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세 천재 지휘자 Eaward Yudenich - 요한 스트라우스의 박쥐 서곡

 

 

카잔 대성당과 마주보고 있는 싱거(Singer) 빌딩

1902년 미국 재봉틀 회사인 싱거(Singer)는 넵스키 대로와 
그리보예도프 운하가 만나는 모서리에 부동산을 매입했다. 
싱거 러시아 지사 사옥 겸 러시아 쇼룸으로 사용하기 위해서였다. 
건물 디자인은 당시 상트페테르부르크 분위기로는 혁신적이며 대담한 것이었다. 
예를 들자면, 당시로서는 선구적인 금속 골조를 사용함으로써 고층 건물을 짓는 것이 가능했다. 

 

싱거(Singer) 빌딩 - 돔 크니기 (Book House) 

싱거 재봉틀 회사는 당시 미국 내외에서 급속한 확장을 하고 있었고 

러시아 제국은 거대한 시장 중 하나였다. 
싱거 회사는 화려한 상트페테르부르크 지사 건축에 돈을 아끼지 않았다. 
이 건물은 넵스키 대로에서 적어도 11층 이상의 

가장 높은 건물이 될 것으로 당초 설계시 계획되었다. 


하지만 당시에 상업용 건물은 황제의 거처인 높이 23.5 미터 동궁보다 
높이 지어서는 안 된다는 ‘토지이용제한법’이 있었다. 
전통 건축물 보호론자들의 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니콜라이 2세는 싱거(Singer)측에 
높이를 7층으로 제한하고 아르누보 스타일의 건물을 지을 수 있도록 허가했다. 
설계를 맡은 파벨 슈조르는 빌딩의 외면을 유리로 두르고 
금속제 탑은 거대한 지구본과 미국의 문장(紋章)으로 장식했다.

지금까지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싱거(Singer) 사옥 건물은 
넵스키 대로의 가장 유명한 랜드마크 역할을 하고 있다. 
소련 시절 싱거(Singer) 사옥은 서점인 ‘돔 크니기’로 사용되었고 
현재는 시내에서 가장 큰 서점과 문학카페가 들어서 있다. 
서점 위 두 층에는 21세기 들어 러시아의 대표 소셜네트워크 서비스(SNS)인 
프콘탁테 사무실이 자리잡았다.

 

카잔스키 다리(Kazansky Bridge)와 싱거 하우스

넵스키 대로에서 그리보예도프 운하를 가로지르는 카잔스키 다리(Kazansky Bridge)는 
길이가 18.8 미터이지만 넓이가 95.5미터로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두 번째로 넓은 다리이다.
카잔스키 다리(Kazansky Bridge) 양편으로 카잔 성당과 돔 끄니그 서점이 있다.

 

카잔스키 다리에서 본 그리보예도프 운하

카잔스키 다리(Kazansky Bridge)에서 그리보예도프(Griboyedova) 운하 상류를 바라보면
이탈리안 다리 (Italiansky Bridge)를 지나 멀리 성혈성당이 보인다.

 

그리보예도프(Griboyedov) 운하 위에 이탈리안 다리 (Italiansky Bridge)

원래의 보행자 다리는 1896년 이탈리안스카야 울리차 정상의 
그리보예도프(Griboyedov) 운하 건너편에 있는 이 부지에 건설되었다. 
몇 번의 소규모 재건축 후 이 다리는 1955년에 완전히 복구되었다. 

 

이탈리아 다리의 단철 난간

베네치아 식 등불과 장식용 주철 난간으로 장식된 이 다리는 버스커들에게 인기가 있으며 
남쪽으로는 카잔 대성당, 북쪽으로는 피의 구세주 교회를 촬영할 수 있는 훌륭한 장소다.

 

이탈리아 다리 랜턴 - 베네치아 식 등불

 

이탈리안 다리에서 싱거빌딩을 본 풍경

 

싱거(Singer) 빌딩 - 돔 크니기 (Book House) 

'싱거(Singer)'는 가수라는 싱어가 아니라 19세기 중반 획기적인 

가정용 재봉틀을 만들어 세계 시장을 휩쓴 미국 재봉틀 상표 싱어(Singer)이다.
우리는 흔히 '싱거'라고 불렀던 유서 깊은 브랜드이다.

싱거빌딩은 제정 러시아 말기 1904년, 미국 싱어사가 러시아 판매 본부로 지은 미국 건물이다.
그것만으로도 ​넵스키 대로에서  아주 독특한 존재이다.

 

싱거(Singer) 빌딩 - 돔 크니기 (Book House) 파사드 야경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가장 크고 가장 유명한 서점인 돔 크니기(Dom Knigi, 책의 집)는 
넵스키 대로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물 중 하나이자
혁신적이고 풍부하게 장식된 아르누보의 걸작품 중 하나다.

넵스키 대로와 그리보예도프 운하가 만나는 

교차로에 있으며 카잔 대성당 바로 맞은 편에 있다. 
러시아 문화 유산의 대상으로 공식 지위를 가지고 있다.

 

넵스킨 대로에서 정면 보기

 

아르누보의 걸작품 싱거(Singer) 빌딩

싱거(Singer)는 뉴욕에 있는 본사 건물처럼 높다란 마천루로 짓고 싶어했지만
상트페테르부르크 시 조례는 예카테리나 겨울 궁전, 
지금의 에르미타주 미술관의 높이 23.5m보다 높게 짓지 못하게 되어 있었다.
싱거(Singer)사에게 설계를 의뢰받은 러시아 건축가 파벨 수조르(Pavel Suzor 1844~1919)는​
고도 제한을 지켜 6층으로 지었지만 건물을 돋보이게 하는 꾀를 냈다.

 

싱거(Singer) 빌딩 유리 돔

대로 맞은 편 카잔 성당이나 뒤쪽 피의 사원에 눌리지 않으려고
옥상에 지름 2.8m짜리 유리 돔을 한껏 높이 세우는 편법을 썼다.
그리고 유리 돔에는 불을 밝혀 밤에도 눈길을 사로잡는 명물 야경을 만들었다.

유리 돔 위에는 항해를 상징하는 두 여인상이 받쳐든 유리 지구를 올렸다.​​
나중에 돔 앞 건물 정면에는 두 날개를 편 독수리상도 만들어 올렸는데,
미국을 상징하는 대머리 독수리이다.

여기엔 조금 엉뚱한 사연이 있다.​
싱거(Singer) 빌딩은 당시로는 획기적인 엘리베이터, 중앙난방, 에어컨부터
지붕에 쌓인 눈을 자동으로 녹이는 제설 시스템까지 첨단 시스템을 자랑했다.  
러시아 혁명 후에는 국유화된 뒤 정부의 출판사가 되었고
상트페테르부르크 최대 서점 '돔 크니기 (책의 집)'로 오늘에 이르렀다.​

 

싱거(Singer) 빌딩 외벽을 장식한 청동 장식들

싱거(Singer) 빌딩은 외벽을 장식한 청동 장식들도 아름답다.
특히 양쪽 측면과 모퉁이 현관 위 정면에 붙은 세 쌍의 청동상이 백미이다.
​이 청동상은 에스토니아 조각가이자 화가인 
아만두스 아담손(Amandus Adamson 1855~1929) 작품이다.
그는 싱어(Singer) 빌딩과 함께 넵스키 대로에서 가장 아름다운 아르누보 건물로 꼽히는
고급 식품점 엘리세예프스키 상점의 외벽 청동상도 만들었다.

 

싱거(Singer) 빌딩 청동상 - 날개 달린 두 여인이 뱃머리에 올라 서 있는 모습

싱거(Singer) 빌딩의 이 청동상은 날개 달린 두 여인이 뱃머리에 올라서 있는 모습이다.
그런데 왼쪽 모자 쓴 여인은 가슴을 보면 여인인데 얼굴은 각지고 퉁명스러운 남자 같다.

 

싱거(Singer) 빌딩 여인 청동상

오른쪽 여인은 실을 감는 원추형 실패를 치켜들고 있다.
재봉틀 회사 싱거(Singer)를 상징하겠다.
왼쪽 여인은 배를 저어 나아가는 노를 들고 있어서 항해와 교역을 뜻한다.
미국 땅에서 러시아로 기술을 갖고 왔다는 의미겠다. ​
조각상을 비롯한 여러 청동 장식들이 비바람에 씻겨 녹청이 낀 것이
하얗고 붉은 외벽 화강암 석재와 잘 어우러져 있다.

 

측면 창틀 위마다 인물상 '마스카론'이 붙어 있다.

 

그리스 신화에서 영웅 페르세우스에게 목이 잘리는 마녀 메두사.

장식을 겸해 건물에 악령이 접근하지 못하게 하려고 붙이는 
마스카론의  대표적인 예가 되겠다.​

 

아르누보(Art Nouveau) 장식

새로운 예술​을 뜻하는 프랑스 단어 아르누보(Art Nouveau)는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유럽, 미국, 남미까지 유행한 건축-미술-장식 양식이다.
덩굴과 꽃무늬 장식, 이집트나 신화 속 조각상, 중세의 기괴한 마스카론 같은
이국적 요소들을 자유분방하게 동원했다.

스페인의 가우디 역시 아르누보 건축가에 꼽힌다.
세계에서 가장 대표적인 아르누보 도시가 라트비아 리가와 

이곳 상트페테르부르크 넵스키 대로이다.
싱거빌딩 외벽에 걸린 외등에도 아르누보 장식 요소가 뚜렷하다.

 

건물 모퉁이 출입문은 백년 전 작품인데도 현대​ 감각에 전혀 뒤지지 않는다.

 

현관 위 메두사 마스카론​으로 장식한 서점 간판, '돔 끄니기(Дом книги)'

 

돔 끄니기(Dom Knigi) 내부

 

돔 끄니기(Dom Knigi) 내부

 

돔 끄니기(Dom Knigi) 내부

 

돔 끄니기(Dom Knigi) 내부

 

돔 끄니기(Dom Knigi) 내부

 

돔 끄니기(Dom Knigi) 내부

 

[영상] Dom Knigi (House of Books)

 

그리보예도프 운하 위의 반콥스키 다리(Bank Bridge) 

카잔 대성당 옆 그리보예도프 운하에서 하류 방향으로 조금 걸어가면 
황금 날개 그리핀의 반콥스키 다리(Bank Bridge)가 있다.

 

반콥스키 다리(Bank Bridge) 위에서 그리보예도프 운하 상류 방향으로 본 모습

 

반콥스키 다리(Bank Bridge) 

반콥스키 다리(Bank Bridge)는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그리보예도프 운하를 가로 지르는 아늑한 횡단 보도이다.
운하를 통과하는 통로는 금으로 장식된 우아한 날개 달린 사자 동상으로 차려 입고 있다.

 

19세기 반콥스키 다리(Bank Bridge) 

고대부터 신화에 나오는 날개 달린 사자인 그리핀은 금을 침범으로부터 안전하게 보호하고, 
구원의 방법을 알고, 비밀 지식을 보존하는 능력을 인정받아 왔다. 

 

그리핀

4 마리의 날개 달린 사자 조각이 다리를 유명하게 만들었다. 
신비롭고 환상적이며 주변 지역에 특별한 매력을 부여한다.

 

그리핀 마스킹 체인

체인은 주철 프레임에 부착되어 동물의 받침대 아래 기초에 내장되어 조각으로 장식된다. 
그리핀이 이빨로 다리를 잡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사슬이 사자의 입에서 나온다.

웅장한 사자 외에도 다리는 열린 부채와 환상적으로 구부러진 
종려 나무 잎을 묘사한 우아한 격자로 장식되어 있다. 
구조는 트레이 서리 무게가 없는 것처럼 보이며 운하의 잔잔한 물 위에 떠 있다.

 

Openwork 펜스

1826년 8월 5일, 그랜드 오픈 당일, 도시의 주민 9,000여 명이 그리핀 주위에 모였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주민들은 날개가 구리로 만들어지고 금판으로 덮여 있는 
"작은 동물"을 열광적으로 좋아했다 .
주철 구형 랜턴이 사자의 머리 위에 고정되어 있고 그 프레임은 섬세한 격자 무늬의 
섬세한 패턴을 배경으로 순금으로 빛났다.

반콥스키 다리에서는 넵스키 대로와 싱거(Singer) 빌딩, 카잔 대성당 및 
피의 구세주 교회의 측면 외관을 아름답고 희귀한 풍경으로 볼 수 있다. 

 

구형 랜턴

금박으로 덮인 주철 창살은 금을 긁어 내고 모으려고 애쓰는 사람들에 의해 훼손되었다.
1952년에 건축가 로태취(A. L. Rotach)는 오래된 도면에 따라 
반콥스키 다리(Bank Bridge)의 격자를 복원하고 원래 위치로 되돌렸다.

 

반콥스키 다리(Bank Bridge) 

다리의 나무 데크, 십자가 및 크로스바는 1949년에  재정비되었다. 
1952년에 주철로 만든 예술적 울타리가 복원되어 금박으로 덮여 있다. 
잃어버린 랜턴은 그리핀의 머리 위에 다시 설치되었다.
2008년 그리핀 피규어는 그 자리에서 수리되고 금도금 날개가 복원되었다. 

 

파손으로부터 보호되는 금도금 펜더

2017년 1월, 그리핀은 반콥스키 다리(Bank Bridge) 를 떠났다. 
이음새가 나뉘어진 조각품은 복원을 위해 제거되었고 파손 방지 코팅으로 덮여 있었다.

2019년 6월 19일, 그리보예도프 운하에서 교차로가 재개방되었다. 
그리핀의 복원된 모습이 시민들 앞에 다시 나타났다.

 

니콜라이 고골(Nikolai Vasilievich Gogol) 기념비

싱어(Singer) 빌딩 돔 끄니기(Dom Knigi) 서점에서 오른쪽 
말라야 코뉴센나야 울리차(Malaya Konyushennaya Ulitsa) 거리로 조금 걸어가면 
니콜라이 고골(Nikolai Vasilievich Gogol) 기념비가 있다.

 

니콜라이 고골(Nikolai Vasilievich Gogol) 기념비

니콜라이 고골(Nikolai Vasilievich Gogol 1809~1852)은 우크라이나의 작가이며 극작가이다.
1809년 우크라이나에서 소지주의 아들로 태어나 1818년 풀타바 군립학교를 거쳐 
1829년 네진 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젊었을 때 배우를 지망했으나 성공하지 못해 문학으로 전환한 고골은 
철학, 문학, 역사에 관심을 두었고 이후 종교적이고 철학적인 작품을 쓰게 된다. 

1827년에 페테르스부르크로 이주하여 우크라이나 인민의 생활을 취재한 소설 
<디카니카 근교 농촌 야화>를 출판하여 크게 명성을 얻었으며, 이때부터 푸시킨을 사귀고 
이후 그가 남긴 대작의 소재는 거의 대부분 푸시킨으로부터 영감을 받았다. 
1834년 페테르스부르크 대학의 조교로서 세계사를 강의했으나 실패하여 곧 퇴직하였다. 
1836년 희극 <감찰관>을 알렉산더 극장과 모스크바에서 상연하였다. 
이는 진보 세력의 절찬을 받았지만, 지배 세력으로부터는 공격을 받게 되어 그는 로마로 갔다. 

