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땅굴과 엘리베이터

법원 검찰청 밑으로 굴이, 침침한 땅굴이 뚫려 있는 줄은 나는 몰랐다.

감옥 출입이 잦았던 사람들을 많이 만나서 얘기들은 것 같은데 이에 대해서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사실 그건 얘깃거리가 되지 못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할지 모른다.

쇠창살 사이사이에 맺히는 서러움만 얘기해도 끝이 없을 텐데, 이 땅굴까지 포함시키면 필경 지치고 말 것이다.

그러나 나는 땅굴 얘기를 좀 해야겠다.

뭐 대단한 것은 아니지만 기록해둘 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구치감으로부터 검찰청 빌딩 5층 공안부 검사실까지 걸어가는데 꼭 30분이 걸렸다.

논스톱 엘리베이터를 탔는데도 말이다.

보행을 아주 느리게 할 수밖에 없었고, 계단은 부축해서야 오르내릴 수 있었다.

나는 이 땅굴에 들어서면 늘 환상적인 세계로 들어온 것만 같았다.

오르막과 내리막이 있고 갈래 길도 있으며 계단도 있다.

가끔씩 흐릿한 바깥 빛이 조금씩 새어드는 데도 있고.

 

그러나 무엇보다 굴 벽 여기저기 걸려있는 노란 불. 이것이 나를 어질어질하게 했다.

여기 들어서면 속이 느글느글해지고, 굴 전체가 왼쪽으로 기우뚱 오른쪽으로 기우뚱 끊임없이 흔들렸다.

이런 것을 롤링이라고 하는지 핏칭이라고 하는지 헷갈리지만, 멀미가 날 것 같아 멈춰서서 벽에 기댄 채 호흡을 조정해야만 했다.

눈을 감고 자꾸 속을 내리 누르면서.

 

어떻게 보면 자베르 경감에게 쫓겨 도망쳤던 장발장의 암담한 하수도 같이 생각되었고,

백성들의 고혈을 짜내던 악당 무림인들을 쳐부수기 위해 당당하게 쳐들어갔을

무협지 속의 의협심 있는 청년 검술인의 지하통로일지도 모르겠다고 느껴지기도 했다.

그런데 나는 몸을 피하는 장발장은 분명 아니었고,

불의한 도배를 무찌르기 위해서 짓쳐 들어가는 경천동지할 힘을 가진 청년 검객도 아니었다.

아니 어찌 보면 장발장과 청년 검객이 짬뽕된 그런 사람은 아니었을까.

그런 수백명 중의 하나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나는 이 땅굴을 구역질내면서 수없이 왔다 갔다 했다.

9월말부터 11월말까지 두어 달 동안. 남영동에서 송치되던 날 말고는 맨 첫 번째로 가막소에서 검찰취조 호출을 받던 날,

나는 앰블런스인가 지프차인가를 타고 구치감에 도착했다.

거기서부터 땅굴을 걸어서 가는 것이었다.

그런데 교도관과 더불어 검찰서기의 에스코트를 구치감에서부터 받았다.

이 정중한 배려에 나는 감사하는 마음조차 가졌다.

내가 고문받아 엉망이 된 것을 알고 이런 배려를 해 주는 것인가.

어쩌면 VIP 대접을 하느라고 이렇게 하는 것은 아닐까.

그냥 그런 중에도 기분 나쁘지 않아서 은근히 희희낙락하며 이 땅굴을 통해 검찰청을 드나들었던 것이다.

 

그뿐인가, 피의자, 피고인은 모두 계단을 걸어서 올라가는데

유독 나는 엘리베이터를 지하층까지 끌어내려 손님으로는 오직 혼자 타고 5층까지 논스톱 직행했다.

어떻게 실수로 1층이나 3층에서 엘리베이터가 멈춰서 문이 열리게 되면

검찰 서기와 교도관이 엄숙하게 입장금지를 선언하는 것이다.

이럴 때 오는 짜릿한 그 기분을 누를 수 없어 높은 사람들은 별 희한한 짓도 다하는 것일 게다.

 

내 손에는 벨기에제 특별 수갑이 채워져 있고, 벌건 포승줄이 칭칭 동여매져 있지만 나는 여유있게 웃어 주었다.

혹시 내가 정치인 경력이 있었다면 손으로 V자를 그리지 못하는 안타까움으로 조바심쳤을지 모르지만.


그러나 나도 약간은 머리가 회전되는 편이어서 이런 특별 에스코트에 '홍이야 홍이야' 하며

잠에 취해 꿈에 취해 계속해서 헤맬 리는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사태는 분명한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철저한 고문은폐 수단이었다.

