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근태 평전/[7장] ‘이제 다시 일어나’, 결연한 옥중기
2012/08/15 08:00 김삼웅
김근태의 운명에는 ‘역마살’이 끼었는지, 1987년 2월, 이번에는 더 멀리 경주교도소로 이감되었다.
‘발화체’를 아주 멀리 격리시킨 데는 까닭이 있었다. 1986년 10월 28일 ‘전국 반외세 반독재 애국학생투쟁연합’ (애학투) 결성대회가 전국 22개 대학생 2,000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건국대학에서 거행되었다. 이때 경찰의 진입으로 1,000여 명의 학생들이 교내와 옥상에서 3박4일 동안 철야농성을 벌였다. 경찰은 이른바 ‘황소 31입체작전’을 벌여 1,525명을 연행했다.
검찰은 ‘공산혁명분자 건국대 점거난동사건’이라며 세계학생운동사에서 기록되는 가장 많은 학생을 연행하였다.
12월 5일에는 정부의 언론통제 내막을 밝히는 보도지침이 폭로되고, 1987년 1월 14일 박종철이 김근태가 당했던 치안본부대공분실의 수사관 6명에게 물고문과 전기고문으로 숨졌다. 2월 7일 서울을 비롯, 전국 16개 지역에서 ‘고 박종철군 국민추도회’가 열리는 등 시국은 태풍권에 들어갔다. 박종철 열사의 추모행사, 장례, 49제가 잇달아 열리면서 정국은 혁명적 열기로 가득찼다. 정부는 이런 상황에서 김근태를 서울에서 가장 먼 경주교도소로 이감시켰다.
<월간 말>이 폭로한 정부의 ‘보도지침’에는 “김근태 관련 단체의 이적행위 관계를 꼭 1면 톱으로 쓸 것, 주모자인 김근태의 출신 배경 등 신상에 관한 기사를 꼭 박스기사로 취급할 것”을 지시하고, 관제언론들은 이를 충실히 따랐다. 그 때문에 김근태에게는 강성 이미지가 오랫동안 지워지지 않았다.
박종철 고문치사 은폐 폭로. 20년 전 박종철 씨가 공안당국의 고문에 의해 사망했을 때 군사독재정권은 이를 은폐하기에 급급했다. 그러나 신부들의 용기 있는 폭로가 있었기에 암흑 속에서 한 가닥 희망의 빛을 발견하게 되었다.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자료사진
박종철 사망 소식을 듣고, 그의 아버지가 아들의 뼛가루를 임진강에 뿌렸다는 사실도 알았다.
아직도 부족하단 말인가. 이미 우리는 제2의 아르헨티나가 되어 버리고 말았는가. 추악한 전쟁은 어느 틈에 시작되었는가. 우리는 적인가. 적이란 무엇인가. 그렇게 되어버렸는가.
그런데 임진강에 뿌려진 그 원통한 죽음을 저들은 어떻게 인정했는가. 나는 그것이 납득되지 않는다. 뭔가 빼도 박도 못할 사정이 있었는가. 아니면 은폐하는 뒤처리 과정에서 결정적인 실수가 있었는가. 지금은 크게 후회하는 그런 실수를 저질렀는가. 아마 그럴 것이다.
금수처럼 당하고도 또 징역을 살아야 하는 권양, 그 흐느낌의 어디에 저들의 양심 같은 것이 끼일 수 있겠는가. 그것은 아니다. 분명코 아니다. 아닌 것이다.
전국에 지명수배를 받고 쫓기다가 달리는 열차에서 뛰어내려 투신자살하였다고 주장되는 우종환 서울대생, 남쪽 머언 시골 어느 야산에서 목매달아 자살했다는 청년, 죽어서 말이 없으니까 뭐라해도 상관없는 것인가. 그렇다면 마산 앞바다에서 풍덩 빠져 종적을 감췄다가 어느 날 갑자기 떠올라 우리 앞에 나타났던 그 청년의 시체는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인가. 애초부터 목에 시멘트 돌덩이를 스스로 매달고 뛰어들어 자살했단 말인가. 모를 일이다. 모를 일이 이것 뿐이리오만은 이 수상쩍은 죽음들이야말로 진정 모를 일이다. 알 수 없는 나라인 것이다.
