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8일 일요일 오전 10시경. 지옥에서 온 나찰 같은 얼굴을 한 윤재호가 방에 들어섰습니다.
잠시 후 김수현, 빅남은, 김영두, 고문기술자, 정현규, 박병선, 최상남 그리고 또 한 사람 허만조 등이 방을 꽉 메웠습니다.
윤재호는 책상을 사이에 두고 본인 맞은 편에서 앉자마자 소리를 질러댔습니다.
"너 이 새끼, 배후를 안대?
콧구멍에 고추가루를 처넣어서 폐기종을 만들어 죽여 버리겠다.
안 댈 거지?
그거(고문대) 들여와,
이 새끼 내가 직접 고문할게."
다른 사람들은 조금 당황한 듯 하면서 모두 서 있었고
김수현, 백남은, 고문기술자들이 굽신거리며 "저희들이 하겠으니 나가시라"고 애원 겸 정중하게 말하더군요.
그 사이 정현규와 최상남이 고문대를 들고 들어왔습니다.
이 때 그 고문대 구조를 명확히 볼 수 있었습니다.
윤재호는 분기탱천해서 나가고, 김수현과 백남은은 '상급자가 저러니 자기들로서는 도리가 없다' 히고,
고문기술자는 여러가지 협박을 해왔습니다.
이렇게 고문은 또 시작되었습니다.
주제는, 아니 메뉴라고 할까요.
배후, 정치적으로 아주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는 불순한 모종의 배후, 이것이었습니다.
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나이 사십인데 누가 배후가 될 수 있겠는가.
더구나 당신들이 말하듯이 민주화운동에서 책임있는 사람들 중 하나이고 오늘의 이 결과를 가져오게 한 역할을 해 냈는데,
내가 누구에게 조정을 당하겠느냐."
고문자들에게는 논리가 통하는 것도 아니고 또 귀를 기울이려 하지도 않았지만 떨리는 목소리로 나는 얘기했습니다.
이들은 상부의 상부인 정치군부가 정해 준 방향대로 결과를 얻어내도록 움직일 수도,
변경할 수도 없는 명령을 받고 그 임무를 완수해 내야했던 것입니다.
고문대 위에 묶어 놓고 그늘진 곳에 숨어 있는 배후, 공개운동 선상에 나와 있지 않은 사람의 이름을 요구했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 "이미 당신들은 잘 알고 있다. 오랫동안 사무실, 집 전화를 도청했고 나를 미행해 오지 않았느나,
그러고도 이렇게 할 수는 없는 일이다"며 항의했습니다.
고문기술자는 "이 새끼 항복했다더니 아직 입이 살아서 움직이는구먼. 진짜 맛을 보여 주겠다.
남민전, 이재문이 어떻게 죽은 지 알아? 전노련 이태복 얘기 너도 들었을 거다.
이재문이는 여기서 당해서 이미 속이 부서져 감옥에서 병사한 거야, 너도 각오해" 하고 협박을 하였습니다.
이 날은 남영동에서 받았던 고문 중 최악의 고통스런 날이었습니다.
가장 혹독하고 긴 고문을 받았습니다.
진부하고 희극적인 추궁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것은 본인의 월북여부에 대한 추궁, 행적에 대한 추궁이었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가증스러운 짓거리입니다.
하지만 고문자들에게는 반드시 빼놓지 않는 과정이며 고문을 가할 수 있는 하나의 중요한 '꺼리'가 됩니다.
정상 상태에서는 그 누가 이렇게 협박을 한다 해도 그것에 대해 인정할 사람은 없습니다.
허나 고문대 위에서 이는 참으로 심각한 위험으로 다가옵니다.
결국 나는 인정하고 무릎을 꿇고 말았습니다.
고문자들은 좋아서 히히덕거리기조차 했습니다.
고문기술자는 공포분위기를 조성했으며 백남은이 추궁했습니다.
'어디서 어떻게 월북했는가'에 대해서 말입니다.
나는 삼천포에서 배를 타고 갔다고 했습니다.
백남은, 김수현 등은 폭소를 터뜨리면서 "그것은 여기서 취급했어, 우리가 잘 알아서 하고..."
이 문제에 대해서는 추궁이 멈칫해졌습니다.
삼천포는 80년 광주사태 이후 몇 년도인가,
박계동씨가 정치군부의 손아귀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일본으로 밀항하려고 했던 항구였습니다.
그것을 기억해서 얘기했던 것입니다.
그것 이외에는 그럴 듯하게 말할 것조차도 없었지만,
다음은 본인의 형들 셋이 월북을 했고, 간첩으로 남파된 형들을 만났다는 것을 자백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도 결국 인정하는 도리밖에 없었습니다.
간첩과 접선 인정은 본인에게 죽음을 가져온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덮쳐 누르는 전기고문과 물고문의 고통을 우선 모면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것은 비합리적이라고 얘기할 수 있겠지만,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 만일 고문을 당해보면
왜 죽음을 가져올 지 알면서도 인정하고 손도장을 찍을 수 밖에 없는가를 적절하게 알게될 것입니다.
