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 세진인쇄 강은기 사장

 

 

세진인쇄 강은기 사장에게 전화를 걸어
오전 중으로 찾아 뵙겠다고 약속했다.

강 사장은 유신 체제와 긴급조치 시대
민주화 운동 단체의 인쇄물을 도맡아 온 분이다.

다시 말하자면 유신헌법을 반대하고

박정희 정권에 대항하는 선언문과 성명서 등 각종 유인물을
70 년대 초반부터 신변의 위험과 사업상의 손실을 무릅쓰고 인쇄해 준 유일한 분이다.

전북 남원의 가난한 집안에서 독실한 기독교 신앙을 가진 어머님 슬하에
모태 신앙을 이어 받아 태어난 그는 중학교를 마치고
더 이상 학업을 계속할 형편이 못 되었다.

애를 태우며 안타까워 하시던 어머니는 어린 그에게 학교를 못 보내는 대신으로
글이라도 계속 접할 수 있는 인쇄소에 취직하도록 권면했다.

고향 남원에서 1 년 여 인쇄소에 다니던 그는 4 . 19 혁명이 일어 나자
어린 마음에 별천지 세상으로 바뀌겠다 싶었던지
다니던 인쇄소를 그만 두고 서울을 향해 무작정 상경했다.

이듬해 5 . 16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자
아직 미성년의 티를 벗어나지 못하던 그는 낙엽이 짙게 물든 가을 어느 날
속리산 법주사에 여행삼아 갔다가 아예 세상을 등지고 입산해서 눌러 앉았다.

하지만 불교의 가르침과 어머니로부터 받은 기독교 신앙으로
또한 부모님과 동생들 걱정으로 제대로 마음 붙이지 못하고 갈등하던 그는
입산한 지 1 년 여 만에 다시 세상으로 하산했다.

집안에서 계속 머물고 있을 형편이 못 되었던 그는
1963 년 다시 상경하여 인쇄소에 취직했다.

10 년 가까이 인쇄소에서 일하던 그는
72 년 박 정권이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헌법을 정지시킨 가운데
계엄 치하에서 또다시 쿠데타를 일으켜 유신헌법을 통과시키자

애가 터지고 울화가 치미는 심정을 억누를 길 없어
다니던 인쇄소를 그만 두고 독자적으로 조그만 인쇄소를 차렸다.


▲ 세진인쇄 강은기 사장


이 후로 그는 엄혹한 시절 유신체제를 비판하고

박 정권에 저항하는 활동 단체를 찾아 다니며
그가 이제까지 갈고 닦아 온 기능과 직업을 통해서
필생의 신념과 사명감을 가지고 줄곧 민주화 운동에 기여해 왔다.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정권으로 이어지는 70 ~ 80 년대
치열했던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나온 각종 유인물은
거의 그의 손을 거쳐서 만들어 졌다.

그러는 동안 그는 수를 헤아릴 수 없을만큼
경찰서와 중앙정보부에 연행되고 구류를 살고 했다.

1980 년 4 월에는 김재규 관련 유인물 제작 건으로 보안사에 연행되었다가

계엄령 위반으로 구속되어 대전교도소에서 징역형을 살다가
이듬해 5 월 석가탄신일을 맞아 가석방되기도 했다.

나는 첫 직장이던 1977 년 월간 "씨알의 소리" 편집장일 적부터
필요한 인쇄물을 강은기 사장에게 맡겨 왔다.

민주화운동청년연합과 민중민주운동협의회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민중문화운동협의회 등등
내가 주도하고 관계했던 모든 단체의 유인물 역시 강은기 사장이 도맡아 주었다.

뿐만 아니라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등등 기독교 단체의 인쇄물도 거의 강은기 사장이 맡았다.

그는 실로 우리 사회의 민주화 운동과 민족 통일 운동 단체에서 나온

각종 유인물의 인쇄를 담당해 온 산 증인이요
자기 직업을 통해서 운동에 헌신해 온 민주 인사다.

그는 오랜동안 나와 같은 교회에 소속된 나의 선임 장로이기도 해서
나와는 더욱 각별한 관계를 유지해 오고 있었다.

이 글을 쓰는 시점에서
나는 다시금 그의 생애를 되돌아 본다.

그는 2002년 여름...
갑자기 췌장암으로 진단 받고 줄곧 병원에 입원해 왔다.

많은 이들이 그의 병실을 찾았고 한겨레신문과 경향신문에서는
그의 안타까운 투병 소식을 취재해 보도했다.

그리고 2002년 11 월 9 일
그는 험난했던 생애를 마감했다.

그를 알고 그를 소중하게 여겨 왔던 이들은
누구랄 것없이 그의 빈소를 찾았고
"민주인사 故 강은기 선생 민주사회장"으로
마석 모란공원 민주열사 묘역에 그를 안장했다.

식순 가운데 그에게 바쳐 진 조시를
여기에 옮겨 싣는다.


그 사람 웃으며 간다 ㅡ 하늘에 쌓아 둔 복록 찾으러

유시춘 (소설가, 국가인권위원회 상임위원)


우리들에게
사계가 늘 겨울이던 시절이 있었다.

