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 '접시꽃 당신'과 도종환

 

 

그즈음 출판가에서는 위암으로 세상 떠난 아내를
하염없이 그리워하는 마음을 시집으로 펴낸 도종환의 '접시꽃 당신'이

그야말로 베스트셀러로 파문을 일으키고 있었다.



책을 펴낸 실천문학사 대표이자 시인으로 소설가로
탁월한 작품을 남긴 송기원이 도종환과 함께 찾아 왔다.

도종환은 충북에서 국어 선생으로 재직하다가
지역 사회 단체와 전교조에 가담해서 주도적으로 활동한 일로
해직되어 있던 상태였다.

어찌보면 내가 겪고 있는 고통을 이미 다 겪은
어쩌면 내가 아직 겪지 못하고 있는 고통까지도
이미 겪고 있는 도종환을 보면서
나는 위로를 해야 할지 받아야 할지 참으로 어색했다.

도종환은 얼굴 가득히 진심으로 나를 위로하는 표정이다.
그저 표정으로만일 뿐 도종환은 도시 말이 없다.

복잡다단한 나의 심사를 훤히 꿰뚫어 보면서
처음에는 도대체가 믿어지지 않더라는 둥
아이들 생각하며... 도무지 잠을 이룰 수가 없더라는 둥
지금 얼마나 충격이 크고 고통스럽겠느냐는 둥

도종환은 누구보다도 실감나고 구구절절한 얘기를
나에게 해 줄 수 있는 감성과 표현력을 간직하고 있겠건만
나와 눈길 마주치기조차 어려운 듯
밑으로 옆으로 피하면서 아무 말 없다.
그저 안쓰럽기 그지없는 표정일 뿐이다.

착하디 착하고 맘씨 좋은...
충청도 하고도 법 없이도 살아 가는
산골짜기 촌부의 어눌한 모습일 뿐이다.

" 수술도 수술이지만 항암제 치료가...
그렇게 고통스럽고 견디기 힘들 수 없다던데...
계속 받아야 하는 건지..."

도종환과 나 사이에 흐르는
애틋한 연민과 위로의 정이
너무 어색하고 답답한 나머지

나는 그만 한숨을 내 쉬며
혼자 중얼거리는 건지 도종환에게 묻는 건지
가늠할 수 없는 말이 입에서 저절로 새 나온다.

중간에서 답답한 분위기를 푸느라 열심히 주섬주섬
정신없어 하던 송기원 사장의 말이 갑자기 툭 끊기면서
분위기가 더 무거워 진다.

" 지나고 나니깐... 어차피 그럴 바에야...
그런 고통 안 겪는 게 좀... 편안할 수 있지 않었겠나...
싶어지기두 하더라구요....."

도종환은 내게 딱히 권면하는 정도는 아닐만큼 대답해 온다.

송기원은 도종환과 출판사에서 함께 나오면서
시집 '접시꽃 당신'을 가지고 오려 했는데
도종환이 한사코 말리는 바람에 못 가져 왔다면서
대신 최근에 출간된 책 몇 권을 봉투에 담아 내게 준다.

나는 복잡다단할 나의 심사를 훤히 들여다 보고 있는
시인의 예리한 감성과 배려를 도종환에게서 느낀다.

그로부터 몇 달 후 '접시꽃 당신'이 영화로 만들어졌다.
실천문학사에서 내게 영화 시사회에 꼭 참석해 달란다.

나는 무엇보다도 도종환과 나 사이에 흐르는
연민의 정에 끌려 시사회에 참석했다.



시사회니만큼 영화가 끝나자 기자 등 몇몇 사람이
내게 소감을 물어 왔다.
아마도 영화평을 한마디 하라는 것이겠거니 했다.

하지만 나는 영화에 대해서 별로 말하고 싶지 않았다.
영화 속에서 주인공으로 설정한 아내와 도종환 역은
영화 상영이 마악 끝난 것처럼 지나간 과거형이지만
내게는 아직 끝나지 않고 상영 중인 상태이기 때문이었다.

그보다는 환자의 정서와 심리의 변화...
사랑하는 아내가 죽어 가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는 남편의 심경이
실존만큼 섬세하고 적나라하게 보이지 않고
너무 작위적이라는 느낌 때문이었다.

차라리 도종환의 시를 그대로 빌어
나의 감상을 대신하고 싶었다.
도종환도 그랬겠지.....


접시꽃 당신


옥수수잎에 빗방울이 나립니다.
오늘도 또 하루를 살았습니다.

낙엽이 지고 찬바람이 부는 때까지
우리에게 남아 있는 날들은
참으로 짧습니다.

아침이면 머리맡에 흔적없이 빠진 머리칼이 쌓이듯
생명은 당신의 몸을 우수수 빠져 나갑니다.

씨앗들도 열매로 크기엔
아직 많은 날을 기다려야 하고
당신과 내가 갈아엎어야 할
저 많은 묵정밭은 그대로 남았는데

논두렁을 덮는 망촛대와 잡풀가에
넋을 놓고 한참을 앉았다 일어섭니다.

마음놓고 큰 약 한번 써보기를 주저하며
남루한 살림의 한구석을 같이 꾸려오는 동안
당신은 벌레 한 마리 함부로 죽일 줄 모르고
악한 얼굴 한번 짓지 않으며 살려 했습니다.

그러나 당신과 내가 함께 받아들여야 할
남은 하루하루의 하늘은
끝없이 밀려오는 가득한 먹장구름입니다.

처음엔 접시꽃 같은 당신을 생각하며
무너지는 담벼락을 껴안은 듯
주체할 수 없는 신열로 떨려 왔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에게 최선의 삶을 살아온 날처럼
부끄럼없이 살아가야 한다는
마지막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함을 압니다.

우리가 버리지 못했던
보잘것없는 눈높음과 영욕까지도
이제는 스스럼없이 버리고
내 마음의 모두를 더욱 아리고 슬픈 사람에게
줄 수 있는 날들이 짧아진 것을 아파해야 합니다.

남은 날은 참으로 짧지만
남겨진 하루하루를 마지막 날인 듯 살 수 있는 길은
우리가 곪고 썩은 상처의 가운데에
있는 힘을 다해 맞서는 길입니다.

보다 큰 아픔을 껴안고 죽어가는 사람들이
우리 주위엔 언제나 많은데
나 하나 육신의 절망과 질병으로 쓰러져야 하는 것이
가슴아픈 일임을 생각해야 합니다.

콩댐한 장판같이 바래어가는 노랑꽃 핀 얼굴 보며
이것이 차마 입에 떠올릴 수 있는 말은 아니지만
마지막 성한 몸뚱어리 어느 곳 있다면
그것조차 끼워넣어야 살아갈 수 있는 사람에게
뿌듯이 주고 갑시다.

기꺼이 살의 어느 부분도 떼어주고 가는 삶을
나도 살다가 가고 싶습니다.

옥수수잎을 때리는 빗소리가 굵어집니다.

이제 또 한번의 저무는 밤을 어둠 속에서 지우지만
이 어둠이 다하고 새로운 새벽이 오는 순간까지
나는 당신의 손을 잡고 당신 곁에 영원히 있습니다.

(이상 '접시꽃 당신'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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