기둥들 336개가 늘어서 있는 지하 공간을 볼 수 있는데,
이 공간 자체가 신비로운 모습이어서 궁전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기둥에는 다양한 문양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 각 기둥이 각기 다른 신전 등에서 운반되어 왔기 때문이다.
당시로는 최단 기간인 2년 만에 완성한 지하 건물로도 유명하다.

이곳에는 수심 50cm~1m 정도의 물이 담겨 있다.


이 위로 다리가 놓여 있어 관광객들이 구경할 수 있다.
대단히 인상적이기 때문에 영화 세트장으로 쓰이기도 하고,

이스탄불 예술 비엔날레 기간 동안에는 시청각 시설로 쓰이기도 한다.

이곳으로부터 19km 떨어진 벨그라드(Belgrad) 초원에서 발렌스 수도교를 거쳐 이곳까지 물을 끌어왔다.


당시 시민들의 생활용수를 저장하기 위해 사용했으며,

무려 8만 톤의 물을 저장할 수 있는 이스탄불 최대 규모의 저수지였다.
일상적인 생활용수 공급 이외에도 포위 공격에 대비해서 만들었다고 한다.

바닥에는 물고기들이 돌아다니고 동전들이 많이 잠겨 있다.


코린트식 배흘림기둥


코린트식 기둥은 주두가 휘감아도는 여러 줄의 아칸서스잎과

아바쿠스 가장자리 아래쪽의 작은 나선형 소용돌이 무늬로 이루어진다.

코린트식 기둥과 주두와 천정.


코린트식 배흘림기둥


저수지로 사용된 이곳이 지하 궁전이라 불리게 된 것은 화려한 문양이 새겨진 코린트식 대리석 기둥 때문이다.


건설에만 무려 7,000여 명의 노예가 동원되었다고 전해진다.
이 저수지는 길이 143m, 폭 65m, 높이 9m에 달할 정도로 어마어마한 크기를 자랑한다.


저마다 다양한 문양이 새겨진 대리석 기둥들이 지하에 빽빽이 늘어선 모습이 신비롭다.


여기에서는 도리스양식, 투스칸양식 등 다양한 기둥 양식이 보인다.

저수지 천장을 지탱하고 있는 아름다운 기둥 336개는 각지의 신전에서 운반해 온 것들이다.

이름하여 '눈물을 흘리는 기둥'


2006. 3. 13. 예레바탄 사라이(Yerebatan Sarnıcı) 방문 기념 인증샷.


눈물을 흘리는 기둥


소원 기둥

실제로 눈물이 줄줄 흐르고 있는 장면이란다.


이곳 구멍에 엄지손가락을 집어 넣고 손바닥을 기둥 바닥에 댄 채,

소원을 빌면서 손가락이 떨어지지 않게 한바퀴를 돌리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성 소피아 성당에서 본 소원의 기둥이 생각난다.


2006. 3. 13. 눈물을 흘리는 기둥 앞에서도 인증샷


사진 왼쪽으로 남자 분이 손바닥을 기둥에 대고 엄지손가락을 중심으로 한바퀴 돌리는 장면과

이 장면을 카메라로 담는 분이 살짝 보인다.

모쪼록 소원이 이루어지시기를~

옆으로 놓인‘메두사의 머리’ 조각 기둥


‘메두사의 머리’ 조각 기둥은 지하 저수지의 가장 안쪽에 있다.

보수 공사 당시 바닥에 쌓인 진흙을 파던 중 저수지의 기둥 받침대로 추정되는 ‘메두사의 머리’ 조각 2개가 발견되었다.

과거 신전을 화려하게 장식했을 메두사 조각상이 지하에서 수조를 떠받치는 기둥 받침대로 변신했다.
이 조각상이 어디에서 운반된 것이며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아직도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옆으로 놓인 ‘메두사의 머리’ 조각 기둥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메두사는 괴물이기 이전에
화를 잘내기 좋아하는 그리스 신들에 의해 저주를 받게 된 수많은 불쌍한 희생물 중 한 명이다.


괴물 메두사는 고르곤 세 자매 중의 1명을 일컫는 말이다.
원래는 바다의 신 포세이돈이 한눈에 반할 정도로 출중한 미모의 여인이었으나
포세이돈과 사랑을 나눈 장소가 하필이면 근엄하기로 유명한 아테네의 신전이었다.


이들의 정사장면을 우연히 보게된 아테네 여신은 신성한 자신의 신전에서 음란한 행동을 한 메두사에 격분해
그녀에게 저주를 내려 머리 한 올 한 올을 뱀으로 변하게 했다.


또 사람들이 한 번이라도 그녀의 얼굴을 보는 즉시, 돌이 되는 흉측한 괴물의 모습으로 만들었다.
더불어 메두사의 자매들도 괴물로 만들었는데 아이러니한 것은 두 자매에게는 흉측한 모습과 함께 불사의 생명을 주었지만,
유독 메두사에게만은 불사의 생명을 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옆으로 놓인 ‘메두사의 머리’ 조각 기둥


결국 불사의 생명을 얻지 못한 메두사는 그리스 신화 속 영웅 페르세우스에 의해 목이 잘린 채
또다른 그리스 신화의 영웅만들기 내지는 아테네 여신의 방패 장식품으로 이용당한 불쌍한 희생양이었다.


그러나 메두사 베기에 성공해 영웅이 된 페르세우스 또한
아폴로 신탁에 의해 할아버지를 살해하는 비극의 주인공이 될 운명을 가지고 태어났다.


신탁 결과를 무서워한 아크리시오스왕은 딸에게 자식이 생기지 않도록 하기 위해 청동 밀실에 딸을 가두었는데
이전부터 다나에의 미모에 정신이 팔린 제우스 신이 황금의 비로 변신하여 청동밀실 지붕으로 스며들어가 다나에를 임신시켰다.


놀란 왕은 그 모자를 방주에 실어 바다에 떠내려 보냈는데
그 방주가 정착한 세리포스의 왕의 명령으로 실시한 여러 가지 모험 중 하나가 바로 메두사 머리를 베어오는 것이었다.


모험은 성공적으로 끝나 영웅이 되어 다시 고향에 돌아오려던 페르세우스는 때마침 열리고 있던 경기대회에서 원반을 던졌는데,
그 원반이 우연하게도 페르세우스가 온다는 소문에 피신해 왔던 할아버지 아크리시오스 왕에게 맞아
왕이 목숨을 잃음으로써 아폴로 신탁은 잔인하게 실현되었다.

수난받는 ‘메두사의 머리 ’ 조각 기둥을 배경으로 인증샷.


거꾸로 놓인 ‘메두사의 머리’ 조각 기둥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신들은 너무나 인간적이기에 화도 잘내서 후회할 짓들도 상당히 많이 했다.
그리스인들은 이러한 신들을 친근하고도 두려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신들의 노여움에 의해 언제든지 신의 저주를 받을지도 모르니 말이다.


이처럼 일반인들이 존경과 두려움을 동시에 갖고 있는 신화 속 주인공들은
그리스 시절부터 부적의 의미처럼 건축물에 조각되어지곤 했는데
메두사의 경우도 방패나 문짝, 사원 꼭대기 등에 새겨 넣어 부적이나 제의적인 마스크로 자주 이용했다.


거꾸로 놓인 ‘메두사의 머리’ 조각 기둥


지하저수조 물 속에 거꾸로 세워져 있는 메두사 머리를 보면

이런 물 저장소에 처박히게 된 사연이 갑자기 궁금해진다.


일설에는 콘스탄티노플 시민들이 메두사의 상징을 너무 무서워한 나머지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해

지하 저수조에 거꾸로 파묻었다고도 하고, 식수로 사용되는 물 저장소에

사악한 기운이 들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부적으로 사용했다고도 한다.


그러나 오히려 기독교라는 새로운 시대로 접어들면서 고대 신으로서의 역할과 권위가

사라진 것을 상징하는 게 아닐까 하는 분석이 더 설득력 있어 보인다.

거꾸로 놓인‘메두사의 머리’ 조각 기둥


지하물 저장고인 예레바탄 사라이(Yerebatan Sarnıcı)는 532년에  유스티니아누스 비잔틴제국의 황제가 만들게 한다.
그 이유는 그 당시 콘스탄티노플은 물은 많지만 정작 사람들이 마실물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도를 이탈리아 로마에서 이곳으로 옮긴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먼저 수도교를  만들라고 지시를 하였고
발렌스 황제 때 수도교가 완공이 되었다.


