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테네 국회의사당과  무명 용사의 묘.


신타그마 광장 위의 국회의사당과 무명 용사의 묘.
근위대가 군악대와 함께 행진하는 근위병 교체식으로 유명한 곳이다.


아테네 국회의사당 무명 용사의 묘 근위병 교대식


무명용사의 비
전사한 그리스 병사들을 추모하기 위해서 1929년 건설하기 시작해 1932년 완공한 기념비


2006. 3. 12 무명용사의 비 방문기념 인증샷


= KOPEA    한국 전쟁에 참전했다가 전사한 용사들


= KOPEA    한국 전쟁에 참전했다가 전사한 용사들


영웅들에게는 세상 어디라도 그들의 무덤이 될 수 있다. 페리클레스(BC495~429)


영웅들에게는 세상 어디라도 그들의 무덤이 될 수 있다. 페리클레스(BC495~429)


2006. 3. 12 근위병과 함께 기념샷


2006. 3. 12.   비둘기와 함께 방문기념 인증샷


파나기아 고르고에피쿠스 성당 


아테네 대성당인 메갈리 미트로폴리 바로 옆에 있는 작은 성당이다.
12세기에 길이 약 7.5m, 폭 12m의 규모로 지어진 작은 성당으로 '미트로폴리'라고도 불리운다.


흰 대리석 건물이지만 오랜 세월을 견디며 변색이 되어 황색을 띠고 있다.
성당의 원래 이름인 파나기아 고르고에피쿠스는 기도에 응답하시는 성모 마리아를 의미한다.

성 아포스톨루 (Apostles) 교회 (성 사도교회)


아테네 고대 아고라  언덕에 위치한 성 아포스톨루 교회(성 사도교회)이다.
바울이 아고라 전도를 기념하여 1000년 경에 세워진 비잔틴 양식의 교회로

실내에는 17세기에 그려진 프레스코화가 있다.



카프니카레아 성당


아테네 에르무(Ermu)거리에  위치한 11세기에 건축된 성당이다.

비잔틴 양식으로 지어졌으며 그리스 정교회이다.

아테네 리카비토스 언덕 (Lycabettus Hill)


아테네 시내가 한눈에 들어오는 해발 295m의 언덕을 말한다.
아테네시에서 가장 높으 언덕으로 아테네의 최고봉으로 불리운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일몰은 매우 아름다워 사람들이 많이 찾는다.
케이블카가 정상까지 운행되는데 정상에는 하얀색의 작은 교회인 아기오스 조르기오스(Agios Georgios)가 있다.

리카비토스의 민머리에서 보는 아테네의 전경은 훌륭하다.


아테네는 벌거벗은 산에 둘러싸여있다. 큰 강이 없는 아테네는 늘 물 부족에 시달린다.
그 이유는 “아테네”라는 도시 이름의 유래에서부터 찾아볼 수 있다.
어느날 포세이돈과 아테네는 이 도시에 자신의 이름을 달겠다며 다투었다.


결국 이들은 시민들을 모아놓고 그들이 좋아하는 선물을 준 신의 이름을 도시에 달겠다고 제안했다.

포세이돈이 준 선물은 물이었다. 그는 자신의 삼지창으로 바위를 내리쳐, 물이 솟아나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 물은 소금물이었다.

아테네는 방패로 땅을 내리쳐 올리브나무가 자라나게 하였다.


올리브 기름과 올리브 열매를 시민들에게 준 것이다.
이를 본 시민들은 아테네의 손을 들어주었고, 이에 화가 난 포세이돈은 아테네에 ‘물 부족’이라는 저주를 내렸다.


이토록 물이 부족한 아테네에 산에까지 물이 안 올라가는 것은 당연할지 모른다.
리카베투스가 민둥산인 이유는 신화에서 나온 바로 그 이유 때문일까?


하지만 석회암으로 이루어진 바위는 물을 품기에 좋다.
그 덕분에, 리카베투스는 완전히 헐벗은 산은 면하게 되었다.


리카베투스는 ‘늑대들의 언덕’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산기슭에 우거진 소나무숲에 늑대들이 살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리카비토스 언덕 (Lycabettus Hill)


아테네는 막 태어난 에리크토니오스를 바구니에 담아

케크롭스의 딸들에게 맡기며 “절대 열지 말라”고 당부했다.


