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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라메이코스(Kerameikos)


케라메이코스(Kerameikos)는 ‘도공구(陶工區)’이라는 뜻이다.

아테네의 서북 디필론(이중문) 밖에 있으며, 여기와 접하거나 또는 일부가 이와 겹쳐서

미케네 시대 이래의 묘지가 있었고 수많은 분묘, 부조, 묘비가 잔존했었다.


디필론에서 시작되는 페이라이에우스(현대명 피레우스)로 향하는 길과 이와 병행해서
성문에서 시작되어 에레우시스로 향하는 도로가 다같이 케라메이코스를 횡단한다.


묘지로서의 사용은 적어도 B.C 12세기 경까지로 소급되며,
특히 B.C. 6세기 이후는 아테네의 부유한 시민 및 공인의 묘지로서 많은 귀인, 전몰자 등이 묻혔다.

근래에 행해진 독일조사대의 발굴에 의해서 많은 도기가 발견되었다.


특히 미케네 말기부터 원(原, 프로토) 기하학적 양식기로 연결되는 도기유품의 발굴은,
선사에서부터 역사시대의 연속을 말해주는 귀중한 자료로서 중요시된다.
그 대부분은 케라메이코스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케라메이코스(Kerameikos) 입구


피레우스 항구로 가는 길목에 있는 ‘무덤의 거리’ 입구와 덱실레오스(Dexileos)의 묘비석


왼쪽 언덕으로 넓게 가족묘가 몰려있다. 아직까지 유명한 묘들이 상당수 남아있다.
다만 여기에 설치된 묘비석과 유물들은 대부분 복제품으로 진품은 케라미코스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묘지들 가운에 가장 앞에 위치하여 눈에 띄는 것이 말을 탄 청년상이다.
묘비에 조각된 상은 무덤의 주인공의 직업과 출신 배경, 죽음의 원인 등을 짐작하게 해준다.
망자 한명을 조각한 경우도 있지만, 기원전 5세기경에는 주로 가족을 함께 조각하기도 했다.


이 무덤의 주인은 아테네 전사 덱실레오스(Dexileos)다.
그는 BC 394년 코린토스 전쟁 때 스파르타 군에 맞서 싸우다 전사했다.
원래 청동으로 만들어져 부착되어 있었다는 창과 말고삐가 소실된 점이 아쉽다.


말을 타고 돌진하여 적을 물리치는 장면을 부조함으로써

그의 가족은 덱실레오스의 용맹을 오래도록 후손에게 기억시키고자 했던 것 같다. 


현장에 설치된 이 말을 탄 청년상은 복제품이다.

오른쪽으로 묘비석 상단에 조성된 황소상이 보이는데 역시 야외의 현장에 있는 황소상은 복제품이다.
진품은 케라미코스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케라미코스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덱실레오스(Dexileos) 묘비석 말을 탄 청년상 진품


곧게 선 갈기와 앞발을 높이 쳐들어 적을 짓밟는 말의 기세와, 쓰러진 적을 창으로 제압하는 청년의 자세가

휘날리는 망토와 어울려 더욱 역동적으로 보인다.
쓰러진 적이 방어하려고 안간힘을 쓰는 모습도 정교하게 묘사하고 있다.


콜리톤의 디오니시오스 장례 기념물 황소상


헤게소의 묘비 맞은 편에는 황소 대리석 상을 볼 수 있다. 이것은 디오니소스 신에게 바쳐진 장례 기념물이다. 
콜리톤은 기원전 345년 기둥 위에 황소 대리석 상을 올려놓고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고 한다.


'이름을 날리던 귀족들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은 많습니다.

디오니소스여, 당신은 생전에 존경을 받을 만한 일을 했고,

이제는 우리 모두 언젠가는 가야 할 페르세포네의 영호(명부)에서 살고 있습니다."

케라미코스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묘비석 황소상 진품


이 조각상 역시 복제품이고 케라미코스 박물관에 진품이 소장되어 있다.


케라미코스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묘비석 여인상 진품


매우 정교하고 화려하게 조각된 두 자매의 묘비 부조이다.

