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 부 / 89. 가족 여행

 

지금까지의 그리 짧지 않은 이야기들은
내 아내 혜숙이 1987 년 4 월 암 수술을 받고
그 해 7 월 중순 경까지를 배경으로 한 것이다.

내 인생에 너무 충격적이고
그만큼 힘들었던 사건이었기 때문인가
3 개월 여 동안의 이야기로는
너무 길고 지루한 점 없지 않았다.

이제 호흡을 좀 빨리 해서
마무리 정리를 해야겠다.

1985 년 7 월 마지막 주간에
우리 가족은 다함께 동해안에서 휴가를 보냈다.

어머니와 두 아이까지 모두 함께 여행하기로는
실로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 때 혜숙은 내게 조용히 임신한 사실을 알리고 
꼭 건강하게 낳고 싶다고 했다. 

 

나는 뜻밖의 통보(?)에 약간 멈칫했지만
이내 고마운 마음에 손을 꼬~옥 잡고
격려의 뜻을 담아 어깨를 감싸안아 주었다.

 

이처럼 온 가족이 함께 단란하게 여행하는 것이 
혹시 처음이자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나는 아름다운 자연을 배경으로 
아내와 아이들, 어머니를 모델로 삼아 사진 찍기에 바빴다. 
 

무려 여덟 통을 찍었다. 
이 사진들은 지금도 우리집 앨범에 담겨 
암울했던 가운데서도 한때나마 즐거웠던 가족 분위기를 소중하게 밝혀 주고 있다.

 

오색약수터 근처에 숙소를 마련하고 

탐방로를 따라 선녀탕과 금강문을 지나 용소폭포에 닿았다.

 

▲ 1985년 7월, 막내 중현이를 임신하고 설악산 용소폭포 앞에서


용소폭포는 높이 약 10m, 소 깊이 약 7m로, 
이 소에서 살던 천년 묵은 암수 이무기 두 마리가 용이 되어 승천하려다가
숫놈만 승천하고 암놈은 미처 준비가 안 된 탓에
이곳에서 굳어져 바위와 폭포가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그 후 4 년 뒤
막내 중현이가 세 돌 되는 해 여름
우리 가족은 또다시 동해안과 설악산으로 여행을 떠났다.
이 때에 어머니는 힘이 드실 것 같다고 집에 계셨다.

초등학교 5 학년이던 딸 사옥이와 3 학년이던 아들 중수에게
체력 단련도 시킬 겸 해서 설악산 금강굴을 향해 올라갔다.

비선대에 이르러 우리는 주변의 경관에 취해서
잠시 쉬고 있었다.

거울처럼 해맑은 물 하며 물줄기에 곱게 다듬어진 웅장한 바위들은
깍아 세운듯한 산줄기를 배경으로 자연이 빗어 놓은 아름다움을 한껏 빛내주고 있다.

비선대에서 흘러 내리는 물은 이내 큰 바위를 굽이쳐 폭포로 변한다.
폭포 위로는 비선대 각자바위에서 연못으로 건너가는 사다리형 다리가 놓여 있었다.

 

▲ 설악산 비선대

 

▲ 비선대 각자바위 : 비선대 암반에 새겨진 각자로 세로로 내려 쓴 글씨가 선명하다.

 

세 아이와 우리 부부는 각자바위 아래 다리를 건너

위에 보이는 고인물에 발을 담그고 있었다. 
취한 듯 아름다운 경치를 배경으로 사진도 찍어 댔다. 

세살배기 막내 중현이도 신명이 났던지 
옷을 홀랑 벗어 버리고 물장구를 치며 놀았다. 

잠깐 절경을 둘러보는 사이에 
막내 중현이는 사다리형 다리가 신기했던지 
그 쪽으로 다가가 사다리 사이에 팔을 걸치고 폭포 위에 서 있었다. 

다시 위로 오르기가 어려웠던지 
중현이는 잡고 있던 사다리를 놓고 
밑으로 빠져 나오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듯했다. 

그 장면을 보는 순간 
나는 막내가 폭포 아래 낭떠러지로 
휩쓸려 떨어지리라 직감했다. 

중현이를 구해 낼 시간이 없었다. 
비명소리를 내지르는 것 외엔 방법도 없었다. 

나는 재빨리 몸을 움직여 
연못에서 뛰쳐 나왔다. 

 

 

하지만 중현이는 이미 
물살에 몸의 중심을 잃고 기우뚱거리더니 
거대한 폭포에 휩쓸려 낭떠러지 절벽으로 떠내려 갔다. 

이제 
중현이를 살릴 방법이 없다. 

나는 몸을 돌보고 자시고 할 겨를도 없이 
막바로 낭떠러지 절벽 폭포를 향해 몸을 내 던졌다. 

천만다행이게도 폭포에 미끄러져 내려 오는 중현이보다 
한 뼘 정도 먼저 떨어 질 수 있었다. 

나는 순간적으로 바위에 부딪칠 찰라에 있는 
중현의 머리를 팔등으로 막아 냈다. 

중현이의 머리와 몸이 
내 팔등에 세차게 부딪쳤다. 

그리고는 퉁겨져 나와 
폭포를 타고 웅덩이 물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나는 재빨리 물 속으로 따라 들어가 
가라 앉는 중현이의 몸을 찾았다. 

잠시 후... 
나는 중현이를 받쳐 들고 
물 위로 떠올랐다. 

주위에 있던 관광객들이 모두 경악하면서 
삽시에 폭포 주변으로 몰려 들었다. 

내가 중현이를 받쳐 들고 물 속에서 떠 오르자 
300 여 관광객들은 
"와 ㅡ !!!" 하는 함성과 함께 
힘차게 박수를 쳐 댔다. 

나는 새파랗게 질리고 놀란 중현이를 
가슴에 꼭 껴안고 
한동안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내쉬었다. 

관광객들은 팔과 팔을 이어서 
인간 밧줄을 만들어 중현이를 받아 올려 주었다. 

