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명소리
인간도살장, 이것은 지나친 표현일지 모릅니다.
누군가가 이를 과장된 것이라고 지적한다면 '그럴지도 모르지'라고 수긍할 수도 있습니다.
또 누가 지나치게 소녀적이고 감상적인 용어표현이라고 비난한다면 맞서서 핏대를 올리면서 그렇지 않다고 나설 생각도 없습니다.
그러나 85년 9월 남영동 거기는, 적어도 나에게는 참으로 알 수 없는 나라였습니다.
비록 설득력 없고 상투적인 표현일지라도 정말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도저히 알 수 없는 그런 곳이었습니다.
물론 논리적으로 설명한다면 누구나 쉽게 알아듣겠지만 그야말로 가슴으로,
아니 온몸으로 그 고통과 공포에 발가벗긴 채 내던져졌던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그런 곳이었습니다.
본인이 이렇게 얘기를 해도 저 '은하철도 999'에 등장하는 어느 별의 우주해적단 악당들의 짓거리와 비슷하구만
하고 지나치는 사람이 많을 것입니다.
남영동, 거기서 비명을 들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비명을 듣고 나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직접 고문을 당할 때는 극도로 혼란되어 있어 앞뒤가 뒤바뀌고 중복되어 버려서
어떤 면에서는 제대로 판별을 못한 채 시간이 흘러가 버렸습니다.
그러나 나는 들었습니다.
그리고 견디지 못해 헛구역질을 해댔습니다.
9월 9일, 그러니까 내가 고문을 받았던 8일과 10일 사이, 그날 나는 하루종일 밤새워 대답하며 쓰고 베끼고 하였는데,
그 날 밤 내내 고문당하는 사람들의 비명, 그 끔찍한 비명, 끊이지 않고 들려오는 그 비명을 들었습니다.
그 비명들은, 사람들이 바뀌면서 계속되는 비명들은 절대로 송곳같이 날카로운 비수처럼 번쩍거리는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돼지기름처럼 끈적끈적하고 비계처럼 미끄덩미끄덩한 것이었습니다.
살가죽에 달아붙은 그 비명은 결코 지워질 수 없는 그런 것이었습니다.
멱이 따진, 흐느껴 대는 낮고 음산한 울려 퍼짐이었습니다.
무슨 슬픔이나 비장한 느낌이 들기는 커녕 속이 완전히 뒤집히고 귓구멍을 틀어막아도 파고 들어오는 참으로 견딜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본인은 이 끊임없이 계속되는 비명 소리의 임자같은 운명이거나 더 지독한 처지에 빠져 있었음에도,
솔직히 얘기해서 어떤 종류의 연대의식이나 동정의 마음을 갖지는 못했습니다.
이들이 학생들일 것이라는 것을, 더구나 나이가 아직 어린 사람들임이 틀림없다.....
마음속으로나마 위로와 격려의 말을 보내야 한다고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래야 한다고, 너무나 편한, 당연한 결론을 내렸었습니다.
그러나 그때는 정말로 그게 안 되었습니다.
혹시 그 비명의 주인공들에게 동정하는 기색이나 비명, 지워질 수 없는 그 비명소리에 괴로워하는 것을
고문자나 신문자들이 발견하고 몰아치지나 않을까 싶어 태연한 척하려고 부단히 안간힘을 썼습니다.
그러면서 속으로는, 들켜서 이를 핑계 삼아 고문하지 않을까 싶어 전전긍긍했습니다.
이런 자신을 들여다 보면서 이젠 인간으로서의 마음을 거의 잃어버렸구나 하면서 허탈해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건 그렇고, 할 수 없는 일이고, 오늘밤에는 당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아니 그렇게 되어야할 텐데, 아직 차례가 남은 사람이 많을까
어떨까에 대해 속을 태우면서 조바심을 쳤고 그러다가 날이 훤히 밝았을 때 '후~'하고 숨을 몰아쉬기까지 했습니다.
