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린토스 (Korinthos)
그리스 본토와 펠로폰네소스반도를 잇는 코린트 지협(地峽)에 있었던 고대 폴리스 및 현대도시.


코린트(Corinth)라고도 한다.

그리스 남북육상교통의 요지인 동시에 이오니아해(海)와 에게해를 잇는 해상교통의 요지였다.


호메로스의 시(詩)에는 중요한 도시로 되어 있지 않으나, 시(市)의 유적에서

미케네 시대 전기의 도기(陶器)가 발견된 것으로 보아 먼 옛날부터 번영해 온 도시임을 알 수 있다.


코린토스 시는 지리적으로 유리한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상업 ·무역으로 크게 번영을 누려 왔고,
그리스의 여러 폴리스가 쇠퇴한 헬레니즘시대에도 상업도시로서 번성하여 ‘헬라스의 별’이라고 일컬어졌다.


일찍부터 그리스 제일의 도기제조 중심지가 되어 코린트식 도기를 생산하였으나,

나중에는 그 지위를 아테네에 빼앗겼다.


교통의 요지였기 때문에 고대에는 여러 차례 국제회의의 개최지가 되었다.
BC 146년 로마가 이를 철저히 파괴해버렸는데, BC 44년에 재건되어 다시 번영하였으며,

신약성서에도 그 이름이 나온다(고린도書).


그러나 521년에 지진으로 큰 타격을 입어 중세 이후 쇠퇴하다가 1858년 지진으로 다시 파괴되었다.

고대의 코린토스는 그리스에서 가장 중요하고 부유한 도시 국가 중 하나로,
펠로폰네소스 반도 북동쪽의 좁다란 지협에 위치하고 있어 무역 활동이 수월했기 때문에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기원전 8세기부터 6세기 중반까지 코린토스는 주요한 도기 수출 국가였으며, 그리스 세계 전역에서
동물, 전사, 식물 모티프의 프리즈로 장식된 코린토스의 특징적인 작은 플라스크가 발견되었다.


고대 코린토스에서 가장 중요한 건물들 중 하나는 아크로코린토스 아크로폴리스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고용되어 있던 수많은 매춘부들로 유명한 아프로디테 신전이다.


코린토스의 두 번째 참주인 페리안드로스 치세 때인 기원전 7세기에는 대단한 기술적 발전이 이루어졌으며,
고전 건축 양식 중 세 번째인 매우 장식적인 코린트 양식이 발전했다.


루키우스 뭄미우스가 통치하던 때인 기원전 146년 로마인들이 이 도시를 파괴했으나,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기원전 44년 다시 재건하여 이 도시에는 남부 그리스의 정부가 위치하게 되었다.


신약 성서에 많은 글을 남겼으며 성 베드로와 더불어 가장 유명한 초기 기독교 전도자였던

사도 바울은 서기 51년 처음으로 코린토스를 방문했다.


그는 6년 후 도시를 다시 찾았고, 두 편의 서간을 썼다.

바로 「고린도전서」와 「고린도후서」로, 신약 성서에 포함되어 있다.


현재의 새 코린토스시는 구(舊)코린토스시의 북동쪽 약 5 km의 지점에 있으며

코린토스현(縣)의 주도(主都)이다.


코린트만의 연안에 위치하며 아테네 등의 도시와 철도 ·간선도로로 연결되어 있다.
자체자원은 거의 없으며, 카란토(코린토스의 건포도라는 뜻)  · 올리브유 · 견직물 ·

펠로폰네소스의 북동부에서 생산되는 곡류 등을 수출하고 있다.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위성 사진


코린토스 만은 펠로폰네소스 반도와 그리스 본토 사이의 좁고 긴 만이다.
서쪽으로는 이오니아해(Ionian Sea)와 연결되어 있으며, 동쪽은 코린토스 지협으로 막혀 있다.
코린토스 지협에는 코린토스 운하가 건설되어 있어 에게 해로도 연결된다.


