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서울 구치소의 겨울
지난 겨울을 지독히도 추웠다.
더구나 서울 한복판에 있으면서도 버림받은 것 같은 이곳 감옥이 춥지 않을 리는 없는 것이지만,
나는 정말 두 다리 와들와들, 온몸을 떨면서 지내 왔다.
나는 병동 아래층 맨 끝, 북쪽 방에 밀어 넣어졌다.
방의 북쪽 벽에는 얼음이 빙판처럼 깔리고, 저녁 형광등 불이 깜빡거리며 들어오면
얼음은 비수처럼 새파랗게 곤두서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매트리스 밑은 흥건하게 습기가 차 한겨울에도 곰팡이가 슬고,
두 겹 비닐로 막은 창문은 매서운 칼바람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습기가 차다고 가막소 간부들에게 얘기해 봐야 헛일일 뿐이고, 우이독경이었다.
칼날처럼 매섭게 얼어붙은 벽을 가리켜도 그것은 한낱 엄살일 뿐이고 마이동풍이었다.
그 사람들에게는 처음부터 아무 소리도 없었던 것과 진배없었다.
내 얘기는 처음부터 귀를 꼭 틀어막도록 지시를 받았거나, 의논하여 합의 결정한 것으로조차 보였다.
85년 9월 4일 미명, 서부경찰서 유치장에서 꺼내어져 어디론가 사라졌던 나를 변호인들이 처음 만난 것은 3개월 5일만이었고,
내 처와 형제들은 그러고도 열흘 뒤 첫 공판이 열린 다음 날부터 만날 수 있게 되었다.
그때 우리는 뜨거운 눈시울, 매캐해 오는 콧속, 그리고 치받치는 목메임에서 그냥 뜨겁게 쳐다보다가,
그러다가 말문을 열어 고문에 대해 지칠 때까지 얘기를 헀다.
이러기를 며칠 한 후, 당시 내 몸이 워낙 안 좋고 보행조차 제대로 할 수 없는데다가
날씨마저 혹독하게 추워 걱정이 된 가족과 변호인들은 내 감방사정을 자꾸 물어보았다.
망설이다가 조그만 목소리로 얘기를 했다.
사실대로 말하면서 나는 이를 견디어 내기로 작정하였음을 밝혔고,
내 방안의 추위와 얼음에 대해 문제제기하지는 말라고 웃으면서 얘기했다.
헌데, 이튿날 구치소 직원 두 사람이 내 방에 들어와 북쪽 방벽을 만져 보고,
곰팡이가 아우성치고 있는 매트리스를 들쳐 보곤 조금은 미안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아울러 넌지시 방을 옮길 수도 있음을 암시하고 나갔다.
그 후 간부 한 사람이 올라와 전방 얘기를 꺼내기에 "인심 한번 쓰려면 후하게 쓰라"고 말했다.
마침 건너편인 7방은 비어 있고, 공간도 비교적 넉넉하여 그걸 요구했다.
내가 있는 8방은 겨울 해와는 완전히 원수지간으로 햇볕 꼬랑지 하나 구경할 수 없었지만,
이 7방은 오후가 되면 햇볕이 비쳐 들어 왔다.
내가 7방에 눈독을 들인 이유는 바로 이 햇볕 때문이었다.
외로움과 추위 속에서 햇볕은 은혜처럼 축복같이 날아드는 것이다.
낙관적인 느낌도 동반해 오고.....
이유는 언제가 그렇듯 잘 모르겠지만, 난색을 표하면서 8방과 거의 똑같은 조건인 9방을 말하였다.
이들이 방을 바꿔줄 생각을 한 것은 아직도 학대행위가 계속되고 있다는 비난이
바깥 사회에서 제기될 근거에 대한 우려 때문임은 더 말할 나위가 없는 것이다.
나는 9방으로 옮김에 대해서는 거절했다.
얼마 전까지 징벌을 받던 사람이 살던 방이었고, 정신 질환자를 수감하느라고 부착했다는 조그만 구멍이 뚫린 쇠철판을 붙이고
완전히 밀봉해 놓은 컴컴한 방이었기 때문에, 차라리 추운 북풍 들이치는 8방에 그냥 있는 것이 나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8방도 어둡고 우울한 분위기가 짙게 배어 있고 꽉 막힌 정신질환자 수용독방이었다.
내가 이 가막소에 온 즉시 8방에 들어갔는데, 그렇게 숨통이 조여지는 듯한 어두움 속에서 두 달여를 보냈다.
