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손가락질 당하는 일


 그러다가 보름 앞두고 혜숙이 쓰러졌다.

 혜숙의 갑작스런 상태는 나의 출소와 어머니 고희연과 더불어
 삽시에 민주화 운동 진영으로 번져 나갔다.

 

 주위 많은 분들에게 알려졌고 염려와 걱정을 넘어
 충격적인 소식으로 전해졌다.

 

 이제 나의 출소랄지 어머니 고희연이랄지보다는
 암으로 쓰러진 혜숙의 생사여부가 주위 모든 분들에게 초미의 관심사였다.

 

 하지만 혜숙은 입원해 있으면서도 자기 몸 상태는 아랑곳없다는 듯
 오로지 어머니 고희연 준비에 몰두했단다.

 

 친지 동료들에게 일일이 전화하고 당일 행사 진행 순서를 짜고
 차질없도록 역할을 맡기고 풍물패를 수배하고 사진과 비디오 촬영을 부탁하고
 하다못해 입구에서 안내하고 접수 보는 이들까지 일일이 챙기고 있더란다.


 절친한 여고 동창 중 어떤이는 혜숙이가 미쳤는가보다고
 지가 죽을지 살지도 모르고 시어머니 칠순 잔치만 생각하고 있다고 혀를 찼단다.

 이런 와중에 칠순 잔치가 뭐냐고 지부터 살고 봐야 되지 않겠냐고 했단다.


 하지만 혜숙은 막무가내였단다.

 결혼 전이지만 시어머니 회갑도 그 후 시아버지 칠순도 못 해드리고 지나쳤는데

 이번이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르는데 이번만은 그냥 지나칠 수 없다고 

 막무가내 우기더란다.

 

 그래서 결국은 여고 동창들도 죽어 가는 혜숙이 마지막 소원 일지도
 맺힌 한 일지도 모를 일이니 저 하고 싶은대로 하라고
 들어 줘야 되지 않겠느냐면서 진행을 도왔단다.


 한편 어머니께서는 여러 달 전 고희연 말이 오가기 시작할 때부터
 크게 노여워하시면서 반대하셨다.

 

 어머님은 오랜 세월 공무원 생활하시면서 지역 주민들에게 

 우리 나라에서 만연하는 부질없는 허례허식과 풍습을 삼가하도록
 계몽하고 설득하러 다니셨다.

 

▲ 어머니 공무원 신분증 사진


▲ 화성군보건소에서 상근책임자로 근무하시던 어머니 (가운데)

    

 분에 넘치고 분수에 맞지 않는 예식을 간소화하도록 교육하고 다니셨다.

 그러니만큼 당신이 먼저 솔선수범하는 데 이미 익숙해져 있었다.

 

 며느리가 쓰러져 병원에 입원한 뒤에는
 더욱더 당신의 고희연을 중단하도록 요구하셨다.

 

 출소하고 처음 뵈었을 때도 어머니는 나에게 무엇보다 먼저
 이런 지경에 고희연이 다 뭐냐고 그만두라 하셨다.

 

 아들은 감옥에 있고
 며느리는 입원해 있고
 딸과 사위는 외국에 나가 있는데

 고희연이랍시고 잔치할 마음이 생기겠느냐고 하셨다.

 

 부질없는 일일 뿐만 아니라
 어머니 자신을 크게 욕보이는 일이라고 나무라셨다.

 

 세상 사람들한테 손가락질 당하는 일이라고
 크게 노여워하셨다.


▲ 경기도 화성군 동탄면 반송리 출장 중인 어머니


▲ 가정 방문 중인 어머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와 혜숙은
 어머니 고희연을 예정대로 진행하기로 했다.

 

 중단하기에는 너무 늦기도 했거니와
 주위 많은 분들의 의견도 있었다.


 그 당시 정치 사회적 상황도 고려했다.

 1987 년은 새해 벽두부터 심상치 않은 기운이 감돌았다.

 

 전두환 대통령은 임기 만료가 되는 해로 자리를 물러 나야 했고
 재야 민주화 운동 진영과 야당에서는
 "대통령을 국민의 손으로"라는 슬로건을 내세워
 직선제 개헌 논쟁에 불을 붙였다.

 

 2 월에는 서울대생 박종철 군이
 남영동 대공수사단에서 고문으로 숨진 사실이 폭로되고
 국가 공권력의 정당성과 도덕성이 크게 실추되었다.
 
 정치 사회적으로 혼란한 분위기가 기승을 더 해가자
 전두환 대통령은 개헌 절대 불가를 천명하며
 "4.13 호헌 조치"를 내세워 마지막 안간힘으로
 정국을 제압하려는 듯 발버둥치는 형국이었다.


   ▲ 1987. 4월 13일자 경향신문.

 

 1979년 10.26 박정희 시해사건으로 계엄령이 선포되었을 때처럼

 1980년 5월 17일 광주민중항쟁을 앞두고 전국 계엄령으로 확대되었을 때처럼

 정국은 일순간 차디찬 냉기에 휩싸였다.

 

1980 년 3 ~ 4 월 민주화의 봄 적에

 견디다 못한 어둠의 세력이 마각을 드러내고

 5.17 계엄 확대 조치를 무기로 총질하고 칼춤추며 판세를 뒤엎으려 난리치듯

 도도한 광주 시민의 민주화 물결을 난도질하고 박살내듯
 
 무언가 거대하게 휘몰아 쳐올 것같은 태풍 전야처럼  
 무거운 침묵이 흐르고 고요했다.


