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아내에게 바치는 노래

 

 

민통련과 민청련 합동으로
나의 석방을 환영하고
혜숙의 건강 회복을 격려하기 위한
자리를 마련했다.

많은 이들이 구속되거나
수배 중인 상태였고
어머니 고희연을 통해서
대개 인사 치례는 한 셈이었던만큼

우리 부부를 위해서라면 중차대한 시국에
굳이 그럴 필요가 있겠느냐고 마다했지만

그 때는 공식적이고 공개적인 모임이었고
이번에는 함께 활동했던 가까운 선후배들이
비공개로 모여 허심탄회하게 회포를 푸는 자리라 한다.

이들은 암 환자 몸 보신 위해서
고단백질 식품으로 개고기만한 것이 있겠냐면서
모임 장소를 아예 보신탕집으로 정했다.

나중에 국무총리에 오른 이해찬이
적극적으로 주선해서 마련한 자리였다.

이해찬과 혜숙이 같은 학번으로
민청학련 사건 때도 함께 구속되어선지
그 동기들이 특히 많이 참석했다.

실로 오랜만에 보는 동료들도 꽤 많았다.
오랜 세월 수배 중인 동료들도 더러 있었다.


▲ 1987년 05월 10일 민통련 주관 최민화 석방환영 모임 @ 박용수 선생


모인 동료들끼리도 오랜만인 모양이다.
그러니만큼 서로들 안부를 묻고 격려하고
반가움에 겨워하는 표정들이었다.

어머니 고희연 때 사회를 보았던 이해찬이
이번에도 총대메고 사회 보면서
한사람 한사람의 근황과 형편을 소개한다.
분위기가 무르익어 가면서
한사람씩 돌아가며 노래를 부른다.

그 때만 해도 노래방이 없던 적인가?
아무튼 이런 모양으로 모이게 되면
우리는 언제나 노래하고 춤추고 장끼를 내세우며
시간가는 줄 모르고 즐거웠다.

요즘은 어딜가나 노래방 기계 때문에
그런 분위기 만들기도 맛보기도 어려워졌지만...

노래 이야기가 나와서 잠시 거슬러 보건대
나의 어머니는 노래를 좋아하시기도 하지만
참으로 잘 부르신다.

음악을 전공한 건 아니지만 처녀 적에
여학교 다니면서 간호사로 도립병원에 근무하면서
늘 대표로 뽑혀 노래를 부르셨다.

친정 아버님 목회하시는 교회 찬양대 소속으로
성악가 이인범 김천애 가수 김정구 등등과 함께
함경남북도 전지역을 순회 공연 다니기도 하셨다.

내가 군 복무 중일 적에
모처럼 휴가 나오게 되면

어머니는 내가 들어보지도 못하던 최근 유행가를
밥지으며 청소하며 곱디고운 목소리로 흥얼거리셨다.

노랫말과 가사가 좋아
나도 좀 가르쳐 달라면

어머니는 어린애처럼 반기시면서
가사를 적어 주고 계속 불러 주신다.

이연실의 '새색시 시집가네' 등
양희은의 '세노야' 등등...

특히 양희은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은
백미로 꼽힌다.

나는 세미클래식이나 올드팝
포크송 등을 좋아하는 편이지만

어머니는 명곡에서부터
찬송가 뽕짝에 이르기까지

좋아하는 범위도 넓고
소화해 내는 범위도 넓으시다.

내가 첫 번째 감옥살이 하고 석방되던 날
서울에서 학교 친구와 후배들
10 여 명이 시골집으로 몰려 왔다.

늦으막한 저녁
상 주위에 둘러 앉아 음식을 나누면서

나는 손님들을 핑계삼아
감옥에 있는 동안
어머니 노래가 그렇게 듣고 싶었노라고

안 하던 속내를 드러내며
어머니께 노래를 신청했다.