손톱밑 반달같이
여리고 뽀오얀 새눈 돋는 봄날과
시퍼런 삼나무 녹음
그 그림자까지 시퍼렇던 뜨거운 날과

먼길 흘러
저 혼자 깊어져
마침내 바다같은 한강하구 박차고
내 마음의 철새들 떠나는 날에도

성명서와
플랑카드와 스티커와
'민주화의 길' '민주노동' '민주가족' '민주통일'
'민' 字 항렬 인쇄물에 뒹굴던
우리 청춘은 늘 춥고 시렸다.

겨울 새벽 동쪽 하늘에 맨살로 걸린
그믐달이 친구였다.

날 선 분노 때문에
70 년대 80 년대 그때에는
을지로 뒷골목
세진인쇄 강은기 그 아저씨
늘 표정이 없었다.

그러다가 인쇄물 몇 리어카 찍어 간
장영달 이해찬 수배되고 감옥 가면
그래서 쌓인 빚 늘어 가면
태백 정선 광부같이
한번
씨익 웃고 말았다.

밤새 찍어 준
인쇄물과 함께 그 아이들 사라지면
대신 경찰서에 끌려가
아마도 그리 말없이
씨익 웃다가

매타작에 죽을 고생하다가도
다시 만나면
그저 한번 씨익 웃었다

강은기
그 아저씨 가슴에는
비수같은 적개심이 없었다

생활이 운동이었다
운동이 곧 생활이었다
숭늉처럼 따뜻하고 융숭 깊었다

세진인쇄
빚진 사람들아
슬퍼마라 울지마라

그 아저씨 이제 하늘에 쌓아 둔
복록 찾으러 가느니

강은기
그 아저씨
외상값 못 갚은 친구들아
'국민의 정부'에 상기 가슴시린 벗들아
애통해 마라

그 사람 스스로
바다에 버린 양식

이제 곧
밀밭되어 보리밭되어
온 누리에 푸르게 물결칠 것을

그 사람
저기 말 없이
씨익 웃으며 가느니

( 전문 옮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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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 전화기와 책상 하나로

 

 

나는 남은 돈 43 만 원을 들고
을지로 5 가 을지전화국으로 향했다.

그 당시 전화를 신청하려면
20 만 원 권 전화 채권값을 포함해서
43 만 원이 필요했다.

가지고 간 돈을 몽땅 지불하고
지정 받은 전화 번호가 적힌 메모지와 채권 한 장
달랑 받아 쥐고 나오다가

지금은 사라진 지난 날의 풍경...
전화국 앞에서 서성대는 아주머니에게
20 만 원 권 채권을 건네 주고
3 만 원을 할인해 17 만 원을 받았다.

17 만 원...
이 돈을 창업 자금으로...
유일한 밑천으로 삼아
6 개월 안에
5 천 만 원 가량 되는 부채를
갚아야 한다.

갚아야지...
꼭 갚고 말꺼야...

혜숙이 살아 있어야 할
올 연말까지는
꼭 갚아야 해...

1987 년 6 월 20 일...
나는 필사적인 행동을 개시하는
첫 번 째 업무를 마치고

중앙극장 건너편에 위치한
을지로 2 가 속칭 인쇄 골목을 향해
터덜터덜 걸어 갔다.

을지로 3 가 쯤에서
만 오천 원을 주고
전화기 한 대를 구입했다.

일제 때 지은 적산 가옥이
마치 혜숙의 빛 바래고 푸석푸석한 몰골처럼
낡고 허름한 건물들이
쓰러지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듯
서로 기대어 다닥다닥 붙어 있는
골목길에 들어 섰다.

인쇄기 돌아가는 소리가
요란하게 귀청을 울린다.

잉크 냄새가
코 끝을 진하게 스친다.

적산 가옥 비좁은 나무 계단을
조심조심 오른다.

색칠도 하지 않은 베니어판을
얼기설기 칸막이로 막아 구분해 놓은 사무실
출입문을 열고 들어선다.

강은기 사장이 씨익 웃으며
반갑게 맞이한다.

"형님! 나 집사람 병 고치고 빚도 좀 갚아야 하는데...
여기 책상 하나 빌려 주세요...
아무래도 형님께 우선 신세 좀 져야 되겠어요.
언제까지가 될 지 모르겠지만....."

나와 혜숙이 살아온 모습
활동해 온 과정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분이어서
나는 전후좌우 가리지 않고
미주알고주알 군더더기도 뺀 채
단도직입적으로 부탁했다.

강 사장은 비좁은 사무실 공간에 놓여 있는
책상과 공타 기계를 요리조리 옮기더니
책상 하나 들여 놓을 자리를 비워 준다.
공간에 맞도록 조그만 책상을 들여 놓고
전화기를 달았다.

아! 이제 나는
더 이상 마련할 수 없는 밑천을 가지고
더 이상 작을 수 없는 공간에서
홀홀단신으로 황당무계한 구름을 잡듯
청운의 뜻을 펼치듯
고난의 대 장정을 시작하는 것이다.


▲ 세진인쇄 강은기 사장

의자에 앉아 본다.
전화기를 만져 본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한숨이 절로 나온다.