 전두환의 4.13 호헌 조치가 선포된 바로 다음 날

4 월 14 일 내가 감옥에서 출소했다.

 

 그리고 나흘 후에
 어머니의 고희연이 예정되어 있었다.


 민주화 운동 진영을 대표하던 민청련과 민통련 민가협 등 단체에서는
 갑자기 얼어붙은 정국을 돌파해 내기 위해서라도

 재야 민주화 운동 진영에 있는 분들이 모두 망라해서

 자연스럽게 모일 수 있는 자리가 가뜩이나 필요한 터이니만큼

 어머니의 고희연을 예정대로 진행하는 것이 좋겠다고 주장했다.


 나와 혜숙은 주변 동료들의 도움을 받아 가며 어머니를 설득했다.

 고희연은 이미 자연인 어머니 개인이나
 우리 가족의 잔치를 넘어 선 행사라 했다.

 

 우리 가족이 처해 있는 형편과 사정도
 이미 우리 가족만의 걱정과 염려가 아니라고 했다.

 

 그때까지 20 여 년 동안 이 땅의 민주화를 위해
 나와 함께 노력해 온 모든 선후배 동지들의 뜻이라고 했다.


 이 땅의 민주화를 앞당기기 위한 행사라고 했다.

 그제서야 어머니께서는 더이상 말씀이 없으셨다.

 

 당신의 뜻을 거두신 건지.....
 말씀하셔봤자 내 고집 꺾을 수 없어 마지못해 포기하신 건지.....

 

 그 후 무겁게 흐르는 침묵을 깨고
 무섭도록 고요한 연못에 파문을 불러일으키는 조짐이 여기저기서 일어났다.

 

 그동안 조용하게 살아 오고, 하고 싶은 말 아껴가며 내색없이 침묵해 온

 살만한 이들이 여기저기서 일어났다.

 

 대학 교수를 필두로 의사 약사 한의사...
 변호사 공인회계사...
 신부 목사 교사...
 

 밀양 안동 마산 기장 동래...
 여수 완산 남원 목포 광주서구...
 유성 옥천 천안 제천 공주...
 강릉 원주 춘천...
 

 중산층으로, 소지역 단위로 모여서 의논하고 입장을 발표하고
 목소리를 내고 함께 행동하고.....

 

 마침내는 도도한 물결이 되고
 거대한 파도가 되고
 6 월 민주 대 항쟁이 되었다.




32. 눈물의 칠순 잔치

 

 

 4 월 18 일 혜숙은 주치의로부터 3 시간 특별 외출을 허락 받았다.

 혜숙은 평소에 얼굴 화장을 전혀 하지 않았다.

 남자인 나도 세면하고 나서 찍어 바르는 스킨 로션조차 혜숙은 바르지 않았다.

 경기여고 시절 학교의 전통있는 행사로 널리 알려진

 세계 민속놀이 대축제에 참가하기 위해 분장했던 일과 우리 결혼식 때 신부 화장한 것이 고작이었다.

 

 그날 내가 근무하던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여직원이 혜숙에게 옅은 화장을 해 주었다.

 그래선지 환자같지 않고 해말간 얼굴이 참 곱게 보였다.

 

 고희연에 앞서 교회 담임 조승혁 목사님 주재로

 교인들과 일가 친척들이 함께 예배를 드렸다.

 

 

함경북도 함흥에서 우리나라 초대 교회 고명하신 목사님 가정에

위로 오빠 언니를 두고 아래로 남동생 여동생 사이에 셋째로 태어나신 어머니

방이 18 개 거실 화장실 합하면 21 개나 되는 함흥중앙교회 사택에서 자라

어렸을 적부터 청소하기가 너무 힘들고 지긋지긋했다던 어머니...

 

영생여고보와 함경남도립병원 간호부 조산부 과정을 졸업하고

결혼 전까지 원산도립병원 기숙사에서만 생활했던 경험으로

남들처럼 작고 아담한 집에서 단란하게 살아 보는 것이 소원이셨다던 어머니

 

그래서 나까지도 팔자에 없을 큰 집을 그리 자주 드나들어 온 건가?

나 역시 어머니와 외가의 영향 아래 모태 신앙으로 자라 왔다.

오랜만에 해후하게 된 친인척 교인들은 우리 가정의 파란만장한 역경과

혜숙에게 드리운 병마를 익히 알고 있어선지 기쁨에 넘치거나 축하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 착잡한 속내를 애써 감추시는 어머니

 

주재하시는 조승혁 목사님과 참석한 이들 모두

특별히 혜숙의 건강과 우리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했다.

합심해서 다함께 하나된 마음으로 감동어린 예배를 드렸다.

 

예배가 끝나자 따사로운 봄날 성북동 그윽한 골짜기에 위치한 '녹음정'으로 하객들이 삼삼오오 모여 든다.

계훈제 송건호 선생님 등 재야 원로

성내운 김찬국 이영희 정윤형 등 당시 해직 교수협의회 교수님들

현기영 임헌영 정희성 조태일 박용수 안종관 채광석 유시춘 등 민족문학작가회의 문인들

임채정 정동익 등 해직 언론인

이길재 최종진 등 전국농민회총연맹 대표

임진택 장선우 유인택 등 문화예술인

윤순녀 김명식 등 가톨릭 수녀 수사님

성해용 이상윤 임흥기 이근복 등 개신교 목사님

최 열 김승균 신철영 신대균 등 시민사회단체 분들

민통련과 민청련 식구들 구속자가족협의회 민주열사유가족협의회 분들

초 중고등 대학 동기 선후배들.....