그리고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물탱크를 만들었는데 그것이 지금의 "예레바탄 사라이"이다. 
이것을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확장하여 다시 탄생하였다.


거꾸로 놓인 ‘메두사의 머리’ 조각 기둥


지하물 저장고를 만들때 수많은 기둥이 필요하게 되었는데 이 많은 기둥을 어디에서 가져올까 생각하다가 
에게해 지방에 있는 그리스 로마 신전에서 가져오게 되었다.

그러던 중 메두사 머리가 옮겨지게 되었는데  메두사는 원래 신전이 있는 도시의 어귀에 세워졌던 기둥이다.


우리나라에서도 동네 어귀에 장승을 세워

잡신들과 나쁜 기운들이 못 들어오도록 막는 것과 같은 역할을 했다고 생각하면 될 듯.
그래서  그리스 로마 신전에는 메두사를 꼭 부조로 만들어 놓는다고.


결국 이 기둥들은 지하 저수조를 만들려고 제작된 것이 아니라 모두 다른 곳에서 옮겨져 왔다.
따라서 모양이나 두께 둘래 높이가 각각 서로 다르다.


기독교가 313년에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해서 공인이 되었지만

아직 사람들 마음 속에는 그리스 로마의 신화가 남아 있었다.   


이는 우리가 유교를 배우지 않더라도 가슴 깊은 곳에 유교 사상이 배어 있듯이
이 사람들의 가슴 속에는 여전히 그리스 로마의 신화가 남아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그리스 로마 신화의 영향으로 기둥이 짧은 것은 밑둥으로 사용하고
기둥을 가로와 세로로 박아 놓아 부적의 의미로 삼았다고 한다.


거꾸로 놓인 ‘메두사의 머리’  조각 기둥이 1500년 동안 이렇게 놓여있는 까닭을 헤아리며 인증샷.


그리스 사람들 중에는 터키 사람들이 그리스 신전을 파괴해서 탁월한 대리석 예술 작품들을 탈취하고,
그 대리석 예술 작품들로 지하 저수지를 만들면서 의도적으로 고대 그리스의 기운을 눌러 버리겠다는 뜻을 담아
‘메두사의 머리’ 조각을 기둥 받침대로 삼고 바닥으로 눕혀 놓았다면서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역사적 죄악이자 만행의 징표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리스 사람들의 주장과는 별도로 메두사의 머리가 거꾸로 놓인 채 발견된 이유는
메두사의 눈과 마주치면 돌이 되어 버린다는 전설 때문이라고도 한다.


기독교라는 새로운 시대로 접어들면서 고대 신으로서의 역할과 권위가
사라진 것을 상징하는 게 아닐까 하는 견해도 있다.


다른 주장으로는 이곳저곳에서 가져온 부조물들을 짜맞추어 사용하다 보니

높이가 맞지 않아서 어쩔 수 없이 기둥 바닥 받침대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메두사의 머리"여 너는 어찌하여 1500년 동안을 지하저수지에서 이렇게 거꾸로 놓여 있는 거니?

1885년에 저수지 보수 공사를 거쳐 조명과 음향 시설을 설치하고 관람객을 위한 보도가 조성되었다.


레스토랑, 카페, 기념품 가게 등이 들어서고 때때로 공연도 열려 현지인과 관광객 모두 즐겨 찾는 명소로 자리 잡았다.


참고로 서양의 기둥 양식에 대해서는 <그리스기행> 코린토스 고고학 박물관 편에서 자세하게 볼 수 있다.

참조 ; http://blog.daum.net/choemh/16141419


예레바탄 사라이(Yerebatan Sarnıcı) 출구



[터키 여행-이스탄불]예레바탄 지하 저수조



참고 ; http://flyingboat.tistory.com/31
https://ljhoi.blog.me/221363753799

http://blog.daum.net/rollei66/16884606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963598&cid=42864&categoryId=50859
http://cafe.daum.net/mosadongcho41/3Kdz/75?q=%EC%98%88%EB%A0%88%EB%B0%94%ED%83%84+%EC%82%AC%EB%9D%BC%EC%9D%B4&re=1




히포드롬 광장 (Hippodrome Square)과 주변 지도


히포드롬 광장 (Hippodrome Square)


술탄아흐메드 자미의 서쪽에 위치한 히포드롬 광장은 3세기 초에 건설된 원형 경기장 터다.
영화 ‘벤허’의 전차 경주 장면의 배경이 된 곳으로도 유명하다.


203년 로마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가 통치하던 시대에 검투 경기장으로 처음 지어졌다.
이후 10만 명 정도를 수용하는 전차 경기장으로 바뀌었고 비잔틴제국의 중요한 국가행사가 이곳에서 개최되었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 때인 532년, 황제에 대한 불만으로 ‘니카의 난’이 일어나자
폭도들을 진압하고 처형한 비운의 장소이기도 하다.


현재 이스탄불 시민들이 즐겨 찾는 공원으로 변신한 히포드롬 광장에서는 유서 깊은 기둥 3개를 볼 수 있다.
광장 북쪽에 있는 기둥은 이집트 카르나크 아몬 신전에서 가져온 것으로 ‘이집트 오벨리스크’라고 불린다.


이 오벨리스크의 기단에는 경기를 관전하는 테오도시우스 황제의 모습이 조각되어 있고
오벨리스크 건립에 관한 비문도 남아 있다.


광장 북쪽 끝에는 19세기 말 독일 황제 빌헬름 2세가 오스만제국의 술탄 압둘 하미드에게 선물한 분수대가 있다.
오리엔탈 특급 열차로 이스탄불까지 운반되었다고 한다.


광장 한가운데는 큰 뱀들이 서로 엉켜 있는 청동 기둥이 서 있다.
기원전 5세기 페르시아군을 물리친 그리스인들이 제작한 전승기념비다.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그리스 델포이 아폴론 신전에서 가져온 것으로 전해진다.
광장 남쪽의 오벨리스크는 콘스탄티누스 대제 때인 4세기에 처음 세워졌으나
제4차 십자군의 침입 당시 파괴되어 현대에 복원한 것이다.


히포드롬(Hippodrome)의 옛 모습. 이스탄불 고고학 박물관 전시 자료


히포드롬(Hippodrome)의 옛 모습. 이스탄불 고고학 박물관 전시 자료


히포드롬(Hippodrome)의 모습. 이스탄불 고고학 박물관 전시 자료


테오도시우스 오벨리스크 (Obelisk of Theodosius, Obelisk of Tutmoses III)


오벨리스크(obelisk)


고대 이집트의 태양신을 상징하는 돌로 된 4각주. 방첨탑(方尖塔)이라고도 한다.
끝이 가늘고 피라미드형을 한 정상에 황금을 붙였으며 본체와 기대(基台) 표면에 봉헌의 명문(銘文)을 새겼다.
원래는 헤리오폴리스의 레신전의 성석(聖石) 벤벤을 모방한 것.


제5왕조(B.C. 2494경~B.C. 2345경)의 국왕들은 돌로 쌓은 오벨리스크를 신체(神體)로 하는 태양신전을 건립하고,
돌기둥 형태의 것은 제12왕조경(B.C. 1919경 이후)부터 신전 내에,
신왕국시대(B.C. 1567경~B.C. 1085경)에는 필론 앞에 한쌍씩 세웠다.


대부분은 애스원 산(産)의 화강암제. 후에 아시리아왕과 로마황제에 의하여 반출되어
현재 이집트 국내에 서 있는 것은 5기에 불과하다.
이중 최대의 것은 카르나크의 아몬 대신전에 하트세프수트 여왕이 건립한 높이 30m의 오벨리스크이다.


런던, 파리, 로마, 이스탄불 및 뉴욕 등의 광장과 공원에도 이집트로부터 반출된 오벨리스크가 서 있다.
이집트 세력이 일찍부터 미친 시리아, 팔레스티나에는 이집트신들에 대한 신앙으로 중기 청동기시대에 세운

비블로스의 태양 신전에 높이 80~150cm의 소형 오벨리스크가 다수 봉납되어 오벨리스크 신전이라는 이름이 있다.