다짐하고 다짐하며 필사적인 각오로
우선 뛰쳐 나오기는 했지만
막막하다.

이제 무엇을 해야 할 차례인데...
무엇을 어떻게 추진해 나가야 하나...
그저 막막하기만 하다.

무심코 전화기 다이얼을 누른다.
엉뚱하게도 어머니의 음성이 들려 온다.

어! 이게 아닌데...
얼떨결에 "...에미 좀 바꿔 주세요" 한다.

"여보! 난데...
지금부터 사업 시작하는 거야...
사무실도 얻고 책상이랑 전화기도 마련했어...
당신한테 첫 번째로 전화하고 본격적으로 시작할려구...
1 년만 기다려... 1 년 안에 다 해결할 테니까..."

나는 생각지도 않게 엉뚱한 소리를 해 댄다.
그렇지! 맞아! 그래야 돼!
이제 시작해야 돼!

본격적으로... 필사적으로...
해 내고 말아야 돼!!!

나는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 전화 다이얼을 누른다.

"아이구 이게 누구야... 전화를 다 주시고...
내가 먼저 연락했어야 되는 건데... 이거 미안해서 어쩌나.
그동안 고생 많았지? 감옥에서 건강은 괜찮았고?
언제 나왔지?... 혜숙 씨는 요즘 어때? 병원에서는 뭐래?
이거 참 큰일이로구먼... 우리 친척 중에도 그런 분이 계셨는데...
그럴 때는 이러저러 해 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더라구...
그 분도 견디다 못 해 막판에는 이러저러했는데...
차라리 처음부터 이러저러했으면...
그렇게까지는 안 됐을 꺼라 그러더라구...
애들은 몇 이지?... 아이구 애들 생각해서라도
혜숙 씨가 빨리 건강해져야 할 텐데...
그나저나 우리 함 만나자구... 나한테도 시간 좀 내 줘...
점심도 좋지만 저녁에 만나서 회포도 풀어야지...
혜숙 씨 한테도 안부 전해 주고......"

첫 번째 통화에서
나는 막상 할 사업 이야기는 한 마디도 못 한 채
서로 안부 인사만 나누고 말았다.

두 번째도 그랬고 세 번째도 그랬다.
통화 내용도 비슷했다.

여기저기 전화 해 보았지만
계속 그 모양이었다.

나는 다급해 졌다.
안부 전화를 나누면서 시간을 보낼만큼
한가롭고 여유있는 형편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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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 세민약국과 나눔기획

 

 

직접 찾아가서 만나기로 작정했다.
그러다보니 연락처가 있어야 했고
명함이 있어야 했다.
상호가 있어야 했다.

그로부터 9 년 전이던 78 년 6 월
혜숙이 나와 결혼하면서
약국을 차렸을 때 장면이 떠오른다.

나는 혜숙의 약국 상호를
무엇으로 할까? 궁리했다.

지금은 재개발이 되어 아파트가 들어 서 있고
다가구 주택으로 변해 있지만
그때 적만하더라도 우리가 살던 곳은
닭장 동네라 불릴만큼 판잣집이 많았다.

그나마도 세들어 사는 이들이 많이 살던
달동네 어귀였다.

나는 '씨알' 약국이라 할까?
'민중' 약국이라 할까... 했다.

너무 '티'를 내고
속내를 드러내 보이는 것 같았다.

조선조 숙종 때
우리 백성들은 참으로 생활이 곤궁했다.
많은 이들이 기아에 허덕였다.

함경도 평안도 등
북쪽 지방이 더욱 심했다.

백성들은 먹을 것을 찾아 헤맸다.
조상이고 친척이고 고향이고를 떠나
뿔뿔이 흩어져 헤매고 다녔다.

산에 닿으면 산나물을 뜯어 먹고
물에 닿으면 물고기를 잡아 먹는다.
들에 닿으면 품을 팔아
곡식으로 끼니를 때운다.

이런 이들을 일컬어 세민(細民)이라 했다.
가난하고 천한 이들이다.

함석헌 선생의 상징어가 된 '씨알'을
한자(漢字)로 표현할 때
민중(民衆)보다는 세민(細民)이 더 가깝다.

서양철학에서 임금 노동자 무산자를 뜻하는
프롤레타리안(Proletarian)이라는 개념보다도
더 역사적이고 구체적인 말이다.

이런저런 궁리 끝에
나는 혜숙의 약국 상호를
'세민약국'이라 작명했다.

한자로는 쓰지 않았다.
험악한 시절 냉전의 세상에서
상호에 담긴 의미를 가지고
괜한 빌미를 살까 염려해서다.

약국에 드나드는 사람들이
더러 묻는 적도 있다.

상호가 부르기 쉽고 마음에 든단다.
무슨 의미냔다.

부부간에 이름을 한 자씩 따서 지은 것 아니냔다.
그렇지 않다고 했다.

영세민(零細民)에서 영(零)자를 뺀 거 아니냐고 한다.
그렇다고 했다.