전두환 씨가 개헌불가 4 . 13 호헌조치를 강압적으로 발표한 직후여서인지

5 . 16 군사 쿠데타 이후부터 연대해 온 재야 민주인사들 가운데

구속되거나 수배된 이들을 빼고는 거의 망라되어서 참석한 자리가 되었다.

 

 

 

 

우리 결혼식 주례를 서신 김찬국 교수님은 혜숙의 등을 두드리며 손을 꼭 잡고 봉투를 쥐어 주셨다.

"이 돈은 아무한테도 보여 주지 말고 우리 박 선생 혼자서 맛 있는 거 사먹어야 돼요....."

따뜻하신 말씀이시다.

 

나중에 확인해 보니 그 때 돈으로 거금 30 만 원이 담겨 있었다.

당신께서도 무려 13 년 여 동안 해직되어 계실때인데.....

나는 혜숙이 입원해 있는 동안 교회 집사님 집에 가 있던 막내를 처음으로 보고 품에 안아 보았다.

가족과 떨어져 지내는 스트레스를 말로 표현 못 해선지 마악 첫돌이 지난 막내는 머리칼이 곤두서듯 위로 뻗혀 있다.

 

 

 

잔칫상과 사람들 사이를 천진난만하게 휘젓고 다니는 딸과 아들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속으로 눈물을 삼켰다.

나 뿐만이 아니었다. 혜숙의 친구들 또한 그 모습을 지켜 보면서 손수건을 눈에서 뗄 줄 몰라 했다.

참석한 이들 모두가 혜숙이 예쁘게 화장한 얼굴로 고운 한복을 입고

갓 돌 지난 막내를 품에 안고 있는 모습을 지켜 보면서 누구랄 것없이 눈시울을 삼켰다.

 

오랜 세월 민주화 운동을 함께 해 왔던 동지이자 후배 이해찬(전 국무총리)의 사회로 식순이 진행되었다.

나는 인사말을 통해서 우리 가정에 드리운 안위에 대해 염려와 걱정을 끼쳐드리게 되어 죄송하다는 말을

우리 가족과 혜숙이 알아 듣지 못하도록 완곡하게 표현했다.

 

더불어 오늘의 자리가 우리 가족을 위한 행사로 그치지 않고

전두환의 4.13 호헌 조치를 돌파해 내는 데 조그마한 교두보가 되어

허심탄회하게 만나고 서로 의견 나누는 자리로 삼아 달라고 부탁했다.

 

한국문화연구소 연성수 소장이 이끄는 풍물문화패의 공연과 함께

우리 가족을 시작으로 선후배 동료들이 어머니께 예를 올렸다.

참석한 이들 대부분이 혜숙의 일거수일투족을 주시하고 있다.

혜숙이 절하고, 친구들과 같이 "어머니 은혜"를 노래하고 오랜만에 보는 막내를 품에 안고 있는 모습은

많은 이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고 눈시울을 삼키게 했다.

 

▲ 어머니 칠순 행사 동영상

 

 

 

33. 당사자인 본인만 모르고


어머니의 고희연은
혜숙의 몸 상태를
풍문이나 알음알음으로
긴가민가 전해 듣던 모든 이들이
직접 보고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제 혜숙이 암에 걸려
언제 죽을 지 모르게 되었다는 이야기

꼬리를 물고
민주화 운동 각 부문 각 지역으로
장안뿐만 아니고 전국적으로 번져 나갔다.

정작 당사자인 아내와 우리 가족만이
모를 뿐이었다.

이제 나흘 후면
퇴원하고 통원 치료를 해야 한단다.

나는 아내에게
더 이상 숨겨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당사자인 본인이 우선 먼저 알고
가족이 안 연후에
주위 사람들에게 알리든
번져 나가지 않도록 단속하든
대비하는 게 순서이고 정상일 터인데

어찌어찌 하다보니
완전히 거꾸로 뒤집어 진 게 아닐까???

혜숙의 운명을
세상 사람들은 다 알고 있는데
정작 당사자인 본인과 가족만 몰라서야 되겠는가???

곰곰 생각해도 그런 경우야말로
혜숙에게는 더 할 수 없는 모독이요
세상 사람들로부터 가혹하게 따돌림 당하는 일 아니겠는가???

더 이상 머뭇거려선 안 되겠지.....

그러니까 어머니 고희연 있던 다음 날이던가?
해 저물고 땅거미 질무렵
나는 혜숙에게 산책이나 좀 나가자 했다.

혜숙은 좋아라 밝은 표정 지으며 따라 나선다.

한적한 교정
우거진 숲을 찾아
우리는 팔짱을 끼고
천천히 걸었다.


▲ 한양대 캠퍼스 전경

나뭇잎사귀와 풀잎사귀
정성들여 가꾼 교정의 봄꽃들

약동하는 4 월의 생명을 주체하지 못하듯
저마다 푸르름을 뽐내고 향기를 내뿜는다.

가지가지 색깔로 단장하고 치장하고
아름다움을 한껏 자랑한다.