분노의 불길이었던 죽음, 항의의 폭탄이었던 죽음, 박영진, 이재호, 김세진 등과 거기에 수상쩍은 죽음이 겹쳐지면서 광주,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광주, 간단없이 지속되는 그것에 나는 넌덜머리가 나면서 무감각해져 버리고 말았는가. (주석 18)
김근태는 잇달은 젊은학생들의 부음 소식에 분노하고 사지육신이 떨렸다. 도저히 잠을 잘 수도, 밥을 먹을 수도 없었다. 그러나 갇힌 몸이라 어찌하기 어려웠다. 분노는 창살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프랑스의 레지스탕스 시인 뽈 엘뤼아르의 <통금通禁>과 같은 심사였다.
통 금
어쩌란 말이냐 문에는 감시병이 서 있었는데
어쩌란 말이냐 우리는 갇혀 있었는데
어쩌란 말이냐 길은 막혀 있었는데
어쩌란 말이냐 도시는 사면초가인데
어쩌란 말이냐 그녀는 굶주려 있었는데
어쩌란 말이냐 우린 무기를 빼앗겼는데
어쩌란 말이냐 밤이 오고 있었는데
어쩌란 말이냐 우리는 서로 사랑했는데.
김근태는 박종철군의 고문치사 소식을 전해 듣고 옥중에서 단식을 결행했다. 곡기를 끊고 절규해도 메아리조차 없었지만, 도저히 그냥 앉아있을 수가 없어서였다. 신라의 옛 고도 외곽에 자리한 감옥은 공동묘지처럼 스산했다. 감시병들만 없으면 공동묘지 그대로였다. 3월 12일 아내에게 편지를 썼다.
잘 잡히지 않는구려, 안개 너머에서 어른거리면서 초점이 모아지지 않는 것이었소. 항의도 하거니와 내 마음을 모으기 위해 단식을 한 것이었소. 이 억울하고 불행한 죽음을 듣자마자 분노의 그런 것이기는 하지만.
사흘 째부터는 꽤 고통스러웠소. 얼굴 표정도 아마 찌그러졌었을 것이오. 건강이 안 좋고, 또 자신감까지 없고 보니 더욱 그랬을 것이오. 공포심이 슬그머니 자리를 잡더니 달걀귀신처럼 자꾸만 커지는 것이었소. 몸과 마음을 비우고, 그 젊은 죽음을 가슴에 받아들여 서로 교감하고자 했던 당초 의도는 힘없이 밀려 버리고 말았소.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지만 그것도 잠시 뿐이었소. 배고픈 고통과 공포, 부끄러운 생각 등의 혼란 속에서 점점 선명하게 부각되어 온 것은, 날카롭게 찔러온 것은, 그는 죽었고 나는 살아 있다는 사실이었소. 이 염치없는 끈적끈적한 생각을 하면서 나는 죽지 않았구나라고 혼자 중얼거렸던 것 같소. (주석 19)
역사는 의로운 죽음에는 반드시 피값을 요구한다. 일제는 안중근ㆍ이봉창ㆍ윤봉길 등 수많은 독립지사들을 죽인 피 값으로, 이승만은 김구ㆍ조봉암ㆍ김주열ㆍ4.19 희생자들의 피값으로, 박정희는 조용수ㆍ장준하ㆍ인혁당 등의 피 값으로 무너졌다. 전두환도 수많은 청년들을 죽이고 분신ㆍ자결ㆍ투신으로 몰아가고 있어 무너지는 날이 멀지 않을 것이라 김근태는 믿었다.
주석
18> 앞의 책, 192~193쪽.
19> 앞의 책, 19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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