아니 완전무결한 고문은폐의 예기치 못한 실패로 인해 책임추궁을 당한 검찰이 취한 그렇고 그런 것이었다.

 

이 지하 땅굴을 가끔씩 오가며 학생들, 오랏줄로 꽁꽁 묶여서 더욱 기가 사는 학생들의

아는 체하는 인사와 목소리를 만나게 되는데, 그것을 차단하기 위한 권력의 방어조치였다.

고문받은 얘기를 주고받아 그것이 가막소에 퍼지고, 그리하여 바깥으로 흘러나가면 골치가 아프므로....,

 

다른 모든 기회는 완전 차단이 가능한데, 가족, 변호인, 다른 재소자와의 만남은 물론

담당교도관 이외에는 누구도 접근이 봉쇄되는데, 이 땅굴이 성가신 것이다.

 

사실 나는 거기서 많은 학생들과 부딪쳤다.

그들이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어정어정 벽을 붙잡고 기어가는 나를 보고 대략 알아봤으며, 큰 소리로 나를 격려해 주었다.

슬슬 고문 얘기도 하고 시간은 불과 3~4초 정도씩 밖에 안되었지만 꽤 재미가 있었던 것 같다.

이처럼 검찰 서기의 에스코트는 대략 한 달 반 이상 계속되었다.

그러다가 조금씩 약화되고 흐지부지되기까지 시간이 제법 흘렀던 것이다.

그러니까 내 편 사람들은 마음 놓고 만나서 서로 눈빛도 교환하고 서러운 가슴을 열어보이기까지는 세 달 여가 걸렸던 것이다.

 

그동안 검찰 서기의 에스코트 차단을 포함해서 정치군부는 모든 수단을 동원했던 것이다.

단 한 차례의 예기치 못한 실패를 제외하고 정치군부는 완전무결하게 성공했다.

그러나 단 한 차례의 실패, 그것은 대단히 치명적이었고 그들에게는 큰  정치적 부담이 지워졌다.

고문의 증거, 발뒤꿈치 상처 딱지 탈취사건

85넌 12월 31일. 고의적인 변호사 접견 봉쇄가 풀린 지 닷새가 되던 날, 나는 흥분하여 깊숙이 간직해 두었던,

양쪽 발뒤꿈치에서 아물어 떨어진 상처딱지를 이돈병 변호인과 목요상 의원에게 드리면서 재판의 증거로 제출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이것이 통할 리 있겠는가.

행형법상 교도관 입회라는 것을 이용, 간섭하는 사람들에 의해 제지당하고 결국은 강탈당하고 말았다.

그들로서는 구체적이고도 명백한 고문의 증거가 내 가족이나 민주화운동가 손으로 넘어가지 못하도록 해야했고,

그래서 나는 모든 주의를 다했던 것인데 정치군부의 뻔뻔스러움은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하는 것임이 또다시 증명되었다.

 

그토록 야만적인 고문을 당하고도 또 당했으나, 역시 나는 맹하고 순진한 경지를 벗어나지 못한 것일까.

여러 사람이 보았다 하더라도 뭐든지 필요하다면 언제나 깔아뭉개버리는 그들인데도....나는 또 설마 했던 것이다.

정치권력의 수작은 이렇게 성취되었다.

절취의 시도. 실패, 노골적 강탈, 말썽이 생길 소지가 있는 사람들의 사전 인사이동 조치, 그리고 거짓말로 진행되었다.

특권적 군부의 본질이 이 작은 사건에서도 축약되어 그대로 드러난 것이다.

폭력적 대처와 뻔뻔스런 은폐, 그리하여 끊임없이 불신과 증오를 조장하고 갈등과 대결적 분위기를 반복해서 불러 일으켰다.

절취의 시도는 이랬다.

변호사 접견을 끝내고 내 방으로 돌아와 대략 한 시간 쯤 지나자 면도를 하라며 면도사가 왔다.

보통 병사는 목요일에 면도를 하는데 금요일에 온 것이 어색하게 느껴졌다.

또 이상한 것은 다른 때와 달리 방 바깥으로 나오라는 것이었다.

그동안 다른 방에 있는 재소자들에게 내 모습을 보이지 않게 하려고 언제나 방안에 앉아서 면도를 하곤 했기에 묘하게 생각했었다.

 

문밖으로 나가 앉았더니 다시 내 감방 안을 볼 수 없는 거리로 옮기라는 것이었다.

좀 이상하기도 하고 귀찮기도 했지만 거절할 필요가 없어서 그대로 따랐다.

면도를 시작하자 곧 검방 담당 교도관이 내방으로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그 옆모습을 보니 얼굴이 굳어진 표정이었다.

 

망설일 때가 아니었다.

서둘러서 면도를 중단시키고 내 방으로 들어가니 역시였다.

