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로파포스(Philopappos) 언덕 지도


필로파포스(Philopappos)는 고대 로마시대 집정관의 이름이다.
아테네인들은 관대한 정치를 베풀었던 그에게 감사와 존경의 의미를 담아 그가 죽은 후 추모탑을 세우고

이 언덕에 이름을 붙여'필로파포스 언덕'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언덕 꼭대기에 세워진 추모탑과 거기서 바라보는 아테네의 아름다운 전경으로도 유명하지만
이곳이 바로 소크라테스가 죽음을 맞이한 장소라고 전해지는 '소크라테스 감옥'이 위치해 있어서 더 유명하다.

소크라테스의 감옥



소크라테스


소크라테스는 플라톤(Plato),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와 함께

고대 그리스 철학의 전성기를 이룩한 인물이다.


소크라테스의 생애를 추정할 수 있는 초창기 자료는 대부분

제자인 플라톤과 크세노폰(Xenophon)에게서 나왔다.


플라톤의 대화편 《테아이테토스(Theaetetos)》에 따르면

소크라테스는 기원전 469년경 아테네에서 조각가인 아버지 소프로니코스(Sophroniscus)와

산파인 어머니 파이나레테(Phaenarete)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남을 가르치는 일 즉, 철학적 토론에 매진했는데,

남루한 옷차림으로 광장을 거니는 그에게 다양한 계층의 제자들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또한 강의를 통해 세속적인 명예와 부를 누렸던 소피스트(Sophist)와는 달리

소크라테스는 가르침의 대가로 돈을 받지 않았다.


소크라테스는 뻐덕니, 주먹코에 왜소한 체격과 투박한 외모를 가졌으나

체력이 좋고 참을성이 많았다고 전해진다.

 
또한 느긋한 성격이었으며 사색에 잠기는 일이 많고,

부(富)에 연연하지않는 삶을 살았다고 한다.


그는 자신보다 훨씬 나이가 어린 크산티페(Xanthippe)와 결혼하여 세 명의 자녀를 두었다.
크세노폰은 《회고록(Memorabilia)》에서 어머니의 엄격함에 대해

불평하는 아들과 아들을 타이르는 소크라테스에 대해 다루었다.


이를 근거로 후대 저작들에서 크산티페는 종종 잔소리 많은 악처로 묘사되는데

이는 과장된 측면이 크다.


소크라테스는 말년에 정치적 문제에 휩쓸렸다.
당시 아테네에는 기존 민주주의 세력과

스파르타의 법을 새로이 차용하고자 한 귀족주의 정파 간의 갈등이 지속되고 있었다.


아테네가 펠로폰네소스전쟁에서 패배하자 귀족주의 세력이 힘을 얻었으나
다시 세를 회복한 민주주의 정권은 소크라테스를 귀족주의의 본보기로 처형하고자 했다.


비록 현실정치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으나 그의 이론들은 민주주의를 비난하는 것처럼 보였고,
제자와 친구들 상당수가 귀족주의 편에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소크라테스는 신성모독과 청년들을 현혹한다는 죄목으로 사형판결을 받았다.
플라톤은 대화편 《파이돈(Phaidon)》에서 스승 소크라테스가

독약을 마시고 죽음을 의연하게 맞이하는 장면을 상세하게 묘사했다.


고대 그리스 철학이 소크라테스 이전과 이후로 나뉠 정도로

철학사에서 소크라테스와 그의 철학사상이 갖는 의미는 남다르다.


그러나 직접 남긴 저작이 없기 때문에 그의 고유한 사상을 명확히 파악하기는 어렵다.
그의 학설은 제자들이 남긴 기록과 그 안에 담긴 소크라테스의 언행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유추되고 있을 뿐이다.


그 가운데 문답법이라는 독특한 교육방식과 재판과정은

소크라테스의 철학사상을 이해하는 중요한 실마리이다.


소크라테스는 질문을 던지는 것 자체에 큰 의미를 두었다.
그는 다양한 사람들과 토론하는 것을 즐겼는데

일반적인 교사들이 제자들이 던진 질문에 답을 주고자 했던 것과는 달리 거꾸로 질문을 던졌다.


