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함께 나누어야 할 고통

 

 

매주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5 일 동안
그렇게 해서 6 주간
혜숙은 방사선 치료를 받아야 한다.

항암제는 처음에 강력한 아드리아마이신과 5-FU를 맞고
3 주 후에 약한 미토마이신과 시스플라틴을 맞은 다음
1 주 후에 혈액검사로 백혈구 수치를 점검하고
다시 강력한 아드리아마이신과 5-FU를 맞아야 한다.

항암제가 인체에 워낙 독한 약물이다보니
처음에는 강한 성분을 주사하고
3 주 동안 몸을 추스린 후에 약한 성분을 주사했다가
1 주 후에는 다시 강하게 주사하는 치료법이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의학 기술의 발달과 성과에
우선적으로 의존해서 최선을 다 하자고 다짐했다.

하지만 주위에서는 혜숙의 병을 혜숙이만의 문제로
우리 가족만이 짊어져야 하는 문제로 놓아 두지 않으려 했다.

특히 오랜 세월 민주화 운동을 함께 해 온 선후배와 동료들
그 가족들은 정도가 지나치리만큼 심했다.

지난 20 여 년을 함께 끌려 다니면서
고문당하고 감옥살이 했던 친구들

이 땅의 민주화를 위해서 물심양면으로 후원하고
함께 행동해 온 선후배 동료와 어르신들, 그 가족들 모두가

혜숙의 병을, 우리 가족이 당하고 있는 고통을
함께 나누고 짊어져야 마땅한 일이라고 여겼다.

이들에게 혜숙이 당하는 고통은 두 번째 사건이었다.
9 개월 전 대구에서 활동하던 이강철(전 청와대 시민사회수석)의 부인이
처음으로 위암 수술을 받았다.

민청학련 사건 때 우리 부부와 함께 구속되었던 이강철은
5 년 여 동안 감옥살이 하다가 석방된 이후로
줄곧 대구 경북 지역에서 민주화 운동을 해 왔다.


▲ 이강철 전 청와대 시민사회수석

그가 뒤늦은 나이로 결혼할 때
나와 혜숙이 함께 대구까지 내려가 축하했다.

그의 부인은 학교 선생님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그런데 수업 도중에 그만 통증으로 쓰러지고
진단 결과 위암으로 판명되어 수술을 받았단다.

그 때 이강철은 시국 사건으로 전국에 지명수배 중이었다.
공안 당국에서 그를 체포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는데
그만 청천벽력 같은 일이 닥친 것이다.

고민하던 끝에 그는 뻔히 잡힐 줄 알면서도
암 수술 받는 아내를 문병하러 갔다가 바로 연행되었다.

참으로 기가 막힐 사연을 안고 있던 이강철은
누구보다도 많은 관심과 조언을 내게 보내 주었다.

그의 부인은 수술 결과 위암 2 기로 판명되어
5 년 생존율이 50 퍼센트 내외라 했다.

내색할 수는 없었지만 그 당시 내게는 그가 참으로 부러웠다.
생사의 갈림길에서 생존율 50 % 와 15 %
더욱이 그의 부인은 항암제를 맞으면서도
멀쩡히 학교에 출근해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니...

" 야! 니 마누라 우리 혜숙 씨 살릴라카믄 우선 토룡탕부터
멕여 봐라 임마야...
왜관에 가믄 신부님들만 지내는 수도원이 있는데 말이다...
서양에서 중세기 이전에 기독교가 극심하게 탄압 받을 때부터
신부님들이 토굴 속에 숨어 살믄서 보신용으로 만들어 잡순 걸
전수받은 거라 카든데...
우리 마누라 그거 묵고 많이 좋아졌다 아이가...
구하기가 쉽지 않은데, 내가 대구 쪽 신부님들한테 부탁해서
구해 볼테니까니 우리 혜숙 씨한테 꼭 멕여라 임마야..."

같은 사건으로 혜숙과 함께 구속된 공범이자 동지적 관계여선지
그는 꼭 "니 마누라 우리 혜숙 씨"라 한다.

그 이강철의 부인 다음으로 재야 민주화 운동 진영에서는
혜숙이 두 번째로 위암 환자가 되어 생사의 기로에 선 것이다.

 



 

44. 풀무원식품 원혜영

 

 

풀무원이라는 무공해 식품 회사를 설립해서
정신없이 바쁘게 운영하고 있던 원혜영 (국회의원)

마악 개발해서 곧 시판에 들어갈 계획이라는
현미 효소와 각종 야채 엑기스 등을 차에 싣고
연락도 없이 혜숙이 운영하는 약국으로 들이 닥친다.

▲ 국회의원 원혜영

원혜영의 얘기인즉슨
미국에서 가장 권위 있는 병원 가운데 하나인 감리교 종합병원의
병원장을 맡고 있던 안토니 사틸라로(Anthony Sattilaro) 박사가
말기암에 합병증까지 걸렸단다.

전립선 암이 두개골과 어깨, 척추, 흉골, 늑골에까지 번져서
최첨단 현대 의학을 모두 동원하더라도
1 ~ 2 년 밖에는 생명을 연장시킬 수 없는 지경에 처했단다.

그는 시시각각으로 몰려 드는 통증을 도저히 견딜 수 없어
동료 전문의에게 사정하고 부탁해서 강력한 진통제를 맞곤 했지만
아무리 주사해도 일시적으로만 고통에서 벗어 날 수 있을 뿐이었단다.

사틸라로 박사는 통증에서 벗어 나기 위해
고환과 림프선을 잘라 내고 흉곽과 늑골을 제거했다.
암세포가 퍼지는 것을 억제하기 위해 에스트로겐 치료를 받았단다.

하지만 현대 의학을 총동원하더라도
그의 몸 속에서 번지고 있는 암 세포를 멈추게 할 수는 없었다.
죽음이 그에게로 점점 가까이 다가 왔다.

그러던 어느날 그는 자연식으로 암을 치료할 수도 있다는 기사를
우연히 접하게 되었다.

그리고는 어차피 현대 의학으로 생명을 회복하기 불가능할바에야
절체절명의 순간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자연식을 교육하고 보급하는 사람들을 찾았다.

의사로서 그리고 권위 있는 종합병원의 원장으로서
그는 현대 의학의 방법이나 성과와는 전혀 상관 없고
동양적인 생활 습관에 따라 신비롭기도 하고 비과학적이기도 한
자연식의 세계에 막연히 매달리게 되었다.

때로는 신뢰하기도 하고 의심하기도 하면서
부질없는 짓이라고 불신하고 절망하기도 하면서
그는 끈질기게 자연식을 이어갔다.

그리하여 마침내는
현대 의학으로나 과학으로나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기적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그의 몸 전체에 퍼져 있던 암 세포가
활동을 멈춘 것은 물론이거니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고
죽을 수밖에 없던 자신의 생명을
다시 건강하게 되찾았다는 것이다.

그 후 그는 현미와 자연식으로 암을 치료하고 생명을 되찾게 된
자신의 체험을 체계적으로 정리해서 책으로 출판하게 되었는데
이 책이 미국 사회에 큰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는 얘기다.