나는 그동안 모은 상처 딱지를 이들의 눈초리를 피하기 위해 평범하게 휴지에 싸서

두루마리 화장지 가운데 틈새에 끼워 놓았었는데, 검방교도관은 이미 상차딱지를 싼 휴지를 훔친 다음 딴청을 부리고 있었다.

변호인 접견시 이들이 똑똑히 보았고. 이에 대해서 즉시 보고를 받은 가막소 간부들과 또 뭐시뭐시들은 절도를 지시받았을 것이고,

그 하수인으로 이 검방 담당관이 선택되었을 것이다.

변호인에게 전달하는 것을 방해받은 뒤 나는 줄곳 불안해 했지만 또 '설마'하고 화장지 틈새에 끼워 놓았으니,

이 교도관이 찾아내는 일은 식은 죽 먹기였던 것이다.

이 배신감이라니, 이 저주받아 마땅한 가증스러움이라니!

얼굴이 확 달아오른 나는 "생사의 고비를 넘어 온 나에게 이렇게 해서는 안된다"고 소리를 질렀다.

 

교도관은 쩔쩔매고 주저하다가 십 분 정도 지나자 마지못해서 모자를 벗어 자기 이름 써 놓은 곳,

거기에서 휴지를 꺼내어 놓았다.

나는 이번의 절취 시도, 도둑질은 이렇게 막았지만 또 다시 훔치러 올텐데,

특히 내가 없을 때는 어디다 두어야 하나 궁리하면서 막연해 하고 있었다.

이럴 즈음 권력은 모든 것을 벗어버리고, 염치 따위는 벗어 짓뭉개 버리고,

주저하지 않고 강도의 본 모습을 여지없이 드러내 보였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데서는 나의 상상력,

아니 우리의 양식범위를 간단하게 넘어버리는 본래의 흉측한 모습이 나타는 것이다.

검방 담담 교도관이 물러간지 십여 분이 되었을까, 최덕이라는 주임이 와서 내 방 창문을 열고

"상처 딱지는 불법소유이니 내 놓으라"고 협박을 했다.

 

"사람은 최소한도의 양심이 있어야 한다. 아무리 윗자리에서 시킨다 해도 해야 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이 있지 않는가.

천벌을 받을 것이다"라고 나는 외쳐댔다.

그러나 그게 무슨 소용 있겠는가.

시비를 걸고 폭력으로 빼앗도록 지시를 받은 이들은 창백하게 질릴 것도 같고, 겁을 잔뜩 집어먹는 눈으로 그냥 돌진해 왔다.

가막소 간부들은 싸우는 소리가 시끄러워지자 다른 방 재소자들은 목욕을 보내서 텅 비게 해놓고 설쳐 대었다.

 

그들은 나에게 욕을 하고 공갈도 쳤지만 이것이 통하지 않자 나를 끌어낸 다음, 방을 샅샅이 뒤지고 엎어 놓았다.

그 상처 딱지는 내 허리춤에 있었으니 이제는 내 몸에 손을 댈 차례가 되었다.

부소장 권태정, 보안과장 송선홍, 보안계장 방을룡, 주임 최덕, 보안과 배치부장,

그리고 교도관 7~8명이 지옥사자 같은 얼굴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다가 왔다.

이들이 내 방을 뒤지는 동안 나는 권태정과 의무관실에서 말싸움을 했으나 이미 사태는 너무나 명백하였다.

당시 화내지 않고 마주 앉은 권태정에게 나는 이렇게 얘기했다.

"이건 당신에 대한 배려이다. 결국 나는 빼앗길 것이고 그것으로 고문의 구체적 근거는 잃게될 것이다.

하지만 이로 인해 당신 개인들에게도 반드시 피해가 갈 것이다. 난 꼭 그렇게 하겠다. 그러니 당신은 서둘러 내려가라."


최덕의 직접 지휘와 권태정, 송선홍, 방을룡이 치료실에서 지켜보는 사이에 병사 복도로 끌려나온 내게

이른바 검신을 한다며 옷을 벗기려 했다.

 

아! 몸을 부딪쳐 싸워야 할텐데 어떻게 하나.

남영동에서 고문받은 후 나는 공포심에 눌려 그야말로 기가 죽어 있었고, 몸도 제대로 움질일 수 없어서 저항할 수가 없었다.

지켜봐 주는 눈 하나 없이 양팔를 꽉 붙잡은 채 허리띠를 풀은 이 강도들은 허리춤에서 상처딱지를 발견하고 강탈해 갔다.

 

내 몸이 아마 지금만 같았어도 격렬하게 저항했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 나는 속수무책이었다.

