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당신 암이래


어둠이 점점 더 짙게 내리깔리면서  
나는 복잡하게 얼키고설킨 심사와
극도로 긴장된 표정을

혜숙에게 들키지 않고 가릴 수 있어
무척 다행이라 여겨진다.

혜숙과 나 사이에
짙게 가로막힌 어둠을 빌미삼아

이제는 알려야 할 말
혜숙이 꼭 알아야 할 말
가슴 속에 묻힌 말 끄집어 토해 낼
용기가 생긴다.

" 여보! 어차피 알게 될텐데...
마음가짐 단단히 먹고 잘 들어...
무슨 병인지 알고 대처를 해야지...
김용일 박사 첫 번 면담했을 적에 들었는데...
.
.
.
당신...
위는 다 잘라내고...
.
.
.
위에 가까이 붙어 있는 비장과 췌장도
일부 잘라냈대.....
.
.
.
위 역할은 장에서도 대신할 수 있대...
시간이 지나고 습관이 되면...
그다지 큰 불편 안 느끼고 살 수 있대...
.
.
.
수술 끝나고...
떼어 낸 부위 조직 검사까지 마친 결과...
.
.
.
위암 3 기로 나왔대...
.
.
.
생존 가능성에 대해서 말씀하시던데...
5 년 생존율을 기준으로 삼는다면서...
.
.
.
15 퍼센트 정도래...
5 년만 무사히 버티면 된대. 그 다음에는 암에서 완전히 해방되는 거래.
당신 자신과 가족의 노력이 무엇보다 필요하대. 5 년만 버티면 된다니까
이제 우리 당신 몸만 신경써야 돼. 앞으로 5 년 동안 우리 오로지 당신
몸만 위해서 살자. 응??? 여보~~~!!! "

나는 어둠에 낯을 가린채로
김용일 박사가 내게 냉정하게 설명하듯

가슴 속에 담아 두었던 말들을
한꺼번에 토해 버렸다.

막판에는 대사를 달달 외워 둔 연기자마냥
더듬거리지도 않고 호흡과 높낮이를 맞춰가며
거침없이 내뱉었다.

" 어~~~억? 아니... 당신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지금??? !!! "

" . . . . . . "
  
혜숙은 정말로
아무 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나 보다.

혜숙에게는 내 말이
전혀 뚱딴지 같고 허무맹랑했던 듯 하다.
전혀 황당무계하고 금시초문인 듯 하다.  

어쩌면 당연한 반응이었겠는데
내가 오히려 뜻밖이라는 느낌에
순간 당황스럽다.

말문이 막힌다.

그렇다면 이 순간
혜숙이 얼마나 큰 충격을 받고 있을까?

참 좋다는 분위기에
편안하고 황홀하다는 기분에
심사가 얼마나 복잡하고 어지러울까?
얼마나 몸서리치고 있을까?

느닷없이 청천벽력 얻어 맞은 듯
천방지축 갈피잡지 못하고 뒤죽박죽일까?

자기 생명을 포기하고
죽음을 각오해야 되는 고통을
어떻게 감당하나?

나는 한숨 내 쉴 여유조차 없다.

숨 죽이고
솟구처 오르는 울음
가슴에 쓸어안고
참아 내야 한다.

" 당신이 뭘 안다고 그래? 잘 알지도 못하면서 왜 그래???
나 원래 위궤양 있었던 거 당신도 알잖아?
그게 좀 심해져서 위 일부분만 잘라 낸 거란 말야!
위가 지금 있는데 왜 없다고 그래???
어디서 그런 말 듣고 다니는 거야! 알지도 못하면서....."

혜숙은 내게 마~악 화를 냈다.

한숨 쉴 여유없이 숨소리 죽이며
솟구치는 감정 억누르고 있는데
그만 견뎌내지 못하고
울음이 입 밖으로 새 나온다.

" 여보! 저기..... 이럴게 아니고... 흐~흑.....
내일 김용일 박사한테 같이 가서 얘기를 직접 들어 보자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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