그 후 계속하여 스위스 · 파리 · 로마 등지에 거주하였다. 
1847년에 또 하나의 대표작 <결혼>을 쓰고, 같은 시기에 로마에서 
명작 <죽은 혼>의 제1부를 완성했고 제2부의 집필을 시작하며 
1848년에 다시 러시아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건강을 해친 뒤였다. 
결국 <죽은 혼>을 모스크바에서 완성했으나 자신의 뜻을 전달하는 데 어려움을 느끼고, 
정신적 고뇌와 사상적 동요로 인해 정신 착란에 빠져 
원고를 불 속에 던지고 10일간의 단식으로 자살하였다.

 

니콜라이 고골(Nikolai Vasilievich Gogol) 기념비
기념비 뒤에서 넵스키 대로를 향해 보면 카잔 대성당이 바로 보인다.

그는 작품 속에 당시의 러시아의 현실, 특히 지주 사회의 도덕적 퇴폐와 
관료 세계의 결함과 부정 등을 예리한 풍자의 필치로 사실적으로 그려냈다. 
고골의 사실주의 정신이 훗날의 러시아 문학과 연극에 미친 영향은 매우 크다고 하겠다.

 

러시안 레스토랑 카츄사(Rusian Restaurant Katyusha)

 

싱거(Singer) 빌딩 돔 끄니기(Dom Knigi) 서점에서 오른쪽 
말라야 코뉴센나야 울리차(Malaya Konyushennaya Ulitsa) 거리 건너편 건물 1층과 지하에 
러시안 레스토랑 카츄샤(Rusian Restaurant Katyusha)가 있다.

 

레스토랑 카츄사(Katyusha)에서 넵스킨 대로 맞은 편은 카잔 대성당이다.

 

카츄사(Katyusha) 여름 파빌리언(Pavilion) 

여름 성수기에는 건물 옆 울리차(Malaya Konyushennaya Ulitsa) 거리에 
러시안 레스토랑 카츄샤(Rusian Restaurant Katyusha) 가설 건축물이 세워지고
영업하면서 성수기를 누리고 있다.

 

카츄샤(Katyusha)

카츄샤(Katyusha)는 러시아의 대중가요이자 군가다.
1938년에 작곡된 노래로, 전쟁터에 나가 있는 연인이 

무사하기를 기원하는 처녀 카츄샤에 대한 노래다. 

카츄사(Katyusha)는 가파른 강둑에 서서 

먼 곳에서 복무하는 사랑하는 군인에게 노래를 보낸다. 
노래의 주제는 전쟁터에 나가 목숨을 걸고 싸우는 군인은 조국과 국민을 지키고, 
소녀 카츄사(Katyusha)는 희생에 대한 감사함으로 그들의 사랑을 지키겠다는 ​​것이다. 

제2차 세계 대전 때 많은 소련의 남성들이 조국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아내와 여자 친구를 떠나 위대한 애국 전쟁에 복무하다가 

수많은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고
소련군에서 8,668,400 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산된다.

작곡가인 마트베이 블란테르가 국립 빅밴드였던 소련 국립 재즈 오케스트라의 
첫 공연을 위해 해당 악단 지휘자였던 빅토르 크누셰비츠키에게 위촉받았고, 
돔 소유조프의 콜론늬 홀에서 초연되자 무려 세 번이나 앙코르를 받은 바 있다. 
작곡자가 명백하기 때문에 민요는 아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소련 국립 재즈오케스트라의 공연이 초연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이 콘서트의 최종 리허설에 참석했던 리디야 루슬라노바라는 사람이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자신의 무대에서 먼저 불러버린 것. 
여담으로 누가 라디야 루슬라노바에게 '악보도 없이 어떻게 곡을 불렀죠?'라고 물어보자 
'난 듣자마자 너무 황홀해서 그 곡을 그냥 외워버렸습니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이 노래는 대 조국전쟁을 통해 크게 유행했다. 
러시아 내에서만 300가지의 버전이 수집되었다고 한다. 
그 뒤 한국의 아리랑과 같은 러시아의 국민 가요가 되었고, 
현재도 전승기념일과 같은 때 많이 불리고 있다. 

노래 카츄사(Katyusha)는 러시아 국내뿐만 아니라 

이탈리아, 스페인, 그리스. 이스라엘, 중화인민공화국, 인도, 몽골, 인도네시아 등 

많은 나라에서 각각의 버전으로 불리면서 인기를 끌었다.

 

카츄사(Katyusha) 노래를 부르며 손님을 불러 모으고 있다.

 

[영상] 러시안 레스토랑 카츄샤(Rusian Restaurant Katyusha)

배경 음악 - Song of Katyusha

 

레스토랑 안에서 밖을 보면 카잔 대성당이 살짝 보인다.

 

카츄사(Katyusha) 레스토랑 내부

 

카츄사(Katyusha) 레스토랑 내부

 

카츄사(Katyusha) 레스토랑 내부

 

[영상] 웨이트레스들이 카츄사(Katyusha) 노래를 합창한다.

 

카츄샤 원본 가사와 한글 발음과 번역

Катюша 캬츄샤 / Katyusha

 

1

Расцветали яблони и груши, 라스쯔비딸리 야블라니 이 그루쉬,

Поплыли туманы над рекой. 빠쁠릘리 뚜마늬 나드 리꼬이

Выходила на берег Катюша, 븨하질라 나 볘롁 까쮸샤,

На высокий берег на крутой. 나 븨쏘끼이 볘롁 나 끄루또이

 

사과꽃 배꽃이 피었지.

구름은 강 위를 흘러가네.

카츄샤는 강 기슭으로 나와

높고 가파른 강둑을 걸어가네.

 

2

Выходила, песню заводила 븨하질라, 뼤쓰뉴 자바질라 

Про степного, сизого орла 쁘라 쓰찝노바, 씨자바 아를라 

Про того, которого любила 쁘라따보 까또라바 류빌라 

Про того, чьи письма берегла. 쁘라따보, 치 삐쓰마 볘례글라

 

노래를 부르며 걸어가네,

초원의 잿빛 독수리에 대해서

사랑하는 이에 대해,

소중한 편지를 보내오는 이에 대해서.

 

3

Ой ты, песня, песенка девичья, 오이 띄, 뼤쓰냐, 뼤쏀까 졔비치야,

Ты лети за ясным солнцем вслед. 띄 리찌 자 야쓰늼 쏜쩸 프쓸롓.

И бойцу на дальнем пограничье 이 바이쭈 나 달님 빠그라니치이

От Катюши передай привет. 아뜨 까쮸쉬 뼤례다이 쁘리볫

 

오! 노래야 처녀의 노래야,

저 빛나는 해를 따라 날아가,

머나먼 국경의 병사 하나에게

카츄샤의 인사를 전해다오.

 

4

Пусть он вспомнит девушку простую, 뿌스찌 온 프스뽐닛 제부쉬꾸 쁘라스뚜유,

Пусть услышит, как она поёт, 뿌쓰찌 우쓸릐쉿, 깍 아나 빠욧,

Пусть он землю бережёт родную, 뿌쓰찌 온 졤류 볘례죳 라드누유,

А любовь Катюша сбережёт. 아 류봅 까쮸샤 즈볘례죳

 

그로 하여 순박한 처녀를 생각케 하고,

그녀의 노래를 듣게 하렴.

그로 하여 조국을 수호하게 하고,

카츄샤가 사랑을 간직할 수 있도록.

 

카츄사(Katyusha) 레스토랑 메뉴

 

카츄사(Katyusha) 레스토랑 메뉴

 

카츄사(Katyusha) 레스토랑 내부 공연

 

카츄사(Katyusha) 레스토랑 내부 공연

 

카츄사(Katyusha) 레스토랑 내부 공연

 

카츄사(Katyusha) 레스토랑 내부 공연

 

카츄사(Katyusha) 레스토랑 내부 공연

 

카츄사(Katyusha) 레스토랑 내부 인증샷

 

카츄사(Katyusha) 레스토랑 내부 공연

 

카츄사(Katyusha) 레스토랑 내부 공연

 

[영상] 카츄사(Katyusha) 레스토랑 전속 가수 공연

신청곡을 받아 주고 우리에게 익숙한 노래도 불러 준다.

 

넵스키 대로와 카잔 대성당 - 모스코프스키 역 방향

 

넵스키 대로와 카잔 대성당 - 구 해군성 방향

 

그리보예도프 운하 카잔스키 다리(Kazansky Bridge)와 카잔 대성당

 

그리보예도프(Griboyedova) 운하는 미하일로프스키(Mikhailovsky) 정원 근처의  
모이카(Moyka) 강에서 시작되어 폰탄카 강으로 흘러 들어가는

길이 5km, 너비는 32미터 되는 작은 운하이다. 


1923년 이전에는 캐서린 대제(Catherine the Great)의 이름을 따서 

캐서린(Catherine) 운하라고 불렸다.  
소비에트 공산당은 러시아 극작가이자 외교관인 

알렉산드르 그리보예도프의 이름을 따서 명칭을 바꿨다.


넵스키 대로에서 그리보예도프 운하 카잔스키 다리(Kazansky Bridge)를 건너면 
카잔 대성당과 유서깊은 돔 끄니기(Dom Knigi) 서점이 도로 양편에 있다.

 

그리보예도프 운하와 카잔 대성당

 

그리보예도프 운하 카잔스키 다리(Kazansky Bridge)와 카잔 대성당

 

카잔 대성당(Kazan Cathedral)

 

카잔(Kazan)은 러시아 타타르스탄(Tatarstan)공화국의 수도이지만,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몽골이 세운 킵차크 한국(Kipchak Khanate)과 

카잔 한국(Kazan Khanate)의 수도로, 러시아 이반 뇌제(Ivan the Terrible 1530~1584)는 

카잔 한국을 멸망시키고 그 지배에서 벗어난 기념으로 
모스크바 붉은 광장에 성 바실리 성당을 건립하였다.

알렉산드르 1세(Alexander Pavlovich Romanov 1777~1825) 시기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러시아 정교회의 본당으로 건립한 성당의 이름을 

카잔 대성당(Kazan Cathedral)으로 정한 이유는 지역적, 역사적인 배경이 아니고, 

러시아 정교회 신자들의 신앙의 상징인 이콘화(Icon)와 관련이 있다.

 

카잔 대성당(Kazan Cathedral)

로마의 산 피에트로 대성당(San Pietro Basilica)을 본뜬 네오클래식 양식의 건물이다.
스트로하노프 백작의 농노 출신 건축가 안드레이 바로니킨(Andrei Nikiforovich Varonikhin)에 

의해 1801년부터 10년에 걸쳐 지은 아름다운 성당으로 

소비에트 시절 한때 금지되었던 예배가 지금은 진행되고 있다. 
성당이 완성된 후 러시아는 나폴레옹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성당 안에는 프랑스 군에게서 탈취한 107개의 군기가 장식되어 있는데 

그중 화려한 이코노스타스는 프랑스군이 러시아 교회로부터 빼앗은 은을 

돌려받아 만든 것이며 쿠투조프 사령관과 바르클레이드 토리 동상은 

승전을 기념해 만든 것이다. 
19세기 말 경부터 혁명 때까지 성당 앞 광장은 학생들의 집회 장소였으나 
지금은 평화로운 휴식처가 되고 있다.

 

그리보예도프(Griboyedov) 운하에서 바라본 카잔 대성당

사람들은 카잔 대성당을 러시아 자연석 박물관이라고 부른다. 
주로 쓰인 석재가 상트페테르부르크 근교에서 채취한 석회화된 응회석인데 
이 돌이 성 베드로 대성당을 지을 때 쓰인 이탈리아 석회석과 닮았기 때문이었다. 
다공성 응회석은 쉽게 가공할 수 있어 성당의 외벽이나 기둥머리, 프리즈, 문턱을 만드는 데 쓰였다. 
내부 장식을 위해 보로니힌이 선택한 석재는 카렐리야 대리석, 현지 반암, 벽옥이었다. 
성당 실내는 담홍색 화강암으로 세운 56개의 기둥과 금을 입힌 기둥머리로 장식하였다.

 

카잔 대성당 3D 모델

서쪽에서 동쪽으로 뻗어 있는 넵스키 대로 곁에 사원을 짓기로 결정하게 되자
건축가 바로니킨은 성당의 위치를 어떻게 설정해야 될지 고민에 빠졌다고 한다. 
러시아 정교회의 제단은 서쪽을 향해야만 했는데 그렇게 하려면 

입구가 넵스키 대로를 바라보는 수밖에 없었다. 
즉 넵스키 대로에서 볼 경우 성당의 측면이 보이게 된다. 

이에 바로니킨(Varonikhin)은 측면 파사드에 장엄한 반원형 콜로네이드를 추가하여 
측면 파사드를 메인 파사드가 되도록 시각적으로 변형하여 이 문제를 훌륭하게 해결했다. 
석고대리석으로 1m정도 씩 이어서 만들어진 96개의 기둥으로 성당의 주위를 둘러싸는 방법이었다.

 

카잔 대성당 코린트양식 대기둥

4열로 배치된 96개의 코린트 양식 대기둥은 바티칸의 성 베드로 대성당을 연상케 했다. 
1811년 9월 10년 만에 교부(Metropolitan) 성 암브로스(Ambrose)는 새로운 카잔 대성당을 봉헌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카잔 대성당이 완성된 후 러시아는 나폴레옹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육군 원수 미하일 쿠투조프 (Mikhail Kutuzov) 기념 동상

성당 봉헌 1년 뒤 발발한 전쟁에 출전하기 전 러시아군 사령관 
미하일 쿠투조프(Mikhail Kutuzov 1745~1813)는 성당을 찾아 가호와 승리를 빌었고, 
실제로 전쟁에 승리하면서 카잔의 성모의 명성은 더욱 높아졌다.

미하일 쿠투조프는 러시아의 야전 원수로 1812년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기간 중 
프랑스의 대육군(Grande Armée)을 패퇴시켰다. 
나폴레옹이 추위를 견딜 수 없도록 먹을 것과 땔감마저 없앤 후 
도시를 비워 나폴레옹이 지치게 만들었던 그 유명한 일화의 주인공이다.
더구나 69만명을 이끌고 러시아를 침공한 나폴레옹의 군대는 
69,000명만 살아남아 돌아갔으니 이 또한 비운의 주인공이 아닐 수 없다.
이 승리는 나폴레옹 전쟁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어 나폴레옹의 몰락을 불러왔다.

1813년 7월엔 카잔 대성당에서 나폴레옹에 대항해 싸운 

러시아 군대의 총사령관이자 톨스토이의 작품 <전쟁과 평화>의 주인공 

미하일 쿠투조프 공작의 장례식이 엄숙하게 치러졌다.