아쉬워선가 반가워선가
저무는 해따라 어둠따라
풀벌레 소리들
점점 더 세차게 울려 온다.

서울 한복판이라지만
비 내린 뒤끝이라선지
공기도 맑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엔
별이 하나 둘 떠오르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무더기로 쏟아져 내릴 듯
사방팔방에서 반짝거린다.

" 당신하고 단 둘이서 이렇게 오붓하게 있으니까 참 좋다...
공기도 맑고... "

혜숙은
내 팔뚝 잡은 손에
꼬옥꼬옥 힘을 주면서
행복에 겨워한다.

아 ~ ~ ~ !

이 분위기에서...
생명이 정지될지도 모르겠다는 이야기를...
해야 하나???.....

죽을지도 모르겠다는 말을...
사형 선고를...
꼭 지금...
내 입으로...
해야 한단 말인가???.....

나는 그만
아무말도 못 하고

그저
한숨만 내쉬고 있다.

" 당신 웬 한숨을 그렇게 크게 쉬어대???
몸이 좀 이상한 거 아냐???
어디 불편한데 있어???
기왕에 여기 있는 동안 종합 검진 좀 받아보자..."

나는 무엇을 숨기려다 들킨 모양
훔치려다 들킨 모양
깜짝 놀라 당황한다.

" 으~응???..... 아냐... 난 괜찮아....."

" 나 솔직히 말해서 이렇게 병원에 누워 있으니까 참 편안해...
일상 생활에서 아둥바둥대다가 해방된 기분이야...
약국을 남에게 맡겨 놓고 있는게 처음에는 그렇게도 불안하더니
지금은 걱정도 안 되고 그저 황홀한 느낌이야...
어머니는 애들 돌보느라 무척 힘드실텐데 그런 걱정도 안 들고...
이런 생각에 빠져 있으면 벌 받겠다. 그지??? 하호호호....."

내가 없는 동안
혜숙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아침 일찍부터 밤 늦게까지 약국을 지켜야 했고
나를 대신해서 집안 살림을 혼자 감당해야 했으니.....
단 하루도 긴장을 풀어 놓지 못한 생활 아니었던가???...

그러면서 버티고 버티다가 도저히 견딜 수 없어
갈데까지 다 간 다음에서야
쓰러져 입원한 거 아닌가???.....

그동안 얼마나 힘들고 지쳐 있었으면
이렇게나마 병원에 입원해 쉬고 있는 게
너무 편하다고
일상에서 해방된 기분이라고  
황홀한 느낌이라고
할 까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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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당신 암이래


어둠이 점점 더 짙게 내리깔리면서  
나는 복잡하게 얼키고설킨 심사와
극도로 긴장된 표정을

혜숙에게 들키지 않고 가릴 수 있어
무척 다행이라 여겨진다.

혜숙과 나 사이에
짙게 가로막힌 어둠을 빌미삼아

이제는 알려야 할 말
혜숙이 꼭 알아야 할 말
가슴 속에 묻힌 말 끄집어 토해 낼
용기가 생긴다.

" 여보! 어차피 알게 될텐데...
마음가짐 단단히 먹고 잘 들어...
무슨 병인지 알고 대처를 해야지...
김용일 박사 첫 번 면담했을 적에 들었는데...
.
.
.
당신...
위는 다 잘라내고...
.
.
.
위에 가까이 붙어 있는 비장과 췌장도
일부 잘라냈대.....
.
.
.
위 역할은 장에서도 대신할 수 있대...
시간이 지나고 습관이 되면...
그다지 큰 불편 안 느끼고 살 수 있대...
.
.
.
수술 끝나고...
떼어 낸 부위 조직 검사까지 마친 결과...
.
.
.
위암 3 기로 나왔대...
.
.
.
생존 가능성에 대해서 말씀하시던데...
5 년 생존율을 기준으로 삼는다면서...
.
.
.
15 퍼센트 정도래...
5 년만 무사히 버티면 된대. 그 다음에는 암에서 완전히 해방되는 거래.
당신 자신과 가족의 노력이 무엇보다 필요하대. 5 년만 버티면 된다니까
이제 우리 당신 몸만 신경써야 돼. 앞으로 5 년 동안 우리 오로지 당신
몸만 위해서 살자. 응??? 여보~~~!!! "

나는 어둠에 낯을 가린채로
김용일 박사가 내게 냉정하게 설명하듯

가슴 속에 담아 두었던 말들을
한꺼번에 토해 버렸다.

막판에는 대사를 달달 외워 둔 연기자마냥
더듬거리지도 않고 호흡과 높낮이를 맞춰가며
거침없이 내뱉었다.

" 어~~~억? 아니... 당신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지금??? !!! "

" . . . . . . "
  
혜숙은 정말로
아무 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나 보다.

혜숙에게는 내 말이
전혀 뚱딴지 같고 허무맹랑했던 듯 하다.
전혀 황당무계하고 금시초문인 듯 하다.  

어쩌면 당연한 반응이었겠는데
내가 오히려 뜻밖이라는 느낌에
순간 당황스럽다.

말문이 막힌다.

그렇다면 이 순간
혜숙이 얼마나 큰 충격을 받고 있을까?

참 좋다는 분위기에
편안하고 황홀하다는 기분에
심사가 얼마나 복잡하고 어지러울까?
얼마나 몸서리치고 있을까?