같은 형의 소형 오벨리스크는 팔레스티나와 시리아에서도 발견되어
동(東) 지중해 연안지방(레반트)에 대한 이집트 문화의 보급을 표시하고 있다.


특히 메소포타미아의 『마니슈투스의 오벨리스크』(수사 출토, 루브르 박물관),

아슈르바니파(?)의 『백작 오벨리스크』(니네베 출토, 대영박물관),
샤르마네얄 3세의 『검은 오벨리스크』(니므루드 출토, 대영박물관)라 통칭되는 4각주 석비는

국왕의 업적, 전쟁, 숭배 및 공납 등의 명문과 부조를 한 말하자면 기념비인데 이집트의 오벨리스크와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테오도시우스 오벨리스크 (Obelisk of Theodosius, Obelisk of Tutmoses III)


오벨리스크의 건축 의도에 대해서는 다산을 기원하는 구조물이 아닐까 하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이런 학자들은 오벨리스크가 남근을 뜻하는 모양일 것이라 주장한다.


다만 진짜로 오벨리스크가 그것을 의미한다고 해도 외설적인 건 아니다.
농경 사회인 당시에는 성관계가 쾌락 이전에 가정과 나라를 위해 필요한 행위였다.


테오도시우스 오벨리스크는 지금은 히포드롬 광장에 자리하고 있지만 원래는 BC 1450년 이집트 파라오 투트모시스 3세의

유프라테스강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룩소르 카르낙 신전에 세운 것이었다.


1,500여년이 지난 AD357년 비잔틴 제국의 황제 콘스탄티누스 2세가 전리품으로 가져와 알렉산드리아에 처음 세웠다.
아스완 산의 분홍색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이 오벨리스크는 처음 세워졌을 당시 30m가 넘었다고 한다.
이후 390년에는 다시 테오도시우스 황제에 의해 콘스탄티노플, 지금의 자리로 옮겨졌다.


테오도시우스 오벨리스크에 대한 해설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 2세(Constantius II, 337-361 재위)가 357년에 알렉산드리아(Alexandria)로 오벨리스크를 옮겼으며,
390년에 테오도시우스 1세가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아스완(Aswan)에서 생산되는 붉은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오벨리스크의 높이는

본래 하단부를 포함해 30m였으나 일부가 파손되어 현재는 25.6m이다.


오벨리스크의 4면에는 각각 투트모스 3세가 B.C.1450년에

유프라테스강 유역을 점령한 것을 기리는 내용이 상형문자로 새겨져 있다.

이집트의 상형 문자가 새겨진 거대한 기념비로, 이스탄불에서 가장 오래된 유적이다.


이집트에서 약탈해 올 때는 너무 커서 밑둥을 자른 채 운반하고 기단 위에 다시 세웠다.

테오도시우스 1세는 이 오벨리스크를 3개로 분할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까지 운반했다.


현존하는 것은 상단 부분이며, 대리석 받침대는 테오도시우스 1세가 만들게 한 것이다.
이 오벨리스크는 3,500년 이전에 만들어졌지만 매우 좋은 상태로 유지되고 있다.
바로 뒤에 술탄 아흐메트 모스크 (Sultan Ahmed Mosque)가 보인다.

테오도시우스 오벨리스크 하단부


흰 대리석으로 된 하단부는 테오도시우스 1세 때 새로 만들어진 것으로,
4면에 각각 황제의 업적을 기리는 내용의 부조가 새겨져 있다.

테오도시우스 오벨리스크 방문 인증샷


뱀기둥 (고대 그리스어: Τρικάρηνος Ὄφις, 터키어: Yılanlı Sütun)


뱀기둥은 터키 이스탄불 술탄아흐메트 광장에 위치해 있다.
새 수도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콘스탄티누스 1세와 그 후계자 (특히 테오도시우스 1세)는

제국 전역에서 예술 작품을 모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장식했다.


콘스탄티노폴리스 경마장에는 특히 스피나라는 길 중앙 장벽에 설치되었다.

기둥이 만들어진 시기는 B.C.478년으로 추정된다.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그리스 연합군이 페르시아 패잔병들의 방패를 녹여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기둥은 원래 고대 그리스에서 세계의 중심으로 여겨지던 델포이의 아폴론 신전에 있었다.


그러나 콘스탄티누스 1세(Constantinus I, 302-337 재위) 황제가 로마의 수도를 콘스탄티노플(현재의 이스탄불)로 옮기면서
세계의 중심이 새로운 곳으로 옮겨졌음을 나타내기 위해 현재의 장소로 옮겨왔다.


 뱀기둥


본래 기둥은 뱀 세 마리가 서로 휘감아 올라가는 형상으로,
뱀 세 마리의 머리가 기둥 꼭대기에서 직경 2m 가량의 황금 트로피를 받치는 모습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트로피는 이스탄불로 옮겨지기 전에 유실되었으며, 뱀 머리는 17세기에 파손되었다.
뱀 머리 중의 하나는 현재 이스탄불 고고학 박물관에 있으며, 다른 것은 런던 대영박물관에 있다.
기둥의 본래 높이는 8m였다고 하나 현재는 5m이다.


뱀기둥은 플라타이아이의 삼각대라는 제단, 원래는 기원전 5세기에 페르시아 전쟁의 일부인
플라타이아이 전투의 승전을 기념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콘스탄티누스 1세는 델포이의 아폴론 신전에서 이를 가져 오도록 명령하여 경마장의 중앙에 설치했다.
이 기둥 정상부에는 3마리의 뱀 머리에 금 그릇이 있었다.
이 그릇은 제4차 십자군 중에 파괴 또는 약탈되었다.


뱀기둥


이 기둥 정상부에는 3마리의 뱀 머리에 금 그릇이 있었다. 이 그릇은 제4차 십자군 중에 파괴 또는 약탈되었다.
오스만 제국 시대에 세밀화되어 뱀의 머리가 그려져 있으며, 적어도 17세기 말경까지 뱀의 머리가 있었다.


이 뱀의 머리의 일부는 복원되어 이스탄불 고고학 박물관에 전시되어있다.
델포이의 삼각대에 현존하고있는 것은 토대 부분만 뱀기둥이라고 되어 있다.


이스탄불 고고학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뱀 머리의 일부


오스만 제국 시대에 세밀화되어 뱀의 머리가 그려져 있으며, 적어도 17세기 말경까지 뱀의 머리가 있었다.
이 뱀의 머리의 일부는 복원되어 이스탄불 고고학 박물관에 전시되어있다.
델포이의 삼각대에 현존하고 있는 것은 토대 부분만 뱀기둥이라고 되어 있다.


콘스탄틴 오벨리스크 (Constantine Obelisk)


10세기의 황제 콘스탄티누스 7세는 오벨리스크를 콘스탄티노폴리스 경마장 (술탄아흐메트 광장) 반대쪽에 세우게 했다.
원래는 금으로 도금된 청동 판으로 덮여 있었지만, 제4차 십자군에 약탈되었다. 벽돌의 일부 부분이 현존하고 있다.

콘스탄틴 오벨리스크 (Constantine Obelisk)


벽돌을 쌓아 만든 이 오벨리스크의 제작 연대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지만,
10세기 경 콘스탄티누스 7세가 청동으로 표면을 장식한 후 이 오벨리스크의 이름이 지어졌다고 한다...
하지만 화려했던 청동 장식은 제4차 십자군 원정 시기인 12세기에 유실되어, 지금은 이 헐벗은 오벨리스크만 남아 있다.

콘스탄틴 오벨리스크 (Constantine Obelisk)


높이 32m로 가장 높은 오벨리스크다.

오스만 제국 시절에는 술탄의 친위 부대인 예니체리가 타고 올라가는 등 군사 훈련 장소로 이용되어 훼손이 더욱 심해졌다고 한다.
수세기 동안 지진과 약탈을 견디고 나서도 여전히 의젓하게 히포드롬 광장 한켠을 지키고 있다.

콘스탄틴 오벨리스크 (Constantine Obelisk)



카이저 빌헬름 분수대 (Kaiser Wilheml's Fountain)


히포드롬 광장 북쪽에 있으며 게르만 분수대라고도 불린다.
1898년에 이스탄불을 방문한 독일 황제 빌헬름 1세가 오스만 제국의 술탄 압둘하미드 2세의 환대에 대한 보답으로 선물한 것이다.