 

바클라이 드 톨리(Michael Bogdanovich Barclay de Tolli) 기념 동상

미하일 바클라이 드 톨리(Michael Bogdanovich Barclay de Tolli 1761~ 1818)는  
러시아 원정과 제6차 대프랑스 동맹 당시 러시아 제국의 육군 원수이자 국방부 장관이었다. 
그는 터키 전쟁, 스웨덴 전쟁, 폴란드 전쟁에 종군하였다. 
1808∼1809년의 핀란드 전쟁에 사령관으로서 출정하여 
보스니아만(灣) 건너의 우메오를 탈취하여 용명을 떨쳤다. 


1810∼1812년 육군장관을 지냈으나 1812년 나폴레옹 1세 군과의 전쟁에서 

그의 후퇴전술은 비난을 받았고, 스몰렌스크에서 패배한 후 

사령관직을 박탈당하여 쿠투조프에게 자리를 물려주었다. 
그러나 1813년 다시 사령관에 복귀하여 1814년 파리에 입성하고 

원수가 되었으며, 1815년에는 공작이 되었다.

 

19세기 초 카잔 대성당

모스크바 크렘린의 성당들처럼, 상트페테르부르크에도 웅장한 역사적 성지들이 많다. 
그중 처음으로 지어진 것은 18세기 초 표트르 대제가 

직접 건설을 지시한 성 베드로 · 바울 성당이다. 
나중엔 크렘린의 아르항겔스키 성당을 대신해 이곳이 황실의 묘소가 되었다.

하지만 성 베드로 · 바울 성당은 경비가 삼엄한 요새 안에 있었다. 
도시가 세워지고 백 년이 지나도록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는 

제국 수도의 영광을 과시할 수 있는
웅대한 건축미를 지녔으면서도 대중의 접근이 가능한 성당이 없었다.
그런 필요를 채워준 것이 1801년부터 1811년까지 10년에 걸쳐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중심가인 네프스키 대로에서도 눈에 띄는 곳에 세워진 카잔 성당이다. 
카잔 성당의 위치와 외관은 도시의 심장부를 장악할 수 있게 치밀하게 계획되었다.

1780년대 초엔 미하일 젬초프(М. Земцов)가 설계한 검박한 외관의 '성모 탄생 교회
(церковь Рождества Богородицы)'를 개축하려는 계획이 있었다. 
이 교회는 기적의 힘을 가졌다고 여겨지는 '카잔의 성모 이콘(성상화)'이 보관된 곳이다. 
많은 모사본이 제작된 카잔의 성모 이콘은 1579년 카잔 대화재 직후로 
그 기원이 거슬러 올라간다고 전해지며,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성모의 형상을 담은 
러시아에서 가장 숭배 받는 이콘 가운데 하나다.

17세기 초 이콘이 '동란의 시대(Смутное время)'라 불리는 황실의 분란으로부터  
러시아를 구했다고 여겨지면서 이콘의 국가적 의미가 커졌다. 
1721년 표트르 대제는 카잔의 성모 이콘의 초기 복사본을 

새 수도인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옮겨 왔다.  

상트페테르부르크 건설에 박차가 가해진 것은 

파벨 1세의 짧은 통치기간(1796~1801) 중이었다. 
파벨 1세는 1798년 나폴레옹에 의해 몰타에서 축출된 

성 요한 기사단의 단장이 되기도 했다.
1811년 공사가 끝날 무렵, 카잔 성당은 국가적 성지가 될 위용을 갖추었다. 
1812년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얻은 전리품이 이곳에 배치되었다.

1870년부터 자선 단체가 성당에서 운영되어 쉼터 스쿨, 무료 식당, 구호원, 
저렴한 아파트가 있는 주택, 가난한 아이들을 위한 다차를 운영했다. 
성인을 위한 주일학교가 성당에서 운영되었고 자체 신문이 출판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이곳에서 따뜻한 옷을 모아 전선으로 보냈고, 
적군을 물리치고 승리를 위한 기도 예배가 매일 열렸다.

 

소련 시대 역사와 무신론 박물관

동방 정교회와 로마 가톨릭을 조화시키려던 파벨 1세의 생각이 

카잔 성당의 모습에도 영향을 준 듯 성당 곳곳은 몰타 십자가로 장식돼 있다. 
카잔 성당을 건축한 안드레이 바로니킨(Andrei Nikiforovich Varonikhin)은 
우랄 지역에 있는 스트로가노프 가문의 소유 영지에서 농노로 태어났다. 

러시아에서 가장 부유한 가문이었던 스트로가노프 가문은 

예리한 안목을 지닌 예술의 후원자였다. 
이들은 바로니킨의 재능을 발견하고 1777년 모스크바로 데려와 
건축가 바실리 바제노프와 마트베이 카자코프 밑에서 2년간 공부하도록 했다.  

바로니킨은 1779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스트로가노프 

서클에 들어갔고, 1786년에는 자유의 몸이 되었다. 
1786년부터 1790년까지 알렉산드르 스트로가노프 백작의 아들인 

파벨의 유럽 여행에 동행했다. 
러시아로 돌아오기 전에는 파리에서 개인적으로 건축 실습을 받았다.

1799년 파벨 황제는 로마의 웅장함을 반영한 

새로운 성당을 지을 건축가를 다시 모집하기 시작했다. 
건축 위원회의 수장이 된 알렉산드르 스트로가노프는 

즉시 바로니킨을 건축가로 선택했다.
바로니킨의 자격 여부가 도마 위에 오르기도 했지만, 

바로니킨에 대한 스트로가노프의 믿음은 광대한 건축 사업의 조직과 

압도적인 위용의 성당 설계를 통해 입증되었다.

권력이 소련으로 바뀐 후 1929년 볼셰비키들은 성당을 폐쇄했고, 

3년 후 과학아카데미에 넘겨 줬다. 
성당의 둥근 지붕을 장식한 십자가는 첨탑이 달린 도금한 공으로 대체되었고, 
교회 용품들은 여러 박물관으로 흩어졌다. 

성당에는 종교와 무신론 역사박물관이 들어섰다. 
전시품들은 기독교, 이슬람교, 동양의 신앙이 탄생하고 발전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들이었다.

기적의 아이콘은 블라디미르 대성당으로 옮겨졌다. 
1998년 3월부터 성당이 다시 봉헌되어 정기 예배를 시작했다. 
2년 후 사원은 러시아 정교회로 반환되어 대성당으로 변모했다.

 

카잔 대성당의 외관

카잔 대성당은 로마 교황의 거주지와 닮았으며 장엄하고 화려하며 
더불어 탁월한 아름다움과 독창성을 지니고 있다.
건물은 4 개의 뾰족한 라틴 십자가 형태로 지어졌으며 
십자가 중앙에는 돔이 있고 그 드럼을 따라 16 개의 둥근 창이 있다.

성당의 벽돌벽은 러시아 서북부 도시 갓치나 인근에서 채굴한 
푸도스트(갓치나 인근 마을이름)의 돌, 즉 투파 석회석으로 마감됐다. 
투파는 채굴 직후엔 다루기 쉬우면서도 공기에 노출되면 
서서히 경화되기 때문에 세밀한 조각에 제격이었다. 
투파의 이런 성질은 회랑 입구, 애프스, 세 회랑의 부조에 
성경을 주제로 한 대형 프리즈를 만드는 데 활용되다.

네 줄로 늘어선 회랑 기둥의 주신과 주두도 투파로 만들어 졌으며, 
세 종류의 화강암과 석회암, 대리석으로 된 다채로운 장식으로 꾸며져 있다. 
회랑의 양쪽 입구에 세워진 블라디미르 성인과 알렉산드르 넵스키 성인 동상을 비롯해, 
조각상 제작에는 청동이 쓰였다.
거대한 문들은 로렌초 기베르티가 피렌체 세례당에 

쓰기 위해 만든 것과 비슷한 모양의 동판으로 덮여 있다.

 

카잔 대성당의 돔

돔은 4개의 모놀리식 철탑으로 지지된다. 
대성당은 반원으로 배열된 94개의 기둥으로 구성된 콜로네이드 뒤에

숨겨져 있으며 그 위에 돔이 72m 높이로 솟아 있다. 
각 기둥의 높이는 14 미터이고 무게는 28 톤이다.

건물 바닥에는 커다란 회색 화강암 기둥으로 만들어진 높은 주각이 있다. 
정면에는 삼각형 페디먼트로 장식된 얕은 부조가 있는 6 개의 기둥 현관이 있다. 
카잔 대성당의 길이는 72.5m, 너비 56.7m이다. 
콜로네이드의 서쪽 부분에는 종탑이 있으며 대성당의 종탑은 지어지지 않았다. 
성전에는 4개의 예배당이 있다. 
1900년에 카잔 대성당 앞에 공공 정원이 배치되어 외관을 마무리했다.

 

카잔 성당 광장(Kazanskaya Square)

성당 앞 광장은 19세기 말부터 혁명이 발발할 때까지 학생들의 집회 장소로 사용되곤 했다지만 
지금은 넵스키(네프스키) 대로를 찾은 사람들에게 휴식처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는 듯하다.
건너편에 보이는 건물은 유서깊은 돔 끄니기 서점

 

보로니힌 광장(Voronikhinsky squar)에서 본 카잔 대성당

 

1809년 보로니힌 광장(Voronikhinsky squar)에 세운 분수

 

[영상] 그리보예도프(Griboyedov) 운하와 카잔 대성당

 

카잔 대성당 내부

카잔성당은 입장료가 무료 이다.
좁은 출입구를 통해 성당 내부로 들어가니 

석회암으로 지어 어두운 색조이나 규모가 웅장하고 엄숙하다.

화려한 실내는 신랑과 익랑을 구분하는 28쌍의 코린트식 기둥으로 나뉘어져 있다.
주신은 붉은 핀란드산 화강암을 연마해 만들었고, 주두의 재료는 금도금을 입힌 청동이다.  
원통형 궁륭은 장미 무늬가 새겨진 육각형 조각으로 채워져 있다. 
바닥은 주로 우랄 산맥에서 캐낸 석재로 만든 모자이크로 덮여 있다.

 

카잔 대성당 내부 

성당 내부의 중심은 돔 하단의 공간이다.  
굵직한 기둥이 네 복음서의 저자가 그려진 펜덴티브(pendentive)를 받치고 있다.  
돔 밑부분은 예수와 성모의 생을 주제로 한 조각처럼 보이도록 그린  
회색조 프리즈(그리자이유, grisaille)로 꾸며졌다.  
격천정 돔은 두 겹으로 이루어졌다. 

 

카잔 대성당 내부

 

카잔 대성당 내부

 

이 성당의 성물 카잔의 카잔의 성모(Our Lady of Kazan) 앞에서 기도하려는 순례자들

내부에는 의자가 없고 여자들은 머리에 두건을 쓰고 있는데, 
성호를 긋는 모습이 우리나라 천주교와 반대 방향이다.
한쪽에서는 예배를 보고 있고, 다른 한쪽에서는 줄을 서서 기다리며 
수도사에게 세례를 받는 모습이 엄숙해 보인다.

 

카잔의 성모(Our Lady of Kazan) 앞에서 기도하기 위해 줄을 서 기다리고 있는 신자들

건물 내부에는 19세기 초의 거장들이 그린 이콘(icon)이 있는데 
그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카잔의 마리아 상>이다. 
이 성상은 쿠투조프가 이끄는 군대가 전장에 가지고 나갔었던 것이고 
보로디노 전투가 있기 전 군사들을 축복할 때도 이 성상을 가지고 했었다고 한다.

 

카잔의 성모(Our Lady of Kazan) 앞에서 기도하기 위해 줄을 서 기다리고 있는 신자들

 

카잔의 성모(Our Lady of Kazan) 앞에서 기도하기 위해 줄을 서 기다리고 있는 신자들

 

카잔의 성모(Our Lady of Kazan) 앞에서 기도하기 위해 줄을 서 기다리고 있는 신자들

 

카잔의 성모(Our Lady of Kazan) 이콘의 상트 페테르부르크 사본

성모마리아 탄생 교회는 로마노프 왕가의 궁정 부속 성당이었다. 
이곳에 왕조의 수호성인으로 여겼던 카잔의 성모 이콘(성화)이 보관되었다. 
카잔 대성당이 세워지자 성물도, 궁정 부속 성당의 역할도 다 물려받게 되었다. 
황실 가족들은 이곳에서 성혼식을 올렸고, 알렉산드르 2세가 
암살 기도를 모면하자 이곳에서 감사기도를 드렸고, 
로마노프 왕조 300주년도 이곳에서 축하됐다.

카잔 대성당은 러시아 정교에서 가장 유명한 성물 중 하나인 
성모 마리아 이콘을 수호성인으로 하면서 성스러워졌다. 
성당에 기적을 일으킨다고 여겨지는 이콘이 보관되어 있다. 
전해오는 말로는 표트르 대제가 직접 이 성물을 페테르부르크로 옮겨오라고 명령했다. 
성모 마리아 탄생 교회가 건축되기 전에는 
페트로그라드 방면에 있던 작은 예배당에 이 이콘이 보관돼 있었다.

 

카잔의 성모(Our Lady of Kazan) 이콘의 상트 페테르부르크 사본

카잔의 성모는 러시아 카잔의 수호성인으로서 성모 마리아를 그린 러시아 정교회의 
가장 거룩한 성화상(icon) 가운데 하나다. 
로마 가톨릭교회에서도 카잔의 성모상의 모사품들을 제작하여 공경하고 있다. 

 

카잔의 성모(Our Lady of Kazan) 

카잔의 성모상은 수세기 동안 러시아의 수호자로 공경을 받아왔으며, 
진품은 1904년에 절도당하여 파손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 두 곳에 소재하고 있는 카잔 주교좌 성당들을 비롯하여 
수많은 정교회 성당들이 카잔의 성모에게 봉헌되어 그를 주보성인으로 모시고 있다. 
카잔의 성모 축일은 7월 21일과 11월 4일이다.

 

이콘 '카잔의 성모'

이콘 '카잔의 성모'는 1579년 ​성모의 계시를 받은 볼가 강변의 

카잔 마을에 사는 9세 소녀마토로나의 꿈에서 성모 마리아가 알려 준대로 찾아가 

땅속에서 발견하여 가져왔기 때문에 "카잔성당" 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러시아 정교회에선 성상화를 종교 작품으로만 여기지 않고 

구세주나 성모, 성인이 출현한 것으로 보고 숭배한다.

러시아 정교회는 카잔의 성모를 기적의 힘을 주는 이콘으로 받들어 

발견된 장소에 테오토코스(성모) 수도원을 지어 이콘을 모신다.
카잔의 성모는 러시아를 수호하는 대표적 이콘이 됐고
페테르부르크와 모스크바, 야로슬라프를 비롯한 여러 도시에 

카잔의 성모 복제화를 모신 카잔성당이 들어선다.

1904년 카잔 테오토코스 수도원에 도둑이 들어 카잔의 성모를 훔쳐 간다.
도둑은 나중에 붙잡혔지만 값비싼 보석들로 장식한 황금 액자를 탐냈기에 

액자만 챙기고 성상화는 잘게 잘라 태워 버렸다고 진술한다.
온 나라가 좌절과 공황에 빠져 앞으로 나라에 나쁜 일이 닥칠 거라고 걱정한대로 
1905년 노동자들 시위에 군이 발포하는 유혈사태가 벌어지고 러일전쟁에서 패한다.