느닷없이 청천벽력 얻어 맞은 듯
천방지축 갈피잡지 못하고 뒤죽박죽일까?

자기 생명을 포기하고
죽음을 각오해야 되는 고통을
어떻게 감당하나?

나는 한숨 내 쉴 여유조차 없다.

숨 죽이고
솟구처 오르는 울음
가슴에 쓸어안고
참아 내야 한다.

" 당신이 뭘 안다고 그래? 잘 알지도 못하면서 왜 그래???
나 원래 위궤양 있었던 거 당신도 알잖아?
그게 좀 심해져서 위 일부분만 잘라 낸 거란 말야!
위가 지금 있는데 왜 없다고 그래???
어디서 그런 말 듣고 다니는 거야! 알지도 못하면서....."

혜숙은 내게 마~악 화를 냈다.

한숨 쉴 여유없이 숨소리 죽이며
솟구치는 감정 억누르고 있는데
그만 견뎌내지 못하고
울음이 입 밖으로 새 나온다.

" 여보! 저기..... 이럴게 아니고... 흐~흑.....
내일 김용일 박사한테 같이 가서 얘기를 직접 들어 보자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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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내가 미워서 그러는 거지?


" 들어보나마난데 뭘 그래! 내가 견디다 못 하니까 오빠가
육동휘 오빠 병원에 데리고 가서 내시경 검사, 조직 검사 다 하고
아무리 간단한 수술이라도 시설 좋은데서 하는게 더 좋겠다 그래서
이 병원으로 온 건데 뭘 그래!
수술하기 전에 조직 검사 결과도 다 듣고, 수술 받고 난 다음 상태도
오빠들한테 다 들었단 말야.
아무려면 내가 명색이 약사인데 지금 내 병이 어떤 상탠지 모르겠어?
당신이 어디서 잘못 안 거야. 당신 좀 이상하다.....
당신 혹시 내가 미워서 그러는 거 아냐?
당신 내가 미워서 그러는 거지???....."
    
솟구치는 감정 억누르지 못하고
계속 흐윽~흑 거리는 나를 두고서

혜숙은 오히려 안스럽다는 듯
설득하고 다독거리려는 게 아닌가?

혜숙의 반응이 주치의 말대로
죽음을 앞둔 암 환자 심리 상태에서
첫 번째 단계와 바로 맞아 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나는 지금 확인하고 있는 순간이다.

더 이상 혜숙을 설득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

차라리
혜숙이 알고 있는대로
자신의 병을 인정하지 않고
부정하고 거부하는 편이 낳을 듯 싶다.

혜숙이 세상을 증오하지 않고
저주하지 않도록 하는 게
옳을 듯 싶기도 하다.

죽음을 앞두고
몸서리치는 공포와 절망을
혜숙이 감당하지 않아도 된다면

전혀 모른 채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면

차라리 그 편이
혜숙을 위해서
더 편안할 듯 싶기도 하다.

" 허~억..... 허~억....."

나는 터져 나오는 울음을 참아 내는 대신
가슴 속 깊은데서 치솟아 오르는 한숨을
그냥 토해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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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변해 가는 표정


그러고부터
우리는 서로
눈길을 마주할 수 없었다.

어쩌다 눈길이 마주치게 되면 나는 혜숙에게
절체절명한 기로에 처해 있는 지금의 상태를
거부하거나 부정하지 말고

죽기살기 각오로 마음 단단히 먹고
영육간의 고통을 한시바삐 극복해 나가자
애원하고 호소하는 눈빛이었고

혜숙은 나에게 더 이상 그따위 쓸데없는 말로
사람 속 뒤집어 놓지 말라고 경계하면서도
한편으론 혹시나 하는 눈빛으로
두려움과 공포를 떨쳐 내려는 표정이었다.

서로 오랜동안 떨어져 있다 재회해서 깨가 쏟아질 듯
가슴 부풀어 있을 분위기는 어디론가 날아가버리고

언제 끊어질지 모르는 긴장감이
우리 사이를 팽팽하게 감돌고 있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나는
막무가내로 거부하고 부정하는 당당함이
점점 두려움과 공포로 변해 가는
혜숙의 눈길과 표정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슬며시 밖으로 나가
북받쳐 오르는 눈물을 억누르고 삼키곤 했다.

나는 다시 주치의 김용일 박사를 찾아갔다.

" 선생님..... 저도 환자 본인이 자기 병을 정확하게 아는 게
치료에도 도움이 되고 극복하는데도 더 효과적이겠다 싶어서
제 아내에게 지금 처해 있는 상태를 어제 저녁에 다 얘기했는데
도무지 믿으려 하지 않는데 어떻하면 좋죠?...
한편으로는 불안해 하는 모습도 보이고 해서...
혹시 부정하고 거부하는 암 환자의 첫 번째 심리 상태에 있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구요...
제 아내 경우는 어차피 치료 받는 과정에서 알아 차릴 것 같구 해서
부탁드리는 건데요...
제가 일단 말을 먼저 꺼내 놓았으니까 이제 선생님께서 환자에게 직접
말씀해 주셨으면 하거든요?....."

" 글쎄... 좀 생각해 봅시다."

나로서는 이 순간 무엇보다도 중요하고 화급한 일인데
주치의는 그러겠다는 건지 말겠다는 건지
도대체가 종잡을 수 없는 대답이시다.

