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남영동을 떠나던 날
남영동에서 본인이 당하는 고문을 보면서, 그 고문을 거들었던 한 두사람이 보였던 그 눈물, 나는 그것을 도저히 잊을 수 없습니다. "더 이상 두고 볼 수가 없다"고 하면서 "어떻게든 여기를 떠나라. 정말로 큰일 나겠다"며 그 사람들은 울먹였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용기였을 것입니다.
생명에 대한 존경과 연민일 수도 있겠지요.
그것은 나에게 구원이었습니다. 빛이었습니다.
우리 사회가 살아남을 수 있는 동력은 이런 사람들이 여기저기 최악의 곳에서조차 움직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것을 기억할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성의 절망적인 측면, 자신들의 안전과 이익을 위해서는 다른 인간동료에게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는
그런 악마적 측면을 부정하는 것이었습니다.
26일 오후 3시경 남영동 5층 15호실을 떠나기에 앞서 나는 김수현과 백남은을 찾았습니다.
잠시 책상을 사이에 두고 김수현과 마주 앉아 얘기했습니다.
별 의미있는 얘기는 없었으나 나는 말하고 싶은 것이 많이 있었습니다.
내가 악수를 청했습니다.
그러면서 나는 속으로 울었습니다.
눈시울이 뜨거워지더군요.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었습니다.
'나는 당신에게 처참한 고문을 당하고 간다.
일방적으로 당하고 간다.
이러고도 속수무책인 것이 원통하다.
더구나 너무 끔찍하게 당해서 분노하기조차 두려운 것이 한스럽다.
떠나는 지금도 내놓고 욕 한 마디 할 수 없고, 그런 용기조차 생기지 않는 것이 말이다.
당신들, 이 저주받을 인간들, 악마같은 자들은 내 생사여탈권을 가진 것처럼 군림했으며
그에 아양조차 떨어야 했던 내게 이 끔찍한 지옥의 올마이티(Almighty)처럼 덮쳐 왔었다'
나는 그 자리를 일어나서 김수현을 똑바로 쳐다보았습니다. 복잡한 감정을 갖고서.
그랬더니 김수현의 키가 점점 작아져 가는 것이었습니다.
고문실에서 결정권을 갖고 있었던 이 사람은 분명 나에게는 거인이었던 것입니다.
거기에다가 나는 늘 의자에 앉아서 오들오들 떨거나 고문대에 묶여 눕혀져 있었고
김수현은 선채로 내려다보고 있었기에 더욱 육박해 오는 거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이 남영동을 떠나기 위해 일어서는 이 자리에서 구두를 신은 김수현은 나만한 키이거나 오히려 작게 보였습니다.
이처럼 '쪼그라들었구나' 하는 생각이 가슴을 때렸습니다.
나는 늠름함에서 김수현에 지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김영두 등과도 악수를 했습니다.
그 고문기술자도 찾았으나 '없다'고만 하더군요.
포니차를 타기 직전에 백남은이 계단으로 나왔습니다.
나는 이 사람도 절대 잊어버리지 않겠다고 다짐하면서 똑바로 뚫어지게 바라보았습니다.
떠나는 이 마당에서만은 당당하고자 했습니다.
9월 4일부터 25일까지 나는 이런 눈초리로 이들을 한 번도 바라보지 못했습니다.
기묘하게 열리는 남영동 대문, '열려라 참깨' 같이도 느껴지는 대문을 나서서
구치감으로 향하는 자동차 속에서 따스한 오후의 햇살을 온몸에 받았습니다.
'아, 이 낯익은 거리에 내가 다시 돌아온 것이구나, 이 햇빛 속으로.'
이것은 축복이었습니다.
회생일지도 모르는 것이었습니다.
죽음 속에서의 돌아옴이었습니다.
검찰청 5층 계단에서 정말 뜻밖에도 본인의 처인 인재근 씨를 만났습니다.