카잔성당이 지닌 의미는 1812년 나폴레옹이 러시아를 쳐들어 오자 중요한 변화를 겪는다.
러시아군 총사령관 미하일 쿠투조프가 출정하기 앞서 

카잔성당에 찾아와 카잔의 성모에게 경배하며 도움을 청한다.
쿠투조프는 모스크바까지 쳐들어 온 나폴레옹 군에게 온 도시를 비우는 작전을 벌여 
나폴레옹군이 제풀에 물러가자 추격해 대파한다.
69만 나폴레옹군은 9만 3천명 만 살아 퇴각했다.

쿠투조프는 1812년 스몰렌스크전투에서 나폴레옹군을 무찌른 공적으로 

국민적 영웅으로 추앙받고 '고귀한 스몰렌스크 공작 전하'라는 영광스러운 작위를 얻는다.
성당에는 나폴레옹군에게서 빼앗은 107개 군기(軍旗)와 

승리의 트로피가 걸려 전승기념관의 성격도 겸하게 된다.

그리고 사람들은 카잔의 성모가 정말 기적을 일으키는 이콘이라는 믿음을 더 굳게 갖게 됐다. 
이듬해 숨진 쿠투조프는 카잔성당에 묻혔고
러시아 국민시인 푸시킨이 그의 영묘에 유명한 애가(哀歌) '쿠투조프의 묘'를 바친다. 

카잔 성당은 라틴 십자가 (세로대의 아래쪽이 긴 십자가) 모양으로 
서쪽, 북쪽, 남쪽으로 코린트 양식의 열주 회랑이 있고 

동쪽에는 반원형 애프스(apse)가 위치한다. 
건물의 상단은 거대한 장식 난간으로 둘러싸여 있다. 


애프스 위에 조각된 프리즈(frieze, 띠 모양의 장식물)에는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예수의 모습이 담겨 있다. 
회랑을 이루는 기둥과 같은 기둥으로 떠받쳐진 돔(dome)이 성당의 머리부분을 구성하고 있다.

이 독특한 구조의 성당을 넵스키 대로와 조화롭게 배치하는 데는 기발한 해결책이 필요했다. 
성당의 중심축(동서 방향)이 넵스키 대로와 평행을 이루었기 때문에 보로니힌은 
북쪽으로 대로를 마주보는 웅장한 파사드를 만들고 동과 서 양쪽으로 
육중한 기둥의 곡선형 열주 회랑을 배치시켰다. 
당초 계획은 남쪽에도 같은 회랑을 건설하는 것이었지만, 현실로 실현되지 않았다. 
서쪽 파사드의 중앙문은 북쪽 회랑에 가려졌다.

카잔성당은 러시아 정교회의 제단은 서쪽을 향해야만 했는데, 

그렇게 할 경우 넵스킨 대로에서 볼 경우 측면을 바라볼 수밖에 없어 

석고 대리석으로 이어 만들어진 94개의 코린트 양식의 기둥으로 
주위를 둘러싸는 방법을 택하였다고 한다.  
반원형의 모양을 만든 것이 성당을 한층 웅장해 보이게 한다.

카잔 대성당 제단

중앙 본당은 측면 본당보다 4 배 더 넓고 반 원통 모양의 금고로 덮여 있다. 
측면 통로는 직사각형 케이슨으로 덮여 있다. 
천장은 프랑스 설화 석고로 만든 양식화된 꽃 형태의 그림 같은 장미로 장식되어 있다.

바닥은 회색과 분홍색의 카렐리안 대리석으로 포장되어 있다. 
제단의 계단과 바닥, 왕실의 바닥과 강단은 진홍색 반암과 마주하고 있다. 
인테리어는 밝고 세속적이며 고급스럽다. 
창문에서 쏟아지는 빛은 돔이 높이 치솟는 인상을 준다.
치장 벽토 장식품과 조각 구성은 내부를 한층 돋보이게 한다. 
메인 예배당의 이콘은 프랑스에서 가져온 금과 트로피 실버로 장식되어 있다.

 

Iconostasis

프레스코화와 캔버스화로 구성된 실내 회화는 제국예술아카데미가 감독했다.
성화벽은 바실리 보로비콥스키와 유명한 화가 알렉산드르 이바노프의 아들 
안드레이 이바노프 등 주로 아카데미 소속 화가들이 그렸다.

중앙 본당의 금고에는 프레스코화 "최후의 만찬"과 옅은 "갈보리 행렬"이 있다. 
중앙 벽에는 옅은 "십자가를 들고"와 "구금 됨"과 칼 브룰로프의 그림 
"천국에 하나님의 어머니를 데려 가기"가 있다.

사원의 우아한 장식은 작은 사원 형태의 우랄색 돌로 된 성막으로 
계단식 바닥에 배치되고 현관으로 장식되어 있다. 

 

돔 볼트

하나님의 어머니 아이콘의 전형적인 옷을 입은 하나님의 어머니. 
성모 마리아의 머리는 축복의 몸짓으로 손가락을 접은 채 손을 들었던 
아기 예수를 향해 약간 기울어져 있다. 
성모의 얼굴 표정은 아들을 기다리는 고통을 예상하여 슬퍼한다. 
아기의 얼굴은 성숙함과 진지함으로 놀라운 감동을 받는다. 
그들의 시선은 기도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그들이 영혼을 직접 들여다보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돔 볼트

 

카잔 대성당 내부

성당 내부의 중심은 돔 하단의 공간이다. 
굵직한 기둥이 네 복음서의 저자가 그려진 펜덴티브(pendentive)를 받치고 있다. 
돔 밑부분은 예수와 성모의 생을 주제로 한 조각처럼 보이도록 
그린 회색조 프리즈(그리자이유, grisaille)로 꾸며졌다. 
격천정 돔은 두 겹으로 이루어졌다.

 

카잔 대성당 내부

1811년 공사가 끝날 무렵, 카잔 성당은 국가적 성지가 될 위용을 갖추었다. 
1812년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얻은 전리품이 이곳에 배치되었다.

 

카잔 대성당 내부

1813년 7월엔 나폴레옹에 대항해 싸운 러시아 군대의 총사령관이자 
톨스토이의 작품 전쟁과 평화의 주인공 미하일 쿠투조프 공작의 엄숙한 장례식이 치러졌다.

대성당에는 격자로 둘러싸인 미하일 쿠투조프 (Mikhail Kutuzov) 사령관의 묘비가 있다. 

 

카잔 대성당 내부

 

카잔 대성당 내부

 

카잔 대성당 내부

 

인증샷

 

인증샷

 

카잔 대성당 내부

 

카잔 대성당 예배

 

[영상] 카잔 대성당(Kazan Cathedral) 내부

 

 

아니치코프 궁전(Anichkov Palace) 상공에서 넵스키 대로 해군성 방향

 

엘리세예프 엠포리움(Elisseeff Emporium)

엘리세프 백화점(Elisseeff Emporium)은 1902~1903년에 엘리세프(Elisseeff) 형제들을 위해 지어진 
유명한 푸드홀을 포함한 대형 소매 및 엔터테인먼트 복합 단지이다. 
이 복합 단지는 3개의 건물로 구성되어 있지만, 코너 하나는 엘리세프의 상점이다.

 

엘리세프 백화점(Elisseeff Emporium) 정면

 

건축가 가브리엘 바라노프스키(Gabriel Baranovsky)가 설계한 이 건물은  
상트페테르부르크 아르누보 건축의 가장 눈에 띄는 사례 중 하나이지만  
건축 당시 건물은 논란의 여지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엘리세프 백화점(Elisseeff Emporium) 건물 표지판

 

[영상] 엘리세프 백화점(Elisseeff Emporium) 건물 표지판

 

1904년경 엘리세프 백화점(Elisseeff Emporium) 현대 엽서

 

백화점 건물 기둥 조각 - 산업을 상징하는 대장장이의 신 헤파이토스(Hephaistos)

건축가 가브리엘 바라노프스키(Gabriel Baranovsky)는 오래된 건물의 일부를 
이 구조에 통합하여 건물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상점 창처럼 보이게 했다. 
파사드의 절반 이상이 단일 아치로 구성된다. 
아치는 거리로 여러 층을 여는 거대한 스테인드 글라스 창이다. 

아르누보 스테인드 글라스는 에스토니아 조각가 아만더스 아담손(Amandus Adamson)이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올림포스 12신 중 산업, 과학, 상업 및 예술을 우화적으로 조각하여 장식한
건물의 화강암 기둥 면과 대조를 이루면서 잘 어울리고 있다.
왼쪽에 배 모형을 들고 뒤쪽에 톱니바퀴를 묘사한 조각상은 
대장장이의 신 헤파이토스(Hephaistos)로 산업을 상징한다. 

 

백화점 건물 기둥 조각 - 상업의 수호신 헤르메스(Hermes)


헤르메스(Hermes)는 카두케우스 또는 케리케이온(Kerykeion)이라 불리는 

뱀 두 마리가 엉킨 지팡이를 들고, 챙넓은 모자 혹은 페타소스(Petasus)라는 이름의 

날개 달린 모자를 쓰고 탈라리아(Talaria)라는 이름의 날개 달린 샌들을 신고 

마법의 망토를 두른 청년의 모습으로 묘사된다. 

 

백화점 건물 기둥 조각 - 예술의 신 아폴론(Apollon)

아폴론(Apollon)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태양과 예언 및 

광명 · 의술 · 궁술 · 음악 · 시를 주관하는 신이다. 
제우스와 레토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며 아르테미스와는 남매지간이다. 
올림포스의 12신의 두 번째 세대에 속한다. 
월계수와 리라, 활과 화살, 백조, 돌고래가 대표적인 상징물이다.
훤칠하고 준수한 미남으로 묘사되며, 그래서 여성 및 남성과 사랑을 나누는 이야기가 많다. 
또한 헤르메스가 선물로 준 리라를 잘 연주하고 활도 잘 쏠 줄 알았다.

 

백화점 건물 기둥 조각 - 과학의 여신 아테나(Athena)

아테나(Athena)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지혜 · 전쟁 · 직물 · 요리 · 도기 · 문명의 여신이다. 
로마 신화의 미네르바와 동일시된다. 
제우스와 메티스 사이에서 태어난 딸로, 올림포스의 12신의 두 번째 세대에 속한다. 
투구, 갑옷, 창, 메두사의 머리가 달린 방패(아이기스), 올빼미, 뱀이 대표적 상징물이다.
언제나 투구와 갑옷을 입고, 손에는 창과 방패를 든 무장한 여전사의 모습을 하고 있다. 

 

엘리세프 백화점(Elisseeff Emporium) 앞면 진열장

 

진열장 안에 장남감 병정이 뭔가를 진지하게 바라본다.

 

중세 귀족 차림 인형이 아이스크림을 치켜들고 있다.

 

수레에 실린 뚱보 영감은 소시지 하나를 꿰어 들고 흐뭇해 한다.

 

옛 동화처럼 코와 귀가 긴 인형이 소시지를 빚는다.

 

요리사는 숟가락과 포크를 챙겨 들고서 뭔가를 조리할 기세다.​

 

마법을 부리는 요술 할머니도 등장한다.

사람보다 훨씬 큰 인형들이 만화처럼 동화처럼 계속 회전하며 움직인다.
100년 넘게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물론 러시아에서 

최고 먹을거리 가게로 꼽혀 온 식품점 진열장이다.

 

엘리세프 백화점(Elisseeff Emporium) 내부

 

엘리세프 백화점(Elisseeff Emporium) 내부

 

엘리세프 백화점(Elisseeff Emporium) 내부

 

[영상] 엘리세프 백화점(Elisseeff Emporium)

 

아니치코프 궁전(Anichkov Palace) 상공에서 본 넵스키 대로

 

앞에 보이는 엘리세프 백화점(Elisseeff Emporium) 건물 앞 횡단보도를 건너 나무 숲 안에
예카테리닌스키 사드(Yekaterininskiy Sad), 캐서린 공원(Catherine Park)이 있다.

 

캐서린 대제(Catherine the Great) 기념 동상

1873년 상트페테르부르크 오스트로브스키 광장(Ostrovskiy Square)에 
캐서린 대제(Catherine the Great)를 기리기 위해 세운 기념비.

예카테리나 대제 (예카체리나 빌리카야 Екатерина Великая)라고도 불리는 
캐서린 대제(Catherine the Great)는 러시아 제국 로마노프 왕조의 8번째 황제이다.
러시아의 마지막 여제(女帝)이기도 하다. 
중국의 측천무후와 자주 비교되기도 하는데 둘 다 거대한 제국의 여제였고, 
황후의 자리에서 황제를 폐위시키고 스스로 황제로 즉위한 여인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캐서린 대제(Catherine II the Great) 공원에서 인증샷

캐서린 정원(Catherine Garden)은 아니치코프 궁전(Anichkov Palace) 저택 구역에 있는 
오스트로브스키 광장(Ostrovskiy Square) 단지의 일부로
알렉산드린스키 극장(Alexandrinsky Theater) 앞에 있는 공원의 비공식적인 이름이다. 

오스트로브스키 광장은 알렉산드린스키 극장, 러시아 국립도서관, 아니치코프 궁전, 
캐서린 2세 기념비, 공교육부 건물 등 중요성을 지닌 역사적, 문화적 기념물이 많다. 
이 지역은 상트 페테르부르크 역사 중심지의 일부로 세계 유산 목록에 포함되어 있다.

 

캐서린 대제(Catherine II the Great) 기념 동상에서 인증샷

예카테리나는 원래 독일인이었다.  
프로이센군 소장인 크리스티안 아우구스트 폰 안할트-체르프스트 공작과  
홀슈타인-고토르프 가문의 요한나 엘리자베트의 딸로,  
본명은 조피 프레데리케 아우구스테 (Sophie Friederike Auguste von Anhalt-Zerbst). 

 
세력이 미약한 귀족의 딸이었다.  
다만 시골 생활에 진저리를 내던 어머니의 열성적인 교육열과  
본인의 총명함과 부지런함으로 어린 시절부터 다양한 교육을 받고 자랐다. 

그러던 어느 날 외삼촌이 옐리자베타 여제와 약혼했던 인연 덕분에 1744년,  
러시아의 제위 계승권자인 홀슈타인 공작 카를 울리히와 결혼했다.  
이때 이름도 러시아식으로 개명하여 
'예카테리나 알렉세예브나'(Екатерина Алексеевна)라고 불리게 된다. 

 

캐서린 대제(Catherine the Great) 기념 동상

예카테리나와 표트르 3세는 신혼 무렵엔 같은 독일인이라는 점 때문에 
사이가 그럭저럭 괜찮았지만, 예카테리나가 주변 사람들의 냉대와 옐리자베타 여제의 
경계를 완화시키기 위해 점차 친러시아 노선을 걷자 사이가 나빠진다.  
게다가 남편인 표트르는 장난감 병정이나 기차만 가지고 노는 
머리 나쁜 위인인데다가 심각한 성불구라는 풍문이 있었다.  
그래서 장기간 부부 관계가 없었고 부부 모두 18년간 각자 정부를 두고 살았다.  
이 때문에 예카테리나의 세 아이 모두 각기 다른 정부의 아이였다는 풍문도 돌았다. 