그 일은 일단 보호자에게 맡겨진 문제로 정리된 게 아니냐면서
완곡하게 거절하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호자가 간곡하게 부탁을 하니
마음이 내키지는 않지만 시간을 두고 기다려 봤다가
딱히 해야만 되겠다고 그런다면
못 한달 수만도 없는 일 아니냐는 뜻 같기도 하다.

나는 뭔가 모르게 마음이 조급해 졌다.

" 기왕에 말문을 열어 놓았으니까 환자가 더 이상 혼란스럽지 않고
마음을 단단히 잡을 수 있도록 가급적 빠른 시간 안에 말씀 좀
해 주십시요....."

나는 아예 떼거지를 쓰다시피 했다.

"....."
      
하지만 김용일 박사는 더 이상 아무 말 없다.

내게는 사회 선배되고 누구라면 알만하게
가문 있는 집안에서 자라
김용일 박사와 초 중 고등 동기 동창이던 정대철 전 의원께
훗날 들어 알게 된 일...

어렸을 적부터 집안끼리 막역하게 왕래하고
서로 제 집처럼 드나드는 사이였단다.

선친도 당대에 이름떨친 명의였고
경기 중 고등 적부터 공부도 썩 잘했단다.

서울대 병원에서도 장래가 보장된 실력이었는데
가문있는 명의 집안 가지고는 행세 못 하던 세상

예상치 못한 일로 경쟁에 밀려
한 때 실의에 빠져 있다 미국으로 유학갔단다.
아까운 인재인데 참으로 납득할 수 없는 일이었단다.  
 
그래서였던가?
왠지 모르게 편안한 인상을 풍기는 김용일 박사한테
떼거지부리듯 허심탄회 할 수 있었던게...

교도소에서 출소한 사실을 은연중 숨기려다
어이없이 들통나버린 일도
주치의와 환자 보호자 사이에 놓인 간격을
허물게 한 계기가 되지 않았나 싶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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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자주색 투피스


다음날부터 아침 회진 때마다
나는 김용일 박사의 표정을 살폈다.

이제나 말 할까? 저제나 말 할 까...

김용일 박사는 아무일 아니라는 듯
들으나마나 하나마나 한 말 몇마디 나누고는
그냥 우르르 몰려 나간다.

나와 눈길 마주치기
여~엉 불편한 표정인 것 같기도 하고
내 말은 말같지 않게 여기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닐테지...
회진 때 어수선한 분위기에서 하기 보다는
따로 불러 하시겠지...
곧 부르시겠지...

그럴 때마다 혜숙의 표정은
미묘하게 밝아 진다.

그것 봐!
주치의 선생님은 아무 말씀 없잖아!
괜히 전문가도 아닌게 알지도 못 하면서
사람 간 떨어지게 하고 난리야!.....

그럴수록 전투에서 밀려난 것처럼
나는 더욱 초조하고 다급해졌다.

거부하고 부정하는 단계의 벽이 이렇게 높으면
어느 세월에 증오하고 저주하는 단계를 넘고
우울증에 빠지고 자포자기하는 단계를 넘어서
삶을 정리하고 안정하는 단계에 들어 서겠는가?

기왕에 거쳐야 할 단계라면
하루빨리 한시바삐 겪고 넘어서
투병 생활에 전심전력 기울여야 되지 않겠는가?

삶을 위한 투쟁을 당장에 시작하고
삶을 위한 고난의 대장정에 바로 나서야 되지 않겠는가?

혜숙이 수술한 지 20 일 째 되는 4 월 22 일
퇴원 수속하라는 전갈이 왔다.

전날부터 혜숙은
화사로운 봄 날
무슨 옷을 입고 퇴원할까?
고르고 궁리하면서 들떠 있었다.

그러고보면 혜숙은 학창 시절
나와 함께 남산 중앙정보부에 끌려 가
100 여 일 동안 구속되었다 석방된 일 말고는
가장 오랜동안 가정을 떠나 있던 셈이다.

바로 엊그제까지만 하더라도
세상 일 잊어버리고 입원해 있는게
이리 마음 편할 수 없다던 혜숙은

하루라도 빨리 퇴원해서 세상으로 돌아가기를
그렇게 바랄 수가 없었다.
한시바삐 병원에서 탈출하고 싶어 했다.

안방 장롱 속 옷걸이에 걸려 있는
자주색 투피스를 찾아서
세탁소에 맡겨 살짝 다림질 해 가지고 오란다.

속 옷은 그 옆에 옷장
몇 번 째 서랍에 있으니
알아서 잘 골라 오란다.

나는 오랜동안 떨어져 있어선지
아무래도 눈에 익지 않아 이리저리 뒤져 본다.

이거겠다 싶어 혜숙이 시킨대로
정성스레 싸 든다.

혜숙은 들뜬 마음으로 보따리를 풀어보더니 대뜸
누가 이런 걸 가져 오라고 그랬냐면서
느닷없이 신경질을 냈다.

나는 어안이벙벙한 채
오른손으로 머리 뒤꼭지를 긁고 있다가
나들이 하는 것도 아니고
여기서 집앞까지 택시 타고 가는 건데
그냥 입고 가면 어떻겠느냐고 했다.

혜숙은 눈을 흘기고
입원해 있는 동안 몸무게가 얼마나 빠졌는지
알고 있기나 하느냐면서

입으나마나 줄줄 흘러내리는 옷을
어떻게 걸치고 다니느냐고
마구 화를 냈다.