울음이 복받쳐 올랐으나 나는 용케 참아냈습니다.
경찰 한 사람과 본인의 처가 계단을 부축해 내려가는 동안 나는 망설이고 망설였습니다.
그러다가 나는 말했습니다. 불과 1분여 동안이었습니다.
그 고문은 나 개인에게 국한될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에 얘기했습니다.
고문얘기를 듣고 처가 괴로워할 것을 생각하면서 그만둘까도 했지만,
그럴 문제가 아니었고 도무지 원통해서 견딜 수가 없었기에 나는 말했습니다.
목소리가 떨리지 않도록 침착하게 말하면서 신고 있던 양말을 벗었습니다.
발뒤꿈치의 상처들과 발등의 시꺼멓게 탄 부분을 보여주었고, 팔꿈치의 상처도 보여주었습니다.
이 만남은 정말로 기적같은 것이었습니다.
더구나 관례와는 다르게 늦은 오후에야 도착한 본인을 만날 수 있덨던 것은, 그리하여 정치군부의 고문과 그 은폐행위가
폭로되고 국내외적으로 맹렬한 비판을 불러일으키게된 이 만남은 본인에게는 영원한 기적이었던 것입니다.
사건의 개요
이 사건은 정치적 보복이며, 그 대상으로 본인이 찍힌 것입니다.
85년 5월, 학생들의 미문화원 사건으로 크게 충격을 받은 정치군부는 학생운동에 그리고 민주화운동에 복수를 하고자 했습니다.
바로 그것이 소위 '학원안정법' 제정기도였습니다.
그러나 그를 둘러싼 권력 내부의 복잡한 전개도 문제였지만,
모든 국민의 한결같은 반대와 미국을 비롯한 여러나라의 회의적 반응 때문에 물러서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타협과 양보를 생각하며 정치적으로 유리한 고지를 획득할 수 있는 기회임에도 불구하고
정치군부는 오히려 수치나 치욕으로 강퍅하게 판단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에 의한 표적으로, 희생양으로 본인이 선택되었습니다.
한편 '미문화원 농성사건' 이후 정치적 탄압에 몰린 학생들은 민청련 등 여러 재야 단체로 찾아와서
호소도 하고 압력을 가하면서 지원할 것을 강력히 요구했습니다.
본인은 이러한 학생들의 요구에 대해 '그 심정은 이해하지만, 특히 민청련이 개입해서 지원한다면 그 효과보다는
오히려 무거운 부담을 감당해내기 어렵게 될 것이다' 는 점을 민청련 간부들에게 지적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당시 상황으로 봐서는 설득력이 없었습니다.
5월 29일쯤 청년학생운동단체가 공동으로 종로 2가에서 '광주사태 항의 국민대회'를 시도했습니다.
이로 인해 본인이 구류를 사는 6월 하순에 '민중민주화운동 탄압저지대회'가 서울대에서 열렸는데,
거기에 또 학생들의 강력한 참석 요구에 따라 민청련 상임위원장 김병곤씨가 참석했던 것이 하나의 분수령이었습니다.
맨 앞에서 얘기한 대로 5월 29일의 '국민대회'를 학생운동단체와 공동으로 개최한 것을 이유로
정치권력은 본인에 대한 구속을 결심했으리라 추측합니다.
다만 광주사태 문제로 구속하는 것이, 그로인해 발생할 정치적 쟁점이 싫었으리라고 믿어집니다.
이른바 '만민탄 대회' 등 계속되는 학생집회에 민청련 간부이자 학생운동의 선배들이 모여있는
민청련이 지원하는 모습을 절대로 그냥 두고 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권력은 칼을 뽑았고 김병곤씨는 이렇게 구속되었습니다.
그런데 김병곤씨를 조사한 남영동은 상부로부터 심한 질책을 받았습니다.
당시 신문에도 발표됐듯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를 덮어 씌우려고 조사했지만 실패했습니다.