원혜영은 그 책을 출판하기 위해 번역하는 중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형수도 사틸라로 병원장처럼
처음에는 비과학적이라고 의심하고 괜한 시간 낭비라고 불신할 테니까
우선 원서와 번역된 부분을 복사해 주겠노라 했다.

이제까지는 자연건강 식이요법을 현미밥과 생야채식에만 의존했는데
시간과 장소와 환경에 따르는 불편을 덜기 위해 풀무원에서
현미는 효소로, 각종 생야채는 엑기스로 개발했다는 것이다.

" 형수요!... 이거 다 먹어 보고 효과가 좋으면 앞으로 얼마든지
더 가져다 줄테니까 아까워 말고 열심히 잡숫기나 하쇼...
그래서 형수가 병 낫다고 소문나면 우리 풀무원 식품도
선전이 되는 거니까....."

원혜영은 암 따위는 별로 걱정할 게 없다는 듯
언제나처럼 낙천적인 표정에 넉넉한 웃음을 짓는다.

얼마 후 원혜영은
' 자연식으로 말기암을 이겨낸 저명한 의사의 투병기'
" 되찾은 생명 " 이라는 책을 출간하자마자 우리에게 갖고 왔다.

 


 

45. 영인한의원

 

 

영인한의원 원장 김영인은 혜숙의 E 여대 후배였다.
김 원장은 학생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하다가
긴급조치 9 호 위반으로 구속되었고 학교에서도 제적되었다.

감옥에서 석방된 후 김 원장은 고등학교 졸업 자격으로
비밀리에 경희대 한의학과 입학 시험에 응시해서 합격했다.

학생운동의 전력을 숨기고 조심조심 과정을 마친 그녀는
마침내 한의사 자격을 취득하고 한의원을 개업하게 되었다.
김 원장에게서 형부만 조용히 만나고 싶다는 연락이 왔다.

김 원장은 혜숙 언니의 병이 양의로 거의 가망 없는 상태라면
한의학을 선택해 보는 게 어떨지 내 의견을 조심스레 물어 왔다.

양의에서 포기한 지경에 있는 암 환자를
한의학에서 임상 치료한 결과
여러 모양으로 성공한 예후가 있다는 거다.

나는 어차피 대수술까지 하고
이제 방사선과 항암제 치료를 한시적으로 받게 되면
양의학으로 할 수 있는 노력을 모두 동원하는 셈이 되는데
일단 현대 의학에 의지하고 싶다고 했다.

그런 연후에 몸의 상태를 보아 가면서
차츰차츰 다른 치료 방법을 고민해 보겠노라 했다.

김영인 원장은 얼굴 가득히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조심스럽게 말을 이어 간다.

" 혜숙 언니의 병 자체가 우리 모두 함께 아파하고
함께 감당해야 할 몫이라는 생각으로 드리는 말씀인데요...
혹시 언제라도 치료 방법을 한의학 쪽으로 바꿀 생각이 드시면
바로 연락해 주세요...
이 방면에 전문 의료인들과 협력해서 최선을 다 해 볼테니까요.
그리고 저... 나중을 위해서...
혜숙 언니가 항암제와 방사선 치료를 받으면서도 몸에 기를 돋우고
보하도록 각별히 감안해서 한약을 지어 보내 드릴 테니까
꼭 복용하도록 형부가 곁에서 신경 좀 써 주시고요...
계속 필요하면 부담 갖지 말고 언제고 연락 주시고요..."

며칠 후 김영인 원장은 정성들여 다린 한약을
한 짐 집으로 보내 왔다.

 

46. '접시꽃 당신'과 도종환

 

 

그즈음 출판가에서는 위암으로 세상 떠난 아내를
하염없이 그리워하는 마음을 시집으로 펴낸 도종환의 '접시꽃 당신'이

그야말로 베스트셀러로 파문을 일으키고 있었다.



책을 펴낸 실천문학사 대표이자 시인으로 소설가로
탁월한 작품을 남긴 송기원이 도종환과 함께 찾아 왔다.

도종환은 충북에서 국어 선생으로 재직하다가
지역 사회 단체와 전교조에 가담해서 주도적으로 활동한 일로
해직되어 있던 상태였다.

어찌보면 내가 겪고 있는 고통을 이미 다 겪은
어쩌면 내가 아직 겪지 못하고 있는 고통까지도
이미 겪고 있는 도종환을 보면서
나는 위로를 해야 할지 받아야 할지 참으로 어색했다.

도종환은 얼굴 가득히 진심으로 나를 위로하는 표정이다.
그저 표정으로만일 뿐 도종환은 도시 말이 없다.

복잡다단한 나의 심사를 훤히 꿰뚫어 보면서
처음에는 도대체가 믿어지지 않더라는 둥
아이들 생각하며... 도무지 잠을 이룰 수가 없더라는 둥
지금 얼마나 충격이 크고 고통스럽겠느냐는 둥

도종환은 누구보다도 실감나고 구구절절한 얘기를
나에게 해 줄 수 있는 감성과 표현력을 간직하고 있겠건만
나와 눈길 마주치기조차 어려운 듯
밑으로 옆으로 피하면서 아무 말 없다.
그저 안쓰럽기 그지없는 표정일 뿐이다.

착하디 착하고 맘씨 좋은...
충청도 하고도 법 없이도 살아 가는
산골짜기 촌부의 어눌한 모습일 뿐이다.

" 수술도 수술이지만 항암제 치료가...
그렇게 고통스럽고 견디기 힘들 수 없다던데...
계속 받아야 하는 건지..."

도종환과 나 사이에 흐르는
애틋한 연민과 위로의 정이
너무 어색하고 답답한 나머지

나는 그만 한숨을 내 쉬며
혼자 중얼거리는 건지 도종환에게 묻는 건지
가늠할 수 없는 말이 입에서 저절로 새 나온다.

중간에서 답답한 분위기를 푸느라 열심히 주섬주섬
정신없어 하던 송기원 사장의 말이 갑자기 툭 끊기면서
분위기가 더 무거워 진다.

" 지나고 나니깐... 어차피 그럴 바에야...
그런 고통 안 겪는 게 좀... 편안할 수 있지 않었겠나...
싶어지기두 하더라구요....."

도종환은 내게 딱히 권면하는 정도는 아닐만큼 대답해 온다.

송기원은 도종환과 출판사에서 함께 나오면서
시집 '접시꽃 당신'을 가지고 오려 했는데
도종환이 한사코 말리는 바람에 못 가져 왔다면서
대신 최근에 출간된 책 몇 권을 봉투에 담아 내게 준다.

나는 복잡다단할 나의 심사를 훤히 들여다 보고 있는
시인의 예리한 감성과 배려를 도종환에게서 느낀다.

그로부터 몇 달 후 '접시꽃 당신'이 영화로 만들어졌다.
실천문학사에서 내게 영화 시사회에 꼭 참석해 달란다.

나는 무엇보다도 도종환과 나 사이에 흐르는
연민의 정에 끌려 시사회에 참석했다.