러시아군이 프로이센을 거의 막바지로 몰아붙였으나 승리 직전에 
옐리자베타 여제가 사망하고 제위를 물려받은 표트르 3세가 
프로이센의 황제 프리드리히 2세를 추종하여 무조건 평화 협정을 맺어 버리자 
러시아 귀족들은 크게 분노하였고, 예카테리나 역시 남편의 처사에 크게 반발한다. 

 

캐서린 대제가 공식 가운을 입고 오른 손에는 홀을, 왼손에는 올리브 화환을 들고 있다.

러시아인들 사이에 평판이 좋을 뿐만 아니라 러시아의 수많은 귀족들의  
지지를 받고 있었던 예카테리나는 결국 1762년 6월 표트르 3세가  
덴마크와의 전쟁 때문에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비운 사이 반란을 일으켜  
자신이 러시아 제국의 황제임을 만천하에 알린다.  
표트르 3세는 체포되어 8일 후에 감옥에서 죽었다.  
이에 대해선 아마도 예카테리나 2세의 지시
혹은 방조가 있었을 것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예카테리나 통치 기간에 농업과 상공업을 진흥시켜 
국력은 크게 향상되었고, 볼테르 등의 문인들을 후원하며 
수학자 레온하르트 오일러를 초청하는 등 문화적인 면에서 업적을 거뒀다.  
예술에도 지대한 관심과 후원을 아끼지 않아서 유럽 각지에 퍼져 있는  
그림, 조각들을 수집, 현재의 에르미타주 박물관을 만들었다. 

 

대제 캐서린 II세와 그녀의 동료들 기념물.

받침대는 왕권의 상징으로 장식되어 있다. 
동상의 받침대에 형상이 새겨진 고위 인사들 중에는 아마도 

러시아 역사상 가장 유명한 장군인 알렉산더 수보로프 (Alexander Suvorov), 

장군이자 정치인 포티옴킨 왕자, 
러시아 과학 아카데미를 이끄는 최초의 여성인 카테리나 다쉬 코바가 있다.

에르미타주 박물관은 원래 예카테리나 2세가 휴식을 취하던 일종의 별궁으로  
초대를 받은 사람이 아니면 출입할 수 없는 곳이었으나 현재는  
러시아인들은 물론 전세계인의 사랑을 받는 최고 수준의 미술관이 되었다.  
그녀가 사들인 미술품들도 굉장히 많다.  
현재에는 한 작품당 1분씩만 감상을 해도 8년이 걸린다는 이야기가 있다. 

 

러시아 과학 아카데미를 이끄는 최초의 여성인 카테리나 다쉬코바

이렇게 향상된 국력을 바탕으로 외치에서 대성과를 거두었다.  
오스만 제국에 강한 압박을 가하여 러시아-튀르크 전쟁(1770~1774)에서 승리하고,  
크리미아와 카프카스를 할양 받아 영토를 넓혔으며,  
1783년에는 크림 반도를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빼앗았다.  
이것으로 오스만 제국의 봉신국이었던 크림 칸국은 멸망했다. 

또한 크림 칸국으로부터 해방시킨 우크라이나 동부에 코사크 농부들을 정착시키고,  
볼가 강 남부 유역과 키스피해 연안에 칼미크인들의 영토를 축소시키고  
그 자리에 대규모의 독일계 이민을 이주시켜 밀농사를 짓게 함으로써,  
러시아의 농업 생산량을 크게 끌어올렸다.  
우크라이나 일대에서 인신 매매와 약탈을 일삼던 크림 타타르족이 

토벌되면서 농업이 안정화되고 20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우크라이나산 밀은 러시아의 주력 수출 품목이 되었다.

 

캐서린 대제 동상 받침대의 세부 이미지

예카테리나 대제는 남자 애인을 많이 둔 것으로도 유명하다.  
심지어 이미 60세가 넘어서 죽음을 앞에 두던 순간까지도 

수많은 정부들을 두고 있었다고 한다.  
예카테리나 2세는 몇 년에 한번씩 정부를 갈아치우는 것으로 악명이 높았지만  
헤어진 정부들에게 막대한 재산과 영지, 관직 등을 하사하여 후히 대접하였다.

 

알렉산드린스키 극장(Alexandrinsky Theater)

모스크바 말리극장 다음가는 옛 극장으로서 1832년에 창립되었으며, 
시의 중심인 네프스키 가(街)의 남쪽, 오스트로프스키 광장의 정면에 서 있고, 
건축가 로시(Carlo Rossi)의 설계로 이루어진 암필식(式) 건물(좌석 1,365)은 
세계 유수의 아름다운 극장 건축으로 알려져 있다. 

 

알렉산드린스키 극장(Alexandrinsky Theater) 내부

제정시대에는 주로 셰익스피어, 몰리에르 등의 서구 고전과 

고골리, 알렉산드르 오스트롭스키 등 러시아 작가의 것을 상연, 

그 무대에서 많은 명배우를 낳았고, 사실적인 예풍과 레퍼토리를 갖는 드라마 극장으로서, 

19세기 러시아 국민 연극의 발달에 큰 역할을 하였다. 
혁명 후에도 그 전통을 이어받아 여전히 러시아를 대표하는 극장의 하나로 되어 있다.

 

[영상] 캐서린 공원 (Catherine Park)

 

러시아 국립 도서관(National Library of Russia)

1795년 캐서린 대제(Catherine the Great)에 의해 설립되었다.
러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공립도서관 일뿐만 아니라 최초의 국립 도서관이기도 하다 . 
소련 붕괴 이전에는 레닌 국립도서관이 이름이었다.

캐서린 공원 (Catherine Park) 바로 옆에 있다.

 

러시아 국립 도서관(National Library of Russia) 내부

 

러시아 국립 도서관(National Library of Russia) 내부

 

러시아 국립 도서관(National Library of Russia) 내부

 

칼 불라 포토뮤지움(Karl Bulla Photomuseum)  

러시아 국립 도서관(National Library of Russia)앞 횡단보도를 다시 건너
넵스키 대로와 말라야 사도바야 스트리트(Malaya Sadovaya St) 가도에 
칼 불라 포토뮤지움(Karl Bulla Photomuseum)이 소재한 건물이 있다.
엘리세프 백화점(Elisseeff Emporium) 앞에 붉은 색 건물

 

아르누보 양식의 고풍스런 건물

 

사진 작가 기념비(Monument to St. Petersburg Photographer)

엘리세예프 엠포리움 (Eliseyev Emporium) 건물 모퉁이에서 오른쪽 거리 
말라야 사도바야 스트리트(Malaya Sadovaya St)로 돌아서면 
우산 아래 삼각대에 청동 사진기를 찍고 있는 사진 작가의 2.5m 조각 동상을 발견한다. 
잉글랜드 불독이 사진기 아래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다.

단정한 정장에 중산모, 깔끔한 콧수염을 한 신사는 칼 불라(Karl Karlovich Bulla)로
"러시아 사진보고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독일계 러시아인 사진 작가다. 
그는 초창기 20만 장에 이르는 거대한 사진 자료를 유산으로 남겼다.

태어날 때부터 독일인이었던 칼 불라(Karl Karlovich Bulla)는 

거의 모든 생애를 러시아에서 보냈고 그 결과 그는 러시아화 

되었을 뿐만 아니라 러시아 시민권 (시민권)을 받았으며

그의 아들은 러시아 이름을 지었고 소련에서 일했다. 
칼 불라는 정치가, 군사 지도자, 작가 및 기타 유명인과 같은 
당시의 위대한 사람들을 촬영할 수 있도록 허용된 작가였다. 

실제로 그는 차르 가족의 삶과 반정부 지식인의 집회, 현장의 스타와 육체 노동자, 
노숙자를 위한 궁전과 호스텔, 심지어 동성애자 파티와 같은 
이국적인 사람들까지 모든 것을 촬영했다. 

 

칼 불라(Karl Bulla)와 그의 아들들

1916년 칼 불라는 "Bulla and sons" 회사의 경영권을 그의 아들 알렉산드르(Alexander Bulla)와 
빅토르(Viktor Bulla)에게 넘겨 주고 Ösel Island (현재 Saaremaa , Estonia )로 이사하여 
그곳에서 조용한 삶을 살았고, 지역 민족 지학 자료를 촬영하고 
1929년 사망할 때까지 에스토니아 소년들에게 사진의 기초를 가르쳤다.

나중에 아들 빅토르(Viktor Bulla)는 10월 혁명과 러시아 남북전쟁의 사진을 찍었다. 
빅토르는 레닌그라드 소비에트의 수석 사진사로 임명되었다. 
그는 블라디미르 레닌과 다른 볼셰비키의 사진을 많이 찍었다. 

1935년 빅토르(Viktor Bulla)는 아버지의 사진 132,683 점을  
레닌그라드의 국가 아카이브(State Archive)에 기증했다. 
아카이브에 있는 모든 사진은 공개되어 있으며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과거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하고도 가장 인기있는 출처가 되었다.
하지만 1938년 그레이트 퍼지 (Great Purge) 대숙청 기간 동안 
빅토르(Viktor Bulla)는 독일 스파이 혐의로 체포되어 총살당했다.

2003년에는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300주년과 칼 불라(Karl Bulla)의 
150번째 생일을 축하하는 대형 전시회가 열렸다. 
상트 페테르부르크 사람들은 칼 불라(Karl Bulla)의 이전 스튜디오 근처 
말라야 사도바야(Malaya Sadovaya) 거리에 칼 불라(Karl Bulla)의 청동 조각상을 설치해 놓았다. 

 

칼 불라(Karl Bulla)의 레오 톨스토이(Leo Tolstoy) 사진

칼 불라의 작품 덕분에 레오 톨스토이 또는 니콜라스 2 세가 
실제로 어떻게 생겼는지 볼 수 있고, 당시 상트 페테르부르크를 상상하고, 
러일 전쟁의 전선에서 찍은 실제 사진과 1905-1907년 혁명기 
"새로운 문제의 시대" 사진 스케치를 볼 수 있다. 
이러한 작품 덕분에 이 상트페테르부르크 사진 작가는 사진 보도 장르의 조상으로 추앙되고 있다.

 

1910년 11월 일리야 레핀(Ilya Yefimovich Repin)이 레오 톨스토이 사망 발표 보도를 읽고 있는 사진. 


현재 러시아의 시인, 수필가이자 문학평론가 코니 추코프스키(Korney Chukovsky)와 
레핀의 아내이자 예술가 나탈리아 노드만(Natalia Borísovna Nordman-Severova)이 있다.

 

Karl Bulla Photomuseum

 

Karl Bulla Photomuseum

 

Karl Bulla Photomuseum

 

Karl Bulla Photomuseum

 

Karl Bulla Photomuseum

 

볼쇼이 고스티니 드보르(Gostiny Dvor)

러시아 국립 도서관(National Library of Russia)에서 사도바야(Sadovaya) 거리 

건너편에 200m에 이르는 블록 하나를 기다란 이층 아케이드 

'볼쇼이 고스트니 드보르(Gostiny Dvor)'가 차지하고 있다.
고스티니 드보르(Gostiny Dvor)가 '고객의 마당' 또는 '상인의 정원'을 뜻하듯
정해진 시간에 인근 각지에서 모여든 상인들이 작은 가게를 벌이는 장마당으로 출발했다.
그 중에서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는 볼쇼이 (큰) 시장이라는 의미다.
뒤쪽으로는 길이가 1km 가까운 역삼각형으로 건물이 뻗어 있어 넓이가 1만5천평에 이른다. 
넵스키대로에서 보기보다 훨씬 더 크다.

 

2008년 Great Gostiny Dvor.

고스티니 드보르(Gostiny Dvor)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가장 오래된 

쇼핑 센터일 뿐만 아니라 세계 최초의 쇼핑 아케이드 중 하나다.

 

정면 박공에 새겨놓은 것은 아케이드 이름 '바흘쇼니 고스트니 드보르'이다.  
양쪽 1761와 1785는 20년 넘게 이 시장 건물을 

네오클라식 스타일로 리모델링한 착공-완공 연도이다

 

고스티니 드보르(Gostiny Dvor)와 근처의 거리, 1799. by 벤자민 패터슨(Benjamin Patersen)

1757년 상트페테르부르크 최초, 유럽 초기 아케이드(실내 시장)이자 
마차를 몰고 온 상인들의 숙소로 출발해 200개 가까운 점포가 들어선 쇼핑몰로 번창했다.

 

거대한 고스티니 드보르(Great Gostiny Dvor), 1802. by 벤자민 패터슨(Benjamin Patersen).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Nevsky Avenue 에 있는 거대한 백화점.

 

상공에서 본 고스티니 드보르와 시계탑

 

시계탑

고스트니 드보르가 차지한 블록 옆 붉은 시계탑이 선 33번 건물은 
1750년 길드 건물로 출발해 1786년부터 1804년까지 시청으로 썼던 두마 빌딩이다.
1847년 르네상스 양식으로 다시 지어 오늘에 이른다.
왼쪽에 있는 신전풍 건물은 18세기 말 고스트니 드보르 시장의 귀금속 거래-환전소였다고 한다.
두마 빌딩 모퉁이에 선 진홍빛 시계탑은 넵스키대로에서 손꼽히는 랜드마크다.
원래 화재를 감시하는 소방탑이었는데  오히려 1998년 화재로 불타 새로 지었다고 한다.

 

시계탑 상공에서 본 넵스키 대로 (Nevsky Prospect) 야경

넵스키라는 이름은 알렉산더 네프스키 라브라 (Alexander Nevsky Lavra) 에서 따온 것이다. 
이 수도원은 거리의 동쪽 끝에 있으며 한때 현 상트페테르부르크 지역을 지배한 
노브고로드 공국의 공작이자 러시아를 스웨덴과 독일, 몽골로부터 지켜낸
러시아의 영웅, 세인트 알렉산더 네프스키 (1221-1263)를 기념하는 수도원이다. 
이 도로의 동쪽 끝에 위치해 있다.

1703년 차르 피터 1세는 상트 페테르부르크를 건립한 후, 길의 시작으로 거리의 코스를 계획했다. 
노브고로드와 모스크바. 애비뉴는 서쪽의 해군성에서 모스크바 기차역까지 이어지며, 
보스타니야(Vosstaniya) 광장에서 약간 남쪽으로 향한 후 
알렉산더 네프스키 라브라(Alexander Nevsky Lavra)까지 이어진다.

주요 명소는 라스트렐리스끄 스트로가노프(Rastrelliesque Stroganov) 궁전, 
거대한 신고전주의 카잔 성당, Bookhouse (원래 가수 하우스), 
엘리세프 백화점(Elisseeff Emporium), 대여섯 18 세기 교회, 기념물 예카테리나 2 세 , 
거대한 18 세기 쇼핑몰 , 19 세기 중반 백화점 , 러시아 국립 도서관 , 
말 동상이 있는 아니치코프 다리 등등이 있다.