늠름하게 버티지 못하는 저 비명소리가 듣기싫기도 했고, 울면서 애걸복걸하는 것이 미워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정말 미웠던 것은 이 구걸하는 것 같은 비명소리가 아니었습니다.
라디오 소리였습니다.
고문당하는 비명소리를 덮어쒸우기 위해, 감추기 위해서 일부러 크게 틀어놓은 그 라디오 소리,
그 라디오 속에서 천하태평으로 지껄이고 있는 남자, 여자 아나운서들의 그 수다를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인간에게 파괴가 감행되는 이 밤중에 오늘 저 시적이고자 하는 아나운서의 목소리,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었습니다.
라디오 소리 사이사이에 들리는 고문 기술자 - 장의사집 둘째 주인 - 의 고함과 심문소리가 어김없이 들려오고
비명소리, 라디오 소리는 어쩐지 비현실적이고 무게라고는 하나도 나가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반면에 저 심문자, 고문자의 고함소리는 위엄 그 자체였으며 천근만근의 무게가 나갔습니다.
현실적이며 살아서 펄펄 뛰는 것이라곤 오직 이것 하나뿐이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고마운 것은 이날 고문을 받지 않고 무사히 넘길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날이 희미하게 밝아옴을 확인하자 나는 버스나 택시운전기사 옆에 두 손을 모으고 기도하는 소녀의 '오늘도 무사히'라는 글귀처럼
앞으로도 매일 '오늘도 무사히'가 되기를 빌면서 허리를 곧추세웠습니다.
그러면서 '25'시인가, 예전에 보았던 영화의 한 장면이 눈앞에 전개되었습니다.
인간들에 대한 집단적 파괴. 복수. 학살이 자행되고 있었던 2차 세계대전 당시
조그만 어느 시골에 하늘을 뒤덮으면서 나타난 폭격기는 민가에 새까맣게 폭탄을 투하했습니다.
그 동네는 초토화되고 어린이를 비롯한 남녀노소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다행히 목숨을 건진 사람들은 어디론가 떠나 가버렸는데, 그때 영화는 한 장면을 보여주었습니다.
어떤 집 내부를 비추면서 죽어 넘어진 시체를, 어지럽게 파괴된 가재 도구를 보여주다가 갑자기 그곳에 유일하게 살아남은 한 가지,
그것도 화려하고도 때깔 나는 왈츠연주곡을 틀어대는 라디오를 보여주었습니다.
이때의 분노.절망.허무감이란...,
남영동에서 이날 밤을 새우고 새벽녘이 되었을 때까지 아주 생생하게 그 장면이 되살아났습니다.
분노, 아니 분노할 힘, 그것은 머리를 세우지 못하는, 오직 절망감과 허무함을 동반한 채였던 것입니다.
고문담당 기술자
여기서 분명히 밝혀 두어야할 것이 있습니다.
그 고문을 가했던 사람들, 고문담당 기술자를 혹시 무슨 귀신, 악마나 도깨비처럼 연상할 지 모르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또 남영동을 본인이 인간도살장이라고 했다 해서 복마전으로 떠올릴 필요는 결코 없는 것입니다.
고문자들은 평범한 사람들입니다.
저주받은 무슨 표지가 얼굴에 있는 것도 아니고 특히 증오심이나 적개심으로 표정이 일그러졌다거나
눈에 살기가 감도는 그런 사람들이 아닙니다.
약간 스스로 큰 체하고 가식적이고 위협적인 목소리를 짓고자 하지만 이것은 다른 곳에서도 볼 수 있는 것이고,
별 뚜렷한 구별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어느 면에서는 똑똑하고 야무지며 또 겸손한 척도 하는 사람들입니다.
미소, 장난기 어린 미소조차 짓기도 하며 한숨도 쉬는, 어디서나 부딪칠것 같은 그저 그런 경찰관들 중의 한 사람 한사람이었습니다.
결혼한 딸의 생활 걱정, 그 사위가 학생운동 출신 전과자여서 걱정이 된다고 얘기하는 사람조차 있었습니다.