데메트리아(Demetria)와 팜필레(Pamphile) 자매다.
BC 325-310년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아테네에서는 부유한 이들의 묘비 장식이 점점 화려해지자 4세기 말에 데메트리오tm(Demetrios)가

묘비의 규모와 양식을 검소하게 제한하는 법을 만들기도 했다.
이 묘비는 이 법 제정 이전의 마지막 시기의 것으로 추정된다.

케라메이코스(Kerameikos) 안내판


케라메이코스(Kerameikos) 전경. 뒤쪽으로 아테네 고대 성벽이 보인다.


우리가 죽으면 갈 곳은 어디일까? 정말 죽음 이후의 세계가 존재하기는 할까?

신실한 종교인에게 이는 금기된 불경스런 의문이다.

 
그래서 사후 세계의 인정여부는 종교적 믿음의 갈림길이기도 하다.
모든 종교는 기본적으로 구원에 대한 믿음에서 시작된다.


모든 종교는 교리의 방식을 조금씩 다르지만, 모두 현세(現世)의 고통과 질곡의 삶을 넘어서
내세(來世)의 평화와 안녕으로 보상받고 징벌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다고 약속한다.
하지만 이 문제는 문명이 시작된 이래 완전하게 풀지 못한 인간의 오랜 숙제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어떻게 생각했을까?

 죽고 나면, 어떤 사람도 주변사람들로부터 존경과 칭송을 얻지 못한다.


우리 모두는 살아있는 동안  살아있는 다른 사람들과 호의를 주고받을 뿐이다.

죽은 자는 가장 나쁜 것을 받을 뿐이다. 


 자유로운 개인으로서 인생의 고뇌를 노래한 걸출한 서정시인 아르킬로코스(Archilochos)의 ‘죽음 이후’란 시다.
그는 기원전 8세기 후반 에게 해 파로스 섬 태생으로 호메로스와 견줄 만한 명성을 누린 시인이다.


그는 트라케와 파로스의 식민지 전쟁 등 숱한 전쟁에 직접 참여한 전사이기도 했다.
그는 죽음보다 현실의 삶이 소중하다고 노래했다.


그의 시가 그리스인에게 사랑받았다는 것은

그리스인의 죽음에 대한 사유방식의 일단을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오디세이아'에도 그리스인의 사생관(死生觀)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 있다.
오디세우스는 트로이 전쟁이후 귀향하는 과정에서 사후세계를 다녀오게 된다.


오디세우스는 저승세계에 산 채로 들어가, 지하세계의 그림자 영혼이 된

아킬레우스, 아가멤논, 아이아스 등 많은 영웅들을 만나 그들의 하소연을 듣게 된다.


오디세우스가 트로이 전쟁의 전우였던 아킬레우스를 만나 그를 위로하며 이렇게 말한다.

 "그대가 여기 사자(死者)들 사이에서 강력한 통치자이니 그대는 죽었다고 해서 슬퍼하지 말라."


하지만 아킬레우스는 애절한 표정으로 이렇게 응답한다.
 "나는 세상을 떠난 모든 사자(死者)들을 통치하느니 차라리 지상에서 머슴이 되어

농토도 없고 재산도 많지 않는 가난한 사람 밑에서 품이라도 팔고 싶소이다." 


 아킬레우스의 말에서 망자(亡子)의 서러움이 진하게 묻어난다.

현실의 어떤 구차한 삶도 사후 세계의 어떠한 영광보다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그리스인의 사생관(死生觀)을 보여준다.


고대 그리스인들도 사후 세계가 있다고 믿었다.
하데스(Hades)신이 주재하는 지하세계는 돌아올 수 없는 죽은 자들의 세상이었다.
뱃사공 카론(Charon)에 의해 죽음의 강 스틱스(Styx)를 건너면 다시는 현세로 돌아올 수 없다고 믿었다.


케라미코스의 전체 평면도


신전의 오른쪽 길이 엘레우시스로 이어지는 ‘신성한 길’이고, 왼쪽이 피레우스 항구로 가는 길이다.
오른쪽 굵은 선의 평면도가 그려진 곳이 폼페이온(pompeion)이다.


