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 모르는 게 약

 

 

병실에 누어 있으면서
혜숙은 자신이 약사인 것이 싫다고 했다.

의사들이 자기들끼리 자연스럽게 전문 용어를 쓰고 영어를 섞어 가며
환자의 의학적 상태나 치료 방법 등을 의논하는데
그 내용들을 거의 알아 듣는 수준이다보니

자신의 몸 상태를 너무 적나라하게 알게 돼서
오히려 고통스러웠던 모양이다.
세상말로 '모르는 게 약'이란 말도 있는데...

혜숙은 위암 수술 때 췌장의 일부를 절제해 내는 바람에
인슐린이 제대로 분비되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혈당이 1,000 까지 올라 갔다.
인슐린을 링거에 섞어 계속 주입했다.

수술 후에 일시적으로 일어난 현상이었다.
혈당이 정상으로 돌아 오는데 일주일 가량 걸렸다.

중환자실에만 무려 30 여 일 있었다.
혜숙은 중환자실에 장기간 누어 있으면서
'내가 일반병실로 옮겨 갈 수 있을까...' 하고 생각했단다.

중환자실에서 오랜 기간 입원해 있는 환자들은
그야말로 죽음의 문턱에서 대기하고 있는 것이란다.

중환자실을 나서서 갈 곳은
영안실 아니면 일반 병실로 가는 두 길 뿐이란다.

혜숙은 중환자실을 빨리 벗어나고 싶어 했다.
언제 일반 병실로 옮겨 갈 수 있을까...
과연 그 길로 나갈 수 있을까... 했단다.

주치의는 하루라도 빨리
중환자실을 벗어 나고 싶어 하는 혜숙을 배려하고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서 산소 호흡기와 함께
혜숙을 일반 병실로 옮기도록 했다.

일반 병실 환자들은
혜숙이 보기를 꺼려하고 무서워 했다.

기도에는 고무 호스를 달고
목에서 가래를 뽑아 낼 때마다
꽥꽥 하는 소리가 무섭게 들리고
곁에서 보기에도 지저분하기 짝이 없었던 모양이다.

성대를 제마음대로 쓸 수 없어
말을 하려면 목에 뚫어 놓은 구멍을 막아
가까스로 작은 소리, 바람 새는 목소리를 내면서 기를 써야 했다.

혜숙이 일반 병실에 옮긴 후 맏아들 중수가 병원에 들렀다.
한달 여 만에 보는 아들 얼굴이다.


혜숙은 초등학교 2 학년인 중수를 부둥키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너무 갑작스럽고 생각지 않던 분위기라선지
중수는 "엄마! 왜 그래... 왜 그러는 거야 엄마!..." 하며 당황해 했다.

혜숙은 아이들의 얼굴을 다시는 볼 수 없을 지도 모르겠다는 두려움 가운데
수술을 받았던 것이다.

그리고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오로지 아이들 생각에 뒤돌아 서서 나와
가까스로 다시 살아난 환상을 떠 올리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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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새 집으로

 

 

흉선 제거 수술 뒤로 혜숙의 근무력증은 점점 나아져 갔다.
혜숙은 중환자실에서만 1 달 여
일반 병실에서 다시 보름 여 동안 입원해 있었다.

암 수술로 입원했을 때보다
무려 두 배나 오랜 기간을 입원해 있었던 셈이다.

그동안 우리집 건축도 모두 마무리 되었다.
반지하에 두 가구, 1 층에 두 가구
그리고 2 층과 3 층은 우리 가족이 살기에 알맞도록 설계해 지어 졌다.

새 집으로 이사한 지 닷새 후
혜숙은 한 달 보름 여 만에 병원에서 퇴원했다.

새 집으로 돌아 온 혜숙은
미처 정리되지 않은 채 쌓여 있는 짐들을 일일이 챙기고 싶어 했다.

커텐과 주방 시설은 물론이고 칫솔통과 비눗곽, 화장실용 슬리퍼까지
일일이 직접 참견해서 선택하고 싶어 했다.

새 집에서 우리 가족은
새로운 삶을 시작한 듯 했다.

근무력증 증세가 나날이 호전되어 감에따라
이제 병마는 옛집과 함께 우리 곁을 떠난 듯 했다.


* * *

암 수술한 지 2 년이 되었다.

후배 의사의 말로는 의학적으로 5 년 생존율이라 하지만
이를 다시 구분해서 우선 2 년을 기준으로 삼는 경우도 있단다.

말하자면 생존율이 낮으면 낮을수록 대개의 환자는

2 년 안에 암세포가 재발해서 죽음에 이르를 확률이 많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선 마의 벽 2 년의 관문을 넘어 서는 것이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는 말이다.

2 년 째 되는 날이다.

혜숙은 내 얼굴을 보지 않고
고개를 밑으로 수그린 채 내게 말했다.

"나 암으로는 안 죽을꺼야...
이런 말 해도 어떨런지 모르겠지만...
나 암 다 나았어..."

"아니... 주치의가 그래???
지난번 근무력증으로 입원해 있을 때 검사 해 본 거야?
정말 그렇대?..."

나는 이게 무슨 말인가 했다.
이제껏 나만 혼자서 가슴 졸여 왔던게 아닌가 했다.

"검사 안 했어...
검사는 해보나마나야...
암세포가 다 없어져서 나타나지 않을텐데 뭐..."

"그게 무슨 얘기야?..."

"...으응. 당신이 어떻게 생각할 지 모르겠는데...
조 목사님이 우리집으로 마지막 예배 인도하러 오셨을 때
그날 나 성령의 은사 받았어..."

"...???..."

나는 이게 웬 뚱딴지같은 소린가 했다.
도대체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딱히 뭐라고 대꾸하거나 물어 볼 말도 생각나지 않는다.
한참을 잠자코 있었다. 혜숙이 말을 잇는다.

"그날 밤에 자는데...
하나님의 성스런 형상이 나타나셨어...
나를 환하게 바라보시더니
'여인아! 이제 네 뱃속이 깨끗해지고 네 몸 속에 병이 다 나았으니 걱정하지 마라'
그러시더라구...
내 직업이 약사이다보니 전문적인 지식이 있어선지...
처음에는 선뜻 믿어지지가 않았어...
뭘 좀 안다고...
암이란 게 그런 식으로 금방 낳을 병도 아닐꺼고
또 과학적으로도 5 년 동안을 살펴 보아야 하는 거라서 믿어 지지가 않았던 거야...
그래서 내가 하나님께 말씀드렸어.
'아직은 그렇게 안심할 때가 아니고...
더 열심히 치료하고 기도하면서 기다려야 되는데요?'
그랬더니 성스러운 형상이신 하나님께서
내 배를 십자가 모양으로 쫘악 열어 보여 주시더니
'보아라! 네 몸 속에 암세포가 다 없어지고 깨끗하게 낫지 않았느냐'
하시는 거야...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해 보니까 정말로 암세포가 깨끗하게 없어진 거야.
그 순간 나는 그 발 앞에 얼른 무릎 꿇고 엎드려서 감사 기도를 드렸어...
바로 그 다음날부터 당장 배가 고파져서 마악 먹기 시작한 거야..."

"그게 벌써 언제 적인데...
1 년 반도 넘었잖아? 그 얘길 왜 이제서야 해?"

"그렇다고 떠벌리고 다닐 수도 없잖아...
직업이 약사라는 사람이 별 허튼소리 다 한다는 사람도 있을꺼구...
암으로 죽어가는 사람이 갖게 되는 심리 상태에서
자기 병을 거부하고 부정하는 단계에서 나오는 소리일 꺼라는 사람도 있을 꺼구..."

