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걸어서 세계 속으로 495회. 코린트 유적지


고대 그리스에서 상업과 문명이 가장 번성했던 곳.
BC 146년 로마군이 침입해 폐허로 만들어 버린 것을 로마 황제 카이사르(Caesar)가 BC 44년에 재건함


코린토스 유적지 조감도


유물과 역사를 연구해서 추정한 당시의 조감도를 찍은 사진.
아폴론 신전 터 바로 옆이 고대 아고라 광장.
이곳에는 역시 오데온, 스토아를 비롯해 화려했던 고대 코린토스 시가지의 각종 건물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아폴론 신전과 글라우케(Glauce)의 샘


글라우케(Glauce)의 샘


글라우케(Glauce)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코린토스 왕국 크레온 왕의 공주로 크레우사라는 별칭을 갖고 있다.
이아손은 글라우케 공주와 결혼하기 위해 아내인 메데이아를 버리고, 이에 메데이아는 복수하기로 마음먹는다.
글라우케는 메데이아가 결혼 선물로 보낸 웨딩드레스를 입고 불길에 휩싸여 죽는다.


이아손에 대한 사랑 때문에 아버지와 조국을 배반하고 동생까지 끔찍하게 죽인 메데이아,
그녀는 이아손과 함께 이올코스로 와서 이아손의 아버지 아이손을 회춘시켜주고,
아이손의 왕위를 찬탈한 아이손의 의붓형 펠리아스에게 처참하게 복수를 한다.


이아손은 메데이아가 이올코스에서 행한 잔인한 복수 때문에 고향에서 쫒겨나 코린토스로 망명한다.
이아손과 메데이아는 코린토스의 왕 크레온의 환대 속에서 자식들을 낳고 행복한 삶을 누린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은 마법의 힘을 가진 이방인 메데이아를 꺼려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아들이 없는 크레온 왕은 이아손을 자신의 딸인 글라우케와 결혼시켜 왕위를 물려주고 싶어하고,
섬뜩한 느낌을 주는 메데이아에게 싫증이 난 이아손은 왕의 제안을 수락한다.


그리고는 메데이아에게 자신이 공주와 결혼하는 것은 공주를 원해서가 아니라
이방인 마녀인 그녀를 구하고 자식들에게 왕가의 피가 흐르는 형제자매를 만들어주어
안전한 울타리를 만들어주기 위함이라고 변명을 한다.


한편 메데이아가 공주에게 치유할 수 없는 재앙을 가져오리라고 예감하는 크레온 왕은
그렇지 않아도 자신의 계획에 장애물이 될 메데이아와 그녀의 자식들에게 추방령을 내리고,
이아손은 글라우케와의 결혼에 마음이 들떠 메데이아와 자식들은 안중에도 없다.


이아손을 위해서라면 어떤 끔찍한 일도 마다하지 않았던 메데이아는
이아손의 마음이 자신에게서 떠난 것을 확인하고 처절하게 복수하기로 결심한다.


메데이아는 크레온 왕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척 하면서 아이들을 위해서 하루만 머물게 해달라고 간청한다.
크레온 왕으로부터 하루의 기한을 얻은 메데이아는 그 하루 동안에 이아손에 대한 복수를 감행하기로 결심하고
크레온 왕과 글라우케 공주 그리고 남편 이아손을 죽일 계획을 세운다.


메데이아는 글라우케에게 결혼 축하 선물로 할아버지인 태양신 헬리우스가 자손들에게 준 값진 장신구와 함께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자신할 수 있는” 그러나 독이 묻은 웨딩드레스를 보낸다.


아무 것도 모르는 순진한 글라우케는 신랑의 전처인 메데이아가 보낸 선물을 보고 기뻐하며 웨딩드레스를 입어본다.
옷을 입는 순간, 글라우케는 옷에 묻은 독이 몸에 퍼지면서 온 몸에 불이 붙는다.
결국 글라우케는 불길에 싸여 숨을 거두고, 딸을 구하고자 한 크레온도 불에 타 죽는다.


나중에 코린토스 지역에 내려오는 전설에 의하면, 글라우케는 연기를 견디다 못해 우물에 몸을 던졌다고 한다.
이후로 그 우물은 글라우케 샘이라고 불리운다. 글라우케는 그리스 말로 푸른 물빛을 가리키는 단어이다.