시사회니만큼 영화가 끝나자 기자 등 몇몇 사람이
내게 소감을 물어 왔다.
아마도 영화평을 한마디 하라는 것이겠거니 했다.

하지만 나는 영화에 대해서 별로 말하고 싶지 않았다.
영화 속에서 주인공으로 설정한 아내와 도종환 역은
영화 상영이 마악 끝난 것처럼 지나간 과거형이지만
내게는 아직 끝나지 않고 상영 중인 상태이기 때문이었다.

그보다는 환자의 정서와 심리의 변화...
사랑하는 아내가 죽어 가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는 남편의 심경이
실존만큼 섬세하고 적나라하게 보이지 않고
너무 작위적이라는 느낌 때문이었다.

차라리 도종환의 시를 그대로 빌어
나의 감상을 대신하고 싶었다.
도종환도 그랬겠지.....


접시꽃 당신


옥수수잎에 빗방울이 나립니다.
오늘도 또 하루를 살았습니다.

낙엽이 지고 찬바람이 부는 때까지
우리에게 남아 있는 날들은
참으로 짧습니다.

아침이면 머리맡에 흔적없이 빠진 머리칼이 쌓이듯
생명은 당신의 몸을 우수수 빠져 나갑니다.

씨앗들도 열매로 크기엔
아직 많은 날을 기다려야 하고
당신과 내가 갈아엎어야 할
저 많은 묵정밭은 그대로 남았는데

논두렁을 덮는 망촛대와 잡풀가에
넋을 놓고 한참을 앉았다 일어섭니다.

마음놓고 큰 약 한번 써보기를 주저하며
남루한 살림의 한구석을 같이 꾸려오는 동안
당신은 벌레 한 마리 함부로 죽일 줄 모르고
악한 얼굴 한번 짓지 않으며 살려 했습니다.

그러나 당신과 내가 함께 받아들여야 할
남은 하루하루의 하늘은
끝없이 밀려오는 가득한 먹장구름입니다.

처음엔 접시꽃 같은 당신을 생각하며
무너지는 담벼락을 껴안은 듯
주체할 수 없는 신열로 떨려 왔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에게 최선의 삶을 살아온 날처럼
부끄럼없이 살아가야 한다는
마지막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함을 압니다.

우리가 버리지 못했던
보잘것없는 눈높음과 영욕까지도
이제는 스스럼없이 버리고
내 마음의 모두를 더욱 아리고 슬픈 사람에게
줄 수 있는 날들이 짧아진 것을 아파해야 합니다.

남은 날은 참으로 짧지만
남겨진 하루하루를 마지막 날인 듯 살 수 있는 길은
우리가 곪고 썩은 상처의 가운데에
있는 힘을 다해 맞서는 길입니다.

보다 큰 아픔을 껴안고 죽어가는 사람들이
우리 주위엔 언제나 많은데
나 하나 육신의 절망과 질병으로 쓰러져야 하는 것이
가슴아픈 일임을 생각해야 합니다.

콩댐한 장판같이 바래어가는 노랑꽃 핀 얼굴 보며
이것이 차마 입에 떠올릴 수 있는 말은 아니지만
마지막 성한 몸뚱어리 어느 곳 있다면
그것조차 끼워넣어야 살아갈 수 있는 사람에게
뿌듯이 주고 갑시다.

기꺼이 살의 어느 부분도 떼어주고 가는 삶을
나도 살다가 가고 싶습니다.

옥수수잎을 때리는 빗소리가 굵어집니다.

이제 또 한번의 저무는 밤을 어둠 속에서 지우지만
이 어둠이 다하고 새로운 새벽이 오는 순간까지
나는 당신의 손을 잡고 당신 곁에 영원히 있습니다.

(이상 '접시꽃 당신'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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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아내에게 바치는 노래

 

 

민통련과 민청련 합동으로
나의 석방을 환영하고
혜숙의 건강 회복을 격려하기 위한
자리를 마련했다.

많은 이들이 구속되거나
수배 중인 상태였고
어머니 고희연을 통해서
대개 인사 치례는 한 셈이었던만큼

우리 부부를 위해서라면 중차대한 시국에
굳이 그럴 필요가 있겠느냐고 마다했지만

그 때는 공식적이고 공개적인 모임이었고
이번에는 함께 활동했던 가까운 선후배들이
비공개로 모여 허심탄회하게 회포를 푸는 자리라 한다.

이들은 암 환자 몸 보신 위해서
고단백질 식품으로 개고기만한 것이 있겠냐면서
모임 장소를 아예 보신탕집으로 정했다.

나중에 국무총리에 오른 이해찬이
적극적으로 주선해서 마련한 자리였다.

이해찬과 혜숙이 같은 학번으로
민청학련 사건 때도 함께 구속되어선지
그 동기들이 특히 많이 참석했다.

실로 오랜만에 보는 동료들도 꽤 많았다.
오랜 세월 수배 중인 동료들도 더러 있었다.


▲ 1987년 05월 10일 민통련 주관 최민화 석방환영 모임 @ 박용수 선생


모인 동료들끼리도 오랜만인 모양이다.
그러니만큼 서로들 안부를 묻고 격려하고
반가움에 겨워하는 표정들이었다.

어머니 고희연 때 사회를 보았던 이해찬이
이번에도 총대메고 사회 보면서
한사람 한사람의 근황과 형편을 소개한다.
분위기가 무르익어 가면서
한사람씩 돌아가며 노래를 부른다.

그 때만 해도 노래방이 없던 적인가?
아무튼 이런 모양으로 모이게 되면
우리는 언제나 노래하고 춤추고 장끼를 내세우며
시간가는 줄 모르고 즐거웠다.

요즘은 어딜가나 노래방 기계 때문에
그런 분위기 만들기도 맛보기도 어려워졌지만...

노래 이야기가 나와서 잠시 거슬러 보건대
나의 어머니는 노래를 좋아하시기도 하지만
참으로 잘 부르신다.

음악을 전공한 건 아니지만 처녀 적에
여학교 다니면서 간호사로 도립병원에 근무하면서
늘 대표로 뽑혀 노래를 부르셨다.

친정 아버님 목회하시는 교회 찬양대 소속으로
성악가 이인범 김천애 가수 김정구 등등과 함께
함경남북도 전지역을 순회 공연 다니기도 하셨다.

내가 군 복무 중일 적에
모처럼 휴가 나오게 되면

어머니는 내가 들어보지도 못하던 최근 유행가를
밥지으며 청소하며 곱디고운 목소리로 흥얼거리셨다.

노랫말과 가사가 좋아
나도 좀 가르쳐 달라면

어머니는 어린애처럼 반기시면서
가사를 적어 주고 계속 불러 주신다.

이연실의 '새색시 시집가네' 등
양희은의 '세노야' 등등...

특히 양희은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은
백미로 꼽힌다.

나는 세미클래식이나 올드팝
포크송 등을 좋아하는 편이지만

어머니는 명곡에서부터
찬송가 뽕짝에 이르기까지

좋아하는 범위도 넓고
소화해 내는 범위도 넓으시다.

내가 첫 번째 감옥살이 하고 석방되던 날
서울에서 학교 친구와 후배들
10 여 명이 시골집으로 몰려 왔다.

