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남들은 다 하는 도리


 
 내가 출소한 뒤 나흘 후에는
 어머니 칠순연이 예정되어 있었다.

 

 어머니는 평소
 무슨 날 무슨무슨 날이라 하여
 특별한 음식을 차리고 행사하고 기념하는 것을
 그리 달가와 하지 않으셨다.

 

 세상 일에 쫓겨 살아 가기도 바쁜 터에
 절기다 뭐다 일일이 따지고 챙기고 하는 것을
 허례허식이라 여기셨고 부질없어 하셨다.

 

 우리 가족의 생일도 마찬가지였다.
 기껏해야 생일을 함께 기억하는 정도로
 상징적인 의미로   
 아침 상에 미역국을 올려 놓는 것이 고작이었다.

 

 어머니의 회갑 때도 역시 그랬다.
 어머니는 늘 눈코뜰새없이 분주하셨고
 나는 긴급조치 9 호 위반으로 구속되었다가
 석방된 지 며칠 지나지 않아서였다.

 

 나는 아직 결혼하기 전이었고
 나의 누이는 오랜 세월 독일에 거주하면서
 돌아 오기 어려운 아니 돌아 올 수 없는 형편이었다.

 

 어머니는 막무가내로 회갑연을 마다하셨다.

 딱히 경제적 형편과 사정이 어려워서도 아니었을 텐데.....

 

 그때 나는 더 이상 어머니의 뜻을 꺾을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나와 혜숙은 인근 가까이 있는 용인 에버랜드 공원으로
 어머니 아버님을 모시고 나들이하는 것으로

 회갑연을 대신해야 했다.

 

 그 후 아버님은 박 대통령 시해 사건으로 비상 계엄령이 선포되고
 내가 세 번째 구속되어 계엄사령부에서 고문당하고 취조받는 와중에
 칠순을 맞으시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집안 사정도 그러려니와
 주변 분위기도 아버님 칠순을 기리고 축하할만큼 여유로울 수가 없었다.

 

 결국 남들은 거의 모두가 다 하는 부모님에 대한 도리를
 나는 그만 이런저런 사정으로 못 하고 지나쳤다.

 

 더우기 아버님은 73 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셨다.

 

 나는 남들 누구나가 다 하는 자식된 도리를
 다시는 아버님께 해 드릴 기회조차 영영 놓쳐버리는
 불효를 저지르고 만 것이다.


 이제 아버님을 저 세상으로 떠나 보내시고
 6 년 여 동안 홀로 지내시던 어머니께서 칠순을 맞이하실 차례다.

 

 나는 여러 달 전부터 교도소 접견실에서 아내와 의논해 왔다.

 이번에 어머니 고희연마저 못 하고 지나쳐 버리면
 나와 혜숙이 가슴에 두고두고 씻지 못할 한으로
 남아 있을 것 같다.

 

 어쩌면 남들이 다 하는 자식된 도리를 시늉이라도 낼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르지 않겠는가?

 

 이런 뜻과 주장은 감옥 안에 있는 나보다
 밖에 있는 혜숙이 더 강경했다.

 

 천만다행이게도 어머니 칠순이
 내가 만기 출소하는 날 나흘 후다.

 

 혜숙은 식구들이 입을 한복을 맞추고
 내 몸둘레 사이즈를 재어 갔다.

 

 장소를 예약하고 음식상을 맞췄다.
 초청장을 만들어 주위 분들에게 띄웠다.

 

 민청련과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

 민주화실천가족협의회(민가협) 등 단체에서도
 나의 석방 환영을 겸해서 축하하기 위해
 어머니의 칠순 행사 준비를 조직적으로  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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