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실패한 재판

 

86년 3월 6일 오전 10시 118호 법정.
"전부 유죄, 징역 7년 자격정지 6년."


서성 씨 입에서 이 말이 나오자 방청객 사이에서 여러가지 외침이 솟구쳐 나왔다.

"생각했던 것보다 너무 적군", "창피하게 여기시오", "건강하시오", 또 뭐뭐라고....


키 큰 교도관들과 경교대원들에게 둘러싸여 복도로 밀려 나서자,

공판에 여러 번 참석해 왔던 이들 사이에서도 제각기 한 마디씩 던져졌다.


"재판장이 대가 약하군",

"배짱이 없는 사람이야",

"너무 심하군",

"승진은 이제 따 논 당상이군" 등등이 내 귓전을 때렸다.

 

격려해 주는 말에 고마워해야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자꾸만 씁쓰레한 심정이 되어갔다.

서성 씨 등에게 희미하게 걸었던 것에 대한 배신감도 그렇거니와

"그래도, 그래도" 해 왔던 나 자신에 대한 자기 혐오감을 주체하기가 어려웠다.


3월 한 달 내내 속이 메스꺼운 상태에서 지냈다.

다른 사람들에게 눈치채이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어영부영 한 달을 보내 버렸다.

자기에게 불리한 판결을 하는 경우 어떤 누구도 사나운 심사가 되어 버릴 것이다.

 

나도 그런 사람중에 하나일 테고, 그래서 조심을 했다.

투덜거리거나 주접을 떨어 지저분하게 되지 않도록 말이다.

하지만 지글지글 끓는 이 부아는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한낱 푸념에 지나지 않겠지만 몇 자 적어 속을 가라앉히려고 한다.


공판에 임해서 나는 더러운 손, 피로 물든 고문자의 손을 고발하기에 급급했다.

정치군부의 적나라한 범죄행위인 고문과 그 은폐로 말미암아 내 가슴 속에 쌓인 한을 풀어내기에 바빴으며,

영원히 비밀 속에 묻어 두려고 온갖 파렴치한 수단도 사양 않는 정치군부의 저 검은 속셈을 폭로하는 데에 안간힘을 썼다.

 

그리하여 이제는 우리 모두에게 매우 현저한 사실이 되었고 반박할 여지가 없는 증거로서 내 몸에, 맘에 남겨진 상처를 드러냈으며,

도대체가 잔인한 고문에 의해 각색된 사건이었기 때문에 그것이 밝혀지기만 하면 아무리 개판인 오늘의 정치군부지만

속절없이 손 털고 물러설 수밖에 없으리라고 낙관했었다.

 

석 달 반 동안을 고통 속에서 완전히 차단당했다가 변호인, 가족들과 간헐적인 만남을 통해서 현실감각을 어느 정도 회복하였지만,

그러나 워낙 격심한 충격을 받았던 나는 감정이 기복이 심했고, 그에 따라 상황판단에 통일성이 결어되어 있었다.

즉 바깥 사회에서 계속되고 있는 강도 높은 민주화 요구 열기에 따라 상당히 들떠 있었던 것이다.


"사회적으로 일단 날카로운 정점이 되어 있는 사건의 경우에는 그 공판 절차가 비교적 민주적으로 수행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 같다.

그러나 결과에서 아직 변함이 없다"는 변호인의 조언에 나는 사태를 아주 낙관했었다.

 

이 사건이 무엇인지는 과정만 합리적이라면 그대로 드러날 것임을 조금도 의심치 않았다.

투옥된 것이 처음이고 재판받는 것도 처음이어서 부담스럽고 서툴렀다.

그래서 나는 형사소송법은 물론 형법, 헌법교과서, 판례를 뒤지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어느 정도 방어를 해 내기만 하면 그것으로 끝나 버릴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변호인이 얘기한 "아직도 결과는 마찬가지다"라는 조언을 나로부터 변경시키겠다는 의욕에 차 있었던 것이다.


지금 돌아보면 내 꼴이 가관이었던 것 같다.

숲은 못 본 채 나무만 열심히 들여다보고 그 사이를 이리저리 해매고 다닌 셈이었으니 말이다.

은근히 '설마 설마' 했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창피하지만서도.....


85년 12월 19일 첫 공판 기일에 정치군부는 물론 재판부, 검찰, 변호인, 나, 가족, 신문기자, 민주화운동 인사 모두 대단히 긴장되어 있었다.

서성 씨는 별 일이 없었는데도 방청권 발행으로 공개주의 원칙에 일정한 제약을 가했지만,

남영동에서 당한 고문을 밝히는 내 이야기에 제동걸지는 않았다.

 

제지 또는 제한이 있을 것으로 예상하고 일부러 짧게 축약했었는데 그것이 후회가 될 정도였다.

이를 고맙게 생각한 나는 그 다음부터 설렁설렁 넘어간 점이 상당히 많았다.


사실 나는 공판정에서도 진술거부를 하고 싶었다.

이 사건은 정치보복이며 또는 내가 정치군부의 정치적 이용물로 활용된 것이기 때문에

그에 대한 명백하고도 강경한 대처가 바로 묵비권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말 좋아하는 사람들의 '국가 형벌권' 이라는 것을 조롱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고문 얘기, 그 은폐기도, 이것을 밝히지 않을 수는 없었고, 그 유일한 기회가 공판정이었으니 참 어려운 문제였다.

만일 판사가 내 얘기를 제지하거나 제한하였다면 그것으로 끝이었고,

재판에 대한 미련이나 회환 그리고 자기 혐오감이 이토록 깊지는 않았을 것이다.

 

판사 자신들에게 많은 부담과 심리적 압박감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고문 얘기 개진에 제한을 가하지 않았던 것이다.

한데 그 이후에 묵비를 한다는 것이 인간적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되었으며, 뭔가 졸렬한 대처로 보일 수 있었을 것이다.

 

또한 정치군부는 이를 사건은폐로 몰아 선전할 것이라고 헤아려 묵비하지 않았다.

결과가 이렇게 되고보니 내가 한껏 조롱당하고 만 꼴이 되어버렸다.


나의 형이 맨 처음 면회왔을 때 건넨 말은 이러했다.

"국제적으로 네가 유명해졌다"고.

 

이에 대해 "이토록 참혹하게 매맞고 유명하게 되고 싶지는 않다"고 말했다.

변호인들도 이와 비슷한 말씀들을 했다.

 

언젠가 형이 다시 면회왔을 때, "한국에서 매 맞지 않고 유명해진 사람이 누가 있느나"고 사람들이 말하더라고.

그렇게 말하여 "함께 웃어보자"고 말했다.

 

나를 격려하기 위해서 한 말인 줄을 잘 알면서도 면회실을 나서는 내 걸음걸이가 정상으로 되돌아간 것처럼 부드럽게 느껴졌었다.

유명해진다는 것에 바람 든 풍선처럼 붕붕 뜰 정도의 철부지는 아니지만 그 말이 싫지는 않았다.

이런 소문에 휘말리지 않도록 내 딴에는 무척 조심하고 경계를 했었는데.....


아! 나는 어느새 교만해지고 방심한 점이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나를 못내 부끄럽도록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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