그리고는 아크로폴리스를 만들 산을 가지러 팔레네로 갔는데,

그 사이를 참지 못한 케크롭스의 딸들이 바구니를 열어본 것이다.


이 사실을 안 아테네는 화를 내며 들고오던 산을 집어던졌는데,

그것이 바로 리카베투스가 되었다고 한다.


리카베투스의 맨숭맨숭한 정상에는 아기오스 조르기오스라는 교회가 있는데,

이곳까지 오르면 아테네의 전망이 기다리고 있다.
민둥산이기에 얻을 수 있는 선물이다.

리시크라테스 기념비


아크로폴리스 동쪽에 있는 고대 그리스의 기념비. 높이 약 7m, 너비 2.75m.
BC 334년에 거행된 디오니소스제(祭)의 경기에서

리시크라테스의 합창단이 우승한 것을 기념하여 세운 것이다.


정사각형의 높은 기단 위에 6개의 코린트양식 반주(半柱)를 지닌 원통형 건물을 세우고,

그 위에 원추형 지붕을 얹었다.


정상에는 우승자가 받은 삼각배(三脚杯)를 올려놓기 위한 대(臺)가 있다.
전체 높이 약 7m, 너비 2.75m의 작은 건물이지만,

고전기 말기의 우아한 양식을 보여주는 뛰어난 조각 건축물이다.

아테네 국립극장


아테네 국립도서관


아테네 아카데미(Athens academy)


아테네 아카데미 (Athens academy)
고대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Plato, BC 428/427~BC 348/347)이 기원전 385년에 설립한 고등교육기관.


아테네 아카데미는 고대 그리스 아테네에 있었던 사설 교육기관이다.

주로 웅변과 화술(話術), 논리를 많이 가르쳤다.


아테네 아카데미가 세워지기 이전 고대 그리스의 교육은

스파르타식 교육 체계와 아테네식 교육 체계로 나뉘어 있었다.


도시국가 그리스의 대표적이었던 두 폴리스(polis) 스파르타와 아테네는

각자의 성격에 맞는 교육 시스템을 가지고 있었다.


스파르타는 7세 이상 어린이들을 한 곳의 기숙학교에 모아

20세까지 강력한 군사훈련 위주로 교육을 시켰다.
‘스파르타식 교육’이라는 말의 어원도 여기에서 비롯됐다.


반면 민주주의를 지향했던 아테네는 주로 대화 방법과

논리 등 상대를 설득하는 요령을 깨치는 교육이 성행했다.


또 스파르타와 달리 문화 지향적이었던 폴리스의 성격에 따라

음악과 미술, 체육 교육도 활발한 편이었다.


아테네에서 가장 발달했던 교육 형태는 수사학교(修辭學校)라는 것이다.

수사학교란 웅변술을 가르치는 학교를 말한다.


최초의 수사학교는 기원전 392년 그리스의 저명한 변론가

이소크라테스(Isokrates, BC 436~BC 338)가 세운 변론술학교였다.


수사학교는 기초적인 문법을 가르치는 초등학교와 달리

비교적 나이와 학식이 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일종의 고등교육기관이었다.
아테네 아카데미도 기원전 385년 아테네 교외의 아카데미아(Akademia)에 세워진 수사학교였다.


당시 학교 대부분은 당대의 철학자들이 제자를 키워내기 위해 설립했다.
아테네 아카데미의 설립자는 형이상학의 수립자로 일컬어지는 플라톤(Plato, BC 428/427~BC 348/347)이었다.


이후 ‘아카데미아’는 플라톤이 세운 학교 이름으로 널리 알려졌다.
플라톤이 숨진 후 스페우시포스(BC 395?~BC 339), 크세노크라테스(BC 396?~BC 314?) 등이 아카데미아를 이어 받았다.


기원전 270년에는 에포케(epokhe, 판단 중지)의 사상을 처음으로 주창한

아르케실라오스(Arkesilaos, BC 315~BC 240?)가 학교를 계승했다.


이 시기 아카데미아에서 배출한 폴레몬(Polemon, BC 314~ BC 269),

크라테스(Crates, BC 269~ BC 266) 등의 학자들이 아카데미아 학파를 형성했다.


