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자주색 투피스


다음날부터 아침 회진 때마다
나는 김용일 박사의 표정을 살폈다.

이제나 말 할까? 저제나 말 할 까...

김용일 박사는 아무일 아니라는 듯
들으나마나 하나마나 한 말 몇마디 나누고는
그냥 우르르 몰려 나간다.

나와 눈길 마주치기
여~엉 불편한 표정인 것 같기도 하고
내 말은 말같지 않게 여기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닐테지...
회진 때 어수선한 분위기에서 하기 보다는
따로 불러 하시겠지...
곧 부르시겠지...

그럴 때마다 혜숙의 표정은
미묘하게 밝아 진다.

그것 봐!
주치의 선생님은 아무 말씀 없잖아!
괜히 전문가도 아닌게 알지도 못 하면서
사람 간 떨어지게 하고 난리야!.....

그럴수록 전투에서 밀려난 것처럼
나는 더욱 초조하고 다급해졌다.

거부하고 부정하는 단계의 벽이 이렇게 높으면
어느 세월에 증오하고 저주하는 단계를 넘고
우울증에 빠지고 자포자기하는 단계를 넘어서
삶을 정리하고 안정하는 단계에 들어 서겠는가?

기왕에 거쳐야 할 단계라면
하루빨리 한시바삐 겪고 넘어서
투병 생활에 전심전력 기울여야 되지 않겠는가?

삶을 위한 투쟁을 당장에 시작하고
삶을 위한 고난의 대장정에 바로 나서야 되지 않겠는가?

혜숙이 수술한 지 20 일 째 되는 4 월 22 일
퇴원 수속하라는 전갈이 왔다.

전날부터 혜숙은
화사로운 봄 날
무슨 옷을 입고 퇴원할까?
고르고 궁리하면서 들떠 있었다.

그러고보면 혜숙은 학창 시절
나와 함께 남산 중앙정보부에 끌려 가
100 여 일 동안 구속되었다 석방된 일 말고는
가장 오랜동안 가정을 떠나 있던 셈이다.

바로 엊그제까지만 하더라도
세상 일 잊어버리고 입원해 있는게
이리 마음 편할 수 없다던 혜숙은

하루라도 빨리 퇴원해서 세상으로 돌아가기를
그렇게 바랄 수가 없었다.
한시바삐 병원에서 탈출하고 싶어 했다.

안방 장롱 속 옷걸이에 걸려 있는
자주색 투피스를 찾아서
세탁소에 맡겨 살짝 다림질 해 가지고 오란다.

속 옷은 그 옆에 옷장
몇 번 째 서랍에 있으니
알아서 잘 골라 오란다.

나는 오랜동안 떨어져 있어선지
아무래도 눈에 익지 않아 이리저리 뒤져 본다.

이거겠다 싶어 혜숙이 시킨대로
정성스레 싸 든다.

혜숙은 들뜬 마음으로 보따리를 풀어보더니 대뜸
누가 이런 걸 가져 오라고 그랬냐면서
느닷없이 신경질을 냈다.

나는 어안이벙벙한 채
오른손으로 머리 뒤꼭지를 긁고 있다가
나들이 하는 것도 아니고
여기서 집앞까지 택시 타고 가는 건데
그냥 입고 가면 어떻겠느냐고 했다.

혜숙은 눈을 흘기고
입원해 있는 동안 몸무게가 얼마나 빠졌는지
알고 있기나 하느냐면서

입으나마나 줄줄 흘러내리는 옷을
어떻게 걸치고 다니느냐고
마구 화를 냈다.

이런 적 없었다.
지금도 얼굴 화장 전혀 안 하듯이
옷가지에 관심두고 신경쓰는 모습
본적도 느낀적도 없다.  
  
남편이기도 하지만
혜숙은 나를 존경하는 선배로
뜻을 함께하는 동지로
늘 자부심을 가져 왔다.

그러니만큼 이날 이때까지
말다툼이나 자잘한 신경질조차 부려본 적 없다.

나는 혜숙의 설명을 재삼재사 머리에 되새겼다.
그리고 혜숙의 신경을 거스르지 않도록
차곡차곡 꼼꼼히 뒤져
자주색 투피스를 찾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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