그 후부터 혜숙은
상호에 대해서 묻는 이들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이 동네가 옛날부터 가난한 이들이 많이 살았대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닭장동네라 해서
다닥다닥한 판잣집에 닭장처럼 옹기종기 모여 산 사람들이 많았잖아요.
그 분들이 다 영세민들이잖아요...
근데 '영세민 약국'하면 좀 이상하고 동네 자존심도 상할 것 같아서
'영' 자를 빼고 그냥 '세민약국'이라 했어요..."

상호에 대해서 이런저런 생각으로 회상에 잠기던 나는
이번에는 무얼로 지을까 궁리했다.

목적과 대상이 되는 객관적 개념보다는
실천과 행동...
구체적인 당위를 뜻하는 개념을 찾고 싶었다.

'나눔'
평등한 사회를 지향하는 실천적 개념이다.
분배의 정의...
정의롭고 평화로운 사회를 이루기 위한 행동적 개념이다.
세계 평화를 지향하는 종교 단체의 슬로건이기도 하다.

'나눔' '나눔기획' '출판인쇄 나눔기획'......
상호를 '나눔기획'이라 정하고 명함을 만들었다.

사무실 입구에 네모반듯한 간판도 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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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네 번째 명함

 

 

첫 직장으로 나는 70 년대 후반
월간 < 씨알의 소리 > 사에서 편집일을 맡아 했다.

주위 동료들이 더러 선망했던 일이었는데
그 일이 내게 맡겨 졌다.

이 후로 나는
감옥에 들어 가 있는 동안을 빼고
계속 직장 생활을 이어 갔다.

두 번째 직장으로 나는
당시 한국일보에 "장길산"을 연재하고 있던
소설가 황석영의 추천으로
우리나라에서 전통 있는 출판사 가운데 하나인
현암사에 입사해서
대작 "한국미술 5 천년"의 기획 출판을 맡아 했다.

10.26 박 대통령 시해 사건이 일어나고 한 달 뒤
'명동 YWCA 위장 결혼식 사건"에 연루되어
세 번째 감옥을 살게 된 나는 출소하자마자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연구출판부장으로 근무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민주화운동청년연합과 민중민주운동협의회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민중문화운동협의회 등의
단체를 조직하고 설립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각각의 단체에서 상임위 의장, 청년단체 대표위원
실행위원 등을 맡아 활동해 왔다.

그러던 중 민청련 시위 사건으로
김근태 등과 함께 구속되어
네 번째 감옥을 살고 나온 것이다.

공교롭게도 네 번째 감옥을 사는 동안
나는 인쇄 공장에 출역하게 되었다.

인쇄공장에는 활판인쇄기, 옵셋인쇄기, 조판 정판실,

최신형 마스타 인쇄기, 재단기 등등의 기계들과 제본실이 있었다.

원고가 들어 오면 편집과 조판 교정에서부터
인쇄와 제본까지 일괄해서 처리하는 구조로 되어 있었다.

10 개월 여 동안 인쇄 공장에 출역하면서
나는 제작 공정의 모든 실무를 직접 배우고 익힐 수 있었다.

'내 팔자에 인쇄 사업이 예정돼 있었던건가?...'

월간지 편집장을 시작으로
미술 대작의 기획 출판을 맡고
연구원의 출판부서를 운영하는 책임과
인쇄 공장의 실무를 익히는 등으로

나는 우연치 않게도 10 여 년 동안
출판 인쇄 분야의 모든 실무와 운영을
두루 경험해 왔던 것이다.

그러니만큼 마음 한구석에
무언지 모를 자신감...
해 낼 자신감이 있었던 게 아닌가 싶었다.

이제 나는 네 번째 명함을 가지고
세상을 향해서 달려 나갈 준비를 차린 것이다.

 

 

 

 

83. 첫 번째 주문

 

 

실천문학사 송기원 사장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
시간 좀 내어 저녁을 같이 하잔다.

송기원은 한국 문단에서 주류를 이루고 있는
서라벌 예대 문예창작과의 마지막 세대이자
합병된 중앙대 문창과의 선두 세대다.


▲ 작가 송기원


그는 우리 사회의 민주화를 위해
문인들을 이끌고 실무일을 도맡아서
가장 치열하게 활동해 온 시인이요 소설가다.

중앙일보와 동아일보 신춘 문예에서
각각 단편 소설과 시로
한국 문단에 화려하게 등장했던 그는

치열했던 자신의 삶만큼이나 예리한 통찰과
탐미적 감수성을 보여 주는 작품 세계를 펼쳐 왔다.

나는 <월간 씨알의 소리> 편집장을 맡고 있을 적부터
그와 가까이 사귀어 왔다.

때로는 서대문 구치소에 함께 구속된 처지에서
서로 통방을 하며 각별한 정을 나누기도 했다.

우리는 종로 1 가 허름한 목로집에서 만났다.
손님들이 앉을 틈도 마땅찮게 비좁은 집이다.

"야! 니가 어떻게 이런 시련을 겪을 수 있냐?...
재야에서 니 경제적 지원 안 받은 단체가 없을꺼고...
니 신세 안 져 본 사람도 그리 없을텐데...
그런 천하의 아무개가 어떻게 사무실도 없이...
전화통만 달랑 갖고 나가 인쇄소 골목에서
나까마(행상)하게 되었냔 말야 임마!!!"