어머니는 겸연쩍어 하면서 일어서시더니
그동안 어디에 가 있는지 어떻게 지내는지도 모르고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고

몇 달이 몇 십 년처럼 흐른 후에
군법회의에서 15 년 구형 받고

징역 12 년에 자격정지 12 년 형으로
확정되었다는 소식

뉴스로 전해 듣고
마음 가눌길 없었는데

그 때 라디오에서 이 노래가 흘러나와
부르고 또 부르고

눈물짓고 마음 추스리며
다시 부르고 했다면서

노래하신다.

" 무슨 말을 할까요 울고 싶은 이 마음
눈물을 글썽이며 허공만 바라보네

무슨 까닭인가요 말없이 떠난 사람
정말 좋아했는데 그토록 사랑했는데

나는 어떻하라구 나는 어떻하라구
나는 어떻하라구 내가 미워졌나요

믿을 수가 없어요 믿을 수가 없어요
내 말 좀 들어봐요 나는 어떻하라구


나는 어떻하라구 나는 어떻하라구
나는 어떻하라구 내가 미워졌나요

믿을 수가 없어요 믿을 수가 없어요
내 말 좀 들어봐요 나는 어떻하라구


나는 나는 어떻하라구 "
.
.
.
.
.

지금도 이 노래를 부를 적이면
어머니는 꼭 끝 구절을
본디 노랫말과 바꾸어서 반복해 부르신다.
.
.
.

나는 흐르는 눈물을 막을 수 없어
상머리에 머리 처박고
방바닥만 멍하니 보고 있었다.

그 때 나는
눈물이 어떻게 콧속으로 들어가
콧물되어 나오는지 호되게 체험했다.

여학생 둘은 체면이고 뭐고 없이
그냥 엉엉 울어버린다.

막상 노래하는 어머니만이
마음 추스리고 담담하시다.

한 곡 더 부르시라고
재청이라도 해야 예의겠건만

다들 뭔가에
주눅들어 있는 분위기다.

그 후 어머니의 노래는
대학가에 소문으로 번졌다.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나 서울로 이사했는데도
대학 노래패들이 찾아와
고문으로 모시겠다고도 했다.

하나밖에 없는 친정 오라버니께서 독립운동 하시고
그것도 저항적 동요를 작사 작곡하신 탓인지
어머니는 잊혀진 독립운동 노래를
상당하게 기억하고 계셨다.

급기야는 엄혹했던 시절 84 년 5 월
지금 민족예술인총연합의 전신이랄 수 있는
민중문화운동협의회에서 어머니를 초청하여

1 년에 한번 주최하는 공식 행사에
특별 순서를 마련하고 흥사단 대강당에서
독립운동가 등 노래를 공연하시게 했다.

이제 몸은 어찌어찌 움직이고
가벼운 집안 청소도 굳이 하시지만

85 연세에 중풍으로 말씀도 어눌해 지시고
그리 좋아하던 노래 가사도 잊으시는 어머니...

.

.

.
그러고보니 잠시 거슬러 본다는 게
곁길로 새도 한참을 샜다...

다시 본말로 돌아가서
어머니에 비해서는 어림반푼어치도 않되지만

그래도 쪼끔은 대물림 받았는지
어디가서 돌림으로 노래부르면
나도 그리 빠지는 편 아니다.

감옥살이 하면서도 하루에 세 번 들려주는
라디오 스피커 노래 소리에 귀기울이다가
가끔씩 따라서 흥얼거리다보면
어느새 노랫말을 익히게 된다.

그럭저럭 노랫말 외우고 익힌 게
한 100 여 곡은 될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상 노래를 부르라면
무슨 노래 부를까 갑자기 망설여 지고
전혀 생각 안날 때도 있다.

그 날도 내 차례가 오면 무슨 노래 부를까
망설이고 있었다.
그러다가 묘한 생각이 머리를 스친다.

대전교도소에서 출소를 보름 여 앞두고
스피커에서 흘러 나오는 노래를 따라 부르다가
뭐에 홀렸는지 나는 그 노랫말을 꼭 외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언젠가는 동료들과 혜숙이 참석한 자리에서
꼭 한번 불러 봐야지...
하면서 열심히 익히고 출소했다.