바람 한 점 들어오지 않는 이 8방에서 고문으로 인한 상처로 끙끙 앓으면서 나는 요구했고, 호소도 했다.
결국은 화를 잔뜩 내고서야 11월말 경에 쇠철판을 제거하고 바람이 통하는 창문을 얻어냈다.
그토록 어렵게 얻어 낸 흐르는 바람을, 창문을 포기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를 눈치 챈 그 사람들은 9방을 뜯어 고쳐 여닫을 수 있는 창문을 닫고 쇠철판을 뜯어냈다.
12월말 경 9방으로 이사했다.
추위야 별 차이가 없었지만 맨살로 부딪치는 북벽을 갖지 않는 것이 기분상 훨씬 좋았고,
무엇보다 습기가 8방보다 덜차는 것은 고마운 일이었다.
지금도 여전히 병사 하 9방의 내 매트리스 밑에는 습기가 고이고 곰팡이가 피어나지만,
이곳은 큰 체하는 간부들이 말하는 특별 권력관계가 작용하는 곳이니까, 여기는 사회가 아니니까,
그까짓 습기와 그 정도 곰팡이는 더불어 같이 살기로 결심을 했고 그 심정 탄탄히 지켜내고 있는 중이다.
12월 중순 경쯤일까, 병사 아래 위층 15~16개 방 모두에 조그만 구공탄 난로를 하나씩 피워 주었다.
그런데 나 혼자 그 혜택에서 제외되었다.
병사 하 9방은 지옥이고 나머지 방들은 천당처럼 바라다 보이기도 했다.
다른 방 사람들은 서로의 체온으로 추위를 녹이고 가슴의 외로움도 녹였으며,
성령처럼 내려 앉는 햇볕에 다시 행복해지는 모습을 나는 본 것 같았다.
거기에다 얼굴이 벌개지는 난롯불을 한 가운데 두고 둘러앉을 수도 있었으니, 끝내주는 일이 아니었던가 그것은.
아픈 분들 방에 난롯불을 놓은 것은 좋은 일이다.
하지만 그 중에서 유독 나만 빼놓은 이 서러움,
그 옆에서 어느 순간 번쩍하는 숨겨진 적대감을 보곤 내 가슴의 추위는 더 매서워져 갔다.
사람이 계속 바뀌어서 정신 질환자들이 7방 또는 8방으로 들어왔는데,
그 사람들과 나는 지난 겨울 내내 영원히 저주받은 동토의 나라에서 살았다.
어느 땐가 꼭 두 번, 내게도 난로 좀 놔 달라고 간부들에게 요구를 했다.
모 계장은 이렇게 말했다. "난로는 병약자들에게만 놓아주는 것이다.
당신같이 건강한 사람까지 놓아준다면 전 사동 재소자들에게 다 놓아주어야 하는데, 우리에게는 그런 예산이 없다."
순간 나는 몸 속에서 피가 역류하는 것을 느꼈다.
부들부들 노여움으로 몸은 떨려오고 '당신도 인간이냐, 나의 부서진 이런 모습을 보면서,
늘상 누워있는 나를 당신의 두 눈으로 보지 않느냐'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애써 목소리를 누르면서 무겁게 뱉어냈다.
단식과 아우성 등 싸움과 싸움을 통해서 학생들이 따낸 보온 수통도 나는 제외시켰다가 며칠이 지나서야 지급했다고 한다.
85년 12월 13일, 고문당할 때 생겼던 발뒤꿈치 상처딱지를 폭력적으로 강탈해 가던 날,
이미 지급했던 감옥 담요 4장조차 도로 빼앗가 간 사람들이었다.
이러한 비인도적 처사, 부끄러움을 모르는 이들에게는 철저하게 대결하는 것만이 유일한 해결책이지만
난 당시 싸울 기력이 없었다.
그저 물러서서 이미 입은 상처가 더 깊어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었다.
인간 도살장이었던 남영동에서 이곳 서대문구치소로 온 9월 26일 이후 한 일주일쯤 지나서였을까.
9월 13일에 여덟 번째, 아홉 번째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받은 이후 나는 밥을 먹을 수가 없었다.
식욕은 물론 없고 이가 모두 흔들리고 아파서 씹을 수 없었고, 소화도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
여기 가막소에서는 죽을 나눠 주었다.
'이런 고마울 데가 어디 있담.