눈깔사탕처럼 땡그란 얼굴에
두꺼운 안경테 너머로
송기원은 동그랑땡 안주 국물에 소주를 들이키면서
황소방울만한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우선 사무실이라도 마련해야 되겠지?...
급한대로 우리 실천문학사에 들러
한 2,3 백 만 원 가져 가 임마...
니가 할 일거리도 챙겨 둘테니까 가져 가고...
일거리 떨어지면 미리미리 얘기해.
출판사에서도 어차피 들어가야 할 비용이니까 걱정하지 말고...
너 감옥 사는 동안에 우리 출판사 책 좀 팔렸어.
그러니 니가 했던 것만큼은 다 못 하더라도
네 사무실 제목마따나 나눌 수 있는 만큼 나눠 먹자 임마!..."

다음날...
나는 실천문학사로 송기원을 찾아 갔다.

기다리고 있었던 듯
그는 경리부를 통해서 내게 2 백 만 원을 내 주었다.

그리고 원고 정리가 아직 덜 되었다면서
이미 출판되어 있는 소설책 한 권을 내밀고
전산 조판부터 인쇄 제작까지 새로 만들어
3,000 부를 납품해 달라는 거다.

나는 굳이 그럴 필요까지야 있겠느냐고
새 원고가 정리될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했다.

하지만 송기원은 앞으로 어차피
활판 인쇄용으로 조판된 책들을 재인쇄 할 때는
옵셋 인쇄용 전산 조판으로 바꾸어 나가야 하니까
전혀 부담 갖지 말고 일거리가 떨어지면
언제든지 들러서 가져 가라고 했다.

사업을 시작하자마자
첫 번째로 의뢰 받은 주문이었다.

각별한 배려에서 온 것이기도 하지만
처음으로 사업이랍시고 뛰어 들어서
처음으로 결재 받은 돈이기도 했다.




 

84. 월간 <말> 합본호

 

 

내가 '나눔기획'을 차린 소식이
주변에 점점 알려 지기 시작했다.

주위에서는 감옥에서 출소하자마자
아내가 위암에 걸려 죽어 가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곁에서 병 구완도 제대로 못 한 채
돈을 벌겠다고 이리 뛰고 저리 뛰는 나를
그냥 내버려 두려 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행여나 내 마음이 다치거나 상처 받을새라
각별한 조심과 배려를 더 해 주었다.

그 당시 월간 <말> 지 사장으로 있던
김태홍 선배에게서 좀 만나자는 전갈이 왔다.

 

▲ 김태홍(1942 ~ 2011) 전 국회의원


김태홍 선배는 한국일보와 합동통신에서
외신부 기자로 있던 언론인 출신이고 
나중에는 광주 북구청장과 국회의원을 지냈다.

광주일고와 서울대를 졸업한 그는 80 년 계엄 치하에서
기자로서는 가장 명예로운 직책이라 할 수 있는 한국기자협회 회장을 맡아
언론 검열 철폐 및 자유언론 실천 운동을 벌인 죄로 계엄 당국에 의해 구속 수감되고
신문사에서도 해직되었다.

"최 형을 이 고생하도록 놔 둔다는 것은 우리 주변 모두의 수치예요.
부끄러움이고 후안무치한 일이지...
요즘 <말> 지 사정이 예전과는 많이 달라졌어요...
전두환 정권에서 각 언론사에 하달하는 보도지침을 폭로한 사건 이후로
<말> 지는 오히려 날개돋힌 듯 팔리고 있소.
재정적으로도 여유가 생겼고...
그런데 마침 <말> 지 창간호에서부터 지금까지 간행된 것을
보도지침 폭로 기사 내용까지 수록해서 합본호로 만들기로 했는데
기왕이면 당신이 좀 맡아 주었으면 좋겠소...
그래야 우리도 안심할 수 있겠고...
비용은 한 천 여 만 원 들텐데 필요한대로 먼저 가져다 쓰시고..."

<말> 지는 내가 편집장을 맡았던
월간 <씨알의 소리>가 1980 년 7 월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 세력의
무지막지한 탄압에 의해 폐간된 이후로

이 땅의 언론 민주화를 위해 싸워 온
해직 기자들이 중심이 되어 창간한 잡지다.

역사적으로 본다면 1950 년대부터 60 년대 말까지는
장준하 선생이 심혈을 기울여 발행한 <사상계>가 있고
박 정권에 의해 <사상계>가 강제 폐간된 이후

그 뒤를 이어 1970 년부터 80 년까지
함석헌 선생을 발행인으로 한 <씨알의 소리>가 있다.

<씨알의 소리> 역시 전두환에 의해 강제 폐간된 이후
무려 5 년 여의 공백기를 지난 1985 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말> 지가 있어
우리 나라 월간 잡지 역사의 전통과 맥을 이어 오고 있는 것이다.

1975 년 유신독재에 맞서 언론 자유를 위해 투쟁하다 해직된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기자들과
1980 년 계엄 하에서 역시 언론 자유를 위해 투쟁하다 해직된 기자들은
1984 년 민주언론운동협의회를 설립했다.

그동안 거리로 내쫓긴 해직 기자들은 독재 정권의 언론 탄압에 맞서
글과 각종 성명서를 통해, 때로는 거리 시위를 통해
언론의 자유를 끊임없이 요구해 왔다.