성벽과 성문의 복원도


고대 아테네의 이 성벽은 전쟁으로 여러 차례 허물어졌지만, 그 위치와 모습은 별로 변한 것이 없다고 한다.
현재 케라미코스 유적지에 남아 있는 성벽은 고대 아테네의 것을 바탕으로

로마 통치 시대에 다시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


트리토파트레이온(tritopatreion) 신전이 있던 자리다.


그리스인의 매장풍습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있어서 장례식은 부유한 가문이 가족 구성원인 고인을 기리고

가문의 부와 명예를 과시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장례 절차는 일련의 의식들로 구성되었는데 도기에 그려진 회화 장면들을 통해서

우리는 이러한 장례가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추측할 수 있다.


이를테면 거대한 기념 항아리에는 두 가지 의식이 재현되어 있는데

하나는 프로테시스, 즉 의식용 침상에 시체를 누여서 사람들에게 공개하고

애도자들이 주변을 에워썬 채로 머리를 쥐어뜯으며 애가를 부르는 행위이고,
다른 하나는 엑포라, 즉 애도자들에게 둘러사여서 묘지로 행진하는 것이다.


이러한 의식들 다음으로는 예식에 따라 고인의 몸을 씻고 기름을 바르고 옷을 입히고

마지막으로 화환으로 장식하는 과정이 이어졌다.


후대(헬레니즘)에 와서 장례 절차에 스틱스 강을 건너는 배삯을 지불할 수 있도록

망자에게 동전을 주는 행위가 더해졌다.


묘지에서는 화장이나 매장이 행해지게 된다.

이때 종교 의식에 따라 도살이 이루어지기도 했는데,

매장지들에서 말들의 뼈가 끊임없이 발견되어 왔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해준다.


또한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기원전 6세기 후반에 밀티아데스의 아버지인 키몬의 장례식에서

그가 상으로 탄 암말들이 함께 묻혔다고 한다.


포도주, 꿀과 물을 섞은 포도주, 우유 등의 헌주(눈물 역시 신에게 바치는 헌주로 여겨졌다)가 고인에게 바쳐졌고,
무덤 또는 무덤 근처에 파진 도랑에 선물이 놓였다.


그 밖의 절차로는 장례 연회와 죽은 이의 집을 정화하는 의식이 있었다.
유명한 디필론 암포라처럼 크고 화려하게 장식된 기념물이 죽은 이의 무덤 위에 세워지는 경우에는

그 가문의 부를 확실하게 과시하는 징표가 되었다.

뒷편에 보이는 나무 두 그루 앞이 트리토파트레이온(tritopatreion) 신전이 있던 자리다.


폼페이온(pompeion)이 있던 자리다. 기단만 남아 있다.


케라미코스 유적 한 가운데 가장 큰 규모의 건축물은 폼페이온(The Pompeion)이었다.
폼페이온은 아테네의 주성문인 디필론과 신성문 사이에 있었다.


디필론과 신성문은 아테네로 입성하는 주 성문으로 다양한 조각 등으로 장식되었던 것 같다.
인근에서 발굴된 사자상, 스핑크스, 쿠로스 등이 이를 짐작하게 해준다.


폼페이온은 아테네의 최고 축제인 판아테나이아 축제를 준비하는 곳이다.
가로 세로가 각각 70m, 30에 달했다고 하니 대단한 규모의 건물이다.


이곳에서 축제를 위한 준비물, 각종 제물과 도구들이 보관되었다.
이곳에서 아크로폴리스의 관문인 프로필라이아로 향하는 축제 행렬이 출발했다. 


하지만 기원전 86년에 로마가 아테네에 침공하여 폼페이온, 디필론, 신성문을 비롯한 주요 시설들을 대부분 파괴했다.
그들로서는 아테네 시민들이 자신들의 영광을 노래하고 결속을 다지는 최고의 축제인 판아테나이아 제전을 분쇄함으로써
아테네인들의 문화를 말살하고 저항의지를 꺾으려 했는지도 모른다. 


헤게소의 묘비(사진 왼쪽). 코로이보스 가족의 묘역(사진 오른쪽 두 비석)


헤게소의 묘비. 기원전 400년경. 대리석. 높이 약 5피트(1.58미터) 아테네 국립 박물관 소장.