 

시계탑 상공에서 본 넵스키 대로 (Nevsky Prospect) 야경

넵스키 대로는 서쪽 네바 강변에서 시작해 동쪽 네바 강변에서 끝나는데, 
관광객이 많이 다니는 상징적인 구간은 구 해군성이 있는 서쪽 끝에서부터 모스콥스키 역까지다. 
이 대로 근처에 운하들, 에르미타주 박물관, 러시아 박물관, 카잔 대성당, 피의 성당 등 
상트의 주요 관광지가 도보 이동권에 모두 모여 있으므로 관광객들도 이 대로를 중심으로 다니게 된다.

현재의 대로의 형태는 이미 러시아 제국 시대에 완성되었다. 
도스토옙스키가 즐겨 산책해 그의 저작에도 넵스키 대로가 종종 등장하고 
피의 일요일 사건 때도 민중들은 차르를 외치며 이 대로를 행진했다. 
도로는 아스팔트로 포장되어 차들이 다니지만 그 외 길가의 건축물들은 
모두 당시부터 보존되는 것이 대부분이며 대단히 고풍스럽다.

 

[영상] 걸어서 넵스키 대로 / 엘리세예프 상점 - 그리보예도프(Griboyedov) 운하 카잔 대성당

 

 

 

상트페테르부르크 모스코프스키 (Moskovsky) 역 플렛홈
밤새 8시간을 달려 아침 07:55분에 상트 페테르부르크 모스코프스키 (Moskovsky)역에 도착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모스코프스키 (Moskovsky) 역 대합실

 

모스코프스키 (Moskovsky) 역 대합실
상트페테르부르크 도시를 설립한 표트르 대제(Peter I the Great)의 동상이 시선을 모은다.

 

상트페테르부르크 모스코프스키 (Moskovsky) 역 대합실

 

[영상] 상트페테르부르크 모스코프스키 (Moskovsky) 역 플렛홈과 대합실

 

상트페테르부르크 모스코프스키 (Moskovsky) 역 전경

 

보스타니야(Vosstaniya) 광장과 레닌그라드 영웅 도시 오벨리스크

보스타니야 광장은  모스코프스키 (Moskovsky) 철도 터미널 앞
넵스키(Nevsky) 대로, 리고프스키(Ligovsky) 대로, 보스타니야(Vosstaniya) 거리 및 
곤차나야(Goncharnaya) 거리의 교차점에 있다.

레닌그라드 영웅 도시 오벨리스크(Leningrad Hero City Obelisk)
1944년 1월 백만 명이 넘는 레닌그라드 주민들이 기아, 폭로 및 독일군 포격으로 사망했다. 
레닌그라드를 수호하고 구호하는 과정에서 300,000 명의 군인이 사망했다. 
레닌그라드(Leningrad)는 1945년에 영웅 도시(Hero City)라는 칭호를 받았고, 
그 명성을 얻은 최초의 도시다.

 

보스타니야(Vosstaniya) 광장과 지하철 플로시차드 보스타니야 역
좌측 앞에 보이는 건물이 지하철 플로시차드 보스타니야(Ploschad Vosstaniya) 역이다.

 

모스코프스키 (Moskovsky) 역과 레닌그라드 영웅 도시 오벨리스크

오벨리스크(Obelisk)를 설치하려면 고도로 숙련된 건축업자와 기술자가 필요하다. 
기념물의 몸체를 만들기 위해 군인의 외투 색을 닮은 회색 화강암이 선택되었다. 
이 암석은 비보르크(Vyborg) 마을 근처의 보쯔로즈드니(Vozrozhdenie) 
광상 채석장에서 채취할 수 있었다. 
화강암의 마무리와 연마는 현장에서 이루어졌다. 
1985년 4월 초에는 "Gold Star"로 장식된 오벨리스크가 받침대에 설치되었다.

오벨리스크의 총 높이는 36 미터이다. 
밑면의 지름은 3.5m, 너비는 9m, 기념물의 전체 질량은 약 390 톤이다. 
베이스가 있는 기념비의 총 질량은 750톤이다. 
꼭대기 'Gold Star'는 직경이 4.5 미터, 지름이 1.8 미터이다. 

광장은 격동의 시대 혁명의 집회 장소로 자주 쓰였기에 볼셰비키혁명 후 
사회주의 정부는 '봉기' 광장으로 이름을 바꿨고 1937년엔 
광장 복판에 서 있던 걸작 조각품 알렉산드르 3세 기마상도 치워버렸다.

보스타니야라는 지금 광장 이름은 1955년에 들어선 지하철역에서 따 왔다.
광장 복판에 화강암을 쌓은 높이 36m '레닌그라드 영웅 도시 오벨리스크'는 
1945년 소련이 나치 독일에게 거둔 승전의 40주년을 기념해 1985년 세웠다.

이 오벨리스크가 2차대전 승전보다 각별하게 기리는 것은 
현대 전사에서 가장 끔찍한 사건으로 꼽는 '레닌그라드 봉쇄'다.
나치 독일군이 1941년부터 900일 동안 레닌그라드(상트페테르부르크)를 

포위하다 퇴각하기까지 당시 시민 3분의 1, 100만 명이 굶주리거나 

질병으로 죽고 군대 30만 명이 전사한 전무후무한 참극이다.

스탈린은 1945년 레닌그라드에 '영웅 도시' 칭호를 부여했고 그 이름이 오벨리스크에도 붙었다.
오벨리스크 꼭대기에 '영웅 도시'의 상징으로 올린 황금 별(실은 스테인리스) 높이만 1.8m 이다.

 

모스코프스키 (Moskovsky) 철도 터미널 야경

 

지하철 플로시차드 보스타니야(Ploschad Vosstaniya) 역 

세계 최초로 스크린도어가 설치된 지하철 역이기도 하다. 
대한민국의 흔한 유리 스크린도어와는 달리 1955년 초창기의 스크린도어답게 
투박하고 육중한 철문으로 되어 있다. 
쾅 하고 닫히는 철문 스크린도어의 굉음과 압박이 대단하다.
모스코프스키 (Moskovsky) 철도 터미널과 바로 연결된다.

 

지하철 플로시차드 보스타니야(Ploschad Vosstaniya) 역 야경

 

넵스키 대로 (Nevsky Prospect) 

 

넵스키 대로(Nevsky Prospect, Невский проспект)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번화가로, 네바 강에 위치해 있다.  
명칭은 '네바 강의 거리'란 뜻이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모든 길들은 넵스키 대로로 통한다는 말이 있을 만큼  
해군성에서 알렉산드르 넵스키 수도원까지 4.5km로 뻗어 있는 이 거리에는  
호텔, 레스토랑과 카페, 상점들, 음악당 등이 위치하고 있다. 

 

넵스키 대로 (Nevsky Prospect)

원래는 습한 늪지대였던 이곳은 1710년에 처음으로 길이 뚫리게 되면서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대표하는 문화, 상업의 중심지이자 

가장 아름다운 거리 중 하나로 손꼽히게 되었다.  
거리에는 19세기에 건축된 화려하면서도 

아담한 건물들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 더욱 운치가 있다. 

 

넵스키 대로 (Nevsky Prospect)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발트해 핀란드만으로 흘러드는 네바강 남쪽에 자리잡았다.
봉건 농업국가 러시아를 근대 유럽 강국으로 끌어올린 개혁군주 표트르 대제가
18세기 벽두 이곳에 새 수도를 건설할 때부터 짧게는 서쪽 전진기지 나르바까지,
멀리는 동남쪽 수도 모스크바까지 연결하는 신수도 중심 도로로 구상했다.

처음엔 그저 '넵스키 수도원 가는 길'이라고 부르다가
1781년 '넵스키 대로'라는 이름을 얻었다.
13세기 현 상트페테르부르크 지역을 지배한 노브고로드 공국의 
알렉산드르 대공은 나르바 전투에서 스웨덴군과 게르만 기사단을 차례로 물리쳐 
나라를 구한 영웅이자 러시아 정교회 성인으로 추앙받고 있다.
그의 출생지가 지금 넵스키 대로 동쪽 끝 수도원 근처여서
'네바강의'라는 형용사 '넵스키'가 그의 이름 뒤에 따라붙게 되었다.

넵스키 대로는 서쪽 네바 강변에서 시작해 동쪽 네바 강변에서 끝나는데, 
관광객이 많이 다니는 상징적인 구간은 구 해군성이 있는 서쪽 끝에서부터 모스콥스키 역까지다. 
이 대로 근처에 운하들, 에르미타주 박물관, 러시아 박물관, 카잔 대성당, 피의 성당 등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주요 관광지가 도보 이동권에 모두 모여 있어서 
관광객들도 이 대로를 중심으로 다니게 된다.

 

[영상] 보스타니야(Vosstaniya) 광장과 넵스키 대로

 

넵스키 대로 (Nevsky Prospect)

걷다 보면 고색창연한 건물이 양쪽 길 옆에 즐비하다.
현재의 대로 형태는 이미 러시아 제국 시대에 완성되었다. 
도스토옙스키가 즐겨 산책해 그의 저작에도 넵스키 대로가 종종 등장하고 
피의 일요일 사건 때도 민중들은 차르를 외치며 이 대로를 행진했다. 
도로는 아스팔트로 포장되어 차들이 다니지만 그 외 길가의 건축물들은 
모두 당시부터 보존되는 것이 대부분이며 대단히 고풍스럽다.

 

콜롯세움(Колизей)이라 씌여진 간판이 있다. 

 

작가 고골(Nikolai Gogol 1809~1852)은 그의 단편 <넵스키 대로(Nevsky Prospekt)>에서 
넵스키 대로의 열광적인 삶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페테르부르크에서 넵스키 대로만큼 멋진 곳은 없다. 
넵스키 대로는 곧 페테르부르다. 여기에서는 모든 것이 다 빛을 발한다. 
이 거리에서 즐겁지 않은 자가 누구란 말인가. 
아무리 사무적인 페테르부르크 사람일지라도 

넵스키 대로만은 세상 어느 곳과도 바꾸지 않으리라. 
젊은이, 늙은이 모두에게 이 거리는 매력으로 가득 차 있다. 
그리고 여인! 그들에겐 이 거리가 더 매력적일 수밖에 없다.”

19세기 러시아 문학 황금기에 유명한 작가들이 자주 방문한 카페 레스토랑은 
넵스키 대로에 여전히 "문학 카페" 로 남아 있다.

 

콜롯세움(Колизей) 내부

 

1834년에 지은 연두색 건물

왼쪽 연두색 건물은 1834년에 건축되었는데 
1904년 건물의 기초와 층 구조는 그대로 두고 외관만 아르누보로 리모델링했다고 한다.

 

기둥마다 신화에 나오는 얼굴을 부조상으로 장식했다.

 

1872년에 지은 붉은 색 건물

오른쪽 붉은색 건물은 장식이 더 복잡하고 화려하다. 
1872년 17세기풍 파리 건축과 바로크 양식을 결합한 절충식으로 지어
볼셰비키 혁명까지 40년 동안 은행과 러시아 최초의 항공우주 전문 잡지사가 들어 있었다고 한다. 

 

넵스키대로는 이미 1720년에 돌을 깔아 포장했고
1883년 전기 가로등이 들어와 진작부터 유럽풍 거리로 번창했다.

 

아니치코프(Anichkov) 다리와 벨로셀스키-벨로제르스키(Beloselsky Belozersky) 궁전

아니치코프(Anichkov) 다리는 도스토예프스키가 첫 작품 <가난한 사람들>의 

원고를 들고 평론가를 찾아가며 건넜던 바로 그 다리다.
도스토예프스키가 "넵스키 대로에서 이루어지는 사람들의 만남, 
이것 하나만으로도 웬만한 책 한 권은 쓸 수 있을 것" 
이라고 했듯 사연도 이야기도 많은 넵스키 대로.

폰탄카 강과 넵스키 대로 아니치코프(Anichkov) 다리 교차로 남동쪽 코너에 
폰탄카 강을 끼고 화려하면서도 우아한 로코코 장식으로 눈을 사로잡는
벨로셀스키-벨로제르스키(Beloselsky Belozersky) 궁전이 있다.

 

벨로셀스키-벨로제르스키(Beloselsky Belozersky) 궁전

최초의 벨로셀스키-벨로제르스키 궁전은 1747년 러시아 엘리자베스의 통치 기간에 
미하일 안드레비치 벨로셀스키 (1702-1755) 왕자를 위해 넵스키 대로에 지어졌다. 
당시 오늘날보다 훨씬 작았던 이 건물은 프랑스 스타일로 설계되었고,
치장 벽토를 씌우고 파리 석회암을 모방하여 페인트했으며 넓은 정원이 있었다.

궁전을 재건하고 대중에게 공개하면서 벨로셀스키-벨로제르스키 궁전은 러시아에서 
가장 호화로운 궁전 중 하나이자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가장 호화로운 무도회와 
콘서트의 장소로 명성을 얻었다. 

이 집 2대 주인 알렉산드르 미하일로비치 벨로셀스키는 저택을 증축하면서 
친하게 지내던 황제 파벨1세에게 부탁해서 벨로제르스키라는 옛 대공 성씨를 받아 낸다.
그때부터 이 가문의 성(姓)은 벨로셀스키-벨로제르스키가 되고 저택 이름에도 붙게 된다.

 

벨로셀스키-벨로제르스키(Beloselsky Belozersky) 궁전

19세기 초 저택을 허물고 지금의 아름다운 궁으로 새로 지은 것은 
알렉산드르​ 미하일로비치의 미망인 엘레나 파블로브나였다.
우랄 광산을 운영하던 친정의 부를 쏟아 부어 자기 취향대로 화려한 궁전을 세웠다.
황제 니콜라이 1세의 허락을 얻어 궁정 건축가 안드레아스 스타켄스나이더가 공사를 지휘하게 했다.
스타켄스나이더가 왕궁 아닌 귀족 사저를 설계한 유일한 사례라고 한다.  

 

벨로셀스키-벨로제르스키(Beloselsky Belozersky) 궁전

전면 기둥들을 떠받치듯 선 부조상들은 제우스로부터 하늘을 떠받치는 형벌을 받은 
그리스 신화 타이탄족 아틀라스이다.
아틀라스상들은 궁이 지닌 파란만장한 러시아 근대사도 함께 떠받치고 있다.

벨로셀스키궁은 새로 짓자마자 러시아에서 가장 화려한 저택이자 가장 멋진 
무도회와 콘서트장이 됐고 엘레나 파블로브나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사교계의 여왕이 됐다.
1848년 개축 때 벨로셀스키궁은 대형 응접 홀, 콘서트 홀, 실내 교회와 함께 
지금의 화려한 로코코풍 외부 장식을 갖췄​다.

1883년 궁을 사들여 새 주인이 된 대공작 세르게이 알렉산드로비치는 
​제정 러시아 로마노프 왕조가 전횡과 호사와 민중의 굶주림 끝에 
몰락을 예고한 1차 러시아혁명 때 폭탄 테러로 사망한다.
미망인은 수녀가 되고 궁은 후견인 드미트리 공작 소유가 됐다.
1차대전 중에는 영국 적십자 의사 간호사들이 들어와 
부상한 러시아 병사들을 치료하는 적십자 병원으로 쓰인다.