그래도 여기는 살만한 곳이구나' 하면서 죽을 오랜 시간 걸려서 천천히 먹었다.
그런 나에게 이 모 주임이라는 사람이 병사 하층을 담당한 사람을 시켜,
또 담당은 이른바 소지를 시켜서 '죽은 떨어졌으니 밥을 주라'는 지시를 했다.
별안간 밥이 나와서 소지에게 사정을 물었더니 담당에게 얘기해 보라는 것이었다.
나는 거의 애걸하다시피 죽을 달라고 매달리기까지 했다.
그러나 '없다'고 차갑게 거절하는 것이었다.
밥을 먹으려 해도 먹을 수가 없어서 국물만 좀 마시고 짬밥으로 고스란히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지시를 받은 담당은 복도 내 방 옆에 몰래 붙어서 밥을 먹나 숨어서 지켜보았고,
식구통으로 나오는 짬밥에 손이 갔는지를 확인하는 숨결이 확연하게 느껴졌다.
하루 정도 나에게 밥만 주었다.
그러니까 강제로 하루를 굶은 꼴이었다.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는지 이 담당은 투덜거리며 내 방 옆을 떠나갔었다.
아! 그때 이 사람이 내뱉은 한 마디, 그것은 내 가슴에 상처를 만들어 버렸다.
듣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 것을.
이 담당은 나에게 "씨발 새끼"라고 욕을 하면서 멀어져 갔는데, 내가 왜 이런 욕을 먹어야 하는지,
그것을 멀거니 듣고도 해댈 수 없는 나의 상시의 쓰러져 일어나지 못함이 아주 쓰라렸다.
나에 대한 조직적인 학대는 멈춘 것이 아니었다.
근래까지 이 상처를 잊지 못해 그 담당과 주임을 미워했었다.
이제는 용서하기로 작정을 해버려 괜찮게 되었지만.....
이 모 주임이라는 사람은 그 후에도 공연히 나에게 두어 번 시비를 걸고 욕설을 해대곤 했다.
구둣발 채로 내가 누워 있던 방으로 들어서기까지 했다.
간부인 자기가 순시하는데 내가 자리에 누워서 일어나지 않는 것은 무례한 일이라면서 모욕을 가했다.
내 몸과 마음의 상태가 누워있을 수밖에 없다며 양해를 구해도 막무가내였다.
멀쩡한 사람이 꾀병을 부린다고 욕을 하면서 나보고 애비도 없느냐는 것이었다.
이에 나도 견딜 수가 없어서 같이 싸웠고, '불과 나보다 댓 살 많은 당신같은 애비도 있느냐!'고 조롱도 해주었다.
이 사람이 본래 냉혹하고 염치를 모르는 철판 깐 사람이기도 했지만,
위로부터 은연 중에 오는 모종의 신호에 맹목적으로 충성하고자 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참 우스운 것은 이젠 미운 정 고운 정이 다 들어서 이 사람과도 그럭저럭 지내게 되었다는 것이다.
정치권력은 가막소 간부들을 통해 어떻게 해서든지 나를 멀쩡한 사람으로 규정하고 만들려고 무진 애를 썼다.
의사들은 비교적 성실하게 진찰하려고 했다.
지금은 그만둔 어떤 의사 한 사람은 특히 더 그러했다.
일부터 나를 불러내서 살펴보고 약도 지어 주었으며 안타까운 눈으로 나를 응시하기도 했다.
나는 그 눈빛이 무엇을 말하는지 금방 알 수 있었다.
그것은 나에게 큰 약이었다.
당시 소생하는, 소생하려고 발버둥치는 나에게는 이 의사의 선의가 무엇보다 효험있는 치료였다.
그러나 이런 선의들이 자꾸만 차단되고 거부와 외면의 몸짓으로 돌아서 가는 것을 느끼지 못할 내가 아니었다.
가막소 의무과에서는 내게 10여병의 링거와 영양제를 놔 주었다.
처음 실려서 업혀 왔을 때 몇 병 맞고, 증거 보전 신청이 제출되었던 시점 이후,
사회적으로 내가 고문받은 사실이 알려진 이후 몇 번을 더 맞았다.
가끔 어지럽고 두통으로 시달릴 때는 그저 하루분 정도의 진통제, 아스피린, 수면제 등을 얻어먹고 견디곤 했다.
그리고 나는 언제나 건강하고 멀쩡한 사람으로, 다만 병사에 격리 수용되어 있는 것으로 내외에 발표되고 선전되었다.