중현이가 무사하게 구출되는 순간 
다시 한번 박수와 함성이 터져 나왔다. 

중현이를 올려 보내고 
너무 긴장했던 탓에 호흡을 가다듬던 내가 
인간 밧줄을 잡고 마지막으로 기어 올랐을 때 
주위 분들 모두 비선대가 떠나갈 듯 함성을 지르며 
우렁찬 박수로 나를 맞이해 주었다. 

 

오랜 세월이 흘러도 설악산에 머물 기회가 있으면

나는 되도록 비선대를 찾아 옛 추억을 기린다. 

 

[영상] 비선대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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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 비선대 추억

 

혜숙은 그때 막내와 내가 
함께 죽는 줄로 알았단다. 

혜숙이 면전에서 
사옥이와 중수가 벌건 대낮에 
시퍼런 눈으로 지켜 보고 있는 가운데서 
막내와 아빠가 사고를 당해 죽는구나 했단다.

 

 

혜숙은 중현이를 품에 꼭 안고 있었다.
중현이는 이내 깊은 잠에 빠졌다.

 

그날 중현이 귀에서
혜숙은 큰 귀우지 덩어리를 빼내었다.


내 팔뚝에 차고 있던 시계는
중현이 머리에 받쳐 바위에 부딪치는 순간
박살이 난 채 떨어져 나가 버렸다.

 

모여 있던 관광객들이 우리 가족에게 다가 와서
내게 악수를 청하고 중현이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모두들 천만다행이라고 위로한다.
참으로 고맙다고 인사한다.

내가 먼저 격려와 도움을 주어서
감사하다는 인사를 일일이 올려야 했는데
모두들 오히려 먼저 내게 고맙다고 한다.

 

        ▲ 비선대 폭포에 떨어진 후 구출된 막내 중현이


이제 모여 있던 관광객들이 하나 둘 떠나면서
나도 점점 안정을 되찾아 갔다.

나는 사옥이와 중수에게
계획했던 대로 금강굴에 올라 갔다 오겠느냐고 물었다.

아이들도 너무 놀란 가슴에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나는 아내와 막내를 쉬게 하고
사옥이와 중수의 손목을 잡고 금강굴로 향했다.

힘들다는 투정없이
땀을 흘리며 산에 오르는 아이들 모습을 지켜 보면서
나는 가슴이 뿌듯해 왔다.

 

        ▲ 금강굴에서 중수와 사옥

이날 이후로
우리 아이들은 아빠에 대해서
무한한 신뢰와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고 했다.

아이들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졌을 때
아빠는 자기들을 포기하지 않고
꼭 구해 주실 꺼라는 믿음을 갖게 되었다고 했다.

우리 가정에서는 이 일을 가끔씩 되돌아 보면서
화제를 삼아 왔다.

 

 

나와 혜숙은 막내가 너무 어릴 때라서
이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줄 알았다.

몇 년이 흐른 뒤
막내 생일에 엄마가 이 이야기를 들려 주니까
그때서야 막내가 고백하더란다.

"엄마, 나 여태까지 엄마한테 비밀로 한 거 있는데...
말 해도 돼?"

"응, 그래그래... 뭔대? 우리 막내가 무슨 비밀이 있을까?
궁금한데?... 엄마한테 얘기해 봐. 무슨 비밀인지..."

"그때 아빠가 구해 준 거 나 기억하고 있어.
내가 잘못해서 그런게 아니라...
물미끄럼 타고 싶어서 일부러 그렁건데 아빠가 살려 준 거야...
지금까지 혼날까봐 말 안 하고 비밀로 하고 있었는데..."

"하하하... 아이구 우리 늦둥이!"

우리집 애들에게는 이 일이
두고두고 재미있게 구전되는 이야깃거리다.

이때부터 아이들이
아빠를 보는 눈빛과 마음가짐이 달라진 것을 느낀다.

아이들이 아빠에 대해서
자부심을 가지고 든든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 낙산해수욕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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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 YS 후보 진영에서

 

 

여름 내내 나눔기획은 거의 매일 야근 작업을 했다.
2 ~ 3 일에 한 번씩은 철야 작업을 해야 했다.

가을에 들어서자 일은 더욱 많아지고 바빠졌다.
16 년 만에 실시되는 제 13 대 대통령 선거가 12 월로 다가오면서
인쇄 시장은 역사상 가장 큰 호황을 누리고 있었다.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 등 네 후보가 각축을 벌이는 동안
재야 민주화 운동 단체와 동료들은 운동의 전략 전술적 방향을 놓고
의견이 서로 엇갈렸다.

이번에는 김대중 씨가 한발 양보하고 김영삼 씨를 후보로 단일화해서
우선 정권 교체를 이루어 내야 한다는 소위 '후보 단일화(후단)' 입장과

김영삼 씨 보다는 상대적으로 더 개혁적인 김대중 씨에게
비판할 것은 비판하고 적극적으로 지지해서 대통령으로 세워야 한다는

'비판적 지지' 입장으로 나뉜 것이다.

민통련과 민청련 간부들, 연세대 후배들은 특히 나에게 논쟁에 참여해서
이끌고 정리해 주기를 바랬지만, 나는 가정의 형편과 사정을 들어 극구 사양했다.

앞으로 최소한 5 년 동안 혜숙이 암에서 완전히 해방될 때까지
나는 오로지 혜숙의 건강 회복을 위해서 살겠다고 선언했다.
그 후에 다시 복귀하겠노라고 했다.

84 년 말과 85 년 초 민청련을 대표해서 나는 김영삼 씨로부터 연락을 받고
두 번을 배석자 없이 긴밀하게 만난 적이 있다. 소위 독대를 했다.
그때 비서실장이던 김덕룡(전 국회의원) 씨가 나를 맞이해서 안내를 했다.