궁은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고 2년 뒤인 1919년 

국유 재산으로 몰수돼​​ 시립 문화센터가 된다.
2차대전 때 내부 로코코 장식이 많이 부서져 1950년대 복원됐고 
지금은 시 재산이 돼 콘서트홀, 미술관 그리고 러시아의 역사적 인물과 
문호들의 밀랍인형 80여 개를 모아놓은 밀랍박물관으로 쓰고 있다.

 

[영상] 걸어서 넵스키 대로 / 엘리세예프 상점 - 폰탄카 강 아니치코프(Anichkov) 다리

 

벨로셀스키-벨로제르스키(Beloselsky Belozersky) 궁전

1차 세계대전 중 1916년 1월부터 1918년 1월까지이 궁전은 러시아 군인을 
치료하기 위해 설립된 자발적인 영국 적십자 병원인 앵글로-러시안 병원의 기지였다. 
2년 후 국유화되어 1991년까지 지역 소비에트가 거주 하게되었고, 
시립 문화 센터로 지정되었다. 
궁전의 로코코 내부는 제 2차 세계대전 동안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하지만 1954년에 원래 상태로 복원되었으며 현재 소규모 청중을 위한 실내 콘서트를 개최한다. 

2012년 2월 28일 궁전 지붕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러시아 언론, 텔레비전 및 관광객이 이를 보도했다. 
건물이 상트 페테르부르크시의 소유가 된 이후로 
콘서트홀로 이용되고 있다.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아니치코프(Anichkov) 다리

폰탄카(Fontanka) 강을 가로지르는 가장 오래되고 유명한 다리이다. 
아니치코프 다리는 1715년 표트르 1세의 명령으로 나무다리로 만든 이래 
여러 차례 고쳐 놓았고 1842년 지금 돌다리 형태를 갖췄다.
18세기 초 도시 건설 초기 이 일대에 미하일 아니치코프 중령이 이끄는 연대가 주둔하며 
처음 나무다리를 놓아​ 아니치코프라는 이름이 붙었다.

운하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베네치아나 암스테르담처럼 수상 운송과 교통이 발달해 있다.​
운하나 강물은 불그스레하고 뿌옇기 때문에 오염된 것으로 오해하기 쉽지만 
철분과 석회석 성분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것일 뿐 실제로는 깨끗하다고 한다.
물고기가 많아 낚시를 즐기기에도 좋다고 한다.

눈여겨 볼 점은 다리 네 모퉁이에 있는 말 동상.
네 개의 유명한 말 조각품 (1849–50)과 함께 이 다리에는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가장 유명하고
화려한 철 난간이 있다. 
푸쉬킨(Pushkin), 고골(Gogol) 및 도스토예프스키(Dostoevsky)의 문학 작품에서 단골로 언급되고 있다.

 

1850년대 벨로셀스키-벨로제르스키 궁전과 아니치코프(Anichkov) 다리

 

[영상 자료] 벨로셀스키-벨로제르스키 궁전

 

아니치코프(Anichkov) 다리에 있는 말과 조련사 조각

 

조련사 조각상은 로마 퀴리날 언덕에 있는 4세기 조련사상 한 쌍에서 유래한다.
난폭한 말을 다루는 조련사의 몸짓과 근육이 역동적이어서 영감을 얻은 여러 버전이 
프랑스, 영국, 독일, 현대 뉴욕에 이르기까지 세계 여러 곳에 섰다. 
그중 가장 유명한 작품이 이곳 조련사상이다.

역동적이고 사실적인 조각 솜씨가 빼어날 뿐 아니라 한 쌍인 로마 오리지널 작품을 넷으로 늘려 
네 가지 인간형을 묘사해, 예술성이 떨어진다는 로마 오리지널 조각상보다 유명하다.

 

아니치코프(Anichkov) 다리 말과 조련사 조각상 

러시아 조각가 표트르 클로트 폰 유르겐스부르크(Peter Klodt von Jurgensburg) 남작이  
그리스 로마의 신화를 모티브로 해서 4필의 말과 조련사(Horse Tamers)를  
디자인하고 조각하여 1849년에 설치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동물, 특히 말을 좋아해 말 애호가였던 황제 니콜라이 1세와 가까웠고  
황제의 의뢰로 조련사상을 만든다. 
1842년 황제는 그중 둘을 프러시아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에게 선물했고  
1846년엔 이탈리아 여행 때 환대해 주었던 시실리 왕 페르디난드 2세에게 보낸다. 

 

아니치코프(Anichkov) 다리 말과 조련사 조각상

그래서 상트에 남아 있던 주조 거푸집으로 다시 지어부어 만든 것이 이 조련사상이다. 
힘 센 아라비아 종마 아말라트벡을 누드의 남자 조련사가 
각기 네 가지 모습으로 다루는 형상을 표현했다.
1848년 표트르 클로트가 만든 두 점의 새 동상은 예전의 것과는 다른 형상이었다. 
표트르 클로트는 이 다리 말 동상 외에도 여름동산에 있는 
쿠르이로프 동상 제작을 비롯하여, 초기 러시아 조각 발전에 기여했다.

살아서 힘이 넘치는 듯한 말과 마부의 동상이다. 
네 곳 각기 다른 동작의 모습을 한 역동적이고 살아있는 모습이다. 
조각상의 공통적인 소재는 날뛰는 말을 진정시키는 장면이라 하겠다. 
이 동상들은 러시아 미술 역사상 작품을 구상한 사람이 

주조도 겸하여 행한 유일한 사례라고 한다.

 

아니치코프(Anichkov) 다리에 있는 말과 조련사 조각

조련사가 말을 감당 못해 쩔쩔매는가 하면 날뛰는 말에 깔려 죽을 지경에 처하기도 하고 
그런대로 겨우 수습하거나 고삐를 단단히 쥐고 의연하게 말을 길들인다.
인간의 현명함과 어리석음을 네 단계로 표현해 어떤 인간형이​ 이상적인지를 말한다

 

아니치코프(Anichkov) 다리에 있는 말과 조련사 조각

말 뒷다리 핏줄까지 선명하게 조각한 모습이 마치 살아 있는 듯하다.
1841년 청동으로 된 동상들이 다리의 서쪽 끝에만 세워졌다. 
다리 동쪽 끝에는 석고 모형들이 있었는데, 이는 청동으로 된 것들을 
니콜라이 1세가 프러시아 왕에게 선물했기 때문이었다.

 

조각가가 이 석고 모형을 그대로 청동으로 대치해서 작품을 만들었을 때, 
이 작품 또한 러시아를 떠나야만 했으니, 이는 나폴리의 왕궁 앞 광장을 장식하기 위해서였다.

 

아니치코프(Anichkov) 다리에 있는 말과 조련사 조각

이 다리에 있는 말 조각과 관련한 믿거나 말거나 한 이야기가 전해 온단다. 
이 말 동상을 만든 조각가의 아내가 다른 남자와 불륜을 저지르자, 
화가 난 조각가는 간통한 정부의 얼굴을 네 마리 말 중, 
한 마리의 성기 부근에 조각해서 붙였다나, 어쨌다나.

 

말과 조련사 조각상 기단에 2차 대전 전쟁의 흔적이 남아 있다.

 

김창준 교수의 설명

"1941~44년 사이에 레닌그라드를 봉쇄했던 파시스트들이 

쏘아버린 148,478개의 총탄 자국 중 하나이다"
라고 씌여 있다.

 

[영상] 김창준 교수의 설명

"1941~44년 사이에 레닌그라드를 봉쇄했던 파시스트들이 

쏘아버린 148,478개의 총탄 자국 중 하나이다" 라고 씌여 있다.

 

아니치코프(Anichkov) 다리에서 폰탄카(Fontanka) 강을 배경으로 

아니치코프(Anichkov) 다리는 넵스키 대로 중간 즈음에 있는 곳으로 
상트 페테르부르크를 방문한 사람은 모두 몇 번씩 지나가는 곳이다.
유람선을 타고 내리는 선착장도 있어서 넵스키 대로의 중심지이다.

 

[영상] 아니치코프(Anichkov) 다리에서

 

아니치코프 궁전(Anichkov Litsey)

넵스키 대로와 폰탄카 강 교차점에 있는 옛 제국 시대 궁전이다.
이오니아 양식(Ionic Order) 기둥에 바로크 양식으로 화려하게 설계되고
러시아의 엘리자베타 여제 (Elizaveta Petrovna 1709–1762 )를 위해 건축된 궁전이다.
이 궁전은 넵스키 대로에서 가장 규모가 큰 최초의 석조 건물이다.

 

아니치코프 궁전(Anichkov Litsey)

건축 공사는 13년 동안 계속되었다. 
1754년에 마침내 궁전이 완공되었을 때, 엘리자베타 여제는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그리고 내연의 남자인 백작 알렉세이 라즈모프스키에게 궁전을 선물했다. 
1771년 라즈모프스키 백작의 죽음 이후 궁전은 왕실로 되돌려졌지만 
1776년 러시아 예카테리나 대제는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포템킨 왕자에게 이 궁전을 기증했다. 
1791년 포템킨의 죽음으로 이 궁전은 왕실로 복원되었고 

황실 폐하의 내각으로 사용되도록 개조되었다. 

1866년 미래의 차르 알렉산더 3세와 그의 아내 

마리아 페오도로프나 (Maria Feodorovna )는 아니치코프 궁전을 

상트 페테르부르크 거주지로 삼아 다양한 역사적 스타일로 새롭게 단장했다. 
마지막 러시아 황제 니콜라스(Nicholas) 2세를 포함한 그들의 아이들은 어린 시절을 보냈고, 
알렉산더 3 세가 1881년에 왕위에 오른 후 그는 아니치코프 궁전에 머물기를 선호했다. 


아니치코프 궁전은 니콜라스 황제의 조카 이리나 알렉산드로프나(Irina Alexandrovna) 공주와 
펠릭스 유수포프(Felix Yusupov) 왕자의 결혼식을 포함하여 수많은 가족 행사가 열린 곳이다. 
니콜라스 2세의 어머니는 황후가 된 후 1917년 2월 혁명 때까지 궁전에서 거주할 권리를 
계속 가지고 있었지만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멀리 키예프로 이사를 했다. 

 

아니치코프 궁전(Anichkov Litsey)

1917년 11월 10월 혁명 이후 볼셰비키 정부는 아니치코프 궁전을 국유화하고 
상트 페테르부르크 시립 박물관으로 지정했다. 
1934년 이후 영 파이오니어 팰리스(Young Pioneer Palace)로 개조되었을 때 

이 궁전에는 10,000 명 이상의 어린이를 위한 방과 후 클럽이 백 개가 넘었다. 
내부의 작은 박물관은 지정된 시간에 일반인에게 개방되지만 

일반적으로 건물은 관광객이 접근 할 수 없다.

 

1750년대 아니치코프 궁전(Anichkov Litsey)
가장 화려한 엘리자베타 시대 바로크 양식의 눈부신 아니치코프 궁전(Anichkov Litsey)

 

1753년 폰탄카 강 아니치코프 다리와 아니치코프 궁전(Anichkov Palace) 모습

 

1810 년대 아니치코프 궁전

1817년 알렉산더 1세는 다가오는 결혼식을 위해 그의 동생 
니콜라이 파블로비치(Nikolai Pavlovich)에게 아니치코프 궁전을 주었다. 
1825년에 니콜라이 파블로비치는 황제가 되었고 

궁전은 "황실 폐하 자신의 것"이라고 불렸다. 
아니치코프 궁전에서는 웅장한 축하 행사가 많이 열렸고, 
푸쉬킨 부부도 그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종종 참석했다. 

1841년 아니치코프 궁전의 다음 소유자는 알렉산더 미하일로비치(Alexander Mikhailovich) 

대공이었으며 그는 아버지에게 결혼식을 위해 이 궁전을 선물로 받았다.
궁전 단지의 마지막 여주인은 니콜라스 2세의 어머니인 

마리아 페도로로프나 (Maria Fedorovna) 황태후였다.

1918년 혁명 직후 아니치코프 궁전은 1935년까지 국유화되고 
상트 페테르부르크 역사 박물관의 전신인 도시 박물관이 되었다. 
아니치코프 궁전의 역사는 미세한 형태의 러시아 역사다. 
사람들이 하나의 궁전을 건축하고 유지하는 데 비용이 얼마나 들었는지는 상상하기 어렵다. 
공공 비용과 국가 돈으로 건축 및 재건을 했다. 

 

1830년대 궁전 : 신고전주의적으로 개조된 이후의 모습

이오니아 양식(Ionic Order) 열주는 그리스 고전 건축양식의 한 가지로, 
이오니아로부터 일어나 아테네 전성시대 이래 한 세기동안을 지배하였다.
기둥에 주춧돌이 있고 곡선상의 소용돌이 모양을 한 기둥머리가 그 특색인데 
우아하고 경쾌한 느낌을 준다.

 

1862년 궁전.
Anichkov 궁전의 전망, 1862. by 바실리 사도브니코프(Semyonovich Sadovnikov)

 

알렉산더 2세(Alexander II) 황제가 개최한 아니치코프 궁전 연회. 수채화.

 

알렉산더 2세(Alexander II) 황제가 개최한 아니치코프 궁전 연회. 수채화.

 

1880년대 아니치코프 궁전 사진. 

1917년 혁명 이전, 러시아의 마지막 황제 니콜라스 2세의 어머니이자 알렉산더 3세의 

미망인 마리아 페도로프나 (Maria Fedorovna)는 아니치코프 궁전에서 살았다.

 

아니치코프 궁전(Anichkov Palace) 단지

 

황태후(Empress Dowager) 마리아 페도로프나 (Maria Fedorovna)와 
아들 니콜라스 2세 (Nicholas II) 마지막 황제

 

1900년대 초 내부 홀 중 하나의 모습

 

아니치코프 궁전 주요 계단

 

아니치코프 궁전 내부

 

아니치코프 궁전 내부

 

 

 

러시아의 간단한 역사

 러시아는 그 역사가 정확하게 어느 시점에서 시작되었다고 단정적으로 말하기가 어려운 나라이다. 
러시아라는 이름 자체가 파생되어 나온 '루스(Rus)'라는 사람들은 
현재의 북서부 러시아에서 남하한 바이킹 부족들의 후예로 
슬라브 계열의 언어가 아니라 게르만 계열의 언어를 사용했다. 
이들은 9세기 후반에 비잔틴 제국으로부터 기독교를 받아들이면서 
현재 우크라이나 공화국의 수도인 키예프에 최초로 공국(公國)을 세웠다.

키예프의 뒤를 이어 교역 요충지나 넓고 비옥한 농지를 중심으로 
우랄 산맥 서쪽에는 '공(公, Prince)'이 통치하는 여러 개의 독립적인 공국이 세워졌고, 
이들은 서로 경쟁하면서 발전해 나갔다. 
공국들 중에서 패권을 잡은 통치자는 '대공(大公, Grand Prince)'이라는 지위를 차지했다. 
키예프 대공의 패권은 13세기에 류리크 왕조의 블라디미르 대공과 모스크바 대공에게 넘어갔다.