글라우케의 샘
언덕의 송수관을 통해 글라우케의 샘에 있는 4개의 저수지가 채워진다고 한다.


글라우케를 살해한 메데이아의 뒷이야기


이아손에 대한 사랑 때문에 온갖 끔찍한 일도 마다하지 않았던 메데이아는 이아손의 새 신부 글라우케를 살해하고 난 후
이아손에게 복수하기 위해 그에게 죽음보다도 더 큰 괴로움을 주기로 결심한다.


메데이아는 급기야 이아손에게 낳아준 자식들, 메르메로스와 페레스를 죽인다.
그리고는 태양신 헬리오스로부터 날개달린 용들이 끄는 수레를 얻어 타고 아테네로 도망간다.


아테네의 왕 아이게우스는 메데이아를 따뜻하게 맞이해주고는 그녀와 결혼하여 아들 메도스를 낳는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를 모른 채 자라 어른이 된 테세우스가 아버지 아이게우스 왕을 찾아온다.


메데이아는 테세우스의 정체를 파악하고는 그를 죽일 음모를 꾸민다.
아이게우스는 메데이아의 음모로 테세우스가 위험에 빠진 결정적인 순간에 그가 자기 아들임을 알게 된다.
아이게우스는 테세우스를 구해내고는 메데이아를 추방한다.


오랜 세월이 지난 후 메데이아는 다시 조국 콜키스로 돌아가는데,
아버지 아이에테스가 동생에게 왕위를 빼앗긴 것을 알고는 아버지를 다시 왕위에 올린다.


아폴론 신전과 코린토스 상점터 유적지


고대 코린토스가 쇠락하게 된 결정적인 원인은 로마의 파괴와 약탈 때문이었다.
코린토스는 기원전 146년 로마군을 막기 위해 아카이아 동맹군(펠로폰네소스 반도 도시국가들의 동맹)을
형성하지만 아카이아 동맹군은 로마에 대패하고 만다.


로마의 장군 무미우스는 코린토스를 약탈하고 철저하게 파괴했다.
기원전 44년 코린토스의 지정학적 중요성을 간파한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자신의 병사들이 살아 갈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기 위해 코린토스 재건을 시작하지만 그의 죽음으로 완성하지 못한다.


그러나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에 의해 코린토스는 재건설되어 옛날의 부귀와 영화를 되찾았다.
사도 바울이 왔을 때 코린토스는 로마 속주 중 가장 발달하고 부유한 곳이었다.


아폴론 신전과 코린토스 상점터 유적


옛 코린토스 유적지에 지금까지 남아있는 아폴론 신전. 이것도 로마시대에 파괴된 것을 재건한 유물이다.
이 지역은 코린트가 번성할 당시 정치적, 종교적, 상업 중심지역.


코린트는 기원전 8세기에 문명이 시작되어 기원전 5세기에는 그리스에서 중요한 도시국가중의 하나로 발전.

기원전 146년에 로마에 파괴.  이후에 로마에 의해 새로운 부흥시기를 맞는다.


바다와 항구가 보이는 코린트 유적지 전경


철학자 디오게네스를 방문한 알렉산더. 세바스티아노 리치. 18세기 이탈리아 화가.



거지 철학자 디오게네스와 세기의 영웅 알렉산드로스


 벨레로폰테스의 성공과 몰락이 코린토스 사람들에게 히브리스를 경계하도록 해주었다면, 거지 철학자 디오게네스는

허영과 쾌락에 흥청거리던 코린토스 사람들에게 검소한 삶을 통해 절제의 미덕을 가르쳐주었다.
절제 곧 소프로쉬네(sophrosyne) 또한 그리스 인들에게 중요한 삶의 좌표가 된 덕목이었기 때문이다. 


코린토스에 기인 철학자가 있다는 얘기를 듣고 알렉산드로스가 디오게네스를 찾아왔다.
그는 당당한 모습으로 디오게네스에게 ‘그대는 짐이 두렵지 않은가’ 물었다.