당시 김영삼 씨의 이야기인즉슨 85 년 12 대 국회의원 선거에 대한
민청련의 전술 방침이 총선 거부 투쟁으로 정해진다는 데 대해
깊은 우려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보다는 미국에 망명 중인 김대중 씨와 김영삼 씨를 배경으로
이민우 씨를 총재로 내세워서 창당하는 신민당에
나를 비롯한 청년 세력들이 후보자로도 적극 나서고 참여해서
전두환 정권에 결정적인 타격을 주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말씀이다.

나는 민청련의 전술 방침에 대해서
전면적 총선 거부 투쟁을 주장하는 의견이 있지만
논쟁의 초점을 총선 참여냐 거부냐에 두는 것이 아니라

장기적으로 볼 때 어떻게 하면 군사 독재 정권을 종식시키고
대통령 직선제 헌법을 쟁취해 내느냐 하는데 두고 있다고 설명했다.

청년 세력이 후보자로 참여하는 문제에 대해서 나는

앞으로 반 군부독재 민주화 투쟁을 더욱더 대중적으로 확산시키고 강화해 나가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운동을 지도하고 이끌어 나가야 할 세력 또한
역량을 보다 더 축적하고 강화해야만 한다고 했다.

그러니만큼 민청련의 주요 간부는
다가오는 국회의원 총선에 후보자로 나설 수 없다고 했다.

다만 신민당에서 개혁성과 선명성, 도덕성을 갖춘 인사들을 후보자로 내세우면
선별적으로 지지하고 지원할 수 있다고 했다.

그로부터 2 년 여가 흐른 싯점에
다시금 김영삼 후보 진영에서 만나자는 전갈이 왔다.

나는 정치적 입장을 선택해야 하는 문제라면
가정의 형편과 사정을 들어 정중하게 사양하기로 작정했다.
한편으로 선거 홍보 인쇄물이나 주문 받았으면 하고 기대했다.

어머니 칠순 잔치에도 김영삼 씨는 이성헌(전 국회의원) 비서를 통해서
화환과 축의금을 보내 준 바 있다.

이성헌 비서는 연세대 후배로 총학생회장 제도가 부활되기 직전
마지막 학도호국단장을 맡았었다.

그는 학생회를 이끌던 주요 간부들과 함께 장래의 진로에 관해서

나의 지도와 안내를 부탁했었고 나는 그 당시 YS 진영에 합류하는 것이 좋겠다고 권면했었다.

그런저런 인연에선지 김영삼 후보 진영에서는 내가 감옥에서 출소하자마자

암에 걸린 아내를 곁에서 병 간호도 못 하고 인쇄소를 차렸다는데
기왕이면 일감을 맡겨 주자며 선전 포스터와 전단지 등을 주문했다.

그 당시에는 홍보 유인물에 대한 규제 조항이 없었던지
후보자의 포스터를 거리 곳곳마다 담벽마다 수십 장씩 연달아 붙이는 것이 유행이다시피 했다.


▲ 1987년 대선 당시 선전벽보

주문을 받고 보니 엄청나게 큰 일거리였다.

매출액이 1 억 원 정도 되는 물량이었다.

이제 나눔기획 자체 시설과 인력으로는
어림도 없는 사정이 벌어졌다.

거래처를 통해서 대형 트럭으로 몇 대씩 되는
고급 용지를 수송해 와야 했다.

기존 단가보다 더 얹어 주고
대형 인쇄기를 잡아 며칠 씩 밤낮으로 작업해야 했다.

납기일을 맞추느라 제본소에 지켜서서
며칠이고 밤을 꼬박 지새워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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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 DJ 진영과 재야 단체에서

 

 

대통령 선거가 중반으로 접어 들자
김대중 후보 진영에서도 주문 물량이 쏟아져 들어 왔다.

구속과 망명과 가택 연금으로 대부분의 세월을 보낸 탓인지
김대중 후보는 조직과 재정이 김영삼 후보에 비해 턱없이 부족했던 것 같다.

종교 시민 사회 단체의 연합체인 민통련에서는
선거 운동 방침을 김대중 후보에 대한 비판적 지지 입장으로 정했다.

그리고 '김대중 선생 단일 후보 추진위원회'를 구성해서
지지, 지원 활동을 벌여 나갔다.

87 년 6 월 민주시민 항쟁을 이끌었던
민주쟁취국민운동본부에서는 공정선거감시운동본부를 구성하고
전국적으로 부정 행위를 감시 고발하는 활동을 펴 나갔다.

나와 가까이 민주화 운동을 함께 해 온 이들은
대부분 '김대중 선생 단일 후보 추진위원회'에 참여했다.
일부는 김대중 후보 선거대책본부에 직접 참여하기도 했다.

이 두 조직에서는 재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전국적으로 모금 운동을 전개했다.

곁에서 전해 들은 이야기로
모금 운동은 그야말로 쇄도할만큼 큰 성과를 올렸다고 한다.

이 두 조직에서도 나에게 많은 일거리를 맡겼다.
서로가 어려운 사정을 익히 알고 있던 관계로
나는 비용을 절감하는 방안을 마련해서 차질이 없도록 홍보물을 만들어 납품했다.

민통련과 국민운동본부에 속한 부문과 지역 활동 단체들에서도
아연 활기를 띠며 활발하게 움직였다.

모든 단체마다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이 선거 홍보물이었던만큼
나는 그야말로 눈코 뜰새없이 거래처와 인쇄 골목을 누비고 뛰어 다녀야 했다.

대통령 선거가 끝나고 12 월 말이 다가오는 즈음에
나는 혜숙이 부탁한 빚을 모두 청산했다.

혜숙에게는 정작
'1 년은 꼭 살아 있어야 돼! 당신 가슴에 한을 남길지도모를
빚을 그 안에 꼭 갚고야 말테니까...'
하고 말했지만, 내 마음 속 깊이 다짐했던대로 올 해 안에,
연말을 넘기지 않고 모두 갚게 된 것이다.