그러다가 구속되고 옥고를 치루면서까지
자유 언론 투쟁을 줄기차게 벌여 왔다.

하지만 정작 언론 매체를 스스로 만들어서
실천적 활동을 벌이는 데까지는 미치지 못했었다.

그러던 중 85 년 5 월 월간 <말> 지를 창간하게 되고
이를 모태로 해서 1988 년에는 급기야
<한겨레 신문>을 창간하기까지 이르르게 되는 것이다.

김태홍 사장은 내게 각별히 부탁한다.

"월간 <말> 지 합본호를 비밀리에 인쇄하고 제작해 줄 사람이
아마도 최 형 말고는 없을 것 같소... 

최형 입장에서야 어디 이 정도를 가지고 두려워서 못 할 분은 아니잖소...
그러니 가급적 조심해서 꼭 해 내 주기를 바랄 뿐이요..."

그 때 상황으로는 실로 엄청난 주문이었다.
인쇄량은 물론이거니와 양장 특수 제본을 비밀리에 해 낸다는 게
여간 만만한 작업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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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 외상 매입을 자산 삼아

 

 

책상 하나를 가지고는 어림도 없는 상황이 벌어졌다.

더 큰 사무실이 필요했다.
당장에 작업을 진행시킬 직원이 필요했다.

시작한 지 보름 만에 사무실을 옮겼다.
출판 편집 경력 15 년 이상되는 베테랑급으로 우선 두 분을 간부 직원으로 초빙했다.

그래도 모자랐다.
다시 보름 만에 20 여 평되는 사무실을 구해 이사했다.
직원도 여섯 분으로 늘었다.

내가 두 번째로 직장 생활을 했던 도서출판 현암사 조근태 사장을 찾아 갔다.
조 사장은 이미 나의 형편과 사정을 간접적으로 들어 알고 계셨다.

 

 

▲ 현암사 조근태 사장 (1942 ~ 2010 )


"최 선생! 사업을 하게 되면 무슨 사업이든 부채를 지게 마련이오.
5 천 만 원이란 부채는 사업 규모에 따라서 별 거 아닐 수도 있소.
너무 걱정하지 말고...

외상 매입 부채가 한 5 천 만 원에서 늘 깔려 있도록 사업 규모를 키워 놓으면...
재정적인 문제도 어렵지 않게 장기적으로 해결해 나갈 수 있을께요.
나도 최 선생을 위해서 무엇을 도울 수 있을까 생각해 봤는데...
우선 아무런 시설도 없고 거래처도 없을 테니까 내가 그것을 맡아 주겠소...
제일 큰 부담이 원재료인 종이값일텐데...
내가 거래하는 지업사에 특별히 부탁해 놓을테니

필요하면 언제든지 주문해서 갖다 쓰시고 여유가 생기면 갚도록 하시오...
그밖에 인쇄소나 제본소도 필요하다면 소개해 주겠소...
그리고 한 가지 더... 혹시 정히 필요하다면...
우리 현암사 어음을 발행해 드릴 테니까 그리 아시고요...
아마 어느 정도는 도움이 될 꺼요..."

그 때 조 사장의 도움과 제안은
내게 크나큰 의욕과 자신감을 불러 일으켜 주었다.

세 번씩이나 울먹이며 피마르는 심정으로
주저주저하며 안쓰런 표정으로
사정하던 혜숙의 모습을 떠올리면서
나는 마음 속으로 혜숙에게 속삭였다.

"내 꼭 올해 안으로... 6 개월 안으로 빚을 갚을께...
몸조리 잘 하고 살아 있어야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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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 1970 년대 민주화 운동과 기독교

 

 

당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위원회 사무국장이고
그 후 협의회 총무를 맡았던 김동완 목사에게서 만나자는 전갈이 왔다.


김동완 목사는 내가 소속된 감리교단의
교회 개혁과 사회 운동을 실천적으로 대표해 오던 분이다.

 

▲ 김동완 목사 (1942 ~ 2007 )


김동완 목사는 일찌기 박형규 목사와 더불어 빈민 운동과 노동 운동
우리 사회의 민주화 운동에 헌신해 오면서 세 차례나 구속되어 감옥에 갇히기도 했다.

나와 혜숙은 김동완 목사와 각별한 관계로
함께 기독학생 운동을 하기도 했다.

"아니! 이게 무슨 난리야!...
우리 혜숙 씨 병 구완도 못 하고...
세상에 최 아무개가 이렇게 돼도 되는 거야???
이게 말이나 되는 거냐구!!!
당신이 감옥 들어가기 전 기사연(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에 있을 때
당신들이 계획하고 준비해 왔던 '1970 년대 민주화 운동과 기독교'를
우리 인권위원회에서 펴 내기로 했소...
기사연에서 내게 되면 정보 기관의 압력을 버텨 내기도 어렵고
위험할 것 같아서 우리가 내기로 한 거요...
어차피 당신들이 계획하고 준비해 온 거니까
기왕이면 직접 맡아서 출판까지 해 주시오...
예산은 한 1 천 5 백 여 만 원을 당신도 알다시피 별도 통장으로
관리하고 있으니까 필요하면 언제든지 가져다 쓰고..."