카이저 빌헬름 분수대 (Kaiser Wilheml's Fountain). 게르만 분수대


8개의 대리석 아치 기둥 위에 푸른 돔을 올렸으며 기둥 모서리마다

양국 지도자 이름의 머리글자를 딴 석조 장식을 붙여 독일과 오스만 제국의 동맹을 상징하고 있다.
오리엔탈 특급열차로 이스탄불까지 운반되었다고 한다.

카이저 빌헬름 분수대 (Kaiser Wilheml's Fountain)에 대한 해설


카이저 빌헬름 분수대 (Kaiser Wilheml's Fountain)



참조 ; https://blog.naver.com/ahnys0/221225939735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963596&cid=42864&categoryId=50859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262736&cid=42635&categoryId=42635
https://namu.wiki/w/%EC%98%A4%EB%B2%A8%EB%A6%AC%EC%8A%A4%ED%81%AC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336433&cid=40942&categoryId=31931
https://blog.naver.com/choemhwa/221401668785
https://ljhoi.blog.me/221363753799
https://ko.wikipedia.org/wiki/%EB%B1%80%EA%B8%B0%EB%91%A5
https://ko.wikipedia.org/wiki/%EC%BD%98%EC%8A%A4%ED%83%84%ED%8B%B4_%EC%98%A4%EB%B2%A8%EB%A6%AC%EC%8A%A4%ED%81%AC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336432&cid=40942&categoryId=33084

https://ko.wikipedia.org/wiki/%EB%B1%80%EA%B8%B0%EB%91%A5

https://blog.naver.com/turkey_trip/221170465279






멀리 항구에서 보는 술탄 아흐메트 모스크 (Sultan Ahmed Mosque)


술탄 아흐메트 모스크는 17세기 초에 세워졌다.
건설 당시에 번역상의 오류로 황금 미나렛 하나를 세우는 대신 6개의 미나렛이 세워졌다.
"alti(여섯)"과 "altin(황금)"을 혼동한 것이다.


건축가에게는 천만 다행스럽게도, 술탄은 미나렛을 너무나 마음에 들어했고,
덕분에 6개의 미나렛 모두―그리고 건축가도―살아남을 수 있었다.


오늘날, 술탄아흐메트는 터키에서 유일하게 6개의 미나렛을 자랑하는 모스크이다.
과거에도 그랬듯, 이스탄불의 아시아 쪽에서 볼 수 있는 최고의 풍경은 배로 이스탄불로 들어올 때 보이는 전경이다.


멀리서도 스카이라인을 장식하는 모스크의 웅장한 실루엣을 알아볼 수 있다.
황혼 무렵 보스포루스 해협의 크루즈를 타면 된다.


술탄 아흐메트 모스크 (Sultan Ahmed Mosque)와 성 소피아 성당 (Hagia Sophia)


오스만 시대에 지어진 직경이 27.5m, 높이가 43m에 다다르는 술탄아흐메트 모스크 (Sultan Ahmed Mosque) 는
규모면에서 터키 최대의 것으로, 맞은편에 있는 성 소피아 성당에 대한 이슬람 세력의우위를 상징하기 위해
그 양식을 모방, 발전시켜 건축한 독특한 형상의 회교사원이다.


그 내부의 벽과 기둥이 푸른색의 타일로 장식되어 있어 블루 모스크라고도 불리워지고 있다.
돔의 200개가 넘는 조그만 창은 스태인드 글래스로 장식되어 있어

이를 통해 들어 오는 햇살이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 한다.


술탄 아흐메트 모스크 (Sultan Ahmed Mosque)


성 소피아 사원에 대적하기 위해 1616년 슐탄 아메트가 건축하였으며, 블루 모스크라고도 부른다.
거대한 돔 주위에 7개의 첨탑과 4개의 부속 돔에 기둥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
외국 관광객에게는 블루 모스크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보스포러스해협 바다에서 유람선을 타고 보는 술탄 아흐메트 모스크 (Sultan Ahmed Mosque). 2006. 3. 14 인증샷.


바다를 배경에 두고 뒤에서 보는 술탄 아흐메트 모스크 (Sultan Ahmed Mosque)


1609년부터 1617년까지 7년간의 기간을 거쳐 만들어진 터키의 대표적인 모스크(사원)로서
내부가 화려하고 아름다운 터키 블루색상의 타일로 장식되어 있어 블루모스크라는 애칭으로 더 유명하다.


이슬람의 중요 종교 행사와 집회등의 공식 행사를 치루던 곳으로 교황 베네딕트 16세가 공식 방문한 곳이다.
푸른 타일의 화려한 장식 뿐 아니라 형형색색의 아름다운 스테인 글라스 장식도 보는 이들의 눈을 즐겁게 한다.

위에서 보는 술탄 아흐메트 모스크 (Sultan Ahmed Mosque)


술탄 아흐메트 모스크 (Sultan Ahmed Mosque)
술탄 아흐메트 모스크(터키어: Sultan Ahmet Camii)는 터키의 이스탄불에 있는 대표적인 모스크로,
세계문화유산인 이스탄불 역사지구의 유서깊은 건축물 가운데 하나이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스크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모스크 안 벽면을 온통 뒤덮은 푸른빛을 띠는 도자기 타일 때문에 블루 모스크라는 애칭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하늘을 배경에 두고 보는 술탄 아흐메트 모스크 (Sultan Ahmed Mosque)


하기아 소피아에서 불과 도보로 5분 거리에 위치한 술탄 아흐메트 모스크는 가운데 커다란 돔에

수많은 작은 돔을 얹은 형태로 구성되어 안정감을 주고 있으며 수많은 기둥이 받치는 각각의 아치 위에

작은 돔이 둥글게 솟았고, 4단을 이루며 돔 숫자는 점점 작아지다가 마지막 거대한 중앙 돔에 이른다.
직경 23.5m의 거대한 중앙 돔은 작은 네 개의 돔이 받치고 있다.


술탄 아흐메트 모스크 (Sultan Ahmed Mosque) 출입구 풍경


돔 주변에는 수많은 창을 내어 자연의 빛이 내부로 비치게 했다.
돔 위에는 황금색 장식을 달았고 맨 꼭대기에는 이슬람을 상징하는 별과 초승달을 얹었다.


2006. 3. 13. 방문 기념 인증샷


술탄 아흐메트 모스크 (Sultan Ahmed Mosque) 전경


오스만 제국 때의 모스크는 신학교, 목욕탕, 시장, 병원 등 사회 시설을 주변에 다 갖추고 있었는데,
이런 시설을 퀼리예라고 부른다.

술탄 아흐메트 모스크도 이 같은 복합 시설을 갖춘 모스크였다.


이 모스크는 전 세계에서 여섯 개의 미나렛을 갖고 있는 유일한 모스크로

오스만 제국 술탄은 매주 금요일 이곳에서 예배를 보았다.

술탄 아흐메트 모스크 (Sultan Ahmed Mosque) 전경


술탄 아흐메트 모스크는 크고 작은 돔의 균형과 모스크 양쪽에 쭉 뻗어 세워진 미나렛으로 장관을 이루고 있다.
또한 모두 다섯 개의 문이 있는데 이중 모스크의 정면으로 들어가는 문은 세 개로 이 남쪽 문을 통해 들어갈 수 있다.


2006. 3. 13. 술탄 아흐메트 모스크 (Sultan Ahmed Mosque) 출입구에서 인증샷.


술탄 아흐메트 모스크 (Sultan Ahmed Mosque) 출입구


모스크의 안뜰 가운데는 샤드르반이라는 분수대가 있고 사원 옆에는

신자들이 기도 전에 손발을 닦는 수도 시설인 육각형 모양의 세정소가 있다.


지금은 밀려드는 신자들을 위해 정원 바깥에 따로 대규모 세정시설을 마련해놓았기 때문에

이 세정소는 오늘날 쓰이지 않는다.