늦으막한 저녁
상 주위에 둘러 앉아 음식을 나누면서

나는 손님들을 핑계삼아
감옥에 있는 동안
어머니 노래가 그렇게 듣고 싶었노라고

안 하던 속내를 드러내며
어머니께 노래를 신청했다.

어머니는 겸연쩍어 하면서 일어서시더니
그동안 어디에 가 있는지 어떻게 지내는지도 모르고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고

몇 달이 몇 십 년처럼 흐른 후에
군법회의에서 15 년 구형 받고

징역 12 년에 자격정지 12 년 형으로
확정되었다는 소식

뉴스로 전해 듣고
마음 가눌길 없었는데

그 때 라디오에서 이 노래가 흘러나와
부르고 또 부르고

눈물짓고 마음 추스리며
다시 부르고 했다면서

노래하신다.

" 무슨 말을 할까요 울고 싶은 이 마음
눈물을 글썽이며 허공만 바라보네

무슨 까닭인가요 말없이 떠난 사람
정말 좋아했는데 그토록 사랑했는데

나는 어떻하라구 나는 어떻하라구
나는 어떻하라구 내가 미워졌나요

믿을 수가 없어요 믿을 수가 없어요
내 말 좀 들어봐요 나는 어떻하라구


나는 어떻하라구 나는 어떻하라구
나는 어떻하라구 내가 미워졌나요

믿을 수가 없어요 믿을 수가 없어요
내 말 좀 들어봐요 나는 어떻하라구


나는 나는 어떻하라구 "
.
.
.
.
.

지금도 이 노래를 부를 적이면
어머니는 꼭 끝 구절을
본디 노랫말과 바꾸어서 반복해 부르신다.
.
.
.

나는 흐르는 눈물을 막을 수 없어
상머리에 머리 처박고
방바닥만 멍하니 보고 있었다.

그 때 나는
눈물이 어떻게 콧속으로 들어가
콧물되어 나오는지 호되게 체험했다.

여학생 둘은 체면이고 뭐고 없이
그냥 엉엉 울어버린다.

막상 노래하는 어머니만이
마음 추스리고 담담하시다.

한 곡 더 부르시라고
재청이라도 해야 예의겠건만

다들 뭔가에
주눅들어 있는 분위기다.

그 후 어머니의 노래는
대학가에 소문으로 번졌다.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나 서울로 이사했는데도
대학 노래패들이 찾아와
고문으로 모시겠다고도 했다.

하나밖에 없는 친정 오라버니께서 독립운동 하시고
그것도 저항적 동요를 작사 작곡하신 탓인지
어머니는 잊혀진 독립운동 노래를
상당하게 기억하고 계셨다.

급기야는 엄혹했던 시절 84 년 5 월
지금 민족예술인총연합의 전신이랄 수 있는
민중문화운동협의회에서 어머니를 초청하여

1 년에 한번 주최하는 공식 행사에
특별 순서를 마련하고 흥사단 대강당에서
독립운동가 등 노래를 공연하시게 했다.

이제 몸은 어찌어찌 움직이고
가벼운 집안 청소도 굳이 하시지만

85 연세에 중풍으로 말씀도 어눌해 지시고
그리 좋아하던 노래 가사도 잊으시는 어머니...

.

.

.
그러고보니 잠시 거슬러 본다는 게
곁길로 새도 한참을 샜다...

다시 본말로 돌아가서
어머니에 비해서는 어림반푼어치도 않되지만

그래도 쪼끔은 대물림 받았는지
어디가서 돌림으로 노래부르면
나도 그리 빠지는 편 아니다.

감옥살이 하면서도 하루에 세 번 들려주는
라디오 스피커 노래 소리에 귀기울이다가
가끔씩 따라서 흥얼거리다보면
어느새 노랫말을 익히게 된다.

그럭저럭 노랫말 외우고 익힌 게
한 100 여 곡은 될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상 노래를 부르라면
무슨 노래 부를까 갑자기 망설여 지고
전혀 생각 안날 때도 있다.

그 날도 내 차례가 오면 무슨 노래 부를까
망설이고 있었다.
그러다가 묘한 생각이 머리를 스친다.

대전교도소에서 출소를 보름 여 앞두고
스피커에서 흘러 나오는 노래를 따라 부르다가
뭐에 홀렸는지 나는 그 노랫말을 꼭 외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언젠가는 동료들과 혜숙이 참석한 자리에서
꼭 한번 불러 봐야지...
하면서 열심히 익히고 출소했다.

이해찬이 그날의 주빈이자 주인공 격인
나와 혜숙을 위해 큰 박수를 보내자면서

'형수님' 내외분이 다정하게 손잡고
함께 노래를 불러 주겠다고 청한다.

나는 여러 동료들과 혜숙이 함께 있는 자리에서
꼭 불러야 할 노래가 있다면서
혼자서 부르겠다고 했다.


▲ 1987년 05월 10일 민통련 주관 최민화 석방환영 모임 @ 박용수 선생

" 젖은 손이 애처러워 살며시 잡아 본 순간
거칠어진 손마디가 너무나도 안타까웠소

시린 손 끝에 뜨거운 정성 고이 접어 다져온 이 행복
여민 옷깃에 스미는 바람 땀방울로 씻어온 나날들

나는 다시 태어나도 당신만을 사랑하리라

미운 투정 고운 투정 말없이 웃어 넘기고
거울처럼 마주보며 살아온 꿈같은 세월

가는 세월에 고운 얼굴은 잔주름이 하나둘 늘어도
내가 아니면 누가 살피랴 나 하나만 믿어온 당신을

나는 다시 태어나도 당신만을 사랑하리라 "


시인 조운파가 작사하고 하수영이 부른
'아내에게 바치는 노래'다.

나는 1 절을 부르고 2 절
'...거울처럼 마주보며 살아온 꿈같은 세월' 하고 부르다가
그만 목이 메여오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어머니께서 '나는 어떻하라구'를 부를 때 만큼은 아니지만
분위기가 착 가라앉고
여기저기서 흑흑하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사회생활 가운데
가장 허물없고 편안한 동료들과 혜숙이 앞에서

나는 울음 섞이고 목메인 소리에 아랑곳 하지 않고
눈물을 참아가며 끝까지 계속 불렀다.

인재근과 양경숙 등등 여성 동료들은 거의 모두
흐느끼며 우느라 정신없어 했다.
혜숙이도 그랬다.

가라앉은 분위기를 바꾸느라 이해찬이 일어나서
친구이자 형수인 혜숙의 답가가 있겠다고 청한다.

나는 혜숙이 무슨 노래를 부를까 궁금했다.
혜숙은 노래를 그리 잘 부르는 편이 아니다.

오래 전에는 노래를 시킬 때마다 못 부른다고
분위기 깰 정도로 빼고 뺀 적 한두 번이 아니다.


