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함께 나누어야 할 고통

 

 

매주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5 일 동안
그렇게 해서 6 주간
혜숙은 방사선 치료를 받아야 한다.

항암제는 처음에 강력한 아드리아마이신과 5-FU를 맞고
3 주 후에 약한 미토마이신과 시스플라틴을 맞은 다음
1 주 후에 혈액검사로 백혈구 수치를 점검하고
다시 강력한 아드리아마이신과 5-FU를 맞아야 한다.

항암제가 인체에 워낙 독한 약물이다보니
처음에는 강한 성분을 주사하고
3 주 동안 몸을 추스린 후에 약한 성분을 주사했다가
1 주 후에는 다시 강하게 주사하는 치료법이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의학 기술의 발달과 성과에
우선적으로 의존해서 최선을 다 하자고 다짐했다.

하지만 주위에서는 혜숙의 병을 혜숙이만의 문제로
우리 가족만이 짊어져야 하는 문제로 놓아 두지 않으려 했다.

특히 오랜 세월 민주화 운동을 함께 해 온 선후배와 동료들
그 가족들은 정도가 지나치리만큼 심했다.

지난 20 여 년을 함께 끌려 다니면서
고문당하고 감옥살이 했던 친구들

이 땅의 민주화를 위해서 물심양면으로 후원하고
함께 행동해 온 선후배 동료와 어르신들, 그 가족들 모두가

혜숙의 병을, 우리 가족이 당하고 있는 고통을
함께 나누고 짊어져야 마땅한 일이라고 여겼다.

이들에게 혜숙이 당하는 고통은 두 번째 사건이었다.
9 개월 전 대구에서 활동하던 이강철(전 청와대 시민사회수석)의 부인이
처음으로 위암 수술을 받았다.

민청학련 사건 때 우리 부부와 함께 구속되었던 이강철은
5 년 여 동안 감옥살이 하다가 석방된 이후로
줄곧 대구 경북 지역에서 민주화 운동을 해 왔다.


▲ 이강철 전 청와대 시민사회수석

그가 뒤늦은 나이로 결혼할 때
나와 혜숙이 함께 대구까지 내려가 축하했다.

그의 부인은 학교 선생님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그런데 수업 도중에 그만 통증으로 쓰러지고
진단 결과 위암으로 판명되어 수술을 받았단다.

그 때 이강철은 시국 사건으로 전국에 지명수배 중이었다.
공안 당국에서 그를 체포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는데
그만 청천벽력 같은 일이 닥친 것이다.

고민하던 끝에 그는 뻔히 잡힐 줄 알면서도
암 수술 받는 아내를 문병하러 갔다가 바로 연행되었다.

참으로 기가 막힐 사연을 안고 있던 이강철은
누구보다도 많은 관심과 조언을 내게 보내 주었다.

그의 부인은 수술 결과 위암 2 기로 판명되어
5 년 생존율이 50 퍼센트 내외라 했다.

내색할 수는 없었지만 그 당시 내게는 그가 참으로 부러웠다.
생사의 갈림길에서 생존율 50 % 와 15 %
더욱이 그의 부인은 항암제를 맞으면서도
멀쩡히 학교에 출근해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니...

" 야! 니 마누라 우리 혜숙 씨 살릴라카믄 우선 토룡탕부터
멕여 봐라 임마야...
왜관에 가믄 신부님들만 지내는 수도원이 있는데 말이다...
서양에서 중세기 이전에 기독교가 극심하게 탄압 받을 때부터
신부님들이 토굴 속에 숨어 살믄서 보신용으로 만들어 잡순 걸
전수받은 거라 카든데...
우리 마누라 그거 묵고 많이 좋아졌다 아이가...
구하기가 쉽지 않은데, 내가 대구 쪽 신부님들한테 부탁해서
구해 볼테니까니 우리 혜숙 씨한테 꼭 멕여라 임마야..."

같은 사건으로 혜숙과 함께 구속된 공범이자 동지적 관계여선지
그는 꼭 "니 마누라 우리 혜숙 씨"라 한다.

그 이강철의 부인 다음으로 재야 민주화 운동 진영에서는
혜숙이 두 번째로 위암 환자가 되어 생사의 기로에 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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