학생운동의 배후로 만드는 일도 별 신통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본인과의 어떤 직접적 연결도 이루어내지 못했습니다.
곤경에 몰린 남영동은 무엇인가 보여주어야할 입장에 처해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실 이것은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었고, 권력의 정치적 필요성을 충족시킬 수 있는 그 무엇이 필요했던 시기였습니다.
85년 8월 '학원안정법' 제정기도 취소 이후 전개될지도 모르는 정치적 곤경을 타개할 수 있는 핑계거리로
본인이 선택되었으며, 이것이 무엇보다 중요했습니다.
바로 이것이 무조건 극도로 잔인하게 고문을 가하게 된 직접적인 동기가 되었던 것이겠지요.
여하튼 결과적으로 괜찮은 것을 획득하고 만들어만 낸다면
과정에 무리가 있다하더라도 아무 문제될 것이 없다고 판단했으리라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자신했겠지요.
정치적으로 충분히 활용할 수 있으리라 낙관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계산이 여러 가지로 틀려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우선 남영동에서 만든 그 각본이 너무 조잡하고 근거가 박약했던 점일 것입니다.
누구도 예기치 못한 만남을 통해 본인이 당한 고문이 공공연하게 알려지면서
수많은 사람들의 분노를 자아내게 된 것이 권력의 계산과는 다르게 나타났습니다.
검찰에서 본인의 완강한 진술거부 또한 저들을 당황하게 만들었을 것이고,
이에 권력은 '공소유지조차 힘들게 되는 것이 아닌가' 라며 허둥지둥댔을 것입니다.
바로 이 때문에 본인을 구속하고도 한달 정도나 그냥 있다가 본인의 묵비권 고수가 결정적인 것으로 보고
10월 2일에야 별안간 민청련 간부를 대대적으로 체포, 구속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도 별 성공적이지 못했습니다.
조사해 봐야 별 것 없었고 문제가 되었던 것에 대한 증거수집도 신통치 않았던 점이 명백합니다.
본인에 대한 혹심한 고문 얘기를 듣고 잡혀간 간부들은 최민화씨 말대로 얼어 있었는데,
고문은 커녕 폭행조차 당하지 않아서 고마움조차 느끼는 묘한 심리에 빠지게 만들어,
어떤 의미에서는 본인을 함정에 몰아넣도록 유도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본인의 경우, 기적같은 만남을 방지하려고 송치되는 날 구치감을 거치지 않고 바로 검사실로 연행했으며,
또한 그날 당장 보통 관례와는 다르게 피의자 신문조서를 여러 간부들,
최민화, 김희상, 김종복 씨로부터 받아내어 본인에 대한 직.간접의 증거로 삼고 있습니다.
이것은 위법된 사실은 아니지만, 그 의도가 무엇인지는 명백합니다.
남영동의 강박 상태로부터 회복하여 바르게 대처하는 것을 막기 위해 계획되고 의도된 것입니다.
본인에 대한 경험, 어떤 의미에서는 실패를 두 번 다시 하지 않기 위함이었겠지요.
따라서 세 사람에 대한 검찰의 피의자 신문조서는 임의성이 있는 것으로 판단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본인에 대한 여러가지 탄압이 실패를 거듭하면서도 계속 강행되어 나갔던 것입니다.
공소가 제기되었던 사실과도 거의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들이 KBS-TV와 연합통신을 통하여
서울신문, 경향신문에 대대적으로 보도되었습니다.
실패한 탄압과 고문, 그것의 계속되는 은폐행위,
나아가서는 재판에 영향을 미치고자 또다시 무모한 시도가 전개됐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들은 모두 소용없는 것들이 되었습니다.
한낱 웃음거리로 또 하나의 80년대 희극물로 본 사건이 나타났을 뿐임은 이 시대가, 모든 국민이 알게 된 일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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