" 나 혼자만이 그대를 알고 싶소
나 혼자만이 그대를 갖고 싶소
나 혼자만이 그대를 사랑하여
영원히 영원히 행복하게 살고 싶소

나 혼자만을 그대여 생각해주
나 혼자만을 그대여 사랑해주
나 혼자만을 그대는 믿어 주고
영원히 영원히 변함없이 사랑해주 "

'나 하나의 사랑'이란 노래인데 혜숙은 언젠가부터
노래를 시키면 지긋지긋하게 빼던 일을 멈추고
마지못해 이 노래를 부르곤 했다.

하지만 그때마다 혜숙의 노래는 1 절에서 끝났다.
2 절까지 부르는 건 처음이었다.

곰곰 생각해 보니 그 적에는
왜 굳이 노랫말을 있는대로 다 불렀던지...

그러니만큼 혜숙의 노래는 다른 동료들에게보다도
심금을 울리며 내게 다가왔다.

나는 정작 보신탕을 그리 좋아하는 편이 아니다.
굳이 말하자면 못 먹는다거나 안 먹는 체하는 것이
내숭떠는 꼴불견으로 비치지 않을까 해선지
그저 불편하지 않게 어울려 먹는 정도다.

혜숙은 아예 못 먹는 편이었다.
하지만 그날 혜숙의 건강 회복을 위해서
비밀하게 특별히 마련한 보신탕 파티는
나와 혜숙에게 큰 위안이 되었다.

그 후부터 혜숙은
나보다도 오히려 보신탕을 더 즐겨 먹게 되었다.

 


 

48. 박형규 목사

 

 

민주화 운동 진영에서 기독교계를 상징하고
실제적으로 이끄시는 박형규 목사님이
사모님과 함께 약국으로 문병 오셨다.

박 목사님은 나보다도 혜숙에게
더 각별한 관심을 갖고 계시다.



혜숙은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박 목사님이 담임하는 서울제일교회를 다녔다.
교회 대학생부에서 열심히 활동하고
이화여대 학생 동아리 모임과 연결하는 역할을 도맡았다.

혜숙이 이화여대 학생으로는 유일하게
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된 연유도
바로 제일교회 대학생부 활동을 통해서
이화여대 학생 서클 모임과 연결하는 고리가 되었기 때문이다.

어찌보면 혜숙은 이화여대 서클 회장으로서라기 보다는
제일교회 대학생부 활동으로 구속되었던 셈이다.

당시 제일교회에서는 박형규 목사와
지금은 기독교방송국 사장으로 있는 권호경 전도사를 비롯해서
대학생부에 소속된 20 여 명 회원 거의 모두가 구속되었다.

그러니만큼 박 목사님이 혜숙에게 갖는 관심은 남달랐다.
박 목사님은 나와 혜숙이 함께 있는 모습을 볼 때마다

"...우리 교회 교인하고 결혼해서 살려면 우리 교회를 나와야지!....."

하면서 우리가 다른 교회에 다니는 것을 못내 섭섭해 하셨다.
약국에 딸린 단칸방에서 심방 예배를 드렸다.

찬송 부르고 성경 구절 봉독하고 설교 말씀하고 나서
박 목사님은 혜숙의 병구완을 위해 안수기도 하신다.

정의와 평등, 평화로운 하나님의 나라를
우리 민족과 한반도 땅 위에 세우기 위해서
노력하고 헌신해 온 주님의 소중한 따님이

우리 인간으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병고로 말미암아
고통 가운데 있사오니

하나님의 크신 능력과 구원의 역사하심으로
다시금 건강한 몸으로 살아가도록 인도해 주시기를 바란다는
내용의 간절한 기도다.

그리고 말미에 박 목사님은 앞으로 겪게 될 지도 모르는
혜숙의 고통을 위안하는 기도를 덧붙이신다.

"... 우리 민족과 사회를 위해서 앞으로도 소중한 역할을 해야 할
귀한 여종을 주님께서 필요하셔서 주님의 품으로 데려 가시려거든
인간으로서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 가운데 두지 마시고...
두려움 없이 편안한 마음으로, 고통 없이 즐거운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시옵소서....."

그 날 혜숙은 안색이 별로 좋지 않았다.
그 후로 혜숙은 박형규 목사님을 만날 때마다

어떻게 해서든지 살아 보려고 피가 마르게 아등바등대고
지푸라기라도 잡아서 매달리고 싶은 환자한테
심방기도 하시면서

편안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죽을 수 있게 해 달라는 게
도대체 말이나 되느냐고 뾰루퉁하게 따지곤 했다.

그러면 박 목사님은 당황한 표정으로

"...어?... 내가 그랬나?... 덕분에 이렇게 살아서 만나는 거라고
감사하게 여겨야지... 허 허... "

하면서 무안한 표정으로 웃곤 하신다.

 



 

49. 위로가 지나쳐 강요가 되고

 

 

이즈음 선후배 동료와 재야 어르신 등등 많은 분들이
집으로 문병 오거나 나를 밖으로 불러내 위로해 주었다.

하지만 때로는 그냥 위로만 해 주면 좋겠는데
무슨 구름잡는 얘기 같은 것 가지고

이렇게 안 하면 절대로 안 된다면서
선택하고 결단할 것을 강요하다시피 하는 통에
나는 저으기 부담스럽기도 했다.

자연식과 전통 민간요법에 관심 두고 있는 분들은
수술을 하지 말아야 하는 건데 왜 했느냐
신체 기능을 조절해서 회복시키면 되는 건데
왜 몸에 칼을 대고 위를 잘라내 버렸느냐고 야단이다.

어떤 이는 가까운 친척 가운데 암에 걸려
병원에서 포기한 상태로 죽을 날만 기다리던 환자가
가족들에게 폐 끼치는 게 부담스러워서 산속에 들어가
산채나물 뜯어먹고 뱀을 잡아먹고 연명하다보니
어느덧 암 세포가 깨끗이 없어졌더라 면서

마누라를 꼭 살려야겠으면 아무 생각 말고
산속으로 들어가 사는 방법밖에 없다고
나에게 거의 협박하다시피 주장하고 나선다.

어떤 이는 암을 고치는 보약 중에 보약으로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천기 비슷한 비법이 있는데
고양이 머리 골을 이러저러하게 먹으면 즉효를 본다면서
아무 걱정 말고 지금 당장 구하러 가자고 억지를 쓰기도 한다.

어떤 이는 민물장어를 푹 고아 삶아서
물즙을 만들어 가져오기도 하고
어떤 이는 흑염소 탕을 만들어 오기도 하고...
개고기에 각종 한약재를 넣어서 삶아 오기도 하고...

가져오는 이들의 걱정과 염려, 정성어린 마음이
그지없이 고맙기도 했지만
때로는 우리를 너무 피곤하게 만들기도 했다.

어느 날 고영하와 문국주가
건장한 체격의 장정 한 명과 함께 집으로 문병을 왔다.

들어서자마자 문병이라기보다는
무슨 수작을 부리려고 들이닥친 분위기다.

고영하는 연세대 후배로
1974 년 1 월 의과대학 본과 재학 중에
시국 선언문을 낭독하고 구호를 외치다 구속되어
징역 7 년 형을 선고받았다.

문국주는 서울대 사회학과에 재학하던 중
같은 해 4 월 우리 부부와 함께
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되었다.