장례용 부조


이 부조는 기원전 4세기 경의 것으로 추정된다. 두 여인 사이에서 두 남자가 장례식 만찬에 참여중이다.

발 아래의 배는 저승으로 가기 위해 스틱스 강을 건너는 여정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배 안에는 죽은 이들을 인도하는 뱃사공 키론이 앉아 있다.



그리스인들은 죽은 후에 가게 될 사후 세계의 존재를 믿었지만,
그곳이 현대 종교의 관념과 동일한 죄악에 대한 구원의 세계로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리스인들은 현세주의자들이었다. 현실의 삶을 무엇보다도 소중하게 생각했다.
물론 미지의 사후 세계에 대한 관심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다. 


 엘레우시스(Eleusis)에 있는 데메테르 신전에서 비밀스런 종교의식

엘레우시스 비의(Eleusinian Mysteries)가 행해졌던 게 그 증거다.


엘레우시스는 아테네에서 서쪽으로 20km 떨어진 곳에 위치했고 아테네 영토에 속했다.
엘레우시스 비의(秘儀)는 입문자들에게 영적인 해탈에 이르는 비법을 전수하였다고 하나

구체적인 내용은 밝혀지지 않았다.


입문자는 비밀 엄수 서약을 해야 했고,

아테네가 비의를 주관하면서 비밀을 누설하는 자를 사형에 처했기 때문이다.


아무튼 신비스런 이 비교(秘敎)에 입문해서

“의식에 참석하기만 하면 어떤 행동을 하건 상관없이 불멸의 축복을 얻을 수 있다고 약속했다.

즉 비교는 개인의 구원을 목적으로 했다.”


모든 종교의 기원이 구원에 대한 약속에서 출발했다는 점을 재확인시켜 준다.
비의 참가자들이 어떻게 구원을 보장받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최소한 참가자들이 “엘레우시스 비의를 통해 우리들은 삶의 시작에 대해 배웠고,
현생을 행복하게 사는 힘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희망을 가지고 죽음을 맞이할 수 있게 되었다”
고 말했던 것을 보면, 이들이 비의를 통해 어느 정도 영적인 위안을 얻었음에 틀림없다.


엘레우시스 비의(秘儀)는 아테네로부터 인정받고 보호를 받는 혜택을 누렸다.
매년 9월에는 대규모 의식이 거행되었다.

아테네에서 엘레우시스에 이르는 길은 ‘신성한 길(The sacred Way)’이라 불렸다.


강위 아치형 통로 오른쪽에 신성문이 있었다.


아테네 성벽의 15개의 문 중 케라미코스(Keramikos)에 인접한 디필론(Dipylon) 성문과 신성문(Sacred Gate)이 있었다.
신성문과 연결된 ‘신성한 길’, 즉 ‘히에라 호로스(Hiera Hodos)’에서 출발하여 엘레우시스까지 이르는 20km의 길은
매년 9월이면 비의에 참가하려는 아테네인들의 신성한 행렬로 붐볐을 것이다.


케라미코스는 공동묘지였지만, 중요한 건축물도 몇몇 있었다.
엘레우시스로 이어지는 ‘신성한 길’과 피레우스 항구로 가는 길의 출발지점인 삼각지에

트리토파트레이온(tritopatreion)신전이 있었다.


아테네 시가지를 떠나는 마지막 신전이자, 아테네 시가지로 입성하는 첫 신전이었다.

신전의 정확한 기능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아테네의 번영과 아테네인의 축복을 빌지 않았을까? 


 아테네의 관문인 피레우스 항으로 가는 길은 바로 아테네가 에게 해로 뻗어가는 번영의 길이었고,
엘레우시스로 가는 길은 사후 세계의 축복을 기원하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모든 물품의 수출입이 피레우스 항구를 통해 이루어졌으니 아테네에서 상업적으로,

군사적으로 가장 중요한 길이었던 셈이다.


‘신성한 길’ 역시 메가라, 코린트, 델피, 펠로폰네소스로 향하는 길이니

그리스 본토와 소통하는 중요한 교통로였다.
케라미코스는 바로 두 길의 출발점이자 도착점에 위치했다.