6 월 말에 시작해서 12 월까지
6 개월 만의 일이다.

1987 년 12 월 31 일 자정에
나는 혜숙과 함께 교회에 나갔다.

송구영신 예배를 드리는 가운데 지나간 1 년 동안의 감회를 말하고
다가오는 새해에 바라는 소원을 종이에 써서 촛불에 태우는 순서가 있었다.

나는 파란만장했던 한 해를 되돌아 보자니
솟구쳐 오르는 눈물을 견딜 수 없어 한참을 울먹였다.

"여보! 나 해 냈어...
당신 가슴에 그토록 맺혀 있던 빚을 다 갚았어...
이제 당신이 해 낼 차례야...
당신이 내 부탁 들어 주어야 할 차례라구...
당신 살아야 해! 당신 살아 있기만 하면 된다구!!!..."

나는 눈을 감고 하나님께 기도했다.

"... 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신 나의 아내, 우리 혜숙이와
제발 헤어지는 일 없이 오래오래 함께 살게 해 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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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 분에 겨운 호사

 

 

혜숙의 건강은 나날이 좋아졌다.
새해 들어서는 몸무게가 48 kg 까지 올라 갔다.

혜숙은 배가 고파 했다.
아무리 먹어도 배부른 줄 모르겠다고 했다.

나는 승용차를 구입하고
주말마다 혜숙과 드라이브를 즐겼다.

입에 맞는 음식을 찾아 다녔다.
이제까지 살면서 해보지 못한 분에 겨운 호사였다.

혜숙도 건강에 자신이 있다며 운전 학원에 다녔다.
나는 혜숙과 보다 많은 추억을 남기기로 작정이나 한 듯
주말마다 전 국토를 누비다시피 했다.

온천을 찾아서, 음식점을 찾아서...
환상적인 드라이브 길을 찾아서...
동해로 남해로 서해로
산과 계곡과 바다로 여행을 다녔다.

혜숙은 그래도 성이 차지 않던지
집을 팔고 아파트로 이사를 가던지
헐고 다시 짓던지 하자고 졸랐다.

그때까지 우리는 한옥집에서 살았다.
판자집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산동네 중턱에
주변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을만큼
마당도 넓고 솟을대문이 육중해 보이는 가옥이다.

동네 아이들이 솟을대문 계단 앞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놀이터를 삼고
상감마마 집이니 절간집이니 하고 불러대던 집이다.

하기사 겨울이면 웃풍이 세고 추워서 어머니께서도
부엌살림과 연탄 가는 일 등등으로 힘들어 하셨다.

혜숙은 다세대 주택으로 지어
좀 편안하게 살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이리저리 알아 보기까지 했는지
집터만 있으면 건축업자가 알아서 지어 준다고 했다.

전세를 내 주면 우리는 돈을 안 들이고도
한 층을 그냥 차지할 수 있다고 했다.

나는 몸도 성치 않은 혜숙이 간곡하게 바라기도 하고
살림을 맡아 하시는 어머니도 좀 편하실 것이라는 말에
집을 새로 짓기로 작정했다.

집안에 병고가 있거나 우환이 들면
집을 헐고 짓는 게 아니라는 풍습에
마음 한 편으로 찜찜한 구석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혜숙이 간절하게 바라고
어머니께서 편하시면 되겠지 하는 생각이 앞서
건축업자를 선정하러 다녔다.

집을 짓는 동안 임시로 살 집을 마련해서
동네 이웃으로 이사했다.

반 지하실에 단칸방 두 개가 딸린 집이었다.
불편하기 이를데 없었지만 한 3 ~ 4 개월 기다리면 되겠거니 하는 생각으로
온 식구가 견디기로 했다.

조승혁 목사님으로부터 안마에 능통하다는 분을 소개받았다.
주로 돈많은 재벌급이나 고위층을 상대하는 분인데
목사님의 각별한 부탁으로 시간을 낸다고 했다.

혜숙은 매일매일 두 시간 씩
그 분에게 안마를 받았다.

처음에 몇 번은 나와 어머니도 번갈아서 같이 받아 보았지만
나는 너무 아프기도 하고 시간 내기도 만만치 않아 그만 두었다.

하지만 혜숙은 좋아했다.
혈관과 경락을 지압으로 꼭꼭 집고 뼈마디마디와 내장 부위까지 맛사지하고나면
온몸이 그렇게 개운하고 시원할 수 없다고 했다.

 

 

 

94. 문익환 목사님의 방문

 

 

1988 년 8 월 하순 경 어느날 아침 시간에
문익환 목사님께서 전화를 주셨다.


문 목사님은 1986년 5월 20일 서울대학교 5월제에서 연설하던 중
이동수 학생의 분신 투신으로 구속되었다가

1987년 7월 8일 형집행 정지로 출옥하신지 한 달 남짓되었다.


어쩐 일이시냐고 여쭈니까
세민약국에 들러 우리집 위치를 알아 보고
집 근처에 와 계신데 집을 못 찾겠다는 거다.

문익환 목사님은 1975 년 나와 혜숙이 학생 운동을 할 적부터
각별한 인연으로 허물없을만큼 가까이 모시고 지내 왔다.


내가 감옥에 있을 적에도 약속 시간에 간격이 생길 때

두 어 차례 세민약국에 들러서 허물없이 쉬다 가곤 하셨단다.

특별히 내가 월간 <씨알의 소리> 편집 일을 맡고 있을 적에는
문 목사님이 사모님을 통해 옥중에서 보내 주신 통일을 염원하는 시
"꿈을 비는 마음"을 우여곡절 끝에 곧바로 <씨알의 소리> 에 실릴 수 있어

목사님께서 명실공히 시인의 반열에 자리매김 하게 됨은 물론
이 후 목사님을 대표하고 상징하는 시로 남아 있게 되었다.