이런 적 없었다.
지금도 얼굴 화장 전혀 안 하듯이
옷가지에 관심두고 신경쓰는 모습
본적도 느낀적도 없다.  
  
남편이기도 하지만
혜숙은 나를 존경하는 선배로
뜻을 함께하는 동지로
늘 자부심을 가져 왔다.

그러니만큼 이날 이때까지
말다툼이나 자잘한 신경질조차 부려본 적 없다.

나는 혜숙의 설명을 재삼재사 머리에 되새겼다.
그리고 혜숙의 신경을 거스르지 않도록
차곡차곡 꼼꼼히 뒤져
자주색 투피스를 찾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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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퇴원 수속


4 월 22 일, 혜숙은 아침부터 퇴원할 생각으로
마음이 한껏 들떠 있다.

처제와 병원 원무과에서 퇴원 수속하던 중에
복잡한 일이 발생했다.

구속될 당시에 나는 연구원에서
연구출판 책임자로 근무하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직장에서 근무하다 시국 사건에 연루되면
쫓겨 나거나 적어도 누를 끼치지 않기 위해
스스로 사표를 내거나 했을 것이었다.

하지만 내가 근무하던 직장은
독일 정부와 미국 영국 캐나다 호주 등의 기독교 기관 지원 아래
한국 사회가 정치적 민주화와 정의롭고 평등한 사회 발전을 이루도록
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립된 기독교 연구 기관이다.

그러니만큼 내가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구속된 일이야말로
설립 목적과 정신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것이었다.

연구원에서는 내가 구속되고 재판 받는 동안에
깊은 관심을 보였을 뿐만 아니라 변호사 비용까지 도맡아 주었다.
        
일반 직장에 비해서도 그리 적지 않은 월급과 상여금까지
꼬박꼬박 지급해 주었다.

그러다가 정보 기관에서 연구원에 대한 감시와 탄압이 거세지고
그러니만큼 재정적 형편도 점점 어려워지게 되었다.

혜숙을 통해서 연구원의 형편과 사정을 전해 들은 나는
석방되기 바로 한달 여 전에 사표를 제출했다.

문제는 의료보험이었다.
의료보험 제도가 생기고 지금처럼 일반화 되기 이전에도
우리 가족은 병원에 다니는 일도 없이 줄곧 보험료를 내 왔다.

감옥에 있는 동안에도 연구원 직장의료보험에 줄곧 가입해 있었다.

그런데 막상 혜숙의 퇴원 수속을 밟으려다보니까
내 사표가 수리되면서 불과 1 개월 여 전부터
우리 가족 모두가 의료보험 적용 대상에서 제외된 것이다.

의료보험 적용 여부에 따라 비용 부담이
그 당시 200 만 원 내외에서 800 만 원 정도로
4 배 가량 차이가 난다.

나는 대학 병원과 의료보험 기관
내가 근무하던 연구원과 약사회 등등으로
여기저기 수소문하고 알아 보고 했다.

마침 가까운 친구의 주선으로
적지않은 도움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병원 원무과에서는 서류를 보강하고 구비하는데 시간이 걸리니
하루를 연기해서 23 일 퇴원하는 것이 좋겠단다.

그리되면 간호사로 근무하는 처제의 직원 가족 배려 등등까지 적용해서
140 여 만 원만 지불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나는 참으로 다행이고 잘 됐다 싶었다.

병실로 올라가 보니 혜숙은
자주색 투피스를 예쁘게 입고
짐가방을 품에 안고
침대에 걸터 앉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퇴원 수속 과정에서 일어났던 복잡한 일들을
혜숙에게 설명했다.

그리고 병원에서도 적용할 수 있는 배려를 다 해 주어서
큰 도움이 되었다고 했다.

이제 하루만 더 있다 나가면
모든 일들이 잘 마무리 될 것이라고 했다.

옷 차려입은 폼이며 기다리고 앉아 있는 자세에서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낀터라
나는 혜숙의 눈치를 살펴가며 조심조심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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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나 그냥 집에 갈래!



혜숙은 내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더니
짐가방을 든 채 갑자기 병실문을 열고 복도로 뛰쳐 나간다.
나는 뒤쫓아 나가 혜숙을 붙들고 달랜다.

 

 " 나 그냥 집에 갈래!!! "

 

그런 걸 할려면 미리미리 해 두었어야지
왜 지금에 와서 그러느냐는 거다.

 

담당 의사와 병실 간호사들 모두가
오늘 퇴원하는 줄 다 알고
병실 환자들도 다 아는데
인사까지 다 했는데

 

퇴원한다던 사람이
퇴원 수속 때문에
입원비 때문에

하루를 더 붙잡혀 있게 되었으니
창피스러워서 못 있겠다는 거다.

 

800 만 원이든 얼마든
당장 만들어 놓을 테니까

지금 빨리 내려가서
오늘 당장 퇴원할 수 있도록
다시 수속하라고 난리다.

 

내가 자꾸 미그적거리면
혜숙이 직접 원무과로 달려가서
수속을 다시 밟겠단다.

 

혜숙은 숨을 씨근씨근 몰아 쉬며
원무과로 향해 간다.

 

혜숙이 워낙 머리 끝까지 화가 치솟아 있던 터라
나는 더 이상 말리지 못한 채
짐이나 받아 들고 뒤를 쫓아 간다.