디오게네스는 ‘도대체 당신은 누구입니까? 선한 자입니까? 아니면 악한 자입니까?’라고 되물었다.
알렉산드로스가 ‘물론 선한 자이다’라고 대답하자, 그는 ‘그러면 누가 선한 자를 두려워하겠습니까?’라고 대답했다.
디오게네스의 침착함이 빛나는 대목이다. 


세상에 널리 알려진 알렉산드로스와 디오게네스의 일화는 ‘햇빛’과 관련된 것이다.
디오게네스가 담대하고 욕심 없는 사람이라는 점은 알렉산드로스가 디오게네스에게
‘나에게 원하는 소원이 있으면 말해 보라’며 그리스 전역을 굴복시킨 왕의 위세를 과시했을 때 나타났다.


디오게네스는 단지 ‘부디 햇볕을 가리지 말아주시오’라고 응대했던 것이다.
순간 불쾌해진 알렉산드로스가 칼을 뽑아 그를 죽이려하다가 멈추고,
이내 ‘내가 알렉산드로스가 아니었다면 디오게네스가 되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사실 디오게네스는 코린토스 사람은 아니었다. 또 일찍부터 철학을 했던 것도 아니었다.
그는 지금의 터키의 흑해 연안의 그리스 식민 도시인 시노페 출신이었다.


그의 부친은 환전상이었는데, 통화를 조악하게 개조하는 바람에 투옥되어

감옥에서 죽고 디오게네스는 조국에서 추방당하게 된다. 


아무튼 디오게네스가 위폐 주조라는 황당한 사건을 저지르게 된 배경이 흥미롭다.
그는 세상에서 큰 명성을 얻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델포이의 신탁을 구했다.
신탁은 ‘나라 안에서 적용하고 있는 것을 바꾸라’는 것이었다. 


이 신탁의 의미는 통용되는 제도와 문화를 혁신하라는 뜻이었지만,
디오게네스는 화폐의 개주(改鑄)로 잘못 해석했었다는 것이다.


이 사건으로 그는 멀리 아테네로 망명했고, 이런 과거는 종종 사람들의 조롱거리가 된다.
그때마다 그는 더 이상 과거의 부정한 행위를 했던 자신이 아니라고 당당하게 말하곤 했다. 


디오게네스가 극도로 청빈한 철학자가 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위조 화폐 주조 사건이 계기가 된 것 같다.
그가 조국에서 추방당한 후 아테네로 망명하여 금욕주의 철학인 키니코스학파(Cynics, 견유 학파)의 창시자인
안티스테네스(Antisthenes, BC 445?~BC 365?)를 스승으로 모시게 되었기 때문이다. 


견유(犬儒)학파라는 명칭에서 혹 ‘개 같은 삶’과 무슨 연관이 있나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사실 키니코스학파라는 명칭은 안티스테네스가 자주 들려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던 체육장의 이름
키노사르게스(kynosarges)에서 유래되었다. 키노사르게스는 '흰 개‘를 의미했기 때문이다.


디오게네스는 소크라테스의 제자였던 안티스테네스를 만남으로써 소크라테스의 집요한 지혜 추구 정신과
스승 안티스테네스의 지독한 절제의 정신을 배워 무욕(無慾)과 자족(自足)의 철학을 실천하는 철학자로 거듭났던 것이다.
그는 스스로 “조국을 빼앗겨 나라도 없고 집도 없는 자. 일상의 양식을 동냥하고 방황하는 인간”이라고 말하고 다녔다.


디오게네스는 어린애가 두 손으로 물을 떠서 마시는 것을 보고, 자신의 바랑에서 컵을 꺼내 내던졌고,
어린애가 빵의 패인 곳에 수프를 넣어 먹는 것을 보고 자신의 밥그릇도 내던졌다.
그가 통나무로 만든 술통에서 살았던 것도 간소한 삶을 실천하는 방안의 하나였다.


디오게네스가 아테네를 거쳐 환락이 넘치는 코린토스까지 간 것도
끝없는 욕망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대중들의 그릇된 삶에 경종을 주기 위해서였는지도 모른다.