원고를 가져 왔다. 실로 엄청난 양이다.
4 . 6 배판으로 2,200 여 페이지 가량 되는 분량이다.
당시 20 여 평형 아파트 값이 천 여 만 원 할 때던가 그랬다.

상황이 또 바뀌었다.
공타기로 조판하기에는 어느 세월에 마칠 수 있을지 막막했다.

첨단 컴퓨터 기술을 응용해서 마악 새로 개발해 시중에 나온
전산 조판기를 구입해야 했다.

다시 보름 만에 사무실을 40 여 평으로 늘리고
최신형 한컴 전산 조판기 4 대와 사진식자기 1 대를 리스로 구입했다.

<말> 지를 비밀리에 인쇄하기 위해서 서울 시내에는 3 대밖에 없다는
미국산 최신형 4 절 마스터 인쇄기도 리스로 구입했다.

구입 비용이 6 천 여 만 원에 달했다.
15 평 남짓 되는 인쇄 공장도 별도로 마련했다.

직원도 20 여 명으로 늘었다.
시작한 지 40 여 일 만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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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 마지막 예배

 

 

한편 혜숙은 이제
죽음을 준비하고 정리하는 단계도 지나 있는 듯 싶다.

앞으로 몇 날을 더 살 수 있을지
내일이건 모래건 숨이 끊어지면 그냥 죽는거지 하는 표정이다.

의학 용어로 터미널 (Terminal) 상태...
우리 말로 풀자면 종착역 종점에 임박해 있는 상태다.

7 월 첫째 주...
혜숙이 여러 달 동안 교회에 나가지 못하자
담임이신 조승혁 목사님과 교인들이 심방을 오셨다.

목사님과 교인들 모두 혜숙이 운명하기 전
마지막 심방 마지막 예배라고 생각했다.

나 역시 조 목사님의 심방 예배가
마지막일 꺼라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 없었다.


▲ 조승혁 목사 (1935 ~ 2014 )


혜숙이 자신도 살아 있는 동안
마지막 예식이 되겠구나 싶단다.

혜숙은 교인들을 보는 것도 마지막이라고 생각한 듯
목사님과 교인들이 대문으로 들어 서는 기척에
벌떡 일어서서 울음으로 맞이한다.

방이며 마루 가득히 둘러 앉아 예배드리는 동안 내내
혜숙은 엎드려 앉아 눈물을 주룩주룩 흘리며 흑흑거렸다.

나는 혜숙과 만난 이래로
이처럼 절망적인 혜숙의 모습을 본 적이 없다.

혜숙은 체신이니 뭐니 아랑곳없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눈물 콧물을 쏟으며 소리내어 통곡했다.

"... 하나님!!! 왜 이 여인을 데려 가시려는 겁니까?...
오랜 세월 한국 사회의 민주적 발전을 열망하며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의로운 길을 걸어 온 여인이
왜 민주화 되는 세상, 좋은 세상을 못 보고
이다지도 고통스럽게 죽어야 하는 겁니까?...
하나님 아버지! 이 나라 이 민족을 위해서
온갖 역경과 고난을 겪어 온 남편을 뒷바리지하고
어려운 동료들을 보살펴 온 당신의 귀하고 의로운 따님을
주님! 데려 가시면 안 됩니다.
앞으로도 주님을 위해서 해야 할 소중한 일들이 많이 남아 있사오니
할 일 많은 이 여인을 주님!!! 살려 주시옵소서...
하나님 아버지!!!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꼭 살려 주셔야 합니다.
주여!!! 살려 주시옵소서......"

조승혁 목사님은 머리 끝부터 발 끝까지 온 몸에 땀을 흠뻑 흘리며 간절하게 기도하셨다.
참석한 교인들도 모두 울고 통곡하며 간절히 기도했다.

목사님은 교회가 세워진 이래 이처럼 뜨겁고 간절한 마음으로
전 교인이 합심된 기도를 드린 적이 없었다고 하신다.

안수 기도 중에 조승혁 목사님은 배와 등허리 쪽으로 심한 통증을 느끼셨단다.
통증을 견디다 못 해 기도 소리가 더 커졌다고 한다.

함께 울고 통곡하고 기도하던 혜숙은 마음이 조금 평온해 지는 듯 했다.
그날 밤 혜숙은 오랜 만에 모처럼 잠을 편하게 들 수 있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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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 죽으면 죽으리라

 

 

이튿날 혜숙은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배가 고픈데 먹을 것 좀 달라고 했다.
수술 이후 처음으로 혜숙은 자기 의지로 자기 욕구로
먹을 것을 달라고 요구한 것이다.

어머니는 너무 반갑고 신이 나신 듯
밝고 환한 표정으로 물으신다.

"에미야~~~ 배가 고프다고?...
무얼 먹고 싶어? 무슨 반찬을 해 줄까?"