그는 정의가 무엇인지, 경건하고 불경한 것이 어떤 의미인지, 신중함과 무모함이 어떻게 다른지,
우정을 어떻게 볼 것인지 등에 관해 상대방에게 질문을 던지고

그 과정을 통해 계속해서 답을 찾아 나가도록 유도하였다.


질의응답을 통한 지식의 추구라는 변증법 방식은 소크라테스 이전 시기부터 존재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이를 적극적으로 사용하고 발전시켰다.


소크라테스는 스스로의 무지를 자각하고자 했다.
‘너 자신을 알라(gnothi seauton)’는 고대 격언은 소크라테스를 통해 더욱 유명해졌다.


델포이 신탁은 소크라테스를 가장 현명한 사람이라고 선언하였으나

그는 '자신은 아무것도 모른다'고 말하고 다녔다.


이와 같은 인간 스스로의 무지에 대한 자각과 문답법을 이용한 내면적 탐구는
고대의 철학적 관점이 자연에서 인간으로 옮겨갔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소크라테스의 사상은 윤리적인 측면이 강했다.
실제 생활에서도 절제를 추구하였던 그는 ‘선’을 중시하여 토론 과정에서도 관련된 질문을 많이 던졌다.


또한 그는 옳은 것을 알았을 때 비로소 바르게 행하게 된다고 생각하여 덕과 앎을 동일시하였다.
최선의 선을 추구하기 위해 사람들은 참된 덕이 무엇인지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한편 도덕적이고 금욕적인 삶의 추구는 스토아학파의 선구적인 모습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소크라테스의 사상은 정치적으로 해석될 여지를 갖고 있었다.
특히 ‘현인(賢人)에 의한 통치’, ‘화려한 연설에 대한 비난’, ‘스스로의 무지에 대한 자각’,
‘덕과 앎의 일치’는 아테네의 민주주의 정부에 대한 위협으로 비춰졌다.


이후 플라톤은 이러한 사상을 발전시켜

이상적인 철인정치(哲人政治)를 보다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한편 일부 연구자들은 아름다움, 선과 같은 보이지 않는 초월적인 것에 대한 물음을 던졌다는데서
소크라테스가 플라톤의 '이데아'에 영향을 끼쳤다고 주장했으나,

두 사상의 개연성에 비약적 측면이 있어 논란의 여지가 있다.


소크라테스의 감옥이라고 소개되고 있지만 소크라테스가 실제로 갇힌 곳은 고대 아고라에 있다고 한다.


경희대 국문학과를 졸업하고 모 방송국 아나운서로 재직하다가 아테네로 유학을 와서

현지인과 결혼을 하고 행복하게 산다는 가이드는 낭랑하고 구슬이 또르르 굴러가는 아름다운 목소리로

소크라테스의 인생과 철학을 감동깊게 해설한다.


소크라테스는 매일 아고라에서 시민과 제자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대화를 통해 사람들의 영혼을 각성시키려고 하였다.

하지만 아테네가 전쟁 후 스파르타에게 항복한 이후 시민들은 변하게 된다.


스파르타의 지배는 8개월 만에 무너졌고 다시 민주주의자들이 권력을 장악했지만

부패한 야심가들에게 눈엣가시였던 소크라테스는 불경죄로 몰려 재판을 받게 된다.

재판 후 사형선고를 받은 그가 남긴 진술은 "악법도 법이다"


소크라테스의 감옥 내부


이곳은 고대 아테네에서 실제로 죄인을 가두는 감옥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상징적인 의미로 소크라테스의 감옥이라고 불리는 것일 뿐,

실제로 소크라테스는 고대 아고라의 감옥에서 죽었다고.

2006. 03.12 감옥 앞에서 인증샷


필로파포스(Philopappos) 추모비


기원전 2세기에 건설된 필로파포스 추모비는 약 12m 높이의 대리석 탑이다.
실제 이 추모탑 뒤편에는 필로파포스의 석관이 있었다고 하는데 파괴되었고,
지금의 모습은 1904년에 복원된 것이라고 한다.

필로파포스 언덕에서 바라보는 아크로폴리스


아크로폴리스에서 바라본 필로파포스 언덕


참조 ; https://spceo.blog.me/221135414745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385968&cid=43843&categoryId=43846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114187&cid=40942&categoryId=404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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