"아무리 그렇더라고 그렇지... 나한테는..."

"당신도 그랬을 꺼 아냐. 암 환자의 심리일 꺼라구...
괜히 말 해놓고 상대방이 그런 의아심을 가지면 나만 모자라는 사람이 되고 바보가 되잖아...
지금 당신한테 이 말 하면서도 좀 찝찝해...
괜히 했나 싶구..."

"당신 무슨 말을 그렇게 해?"

"나 이런 말... 5 년 지난 다음에 할려구 그랬어...
병 다 낫고 난 다음에 당당하고 떳떳하게...
그동안 하나님과 나만 알고 아무에게도 말 안 할려구 했어...
괜히 바보 병신 취급 받을 게 싫기도 해서지만...
한편으로는 하나님과 나만 아는 비밀을 다른 사람들한테 말 하기 싫었던 거야.
왜 천기를 누설하면 그 벌을 다시 받는다고 그러잖아.
그래서 좀 찝찝한 거야..."

"하나님과 당신만 알면 그게 무슨 소용 있어?
성경에는 하나님의 은총을 찬양하고 찬양하라 했어.
오히려 만천하 만백성에게 알리고 널리 간증해야 옳은 거지."

"그러잖아도 5 년 되는 날, 우리 교회에서 간증할려고 그래...
목사님의 안수로 성령의 은사를 받고 병고침 받은 거라고.
당신도 5 년 될 때까지 다른 사람들한테 이런 말 하지 말고 있었으면 좋겠어..."

그래서였던가?
나는 마음 한 구석에 혜숙이 2 년을 넘길 수 있을려나...
5 년을 넘길 수 있을려나... 하는 불안과 공포를 늘 안고 살았다.

위를 잘라 내고 비장과 췌장, 흉선까지도 잘라 낸 혜숙이
과연 얼마를 더 살 수 있을까 저으기 염려되었다.

하지만 혜숙은 언뜻언뜻 암으로는 죽지 않는다는 자신감이
내면 깊숙히 있었던 것 같다.

암은 이미 다 나았다는 확신과 여유가
늘 마음 속에 차 있었던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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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 다시 찾은 세민약국

 

 

실제로 혜숙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성령의 은사를 받아
암세포가 완전히 없어지고 깨끗하게 병 고침을 받았다고 믿었다.

의심의 여지없이 확신하고 있었다.
나도 마음 속으로 점점 믿음이 생겼다.

언뜻언뜻 마음 한구석에 불안한 감이 없지 않았지만 점점 자신감이 더해 갔다.
확신하는 마음으로 굳어져 갔다.

교회에서는 한달이 시작되는 첫째 주일마다
'박혜숙 권사의 건강을 위한 특별 기도회'를 갖었다.

낮 예배를 마치고 조승혁 담임 목사님의 인도로
전 교인이 다함께 참여하는 기도회다.

나는 1989 년 2 월
감리교 서울 종로지방회에서 장로로 안수 받았다.

기도회는 혜숙이 수술한 지 5 년 되는 날까지
무려 5 년을 작정하고 계속해 갔다.

혜숙은 별탈없이 건강을 유지해 갔다.
몸무게도 점점 늘어 50 Kg 까지 올라 가기도 했다.
우리는 주말마다 여행을 계속했다.

수술한 지 4 년 반 쯤 지나자
혜숙은 약국을 운영하고 싶어 했다.
약국을 다시 차려 달라고 내게 졸라댔다.

1991 년 가을 추석 무렵
그로부터 4 년 여 전에 넘겼던 세민약국을 다시 찾았다.
혜숙은 전에 없던 열성으로 신명나게 일했다.

매일 아침 8 시에 셔터문을 열고 밤 10 시에 문을 닫는다.
상담하러 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정성으로 들어 준다.

동네 사람들의 상담역인 혜숙은 동네 사람들을
종우 엄마, 재헌이 아빠, 재경이 할머니라 부르면서 스스럼 없이 대한다.

동네 분들도 혜숙이 암을 이겨 내고
다시 약국을 차리게 된 것을 다행스럽고 고맙게 여긴다.



손님을 대하는 자세와 태도 역시 그 전과는 사뭇 달라졌다.
이제 거듭난 삶으로, 새로운 삶으로 혜숙은 프로 약사가 되고 싶어 했다.

약사라는 직업을 통해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사를
혜숙은 주위 분들에게 돌려 주어야 한다고 여겼다.

오고가는 사람들에게
박카스랄지 드링크제를 대접하는 인심도 후해 졌다.

생활이 어려운 이들이나 할머니 할아버지들께는
돈을 받지 않고 약도 그냥 잘 지어 준다.

학문적인 노력에도 열심이었다.
자연 건강법과 한약에도 관심을 쏟았다.

일주일에 3 일은 새벽 5 시부터 8 시까지
한약학을 배우러 다녔다.

새로운 의학 지식을 익히느라 열심이고
새로운 삶에 대한 감사와
일에 대한 열정이 남달랐다.

 

 

 

102. "사랑이 뭐길래"

 

 

약국을 다시 시작한 지 한 달 쯤 지나서다.
손님들이 몰려 들고 혜숙은 눈코 뜰새없이 바쁘다.
하루 매상도 예전에 비해서 꽤나 많다.

MBC 텔레비전에서 제의가 들어 왔다.
일반적으로 텔레비전을 많이 보게 되는 가을에서 다음 해 봄까지
시청율을 높이기 위해서 프로그램을 개편한단다.

이 때 텔레비전 회사마다 사운을 걸고 프로그램 경쟁을 하게 되는데
MBC 에서 주말 드라마 프로그램으로 큰 야심을 갖고 기획하는 작품이 있단다.

그 작품의 일부를 세민약국에서 촬영하고 싶은데 허락해 줄 수 있겠느냐는 거다.
촬영은 언제쯤인지... 시간은 얼마나 걸리는지 물었다.

일주일에 2 회를 촬영하게 되고 1 회분 촬영에 소요되는 시간은 일정하지 않다고 했다.
최소한 6 개월 동안은 계속해야 하고 사정에 따라서는 몇 달 더 연장될 수 있단다.

촬영할 때마다 두 시간 이내로 끝나면 사용료로 5 만 원을
두 시간이 넘으면 10 만 원을 지불한단다.

우리는 쾌히 승락했다.
처음에는 무슨 내용을 촬영하려고 그러나 했다.

방영이 시작되고 보니 MBC 주말 연속극 "사랑이 뭐길래"다.
줄거리 가운데 탤런트 최민수가 대발이 역으로 등장하고
그 상대역으로 하희라가 출연한다.

대발이 부모 역으로 이순재와 김혜자가,
처제 역으로 신애라가 약국을 운영하는 친구의 관리 약사 신분으로 등장한다.

이 대목에서 등장하는 약국 장면을
우리 세민약국에서 촬영하겠다는 거다.

약국 장면의 주요 등장 인물인 신애라를 비롯해서
윤여정, 여운계, 강부자, 사미자, 이재룡, 김찬우 등등
탤런트들이 일주일에 두 번씩 세민약국에서 촬영을 한다.

촬영이 있는 날이면 약국 앞 네거리는
그야말로 인산인해를 이룰 정도였다.

더우기 MBC 에서 사운을 걸고 기획한 작품인만큼
이 드라마는 우리 나라 TV 역사상 전무할 정도로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하는 공전의 화제작이 되었다.