1974 년...

여기서 잠깐 돌이켜 보면
그 해는 새해 벽두부터 민란을 넘어서 동족상잔의 비극이
한바탕 거세게 휘몰아칠 것 같은 긴장이 감돌던 때다.

1 월 8 일에는 전쟁 상황에서라야
취할 수 있으리라 여겼던 대통령 긴급조치 1 호가
학생들과 민주 인사를 대상으로 발동되었고

그것도 모자라 4 월 3 일에는
유신헌법과 긴급조치에 대해 비판적인 생각을
머리 속에 두고 있는 사람은 물론이거니와

그런 움직임 그런 모임 그런 사람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관계 당국에 신고하지 않은 사람까지 모두
5 년 이상 사형에 처하도록 하는
전대미문의 대통령 긴급조치 4 호가 발동되었다.

그야말로 전 국민을 상대로 한 선전 포고에 다름아니었다.
이 조치로 말미암아 수 천 명이 쥐도새도 알게모르게
연행되어 고문당했고

그 가운데 1,024 명이 구속 수감되었으며
204 명이 5 년 이상 사형 언도를 받고
그 중 8 명은 실제로 사형이 집행되었다.

이런 와중에 대통령 영부인 육영수 여사가
8 월 15 일 광복절 기념식장에서 피살되었다.

지금은 흘러간 과거 역사로 잊혀져 가는 시절...
그 때 그 시절 사회적 분위기를 김지하의 시
'1974 년 1 월'로 더듬어 본다.


ㅡ 1974 년 1 월 ㅡ

1974 년 1 월을 죽음이라 부르자
오후의 거리, 방송을 듣고 사라지던
네 눈 속의 빛을 죽음이라 부르자

좁고 추운 네 가슴에 얼어붙은 피가 터져
따스하게 이제 막 흐르기 시작하던
그 시간
다시 쳐 온 눈보라를 죽음이라 부르자

모두들 끌려가고 서투른 너 홀로 뒤에 남긴 채
먼 바다로 나만이 몸을 숨긴 날

낯선 술집 벽 흐린 거울조각 속에서
어두운 시대의 예리한 비수를
등에 꽃은 초라한 한 사내의
겁먹은 얼굴
그 지친 주름살을 죽음이라 부르자

그토록 어렵게
사랑을 시작했던 날
찬바람 속에 너의 손을 처음으로 잡았던 날

두려움을 넘어
너의 얼굴을 처음으로 처음으로
바라보던 날 그날
그날 너와의 헤어짐을 죽음이라 부르자

바람 찬 저 거리에도
언젠가는 돌아올 봄날의 하늬 꽃샘을 뚫고 나올
꽃들의 잎새들의
언젠가는 터져 나올 그 함성을
못 믿는 이 마음을 죽음이라 부르자

아니면 믿어 의심치 않기에
두려워하는 두려워하는
저 모든 눈빛들을 죽음이라 부르자

아아 1974 년 1 월의 죽음을 두고
우리 그것을 배신이라 부르자

온몸을 흔들어
온몸을 흔들어
거절하자

네 손과
내 손에 남은 마지막
따뜻한 땀방울의 기억이
식을 때까지

(이상 '1974년 1월'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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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협박당하고 끌려가고

 

 

고영하와 문국주는 방으로 들어오지도 않고 마당에 선 채로
대짜고짜 좋게 말할 때 우리와 같이 가잔다.

고집을 부리면 강제로 납치할 각오로
자가용까지 대기시켜 놓았다고 기세가 등등하다.

그들의 말인즉슨 한마디로 위암이란 게
방사선과 항암제로 치료될 병이 아니라는 거다.

방사선 치료는 원폭 피해자들처럼
핵 폭발물에 온몸을 노출시키는 거나 다름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몸속으로 끌어들이는 것이란다.

우리 형수 병 낳게 할려면
민간요법인 자연 건강법에 의존해야만 되는데
우물쭈물할 시간적 여유도 없고 한시바삐 시작해야 한다는 거다.

광주에서 가톨릭 농민회 활동하는 분 가운데
자연 건강요법으로 암을 치료하는 유명한 전문가가 있으니까
지금 당장 같이 내려가자는 거다.

나는 우선 방으로 올라와 앉아서 얘기하자 하고
혜숙의 몸이 의학적으로 이러저러한 상태에 있고
앞으로 남은 의학적 노력도 한시적인 것이니만큼
우선 현대의학에 의존해서 최선을 다한 연후에
생각해 보겠노라고 차분차분 얘기했다.

하지만 이들은 막무가내였다.
형이 뭘 알지도 못하면서
중간에서 가로막고 있는 줄 다 알고 왔다는 거다.

의과대학을 다녔던 고영하가 특히 더 심했다.
형수의 병을 자기도 웬만큼은 안다고 했다.

형수의 병은 양의학에서 말하듯 갑자기 생긴 게 아니란다.
오랜 세월 민주화 운동을 하는 과정에서
일상생활이 안정되지 못하고 불규칙하다 보니까
신체 리듬이 변하고 체질이 바뀌어서 그런 거란다.

혜숙과 동년배인 문국주는 이 일은 특히
우리 동료들이 함께 책임지고 다같이 감당해야 할 문제이지
형과 형수만의 문제가 아니라 했다.

주위 사람들 모두가 관심을 가지고 있고
그러니만큼 힘을 합해서 다시 살려내야 할 문제라면서
오히려 나를 향해 형님은 너무 나서지 말고
주위에서 하자는 대로 따르기만 하라고 욱박지른다.

나는 그들의 속 깊은 뜻은 고마웠지만 치료 방법에서
내 뜻을 굽히고 물러설 마음이 전혀 없던 터라
신경이 예민해 지고 언성이 점점 높아 갔다.

" 야! 너는 네 아버님께서도 지역 사회에서 저명한 외과의사시고
너도 의과대학에서 현대의학을 전공했던 처지에
어떻게 인류사회가 오랜 세월 수많은 임상 실험과 경험을 통해서
과학적으로 발전시켜 온 성과를 그리 무시하는 거냐!...
나도 자연 건강법이니 민간요법이니 하는 얘기
귀가 닳도록 들었는데 가만히 듣고 보면 그렇게 하다가
효험이 있었다거나 살아났다는 얘기만 들었지...
효과가 별로 없었다거나 아무 소용없었다는 얘기는
전혀 들어보지 못했는데...
그런 만큼 나는 비과학적이라고 생각하는 거다!
100 명의 환자를 임상 치료했으면
그 중에서 10 명이 됐든 90 명이 됐든
성공률과 실패율이 종합해서 통계적으로 나와야지...
구름잡는 식으로 1 명인지 99 명인지
밑도 끝도 없이 살았다는 둥 효험이 있었다는 둥 하니까...
도대체 뭘 보고 신뢰하겠냐!!!....."

본래 남달리 집요하고 고집이 센 고영하는
전혀 물러설 기미가 없다.

형님이 몰라서 그렇지 영국과 일본에서도
많은 임상 경험이 있고 성공한 사례도 많다는 거다.