분하고 원통했지만 울화병이 깊어지는 또 하나의 계기가 되지 않도록 나 자신을 안정시켜야 했다.

첫 공판 기일 85년 12월 19일.

남영동에서 고문당한 얘기 뒤에 이 파렴치한 강도행위를 짤막하게 얘기했다.

권태정은 빼놓고. 내 충고를 스스로 지켰던 것이다. 그리고 송선홍을 증인 신청 했다.

며칠 후 연말쯤, 갑작스럽게 송선홍과 접견과장이 각각 안양교도소와 대구교도소로 전보 발령나 버렸다.

접견과장은 나와 변호인의 접견을 봉쇄했기 때문에, 송선홍은 딱지사건으로 말썽의 소지가 있기 때문에 그렇게 했던 것이다.

구치소에는 의아해 하는 분위기도 있었지만 사정을 아는 사람들은

나의 '공판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라고 수군대는 것이 내 귀에도 들려왔다.


이 상처딱지에 대한 재판부의 조회에 대해 구치소측은 '빈 휴지를 압수해서 폐기처분했노라'는 회신을 했다.

고문, 은폐, 거짓말, 중첩적 범죄행위를 감행하고도 여전히 늠름하게 웃어대는 저 정치군부의 가면에

우리는 침을 빝어야 마땅하지 않겠는가.

이 사건에서 내가 잊을 수 없는 것이 또 하나 있다.

그 검방 교도관이 도둑질에 실패하고 간부들에게 몰려 나에게 닥치기 전까지 얼마나 닥달을 당하였는지 가히 짐작이 간다.

이 검방 교도관은 상처딱지를 손에 넣으면서 여전히 하얗게 질린 얼굴로

"만일 이것이 재판부에 제출된다면 자신은 파면됐을 것이고, 나이 50세인데 식구들과 거리에 나앉을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게 되었다면 나는 당신을 평생 저주했을 것'이라면서 씩씩거렸다.

 

이 교도관 얘기대로 됐을지 어떨지 모르겠지만, 여하튼 용케 재판부에 증거로 현출되었다면

이 구치소 직원과 간부들에게 일정한 부담과 피해가 돌아갔음은 거의 틀림없었다.

나는 교도관의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한편 슬프고 다른 한편으로 혼란이 일어났다.

피해와 부담은 늘 자신 혹은 나와 비슷한 민주화운동에 참여하는 사람들만 짊어져야 하는가.

민주화의 귀결은 우리에게만 돌아오는 것이 아닌데,

전제와 자의적 지배로부터 진정한 법 지배의 실현 채무는 우리 모두에게 있는 것이 아닌가.

지금의 정치군부가 이런 나약함, 비열함의 틈을 뚫고 끊임없이 공포심을 조장, 확산시킴으로써,

자신들이 지배를 계속할 수 있는 도구로 활용하는 이 무서운 쇠사슬을 어떻게 끊어버릴 수 있을 것인가.

"우리가 무슨 힘이 있는가. 왜 우리에게 부담을 안기는가. 당신들의 뜻은 잘 알지만 우리로서는 어떻게 할 수가 없다."

 

구속되기 전에도 이런 얘기를 여러 번 들었지만, 구속 이후 그야말로 어디서나 귀가 따갑게 들을 수 있었다.

그러다가도 위에서 시키는 일은 그것이 옳은지, 어떤지를 불문하고 행해지는 모습에서 참으로 깊은 외로움에 빠지곤 했다.

 

나는 이것을 고문 현장인 남영동에서, 이 구치소에서, 검찰에서, 그리고 공판정에서도 반복해서 들었다.

그 표현되는 방법과 분위기는 달랐지만 나는 모두에게서 분명히

"우리가 무슨 힘이 있는가, 자신들을 이해해 달라"는 요청을 여러 번 들었다고 생각한다.


다만 직위가 낮은 사람은 '이 밥줄을 유지하기 위해서'라고 솔직히 얘기하는 데에 비해서 직위가 높은 사람은

에둘러서 완곡하게 말하거나 '자리를 유지하려면 별 수가 없다'는 씁쓸한 자조 속에서 그것을 표현했던 차이는 있다.

물론 아주 드물게 적대적인 사람도 있었다.

자신이 뭔가 대단히 큰 존재인것처럼 어깨에 힘주는 사람이나

자리가 제법 높아 그에 걸맞게 사명감에 불타오르는 눈을 가진 사람들,

그래서 그 윗자리를 호시탐탐 노리는 사람들,

그런 지식인들을 왜 내가 모르겠는가. 정치 군부의 졸렬한 하수인들을......


나는 이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오늘도 이 가막소 맨 땅바닥에 침 한번 뱉고 신발바닥으로 문질러 버린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