아테네와 코린토스 지도


이오니아해(Ionian Sea)와 에게해(Aegean Sea) 사이 아테네와 펠로폰네소스 반도에 코린토스가 있다.
아가야(Achaia)는 고대 그리스 마게도냐 남단의 지명으로 수도는 고린토스. 고린도 교회가 있었다.


바울이 2, 3차 전도여행 때 방문했던 로마의 한 속령으로 고대 그리스 마게도냐 남단을 일컫는다(롬 15:26; 살전 1:7).
원래는 펠로폰네소스 북쪽의 비옥한 지역을 말했으나 로마의 지배를 받게 되면서

마게도냐를 포함한 넓은 지역을 아가야라고 불렀다.


BC 27년에 황제 아우구스투스는 아가야를 분할하여 다시 북쪽을 마게도냐로, 남쪽을 아가야로 명칭했다.
바울 당시 아가야 총독은 갈리오, 수도는 고린토스였다(행 18:12; 고후 1:1).


마케도니아(Macedonia)는 바울이 선교했던 유럽의 첫 지역이다.

발칸 반도의 그리스 북쪽에 위치했던 왕국이다.


마케도니아는 BC 7세기경 페르디카스 1세가 세웠으며,

BC 4세기 알렉산더 대왕 때 전성기를 맞아 그 세력이 인도에까지 미쳤다.


그러나 알렉산더 대왕 이후에는 분열하였고 로마의 속주가 되었다.
성경에서도 마케도니아는 바울이 선교했던 유럽의 첫 지역.


바울은 마케도니아의 네압볼리, 빌립보, 암비볼리, 아볼로니아, 데살로니가 등을 방문했다.

(행 16:12; 17:1; 고전 16:5; 고후 7:5; 빌 4:15; 살전 4:10; 딤전 1:3).


마케도니아의 성도들은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를 위해 헌금했고

바울이 마케도니아를 떠나 아가야로 갈 때 바울을 유일하게 후원하였다.(롬 15:26; 고후 8:1-5; 빌 4:15)


코린토스(Corinth)는 그리스의 항구 도시로 상업과 무역이 번창한 상업도시이자

동서문화와 종교의 혼잡을 이루었던 도시이다.


BC 8세기경 강력한 경제력과 군사력을 지닌 도시였으나 BC 146년에 로마의 뭄미우스 장군에 의해 파괴되었다가
BC 46년 율리우스 시이저에 의해 재건되어 로마인들이 이주하여 살았다.


그 후 아우구스투스 황제에 의해 아가야 지방의 수도가 되었으며(BC 27)

상업, 무역, 정치의 중심지로 번창하였다.


2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야외극장이 있었고 여기서 운동경기가 수시로 열렸다.
코린토스에는 적어도 12개의 신전이 있었는데 도시 중앙에는 아폴로 신전이 있었고

북쪽에는 치료의 신인 아스클레피우스 신전이 있었다.


또 코린토스에는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에게 바쳐진 신전이 유명했다.

이곳에는 1,000명 정도의 신전 매춘부들이 있어 도시 전체를 도덕적으로 타락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그래서 ‘코린토스인이 되다’라는 헬라어 ‘코린티아조마이’(Korinthiazomai)가

‘성적으로 부도덕하게 되다’라는 의미를 가질 정도였다.
이러한 도시의 타락은 코린토스 교회 내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고전 5:1).


사도 바울의 선교여행 지도


바울은 2차 전도 여행 때 이곳에 들러 1년 반 동안 머물면서 전도하여 고린도 교회를 세웠다(행 18:1-11).
바울은 이곳에서 로마서, 갈라디아서, 데살로니가전후서를 썼다.


바울 이후 교회 역사에서 고린도는 중요성을 잃어갔으며,

1458년 사라센에게 점령되었고 1858년 대지진으로 폐허의 도시가 되었다.


