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회 진

다음 날
잣죽과 밑반찬거리를 싸들고 병원으로 달려 갔다.

병실 전체가 아침부터 각종 진료와 검사... 투약과 주사...
간호사 회진... 담당 의사 회진... 등등으로
어수선하고 분주하다.

어제 만나 뵈었던 주치의 김용일 박사가
휘하에 수련의 7 ~ 8 명 이끌고 우르르 들어 선다.

마치 군대에서 감옥에서 순시하고 점호할 때마냥
혜숙은 사물함과 침대를 깔끔하게 정리 정돈하고
침대 위에 차렷 자세로 앉아 있다.

나도 덩달아 벌떡 일어 나긴 했지만
차렷 자세는 좀 어색하고
뒷짐짓고 삐딱하니 서 있기도 그렇고...

이것도 저것도 아닌 자세로
엉거주춤 서 있는다.

혜숙은 주치의에 대하여.....
정중하게 인사...
한다.

소변은 보았느냐.....
몇 번 보았냐...
대변은...

밥은 먹었냐.....
얼만큼 먹었냐...

이 절체절명 중차대한 순간에
아무 의미도 없을
일상적인 말

밥 먹었냐... ( 많이 묵어라... )
오줌 똥 눴냐... ( 마니마니 싸라... )

주치의 김용일 박사는 혜숙에게 몇 마디 묻더니
수련의들 향해 전문 용어로 소곤소곤거리고는
다시 우르르 몰려 나간다.

" 잠깐만요 ! ! ! "

차렷 자세로 앉아 있던 혜숙이
오른손 번쩍들어 치흔들면서 의사들을 불러 세운다.

" 저..... 김용일 박사님은 어제 뵈었지요?.....
여기 이 사람이 제 신랑이예요.....
여보 인사드려.....
어디 좀 머얼리 가 있다가 어제 나왔어요....."

혜숙은 기왕에 들통난 것
별로 거리낄 것도 없다는 듯
당당하고 밝은 표정으로 익살을 섞어 가며
의사들에게 나를 소개한다.

" 선생님... 나 우리 신랑이랑
1 년 반두 넘게 떨어져 있다가 만난 건데.....
퇴원 좀 빨리 시켜 줄 수 없어요?....."

진심인지 농담인지...
부탁하는 건지 사정하는 건지 떼를 쓰는 건지...
갈피잡을 수 없는 묘한 뉘앙스로
혜숙은 의사들을 향해 목소리를 높인다.

" 어..... 같이 노력해 봅시다.....
상태가 좋아지면 굳이 오래 입원해 있을 필요가 없을테고...
좀 지켜 보지요....."

김용일 박사 역시
딱히 이럴 건지 저럴 건지
알듯말듯한 말로 맞장구를 쳐 준다.

상태가 좋아지면이라니...
그럼... 금방 좋아질 수 있다는 말인가?
금방 나을 수도 있다는 말인가?
무려 5 년을 지켜 보아야 한다고 했으면서.....

좀 지켜 보고 노력해서 상태가 좋아지면
정말로 굳이 입원해 있을 필요도
걱정할 필요도 없다는 건가?.....


나는 그 순간

또다시 김용일 박사의 말꼬리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 진다.

 



 28. 저 환자 암이야

 


 의사들의 회진이 끝나자
 병실은 소란하고 어수선한 분위가
 단숨에 멈춰 버린 듯 조용하다.

 

 혜숙은 나에게 가까이 좀 와 보라더니    
 귓속말로 속삭인다.


 " 있잖아~~~ 저 맞은편에 있는 환자 있지???
 저 환자 암이야 암......
 내가 보니까 항암제를 맞고 있는데 너무 안 됐어...
 머리카락두 다 빠지구...
 근데... 본인은 자기가 암인 줄 전혀 모르구 있어...
 아마 며칠 있으면 병원에서두 포기하구 퇴원할 거 같애......" 
  

 아~~~!
 혜숙은 정말로
 자기 자신이 암이란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구나......

 

 그렇게 큰 수술을 받고도
 자기 가슴에 크게 난
 수술 자국을 보고도
 낌새조차 전혀
 못 느끼고 있구나......

 

 그렇다면 내가
 주치의를 처음 만났을 때
 김용일 박사에게는
 징역 살다 나온 사람과
 평생에 처음으로 마주했던 것처럼

 

 나 또한
 평생에 처음으로
 암 환자라는 사람을
 마주 보고 있는 것이다.

 

 나와 혜숙이
 민주화 운동 하다가 감옥에 들락거리는 이들을
 주변에서 수없이 만나고 함께 생활해 왔듯이

 

 김용일 박사는 암 환자들과 수없이 만나고
 그들과 함께 생활해 온 것 아닌가.....

 
 나는 암이란 병이 인간에게 얼마나 무섭고
 고통스러운 것인지 들어서 알고 있다.

 

 친척이랄지 친지랄지 알 만한 사람들 중에
 암으로 고생하다 운명했다는 말을 전해 듣기도 했다.

 

 하지만 혜숙이 말대로라면
 죽음을 앞두고 있는 암 환자를
 직접 마주 보기는 처음이다.


 아마도 내 사랑 혜숙이 역시
 마찬가지겠지.....

 

 그러니까
 경이로운 사실을 알려 주기 위해
 내게 가까이 좀 와 보라면서
 귓속말로
 귓속말로 속삭이는 게 아닌가?.....

 

 " 어저께도 암 환자가 한 명 퇴원했어.
 아마 못 살꺼 같으니까 집으로 데려 간 모양이야."


 나는
 가슴이 덜컹
 내려 앉는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가...
 자기 자신도
 바로 그 병을 앓고 있는데......

 

 혜숙이 주변
 내 주변 사람들은 모두 다 알고 있는데......

 

 혜숙의 말대로
 저 맞은편에 있는 환자 본인은

 자기 자신이 암인 줄 전혀 모르겠지만


 건너편에 있는 혜숙이 암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그 환자는 혜숙을 보면서

 젊은 나이에 갓 난 것부터 애들두 셋이나 있다는데

 

 너무 불쌍하고 안 됐다고

 너무 안타깝고 비참하다고 여기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어찌해야 하나......
  
 혜숙은 자신이 암이리라고는
 전혀 생각지도 않는다.

 

 절대로 암일리 없다고
 확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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