이해찬이 그날의 주빈이자 주인공 격인
나와 혜숙을 위해 큰 박수를 보내자면서

'형수님' 내외분이 다정하게 손잡고
함께 노래를 불러 주겠다고 청한다.

나는 여러 동료들과 혜숙이 함께 있는 자리에서
꼭 불러야 할 노래가 있다면서
혼자서 부르겠다고 했다.


▲ 1987년 05월 10일 민통련 주관 최민화 석방환영 모임 @ 박용수 선생

" 젖은 손이 애처러워 살며시 잡아 본 순간
거칠어진 손마디가 너무나도 안타까웠소

시린 손 끝에 뜨거운 정성 고이 접어 다져온 이 행복
여민 옷깃에 스미는 바람 땀방울로 씻어온 나날들

나는 다시 태어나도 당신만을 사랑하리라

미운 투정 고운 투정 말없이 웃어 넘기고
거울처럼 마주보며 살아온 꿈같은 세월

가는 세월에 고운 얼굴은 잔주름이 하나둘 늘어도
내가 아니면 누가 살피랴 나 하나만 믿어온 당신을

나는 다시 태어나도 당신만을 사랑하리라 "


시인 조운파가 작사하고 하수영이 부른
'아내에게 바치는 노래'다.

나는 1 절을 부르고 2 절
'...거울처럼 마주보며 살아온 꿈같은 세월' 하고 부르다가
그만 목이 메여오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어머니께서 '나는 어떻하라구'를 부를 때 만큼은 아니지만
분위기가 착 가라앉고
여기저기서 흑흑하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사회생활 가운데
가장 허물없고 편안한 동료들과 혜숙이 앞에서

나는 울음 섞이고 목메인 소리에 아랑곳 하지 않고
눈물을 참아가며 끝까지 계속 불렀다.

인재근과 양경숙 등등 여성 동료들은 거의 모두
흐느끼며 우느라 정신없어 했다.
혜숙이도 그랬다.

가라앉은 분위기를 바꾸느라 이해찬이 일어나서
친구이자 형수인 혜숙의 답가가 있겠다고 청한다.

나는 혜숙이 무슨 노래를 부를까 궁금했다.
혜숙은 노래를 그리 잘 부르는 편이 아니다.

오래 전에는 노래를 시킬 때마다 못 부른다고
분위기 깰 정도로 빼고 뺀 적 한두 번이 아니다.


" 나 혼자만이 그대를 알고 싶소
나 혼자만이 그대를 갖고 싶소
나 혼자만이 그대를 사랑하여
영원히 영원히 행복하게 살고 싶소

나 혼자만을 그대여 생각해주
나 혼자만을 그대여 사랑해주
나 혼자만을 그대는 믿어 주고
영원히 영원히 변함없이 사랑해주 "

'나 하나의 사랑'이란 노래인데 혜숙은 언젠가부터
노래를 시키면 지긋지긋하게 빼던 일을 멈추고
마지못해 이 노래를 부르곤 했다.

하지만 그때마다 혜숙의 노래는 1 절에서 끝났다.
2 절까지 부르는 건 처음이었다.

곰곰 생각해 보니 그 적에는
왜 굳이 노랫말을 있는대로 다 불렀던지...

그러니만큼 혜숙의 노래는 다른 동료들에게보다도
심금을 울리며 내게 다가왔다.

나는 정작 보신탕을 그리 좋아하는 편이 아니다.
굳이 말하자면 못 먹는다거나 안 먹는 체하는 것이
내숭떠는 꼴불견으로 비치지 않을까 해선지
그저 불편하지 않게 어울려 먹는 정도다.

혜숙은 아예 못 먹는 편이었다.
하지만 그날 혜숙의 건강 회복을 위해서
비밀하게 특별히 마련한 보신탕 파티는
나와 혜숙에게 큰 위안이 되었다.

그 후부터 혜숙은
나보다도 오히려 보신탕을 더 즐겨 먹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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