1985년 8월 함석헌 선생님께서 퀘이커 세계협회 종교대회 참석 차

멕시코와 미국, 카나다를 방문하시던 중에 함 선생님과 친분이 아주 두터운 목사님 한 분이

북한을 방문하고 함 선생님의 친종손을 만났다.


그리고는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친손자가

할아버지를 애타게 그리워하는 사연이 적힌 편지와 가족 사진을 함 선생님께 전달한 적이 있다.

함 선생님으로서는 근 45 년 여 만에
가족의 생사여부와 근황을 접하게 된 일이었다.

서슬이 퍼렇던 시절 그 목사님은 함 선생님 같은 분이 당당하고도 공개적으로 북한을 방문하고
다시 떳떳하게 한국으로 돌아 와야 비로소 총칼로 가로막힌 남북한 사이의 담을 헐어서
화해하게 하고 통일을 이루어 낼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함께 북한을 방문하자고 막무가내로 권면했단다.

강권을 뿌리치고 그 해 연말 미국에서 돌아 온 함 선생님은
비밀하게 나를 불러 친손자의 편지와 북한에 있는 가족 사진을 보여 주시고

눈물을 글썽이시며 저간의 일들을 내게 말씀해 주셨다.

얼마 후 내게 비밀히 이런 사연을 전해 들은 문 목사님은 무릎을 탁 치시면서

함 선생님을 영원히 살리고 남북통일을 이룰 수 있는 방법은 이 길밖에 없다시면서
어린아이처럼 천진스럽게 흥분해 마지 않으셨다.

그 후 문 목사님과 나는 함 선생님의 당당하고도 공개적인 방북에 대해
비밀스럽게 의견을 나누어 왔다.

하지만 이 일은 성사를 이루지 못한 채
함 선생님은 병고를 겪고 1989년 2월 4일 끝내 운명하셨다.


▲ 함석헌 선생님 (1901년 3월 13일, 평안북도 용천 ~ 1989년 2월 4일)

함 선생님이 운명하시던 날 문 목사님은 나를 붙들고
이제 우리 민족의 큰 어른이시자 스승이 통일된 세상을 보지 못하고 운명하셨으니
누가 그런 소임 그런 역할을 감당할 수 있겠느냐면서 하염없이 울먹이셨다.

나는 오히려 문 목사님을 위로하면서
이제 그런 역할을 감싸 안고 감당하셔야 할 분은 문 목사님밖에 없다고 하소연했다.


그러고 나서... 한 달 보름만인 1989년 3월 25일

문익환 목사님은 통일의 길을 열기 위해서 북한을 방문하고
김일성 주석과 두차례 회담하여 통일 3단계 방안에 원칙적으로 합의하고
국가보안법으로 구속하겠다는 위협에도 불구하고 귀국하셨다.


▲ 방북 중 문익환 목사님과 김일성 주석


결국 문 목사님은 정부와 사전 협의 없이 독자적으로 방북했고
평양 도착성명에서 ‘존경하는 김일성 주석’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한편
한국정부를 일방적으로 비방했다는 등의 이유로
국가보안법상의 ‘반국가단체잠입죄’로 투옥되셨고
1990년 10월 20일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었다.


하지만 이후 공안정국을 조성한 정부에 의해
1991년 6월 6일 재수감되고 이후 1993년 초 석방되신다.


다시 말머리로 돌아가

1986년 5월 20일 문익환 목사님은 서울대학교 5월제에서 연설하던 중
이동수 학생의 분신 투신으로 구속되었다가 1987년 7월 8일 형집행 정지로 출옥하셨다.

석방되시는 날 나는 당연히 교도소로 마중을 나갔어야 마땅한 일이거늘
석방 후 여러 날이 지나도록 먼저 찾아 뵙지를 못하고 뜻밖에도 목사님께서 오히려 먼저

안부를 여쭈면서 우리집 근처에 오셔서 서성이고 계시다니 몸둘바없고 말이 아닌 꼴이 되었다.

목사님 계신 곳으로 달려 나가 보니
한창 건축 중인 우리집 근처에서 서성이고 계셨다.

집을 헐어서 다시 짓는 중이라고 설명드리고
임시로 거처하는 집으로 모시고 왔다.

박혜숙이 너무 걱정이 되어서 지나다가
이렇게 불쑥 찾아 오게 되었다고 하신다.

나는 혜숙의 몸 상태와 그간의 과정을 말씀드렸다.
문 목사님 주재로 예배를 드렸다.

이런저런 말씀을 나누다보니
문 목사님은 우리 어머니와 동갑내기시다.

두 분이 고향 얘기며 집안 얘기를 나누신다.
문 목사님은 북간도 용정이 고향인데
사모님이신 박용길 장로님이 함경도이시다.

어머니 고향이 함경도 함흥이시고 어린 시절을 블라디보스톡에서 보내셨다.
함경도에서는 가장 역사가 깊고 제일 큰 초대 교회 목사님 가정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독실한 신앙을 가진 외할아버님은 명예롭고 편안한 직임을 마다하시고 선교사를 자청해
우리 나라 목회자로는 처음으로 소련 땅 불라디보스토크에서 선교 활동을 하셨다.

어머니가 한 때 성장했던 불라디보스토크는 우리 나라의 많은 항일 운동가들이
일제의 탄압을 피해서 활동했던 곳이다.

거기에서 어머니는 유치원과 초등학교를 다니셨다.
큰오라버니는 고등보통학교에 다닐 적부터 독립 운동에 심취해서 활동하셨다.

그 후 어머니는 함흥으로 돌아와 함경도에서 제일 역사가 깊고
외할아버님이 담임하시던 함흥 중앙교회 소속 함흥 영생여자고등보통학교를 다니셨다.
그리고 함남도립간호전문학교를 나오셨다.

졸업 후 원산도립병원에서 간호사로 근무하시던 어머니는
1940 년 결혼하면서 아버님 근무지를 따라 북간도로 가셨고
그곳에서 3 년 여 사시다가 1943 년 서울로 나오셨다.