"조기 반찬이 먹고 싶어요"

혜숙이 "일어나 비추어라"라는 책을 읽어 보니
지은이 오혜령도 암 수술을 받고 아무 것도 먹지를 못하다가
끝내 배에 복수가 가득차고 의학적으로 터미널 상태에 다달았는데

하나님의 은총으로 다시 살아나서
맨 먼저 먹고 싶었던 것이 조기 반찬이었다는 거다.

오혜령은 죽음 직전에 이르러서
마지막으로 하나님께 매달려 간절히 기도했는데
기도를 마치자마자 이제 '죽으면 죽으리라' 하고
불안한 마음이 가시며 평온해 지더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죽음을 맞이하고 있는데 가득 찼던 복수가 점점 빠지고
암 세포의 진행이 멈추더라는 것이다.

혜숙은 오혜령의 수기에서처럼
자신도 그렇게 소생하기를 간절히 바랐던 게다.

암 환자의 심리적 변화에서
제 1 단계인 부정하고 거부하는 상태에서부터

죽음의 공포에 시달리며
모든 것을 증오하고 미워하는 상태...

그러고 그러다가 자포자기하고
한없이 무력해 지는 상태를 지나

자신의 삶을 정리하고
죽음을 맞이하려는 단계까지 예외없이 겪어 온 혜숙은

이제 이 모든 단계들이 때때로 혼재되어 나타나면서
그래도 살아 나야 한다는 희망에 애처롭게 매달려 있다.

어머니는 조기반찬에 자연식 야채로
상을 가득히 채워 놓으셨다.

어머니와 나는 혜숙이 얼마나 먹을까...
먹은 것을 제대로 소화시킬 수 있을까...
기대하고 염려하면서 지켜 보았다.

혜숙은 입에 넣자마자
먹은 음식들을 토해 내느라 정신 없어 했다.

하지만 혜숙은 토하면서도 먹기를 계속했다.
먹으면 토하고... 먹고 토하고......

물만 먹어도 토하고
먹은 것보다 더 토하곤 했다.

이후부터 혜숙은 토하면서 죽도 먹고
조기 반찬도 먹고 했다.

그래. 먹어야 한다.
먹자. 먹자.

혜숙은 죽기 살기로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혜숙은 생기가 돌면서
삶의 의욕이 생기는 듯 했다.

비록 토하더라도 먹는 재미
씹는 재미가 쏠쏠하다고 했다.

제일 맛있는 것이 물이라고 했다.
그즈음 해서 나는 생수기를 들여 놓았다.

의학적으로는 대책이 없고 방법도 없는 터미널 상태지만
혜숙은 그 날부터 풍욕과 냉온욕 그리고 간간이 먹어 대는 일로
하루 종일 분주했다.

초등학교에 입학한 맏아들이 친구들을 몰고 집에 와도 개의치 않고
맞바람 치도록 창문과 방문을 열어 놓고는 벌거벗은 채로 풍욕을 하고
하루에 한 번 목욕탕에 가서 냉온욕을 하고 왔다.


밤에는 마고약을 배에 얹고 잤다.
하루에 풍욕 8 번 냉온욕 1 번 마고약 1 번

그렇게 석 달을 온전히 채우기 위해

혜숙은 필사적으로...
그야말로 죽기살기로 작정하듯 매달렸다.

그즈음 해서 혜숙은 기도에도 열심이었다.
이제껏 살아 오면서 잘못한 일들을 하나하나 돌이켜
진심으로 회개하는 기도를 드린다는 것이다.

지금껏 마음 속 깊이...
가장 꺼림직하게 남아 있는 게 무언가...
무엇을 제일 잘못하고 있었나...
혜숙은 곰곰 생각하고 따져 보았단다.

1 번 2 번 순서를 달아 적어 보니 아무렇지도 않았던 일들이
모두 마음에 걸리고 한도 끝도 없이 나오더란다.
한 30 여 가지를 적어 놓았단다.

가장 마음에 걸리고 잘못한 일은
시어머니를 마음 속 깊이 공경하지 못했던 거란다.

혜숙은 시어머니에 대해 마음 속으로 불편해 하고 짜증 낸 것을
첫 번째로 삼아 회개했다.

돌이켜 보고 뉘우치며 간절한 마음으로 회개 기도를 하는데
해도해도 끝이 없을 정도로 많이 쏟아져 나오더라는 것이다.

첫 번째 제목이 해결되어야 다음 순서로 넘어 갈 텐데...
너무 오래 걸리더란다.

그래도 철저하지 못했다면서
두고두고 아쉬웠단다.

회개 기도를 하면서 혜숙은 마음을 비우고
성격도 많이 변했다.

혜숙은 하나 더하기 하나는 둘이라야만 되는
이과 전공 출신이어선지 성격도 좀 원칙적인 편이다.

자기 자신에게도 좀 까다롭고
힘에 겨운 일을 잘 참아 내지 못한다.
곧잘 실망하기도 하고 낙담하기도 한다.

혜숙은 자신의 이러한 성격을
모두 다 비워 버리려고 노력했다.

시건방진 생각을 버리고
마음을 넉넉하게 편안하게 갖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기도했다.

한 달 쯤 지나자
혜숙은 체중이 5 백 그램 정도 늘었다.

혜숙은 체중이 늘었다고 여기저기 자랑하며
사소한 일에도 자주 웃고 즐거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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