 

혜숙은 원무과장을 만나
당장에 퇴원할 테니까
어떻게 해서든지 처리하라고 다그친다.

 

느닷없이 봉변 당한 원무과장은
난감해서 어쩔 줄 몰라 한다.

 

처음부터 사정을 미리 알았더라면 차질없이 처리할 수 있는 건데
입원할 때 기록부터 모든 서류를 다시 정리해야 되기 때문에
시간이 많이 걸린단다.

자기 임의대로 처리할 수 없다는 거다.

 

그러면서 실무자의 입장을 생각해서라도 하루만 더 참아 달라고
오히려 혜숙에게 사정한다.
그제서야 혜숙은 화가 좀 풀렸는지 수그러든 표정이다.
 
나는 혜숙의 비위에 거슬리지 않도록 조심조심 눈치를 살피며
다시 병실로 데리고 간다.

 

하루이틀 사이에 혜숙이
병원에서 탈출하고 싶어 하고
예쁜 옷 입고 싶어 하고
뜬굼없이 신경질 부리고 화내는 모습 지켜 보면서

 

암에 대한 불안
죽음에 대한 불안과 공포로 휩싸인
속내를 들여다 보는 것 같아

나는 고개를 돌리고
한숨을 토해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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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확인 사살



다음 날
그러니까 혜숙이 입원한 지 21 째 되고
내가 출소한 지 9 일째 되는 날
혜숙은 퇴원한다.

 

전 날 퇴원했더라면 주치의와
마지막 면담을 할 수 있었을 껄...

 

그 날은 김용일 박사
진료가 없는 날이란다.

 

혜숙에게 질병 상태를 확인시키지 못하고
이대로 그냥 퇴원해야 하는 건가?

 

퇴원 수속하면서 수련의에게 간호사에게
김용일 박사께 인사 좀 드리러 가야겠노라 했다.

1 시간 여 후에 의과대학 교수 연구실에서 만나잔다.

 

병원 진료실이 아니어선가?
의사의 백색 가운과 환자복이 주는 간격과 벽을 벗고
서로가 생활 복장으로 차려 입은 상태에서
처음으로 마주하는 자리

환자와 의사라는 상대적 업무적인 관계에서
조금은 벗어날 수 있는 분위기다.

 

그러니만큼 인생의 선후배
사람과 사람 사이에 흐르는 인간적인 정을
어느 정도 느낄 수 있는 자리

그동안 의학적이고 사무적인 언어로만 나누던 건조한 대화도
일상 생활 용어를 섞어 가며 자연스레 나눈다.

 

이번에야 말로 마지막 기회일텐데...
나의 눈빛과 표정에 담긴 뜻을 아시겠지...
간절히 애원하는 부탁을 들어 주시겠지...

 

김용일 박사는 미리 작정하고 준비한 듯
병상 기록부를 테이블 위에 펼쳐 놓는다.

 

" 환자는 수술하기 전 내시경과 조직 검사 결과 위암 말기로 진단돼서
아주 어려운 상황에서 수술하게 되었습니다.
일단 열어 놓고 위를 모두 절제하고 위에 가까이 붙어 있는
비장과 췌장도 3 분의 2 정도를 잘라냈습니다.
임파선과 신경 등 많은 부위에서 확인할 수 있는 암세포는
모두 찾아서 제거했습니다.
수술 후 잘라낸 부위를 정밀 검사한 결과로는 위암 3 기에서 4 기로
진행하는 중이었던 것으로 나왔습니다.
이제부터는 혹시 미처 제거하지 못한 암세포가 더 있을 수도 있으니까
항암제 치료를 받고 방사선 치료도 6 주 정도 받아야 합니다. "

 

나는 그 와중에 혜숙의 표정을 살핀다.
혜숙은 이미 각오하고 있었는지 표정이 없다.

 

자기 몸에 대한, 자신의 운명에 대한
과학적 판정, 심판을 그저 무덤덤히 듣고만 있다.

 

의심하거나 궁금하거나 다시 확인하고 싶은 표정도 아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거부하거나 부정하려는 표정도 아니다.
아무런 질문도 말도 없다.

 

주치의가 내민 차트를 읽고 있는 건지
그저 시선 둘데가 마땅치 않아 거기에다 두고 있는 건지
도무지 표정이 없다.

 

나는 이 말을 처음 듣는 순간
소름이 끼치고 온 몸에서 진땀이 배어 나왔다.

온 몸의 신경이 한꺼번에 머리로 치솟아 오르고
졸도할 듯 현기증이 일어 털썩 주저 앉았었다.

 

온 몸의 피가 손가락 끝으로 발가락 끝으로 술술 새 나가듯
안색이 하얗게 질려 버렸다.
온 몸을 제대로 가눌 수 없었다.

 

혜숙이 나에게 이 말을 들었을 때
신경질부리고, 발악하듯 화 내고
부정하고 거부했던 것처럼 반응하지 않는 모습에서
나는 오히려 숨이 멈춰 버릴듯 답답해 진다.

 

혹시나 혹시나 거부하고 싶은 몸부림에
가냘픈 지푸라기라도 붙잡고 매달리고 싶은 절박한 심경에
마치 총뿌리를 들이대고 확인 사살하듯
잔인하게 박살 내버리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에
나는 가슴이 찢어질듯 쓰라려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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