디오게네스는 대낮에도 등불을 켜고 다니며, ‘나는 인간을 찾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스스로 노숙자와 같은 자신의 삶을 탐욕에 찌든 코린토스 시민들에게 보여주면서
육체적 안락과 쾌락을 멀리하고 덕을 쌓을 것을 권면했던 것이다.


그는 “경주를 할 때에는 옆 사람을 팔꿈치로 치거나 발로 차거나 해서 사람들은 서로 겨루려는데,
훌륭하고 선한 인간이 되는 것에 대해서는 누구 한 사람 서로 겨루려고 하는 자가 없다”고 말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디오게네스는 그리스 사회에 만연한 쾌락과 탐욕의 사회 문화를 지혜와 덕을 추구하는

아름다운 사회 풍조로 바꾸려 애썼던 것이다.
이는 자신이 받았던 신탁의 본래의 참뜻인 나라에 통용되는 사회문화를 바꾸는 소명을 실천했던 셈이다.


그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고 후세에까지 명성이 전해지고 있는 것을 보면,
그의 노력이 완전한 결실은 거두지 못했지만, 늘 사회의 목탁 역할을 했던 것만은 틀림없는 듯싶다.
디오게네스가 죽은 후 코린토스 시민들이 그를 찬양하여 청동상을 세우고 시구를 새겼던 것이 이를 입증해 준다.


청동도 세월이 지나면 늙는 것.
하지만 그대의 영예는 디오게네스여, 영원히 썩지 않으리.
그대만이 홀로 죽어야 할 자들에게 자족(自足)하는 방법과,
가장 쉬운 삶이 길을 가르쳤으므로.


디오게네스는 지협(地峽) 이스트모스로 통하는 성문 옆에 매장되었다고 한다.

그곳이 어딘지는 알 수 없다.


또 지금의 코린토스에서 디오게네스가 거닐던 체육장인 크라네이온(Craneion)이 어디쯤인지도 찾을 길이 없다.
그러나 그가 보여준 검약과 절제의 삶은 사치와 방탕에 빠져 갖가지 유혹에 노출되어 있던 코린토스 사람들에게
어느 정도 욕망의 제동장치가 되어주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아폴론 신전 유적지 전경


아크로 코린토스(Acros Corinth)를 배경으로 서 있는 아폴론 신전


아크로 코린토스(Acros Corinth)는 제우스 신으로부터 형벌을 받은 시시포스가

바위를 굴려서 언덕 위로 올라가야 하는 일을 영원히 반복한다는 이른바

시시포스의 언덕이란 전설을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아폴론 신전


코린토스가 전성기였던 기원전 6세기에 다른 신전이 있던 자리에 태양신 아폴론을 모시기 위해 세워졌다.
가로 53m 세로 21m의 대좌를 38개의 기둥이 감싸는 모습이었고
내부에는 16개의 기둥이 신전을 떠받치고 있었는데 지금은 기둥 7개만 남아 있다.


아테네 파르테논 신전의 기둥은 중간중간 잘라져 만들었는데
여기 아폴론 신전은 한덩어리의 돌로 만들어진 도리아식 기둥이 특징이다.
도리아식은 남성미가 풍기며 간결하고 장중하다.


고대 코린토스 유적 중 유일하게 그리스 유적이며, 올림피아의 헤라신전 다음으로 오래된 신전이라고 한다.
돌 하나로 만들어진 기둥으로 신전을 만든 것이 다른 신전과 구별되는 특징.

아폴론 신전


지역에서 생산되는 석회석으로 만들어졌는데 신전을 둘러싸는 38개의 도리아식 기둥과

내부의 16개 기둥으로 이루어진회랑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아폴론 신전


신전의 내부는 분리된 2개의 방으로 이루어져 있고, 지붕은 화려한 건축적 요소들로 장식되었다고 한다.
로마인들 역시 신전으로 사용했다가 기독교가 공인된 이후로는 교회로 사용되었다.


아폴론 신전을 배경으로 인증샷



코린토스에 남겨진 유적 / Ruins/Sanctuary of Apollo / Lechaion road / Bema


참고 ; https://blog.naver.com/felwithe/221346632800
https://blog.naver.com/wabool/221088240695
https://blog.naver.com/springborn/221295553443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3397666&cid=58143&categoryId=58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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