"사랑이 뭐길래"가 방영되는 날은 길가에 행인들의 발길도 뚝 끊길 정도였다.
인기 있는 스포츠 중계보다도 더 높은 시청률을 보였다.

시청률이 가히 폭발적으로 올라 가면서
세민약국은 인근 일대에서 유명한 명소가 되었다.

지금까지도 인근에서는
"여기가 '사랑이 뭐길래'를 촬영했던 세민약국" 이라며 구전되어 전해 지고 있다.

 

▲ 문화방송 주말연속극 "사랑이 뭐길래"에서 약사 역 신애라

 

생각지도 않던 뜻밖의 상황도 더러 벌어졌다. 
제약회사마다 비상이 걸린 것이다. 

TV 에서 자주 비춰 지는 약품 진열장 부근에 자기 회사 제품을 진열해 달라면서 
광고비 댓가로 2 백 만 원을 주겠다 3 백 만 원을 주겠다 하는 등으로 
치열하게 경쟁하며 혜숙에게 달려 들었다. 

우리는 상황이 이렇게까지 진행될지 
전혀 예상치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무척 당황했다. 

처음에는 그래도 되는 건지 판단이 서지 않아 정중하게 사양했다. 
그러면 그럴수록 각 제약회사 광고부에서는 더욱 안달이 나는지 
액수를 더 크게 올려주겠다고 난리다. 

특히 경쟁 업체끼리 서로 치열하게 다투며 대드는 모습은 
그야말로 가관이었다. 

멀쩡하게 진열되어 있는 약품들을 
자기 회사 제품으로 바꿔 놓지 않을려면 공평하게 치우라는 거다. 

 

MBC 본사에도 이런 내용의 터무니없는 항의가 빗발쳐 들어오는 바람에
너무 선명하게 비치는 약품은 회사와 제품명을 종이로 가리기도 하고
자주 비칠 수밖에 없는 약품들은 어느 회사 제품인지 시청자가 느끼지 못하도록
흐릿하게 촬영하느라 애를 먹어야 했다.

참으로 복에 겨운 시달림이었다.
다시 찾아 시작하자마자 세민약국은 예상치 못한 행운이 따르고 있던 것이다.

우리는 뭔지 모르게 이제 고통과 고난의 짐을 벗고 앞으로
하나님의 축복과 은총이 따르는 게 아닌가 여겨지면서 희망과 기대를 갖게 되었다.

혜숙은 피곤한 줄 모르고
하루하루를 더욱더 신명나게 살아 간다.

 

 

 

103. 암으로부터 해방되던 날

 

 

암 수술을 받은 지 이제 만 5 년이 되었다.
생존 가망성 15 퍼센트 뒤집어 말하면 십중팔구에 해당하는

85 퍼센트는 사망한다는 의학적 생존율...

5 년이 지나면 암에서 해방된 것으로 본다는 바로 그 5 년을
기적같이 살아서 맞이하는 날이 온 것이다.

혜숙은 이제 성령의 은사로 뿐만 아니라
의학적으로, 과학적으로 온전히 암에서 해방된 것이다.

1992 년 4 월 첫째 주일
나는 혜숙의 가까운 친구들을 교회로 초청했다.

김근태의 부인 인재근(국회의원) 여사,
조성우(민화협 사무총장)의 부인 홍현실 선생
실천문학사 대표를 맡고 있던 이석표의 부인 이희순 여사
한국기독교장로회 소속 임희일 목사 등이 참석했다.

앞서도 말했거나와 교회에서는 지난 5 년 동안 모든 교우들이 합심해서
매 월 첫째 주일마다 빠짐없이 혜숙의 건강을 위한 특별 기도회를 가져 왔다.

조승혁 목사님을 비롯한 모든 교인들은 지나간 5 년 동안 다함께 합심해서
간절한 마음으로 드린 기도를 하나님께서 받아 들이시고 응답하시어서
건강하게 지켜 주신 은총에 감사하는 특별 예배를 드렸다.

혜숙은 이 날 5 년 동안의 투병 생활과 파란만장했던 체험들을 특별 간증으로 발표했다.
나는 혜숙이 무슨 말을 어떻게 할까 궁금했다.
간증 설교문을 준비하는 것 같았지만 혜숙은 나에게 보이고 싶지 않아 했다.

무슨 천기라도 누설하는 것인양 내가 낌새라도 차릴새라 굳이 감추려 들었다.
혜숙이 그러는 눈치인데 내 쪽에서 굳이 좀 보자고 하기도 민망스러웠다.

나름대로 계면쩍기도 했겠고
기도 중에 하나님과 단 둘이서 다짐한 내용들도 있을 터였다.

혜숙이 강단에 올라 서자 나는 한가롭게 궁금할새 없이 온 몸으로 긴장감이 몰려 왔다.
아마도 예배에 참석했던 이들 모두 그랬던 듯 싶다.

혜숙은 처음에 차분한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그러더니 차츰차츰 목이 메여 갔다.

점점 울먹이더니 눈물을 흘리며 간증을 했다.
초청된 친구들은 연신 손수건으로 흐르는 눈물을 닦아 내느라 바쁘다.

교인들도 모두 감동과 감사의 눈물을 흘린다.
지나간 일들이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친다.

감옥에서 출소하자마자 혜숙이 위암으로 쓰러져 있다.
그 와중에서 각계각층의 분들을 모시고 어머니의 고희연을 차려 올린다.

선후배 동료들의 관심과 위로...

광주로 끌려가 자연 건강 훈련을 받는다.
경제적인 곤란까지 겹쳐 맨손으로 인쇄소 골목에 뛰어 든다.

혜숙은 점점 죽음의 문턱으로 다가간다.
부채를 갚고 사업체를 세워 낸다.
집을 헐고 새로 짓는다.

병마가 다시 찾아 오고 혜숙은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 나온다.
약국을 되찾고 삶을 다시 시작한다.

이제 혜숙이 생명을 완전히 되살리고
눈물을 흘리며 감동어린 간증을 하고 있다......

그 날로 우리 교회에서는
'박혜숙 권사의 건강을 위한 특별기로회'를 5 년 만에 마감했다.

조승혁 목사님은 마지막 예배라고 생각하고 우리 집에서

혜숙을 위해 안수 기도 드릴 때 말할 수 없는 통증을 느꼈다고 했다.

특히 배와 등뼈에 견디기 힘든 통증이 순간적으로 전해져 오더라는 것이다.
그리고는 신열로 몸살을 앓듯 온몸으로 땀이 철철 흐르더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박혜숙 권사가 간증으로 밝혔듯이 성령이 임하셔서 암세포를 내쫓고
몸의 병을 깨끗이 치유하는 은사에서 나타나는 현상이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총이 조 목사님을 통해서 박혜숙 권사에게 나타나
병 고침을 받은 것이 분명하다고 했다.

조승혁 목사님은 조화순 조지송 목사님과 함께
산업 현장, 노동 현장에 직접 뛰어 들어 선교 활동을 한 분으로 유명하다.

한국 교회가 노동 운동에 관심을 가지고
참여하도록 이끌어 온 장본인이다.

조 목사님의 산업 선교, 노동 선교 활동은 한국교회사에 중요한 획을 긋고
분기를 이루는 역할로 평가되면서 기록되어 있다.

조승혁 목사님은 혜숙에게 간증 집회를 같이 다니자고 제안했다.
그 후로 혜숙은 종종 암 환자를 위한 기도회에 조 목사님을 따라다니며 간증을 했다.