아치 가까운 쪽에 에리다노스 강이 복개되어 있다.


아치형 문 사이 가운데로 에리다노스(Eridanos) 강이 흐른다.

우리나라의 작은 개천 정도에 비교된다.

강의 오른쪽에 ‘신성한 길’이 위치하고, 아치 통로 오른쪽에 신성문이 있었다고 한다.



죽음은 남은 자에게 더욱 슬픈 일이다.
케라미코스에 조성된 숱한 망자의 무덤은 말이 없지만,

묘비석마다 새겨진 다양한 부조 속에 망자가 생전에 가족과 나누던 정겨웠던 장면들이 보는 이들을 안타깝게 한다.


자식을 잃은 부모의 애끓는 슬픔과 허망함, 망자에 대한 그리움이 절절히 느껴진다.
살아남은 가족들은 망자의 기일(忌日)이 되면 케라미코스를 방문하여 꽃을 바치고,

묘비에 새겨진 망자의 모습을 쓰다듬으며 다감했던 추억들을 되새겼으리라.


몇몇 묘비석들은 망자와의 이별의 슬픔을 짧은 글귀의 비문으로 덧붙이고 있어 보는 이의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암파레테(Ampharete)의 묘비도 그 중의 하나다.


"나는 여기에서 내 딸의 사랑스런 자식을 안고 있다.

우리가 살아서 태양 빛을 바라볼 때, 나는 이 아이를 무릎에 안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나는 죽어서 역시 죽은 그 손자를 안고 있다."


손자를 애지중지하던 할머니의 슬픔이 애잔하게 느껴진다.
할머니가 오른손에 살아있는 새를 쥐고 아이를 어르고 있는 모습이 생생하다.
아버지가 딸을 보내는 슬픔이 잔잔하게 담긴 묘비 부조도 인상적이다.


“여기 아리스톤(Ariston)과 로디라(Rhodilla)의 딸 아리스틸라(Aristylla)가 잠들어 있도다.

너는 우리에게 너무나 훌륭한 자식이었다. 사랑하는 딸아!”


이별의 슬픔이 깃든 딸의 모습에 비해 슬픔을 안으로 삼키며 애써 담담한 표정으로

딸의 손을 지그시 잡은 아버지의 모습이 보는 이를 안타깝게 한다. 




케라미코스는 국립묘지답게 숱한 전투에서 전사한 아테네의 청년들이 수없이 많이 묻혔다.
하지만 용사들의 무덤이 많이 남아 있지 않다.


묘비 장식에서 뚜렷한 걸작품 몇 기가 남아 있어 그나마 다행이다.
무덤 감실(naiskos)에 조각된 아테네 전사 아리스토나우테스(Aristonautes)의 묘비가 대표적이다.  


 왼손에 방패를 들고 소실된 오른손에 창을 들었을 것이다.

왼발과 오른발을 땅이 파일 듯 굳게 딛고 있고,

 발을 벌리고 버티고 선 품새가 쉽게 범접할 수 없을 만큼 굳건해 보인다.


더구나 상체와 하체의 근육과 핏줄이 팽팽하게 표출되어

곧바로 적과 육박전이라도 벌이려는 상황을 묘사한 듯 긴장감을 준다.


얼굴 표정의 결연함도 압권이다.

조각의 뛰어난 작품성을 자랑하듯 감실에 조각가의 이름이 명기되어 있는 것도 이채롭다.


아리스토나우테스(Aristonautes)의 용맹한 모습을

오래도록 생생하게 기억하도록 만든 이는 조각가 스코파스(Skopas)다.

죽은 자들의 슬픔에 산 자들이 언제까지나 매달릴 수는 없는 법이다.



아크로폴리스를 오른쪽으로 바라보며 케라미코스 옆으로 난 넓은 길을 따라

5 분여 정도 걸어가면 아고라쪽으로 가는 길에 늘어선 벼룩시장을 만나게 된다.


여기는 궁색하지만 살아있는 자들의 거래가 활발하다.

고대 아테네 시절에도 이랬으리라. 케라미코스 바로 옆이 아고라였다.