이후 아카데미아는 ‘아카데미’라는 단어로 변형되면서 고대와 중세에 교육기관을 뜻하는 단어로 사용됐다.
특히 13~14세기 이탈리아에서 교육기관으로서 아카데미가 새로 확립됐고 15~16세기 크게 번성했다.
르네상스 시대에는 인문주의자들의 모임을 아카데미라고 부르기도 했다.


플라톤과 제자 아리스토텔레스(오른쪽)


플라톤 (Plato, BC 428/427~BC 348/347)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객관적 관념론의 창시자, 소크라테스의 제자. 귀족 출신.


40세경 아테네 교외의 아카데미아에 학교를 열어 교육에 임하였으며,

또한 많은 저작(30권이 넘는 대화편)을 썼다.


그의 철학은 피타고라스, 파르메니데스, 헤라클레이토스 등의 영향을 받았으며,

그 당시의 유물론자 데모크리토스의 사상과 대립하였다.


그는 유명한 이데아설을 제창, 이데아(혹은 eidos=형상)는 비물질적, 영원, 초세계적인 절대적 참실재이며
이에 대하여 물질적, 감각적인 존재는 잠정적, 상대적이고, 이 감각에 호소하는 경험적인 사물의 세계는
이데아의 그림자, 모상(模相)이라는 이원론적 세계관을 내세웠다.


세계의 중심을 이루는 것은 세계 영혼이며, 인간의 영혼은 세계 영혼이 주재하는 이데아계에 있던 것으로
이 영혼은 불멸(不滅)이며 이데아를 상기하는 것에서 진정한 인식이 얻어진다고 하였다.


감각적 지식은 단순한 '억견'(doxa)에 지나지 않고 영혼에 의한 지적 직관으로써 상기되는 것이 참지식으로,
이들 양자 사이에는 합리적 지식인 수학적 대상의 지식이 있다.


이때 그는 개념적 인식에 대하여 변증법을 말하고 있다.

그것은 점차 일반적인 개념으로 전진하여, 가장 일반적인 것에 이르는 과정과,

이 발전적 개념으로부터 점차 일반성의 낮은 단계로 하향(下向)하는 2개의 과정을 취한다고 하였다.


이리하여 인간에게는 육체에 임시로 머물고 있는 영혼에 의해 이데아계를 인식하는 곳에 인간의 최고의 기쁨이 있으며,
철학자는 현실 세계를 이 이상에 근접(近接) 시키는 역할을 한다.


그는 아테네 귀족의 대표로서 이상적 귀족국가의 구상을 내놓고 철학자에 의한 지배를 제창하여
이 지배자 아래에 군인이 있고 그 아래에 상인이 있는 계층을 생각하였다.


이것은 그가 영혼에는 이성적, 의기적(意氣的), 욕정적(欲情的)인 것이 있다고 한 것에 대응한다.
플라톤의 철학은 그 후 계속 관념론 철학에 강력한 여운을 남기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 (Aristoteles BC 384년 ~ BC 322년)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학문 전반에 걸친 백과전서적 학자로서 과학 제 부문의 기초를 쌓고 논리학을 창건하기도 하였다.


트라키아의 스타게이로스에서 출생하여 플라톤의 학교에서 수학하고,

왕자 시절의 알렉산더 대왕의 교육을 담당하였다.


B.C. 335년에 자신의 학교를 아테네 동부의 리케이온에 세웠는데,

이것이 페리파토스 학파(peripatetics : 소요학파, 逍遙學派)의 기원이 된다.


그는 플라톤의 비물체(非物體)적인 이데아의 견해를 비판하고 독자적인 입장을 취하였지만,
플라톤의 관념론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하고 관념론과 유물론 사이에서 동요하였다.


그의 연구는 1) 존재와 그 구성ㆍ원인ㆍ기원을 대상으로 하는 이론학, 이것에는 제1철학, 수학, 자연학이 포함되고,
2) 인간의 활동을 대상으로 하는 실천학, 여기에는 윤리학, 경제학, 정치학이 포함되며,
3) 창조성을 대상으로 하는 제작술(製作術), 여기에는 시(詩) 등 예술 활동이 포함된다.


제1철학은 후에 형이상학이라 불리워지게 되는 것을 말한다.
학문 연구의 대상은 일반적인 것의 획득이고, 이 획득은 감각에 기초한 지각에 의해 개개 사물 가운데 있는 일반적인 것을

인식함으로써 성립하며, 감각적인 것을 통하지 않고는 체험될 수 없다고 보고 귀납을 인식의 조건으로 삼았다.