때로는 혜숙이 여러 교회들에서 초청을 받아
간증 예배 설교를 맡기도 했다.

암으로부터 해방되던 날...
그 날은 온전히 하나님의 은총으로
생명의 소생함을 얻은 혜숙을 위한 날이었다.

특별한 음식을 마련하고
온 교인들이 다함께 감사의 잔치를 벌였다.

목사님과 교인들. 혜숙의 친구들에게 나는 거듭거듭 감사의 인사를 드리면서
하루를 마음껏 축제와 감사의 날로 보냈다.

이제 혜숙이 그날 밝혔던 간증 내용과
그 후 여러 교회들로부터 초청을 받아 간증한 내용을 정리해서 여기에 덧붙인다.

 

 

 

104. 간증 ㅡ 하나님의 은총으로 / 박혜숙

 

 

(1) 먼저 드리는 말씀

오늘 본 교회 목사님을 비롯한 여러 성도님들을 만나 뵙도록 인도해 주신
하나님께 우선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특별히 제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신앙 체험을 귀한 예배 시간을 통해서

간증할 수 있도록 허락하신 목사님과 성도 여러분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저는 3 기에서 말기로 진행 중이던 위암과 중증 근무력증에 따른 호흡 마비 증세로
두 번을 죽음의 문턱에까지 갔었습니다.

지금도 그 당시 일을 되돌아 볼 때마다 죽음의 사선을 넘고 소생의 길로 들어 서서
이처럼 건강한 몸으로 여러 성도님들 앞에서 간증할 수 있게 된 것을
저는 오로지 하나님의 은총이라고 믿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별로 내세울 것도 없이 평범하게 살아 가는 저에게
귀한 은사를 세 번이나 내려 주셨습니다.
그리고 한 번은 마귀의 형상이 나타나서 저를 혹독하게 시험하고 갔습니다.

처음에 하나님은 달콤하고 산뜻한 향내음으로 제게 향기로운 은사를 주셨습니다.
그러자마자 샘을 내고 시기해서인지 시멘트못 형상을 한 마귀가 나타나서
저를 혹독한 시험에 빠뜨립니다.

다음으로 위암 수술을 받고 죽음의 문턱에 들어 선 제게
하나님의 형상이 나타나셔서 암세포를 깨끗이 씻어 내 주십니다.

그리고 제가 호흡마비 증세로 중환자실에 입원해서
차라리 죽음의 사신을 달콤하게 그리워하고 있을 때
예수님의 형상이 나타나서 저를 천국 가는 길로 인도해 주십니다.

저는 오늘 이 시간 하나님의 은사가 과연 어떤 모양으로
어떤 형상으로 우리에게 나타나 보이시고
한편 마귀는 어떤 형상과 모양을 띠고
우리를 시험하고 있는가 하는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저의 신앙 체험을 바탕으로 성도 여러분께 간증드릴 때
다함께 은혜 받는 귀한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신앙을 가지게 된 배경

우선 먼저 제가 신앙을 갖게 된 배경에 대해서 잠깐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본래 유교를 지키는 집안에서 태어나고 자랐습니다.

그러다가 기독교 계통인 정신여중에 다니게 되었는데
그때 다른 학생들은 별로 좋아하지 않던 성경과목을 저는 참으로 흥미있어 했고 좋아했습니다.

성경 구절 암송대회. 성경 퀴즈대회에 나가서 상도 많이 받았습니다.
감수성이 한창 예민할 때여서인지 정서적으로 기독교 신앙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고등학교는 공립학교인 경기여고를 다녔는데
그때 저는 성경 과목이 없는 것을 무척 아쉬워했습니다.

1972 년 이화여대 약대에 입학하자마자
저는 대학생들 사이에서 일반적으로 KSCF 라고 불리는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에 가입해서 활동했습니다.

이 단체는 당시 전국적으로 거의 모든 대학에서
활동하고 있던 기독학생회 모임의 연맹체입니다.

요즘에는 대학마다 기독학생회 단체가 여러 성격으로 나뉘어 있습니다만
그 당시에는 한국 기독교계 단체와 지도자 그리고 기독학생들이 학원 사회에서까지도
교파와 교권으로 분열되어서는 안 되겠다고 의논하고 합의해서 다함께 통합하기로 결의했습니다.

그래서 YMCA와 YWCA에서 대학생부를 없애고
기존의 기독학생회와 더불어 초교파적 통합체로 KSCF를 구성한 것입니다.

제가 대학에 입학하던 1972 년 가을에 계엄령이 선포되고 유신헌법이 제정되었습니다.
그 때, 대학 사회는 물론 온 나라 전체가 두려움과 공포 분위기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지식인들은 물론 온 국민들도 잔뜩 겁을 먹고 있었습니다.
이때 우리 기독교계 목사님들과 교수님들이 독재 권력을 우상화하고 신격화하는 데
앞장서서 반대하고 나섰습니다.

한국 사회에 합리적이고 양심적인 지식인들 가운데 특히 우리 기독교계 인사들이
제일 강건하게 비판하고 저항해서 수많은 분들이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하지만 이런 신앙적 결단과 행동으로 말미암아 유신체제는 결국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한국 교회가 이처럼 우리 사회의 민주화에 큰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 역시
저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대적 정치사회적 배경 속에서 저는 기독학생회 활동을 하다가 목사님과 교수님을 비롯한
여러 동료 대학생들과 함께 1974 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되었습니다.

여학생의 몸으로 저는 100 여 일 동안 남산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혹독한 조사를 받고

서대문 구치소에 갇혔습니다.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 부회장으로 활동하면서 여기 앉아 계신 최민화 장로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결혼하기 전에 3년 동안 민주화 운동을 함께 하고 서로 사귀기도 하면서 학교를 다녔습니다.

그 사이에 최 장로님은 민주화 운동과 관련해서 두 차례 구속되었습니다.
졸업 후에 결혼하고서부터는 장로님을 따라 서울 회원교회에 다녔습니다.

장로님은 결혼 후에도 두 번을 더 감옥에 가게 되어서 첫 애 낳을 때만 제 곁에 있었고
둘째 셋째 애는 남편이 감옥에 있는 동안에 낳았습니다.


(3) 향기로 주신 첫 번째 은사

저는 졸업과 함께 결혼하자마자 약국을 개업했습니다.
그러다보니 경험도 없고 실력도 모자라서 제대로 감당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1 년 여 만에 약국을 정리하고 종로 5 가에 있는 대형 약국과 제약회사에 다니면서
3 년 여 동안 경험을 쌓고 모자라는 실력도 키워 나갔습니다.

그러다가 이제는 어느 정도 감당할 수 있겠다 싶어서
1984 년에 다시 개업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 고등학교와 대학 동창으로 믿음이 돈독하고 절친한 친구가 있었는데
제가 약국을 다시 개업한다니까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고 시작하라고 권면했습니다.

저는 친구를 따라 처음으로 순복음교회 기도원에 가서
하나님께 간절한 기도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친구의 안내로 시무하시는 목사님께 특별 안수 기도를 받았는데
저는 그때 이상한 향내에 도취되었습니다.

아카시아향 같기도 하고 박하사탕에서 나는 향내 같기도 한데
달콤하고 생그러운 맛과 산뜻한 향내음이 제 코에 스며드는 것이었습니다.

순간적으로 저는 '순복음교회 목사님들은 박하사탕이나 껌을
입에 물고 기도해 주시나보다' 하고 생각했습니다.