군대 나간 아들에 대한 걱정, 대학진학을 눈앞에 둔 자제를 가진 어버이로서 당연히 부딪치는 조바심,
서민이면 누구나 안게 되는 살림살이 걱정, 박봉에 대한 불평등 종로나 명동의 어느 길거리에서도 부딪칠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런 평범한 사람들이 저 끔직하고도 무서운 고문을 감행하는 것입니다.
아니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인간 동료에게 고문을 가하고도 혼란에 빠지지 않을 지 모릅니다.
나는 이 사람들의 저 태연함, 고문을 가하면서 짓는 야릇하고도 냉담한 미소에 질려버렸습니다.
그 철판같은 배짱과 강심장에 뭐라 할 말이 없었습니다.
어떻게 이러고도 이 사람들이 견딜 수 있을까, 무슨 대단한 비밀이 감춰져 있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주 간단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기만, 자기기만과 강제되는 타인기만의 조작된 제도위에 서 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구속 또는 고문을 결정하고 방향을 결정짓고 대상을 선정하여 증오심을 키우고 확대시켜 나가면서
선전을 감행하는 사람이나 그룹은 저 어디 다른 곳에 도사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남영동 사람들은 제시되고 결정된 방향으로 자기들의 직무를, 아니 작업을 추진해 나가면 그뿐입니다.
이들은 예정되고 설정된 모종의 정치적 목표를 위해 단정적으로 가정하고 있는 불온하고도 불순함,
그것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획득해 내야 합니다.
만들어 내는 것조차 충동질 당하는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미리 증오와 타도의 대상으로 본인은 설정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 미소, 때로 보이는 그 미소 그 자체야 나쁠리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것은 오직 표면적인 것일 뿐이고 사실 별 의미가 없으며,
자신들이 기정사실화 해버린 목표를 성취해 나가는 하나의 수단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밥 먹듯이 인간파괴행위를 저지르고도 '또라이'가 되지 않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인간 동료에게 적대하고 가혹한 고문과 능욕을 가하는 훌륭한 부업제도가 살아서 움직이고 있는 것입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미국인들이 떼를 지어 나치 국가였던 독일을 방문하고
많은 사람들이 충격을 받았다는 글은 어디선가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처럼 맹목적이고 잔인했다고 들었고 또 그것을 의심없이 받아들였던 독일인들이 자신들과 하등 다름이 없는 인간적 이상과
애정을 가지고 있었고, 더구나 전쟁에서 목숨을 잃고 묻혀 있는 병사들의 공동묘지를 방문했을 때의 충격은 참으로 컸다고 했습니다.
그 병사들의 묘비명에 쓰여있는 "여기 그 가족을 사랑했던 누구가 묻혀 있습니다"는 표현에 놀랐다는 것입니다.
오직 증오와 경멸 외에는 인간 상호간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을 것으로 상상했던 이 독일인들이
'사랑'이라는 두 글자를 발견한 것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제도화되고 조직된 인간파괴행위, 자기기만과 강제된 타인기만의 사회제도화는 인류를 언제나 맹목적 충동에 사로잡히게 할 수 있으며,
그것은 저 나치나 파시스트 국가의 지나간 옛날 얘기가 아니고, 오늘 개명한 20세기 후반 이 서울 한복판에서
그것도 노골적으로 감행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본인이나 또 몇사람 개인들에게 한정된 문제가 아닌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공권력의 자의적 지배, 야만적 고문으로부터의 자유보호는 지난 수 백 년간 인류의 불요불굴한 노력과 투쟁의 결과였으며,
전 세계 모든 국가 헌법의 중심을 형성하고 있는 것입니다.
85년 9월 남영동에서 겪은 저 끔찍한 사건, 그것은 까마득한 옛날 일이었던 것처럼 느껴집니다.
빛바랜 어떤 사진처럼 말입니다.
우리가 어렸던 시절, 대청마루 윗벽에 걸려있던 사진틀 속의 할아버지 할머니의 사진 같이 누렇게 변색되어 버린 것입니다.