특히 일본에서는 저명한 의과대학 교수들이
현대의학의 방법에 한계를 느끼고

민간요법에 의한 자연 건강법을
집중적으로 연구하고 체계를 세워서

공식적으로 임상치료에 적용한 결과
의학적으로도 상당한 성과를 거두고
일단의 학파를 형성하고 있다는 거다.

형수의 몸이 조직 검사 결과
위험한 상태로 진단이 나왔다면
애당초 수술을 하지 말고
자연 건강법에 의존했어야 했단다.

어차피 여기까지 온 바에야 앞으로라도
방사선과 항암제 치료를 받아서는
절대로 안 된다는 거다.

만약에 형님이 계속 고집을 부린다면
형님이 형수를 죽이는 거라고
극단적인 말도 서슴치 않는다.

그냥 피차가 뜨거운 동지애를 가지고
차분차분 얘기해서 넌지시 거절하려던 내 생각은
점점 빗나가고 있다.

막판에는 내가 일단 여기서 끝내고
생각 좀 해보자고 했고

그들은 이대로 그냥 놔두면
형님이 방사선과 항암제로
형수를 죽이고 말게 뻔한데

납치를 해서라도
광주까지 데리고 가야겠다고 했다.

한동안 더 실갱이 하고 옥신각신 하다가
나와 혜숙은 결국 광주로
끌려 내려갈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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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고향만큼 친근한 광주

 

 

1974 년 민청학련 사건 이후로
나는 다른 지역보다도 광주를 자주 내려간 편이다.

어쩌면 가까운 고향이나 선산보다도
멀리 떨어진 광주에 내려갈 기회가 더 많았다.

한국의 학생 운동을 이끌어 온 세력을
출신 지역별로 살펴 보면 대체로

50 년대부터 60 년대 초중반까지는
경북고를 중심으로 한 영남 출신들이

60 년대 중반부터 70 년대 초반까지는
서울과 수도권 지역 출신들이

그러다가 70 년대 초중반 무렵부터 80 년대 말까지
무려 15 년 여 동안은 광주일고를 중심으로 한
호남 지역 출신들이 주도하다시피 했다.

심지어 중앙정보부와 보안사령부 치안본부 등에서는
각 대학마다 광주일고 출신 학생들의 명단을 작성해서
모두 요시찰 감시 대상으로 삼았었을까...

80 년 5 월
치열했던 광주 민주화 운동도
이런 일련의 흐름과 무관하지 않았다.

광주에 내려가면 가까운 동료들만도
헤아리기 어려울만큼 많고
지역 사회 운동을 이끄시는 선배 어르신들도
대개 잘 아는 사이다.

그러니만큼 광주는 내게
고향만큼이나 친근한 곳이다.

오랜 만에 광주에 들어 섰다.

80 년 5 월의 도시...
무등산의 도시...
나의 친구와 선후배 동료들의 보금자리 광주다.

안내를 받고 낯선 집에 들어 서니
낯익은 분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장두석 선생...
성함으론 누구신가 했는데
만나 뵈니 서울에서 중요한 전국회의 때마다
더러 뵙던 분이다.

그러고 보니 광주가 더욱 낯설지 않고
친근하게 다가 온다.


▲ 장두석(1938~2015) 선생

우리는 서로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장두석 선생은 혜숙이 입원한 직후부터
소식을 전해 들어 잘 알고 있었다고 했다.
나보다도 훨씬 먼저 알고 있었던 셈이다.

그러지 않아도 우리 집으로
직접 문병을 올려고 하셨단다.

우리가 내려 온다는 기별을 받고
식사 준비를 해 놓았으니
우선 간단하게 씻고 저녁을 먹자 하신다.

우리가 묵게 될 방에 들어서니
한 켠에 운동 기구가 놓여 있고
방 문짝같이 생긴 나무판이 서너 겹 세워져 있다.

그 곁에는 베개용으로 보이는
반달형 나무토막이 놓여 있다.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는 방을 둘러 보고
우리는 한 켠 구석으로 짐을 가지런히 챙겨 놓았다.

장두석 선생은 어린 시절
심한 간질환과 폐수증으로
사경을 헤맸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견딜 수 없어
산으로 들어가 산생활을 하는데
어느덧 몸이 점점 좋아지고 병이 완치되는 기적을
체험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후로 자연 건강법에 눈을 뜨고
전통의학과 민간요법
동서고금의 의학서들을 접하면서
자연과 생활에 기초한 민족의학의 체계를 세우는 데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가톨릭 농민회 활동을 통해서
지역 사회 운동에도 적극 참여했다.

우리나라가 서구화되고 산업화됨에 따라
자연 환경이 파괴되고 그 피해가 점점 드러나자
일찍부터 환경 운동에 앞장서기도 했다.

신용협동조합과 양서협동조합 운동
민주화와 통일 운동에도 적극 참여하면서
여러차례 옥고를 치루기도 했다.

장두석 선생은 세워져 있던 나무판을 방바닥에 뉘어 놓고
반달형 나무토막을 그 위에 올려 놓았다.

그리고는 혜숙의 얼굴을 찬찬히 살피면서 누우라고 한다.
혜숙의 눈꺼풀을 까뒤집고는
위로 아래로 좌우로 움직여 보란다.

그런 다음 두 팔을 꼼꼼하게 검사하듯 들여다 본다.
두 발도 자세히 살핀다.
손과 발, 팔의 한 지점을 손가락 끝으로 눌러 보곤 한다.

혜숙은 어떤 지점에서 통증을 심하게 느끼듯
'아~~~아!' 하며 비명을 내지른다.

한동안 심각하고 진지한 자세로
장 선생은 혜숙의 신체를 이리저리 진찰한다.

" 수술을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힘들게 됐어...
양의 하는 놈들은 과학이니 현대 의학이니 해 가면서
환자들에게 무조건 마구 칼을 대고 잘라 내고
하는 방법으로밖에 취급을 안 하니 참 큰일이야...
사람의 생명체에 치명적인 독이 되는 약물이나 마구
집어 넣고 말이야....."

그는 서양 의학에 대해서
입에 담지 못할 표현까지 섞어 가며
격렬하게 욕을 해 대다시피 했다.

그러면서 암의 근본적인 원인은
바로 잘못된 먹거리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제부터라도 음식 생활을 바꾸고 습관을 바꾸어서
자연식을 철저하게 해야 한다는 거다.

가장 중요한 것은 밥일텐데
백미로 지은 밥은 쌀껍질을 완전히 다 벗겨 내서
때깔 좋고 먹기에 부드럽겠지만
인체에 필요한 영양분까지 모두 벗겨 내버린 꼴이 되어
오히려 도움이 않 된다는 거다.

쌀껍질을 3 할 정도 남겨 둔 것을 현미라고 하는데
여기에는 비타민과 미네랄, 필수 지방산 등이
충분히 보존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상적인 음식 생활은
신토불이에 맞추어 먹는 것이란다.

이를테면 우리에게는
우리 땅에서 난 음식이 제일 좋고
계절마다 제 철에 난 채소가 제일 좋다는 것이다.