집으로 돌아 와서 저는 기도원에서 지낸 일들을 시어머님께 말씀드렸습니다.
제 시어머님은 경건하신 초대교회 목사님의 따님으로 신앙심이 깊고 돈독하신 분입니다.

어머니께서는 함께 안수 받은 제 친구는 그 향내를 맡지 못했을 수도 있었을 꺼라면서
한번 확인해 보라고 하셨습니다.

그 친구는 제 곁에 바로 붙어 있었는데도 향내를 전혀 맡지 못했다고 합니다.
어머니께서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사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선택하고 저에게만 내리신 특별한 은사라는 겁니다.
은사를 받고 나면 마귀가 샘을 내고 시기해서 시험에 드는 수가 있으니 조심하고
더욱 열심히 기도하라 하십니다.

어머님의 말씀을 듣는 순간 저는 온 몸이 떨려 왔습니다.
성령이 역사하시는구나 하고 느끼면서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연약하고 보잘 것 없는 저를 택하셔서
은총을 허락하시니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 제게 내리신 사명으로 믿고 열심히 살겠습니다.
약사라는 전문직을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증거하라는
계시임을 믿고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4) 마귀의 시험

며칠 후에 정말로 마귀가 찾아 왔습니다.
어머님의 말씀대로 어김없이 찾아 온 것입니다.

그 당시 저희 집은 한옥이었습니다.
곤하게 자고 있는데 시멘트못 형상을 한 마귀가 대청마루 유리창을 통해서

방으로 마구 쳐들어 오더니 제 오른팔에 무수히 꽂힙니다.

저는 어머님 말씀을 듣고 어느 정도 대비하고 있었지만
막상 당하고 보니 기도가 입으로 터져 나오지 않았습니다.

저는 다급하고 초조한 마음에 주기도문을 외우고 또 외쳤습니다.

외치면서 입으로 악악거리고 토해 내자
오른팔에 박힌 시멘트못 형상이 하나 둘 빠져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아! 이것이 바로 마귀의 형상이로구나!
겁내지 말고 물리쳐 이겨 내야지!'

용기를 내고 희열을 느끼며 열심히 소리쳐 기도하니까
마귀들이 거의 다 빠져 나갑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마지막 남은 하나가
미처 빠져 나가지 못하고 있을 때 대문에서 벨소리가 울립니다.

깨어 일어나 대문을 열어 보니 남편이 들어 옵니다.
그 바람에 저는 이 하나를 미처 뽑아 내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제게 은총을 내리시어
사랑을 베풀고 계시다는 것을 보여 주신 겁니다.

또한 이를 믿고 매사에 항상 하나님을 섬기고
경외하라는 메시지요 계시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얼마 후 저는 이 메시지를 잊어버리고
세상 일에 매달려 아둥바둥 살아갔습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경외하는 생활을 소홀히 한 것입니다.


(5) 위암 수술

어리석은 저는 제가 스스로 잘나고 유능해서
약국 운영도 잘 되는 줄 알고 교만을 떨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저에게 계속 메시지를 보내셨습니다.

1987 년 제 나이 34 살 때 일입니다.
그 당시 남편은 네 번째로 감옥에 갇혀 집에 없었습니다.

제 몸은 점점 말라가고 얼굴은 핏기없는 색으로 변해 갑니다.
온몸으로 통증이 몰려 옵니다.
척추가 부러질 것 같은 통증을 견딜 수 없어 등과 가슴에 파스를 더덕더덕 붙입니다.

진통제 약을 집어 먹고 영양 주사를 맞으면서
남편이 감옥에서 출소할 날만 기다렸습니다.

남편이 얼마 안 있으면 만기 출소하니까
그때까지만 참고 기다리자고 이를 악물었습니다.

하지만 남편이 출소하기 보름 전인 1987 년 3 월 말에
저는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통증이 너무 심해 마구 뒹굴었습니다.
친정 오라버니와 여동생이 달려 들어 억지로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습니다.

초록색 수술복으로 갈아 입고 수술용 침대 위에 누어 있는데
저는 이 환한 세상을 과연 다시 볼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에 온몸이 떨려 왔습니다.

저는 눈을 감고 하나님께 두려움을 떨치고
이겨 낼 수 있는 용기를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마음 속으로 찬송가를 불렀습니다.
'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 십자가 짐같은 고생이나...' 찬송가 364 장 입니다.

십자가를 진 고생의 길이 아니라 주님께 좀 더 가까이 가고
주님을 가까이 느끼기 위해서 부른 것입니다.

저는 무슨 수술을 받는 건지 잘 몰랐습니다.
그저 위궤양이 심해서 위를 좀 잘라 내야 하는 것인 줄로만 알았습니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은 제가 위암 말기 상태로
수술이나 제대로 받을 수 있겠는지 염려하고 있었습니다.
앞으로 3 개월에서 6 개월 정도밖에 못 살꺼라고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보름 후에 남편이 감옥에서 출소했습니다.
저는 주치의를 만나 본 남편을 통해서

제가 위암 3 기에서 말기로 진행하는 중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암 세포가 이미 위 전체로 다 퍼져 있고
위 주변의 임파선까지 전이되어 있는 상태였다는 겁니다.

수술을 해도 별 소용이 없거나
수술 자체가 아예 불가능할 지도 모를 상태였다는 겁니다.

그나마라도 부탁하고 사정해서 위를 다 잘라 내고
위에 가까이 붙어 있는 비장과 췌장도 일부를 잘라 냈다고 합니다.


(6) 십중팔구는 죽을 병

암에 걸렸을 때 죽지 않고 살아날 수 있는 가망성을 의학적으로 5 년 생존율이라고 하는데
제 경우에는 5 년 생존율이 15 퍼센트 정도라고 합니다.

바꾸어 말하면 제가 살아날 수 있는 가망성은 15 퍼센트, 죽을 확율이 85 퍼센트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십중팔구는 죽을 꺼라는 얘깁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저는 실감이 나지 않았습니다.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당시 서른 네 살의 젊은 여자, 세 아이의 엄마...
막내는 아직 첫돌이 마악 지난 상태였는데...
죽으리라는 생각조차 하기를 거부했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항암제와 방사선 치료를 받으면서 직업이 약사인 저는

과학적 현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머리카락이 뭉텅뭉텅 빠져 버립니다.
얼굴이며 살갖은 핏기와 탄력을 잃고 누렇게 변합니다.

온 몸은 앙상하게 뼈가죽만 남고
앉아 있기조차 힘듭니다.

빨갛고 시퍼런 항암제 주사를 맞고 있자니
그것이 바로 제 생명의 줄을 쥐고 있는 하나님입니다.

방사선 치료를 받기 위해 기계 밑에 누어 있으면
그 빛이 바로 하나님이었습니다.

위에 붙어 있는 횡경막이 없다보니까
창자에 있는 분비물이 목으로 코로 사정없이 넘어 옵니다.

이렇게 넘어 올라 오는 쓰디쓴 쓸개액과 침액과 구토물로
저는 고통을 못 이겨 몸부림쳐야 했습니다.

식도와 코는 망가지고 헐고 진물이 나서 얼마나 쓰라리고 아프던지
방바닥에 마구 뒹굴어야 했습니다.

수술 후 석 달 가량을
저는 거의 아무것도 먹지를 못했습니다.

주치의는 체중이 34 kg 이하로 떨어지면 위험하니까
죽음을 준비하고 있으라고 제 남편에게 말했습니다.