술탄 아흐메트 모스크 (Sultan Ahmed Mosque) 첫 번째 입구


모스크 내부는 약 2만 1,000개에 달하는 파란색의 이즈닉 타일과

푸른빛의 260개 유리창으로 장식되어 있는데, 서양 사람들은 발음하기 어려운

술탄 아흐메트 모스크로 부르기보다는 파란색의 타일이 많은 사원이라 하여 ‘블루 모스크’라 부른다

술탄 아흐메트 모스크 (Sultan Ahmed Mosque) 두 번째 입구


모스크의 가장 아름다운 부분인 2층 회랑은 현재 방문이 금지되어 있다.
내부에 있는 거대한 돔은 네 개의 거대한 기둥에 의해 떠받쳐지고 있다.


돔의 하중을 견딜 수 있도록 육중하게 만들어진 이 기둥은

직경이 5m가 넘어 일명 코끼리의 다리라고 불린다.


술탄 아흐메트 모스크 (Sultan Ahmed Mosque) 두 번째 입구 돔과 탑


하얀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모스크의 설교단(민바르)에는

아라베스크 문양이 정교하게 새겨져 있다.


이 설교단을 중심으로 왼쪽에는 술탄의 전용 기도실이 있다.

여름에는 모스크의 내부를 아름답게 밝혀주는 조명이 켜진다.

술탄 아흐메트 모스크 (Sultan Ahmed Mosque) 두 번째 입구 탑


술탄 아흐메트 모스크의 바로 북쪽 자리에 히포드롬이라 불리는 고대 동로마 제국의 경기장이 있다.
오스만 제국의 술탄들도 이곳을 말의 광장이라는 뜻의 아트 메이다느라고 불렀다.


히포드롬에는 과거의 웅대한 모습은 다 사라지고

고대 이집트의 오벨리스크, 청동 뱀 기둥, 유스티니아누스 기념탑 등
세 개의 기념물이 독일이 만들어 기증한 분수대와 함께 남아 있다.


술탄 아흐메트 모스크 (Sultan Ahmed Mosque) 건물 탑


1616년에 오스만 제국 술탄 아흐메트 1세가 건축가 자개기술공(세데프캬르)

메흐메트 아아(Sedefkâr Mehmet Ağa 1540~1617)에게 명령하여 짓게 한 모스크로,
건축 연도를 보면 알 수 있듯이 메흐메트의 마지막 건축 작품이다.


당시 예루살렘으로 성지 순례를 간 술탄이 금(알튼 altın)으로 모스크를 지으라고 무리한 명령을 내리자

도저히 불가능했던 터라 금이 아닌 6개(알트 altı)로 잘못 듣었다고 하여 첨탑을 6개 세웠다는 이야기도 있다.

술탄 아흐메트 모스크 (Sultan Ahmed Mosque) 두 번째 건물 문을 지나면서


모스크는 첨탑이 몇 개인가가 그 모스크의 격을 결정하기 때문에

성지인 메카의 모스크와 첨탑의 수가 같다는 건 문제가 되는 일이었다.


메카의 카바(Kâbe) 신전도 처음에는 첨탑이 6개였으나 술탄 아흐메트 1세가 건설비를 지원해서 7개가 되었고,
나중에 2개를 증축하여서 현재는 9개나 된다.


공교롭게도 아흐메트 1세도 메흐메트 아아랑 같은 1617년에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메흐메트 아아는 50살이나 나이 차가 있어 27살 젊은 나이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술탄 아흐메트 모스크 (Sultan Ahmed Mosque) 사원 옆 세정소


사원 옆에는 신자들이 기도 전에 손발을 닦는 수도 시설인 육각형 모양의 세정소가 있다.
지금은 밀려드는 신자들을 위해 정원 바깥에 따로 대규모 세정시설을 마련해놓았기 때문에

이 세정소는 오늘날 쓰이지 않는다.


술탄 아흐메트 모스크는 그 거대한 규모에도 불구하고

하기아 소피아에 비해서 평가가 낮은 편이다.


아야 소피아가 거대한 돔형 건축물로 탄생한 것이 537년이고

블루모스크의 완공은 1616년이니 무려 1079년 후이다.


하지만 술탄 아흐메드 모스크를 건설하기 전에 오스만 제국도 셀리미예 모스크 등의 많은 건축적 경험을 쌓았고,
아야 소피아가 가지고 있는 많은 단점들을 넘어 술탄 아흐메드 모스크는 좀 더 완성된 구조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술탄 아흐메트 모스크에 쓰인 푸른 타일들은

17세기 이즈니크 타일의 걸작으로 높은 문화, 예술적 가치가 있다.


아무튼 역사적 의의야 아야 소피아에는 미치지 못한다는 평이지만,

어찌되었건 둘 다 나란히 위치한 건축의 걸작이란 점은 분명하다.

술탄 아흐메트 모스크 (Sultan Ahmed Mosque) 사원 입구


역시나 관광객이 많이 온다.

다만 박물관인 아야 소피아와 달리 여긴 모스크라서 들어가기가 까다롭다.


현지 무슬림들이 기도할때는 더더욱. 다행히 비(非)무슬림들도 들어갈 순 있지만,

신발을 벗어야 하는 등 예배의 규칙을 지켜야 한다.


그리고 여자라면 스카프를 챙겨가야 한다.

머리카락을 가리지 않으면 모스크 안에 들어갈 수 없는데 후드 모자를 써도 안된다.


입구에서 스카프와 치마를 빌려주기 때문에 없다고 해서 당황할 필요는 없지만,
이스탄불에 모스크가 워낙 많다보니 이쪽을 여행할 땐 그냥 속편하게 스카프를 준비하는게 좋다.


하지만 무슬림국가에 온 이상, 비무슬림이어도 어느정도 예를 갖춰 옷을 챙겨입는게 좋다.
모스크에 들어갈 때 남자는 무릎부터 팔뚝까지 가리고,

여자는 발목부터 손목, 머리카락을 다 가려야 한다.


사원 앞 정결을 위한 세정소.

정원 바깥에 따로 세정소를 마련해 놓았다. 예배하러 온 사람들이 모두 손과 발을 씻는다.


예배하러 온 사람들은 여기 세정소에서 모두 손과 발을 씻는다.


술탄 아흐메트 모스크 (Sultan Ahmed Mosque) 사원



해가 뜰때 들어오면 창문으로 들어오는 빛이 타일에 반사되어 정말 아름답다고 한다. 
다만 그 시간대에는 무슬림만 들어갈 수 있기 때문에,

입구의 경비들과 이야기를 하던지 아니면 무슬림인척 하던가 하라고.


참고로 무슬림들의 기도시간으로 입장이 통제될 때는

근처의 건물에서 술탄 아흐메트 모스크에 대한 소개영상을 상영하고,
이슬람교 전반적인 것에 대한 질의응답 시간이 있다.


술탄 아흐메트 모스크 (Sultan Ahmed Mosque) 사원 내부 광경. 예배하는 모습


내부 광경. 화려한 스테인드 글라스 (stained glass). 관광객이 다니는 통로.


술탄 아흐메트 모스크 (Sultan Ahmed Mosque) 예배드리는 곳.

오른쪽(Minbar)에 민바르가 있다.


민바르 (Minbar)


미흐라브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섰을 때 오른편에 위치한다.
모스크 전반에 사용된 건축 자재에 따라 민바르의 제작 재료도 달라지는데,
목재를 이용하는 것이 일반적이며 경우에 따라 석재로 만들기도 한다.


민바르는 부조 혹은 투각, 상감기법으로 《코란》명문을 새겨 넣거나
이슬람 예술에 주로 사용되는 식물 문양의 패턴으로 장식한다.


기능은 예배 의식을 마친 후 이맘이 올라가 설교를 하는 곳으로,
예언자 무함마드가 세 개의 단으로 구성된 곳에 올라 설교한 것이 민바르의 시초이다.
이후 여러 개의 층계가 놓인 설교단이 제작되었다.


가장 높은 단에 올라가는 것은 절대자(하느님, 알라)만이 할 수 있는 것이며,
인간은 언제나 겸손한 존재여야 한다는 종교적 교리 및 해석에 따라 최상단에 올라가는 것을 금기하고 있다.


이맘의 경우에도 위에서 두 번째 층계에 올라선다.
원칙상 민바르 위에 올라서서 설교하는 것은 무슬림이면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일반적으로 종교 지도자로 여겨지는 이맘만이 이용한다.