의료보호 또는 도움으로부터 사실상 버림을 받았는데 나는 이것을 시정시킬 기력도 없었고,
또 그렇게 하지 않기로 결심도 했다.
그 이유는 이러하다.
85년 9월초 남영동에서 전기고문, 물고문에 못견뎌, 나는 발가벗기고 두 눈이 가려진 채 무릎으로 엉금엉금 기면서
항복한다고 용서해 달라고 두 손으로 빌었다.
그때 고문자인 김수현, 백남은, 그리고 전기고문 기술자 잎에 번졌던 소리없는 웃음, 그 웃음을 나는 절대로 잊을 수 없다.
아니, 이 하수인 뒤에서 충혈된 두 눈으로 낄낄거렸을 이 폭력적 정치군부를 어떻게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
이 인간 파괴자들을.......
그런데 나는 이들에게 살려달라고, 아니 곱게 죽여달라고 애걸복걸했던 것이다.
나는 다시 이들 박해자들의 소매에 매달리지 않기로 결심했다.
씻을 수 없는 치욕을 두 번 다시 입지 않겠다고 말이다.
일제하에서 옥사했던 윤동주, 이육사를 그리며 나는 시인도 못되고 이 서대문 가막소에서 죽을 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죽어 갈지도 모르는 내 모습을 단단히 지켜보리라 결심했던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가 인간적 긍지를 다시 세우는 유일한 길이었기에.
그리고 올바른 의료 제공, 치료를 받기 위해서는 적극적으로 싸워야만 할텐데, 당시 나는 심신이 거의 무너진 상태였고
기력이 없었으며, 고문당할 때 엄습해왔던 공포심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에 제대로 대항할 수가 없었다.
또 그런 부딪치는 과정에서 오히려 자신의 상태가 악화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병사 하층 8방의 내 이불 속 깊숙이 들어가 그 속에서 혼자 깊게 앓았던 것이다.
다만 10월초, 중순경부터 내 발뒤꿈치에 났던 상처, 고문으로 인한 유일한 외상에 대해서
관심을 표현하고 의사와 이곳 간부들도 보자고 했다.
정치권력은 의사의 진료행위를 이용하여 고문의 유일한 외적 증거를 수시로 확인하고자한 것이다.
처음에는 전혀 관심을 갖지도 않았던 부위에 대해 한두번도 아니고 여러 번 여러 사람이 보자고 하는 데에도 넌덜머리가 났다.
그리고 그 가증스러움이라니!
변호인단이 제출한 고문 증거보전 신청과 내 처 인재근과 민주활동가 여러분의 고문 폭로 규탄 때문에
정치군부의 신경이 날카로워졌고, 어떻게 해서든지 고문을 완벽하게 은폐하기로 결정내렸을 것이다.
만일 정치군부의 열렬한 희망과 기대에 반해 나에게서 어떤 충격적인 음모나 내막이 폭로되었다면
그들은 뭐 '그럴 수도 있는 것 아니냐' 하며 태연스럽게 나왔을 것이다.
그러나 헛수고였다. 더우기 고문의 역력한 증거를 내 처인 인재근과 이을호 씨의 처 최정순, 김상철 변호사
그리고 여러 검사들이 두 눈으로 명백히 보았고 이에 따라 민주인사 여러분들의 뜨거운 분노와 항의에 부딪쳤던 것이다.
이른바 국가보안법으로 제대로 엮지 못했던 것이다.
궁지에 몰린 정치군부는 단단히 결심했을 것이다.
고문을 완전히 은폐하고 관계 언론을 동원해서 내 주위에 수상쩍은 분위기를 형성하도록 말이다.
이야말로 '방귀 뀌고 성내는' 격이었다.
철저하고 완전하게 은폐하기 위해서 나는 아프지 않아야 했고, 치료를 받지 말아야 했으며, 받을 필요 또는 없는 것이 되어야 했다.
그 동안은 누구와의 만남도 봉쇄되어 고문사실과 그 증거가 확인되지 않아야 했던 것이다.
발 뒤꿈치 상처의 상태를 확인하면서 가족과 변호인은 물론 이곳 가막소 내의 누구와도,
일반 제소자까지 절대로 말을 주고 받지 못하도록 봉쇄되었다.
내가 있던 8방의 앞 7방과 9방은 비워 두거나 정신이상자들만 수용함으로써 그 차단 목적을 성공적으로 달성했던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