그에 따르면 사물 생성의 조건이라는 의미에서의 원인으로
1) 질료(質料, 그 hylē, 영 matter) : 생성의 수동적인 가능성,

2) 형상(形相, 그 eidos, 영 form) : 질료에 내재하는 본질,
3) 운동의 시원(始原), 4)목적 등 네 가지를 들었다.


이렇게 일체의 존재는 질료와 형상의 결합이며, 가능성(질료)이 현실성(형상)으로 전화ㆍ발전하는 것으로 보았다.
질료에는 수동성을, 형상에는 활동성을 부여함으로써 운동의 시원과 목적을 형상에 귀착시켰다.


여기에서, 운동의 시원으로서 스스로는 움직이지 않으면서 다른 것을 움직이는 것,

즉 '움직이지 않는 최초의 움직이는 것'으로 신(神)을 내세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과 같이 초월적인 이데아를 인정하는 관념론자는 아니지만

역시 위에서 볼 수 있듯이 관념론적 입장이 보인다.


그러나 그가 자연을 논하는 경우에는 유물론적 색채가 농후하다.
그의 논리학은 존재론, 인식론과 밀접한 관계가 있고, 인식은 단순히 실험의 검증을 최후의 근거로 삼는 것이 아니라,
감각에 의하지 않고 정신의 작용만으로도 진리가 추정된다고 하면서, 귀납뿐만 아니라 연역의 중요성도 주장하고 있다.


그가 수립한 우주론(宇宙論)은 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설을 주장하기까지 오랜 세월을 지배하여 온 천동설이었다.

윤리학에서는 노예제 사회에서의 유한(有閑)계층의 사고에 부합하여 관조(觀照)를 정신 활동의 최고 형태라 하고,
그 모범을 가장 완전한 철학자, 자기 자신을 사고하는 사상으로서의 신(神)에게서 찾았다.


사회학에 있어서는, 노예제를 자연에 기인한 것이라 주창하고, 국가 권력은 그 최고 형태를 권력의 이기적 행사가 아닌,
사회 전체에 도움을 주는 것에서 찾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관념론과 유물론의 2면성은 후세의 철학 사상에 깊은 영향을 끼쳤으며,
특히 중세의 기독교는 그의 관념론을 받아들여 신학 체계를 세우는 데 크게 이용하였다.
그러나 동시에 그의 사상은 이러한 관념론을 타파하는 유물론의 근거가 되기도 하였다.


아테네 아카데미(Athens academy)


아테네대학교(National and Kapodistrian University of Athens)


1837년 5월 처음 세워져 신학과 법학, 의학, 예술의 4개 학부가 설치되고,

33명의 교수와 52명의 학생으로 시작하였다.


근대 그리스 국가와 발칸 및 동부 지중해지역에서 처음 세워진 대학으로,

당시 교명은 그리스 왕국의 초대 국왕이었던 오톤의 이름을 따 오톤대학교라 하였다.


1862년에는 국립대학교로 명칭이 변경되었으며, 1904년 예술학부가 예술과 과학부로 나눠지고
이후 과학부에 물리학과와 수학과가 설치되고 화학과가 추가되었으며, 약학과, 치의학부 등이 설립되었다.


1911년부터 1932년까지 카포디스트리아대학과 국립대학으로 나눠서 운영되다가,

1932년 두 학교는 아테네국립카포디스트리아대학으로 병합되었다.
이는 그리스 제1공화국 초대 대통령이었던 요안니스 카포디스트리아스를 기념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2009년 기준으로 경제정치과학, 법학, 과학, 교육학, 철학, 신학, 건강과학, 물리교육 및 스포츠과학부의

8개 학부에 36개 학과가 설치되어 있으며, 학부와 석사, 박사과정이 제공된다.


EU 통합 펀딩제도로 유럽연합 내외의 학생과 청소년, 자원봉사자, 교수, 교직원 및 시민단체 등에게

국외연수나 연구, 강의 등을 재정적으로 지원하는 에라스무스 플러스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다.
2006년에는 한국외국어대학교와 학술교류협정을 체결하였다.