체중이 34 kg 으로 떨어집니다.
남편과 가족이 거의 반 쯤은 포기하고 준비합니다.
저 역시 살기를 제 생명을 반 쯤 포기합니다.

이제 끝이로구나...
이렇게 살다가 가는 것이로구나...
참 별것도 아닌데 아귀다툼하고 살았구나...
단지 남은 가족보다, 다른 사람들보다 좀 먼저 갈 뿐인데...
하는 생각에 빠집니다.

숨이 멈출 때까지 그저 무력하게
남아 있는 숨만 쉬고 누어 있습니다.


(7) 뜨거운 안수 기도

이 때 교회 담임 목사님과 교인들이
마지막 심방으로 여기고 찾아 와 주셨습니다.

목사님이 우리집 대문으로 들어서자마자
저는 일어나 앉았습니다.

이제 깨어 있는 정신으로 마지막 보게 될 교인들과 목사님 앞에서
저는 눈물 콧물 할 것 없이 줄줄 흘리면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목사님께서는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온몸에 땀을 흠뻑 흘리시면서
저를 위해 뜨거운 안수 기도를 해 주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왜 이 여인을 데려 가시려는 겁니까?
오랜 세월 한국 사회의 민주적 발전을 열망하며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의로운 길을 걸어 온 이 여인이
왜 민주화 되는 세상, 좋은 세상을 못 보고
이다지도 고통스럽게 죽어야 하는 겁니까?...
하나님 아버지시여! 이 나라 이 백성을 위해서
고난과 역경을 감당해 온 남편을 뒷바라지 하고
어려운 동료들을 보살펴 온 당신의 귀하고 의로운 따님을
주님! 데려 가시면 안 됩니다...
앞으로도 주님을 위해서 해야 할 소중한 일들이
많이 남아 있사오니, 할 일 많은 이 여인을
주님! 살려 주시옵소서...
하나님 아버지!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꼭 살려 주셔야 합니다.
주여! 살려 주시옵소서......"

교인들도 모두 합심해서 통성으로 울부짖고 통곡하며
보잘 것 없는 저의 생명을 위해서 간구해 주셨습니다.

목사님께서는 안수 기도 중에
온몸으로 심한 통증을 느끼셨다고 하십니다.

통증을 견디다 못 해
기도 소리가 더욱 더 커졌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이 때 제 가슴 속에서
'죽으면 죽으리라...' '죽으면 죽으리라...'

하는 말씀이 뜨겁게 전해져 옵니다.

'죽으면 죽으리라...' 이 말씀으로 말미암아
불안과 초조가 서서히 걷히고 마음이 평온해 집니다.
숨쉬기가 훨씬 수월해 지기 시작합니다.

목사님과 교인들이 다녀 가신 그 다음날부터
제 몸에서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배고프다'는 신호가 위에서 뇌로 전달되는 겁니다.
먹고 싶다는 의욕이 마구 솟구치는 겁니다.

저는 이때부터 음식을 먹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먹은 것을 도로 토해 내기 바빴지만 저는 토해도 먹고, 먹고 토하기를 반복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저의 교만함과 방자함을...
인간적인 사리사욕을 하나님께 회개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제까지 저지른 허물들을 수첩에 일일이 적어 가며
회개 기도를 시작한 것입니다.


(8) 두 번째 은사 ㅡ 성스러운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을 진정으로 경외하며 회개 기도를 드린 지 닷새 후에
하나님께서는 저에게 다시 나타나셔서 기적을 보여 주셨습니다.

깊은 잠에 들어 있는데 하나님의 성스러운 형상이 제게로 다가 오십니다.
측은한 모습으로 저를 내려다 보십니다.

그리고는
"여인아! 이제 네 뱃속이 깨끗해 지고 네 몸속에 병이 다 나았으니 걱정하지 마라"
하십니다.

저는 약사로서 전문 지식이 있어선지

의심 많은 도마처럼 믿지를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아직은 그럴 때가 아니고 더 열심히 치료하고 노력하면서 기다려야 하는데요?"
하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랬더니 성스러운 하나님 형상께서는
"여인아! 내가 네 배를 열어 보여 주리라"
하시면서 제 배를 십자가 모양으로 갈라서 열어 보여 주시는 겁니다.

그리고는 "보아라! 네 몸 속에 암세포가 없어지고

깨끗하게 다 낫지 않았느냐" 하십니다.

제 눈으로 직접 보니까 정말로 깨끗했습니다.
암세포가 깨끗하게 없어진 겁니다.

저는 그 발 앞에 얼른 무릎 꿇고 엎드려 감사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 후로 저는 감사하는 기도 생활을 계속했습니다.

화장실에서도 꿈속에서도 저는 마냥 즐거웠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몸 안에 모시고 하나님과 함께 생활하는 저는 갓난 어린아이처럼 마냥 즐거웠습니다.

매일매일 찬송을 부르고 하나님을 찬양하며 기도하는 생활에 매달렸습니다.
그리고 저는 암으로는 절대로 죽지 않을 꺼라는 믿음과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9) 견딜 수 없는 고통 ㅡ 중증근무력증

그 후로 저는 찬송과 기도와 감사의 생활로 1 년 여를 보냈습니다.
하지만 저에게는 또 한번의 혹독한 시련이 남아 있었습니다.

의학적으로 설명 드리자면 위와 비장, 췌장을 잘라 내고
항암제와 방사선 치료 등으로 몸이 허약할대로 허약해 진 상태에서
저는 중증근무력증에 걸리게 되고 그로 인해서 호흡이 마비되는 증세가 온 것입니다.

근무력증은 세포와 세포를 이어주는 신경이 마비되는 병입니다.
의식은 있어도 몸 전체가 마비되는 병입니다.
심한 경우 호흡이 마비되면 순식간에 사망으로 이어지는 무서운 병입니다.

저는 가슴 부위가 마비되어 제 힘으로는 숨도 쉴 수 없었습니다.
병원 중환자실 산소호흡기에 의지해서 1 달 여 동안 있었습니다.

항암 치료로 피가 혼탁해져서 대 여섯 차례에 걸쳐
온 몸의 피를 걸러 내야 했습니다.

앞 가슴 갈비뼈를 톱으로 절단해서 쫘악 벌려 놓고
그 안에 있는 흉선을 제거하고는 다시 갈비뼈를 붙이는 대수술을 받았습니다.

맥박이 30 ~ 40 까지 떨어지고
쇼크로 사망할 뻔하기도 했습니다.

제 몸에는 기관지를 절제해서 기계 호흡에 사용하는 줄,
소변 줄 등등... 호스 줄이 8 개나 달려 있었습니다.

저는 참으로 너무나 견딜 수 없고 고통스러워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드렸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어찌하여 저에게
이처럼 견딜 수 없는 고통을 주시나이까?
저는 도저히 더 이상 견딜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정말로 저를 위하고 아끼신다면
제가 잠들어 있을 때, 영원히 이 눈을 뜨지 말고 잠들 수 있도록 도와 주옵소서...
저를 제발 평안한 마음으로 주님의 곁에 갈 수 있도록 인도해 주옵소서..."

내일이면 이 중환자실의 기계들을 보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통증에서 빨리 벗어 나게 해 달라고 매달렸습니다.
하루 빨리 하나님의 품에 안기게 해 달라고 애원했습니다.


(10) 세 번째 은사 ㅡ 예수님의 형상과 천국 가는 길

그러던 어느 날 예수님의 형상이 다시 나타나셨습니다.

사진에서 늘 보았던 거룩하고 밝은 모습이 아니라
"저 여인을 어찌해야 하나..."