술탄 아흐메트 모스크 (Sultan Ahmed Mosque) 사원 내부 전경.


술탄 아흐메트 모스크 (Sultan Ahmed Mosque) 사원 내부 전경.


술탄 아흐메트 모스크 (Sultan Ahmed Mosque) 사원의 화려한 스테인드 글라스 (stained glass)


스테인드 글라스 (stained glass) 디자인


○ 스테인드 글라스는 여러가지 빛의 조작효과와 구조상 여건에 맞아야 하기 때문에 힘든 작업이 요구된다.
반면 어떤 재료보다도 더욱 직접적으로 고도의 동적인 현상 사이의 상호작용을 이용해

비세속적이며 생생하고 재치 있는 독특한 효과를 낸다.


광선은 하루의 시간과 계절, 날씨에 따라 계속 변화해서 빛의 효과에 의한 색조와 강도가

부드럽고 온화한 것에서 찬란하고 화려한 것으로 끊임없이 바뀌게 된다.


또한 시간뿐만 아니라 장소(초원과 숲, 온실과 감옥 등)에 따라서도 느낌이 달라지며,
개개인이 취하게 되는 시각의 자발적인 선택 과정도 각기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술탄 아흐메트 모스크 (Sultan Ahmed Mosque) 사원 내부 스테인드 글라스.


○ 창을 통한 광선으로만 건축물의 밝기를 조절했던 중세 교회 건축물에서 12~13세기초의 예술가들은
주변의 어둠과 대비하여 찬란하고 엄숙한 분위기를 위해 깊고 진한 루비와 푸른색의 유리창을 창작했고,
또 효과적으로 광선을 부드럽게 하기 위해 그리자유 화법으로 불투명 메시(mesh)를 사용하기도 했다.


이후 교회의 벽이 더 많은 광선을 받아들이도록 개방됨에 따라 14~15세기에는

전보다 완화되고 절제된 색상조화로써 덜 침침한 효과를 선호하는 실질적 경향을 엿볼 수 있다.


재료와 기술 유리를 만들 때 유리의 착색은 녹은 상태의 유리에 붉은색은 동(銅), 푸른색은 코발트,
자주색은 망간, 노란색은 안티모니, 초록색은 철과 같은 금속 산화물을 첨가하여 이루어진다.

술탄 아흐메트 모스크 (Sultan Ahmed Mosque) 사원 스테인드 글라스 (stained glass)


○ 중세의 유리판은 유리불기법(blow-molding)으로 만들어졌는데
이는 녹은 유리를 대롱을 통해 방울을 불어 만든 다음 그것의 끝을 잘라 통형이 되게 한다.
한쪽 끝에서 길이로 이 통형을 갈라서 펴 판형을 만들고 이를 가마에 넣어 서서히 냉각시켜 완성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얇은 색유리판은 스테인드 글라스 작가의 디자인에 따라 여러 조각으로 잘라낸 다음
이 색색의 유리조각들은 납띠를 가장자리에 고정시켜 모아 붙여서 전체 디자인에 맞게 구성한다.


이때 납띠는 그 자체도 디자인의 한 부분 역할을 하며,

개개의 납띠를 두른 조각들을 모아 철틀에 끼워넣어 유리창을 만든다.
또 유리조각들 표면에는 검은색 유리질 에나멜로 세부 디자인을 그려넣어 섬세한 장식 표현을 만들고 있다.


12~13세기에 만들어진 스테인드 글라스 작품은 우연이든 계획된 의도였든간에
유리의 두께가 일정치 않은 등 미숙하면서도 세련되어 이상적인 조화를 잘 이루고 있다.


르네상스 시대에는 유리기술이 발전해 더 크고 얇고 판판한 유리를 생산할 수 있었으나
이후에는 미학적으로나 시각적으로 이전보다 발전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후에 고딕 복고주의자들은 이런 결과를 인식하고 12~13세기에 쓰였던 소위 앙티크 유리의 색과 질,
음영효과를 발전시켜 초창기 수법으로 돌아가고자 했다.

술탄 아흐메트 모스크 (Sultan Ahmed Mosque) 사원 내부 천장.


스테인드 글라스 (stained glass)전통 수법


스테인드 글라스 예술은 '모자이크'와 '에나멜링'예술이 투명한 소재로 전환,

표현된 산물이라 할 수 있다.


모자이크 제작에서 여러 조각의 유리로써 기념적인 도상을 구성하는 개념이 생겨났고,
에나멜링에서는 금속 띠(테)로 유리조각들을 모아 붙이는 기술과 금속띠 자체를 디자인한 점,
또 세부장식이나 명문을 그려넣는 안료인 유리질 에나멜을 만들어 쓰는 것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에나멜 세공).


1110~40년 사이에 테오필로스(12세기 헬마쉬하우젠의 야금술사 루제루스로 추정됨) 수사가 쓴
〈공예 개설 Schedula diversarum artium〉에 최초로 스테인드 글라스 제작기술이 서술되어 있다.


이 전통기법은 먼저 색깔의 구분이 나타나 있는 백도제(白塗劑)가 입혀진 탁자 위에 그려놓고,
색에 맞추어 각각의 유리판에 달구어진 뜨거운 철로 된 연장을 대고 움직여서 정확한 크기와 형태로 유리를 잘라낸 후,
눈금이 새겨진 인두(grozing iron)로 다시 가장자리를 다듬는다.
이때 조각들은 서로 접합시킬 납테를 두를 여분을 고려해야 한다.


술탄 아흐메트 모스크 (Sultan Ahmed Mosque) 사원 기둥과 내부 천장.


○ 스테인드 글라스의 필요한 세부 디자인은 유리질 에나멜로 유리조각 위에 그려넣은 후에
가마에 넣어서 에나멜이 유리에 녹아 붙기에 적절한 온도로 가열한다.


그리고, 탁자 위에서 2개의 긴 납띠로 유리조각을 서로 연결하여 모아 붙여 전체 디자인에 맞게 구성하게 되는데,
유리의 가장자리에 둘리어지는 홈이 패인 납띠는 그 단면이 H자형으로 되어 있다.


술탄 아흐메트 모스크 (Sultan Ahmed Mosque) 사원 내부 천장.


○ 스테인드 글라스의 초창기 작품인 〈예언자 Prophets〉 같은 단일상으로 된 란셋 창에서는

납테에 의한 구획은 순전히 기능적이었으나, 이어 창의 크기가 커지면서 이런 구획은 다루기가 어려워지기 때문에
유리창을 수직과 수평으로 더 작게 분할하는 방법이 개발되었으며

따라서 유리창 전체 디자인에 맞도록 기하학무늬를 이루게 되었다.


술탄 아흐메트 모스크 (Sultan Ahmed Mosque) 사원 내부 천장.


○ 이는 사실 큰 고딕 성당의 원형 창이 생겨나는 시기에 맞춰 디자인된 독창적 변화라고도 할 수 있다.
화면·장식·구조의 완전한 화합이 각기 단독으로는 이룰 수 없는 어떤 힘을 가지게 되기 때문에
이러한 조화가 스테인드 글라스의 역사에서 가장 의미 있는 전환점이 되었던 것이다.


술탄 아흐메트 모스크 (Sultan Ahmed Mosque) 사원의 화려한 내부 천장.


14세기 스테인드 글라스 (stained glass)의 발달


14세기초에 이르러 여러 가지 발달을 보게 되는데 초창기에 불가능했던 2차적인 색깔,
즉 흐린 황색, 이끼색, 자주색의 일반화가 가능해졌고 은염(銀鹽)으로 그린 노란색 색조유리도 발명되었다.


유리화가들은 유리 전면에 반색조의 투명 매트를 붙이거나 강조할 부분을 유리질 에나멜로 음영을 표시하고 모델링하는 등
많은 기술 발전을 이룩했으며, 특히 15세기에는 점차로 선의 사용도 숙달되고 세련되어갔다.


또 기술상 새로운 방법들도 추가되었는데, 맑은 투명 유리를 녹은 색유리에 잠깐 담그어 얇은 색유리 막을 입히는

입힌 유리(flashed glass)라든가 스테인의 두께와 열의 정도 또는 마연법에 따라 색상의 정도가 다르게 표현되기도 했다.

