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변해 가는 표정


그러고부터
우리는 서로
눈길을 마주할 수 없었다.

어쩌다 눈길이 마주치게 되면 나는 혜숙에게
절체절명한 기로에 처해 있는 지금의 상태를
거부하거나 부정하지 말고

죽기살기 각오로 마음 단단히 먹고
영육간의 고통을 한시바삐 극복해 나가자
애원하고 호소하는 눈빛이었고

혜숙은 나에게 더 이상 그따위 쓸데없는 말로
사람 속 뒤집어 놓지 말라고 경계하면서도
한편으론 혹시나 하는 눈빛으로
두려움과 공포를 떨쳐 내려는 표정이었다.

서로 오랜동안 떨어져 있다 재회해서 깨가 쏟아질 듯
가슴 부풀어 있을 분위기는 어디론가 날아가버리고

언제 끊어질지 모르는 긴장감이
우리 사이를 팽팽하게 감돌고 있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나는
막무가내로 거부하고 부정하는 당당함이
점점 두려움과 공포로 변해 가는
혜숙의 눈길과 표정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슬며시 밖으로 나가
북받쳐 오르는 눈물을 억누르고 삼키곤 했다.

나는 다시 주치의 김용일 박사를 찾아갔다.

" 선생님..... 저도 환자 본인이 자기 병을 정확하게 아는 게
치료에도 도움이 되고 극복하는데도 더 효과적이겠다 싶어서
제 아내에게 지금 처해 있는 상태를 어제 저녁에 다 얘기했는데
도무지 믿으려 하지 않는데 어떻하면 좋죠?...
한편으로는 불안해 하는 모습도 보이고 해서...
혹시 부정하고 거부하는 암 환자의 첫 번째 심리 상태에 있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구요...
제 아내 경우는 어차피 치료 받는 과정에서 알아 차릴 것 같구 해서
부탁드리는 건데요...
제가 일단 말을 먼저 꺼내 놓았으니까 이제 선생님께서 환자에게 직접
말씀해 주셨으면 하거든요?....."

" 글쎄... 좀 생각해 봅시다."

나로서는 이 순간 무엇보다도 중요하고 화급한 일인데
주치의는 그러겠다는 건지 말겠다는 건지
도대체가 종잡을 수 없는 대답이시다.

그 일은 일단 보호자에게 맡겨진 문제로 정리된 게 아니냐면서
완곡하게 거절하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호자가 간곡하게 부탁을 하니
마음이 내키지는 않지만 시간을 두고 기다려 봤다가
딱히 해야만 되겠다고 그런다면
못 한달 수만도 없는 일 아니냐는 뜻 같기도 하다.

나는 뭔가 모르게 마음이 조급해 졌다.

" 기왕에 말문을 열어 놓았으니까 환자가 더 이상 혼란스럽지 않고
마음을 단단히 잡을 수 있도록 가급적 빠른 시간 안에 말씀 좀
해 주십시요....."

나는 아예 떼거지를 쓰다시피 했다.

"....."
      
하지만 김용일 박사는 더 이상 아무 말 없다.

내게는 사회 선배되고 누구라면 알만하게
가문 있는 집안에서 자라
김용일 박사와 초 중 고등 동기 동창이던 정대철 전 의원께
훗날 들어 알게 된 일...

어렸을 적부터 집안끼리 막역하게 왕래하고
서로 제 집처럼 드나드는 사이였단다.

선친도 당대에 이름떨친 명의였고
경기 중 고등 적부터 공부도 썩 잘했단다.

서울대 병원에서도 장래가 보장된 실력이었는데
가문있는 명의 집안 가지고는 행세 못 하던 세상

예상치 못한 일로 경쟁에 밀려
한 때 실의에 빠져 있다 미국으로 유학갔단다.
아까운 인재인데 참으로 납득할 수 없는 일이었단다.  
 
그래서였던가?
왠지 모르게 편안한 인상을 풍기는 김용일 박사한테
떼거지부리듯 허심탄회 할 수 있었던게...

교도소에서 출소한 사실을 은연중 숨기려다
어이없이 들통나버린 일도
주치의와 환자 보호자 사이에 놓인 간격을
허물게 한 계기가 되지 않았나 싶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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