그랬더니 그것을 합리적으로 설명하기를 요구하면서 증거를 강요하더군요.
돈을 받았느냐고 해서 1백만원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74년도 쌍문동 집 근처에서 한번 만났고, 84년도에 역곡에서 한 번 만났다고 했습니다.
이 고문자들 참 좋아하더군요.
좋아서 미쳐 날뛰기 일보직전인 것 같았습니다.
김수현은 합리적 근거를 대라고 요구했습니다.
이들의 분위기는 달밤에 먹이를 앞에 놓고 침을 질질 흘리고 있는 털 빠진 승냥이들의 모습이었습니다.
이렇게 저렇게 말을 만들어서 얘기를 하니까 고문자들이 거들어 주고 수정을 해 주었습니다.
고문대 위에 놓여진 본인과 고문자 사이에 협력과 토의 수정이 진행되어 나가는 것이었습니다.
한참을 이렇게 하며 각본을 만들어 나갔습니다.
그런데 백남은이 이렇게 말하더군요.
"평양이 부산이지? 마음대로 왔다 갔다 하고."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었습니다.
반복해서 백남은이 얘기할 때 비로소 알아들었습니다.
백남은은 이어서 "그런 일 없지?" 라고 확인을 했고 "그런 일 없는 것은 우리가 알아"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습니다.
눈물이 날 지경으로 고마워지는 것이었습니다.
이 틈에 용기를 내어서 "정말 그런 일이 없다"고 했습니다.
고마움과 안도에 떨리는 목소리로 서둘러서 반복하여 '절대로 그런 일이 없다'고 확인했습니다.
고문기술자가 나서더군요. "그러면 왜 만났다고 했는가, 고문에 못 이겨서 그랬다고 했는가" 라고 추궁하며
다시 강하게 전기고문을 시작하면서, "아냐, 간첩을 만났지?" 라고 요구해 댔습니다.
부정했지만 결국은 또 인정하게 되고요.
도대체 몇 번을 이렇게 왔다 갔다 하도록 고문하고 강요했는지 모릅니다.
거기다 또 '말이 왔다 갔다 한다' 고 고문을 해대고 말입니다.
아, 이처럼 눈물나는 희극은 세상에 없을 것입니다.
'정말 무서운 것은 비극이 아니라 희극이구나. 희극의 시대구나. 이 저주받을 희극의 시대'라고 표현할 수 밖에 없는 일입니다.
하여튼 월북과 간첩과 접선 얘기는 대충 이렇게 끝났습니다.
이후 필요할 때는 위협수단으로 사용했지만, 이 문제에 관한 한 어떤 진지함을 고문자들은 갖고 있는 것 같지 않았습니다.
사실 고문자들에게 처음부터 느낀 것은 본인의 사건에 어떤 열성이나 뚜렷한 확신을 갖고 있지 않았으며,
무리를 하고 있다는 표정이나 몸짓이 전해져 왔습니다.
자기들끼리 수군대는 과정에서 '시기가 너무 빨랐다',
'아직 사건으로 만들 때가 아니었는데' 하면서 고문자의 누구누구는 '흥미가 없다'고 얘기하는 것도 직접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 그들이, 그들의 지휘자인 정치군부가 자신들의 과오를 인정하고 물러설 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 이후에 보듯이 무리와 무모함을 더욱 강제하고, 그를 은폐하기 위해서 별별짓을 다하게 되는 것이지요.
8일 오후 1시 반경, 일단 오전 고문은 끝났습니다.
저녁 7시경에 또 전기고문이 시작되었으며 밤 12시까지 계속되었습니다.
고통을 못 이겨 악을 써 대고 고문기술자는 맞고함을 치고 김수현 등은 킥킥거리듯이
몸부림치는 나를 묶인 채로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나를 내려다보면서 고문은 계속되었습니다.
역시 배후의 문제였습니다.
그늘에 가려진 사람은 있을 수도 없는 것이어서 무척 곤경에 빠져 버렸습니다.
둘러댈 이름도 없는 것이니까요.
배후란 것은 없다고 해 봐야 아무 소용없는 헛일이었고요.
결국 재야 운동권과 종교 운동권의 인사가 모두 배후라고 불면서 인정해 달라고 애걸복걸하였지만 고문자들은 막무가내였습니다.
그것은 물고 들어가는 일일 뿐이라고 하면서 거절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이들은 재야인사로 초점을 옮기더군요.
그 중 나보다 나이 많은 사람들 이름을 계속 대라고 요구하였습니다.
줄줄이 대고 거절당하고, 또 대고.... 이렇게 반복하기를 십여차례 하다가 함세웅 신부와 권호경 목사, 두 사람으로 좁혀지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본인과 고문자들의 협력과 타협, 그리고 조작 위에 세워진 것은 말할 나위도 없는 것이지요.
함 신부는 완전한 배후로서 결정됩니다.
함 신부는 해방신학의 대가이며 본인이 83년 9월 민청년 창립 이후 매달 한 번씩 한강 성당, 구의동 성당으로 찾아가
민주화운동을 의논했다는, 고문자들 말에 의한 한 권의 소설에 본인의 철저한 배후로 등장하게 됩니다.