문익환 목사님의 선친께서도 목사님이시다.
선친이신 문재린 목사님은 북간도와 미국에서 목회 활동을 하셨다.

제씨 되는 문동환 박사도 목사님이시다.
문동환 박사님은 일찌기 내가 대학에 다닐 적부터 우리를 지도해 주셨다.

문 목사님과 나의 어머니는 그 때 그 시절 이야기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나누신다.
내가 잘 모르는 그 당시 상황과 사건들을 구체적으로 상세히 되짚기도 하신다.

그러더니 서로 생일을 물으신다.
어머니는 1918 년 5 월 1 일 생이시다.
문 목사님은 한 달 늦은 6 월 생이시다.

동갑내기란게 그리도 반갑고 할 얘기가 많으신건지...
하긴 파란만장했던 민족사의 지나온 발자취를

동시대를 살아 왔던 분들이 만나서 되돌아 볼 때
한도 없고 끝도 없겠지 싶기도 하다.

문 목사님은 정말로 오랜만에
낯선 동갑내기 여인을 만나는 느낌이
이제까지 생사도 모르고 소식도 알 수 없던
그 옛날 옛적 소꿉 동무를 만난 기분이라고 했다.

어머니도 그러셨을까......
문 목사님이 자리를 일어 서시자
어머니는 나와 함께 문밖 골목 저편까지 나가
목사님을 배웅하고 차제에 공사 중인 집을
한바퀴 둘러 보신다.

 

 

 

95. 시련은 떠나지 않고

 

 

혜숙이 안마를 시작한 지 한 달 남짓 될 무렵이다.
갑자기 숨이 차 오른다고 했다.

숨을 못 쉬겠다며 입으로 허연 거품을 품어 냈다.
혜숙은 결혼하기 전에도 몸이 찬 편이었다.
가끔가다 손발이 저린다고도 했다.

혜숙은 처음에 오른쪽 눈꺼풀이 자꾸 내려 앉아
눈이 잘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서울에서 유명하다는 안과 병원을 찾아 다녔다.

종로 1 가 공안과에서는 우선 약을 복용하고
반응을 좀 지켜 보자고 했다.

영등포 김안과 병원으로 갔다.
역시 마찬가지로 좀 지켜 보자고 한다.

그러는 동안 혜숙은 안면이 저려 온다고 했다.
입술이 뻗뻗하게 마비된다고 한다.

말할 때마다 침을 흘리면서 소리가 새어 나왔다.
마비 증세가 점점 목으로 안면으로 진행되었다.
그러다가 급기야는 호흡 곤란까지 오게 되었다.

응급차에 싣고 한양대 병원으로 달려 갔다.
병원에서는 어떻게 이 지경이 되도록 있었느냐면서
당장 중환자실에 입원해야 된다고 했다.

나는 암이 퍼져서 그런게 아닌가 온몸에 소름이 끼치면서
제발 그것 만은 아니기를 바라고 기도했다.

진찰 결과 중증근무력증이라고 한다.
근무력증은 세포와 세포를 이어 주는 신경이
마비되어 나타나는 병이란다.

처음에는 대개 눈꺼풀이 내려 앉으면서
앞이 잘 안 보이기 때문에
환자들이 안과를 먼저 찾는다고 한다.

의식은 있어도 숨 쉴 수 있는 기력이 없을만큼
온몸이 마비되기도 한단다.

심한 경우 호흡 마비에까지 이르르면
순식간에 사망으로 이어 질 수도 있는 무서운 병이란다.
혜숙이 바로 그런 상태에까지 와 있단다.

혜숙은 산소호흡기가 갖추어져 있는
중환자실에 입원해 있어야 했다.

근무력증으로 인해 가슴 부위가 마비되어
자기 힘으로는 숨을 쉴 수가 없었던 것이다.

혜숙을 중환자실로 옮기는 데
장정 3 명이 달라 붙어도 들어 옮기기 힘들어 했다.
온몸이 마치 시체처럼 쫙 뻗고 굳어버린 탓이다.

숨을 쉬지 못하면 사람은 곧 죽고 만다.
그럴 때 사람들은 가슴이 터질 것 같다고 말하는데
혜숙이 바로 그런 상태였던 것이다.

혜숙은 잠을 자다가도 마비가 오면
가슴과 심장이 터질 것 같다고 했다.

그럴 때면 중환자실에서도 응급 간호사가 달려들어
기도 확장 주사를 놓아야 겨우 숨을 쉴 수 있었다.

그 시간이 1 ~ 2 분 정도에 지나지 않았지만
혜숙은 그 사이를 견딜 수 없어
병실 건물에서 뛰어 내려 죽고 싶다고 했다.

한 번은 실제로 창문에 매달리고 흔들어 대면서
뛰어 내리려 발버둥을 쳐댔다.

기도 확장 주사를 맞으면 사람이 죽기 전에
오공에서 냄새 고약한 분비물이 새나오듯
그렇게 소변이며 분비물이 자꾸 나온단다.

산소호흡기에 의존해서 숨을 쉬고부터
혜숙은 안정을 되찾은 듯 했지만
침대 시트에 오줌을 싼 것도 의식하지 못했다.

환자의 마지막 모습
마지막 순간처럼......

하지만 의사들은 의학 기구가 현대화되고 발달해서
중환자실에 입원해 있는 한
중증근무력증으로는 쉽게 죽지 않는다고 했다.

호흡마비가 오더라도 산소호흡기를 사용하면
심장 괴사를 막을 수 있다는 거다.
그리 절망적으로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나는 의사의 말에 큰 위안을 받고
조금은 안심이 되었다.

 

 

 

96. 다시 죽음의 문턱에서

 

 

하지만 혜숙은 숨 쉴 기력을 거의 잃어 가고 있었다.
의사들은 아예 마취를 시키고 산소호흡기를 댔다.
다른 환자들보다 더 심하고 특이한 경우였단다.