암 환자의 경우에는 이미 몸의 균형이
깨어져 있는 상태에 있기 때문에
일반적인 식사법으로는
신체적 이상을 극복하기가 매우 어렵다고 한다.

그러므로 때로는 단식과 생식 요법 같은
엄격한 식사요법을 쓰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거다.

저녁상이 마련되었다는 전갈이 왔다.
우리는 안방으로 건너가 상 주위에 둘러 앉았다.

장 선생이 설명한 바대로 현미 잡곡밥이 올려졌다.
현미와 조, 수수, 콩, 통밀 등이 섞인 잡곡밥...
부드러운 맛은 없지만 입에서 백 번을 씹으니까
고소한 맛이 감돈다.

반찬은 주로 각종 야채로 된 것이다.
상추와 깻잎과 케일을 비롯해서 제철 생야채가 가득하다.

밑반찬도 김치와 알타리무, 물김치 등등
열을 가하지 않고 절이거나 담근 것이 주종이다.

나는 감옥 생활을 포함해서 그야말로 오랜만에
먼 여행길이어선지 시장기도 있었거니와
음식이 너무도 싱싱하고 입에도 맞아
참으로 맛있게 먹었다.

하지만 혜숙은 그저 수저를 드는 시늉을 하더니
이내 내려 놓고 자리를 물러나려 한다.

" 박 선생... 병을 고칠려면 억지로라도 좀 먹어야 돼요...
병원에서 한다는 짓들이라는 게 신체 기능을 다 잘라 내지 않나
항암제니 방사선이니 해 가면서 독약이나 다름없는 것들을
몸 속에 마구 집어 넣고 쏘이지를 않나...
그러니 아무리 몸에 좋다는 음식인들 먹히겠냐 말이요...
이거야말로 생사람 잡는 짓들이지....."

장 선생은 말끝마다 서양의학을 호되게 비판했다.
서양의학은 인체에 나타나는 증상을
모두 질병으로 본다는 거다.

몸에서 열이 나면 해열제를 먹여서 억지로 열을 낮추고
설사를 하면 지사제를 써서 억지로 설사를 멈추게 한다는 거다.

하지만 우리 조상들은 사람에게 생기는 증상을
몸 안에서 자연적으로 치유하려는 현상으로 본다는 거다.

이를테면 몸에서 열이 나면
몸 안에 들어 온 병균과 싸워서 이기기 위해
열을 내는 것이라 보고 오히려 열을 더 북돋운다는 거다.

설사를 하면 몸 안에 있는 이물질이 더 많이 빠져 나가도록
오히려 설사를 더 북돋아야 한다는 거다.

간질의 경우도 온 몸을 떨면
몸에 피를 돌리기 위해 떠는 것으로 보고
더욱 더 떨게 해 주어야 한다는 거다.

우리는 장 선생의 주장이 그리 마음에 와 닿지 않았다.
현대의학의 성과와 업적을 전적으로 외면하고 부정하기에는
너무나 절박한 처지에 놓여 있는 형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왕에 광주까지 먼 길을 온 바에야
민족생활의학과 자연 건강법이 무언지...
혹시 무슨 도움이라도 얻을 수 있는지...
알아 보는 정도라도 필요하겠다 싶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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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숙변과 마그밀 

 

 

저녁 식사가 끝나자 장 선생은 나에게도 똑같이
함께 치료 받고 훈련 받을 것을 주문했다.

아내의 병이 워낙 위중한 상태여서 엄격한 훈련이 필요한데
그러기 위해서는 남편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단다.

때때로 아내가 규칙대로 실행하기를
게을리 하거나 힘들어 할 경우에
남편과 함께 하는 가운데 큰 위안이 되고
어려움도 덜 수 있다는 거다.

나 역시 오랜 동안의 감옥 생활과 불규칙한 사회생활
식생활 등등으로 잘못되어 있는 체질을
바꿀 필요가 있다는 거다.

나는 아내와 함께 하겠노라고 흔쾌하게 응락했다.
장 선생은 무엇보다도 우선해서 몸 속의 숙변을
제거해 내야만 한단다.

재를 남기지 않는 땔감이 없듯이
우리 몸에도 연료가 되는 음식물을 소화하는 과정에서
찌꺼기가 남게 되고 이 찌꺼기의 대부분은
변으로 대장에 담겨져 있다가 밖으로 배설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대장에 저장된 변 속에는 많은 세균들이 기생하면서
끊임없이 부패하고 발효 작용을 일으키는 가운데
인체에 해로운 여러 가지 화학물질이
때로는 체액 속에 흡수되어
자가 중독 현상을 일으키기도 하고
이로 인해 여러 가지 신체 장애가 발생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사람의 몸 속에는 100 미터가 넘는 대장이
꼬불꼬불 겹쳐서 배 속에 들어 있는데
변이 장에서 빠져 나가지 못하고 오랫동안 남아 있게 되면
일산화탄소, 암모니아가스, 아황산가스 등등의
유독 가스가 발생하게 되고

이 가스들이 혈액 속으로 유입되면서 혈액이 산성화 되는데
이렇게 되면 각종 질환을 일으키는 원인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동서고금의 많은 의학자들이
숙변을 곧 만병의 원인으로 삼고 있다는 것이다.

숙변은 사람에게만 있는 것이란다.
네 발로 걷는 야생동물들은 척추를 좌우로 움직이고
구부렸다 폈다 하면서 복부의 상하 운동이 활발하기 때문에
변비나 설사가 생기지 않는단다.

그런데 인간은 두 발로 서서 활동하기 때문에
대장과 소장이 활동성과 탄력성을 갖지 못하고
장 벽에 많은 주름이 생기면서
변이 말라 붙기가 쉽다는 것이다.

또한 사람은 의복으로 몸을 지나치게 감싸 안아서
피부 호흡 활동을 막아 놓기 때문에
간장이 약해지고 간액의 분비가 줄어 들어서 장의 연동운동이
둔화된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변비가 생기고 변비는 또 장 마비의 원인이 되어서
숙변을 정체시키게 된다는 것이다.

장 선생은 우리에게 만병의 근원인 숙변을 제거하자면서
마그밀을 권했다.

가장 좋은 방법은 단식인데
시간이 오래 걸리고 다른 훈련도 받아야 하니까
손쉽게 내장을 청소하고 설사를 통해서 배설하는 방법으로
마그밀을 복용하는 것이 좋겠단다.

나와 혜숙은 장 선생이 권하는 대로 마그밀을 복용했다.
그러자 한 세 시간 쯤 흐른 뒤부터 배가 뒤틀리더니
그 후부터서는 뻔찔나게 화장실을 들락거려야 했다.

식사 후마다 마그밀을 복용하면서
듣던대로 엄마 젖 먹었을 때부터 장 안에 남아 있던 찌꺼기까지
빠져 나오지 않고는 못배길만큼
우리는 3 일 동안 시도때도 없이 심하게 설사를 해 댔다.

장 선생은 평소에 일상적으로 숙변을 예방하기 위해서는
현미와 생야채식, 그리고 가급적 천연섬유로 만들어 진
얇고 훌렁훌렁한 옷을 입어야 하고
잘 때도 가벼운 이불을 덮고 자야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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