시장의 시끌벅적한 활력이 케라미코스의 우울과 슬픔,

좌절의 분위기에서 다시 현실로 돌아오게 만드는 촉매가 되었을 것이다.

가장 치열한 현세의 공간 옆에 망자들의 묘지를 둔 것도 아테네인들의 또 다른 지혜가 아닐까? 



2006. 03.11 케라미코스(Keramikos) 방문 기념 인증샷


케라메이코스 고고학 박물관 (Archaeoloical Museum of Keramekos)


케라미코스 박물관 입구.


박물관 옆에 진열된 석관과 무덤 장식물들.


케라메이코스(Kerameikos) 입구 묘비석 기단 위에 설치된 황소상 진품


이 무덤의 주인공은 사모스 섬 출신의 알피노스(Alphinos)의 아들 디오니소스(Dionysios)다.
그는 기원전 4세기 중엽 헤라 신전(Heraion)에서 보물지기로 봉직한 것 같다.


그는 케라미코스 인근인 콜리토스(Kollytos) 구에 살았고 미혼이었다.
백색의 대리석으로 조각된 힘이 넘치는 황소의 야성미가 물씬 풍기는 걸작품이다.


이중섭의 ‘황소’의 이미지가 연상된다. 이런 석우(石牛) 작품은 신전이나 묘역에 자주 조성되는 양식이다.
청동기 시대부터 시작된 오랜 석우숭배(石牛崇拜)의 관념이 고대 그리스 시대에도 여전했음을 보여주는 것 같다.


이 정도의 훌륭한 거대 조상을 봉헌 받은 것을 보면 디오니소스가 헤라 신전에서 꽤 중요한 소임을 맡았던 것 같다.
아니면 그의 가문이 매우 부유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묘비석 기단 위에 설치된 황소상 진품


케라메이코스(Kerameikos) 입구 묘비석 기단 위에 설치된 여인상의 진품


매우 정교하고 화려하게 조각된 두 자매의 묘비 부조이다. 데메트리아(Demetria)와 팜필레(Pamphile) 자매다.
BC 325-310년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아테네에서는 부유한 이들의 묘비 장식이 점점 화려해지자 4세기 말에

데메트리오tm(Demetrios)가 묘비의 규모와 양식을 검소하게 제한하는 법을 만들기도 했다.
이 묘비는 이 법 제정 이전의 마지막 시기의 것으로 추정된다.


루트로포로스(loutrophoros)


묘비를 장식한 큰 물동이 루트로포로스(loutrophoros)이다.
결혼식 전날 밤 신랑과 신부의 목욕 의식에 루트로포로스를 사용했다.


그래서 결혼하기 전에 죽은 사람의 무덤에 올려놓는 장식으로 널리 쓰였다.

묘비석은 인물부조 식, 오벨리스크 식, 화병장식 등으로 다양하다.



‘프로크세노스의(딸 아니면 처) 헤게소(Hegeso)’로 알려진 묘비석.


‘무덤의 거리’입구 쪽에 있다. BC400년경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두 여인의 자태가 아름답게 조각되었다. 의자에 앉은 이가 망자(亡子)인 헤게소이다.


머리를 우아하고 세련되게 손질했고 옷맵시도 훌륭한 것으로 보아 높은 신분의 여인으로 보인다.
앞에 선 시녀가 내민 상자에서 보석을 고르는 장면이다.




돌이 아니라 얇은 천으로 만든듯 매우 섬세하고 사실적이다.




신성문 지역에서 발굴된 쿠로스(Kouros) 석조상.


묘비석 상단에 조상된 스핑크스(Sphinx) 상. BC 560-550년 경 작품. 신성문 지역에서 발굴.


신성문의 사자상. BC 590-580 사이 작품으로 추정.


간결하면서도 아름답게 조상된 숫사자상이다.
페르시아 전쟁 통에 용케 땅에 묻혔다가 신성문 구역에서 발굴되었다.




2200 여 년 전의 성생활을 엿볼 수 있는 작품










참고 ; http://www.dailian.co.kr/news/view/438092
https://blog.naver.com/lsw24001/221336567602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264022&cid=42635&categoryId=42635

https://blog.naver.com/mjahn21/600587248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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