침도 삼킬 기력이 없어 옆으로 질질 흘리고
의식은 있어도 말로 표현할 기력을 잃고 있었다.

혜숙은 살아 있는 고통이 얼마나 극에 달했던지
차라리 죽고 싶어 했다. 이 때 혜숙은

" 하나님 아버지! 어찌하여 저에게 이처럼
견딜 수 없는 고통을 주시나이까...
저는 더 이상 도저히 견딜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정말로 저를 조금이라고 위하고 아끼신다면
제가 잠들어 있을 때 영원히 이 눈을 뜨지 말고
잠들 수 있도록 도와 주옵소서.
제발 평안한 마음으로 주님 곁에 갈 수 있도록
저를 인도해 주옵소서"

하는 기도를 수없이 드렸다고 했다.
내일이면 이 중환자실에 있는 기계들을
이 광경들을 보지 않게 해 달라고
하루 빨리 하나님의 품에 안기게 해 달라고 애원했단다.

한 번은 혜숙의 맥박이
1 분에 30 ~ 40 회로 계속 내려 가 있었다.

의사들이 질겁을 하고 몰려 와
초긴장 상태로 바쁘게 움직였다.

그 후 한동안 의사들은 교대로
혜숙의 옆에서 항상 대기하고 있었다.

혜숙의 친척들 나의 친척들 그리고 선후배 동료들이
마지막 얼굴이라도 보겠다고 또다시 모여 들었다.

동네에서는 살던 집을 부수고 건축 공사를 하더니
혜숙이 곧 죽게 되었다고 소문이 났다.

이때 혜숙은 죽음의 문턱까지 다녀 왔다고 했다.
하나님께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고
애원하면서 매달려 기도하는 중에
예수님의 형상이 나타나더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형상이 "이제 나랑 같이 가자" 하시며
앞서서 걸어가시는데 혜숙은 아무런 주저없이
"예 따라 가겠습니다" 하고는
그 뒤를 쫓아 갔다는 것이다.

그 길이 아마도 천당가는 길 아닌가 싶었는데
양쪽으로 금보라빛 나무가 늘어서 있었단다.

아름답고 찬란한 그 길을 끝까지 따라 가는데
마지막에 돌계단과 문이 나오더란다.

그 문으로 들어 서면
천국으로 들어가는 거겠구나 싶더란다.

그 순간에 갑자기 아이들 생각이 떠오르더란다.
그래서 "주님!" 하고 소리쳐 부르고는
"저 조금 더 있다가 들어가면 안 될까요?
애들 때문에 지금 집에 좀 가 봐야 하는데
갔다가 다음에 올께요..." 하고는
뒤돌아서 돌아 왔단다.

그때 예수님은 "이 여인을 어찌해야 하나"
하고 고뇌하는 표정으로 혜숙을 바라보고 있었단다.

그 인간적 예수의 모습이 가물가물 사라지면서
다시금 깨어 났다고 한다.

주치의는 산소호흡기를 장기간 사용하면
폐에 합병증이 발생할 염려가 있다고 걱정했다.

그러니만큼 기관지 확장 수술을 하는 것이
좋겠는데 어떻게 하겠느냐고 나의 의견을 물었다.

나는 아내가 너무 고통스러워 못 견뎌하니
기관지 확장 수술이든 뭐든 빨리 손을 써 달라고 졸라댔다.

수술은 30 분 만에 간단히 끝났다.
나는 혜숙에게 이제는 괜찮아질 꺼라고
잘 참고 견뎌달라고 간청했다.

그리고는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고 매달렸다.
아내의 고통은 내게 더 할 수 없는 고문이었다.

 

 

 

97. 얼굴 보는 게 마지막일지도...

 

 

중증 근무력증은
쉽게 고쳐 질 수 있는 병이 아니었다.

위암처럼 수술을 통해서 암세포를 떼어 내거나 제거하고
항암제나 방사선으로 치료하듯 정확한 치료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정신 질환 치료처럼 효험이 있겠다 싶으면 일단 한 방법을 써 보고
그것이 혜숙에게 효과가 없으면 또 다른 방법을 써 보고 하면서
시체처럼 말을 듣지 않는 근육들이 혜숙의 의지대로 움직이도록 방법을 찾아 갔다.

처음에는 치료 방법 중에 하나로 부신피질 호르몬제를 강력하게 써 보았다.
그런데 효과가 전혀 없었다.
그러자 피를 깨끗하게 걸러 내는 혈액투석법을 써 보았다.

혈액투석이란 양질의 피를 공급하고 한쪽 팔에서 피를 빼 내어
혈액투석기로 걸러 낸 다음 다른 팔 쪽으로 보내는 방법이다.

혜숙은 암 수술과 항암제 주사 그리고 방사선 치료를 받느라고
혈액 농도가 아주 나빠져 있었다.

피가 너무 탁하니까 깨끗한 피로 만들기 위해서
혈액 투석기로 혈청 성분을 걸러 내는 것이다.

피갈이를 하는 동안 혜숙의 몸은 고무 호스줄로 칭칭 연결되어
온통 감겨 있다시피 했다.

피갈이를 5 ~ 6 회 계속하자 산송장처럼 처져 있던 혜숙의 눈꺼풀에 힘이 생겼다.
눈을 뜨고 앞을 볼 수 있게 되었다.

결국 이 혈액투석법으로 신체 기능이 좋아져서
다른 치료와 수술을 할 수 있는 상태가 되었다.

주치의의 권유로 혜숙은
흉선을 제거하는 대수술을 받게 되었다.

어떤 임상 실험 결과 흉선을 제거하니까 근무력증 증세가 좋아 질 수 있었다고 하면서
혜숙이도 아마 흉선이 비대해져 있을 가능성이 높으니 아예 제거해 버리자는 것이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매달리는 심정으로 우리는 수술에 기꺼이 동의했다.
수술에 들어 가기 직전에 간호사로 있는 처제가 내게 울먹이며 말한다.

