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눈부셔 눈이 부셔



눈부셔 눈이 부셔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다


눈 가느다랗게 떠야만
달려드는 강렬한 샛노랑에
견뎌낼 수 있을 정도이다.

맨 마지막으로 흘러내린
인왕산 끝자락에는
무학대사 손자국이 깊이 패어 있는 바위 하나
크게 서 있다.

그 아래
우리네 고향 앞산처럼
골짜기와 산마루가 펼쳐져 있다


오밀조밀하게
노랗게 조금씩 조금씩 물들어 가더니
어느 날 대낮
드디어 개나리는 샛노랗게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너무 샛노라
관능적인 냄새가 나는 것 같고,
속이 약간 느끼해지기도 한다

해가 서쪽으로
비켜서는 오후가 되면
인왕산 개나리가 타오른다
샛노란 불길로 타오른다
노오란 노여움으로 타오른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의 노여움으로 불타오른다


쏟아지는 햇빛 담뿍 받은 개나리는
샛노란 노여움으로
불타오르는 것이다

얕은 골짜기 여기저기
띄엄띄엄 응달진 곳에
붉은 얼룩이 보인다


노랑 천지 속에
얼핏 보이는 저것은
불그스레한 그 번짐은 무엇일까?

이제는 까맣게 멀어져 간
4월의 함성이
이 봄에
슬그머니 되살아나고 있는가


부릅뜬 눈으로
아직은 절대 잠들 수 없는
피맺힌 5월이
아스팔트에 낭자하게 쏟아졌던
피, 그 피가
은연 중 배어나고 있는가


아니면 작년 9월
아! 그 남영동에서
내가 토해냈던
울부짖음의 파편이 튀어서
저리 붉게 피어나는가


물고문에
불고문에 바스라졌던 내 넋의 한 조각이
다시 새롭게 물 올라
한 무더기 진달래로 피었는가

노랑 바탕에 붉게 얼룩진 건너편 인왕산이
여전히 발시린 내 감방을 화안히 비춘다


이 밝음 맞아들이기 위해서
좁다란 창문 밖 쇠창살 앞에
개나리 서너 가지 꺾어 꽂아 놓았다


요구르트 병 두 개 말끔히 부셔내고
거기에 물 가득 담아
어렴풋이 꽃망울 맺힌
개나리 가지를
확실하게 꽂았다

4월 4일이었던가
나의 개나리
망울 별안간 터뜨리고
활짝 피기 시작했다.

그늘진 창문으로
때때로 몰려오는 아직도 써늘한 바람 밀어 내고서


아! 이것은 4월 3일
나를 찾아온
뜨거운 설레임.


들뜨는 자유 한 모금 몰아쉬고
망을 연 것이 아닐까


연성수, 권형택. 김종복 친구들
모질고 외진 이곳
나서는 가벼운 발걸음 따라 일어난
그 바람 먹고
개나리 피었을까

그러나 나는 본다
눈부심 속에서도
놓치지 않고 똑바로 본다

노란 개나리
붉은 진달래 무더기들의 눈부심.


그 아래
또 옆에 널려있는
겨울의 잿빛을
나는 눈 감지 못한다

어두운 회색에
아직도 젖어 있는 저 겨울은
속으로 속으로 울었던
내 울음을 되살려 내고
깊어져만 갔던 상처를
자꾸 건드려 대는 것 같다

유난히 추웠던
지난 겨울
몸과 마음에
깊이 패인 상처를 가졌던 나는
오들오들 떨면서 한 세월을 보냈다


컴컴한 밤이 올 때마다
인왕산 허리 곳곳에
숨어 엎드려
새파랗게 빛 내뿜던 수은등들 때문에
나는 더 추었다


그 수은등
나는 정말로 미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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