이로써 납띠에 의해서만 좌우되던 스테인드 글라스의 디자인이 차츰 납띠의 지배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술탄 아흐메트 모스크 (Sultan Ahmed Mosque) 사원 내부 천장.


스테인드 글라스 (stained glass) 후기의 발달


15세기말경 유리질 에나멜의 새로운 영역이 개발되고,
16세기 중엽에는 유리 위에 에나멜 안료로 그리는 기술이 가장 중요한 것이 되었다.


17세기 중엽에 이르러 유럽전역의 정치적 혼란으로 색유리가 귀해졌고

전통적인 색유리 기법은 점차 새로운 방법으로 대치되어갔다.


16~20세기까지 스테인드 글라스 제작술의 발전은 순전히 실용적인 것이었다.
16세기에 다이아몬드로 된 유리 커터가 발명되고

18세기에 에칭 입힌 유리기법을 위해 플루오르화수소산이 사용되었다.


19~20세기에는 가스·전기가마·납땜인두(soldering iron)도 쓰였으며,

색·질·두께가 다양한 커다란 유리판도 역시 20세기에 개발되었다.


현대에 와서는 1930년경 프랑스에서 납띠를 대신하여 콘크리트에 유리를 끼우는 방법을 포함한
여러 기술 혁신과 투명 합성수지 접착제에 유리를 접착시키는 것 같은 실험적 기술이 쓰이면서
현대의 스테인드 글라스 작가는 다른 것이 따를 수 없는 다양한 표현을 구사하게 되었다.

술탄 아흐메트 모스크 (Sultan Ahmed Mosque) 사원 내부 천장.


스테인드 글라스 (stained glass)의 주제


중세의 교회예술은 교훈적인 내용을 근본으로 하므로, 유리창에 그려진 주제는
성서의 해설과 교회나 성인(聖人)들을 영광되게 하는 것이 중요한 부분이었다.
창문이 커짐에 따라 스테인드 글라스는 미적으로나 교리의 전달에서도 더욱 중요해졌다.


교회 건축에 쓰였던 중세 스테인드 글라스의 도상학적인 배치계획은 몇 가지 요인을 고려하여 정해졌는데,
교회 건축의 십자형 평면은 그 자체가 4개의 중심지역으로 구분되고
각 지역의 건축형태나 태양의 방향에 따라 일정한 주제가 발달하게 되었다(→ 도상학).
예를 들어 샤르트르 성당에서는 성단의 5개 중앙 채광창과 북쪽 장미창은 성모 마리아에 봉헌되며
남쪽 장미창은 그리스도의 영광, 서쪽 장미창은 최후의 심판을 주제로 헌정되어 있다.


보통 성서에서 채택된 스테인드 글라스 (stained glass)의 주제는

성인, 예언자, 그리스도, 성모의 생애, 최후의 심판 등을 포함한다.


그리고 12사도,〈신약성서〉·〈구약성서〉·〈요한의 묵시록〉의 내용, 황도12궁,
또한 이삭에서 그리스도에 이르는 계보 등이 가장 인기 있는 주제들이었다.


때로는 도상학적 배치와는 관계없이 유리창의 작품 헌납자의 뜻이나

개인의 기호에 따른 주제도 묘사되었다.


가장 큰 성당인 샤르트르 성당에서 보면, 176개의 창에 2,500㎡의 스테인드 글라스가 쓰였으며,
3개의 장미창은 각각 직경 12m로 거대하게 구성되었는데,
이는 1203~40년 사이의 40여 년에 걸쳐서 9명의 작가가 완성한 작품임을 알 수 있다.


성직자들이 창의 드로잉을 유리 숙련공들에게 제공해 제작하기도 했는데
대영박물관의 12세기 문헌에는 성 구트락의 생애를 그린 것이 그 대표적인 예로 되어 있다.


중세 후기에는 글로 쓴 드로잉을 받아서 예비 스케치를 마련해 후견인의 승인을 받은 후,
실제 크기의 최종 도안을 완성했던 과정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글로 된 교시의 예는 헨리 7세가

영국 그리니치의 그레이프라이어스 교회에 봉헌한 드로잉에서 볼 수 있다.


14세기에는 양피지나 종이 위에 그려진 각각 다른 모양의 완성된 도안들을 보관하는 것이 유리공들의 관습이어서
이러한 도안그림들은 후손들에게 물려주어 오랫동안 다시 사용되었는데
1450년에 죽은 요크 지방의 한 유리공은 유언으로 도안그림을 아들에게 물려주었다.


중세 후기에는 숙련공의 유리공장은 고도로 조직된 사업체로서 각종 등급의 디자인을
후견인이나 주문자의 비용 여하에 따라 생산해내고 있었다.


봉헌자가 성직자이든 평민이든 간에 주제 선택과 표현방법에는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지만,
최종 디자인은 반드시 당대 예술 성향을 구현할 수 있는 예술작가인 마스터 유리공(숙련 유리공)만이 완성할 수 있었다.
 

술탄 아흐메트 모스크 (Sultan Ahmed Mosque) 사원 스테인드 글라스 (stained glass)


 서양의 스테인드 글라스


스테인드 글라스는 초기 그리스도교 시대부터 있었으나 중요한 장식미술로서 진전된 것은
훨씬 후에 이르러서였으며 그 발전과정은 더디었다.


12세기 이전의 스테인드 글라스의 존재는 문헌기록과 발굴자료에서 확인되었으나 자료가 너무 간략해서
그 기술이 어떻게 발전되었는지를 충분히 살펴보기가 어렵다.


그러나 라틴 교회의 교부들, 즉 락탄티우스, 프르덴티우스, 성 히에로니무스의 기록에 의하면
초기 그리스도교의 바실리카 색유리창에 대해 언급되어 있으며
5세기의 시인 시도니우스 아폴리나리스는 프랑스 리옹의 색유리창에 대해 묘사하고 있다.


또한 교황 레오 3세(795~816 재위)는 로마의 산파올로 바실리카를 위한 색유리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이미 유럽에서는 카롤링거 왕조 이전부터 부자들의 건축물에 색유리창이 크게 퍼지고 있었음을,
669년의 영국 요크 대성당이나 영국 선덜랜드의 멍크웨어머스 수도원에서 발견되는
7세기말부터의 색유리창 조각들에서 알 수 있다.


이들 초창기 중세 유리창들은 상당히 다양해서 처음에는 창틀 부분에 얇은 대리석, 설화석고(alabaster),
석고 또는 나무판 등으로 메워넣고 여기에 구멍을 뚫어 색유리를 끼우는 '모자이크'창의 형태도 있었다.


이 모자이크 창은 서유럽에서는 로마네스크 시기에도 쓰였으며 11세기초에는 이탈리아 베네치아 근처
토르첼로 대성당과 피렌체의 산미니아토 교회에서도 보인다.


이런 초기방법에서도 창틀에 유리파편들을 붙일 때 납띠가 쓰였을 것이며 이미 4세기경부터는
유리창 끼우기에 납으로 된 띠가 쓰였음이 발굴에서 확인된 바 있다.


최초의 납테로 된 유리 디자인은 9세기경

프랑스 랭 지방의 세리레메지에르 교회에 있는 작은 패널화(1918 파손됨)이다.


초기의 색유리창은 그림으로 장식되지 않고, 비교적 간단한 도안의 색유리로만 구성되어 있었는데
9세기까지는 그림이 도안된 색유리창이 있었다는 기록은 없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스테인드 글라스는 독일의 로르슈에서 발굴된 유리파편들인데
이들은 그리스도의 두부 형상으로 복원되면서 이 형상은 카롤링거 왕조의 회화와 형식이 유사함을 보여주는
9, 10세기 또는 11세기의 작품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현재 남아 있는 최초의 완전한 스테인드 글라스 그림은
12세기초에 속하는 독일 아우크스부르크 성당에 장식된 5명의 예언자 상이다.


카롤링거 왕조와 초기 로마네스크 건축에서는 구조상 창의 숫자가 적고 크기도 작았기 때문에
화려한 장식은 창보다는 넓은 벽과 둥근 아치형 천장에 집중되어 있다.