위성 사진으로 본 코린토스 운하


코린토스 운하(Corinth Canal)는 코린토스 만과 에게 해의 사로니코스 만을 연결하는 운하이다.
코린토스 지협을 따라 1881년부터 1883년까지 6.3 km의 길이로 건설되었다.
운하의 폭이 24m, 깊이가 8m로 규모가 작기 때문에 운하를 이용하는 선박은 대부분 관광용 여객선이다.


위성 사진으로 본 코린토스 운하


코린토스가 일찍부터 그리스 세계의 상업 중심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까닭은
본토와 펠로폰네소스를 잇는 동시에 두 만의 바다를 이어주는 지협에 위치한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작은 배라도 한쪽 바다에서 다른 쪽으로 옮기는일은 고되고 위험한 일이었다.
그런 까닭에 고대부터 이 지협에 운하를 파려는 수많은 계획과 시도가 있었다.


고대 코린토스와 코린토스 다리의 위치를 표시한 지도


이미 기원전 6세기 초에 코린토스의 참주 페리안드로스는 이곳에 운하를 팔 계획을 세웠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로마의 칼리굴라 황제 역시 운하를 팔 계획을 세웠지만 비명횡사하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못했다.


그러나 네로 황제는 6000명의 유대인을 팔레스타인에서부터 코린토스로 이주시켜 운하를 파는 작업을 시작했다.
이 공사는 골족의 로마 침입으로 중단되었지만 유대인들은 계속 코린토스에 남아 살게 되었다.
이 유대인들이 나중에 사도 바울을 맞아 코린토스에 유럽 최초의 그리스도교 교회를 세우게 된다.


코린토스 운하 전경


운하의 양쪽 끝에는 조그만 포구가 있고 운하의 양쪽을 차가 다닐 수 있도록
수면에서 겨우 몇 미터 떨어져 있는 나지막한 다리가 놓여 있다.


이 다리는 배가지나갈 때는 물밑으로 가라앉는다.
다리가 가라앉고 그 위를 배가 지나는 광경은 평화롭기만 하다.


코린토스 운하 (Corinth Canal)


길이 6.3km. 바닥 너비 21m. 표면 너비 25m. 깊이 8m. 프랑스 자본으로 1882∼93년에 굴착되었다.
이 운하가 완성됨으로써 아테네의 외항 피레에프스와 이탈리아의 브린디시 사이의 항로를 320km 단축하였다.


예로부터 이 운하를 만들 계획이 있었으며,

로마의 황제 네로도 6,000명의 유대인 포로를 동원하여 공사에 착수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운하의 수면 위 60m에 길이 33m의 다리를 놓았으나 철도교(鐵道橋)는 폐쇄하였다.
수위가 일정하여 갑문이 없으나 약간의 조류에도 항행에 주의가 필요하다.


여객선이 오가는 코린토스 운하


2006. 03.11 코린토스 운하 방문 기념 촬영


2006. 03.11 코린토스 운하 방문 기념 인증샷


멀리 보이는 쪽이 에게해(Aegean Sea), 안쪽이 이오니아해(Ionian Sea)이다.
운하를 가로지르는 80m 다리 위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난간을 붙들고 있는 손에서 땀이 솟고 발끗이 찌릿해 온다.
다리 아래로 고개를 내밀어 물빛을 쳐다보고 있으면 고소공포증이 밀려와 두렵기도 하다.


코린토스 운하 다리


코린토스 시내


KBS 걸어서 세계 속으로. 495회. 고대 코린토스



도시 사이에 뚫린 코린트 운하 / Corinth Canal / Peloponneso s / Railroad bridge



고대 코린토스 (Ancient Corinth) 조감도 입체 영상




참고 ;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950584&cid=43081&categoryId=43081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150070&cid=40942&categoryId=34085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150075&cid=40942&categoryId=32191
https://ko.wikipedia.org/wiki/%EC%BD%94%EB%A6%B0%ED%86%A0%EC%8A%A4_%EC%9A%B4%ED%95%98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