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om of Felix Vallotton.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7

 

화가들 중에는 평생을 한가지 화풍만 고집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변화 무쌍하게 다양한 화풍을 보여준 화가들도 있다. 
그런 화가들 중 스위스의 펠릭스 발로통(Felix Edouard Vallotton 1865~1925)은 
정밀한 대상의 묘사에서 나비파까지 연결되는 화풍을 보여 주고 있다.

발로통은 스위스의 로잔에 있는 중류층 집안에서 태어났다. 
1882년, 열 일곱의 나이에 로잔에 있는 학교를 졸업하고 그림 공부를 위해 
파리로 떠난 것을 보면 꿈은 확실하게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대학에서 그가 배운 분야는 고전이었다.

 

Landscape at Arques-la-Bataille, 1903. by Felix Vallotton. oil on board, 67 X 103.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7

 

파리에 도착한 발로통은 줄리앙 아카데미에 입학, 
구스타브 블랑제와 쥘 르페르브 밑에서 공부를 시작한다. 
당시 많은 학생들처럼 발라통도 루브르 박물관에서 대가들의 작품을 보며 많은 시간을 보냈다. 
특히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화가는 홀바인과 뒤러 그리고 앵그로였다. 
이들의 작품은 평생 발라통 미술의 전범(典範)이 되었다.

처음 발로통은 초상화가로 미술가의 경력을 시작했다. 
그러나 1885년, 스무 살 되던 해, 정식 살롱전은 아니었지만 조그만 살롱전에 
출품을 하고 난 후 작품의 주제가 실내 풍경으로 바뀐다. 
작고 정밀한 붓 터치, 선 처리로 아주 섬세하게 사물을 묘사하는 기법도 
이즈음부터 그가 스스로 개발한 것이었다.

 

Interior, Bedroom with Two Figures, 1903-1904, by Felix Vallotton. oil on cardboard, 61.5 X 56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7

 

그의 이런 기법은 대상을 정확하게 그리고자 했던 1920년대의 신즉물주의 화가들의 
기법과 유사한데, 그를 신즉물주의의 선구자라고 평하기도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발로통은 화가보다는 목판화가로 더 미술사에 크게 기록되는 것 같다. 
현대 목판화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평가 받고 있다. 


처음 목판화 제작을 시작한 것은 발라통이 스물 여섯 되던 해였다. 
그리고 얼마 뒤 에칭 분야에도 뛰어든다.
1890년대 책을 통해 그의 수많은 목판화가 소개 되었고 유럽 전역과 
미국까지도 그의 명성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대중들은 그에게 그래픽 미술가의 선두 주자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Lady at the Piano, 1904, by Felix Vallotton. oil on canvas, 43.5 X 57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7

 

많은 잡지에 기고도 하고 포스터 제작에도 열성이었던 발로통은 1893년, 
프랑스 예술가 협회를 탈퇴하고 기존의 살롱전에 반대하던 앙데팡당전에 작품을 출품한다. 
보수적인 비평가들로부터 엄청난 공격이 이어진 것은 예상된 결과였다. 
또한 아르누보 갤러리에 작품을 출품하면서 발라통은 나비(Nabi)파와도 연결고리를 갖게 된다.

이미 자신들을 표현하는 말 안에 신비주의적인 요소를 품은 나비파는 종교적인 주제와 
초자연적인 주제가 주요 모티브였지만 나중에는 일상적인 삶의 주제까지 폭 넓게 다루었다. 
’미술에서 색채는 사물의 원래 색과 같을 필요가 없다’는 고갱의 관념을 
그 시작으로 해서 표현을 단순하게 하고 굵은 윤곽선을 강조해서 
작품 속 대상들에게 영혼을 불어 넣는 것이 그들의 목표였다.

 

Woman with a Black Hat, 1908. by Felix Vallotton. oil on canvas, 81.3 X 6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7

 

나비파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면서 발로통의 작품에서는 

점차 전통적인 기법들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대신 후기 인상파와 상징주의 그리고 일본 판화의 영향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1890년 에콜드 보자르에서 개최된 일본의 우키요에 전시회가 열렸을 때 
많은 화가들이 앞 다투어 작품을 구입했는데 발라통도 예외는 아니었다.

1899년, 34세가 되던 해 발로통은 베르넴 가문의 여인과 결혼을 한다. 
베르넴 가문은 르노와르 작품을 구입한 대표적인 화상이었다. 
아내 덕분에 발라통은 금전적인 여유를 얻게 된다. 
물론 베르넘 전느 (Bernheim-Jeune) 갤러리에 작품을 지속적으로 전시할 수 도 있었다. 
그리고 다음 해에 이 결혼으로 인해 프랑스 시민권도 얻게 되었다.

 

Portrait of Mrs. Haazen, 1908. by Felix Vallotton. oil on canvas, 80 X 6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7

 

유화 작품에 치중하면서 자연스럽게 목판화 제작이 줄어 들었다. 
한편으로는 그림을 그리면서 또 한편으로는 미술 비평도 시작했다. 
비엔나에서는 그의 작품 전시회가 열렸고 독일 잡지에는 그의 비평이 실리는 등 
국제적으로 발라통의 명성이 알려졌지만 정작 그의 고국인 스위스 사람들에게 
그가 알려진 것은 1910년, 그러니까 마흔 다섯이 되고서였다.

1차 대전이 발발하자 발로통은 군에 지원한다. 
그러나 나이 때문에 거절당하는데 그 때 그의 나이가 마흔 아홉이었다. 
비록 군에 입대하지 못했지만 발라통은 그의 장기인 

목판화를 통해 일련의 반전 작품을 제작한다.

전쟁이 끝나고 그의 명성은 퇴조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꾸준히 살롱에는 작품을 출품했다. 
암 수술을 앞두고 있던 발로통은 60세 생일을 보내고 다음 날 세상을 떠났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환갑 다음 날이다.

 

Portrait of G. E. Haasen, 1913, by Felix Vallotton. oil on canvas, 81.7 cm X 100.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7

 

1,700점이 넘는 회화와 드로잉을 남겼다고 하니까 그의 다작에는 그저 입이 벌어진다. 
그 외에도 조각과 3편의 소설, 수많은 연극 대본을 남긴 발라통을 생각하면 
끝없이 열기를 뿜어 내는 용광로가 떠오른다.
스위스 화가인 펠릭스 발로통은 1882년에 파리에 왔다. 
그는 본래 목판화에 탁월한 재능을 보였는데, 

나비파에 합류하면서 장식적이고 평면적인 작품들을 선보였다.

 

[영상] Felix Vallotton in The State Hermitage Museum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