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 위로가 지나쳐 강요가 되고

 

 

이즈음 선후배 동료와 재야 어르신 등등 많은 분들이
집으로 문병 오거나 나를 밖으로 불러내 위로해 주었다.

하지만 때로는 그냥 위로만 해 주면 좋겠는데
무슨 구름잡는 얘기 같은 것 가지고

이렇게 안 하면 절대로 안 된다면서
선택하고 결단할 것을 강요하다시피 하는 통에
나는 저으기 부담스럽기도 했다.

자연식과 전통 민간요법에 관심 두고 있는 분들은
수술을 하지 말아야 하는 건데 왜 했느냐
신체 기능을 조절해서 회복시키면 되는 건데
왜 몸에 칼을 대고 위를 잘라내 버렸느냐고 야단이다.

어떤 이는 가까운 친척 가운데 암에 걸려
병원에서 포기한 상태로 죽을 날만 기다리던 환자가
가족들에게 폐 끼치는 게 부담스러워서 산속에 들어가
산채나물 뜯어먹고 뱀을 잡아먹고 연명하다보니
어느덧 암 세포가 깨끗이 없어졌더라 면서

마누라를 꼭 살려야겠으면 아무 생각 말고
산속으로 들어가 사는 방법밖에 없다고
나에게 거의 협박하다시피 주장하고 나선다.

어떤 이는 암을 고치는 보약 중에 보약으로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천기 비슷한 비법이 있는데
고양이 머리 골을 이러저러하게 먹으면 즉효를 본다면서
아무 걱정 말고 지금 당장 구하러 가자고 억지를 쓰기도 한다.

어떤 이는 민물장어를 푹 고아 삶아서
물즙을 만들어 가져오기도 하고
어떤 이는 흑염소 탕을 만들어 오기도 하고...
개고기에 각종 한약재를 넣어서 삶아 오기도 하고...

가져오는 이들의 걱정과 염려, 정성어린 마음이
그지없이 고맙기도 했지만
때로는 우리를 너무 피곤하게 만들기도 했다.

어느 날 고영하와 문국주가
건장한 체격의 장정 한 명과 함께 집으로 문병을 왔다.

들어서자마자 문병이라기보다는
무슨 수작을 부리려고 들이닥친 분위기다.

고영하는 연세대 후배로
1974 년 1 월 의과대학 본과 재학 중에
시국 선언문을 낭독하고 구호를 외치다 구속되어
징역 7 년 형을 선고받았다.

문국주는 서울대 사회학과에 재학하던 중
같은 해 4 월 우리 부부와 함께
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되었다.

1974 년...

여기서 잠깐 돌이켜 보면
그 해는 새해 벽두부터 민란을 넘어서 동족상잔의 비극이
한바탕 거세게 휘몰아칠 것 같은 긴장이 감돌던 때다.

1 월 8 일에는 전쟁 상황에서라야
취할 수 있으리라 여겼던 대통령 긴급조치 1 호가
학생들과 민주 인사를 대상으로 발동되었고

그것도 모자라 4 월 3 일에는
유신헌법과 긴급조치에 대해 비판적인 생각을
머리 속에 두고 있는 사람은 물론이거니와

그런 움직임 그런 모임 그런 사람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관계 당국에 신고하지 않은 사람까지 모두
5 년 이상 사형에 처하도록 하는
전대미문의 대통령 긴급조치 4 호가 발동되었다.

그야말로 전 국민을 상대로 한 선전 포고에 다름아니었다.
이 조치로 말미암아 수 천 명이 쥐도새도 알게모르게
연행되어 고문당했고

그 가운데 1,024 명이 구속 수감되었으며
204 명이 5 년 이상 사형 언도를 받고
그 중 8 명은 실제로 사형이 집행되었다.

이런 와중에 대통령 영부인 육영수 여사가
8 월 15 일 광복절 기념식장에서 피살되었다.

지금은 흘러간 과거 역사로 잊혀져 가는 시절...
그 때 그 시절 사회적 분위기를 김지하의 시
'1974 년 1 월'로 더듬어 본다.


ㅡ 1974 년 1 월 ㅡ

1974 년 1 월을 죽음이라 부르자
오후의 거리, 방송을 듣고 사라지던
네 눈 속의 빛을 죽음이라 부르자

좁고 추운 네 가슴에 얼어붙은 피가 터져
따스하게 이제 막 흐르기 시작하던
그 시간
다시 쳐 온 눈보라를 죽음이라 부르자

모두들 끌려가고 서투른 너 홀로 뒤에 남긴 채
먼 바다로 나만이 몸을 숨긴 날

낯선 술집 벽 흐린 거울조각 속에서
어두운 시대의 예리한 비수를
등에 꽃은 초라한 한 사내의
겁먹은 얼굴
그 지친 주름살을 죽음이라 부르자

그토록 어렵게
사랑을 시작했던 날
찬바람 속에 너의 손을 처음으로 잡았던 날

두려움을 넘어
너의 얼굴을 처음으로 처음으로
바라보던 날 그날
그날 너와의 헤어짐을 죽음이라 부르자

바람 찬 저 거리에도
언젠가는 돌아올 봄날의 하늬 꽃샘을 뚫고 나올
꽃들의 잎새들의
언젠가는 터져 나올 그 함성을
못 믿는 이 마음을 죽음이라 부르자

아니면 믿어 의심치 않기에
두려워하는 두려워하는
저 모든 눈빛들을 죽음이라 부르자

아아 1974 년 1 월의 죽음을 두고
우리 그것을 배신이라 부르자

온몸을 흔들어
온몸을 흔들어
거절하자

네 손과
내 손에 남은 마지막
따뜻한 땀방울의 기억이
식을 때까지

(이상 '1974년 1월'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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