 하고 고뇌하면서 애처러워 하는 표정이었습니다.

"이제 내 힘으로는 안 되는데...
어떻게 하면 편안하게 해 줄까?..."
하는 모습... 안타깝고 불쌍해 하는 모습으로 저를 부르십니다.

"혜숙아~~~!!! 이제 나랑 같이 가자~~~"

저는 아무런 주저 없이 따라 갔습니다.
금보라빛으로 덮힌 그 길은 참으로 고즈넉했습니다.

그 길을 끝까지 따라 갔습니다.
마지막 끝에 계단과 문이 있습니다.

이제 이 문으로 들어서기만 하면
천국으로 가는 거로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순간...
집에 있을 아이들 생각이 뇌리를 스칩니다.

"주님! 저 조금만 있다 가면 안 될까요?
집에 좀 가 봐야 되겠는데... 다음에 다시 올 께요"

저는 되돌아 왔습니다.
며칠 후에 예수님의 형상이 또 나타나십니다.

그 때에도 예수님은 한없이 애처롭고 안타까운 모습으로 저를 보듬어 주시면서
'이 여인을 어찌해야 좋을꼬...' 하시며 위로해 주십니다.

저희 교회 담임 목사님께 이 말씀을 드렸더니
그 안으로 들어 갔으면 그 날로 천국에 가는 건데 되돌아 와서 다시 소생하게 된 거라고 하십니다.

저는 지금도 천당 가는 길이 눈 앞에 선명하게 떠오릅니다.
반짝반짝 화려하거나 호화로운 건 아니지만 금보라빛이 무척이나 따스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의 모습도 생생하게 떠오릅니다.
이 여인을 어떻게 위로해야 하나... 하는 모습
고뇌하는 인간적인 모습이었습니다.
그 인간적 예수의 모습을 보고 깨어났습니다.

암 수술보다 더 큰 수술을 받고 저는 다시 퇴원했습니다.
그리고 가정으로 돌아 왔습니다.


(11) 맺는 말

그 후 저는 제가 운영하던 약국을 다시 인수해서
오늘날까지 열심히 운영하고 있습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제게 내려 주신 은혜에 보답해야 한다는 의지와 믿음으로
지역 주민들과 상담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저에게
향기로운 은사를 내려 주셨습니다.

제 배를 십자가 모양으로 갈라 보이시며
암 세포를 깨�하게 없애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형상으로 나타나셔서
따스한 금보라빛, 천국 가는 길을 보여 주셨습니다.

시멘트못 형상을 띠며 온 몸에 달라붙는 마귀를
물리쳐 주셨습니다.

저는 문득문득 하나님께서 저의 생명을 구해 주신 뜻이
과연 무엇인가? 어디에 있는가? 하고 헤아려 봅니다.

이 세상에 응답하실 일이 셀 수 없이 많고 많을텐데
어찌해서 보잘 것 없는 저에게까지
이처럼 각별한 관심을 가지시고 은총을 내리셔서
하찮은 생명을 연장시켜 주신 걸까 생각해 보게 됩니다.

그럴 때마다 저는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저와 같이 마음이 연약한 이들
세상 만사에 흔들리며 갈등을 겪고 살아 가는 이들
믿음이 없는 사람들
암으로 또는 다른 병고로 고통 받는 이들에게

하나님이 살아 계시고 역사하고 계심을
저로하여금 증거케 하기 위해서였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하잘 것 없는 저의 생명을
구원해 주신 것이라고 믿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이처럼 살아 계십니다.
하나님은 역사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 가운데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명을 주관하고 계십니다.

이제 오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귀한 은총이
우리 모두와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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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 에 필 로 그

 

 

혜숙이 암으로부터 해방되고 중증근무력증 증세도 점점 호전되면서
병마는 이제 우리 곁을 멀리 떠난 듯했다.

하지만 혜숙은 그 후 2 년 만에 또 쓰러졌다.
이번에는 서너 가지가 연속적으로 들이 닥쳤다.

근무력증 치료를 위해서 2 년간 꾸준히 약을 복용하고
이제는 다 나았다고 안심하던 때였다.

약국은 전에보다 손님들도 많아 관리 약사를 두고 운영도 잘 되었지만
그만큼 더 신경을 쓰게 되고 피로가 누적되었던 것 같다.

두 번에 걸친 큰 수술로 위와 비장과 췌장뿐만 아니라
흉선까지 제거한 상태이다보니 면역과 조절 기능이 크게 떨어져 있었던 것이다.

94 년 4 월 혜숙은 갑상선 기능 저하로 다시 병원에 입원했다.
갑상선 질환은 수술해서 고치는 병이 아니라
평생동안 약을 복용하면서 기능을 조절해야 하는 병이란다.

그 후로도 혜숙의 몸은 자꾸 야위어 갔다.
그동안 50 kg 까지 늘었던 몸무게가 38 kg 으로 다시 줄어들었다.

혜숙은 고등학교와 대학에 다닐 때 60 kg 에 이를 정도로 몸집이 뚱뚱했다.
그 때 찍은 사진들을 보면 안경 밑이 달걀처럼 부풀어 있고
눈은 얼굴살에 가려 지금보다 조그마했다.

바지를 입으면 허리와 몸통을 구분하기 어려운데도 꼭 벨트를 차고 있어서

가까운 친구들이 '드럼통에 중간 표시를 하고 다닌다' 고 놀려대곤 했었다.

그러던 몸집이 몇 번의 병마를 겪다보니

왜소하게 말라버린 것이다.

갑상선 치료약을 계속 복용하던 중에
혜숙은 1 년도 채 지나지 않은 95 년 3 월 또다시 입원했다.

신경외과에서는 갑상선 비대와 심장 저하로 보았는데
검사 결과 의외로 당뇨병에 초기 결핵이 합병증으로 왔다는 진단이다.

급히 호흡기질환 격리 병실로 옮기고 무려 두 달 여 가량을 입원해 있었다.
퇴원 후에도 혜숙은 당뇨병으로 주머니에 설탕이나 사탕같은 것을
항상 지니고 다녀야 했고 마실 물을 늘 곁에 준비해 두어야 했다.

그 후 1999 년 연말까지 한 해에 두어 차례는
잠을 자다가 혹은 주위 친지 집에서 모임을 갖다가 혈당이 갑자기 저하되어
그야말로 시도때도 없이 119 앰블런스 편에 병원 응급실로 급히 실려가곤 했다.

2000 년에 들어 서서도 이런저런 증세로 한 두 해에 두어 번은 입원을 하게 되고
윗니 아랫니 합해서 반 이상은 상하고 다쳐서 틀니를 하고 생활한다.

우리 가족과 가까운 동료들은 혜숙을 '종합병원'이라고 부른다.
평생동안 한 가지 병만 지니고 살아 가기도 힘든데
세상에 못 된 병을 두루 돌아가며 앓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의학적으로도 싸이클 현상이란 게 있단다.
염주목걸이처럼 한 번씩 돌아가며 병치레를 겪는 현상이란다.

한양대 병원에서는 혜숙을 의학적으로
희귀한 임상 대상으로 삼아 연구하고 있단다.

그래선지 혜숙이 오랜 만에 외래 진료를 받으러 가면 주치의가 놓아 주지 않고

며칠 만이라도 입원해서 검사를 받아 보자고 굳이 권면하고 부탁한다.

혜숙이 입원해 있는 동안에도 전문의 수련 과정에 있는 의사들이
시도때도 없이 찾아와서 정중하고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기회를 달라고 요청한다.