"형부! 살아 있는 언니 얼굴 보는 게 여기서 마지막일지도 몰라요..."

나는 가슴이 떨리고 소름이 끼쳐 왔다.
혹시라도 암세포가 흉선에 전이되어 부풀어 오른 것이라면 더 이상 방법이 없다는 것이고
그 결과는 일단 수술을 해서 가슴을 열어 봐야 알 수 있다는 거다.

하지만 내게 수술 과정을 설명하는 의사는 의미심장하거나 심각한 표정이 아니었다.
어쩌면 자신만만하고 여유 있어 보이기까지 했다.

약간 안도가 되면서도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나는 의사에게 암세포가 전이된 상태는 아닌지 물었다.

주치의는 그럴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지만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닐 수도 있다고 한다.

뒤집어서 말하면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는 말이지만

나는 또다시 지옥에서 천당으로 오르는 끈을 쥐어 잡고
놓치지 않으려 발버둥 쳐대는 심정이었다.

" 그래. 걱정하지 않아도 될 꺼야...
주치의가 그리 걱정하지 말랬잖아...
혜숙이 다시 입원하게 된 것도 어쩌면 다행스런 일인지도 몰라...
이제 혜숙이 몸 속에 혼탁하고 오염된 피도 새로 갈고 깨끗해 졌잖아...
정말로 다행한 일이야...
이제 수술만 받으면 곧 나을 꺼야...
이제는 깨끗이 나을 수 있을 꺼야..."

나는 안도의 숨을 쉬었다.
천당으로 오르는 끈을 놓칠새라 꼭 잡고
희망의 세상을 맞이할 생각으로
오히려 가슴이 부풀어 오를 정도였다.

하지만 마음 한 구석으로는 혹시 거부하고 싶고 부정하고 싶은
환자와 보호자의 심리는 아닐까 불안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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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 흉선 제거 수술

 

 

그런저런 불안 때문이었던가
나는 혜숙이 수술실로 들어 가는 순간을 놓쳐 버리고 배웅하지 못했다.

시간을 맞추려고 노력했는데
사무실 일로 분주하게 허둥지둥 거리다가 그만 한발 늦게 도착한 것이다.

혜숙은 수술실 문이 닫힐 때까지 기다리다가
정작 내가 보이지 않으니 무척 섭섭했던 모양이다.

두고두고 그 때 일을 기억하고
가끔씩 이야기하면서 나를 원망한다.

암 수술을 받을 때는 내가 감옥에 있어서
두렵고 외로워도 혼자 감당할 수밖에 없었지만
두 번째 대수술 때는 정말로 야속해서 눈물을 흘렸단다.

한발 늦게 도착한 나는 수술실 밖에서 가슴 졸이며 기다렸다.
그제서야 심각하다는 생각에 다시금 두려움이 밀려 들었다.

흉선이란 부갑상선의 일종으로 호르몬을 분비하는 기관이란다.
흉선은 앞가슴 갈비뼈 안쪽에 크고 긴 목걸이형으로 둥그렇게 자리잡고 있단다.

흉선을 제거하려면 앞가슴 갈비뼈 한 가운데를
톱으로 모두 절단해서 쩌억 벌려 놓고
그 안에 붙어 있는 허연 부위를 잘라 내야 한단다.

수술이 끝난 다음에는 반으로 갈라진 갈비뼈를
다시 제자리로 오무려 닫고 절단된 부위를
접착제로 다시 이어 붙여야 한다는 거다.

의사의 설명을 들으면서 나는 그야말로 전신에 소름이 끼쳐 왔다.
가냘프고 연약한 여자의 몸으로 그런 지경을 어찌 감당해 낼 수 있을까...

나는 약국 건너편에 있는 정육점에

소와 돼지가 큼직한 가슴 속 갈비뼈를 드러 낸 채
굵은 쇠갈구리에 매달려서 걸려 있는 모습이
갑자기 머리에 떠 오르면서 다시금 몸서리를 쳤다.

수술실에서 나온 혜숙은 광목줄로 온몸이 꽁꽁 묶여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조금이라도 움직이거나 꿈틀거리지 않도록
온몸을 침대에 꽁꽁 묶어 고정시켜 놓았다.

몸이 흔들리면 절단했다가 다시 붙여 놓은 갈비뼈가
제대로 아물지 않거나 겹질릴 염려가 있어서란다.

또한 기도와 방광, 양쪽 갈비뼈 밑으로 분비물을 배출해 내는 생고무줄 호스가
무려 8 개나 주렁주렁 달려서 몸을 칭칭 감고 있었다.

나는 마치 강시 같기도 하고 염습한 시신 같기도 한
혜숙에게 다가가 살포시 품에 안아 보았다.

인기척을 느껴서였던가 그 순간 마악 마취에서 깨어난 혜숙은
내가 몸서리치던만큼 그리 고통스러워하지는 않는 표정이다.

데메롤 등 몰핀 주사를 강하게 투여한 까닭인지
그리 아프지 않다고 했다.

그저 정신이 몽롱하고 약간 황홀하면서
계속 잠이 쏟아진다고 했다.

기관지를 절개해서 말을 잘 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의사 표시는 필담으로 했다.

혜숙은 또다시 강한 분노와 증오의 감정을
내게 필담으로 써댔다.

"당신은 내가 수술할 때마다 왜 곁에 없는 거야?
애들 둘 낳을 때도 그렇고... 그게 제일 가슴에 맺혀...
당신 식구들은 음식도 맛있게 잘 먹고 건강하지?
나 때문에 피곤하지?...
내가 얼른 죽어버렸으면 좋겠지???......"

꽈배기처럼 배배 꼬여 뒤틀린 심사가 다시 발동하면서
온갖 감정을 필담으로 퍼부어댔다.

나는 혜숙이 정을 떼고 가려고
이렇게 포악스럽게 구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에 가슴이 철렁 내려 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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