권호경 목사는 반쯤 배후가 되어 두 달에 한 번 정도 기독교회관 인권위원회 사무실에서 여러가지 얘기를 나눈 것으로 되고,
이것과 관련해서는 반 권 분량의 소설이 만들어집니다.
이 두분에 대해서는 참으로 미안하고, 부담이 되는 줄 알면서도 그것 이외에는 길이 없었습니다.
이을호 씨와 문용식 씨의 배후로 찍혀서 지금 이 고통을 당하고 있는 본인은 이렇게 생각했었습니다.
고문에 못 이겨서 강제자백을 한 것이겠지만, 그래서 이해를 충분히 하지만
그러면서도 한편 이을호씨와 문용식씨를 미워했었고 참으로 서운해 했었습니다.
그러나 본인도 거기에서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아직 현실적 위험으로 나타나고 있지는 않지만 일단 본인의 배후로 찍혀서 작성된 그 소설이 써먹힐 가능성은 있는 것이고,
아마 지금도 함 신부와 권 목사 두 분에게 부담과 위험이 되고 있을 것입니다.
이날 고문이 마무리될 즈음해서 이범영씨가 다시 거론되고 "민한당사, 미문화원 사건 조종을 했지?" 라고 강박하여
" 각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이미 이범영씨로부터 들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무엇입니까? 한마디로 코미디이며, 나는 이 코미디에 등장하는 꼭두각시였던 것입니다.
이 날부터 복습이 시작되었습니다.
지난 4, 5, 6일 있었던 이을호, 문용식의 N.D.R.과 C.D.R., P.D.R.에 대해 완전학습, 총정리가 고문대에 눕혀진 채 요구되었습니다.
시간이 걸리기는 했지만 잘 해내서 칭찬을 받고 고문대에서 내려올 수 있었습니다.
8일에 있었던 물고문, 그것은 4,5,6일에 자행한 것보다 지독했습니다.
그것은 세수 수건 대신 코와 입 위에 가제를 덮고 물을 쏟아 부었습니다.
세수수건을 덮고 고문할 때에도 호흡은 완전 차단이었습니다.
공기가 끼어들 여지를 배제해 버리지요.
그래서 그런지 이 날 물고문의 중간, 한 번 입을 벌려서 고춧가루를 처넣었습니다.
곧 뱉어 버리긴 했지만, 입 속이 얼얼하고,
고문대 위 담요에 고여 있는 땀과 물 속에 떨어진 고춧가루 때문에 등 전체가 따갑기도 했습니다.
무슨 화학 약품이라고 겁주면서 가제 위에 한 웅큼을 집어다 놓고 물로 녹여서 입, 귀, 콧속으로 녹아들도록 했습니다.
이것을 세 번 했는데,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약간 집찔한 것으로 보아서 소금이 아니었던가 싶습니다.
이는 심리적 압박으로 고문을 가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전기고문의 전류가 더 잘 통하도록
핏속의 전리도를 높이려는 이중적 계산이 내포된 것이라고 추정됩니다.
이날의 고문은 잔인무도의 정점이었습니다.
목이 완전히 붓고 말을 제대로 할 수 없고 목이 쉬고....
연거푸 비명을 질러댔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지요.
팔꿈치와 발뒤꿈치는 이미 헤어져 상처가 어느 정도 깊어지기도 하고요.
이날 이후 고문자들은 팔과 발뒤꿈치 상처에 많은 신경을 쓰며 약을 사다가 먹이고, 바르고, 열심히 치료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발뒤꿈치 상처가 특히 오래간다고 얘기를 했습니다.
외용 살포제로 니라민산이라는 하얀 가루약, 수많은 항생제 복용, 옥시풀과 머큐로크롬 등으로 치료했습니다.
한편 목 아픈 데에도 무슨 약인가를 주어서 먹고 가라앉혔으나 쉰 목은 잘 낫지 않았습니다.
이 8일의 고문 이후에 나는 '저80년 5월의 광주사태가, 광주시민 대학살 같은 것이 85년 9월에 또다시 일어나고 있거나
반드시 정치군부에 의해서 감행될 예정이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도저히 이럴 수는 없는 것이라고 굳게 믿게 되었습니다.
나는 이 예정된 정치적 사변의 희생양이 되는 것이며
불순한 내란 소동의 주범 또는 배후로서 낙인 찍혀 공공연하게 선전되겠구나 생각했습니다.
멍멍해지고 공중에 붕 뜬 것 같은 기분이 되기도 하고 나사가 풀려버려 드디어는 착란 상태,
광기를 보이게 될 운명일 수도 있겠구나 싶었습니다.
그 당시, 그래도 현실성을 느끼게 해 주는 것은 머리가 빠개질 것 같은 두통이었습니다.
이것은 전기고문을 받을 때마다 더욱 심해졌고 그 견딜 수 없는 두통만이 현실적이었습니다.
그 어디에도 구원이라는 것은 없었고 구원의 빛깔 비슷한 것 조차도 없었지요.
모든 것이 이미 고문 지옥으로부터, 나로부터, 멀리 저 멀리 사라져 가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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