몇 개월 전의 이 사건으로 아직 신체적 휴우증과 흉터가 남아 있는데도
기억이 이렇게 아사무사하게 되는 것이 이상스럽게 여겨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의식의 표면이 이렇게 되는 것은 사실 너무나 당연한 것이고, 어찌보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방어조치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감당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서 버렸던 그 고통과 공포를 생생하게 머리에,
의식의 표면에 떠올려놓고서는 오늘의 내 생활을 도저히 견디어 낼 수 없는 것이니까요.
이 상처를 우선 의식의 표면에서 지우려고 안간힘을 써왔던 것이고, 그래서 어느 정도 이루어진 것이겠지요.
만일 이것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면, 아마 이을호씨처럼 본인도 지금쯤은 정신병원 어느 구석방에 쳐박혀져서
혼란의 수렁에 빠져 버렸을 것입니다.
이러한 정신적 혼란을 그냥 심리적으로 허약해졌기 때문이라고 쉽게 몰아세워서는 안됩니다.
감당할 수 없었던 그 고통과 상처, 그로 인한 깊은 심리적 상처 - 어쩌면 죽음의 일부분이거나 그 그림자일지도 모릅니다 - 로부터
탈출은 무엇보다 우선하는 지상명령이니까요.
고통, 공포, 강제에 굴복한 자아가 그것을 거부하는 자아의 이 절망적 분열의 타개책은 우선 현실로부터 전면적인 후퇴를 하든지
- 정신착란 속으로 - 아니면 그것을 지워서 중압의 무게를 완화하는 두 가지 방법 중 어느 하나 뿐인 것입니다.
본인에게 후자 선택이 가능했던 것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었지만,
이을호씨와 같이 혼란, 정신적 고통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났다고 생각하기에는 아직 이른 것 같습니다.
지금도 늘 머리를 옭죄는 두통이 심하고 때로 균형감각에 이상이 오는 것도 문제지만,
더 큰 문제는 의식의 심층 저 아래에서 지금도 발생하고 있는 상처의 깊어감입니다.
맥을 놓고 멍하니 않아 있는 경우에 그리고 살포시 잠이 들거나 또는 아직 잠이 덜 깬 상태에 있을 때 바로 그 때마다
느글느글한, 어떻게 할 수 없었던 남영동의 아픔이 덮쳐 오는 것입니다.
남영동의 그 고통과 공포, 상처는 수많은 필름에 찍혀서 본인의 심층 거기에 간직되어 있고,
조금만 방심하면 활동사진으로 핑핑 돌아가면서 나를 거꾸러뜨리려 엿보고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것이 정말로 지워질 수가 있겠습니까?
나는 발버둥쳤습니다.
고통과 공포의 무게를 줄이려고 말입니다.
밤이 늦으면 기차바퀴 소리가 들리고 기적소리가 아련하게 들려왔습니다.
이건 당시 본인에게 큰 위안이었습니다.
바깥 세계를 그 기적소리에서, 기차바퀴 소리에서 확인했을 뿐만 아니라
절망적으로 고립되어 있는 나를 밖의 세계와 연결시키는 끈이 되어 주었던 것입니다.
이 기적소리는 나를 실어서, 내 영혼을 담아서 어린 시절 행복했던 그 시절로 되돌려 보내주곤 했었지요.
그러나 그것은 그뿐이었습니다.
잠시의 회상에 불과한 것이지요.
구멍이 숭숭 뚫린 방음벽 네모진 흰 벽이 그때마다 내 이마를 '탁!' 치면서 벌떡 일어서는 것이었습니다.
소스라쳐 놀라면서 나는 더욱 왜소해져갔습니다.
이 남영동에 끌려온 이래 쉴 새 없이 작고 왜소해져서, 그곳 시멘트 바닥에 녹아 없어져 버릴 것 같았던 나는
짓밟히는 검불처럼 볼품도 무게도 없어져 갔던 것입니다.
어떻게 당해도 좋은, 그래도 마땅한, 마침내 공중으로 사라져 버릴 왜소함 그 자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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