그러나 후기 로마네스크와 고딕 건축에서는 창의 배치와 개방성을 강조해
이때부터 스테인드 글라스 그림이 주된 예술양식으로 자리잡게 되었으며
북유럽에서는 교회장식의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되고 있다(카롤링거 왕조 미술, 로마네스크 예술).


그림을 그린 스테인드 글라스 창은 보통 서유럽에서 발명된 고유한 것으로 여겨져왔지만,
초창기 발전과정에는 아직 모호한 부분이 많이 남아 있다.


그러나 12세기초부터는 비교적 합리적으로 발전되어갔는데 중세 후기의 스테인드 글라스의 정교함과 세련됨은
주제의 자연주의적 해석에 있어서 프레스코나 이젤 화가들의 기량과도 겨루게 될 정도로
예술적으로 크게 이바지했다고 할 수 있다.


12세기의 다른 중요한 작품으로 파리 근교의 생드니 수도원에 남아 있는 것과
파리의 생샤펠에서 보이는 15개의 창에 1,134개의 장면으로 이루어진 찬란한 스테인드 글라스 장식을 들 수 있으며
13세기의 작품으로 현존하는 것 중 가장 훌륭한 작품은 영국의 캔터베리 대성당을 예로 들 수 있다.

술탄 아흐메트 모스크 (Sultan Ahmed Mosque) 사원 스테인드 글라스 (stained glass)


13~16세기까지는 중요작품들이 만들어지지만 스테인드 글라스는

예술형태로서 퇴보하기 시작한다.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들은 효과를 추구했는데

이러한 사실주의적 경향은 스테인드 글라스 기술이 덜 적절할 뿐만 아니라,
작가들이 고도의 광선-굴절 성질을 구사하던 작업에서 벗어나기 시작하면서
스테인드 글라스 예술이 쇠퇴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19세기에는 중세 스테인드 글라스에 대한 흥미가 부흥되었는데
이는 고딕 미술의 부흥과 관계가 있으며 많은 작품들이 제작되었다.


영국에서는 에드워드 번 존스의 디자인이나 윌리엄 모리스 같은 미술공예운동의 지도자들과
미국의 루이스 컴퍼트 티퍼니 등에 의해 찬란한 작품들이 만들어졌다.


아르 누보 운동으로 스테인드 글라스는 장식 목적으로 많이 사용되었으며,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는 건축작품에서 크게 활용했다.


20세기에는 앙리 마티스, 마르크 샤갈, 페르낭 레제 같은 유명화가들의 디자인으로

찬란한 현대의 유리작품들이 만들어지고 있다.
 

술탄 아흐메트 모스크 (Sultan Ahmed Mosque) 사원 스테인드 글라스 (stained glass)


한국의 스테인드 글라스


서양의 장식예술인 스테인드 글라스가 한국에 소개된 것은

스테인드 글라스의 시작이 그러하듯 종교단체를 통해서였다. 


1898년 초창기 서양식 건축(고딕 건축)인 명동대성당이

파리 외방선교회의 의뢰로 프랑스의 베네딕투스 수도원 수사들에 의해 지어졌고
여기에 유리창 장식으로 스테인드 글라스가 처음으로 사용되었다.


이 장식은 성서의 구절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것으로,

예를 들어 잉태한 마리아에서 천상모후의 관을 씌워드리는 예수까지
그리스도의 일생을 묘사한 15편의 장면과 나뭇잎 모양 등을

기하학적 모티프로 응용하여 장식한 유리창 등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명동대성당에서 시작된 스테인드 글라스 장식은 대중화되지 못했고
1968년에 들어서면서 가톨릭교도이며 종교미술에 심취한 화가 이남규가 스테인드 글라스에 깊은 관심을 쏟게 되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뜻있는 사제의 주선으로 그는 오스트리아 수도원과 파리 베네딕투스 수도원 공방에서
3년 여 동안 제작기법을 익히고 돌아왔다.


그가 돌아와 예술성을 접목한 정통 스테인드 글라스를 성당건축에 설치하기 시작하면서
한국 스테인드 글라스의 장을 열었고, 특히 각 성당에 큰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그가 제작한 서울 중림동·혜화동·역촌동 성당, 인천 가좌동성당 등의 작품들은
그의 독특한 현대미술 성향과 전통기법을 조화시킨 예술품이다.


더욱이 1982~84년까지의 명동대성당의 스테인드 글라스 복원작업은 서양 수사가 제작한 것을
한국의 예술가가 새로운 시각으로 마무리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


종교단체를 통해 확산된 스테인드 글라스는 상업적인 일상용품으로 생산되기도 했는데,
제작과정이 번거롭고 비싸다는 단점 때문인지 크게 확산되지는 못하고 있다.


그러나 현대건축물에서 예술공간의 부분장식으로 조금씩 다시 사용되고 있어
스테인드 글라스의 폭은 점점 넓어지고 있는 경향이다.


술탄 아흐메드 영묘 (Tomb of Sultan Ahmed)


술탄 아흐메드 1세(Sultan Ahmed I, 1590-1617)의 시신이 모셔진 영묘로서,

술탄아흐메드 모스크 북쪽에 있는 독립된 건축물이다.

현재는 술탄아흐메드 공원과 마주보고 있다.


1616년에 완공되었는데, 정사각형의 토대 위에

다각형의 기둥들이 받치고 있는 여러 개의 돔이 연결된 구조이다.
내부는 화려한 장식 타일과 섬세하게 세공된 목재로 꾸며져 있다.

 술탄 아흐메드 영묘 해설문


술탄 아흐메드 영묘는 16세기에 완공된 것으로 40명의 왕족이 묻혀 있다고 한다.
14대 술탄이었던 아흐메트는 13세에 술탄의 자리에 올라 26세에 술탄의 이름이 붙은 마지막 사원인

술탄 아흐메트 사원(블루 모스크)을 완성했다. 하지만 1년 뒤인 1617년 27세의 젊은 나이에 사망했다.


블루 모스크 근처, 술탄 아흐메트 공원과 마주보는 곳에는 블루 모스크 사원의 주인인 술탄 아흐메트 1세와
황후였던 코셈(Kosem), 아들인 16대 술탄, 무라드 4세(Murad IV),

17대 술탄이었던 오스만 2세(Osman II) 등 그의 일가족의 묘가 있다.

술탄 아흐메드 영묘 내부


영묘는 술탄 아흐메트 사원(블루 모스크)을 만든 건축가 메흐메트 아아(Mehmet Ağa)가

술탄 아흐메트 1세가 사망한 지 3년 후인 1619년에 완공하였다.


영묘 내부에 들어가면 화려한 타일과 스테인드글라스 등으로 아름답게 꾸며져 있다.
특히 천장과 벽에 꾸며진 푸른색과 흰색의 아름다운 장식 타일이 눈길을 끈다


200221@차노휘


200221@차노휘


200221@차노휘



보스포러스해협 바다에서 유람선을 타고 보는 술탄 아흐메트 모스크 (Sultan Ahmed Mosque). 2006. 3. 14 인증샷.


EBS 블루모스크



[터키 여행-이스탄불]블루 모스크, 술탄아흐메드 사원/Blue Mosque, Sultan



참조 ; https://blog.naver.com/mi2591/140134331473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b13s0848b
http://cafe.daum.net/globalsangyoung/MbGL/2938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87XX41000024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951660&cid=42866&categoryId=42866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336431&cid=40942&categoryId=31931
http://cafe.daum.net/krcos/nwSk/291?q=%EB%B8%94%EB%A3%A8%20%EB%AA%A8%EC%8A%A4%ED%81%AC&re=1
http://cafe.daum.net/hnjmg/MHSi/1341?q=%EB%B8%94%EB%A3%A8%20%EB%AA%A8%EC%8A%A4%ED%81%AC&re=1
https://namu.wiki/w/%EC%88%A0%ED%83%84%20%EC%95%84%ED%9D%90%EB%A9%94%EB%93%9C%20%EB%AA%A8%EC%8A%A4%ED%81%AC
http://cafe.daum.net/krcos/nwSk/291?q=%EB%B8%94%EB%A3%A8%20%EB%AA%A8%EC%8A%A4%ED%81%AC&re=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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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88%A0%ED%83%84_%EC%95%84%ED%9D%90%EB%A9%94%ED%8A%B8_%EB%AA%A8%EC%8A%A4%ED%81%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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