그러면 혜숙은 자신이 약학을 전공한 때문인지
어려워 하지 말고 궁금한 게 있으면
뭐든지 물어 보시라면서 친절하고 편안하게 대해 준다.

의학적으로 볼 때 혜숙의 몸은 살아 있는 것 자체가 신비하단다.
생명의 오묘함이요 기적이란다.

혜숙은 자신의 병력을 굳이 감추거나 숨기려 하지 않는다.
수련의에게 뿐만 아니라 주변 분들에게도 필요하면 적나라하게 드러내 보인다.

혜숙은 가끔 스스로 생각해도 자기 몸이 기이하고 오묘하다면서
죽으면 시신을 의학 실험용으로 기증하는 게 어떻겠느냐고
조심스런 표정으로 내게 묻기도 한다.

여학생의 몸으로 서슬퍼런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갖은 고초를 당하고

감옥에 갇히기도 하면서 이 땅의 민주화를 위해 싸워 온 세월...

경제적 사정으로 어려움을 겪으면서
남편을 뒷바라지하고 가정을 지켜 온 세월...

혜숙이 이처럼 모진 세월을 극복하고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사랑이라는 희망이라는 불씨를 가슴 속 깊이

소중하게 간직하고 살아 왔기 때문이라고 나는 감히 생각해 본다.

이 땅의 민주화에 대한 믿음과 희망...
남편과 가정에 대한 지극한 책임과 사랑이 없었다면

아마도 가능하지 않았으리라......

그렇다! 혜숙과 나에게는 사랑과 희망이야말로
그 어떤 고통과 좌절, 절망과 죽음도 극복할 수 있는
고단위 항암제요 치료제였다.

지금도 내 아내 혜숙의 건강이
온전하다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앞으로도
자신의 의지와 확신으로
사랑과 희망의 불씨를
가슴 속 깊이 간직하고 살아 간다면

몸과 마음의 병은
치유될 수 있을 것이다.

 

 

 

106. 글을 마치며


인생에서 가장 큰 시련을 꼽으라면
나는 주저없이 내 아내 혜숙이 암으로 쓰러지고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면서 투병했던 일을 무엇보다 첫 번으로 삼는다.

내 자신이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 네 번씩 실형 언도를 받고
적지 않은 세월 감옥에 갇히고 했지만

그보다는 죽어 가는 아내를 곁에서 지켜 보는 일이야말로
내게는 더할 수 없는 고통이었다.

1991 년 2 월 조금은 민주화 된 세상에서
나는 대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고 이 일은
"민주화 운동가...
제적과 징집, 복학과 구속과 제적을 거듭하다가
22 년 만에 연세대학교 졸업..."
이란 제하와 내용으로 각 일간지와 교계 신문에 크게 보도되었다.

1993 년 7 월 월간 <행복이 가득한 집>에
우리 부부의 기사가 특집으로 꾸며져 가족 사진과 함께 게재되었다.

1996 년 3 월 나는 그동안 살아 온 이야기를 정리하여 <우리는 하나>라는 제목으로

도서출판 현암사에서 책을 출판하게 되었다.

그때는 글을 시작하고 마무리하기까지
사정이 너무 촉박해서 미처 가다듬을 사이없이 졸속을 무릅쓰게 되었다.

그리고 후일 차분한 마음으로 여유를 가지고
다시 정리할 수 있는 날을 기약했다. 

여기 홈페이지에 실린 <우리는 하나>는 그 책의 제 1 부에 해당하는 내용이다.
기약한 바대로 차분히 가다듬다보니 분량이 열 배 이상으로 늘어 났다.

2000 년 1 월 도서출판 한울에서 <사랑과 희망으로>라는 제목의 책을 출간했고
이 책은 출간되자마자 많은 언론사에서 신간 안내나 서평으로 다루는 등 주목을 받기도 했다.

조선일보의 종합여성지 월간 <feel> 은 2000 년 2 월호에서
<시한부 인생 아내를 암에서 구해 낸 한 사회운동가의 감동 외조 & 민족의학의 실체>
라는 제목의 특집을 꾸며 게재했다.


같은 해 2 월 3 일에는 KBS TV 아침마당 저자와의 대화 코너에

우리 부부가 함께 출연해서 생방송으로 35 분간 방영되기도 했다.


이상의 자료들은 본 홈페이지 언론방송 자료방에서 볼 수 있다.


이제 세월이 흘러 <우리는 하나>와 <사랑과 희망으로> 모두

절판이 된지 오래이다.


늦은 나이에 홈페이지를 제작하고 영상작품을 만드는 일에 취미를 붙인 나는

위 두 책에 실렸던 내용을 중심으로 당시의 언론 보도와 사진 등

역사적이고 사실적인 자료들을 추가 보충하고 검증하여

직접 제작한 나의 홈페이지에 공개해서 올린다.

*

*
예로부터 아내와 아이들, 집안 이야기는

자랑이든 허물이든 밖에서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했다.

특히 아내에 대해서는
더더욱 그렇다.

이를 일컬어
팔불용(八不用)이요 팔불출(八不出)이라 했던가...

하지만 어리석은 소치임을 알면서도
이렇게 만시리에 공개하는 까닭은
모든 사람들이 다함께 사랑과 희망의 불씨를
가슴 속 깊이 간직하고 살아갔으면 하는 뜻에서다.

이 땅에 민주화된 세상을 이루기 위해서

관심을 가지고 헌신해 온 이들


병마로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며

고통당하는 이들

그리고 경제적 형편으로

절박한 어려움을 겪는 모든 이들에게

이 글이 조그마한 위로가 될 수 있다면
더 이상 바랄 게 없겠다.

*
*

( 추신 )

내 아내 혜숙은 <사랑과 희망으로>를 펴내고 4년 여

암 수술을 받은 후로는 17년 6개월 여가 흐른 뒤
2004년 9월 3일 유명을 달리했다.


우리 가족은 선후배 동지들의 간곡한 뜻에 따라

마석 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 묘역에 혜숙을 안장했다.


나는 삼오제가 되는 날
비문을 작성하고 무덤 앞에 새겨 두었다.

(전면)
민주화운동 관련자
故 박혜숙의 묘

(후면)

故 박혜숙은 1972년 경기여자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이화여자대학교 제약학과에 입학하자마자
박정희 독재 권력에 대항해서 학생운동을 펼치다가
1974년 중앙정보부에 연행되어 여학생의 몸으로

갖은 고문과 공포 속에서 조사를 받고
소위 민주청년학생총연맹 사건으로 서대문구치소에 구속 수감된 이후에도

뜻을 굽히지 않고 수사 당국으로부터 수차례

지명수배와 연행 조사를 당하는 등 계속 활동해 오다가
1978년 이화여대 약대를 졸업하고
학생운동의 동지인 최민화와 결혼한 이후로는 세민약국을 경영하면서
모두 네 차례에 걸친 남편의 옥바라지는 물론이거니와
민주화운동청년연합 민중문화운동협의회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민주화실천가족협의회
이화여자대학교민주동우회 등 단체의 결성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해 오다가
1987년 위암 수술을 받고 병마와 치열하게 싸워오던 중
2001년 8월 28일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에서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결정하여 증 제2224호로 민주화운동관련자 증서를 수여받고
2004년 9월 3일 02시 21분에 일기를 마치니
남아 있는 동지들의 간절한 뜻으로
여기 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 묘역에서 고이 잠들다

2004 년 9월 7일 삼오제에 남편 최민화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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