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확인 사살



다음 날
그러니까 혜숙이 입원한 지 21 째 되고
내가 출소한 지 9 일째 되는 날
혜숙은 퇴원한다.

 

전 날 퇴원했더라면 주치의와
마지막 면담을 할 수 있었을 껄...

 

그 날은 김용일 박사
진료가 없는 날이란다.

 

혜숙에게 질병 상태를 확인시키지 못하고
이대로 그냥 퇴원해야 하는 건가?

 

퇴원 수속하면서 수련의에게 간호사에게
김용일 박사께 인사 좀 드리러 가야겠노라 했다.

1 시간 여 후에 의과대학 교수 연구실에서 만나잔다.

 

병원 진료실이 아니어선가?
의사의 백색 가운과 환자복이 주는 간격과 벽을 벗고
서로가 생활 복장으로 차려 입은 상태에서
처음으로 마주하는 자리

환자와 의사라는 상대적 업무적인 관계에서
조금은 벗어날 수 있는 분위기다.

 

그러니만큼 인생의 선후배
사람과 사람 사이에 흐르는 인간적인 정을
어느 정도 느낄 수 있는 자리

그동안 의학적이고 사무적인 언어로만 나누던 건조한 대화도
일상 생활 용어를 섞어 가며 자연스레 나눈다.

 

이번에야 말로 마지막 기회일텐데...
나의 눈빛과 표정에 담긴 뜻을 아시겠지...
간절히 애원하는 부탁을 들어 주시겠지...

 

김용일 박사는 미리 작정하고 준비한 듯
병상 기록부를 테이블 위에 펼쳐 놓는다.

 

" 환자는 수술하기 전 내시경과 조직 검사 결과 위암 말기로 진단돼서
아주 어려운 상황에서 수술하게 되었습니다.
일단 열어 놓고 위를 모두 절제하고 위에 가까이 붙어 있는
비장과 췌장도 3 분의 2 정도를 잘라냈습니다.
임파선과 신경 등 많은 부위에서 확인할 수 있는 암세포는
모두 찾아서 제거했습니다.
수술 후 잘라낸 부위를 정밀 검사한 결과로는 위암 3 기에서 4 기로
진행하는 중이었던 것으로 나왔습니다.
이제부터는 혹시 미처 제거하지 못한 암세포가 더 있을 수도 있으니까
항암제 치료를 받고 방사선 치료도 6 주 정도 받아야 합니다. "

 

나는 그 와중에 혜숙의 표정을 살핀다.
혜숙은 이미 각오하고 있었는지 표정이 없다.

 

자기 몸에 대한, 자신의 운명에 대한
과학적 판정, 심판을 그저 무덤덤히 듣고만 있다.

 

의심하거나 궁금하거나 다시 확인하고 싶은 표정도 아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거부하거나 부정하려는 표정도 아니다.
아무런 질문도 말도 없다.

 

주치의가 내민 차트를 읽고 있는 건지
그저 시선 둘데가 마땅치 않아 거기에다 두고 있는 건지
도무지 표정이 없다.

 

나는 이 말을 처음 듣는 순간
소름이 끼치고 온 몸에서 진땀이 배어 나왔다.

온 몸의 신경이 한꺼번에 머리로 치솟아 오르고
졸도할 듯 현기증이 일어 털썩 주저 앉았었다.

 

온 몸의 피가 손가락 끝으로 발가락 끝으로 술술 새 나가듯
안색이 하얗게 질려 버렸다.
온 몸을 제대로 가눌 수 없었다.

 

혜숙이 나에게 이 말을 들었을 때
신경질부리고, 발악하듯 화 내고
부정하고 거부했던 것처럼 반응하지 않는 모습에서
나는 오히려 숨이 멈춰 버릴듯 답답해 진다.

 

혹시나 혹시나 거부하고 싶은 몸부림에
가냘픈 지푸라기라도 붙잡고 매달리고 싶은 절박한 심경에
마치 총뿌리를 들이대고 확인 사살하듯
잔인하게 박살 내버리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에
나는 가슴이 찢어질듯 쓰라려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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