주 캠퍼스는 조그라푸(Zorgrfou)에 위치하며 이 곳에는 과학과 신학, 철학부 등이 있다.
이 외에도 건강과학은 가우디 지역, 경제정치과학부와 행정시설 등은

아테네 중심지, 물리교육과 스포츠과학과는 다프네 캠퍼스에 있다.


대학 본관 건물은 신고전주의 양식의 건축물로 각각 본관의 왼쪽과 오른쪽에 위치한 그리스 국립도서관,

아테네 학술원과 더불어 아테네 신고전주의 3부작으로 불린다.


내부 정면 내벽 상단에 오스트리아 화가 칼 랄(Carl Rahl)이 그리스 신화와 역사 속 인물들을 그린 벽화가 유명하며,
본관 앞에는 오스만 제국 지배하에서 독립운동을 펼쳤던 작가 리가스 페레오스의 조각상이 있다.


학내에는 1886년에 설립된 인류학 박물관을 비롯하여

고고역사예술박물관, 성서고고학박물관, 아테네대학교박물관 등의 여러 박물관이  있다.


졸업생으로는 하릴라우스 트리쿠피스(Charilaos Trikoupis)와 엘레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Eleftherios Venizelos),
최초의 여성 총리인 바실리키 타누 크리스토필루(Vassiliki Thanou-Christophilou) 등을 비롯한 15명의 국무총리와
콘스탄티노스 카라만리스(Konstantinos Karamanlis), 카롤로스 파풀리아스(Karolos Papoulias) 등 3명의 전직 대통령이 있다.


또한 1963년과 1979년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시인 조지 세페리스(Giorgios Seferis)와

오디세우스 엘리티스(Odysseas Elytis)가 졸업했다.


마라톤 승전을 알리고 죽은 병사


세계인의 축제인 올림픽은 고대 그리스에서 시작되었다.

기원전 776년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이 정설.


4년마다 한번씩 열렸던 이 경기는 시민권이 있고, 범법행위를 한 적이 없으며,

제우스에 대해 불경한 행동을 한 적이 없던 남자만 참가할 수 있었다.


여성의 경우는 관전조차도 금지되어 있었는데,

이 경기에 참여한 모든 선수들이 벌거벗은 채였다는 것이 하나의 이유가 될까?


색다른 것은, 당시 고대 올림픽에는 운동선수만 참여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시인, 철학자, 예술가들도 참가해 문학, 예술, 연극 등을 겨루었다는데

현재에는 그 전통이 이어지지 않는 것이 아쉽다.


서기 393년 로마제국의 데오도시우스 1세가 반 기독교행사라고 규정하면서

제293회 대회를 마지막으로 고대 올림픽은 막을 내렸다.


역사 속에 묻힌 올림픽을 1896년 되살린 이는 프랑스의 쿠베르탕 남작.
빈곤한 그리스를 대신하여 돈을 쾌척한 그리스의 대부호 아베로프 덕분에,

아테네는 고대 경기장을 복원하여 제 1회 근대올림픽 개최지에 걸맞는 대리석 좌석의 경기장을 갖게 되었다.
지금도 그곳에 가면 아베로프의 동상을 볼 수 있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대리석으로만 된 이 경기장의 또 하나의 특징은

고대경기장과 같이 말발굽 모양의 구조라는 것.


5만명을 수용할 수 있는 이곳은 로마시대에는 투기장으로 사용되었으며,

현재에도 각종 육상경기와 행사 등에 사용되고 있다.


28회 2004 아테네 올림픽 당시에는 개막식과 폐막식이 거행되기도 했다.

이곳은 또한 마라톤의 도착지점이기도 하다.


BC490년, 아테네를 공격한 10만의 페르시아군을 1/5밖에 안 되는 2만의 아테네시민군이 물리친

마라톤 전투의 승전보를 알리기 위해 42.195km를 달려온 병사의 죽음을 기리는

이 뜻깊은 경기는 올림픽의 꽃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나저나, 그 병사도 누드였을까?

디오게네스는 헐벗고 다녔지만 그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나는 대왕 알렉산드로스다. 네가 원하는 것을 말하라.”

라며 위풍당당하게 그를 내려다보는 청년 앞에서 남루한 옷자락 속으로 손을 넣어 긁적거리며

“햇볕을 가리지 말고 비켜주시오”라고 말했다는 철학자 디오게네스.


시노페에서 태어나 일명 “시노페의 디오게네스”라 불리는 그는 퀴닉학파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문명을 반대하고 원시적인 생활을 추구한 그는 가능한 한 욕망을 줄이고

수치심을 느끼지 않으며 스스로 만족하는 것에 큰 가치를 두었다.


“아무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 상태”가 되어야 신에게 가까워진다고 생각했던 것.

그의 세계관에 맞게, 그의 외양은 초라했다.


한 벌의 옷, 한 개의 지팡이, 그리고 약간의 소지품이 든 자루. 그리고 그의 집은 통이었다.
그의 철학이 퀴닉학파라는 이름을 얻은 이유는 통속에 사는 그의 모습이 개(퀴온 Kyon)와 같았기 때문이었다.


아무것이나 잘 먹고 잠자리를 걱정하지 않으며 불평없이 정직하게 살아가는 개에게 찬사를 보내며

개처럼 살고자 했던 것이 가장 큰 이유였지만. 알렉산드로스 대왕과의 에피소드만큼이나 알려진 그의 기행은,

환한 대낮에 등불을 켜서 들고 다녔다는 것이다.


진실한 사람, 정직한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며 들고 다녔던 그 등불은 “디오게네스의 등불”이라는 이름으로 구전되었다.

현재 아테네에는 ‘디오게네스의 등불’ 기념비라고 알려진 것이 있다.


아크로폴리스의 동쪽에 있는 리시크라테스 기념비(Lysikrates Monument)는

BC 335 년경 소년 합창대회의 스폰서들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진 비석이다.


그러나 그 생김새 때문인지 사람들은 이 비석을 디오게네스의 등불이라 부른다.
현재 이 비석이 자리하고 있는 수도원은 1810년 바이런 경이 아테네를 방문했을 때 머물렀던 곳이기도 하다.


그리스 조각들은 사실적인 미를 추구했다.


아테네 국립고고학박물관, 누드조각상들이 가득한 곳
벌거벗은 옛 그리스인들을 보고싶다면 아테네 국립고고학박물관에 가면 된다.


물론 당시의 그리스인들이 이토록 멋진 몸매를 하고 있었을 것 같지는 않지만,

사실적으로 묘사된 나체의 조각상들이 박물관을 꽉꽉 채우고 있다.


아프로디테 여신이 기원전 4세기의 조각가 프락시텔레스가 만든 자신의 조각상을 보고 놀라
"도대체 프락시텔레스는 어디서 내 벌거벗은 모습을 보았는가?"라 했다는 이야기는 물론 지어낸 에피소드이겠지만,
당시 그리스인들이 그 조각상을 보고 놀라

“도대체 프락시텔레스는 언제 아프로디테 여신의 벌거벗은 모습을 보았는가?”라며 수근거렸을 법하다.


1891년에 문을 연 아테네 국립고고학박물관은 고대 그리스의 건축을 본떠 지어졌다.
조각상뿐 아니라 선사시대에서 헬레니즘 시대에 이르는 시기에 만들어진 조각, 회화, 공예품들이 한곳에 모였다.
조각상은 대부분 그리스의 신들을 모델로 하고 있는데, 입고 있는 옷이 없다보니 소지품으로 정체를 판단할 수밖에 없다.


BC460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진 유명한 포세이돈 청동상은 멋진 자세로 뭔가를 던지기 위해 팔을 뻗고 있는데,
그 손에 든 것이 삼지창인지 번개인지 알 수 없어 “제우스 또는 포세이돈 청동상”이라 표기해놓았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널리 포세이돈 청동상이라 알려진 이유는 아마도 바닷 속에 빠져있던 것을 건져올렸기 때문인 게 아닐까.
1928년 아르테미시온의 바닷속에서 건졌기에, 아르테미시온의 포세이돈상이라 불리기도 한다.



영상으로 아테네 둘러보기



참조 ; https://blog.naver.com/rabtle/220788503657

https://blog.naver.com/nasci/220798659226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965287&cid=42864&categoryId=50859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089647&cid=40942&categoryId=40465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871351&cid=43142&categoryId=43142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389720&cid=41978&categoryId=41985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389430&cid=41978&categoryId=41985

https://ko.wikipedia.org/wiki/%EC%95%84%ED%85%8C%EB%84%A4_%EB%8C%80%ED%95%99%EA%B5%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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