14세기에는 칭기즈 칸의 손자 바투의 정복으로 러시아 전체가 몽골의 지배를 받았다. 
이 시기 러시아는 몽골의 지배보다는 약화된 러시아를 노리고 자주 침공한 
게르만의 튜튼 기사단과 스웨덴으로 인해서 더 큰 괴로움을 받았던 약소국이었다. 
이러한 러시아를 강대국으로 변모시킨 사람들은 두 사람의 난폭한 통치자들이었다

 

Tsar Ivan The Terrible, 이반 뇌제. 1897. by Viktor Vasnetsov.  
oil on canvas. 247 × 132 cm. Tretyakov Gallery Room 26

류리크 왕조의 이반 4세 (Ivan Ⅳ 1530~1584)에게는 '광제(狂帝, the Terrible)' 
혹은 '뇌제(雷帝, the Awesome)'라는 별명이 붙어 있다. 
이반은 러시아 역사상 처음으로 '차르'라는 명칭을 사용한 강력하고 유능한 통치자였다. 
그는 전제주의적인 강력한 왕권을 세워 몽골 제국의 잔재인 
두 개의 작은 칸국을 정복했으며 태평양을 향한 동진도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심각한 정신질환을 앓고 있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스스로 분노를 통제하지 못해서 

폭발적으로 난폭함을 드러내는 증상을 보이곤 했다.

 

Ivan the Terrible and His Son Ivan on November 16, 1581.  
아들 이반 이바노비치를 죽인 뒤 오열하는 이반뇌제. 1581년 11월 16일', 1885. 
by Ilya Repin. oil on canvas. 254 x 199 cm. Tretyakov Gallery Room 30  

이반의 비극은 아들의 죽음으로 절정을 맞이했다. 
그는 며느리가 얇은 옷차림으로 나타나자 발작을 일으켜 
그녀를 때려 임신 중이던 아이를 유산하게 만들었다. 
이 처사에 대해 아들 젊은 이반이 항의하자 그는 다시 이성을 잃고 
들고 있던 왕홀로 아들을 폭행하기 시작했다. 
젊은 이반은 치명상을 입었다. 
정신을 차린 차르는 아들을 껴안고 통곡했지만 젊은 이반은 사흘 후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반 뇌제도 그로부터 3년 후에 세상을 떠났으며 이것으로 9세기 중엽 
노브고르드(Novgord) 대공으로 시작된 류리크 왕조는 실질적으로 막을 내렸다. 
이반 4세의 치세 이후 치열한 권력 투쟁이 벌어졌으며 마지막 승자가 바로 
새로운 왕조를 이루게 될 로마노프 가문이었다. 
이 새로운 왕조는 여러 세력 사이에 이루어진 타협의 산물이었다.

수십 개의 동등한 명문가 중 하나였을 뿐인 로마노프 가는 
왕권 기반도 단단하지 못한 상황에서 군사 강국들인 독일 튜튼 기사단령 
프로이센 , 폴란드, 스웨덴, 오스만튀르크를 동시에 상대해야 했다. 
또한 제국으로부터 독립하려는 분리주의자들과 높은 세금과 함께 갖가지 의무와 
지주들의 착취에 신음하는 농민들의 거센 도전도 헤쳐 나가야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등장한 사람이 바로 러시아 역사상 최초로 
'대제(the great)'의 칭호를 얻게 될 표트르 1세였다.

 

상트 페테르부르크(Saint Petersbur) 구글 지도

상트 페테르부르크(Saint Petersbur)는 러시아의 북서쪽에 있는 연방시로
네바(Neva) 강 하구에 있으며, 그 델타지대에 형성된 자연섬과 
운하로 인해 생긴 수많은 섬 위에 세워진 도시이다.
발트 해의 핀란드 만에 접해 있고 "북유럽의 베네치아"라고도 불린다.
예전에는 페트로그라드(Petrograd)와 레닌그라드(Leningrad)로 불리기도 했다. 
1924년 1월 21일 블라디미르 레닌이 죽자 1924년 1월 26일 그를 기념하여 
레닌그라드로 불리게 되었고, 1991년 9월 6일 다시 옛 이름을 되찾았다.

 

우리 민족에게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매우 각별한 의미를 지닌 도시다.
세계 최초로 대학에서 한국어강좌가 개설된 곳이며, 
러시아 최초의 한국공사관이 설치된 도시이자 일본의 국권 강탈에 항거하며 
대한제국의 자주 독립을 지키려고 애쓰다가 비운의 생명을 마감한 
애국지사의 영혼이 깃든 곳이기도 하다.

 

고종은 아관파천 후 민영환을 최초의 특명 전권대사로 임명하여
니콜라이 2세 대관식에 참석하도록 했다.

1896년 5월 민영환은 특사 사절단을 이끌고 최초로 러시아를 방문하여
상트페테르부르크에 3개월 간 체류한 뒤 귀국했고, 3년이 지나서 
1899년 3월 러시아, 프랑스, 오스트리아 겸임으로 이범진 공사가 임명되었다.


이후 1901년 3월 이범진 공사는 겸임을 해제하고 주러시아 상주 공사로 임명되어 
외교활동을 전개했지만 1905년 11월 을사조약의 체결로 외교관 신분이 박탈되고
1910년 8월 29일 매국내각에 의한 한일합방이 발표되자 더 이상 구차한 생명을
부지할 의미를 느끼지 못하고 자결로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생을 마감하게 되었다.

 

[영상] 초대 러시아 상주 공사 : 독립운동가 이범진

 

[영상] 초대 러시아 이범진 공사 기념관 건립 ‘10년째 표류’ / KBS News

 

네바(Neva) 강

길이 740km. 너비 500∼1200m로 러시아 연방 북서쪽 라도가 호(湖)에서 
서쪽으로 흘러 하류에 큰 삼각주를 형성하고, 발트 해의 핀란드만(灣)으로 흘러들어간다.
12월부터 다음해 4월까지는 결빙(結氷)하며, 해빙기의 수위상승은 작으나 북서계절풍에 의해 
서쪽으로 열린 만구(灣口)의 수위가 높아져 1924년에는 큰 수해를 입기도 하였다.

상트페테르부르크는 강어귀에 발달된 면적 45.6 ㎢ 에 이르는 
커다란 삼각주 위에 발달된 항구로, 예로부터 발트 해(海) 제일의 무역항을 이루었다.
네바 강은 상트페테르부르크 시내에서 크고 작은 2개의 네바 강으로 나뉘어 흐르는데 
지점 주변에는 페트로파블로프스크 요새(要塞)와 푸시킨 광장 · 에르미타주 미술관 등의 명소가 많으며, 
시내를 관류(貫流)하는 하천이기에 시민과 관광객에게 친근감을 준다.

네바강은 전 유로(全流路)가 항행이 가능할 뿐 아니라 백해(白海)∼발트해를 연결하고, 
모스크바~볼가강(江) 유역의 도시, 카스피해∼흑해를 잇는 중요한 수상교통로 구실을 한다.

 

표트르 대제(Peter I the Great)의 초상, 1838. by Paul Delaroche. oil on canvas. 130.6 x 97cm.

러시아 제국의 차르 표트르 대제가 1703년 설립한 이 도시는 
1713년 모스크바에서 천도하여 1918년까지 러시아 제국의 수도였다. 
1918년 수도는 다시 모스크바로 옮겨졌다. 
2010년 기준으로 5,000,000 명이 살고 있으며, 러시아에서는 수도 모스크바 다음으로, 
유럽에서는 네 번째로 인구가 많은 도시이다. 
모스크바에 이은 러시아의 대공업도시로 복잡한 정밀기계의 제조가 특색이다. 
선박, 터빈, 발전기, 디젤 엔진, 트랙터, 공작기계, 계기류(計器類), 각종 장치의 제조공장이 있고, 
화학공업(고무제품·과린산비료·화학합성 자재·염료·도료·향료), 섬유공업, 인쇄업 등도 성하다.

다수의 학술 연구기관, 미술관, 박물관 등이 있어 학술 · 문화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도심은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다. 
레닌그라드주와는 분리된 연방시를 이루고 있으나, 레닌그라드주의 행정 중심 도시로 되어 있다.

현재 상트페테르부르크가 있는 핀란드 만 주위로 8~9세기부터 러시아인들이 정착했다. 
이 지역은 노브고로드 대공국에 귀속되었으나 습지였기 때문에 사람들이 
거의 살지 않았으므로 버려진 땅이었으며 이후 15세기에 모스크바 공국의 영토가 되었다. 
1611년에 한번 스웨덴이 이 지역을 차지한 적이 있었으나, 
표트르 1세가 북방전쟁에서 이 지역을 탈환하였다. 
이곳의 수비를 목적으로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를 짓기 시작함으로써 
도시건설의 기반이 마련되었다. 
표트르 1세는 서구 문화를 받아들이기 위하여 장대한 도시계획을 세우고, 
이 요새 근처에 사도 베드로의 이름을 따서 새로운 도시(상트페테르부르크)를 짓게 되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새 도시를 짓기에는 이 지역의 자연환경이 좋지만은 않았다. 
연 평균 기온은 4.2도에 일조량은 31일 정도이다. 
또 매년 한 번씩 홍수가 터져서 곤혹을 치른다. 
또 원래 습지였던 이 지역에 도시를 바로 짓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도시를 짓기 위해서는 석조 토대가 필요했는데, 
이 때문에 도시를 지을 때 돌을 쏟아부어 습지를 메울 필요가 있었다. 
물론 습지를 메우는 데에는 어마어마한 양의 돌이 필요했다. 

따라서 표트르 대제는 돌을 충당하기 위해 도시를 들어오는 
모든 선박과 사람들에게 돌을 가져오라고 칙령을 내렸다. 
선박은 크기에 따라 30kg이상의 돌을 10~30개 가져와야 했으며, 
육로로 들어올 경우에는 15kg이상의 돌을 세 개씩 가져와야 했다. 
수많은 노예들이 습지를 돌로 메우는 데에 이용되었으며 가혹한 자연과 
고된 노동을 이기지 못하고 많은 사람들이 사망하였다. 

이때 죽은 노예를 습지로 던져버렸기 때문에 이 도시에는 
뼈 위에 세운 도시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이 있다. 
이 때는 석조 건축물을 짓는 것도 금지되었다. 
각종 물건들에도 세금이 붙었고 교회의 재산도 국가에 귀속시켜 버렸다. 
표트르 대제에 반하여 구 귀족 및 종교 세력의 편이었던 그의 아들 
알렉세이 페트로비치 황태자는 1718년에 무자비하게 처형되고 만다.

 

상트페테르부르크

18세기 초반부터는 러시아 최대의 무역항으로 공업의 중심지가 되었다. 
1851년엔 러시아 최초의 철도가 부설되기도 했다.(모스크바와 연결) 
자본주의가 발전하고 교통이 편리해짐으로써 이 도시의 인구는 폭발적으로 증가하였다.

이후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중반까지 각종 러시아의 혁명에서도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중심이 되었다.(피의 일요일, 3월 혁명, 11월 혁명) 
또 세계 2차대전 당시 1941년 8월부터 29개월 동안 독일군에 포위당한 상태로 
40만 명이 아사(餓死)당하면서까지 지켜낸 도시라고 하여 영웅 도시라고 불리기도 한다. 
소련이 해체될 때까지 "레닌그라드"라고 불렸다가, 다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이름을 바꾸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역사 지구와 관련 기념물군은 1990년 세계유산으로 지정되기도 하였다.

 

상트페테르부르크

모스크바가 동양적 모습을 많이 간직하고 있는 도시라면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서부 유럽으로 가는 통로'라는 호칭에 맞게 많은 면에서 서양적인 특징들을 많이 보존하고 있는 곳이다.
상트페테르부르크는 특히 18-19세기에 지어진 우아한 바로크 양식의 건축물과 
에르미타쥐 박물관으로 인해 많은 관광객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특히 강한 바람이 강물을 역류시키는 가을과 해빙하는 봄에 홍수가 많이 발생한다.

북위 60°의 고위도 지역이면서 온화한 해양성 기후를 보여, 남쪽의 모스크바보다 기온이 높다. 
연 평균기온은 4.6℃이며 추운 겨울에는 -40℃까지 내려가기도 한다. 
연강수량은 약 584㎜로 여름에 비가 많이 내린다. 
북극권에 가까워 겨울에는 밤이 길지만 6∼7월 초여름에는 백야(白夜)가 계속된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상트페테르부르크는 1703년 러시아 표트르 대제가 
네바강 하구에 페트로 파블로프스크 요새를 세움으로 시작되었다. 
표트르는 1712년 수도를 모스크바에서 이곳으로 옮기고 
도시 이름을 상트페테르부르크라 하였고, 많은 귀족과 상인들이 
새 수도로 이주해 왔으며 그들이 살 집과 궁전, 정부 관청 등이 신속하게 건설되었다.
19세기 이후에는 새로운 교통 · 통신수단의 발달에 힘입어 
러시아의 가장 중요한 산업 도시로서 본격적인 성장을 하였다.

 

상트페테르부르크

1810년 마린스키 운하가 새로 건설되고 1811년 티흐빈 운하가 보수되는 등 
내륙 수로망과 연결 운하가 정비되었으며 1813년 러시아 최초의 증기선이 건조되었다.
1837년 차르스코예셀로(지금의 푸슈킨시)와 여름 궁전 사이에 
러시아 최초의 철도가 건설되었고, 1851년 상트페테르부르크 - 모스크바 간의 철도가 개통되었다.
1861∼1862년 상트페테르부르크 -바르샤바를 잇는 철도 노선이 완성되는 등 
이 도시를 중심으로 러시아 내륙과 유럽을 연결하는 철도망이 건설되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한편 정치 · 문화의 중심지였던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러시아 혁명 운동의 무대이기도 하였다.
1825년 농노제와 전제 정치의 폐지를 주장한 데카브리스트 봉기를 시작으로 
노동자들의 혁명적 활동과 저항이 전개되었는데, 1905년 1월 
15만 명이 참여한 총파업으로 노동자들의 저항은 절정에 이르게 된다. 
1905년 1월 9일에 <피의 일요일> 사건이 일어남으로써 
상황은 혁명으로 발전하여 러시아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1917년 10월 혁명 때 볼셰비키 노동자와 병사들은 레닌을 수반으로 하는 
새로운 정권을 수립하였으며 1918년 3월 수도를 다시 모스크바로 옮겼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1941년 8월부터 1944년 1월까지 872일간 
독일군에게 포위되어 66만 명의 희생자를 내기도 한 도시이다.
그 후 1980년대의 개방화가 진전되면서 1991년 옛이름인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되찾았으며, 페테르부르크로 약칭하기도 한다.

 

러시아 제국 - 로마노프 왕조의 간략한 계보
상트 페테르부르크는 표트르 대제와 로마노프 왕조 흥망성쇠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 표트르 1세 (대제) (1682-1725)
- 큰형 페도르 3세, 둘째 형 지체 장애인인 이반 5세, 이복누이 소피야
아들 알렉세이 페트로비치, 딸 안나 페트로브나, 딸 옐리자베타 페트로브나,

​• 예카테리나 1세 (1725-1727) - 표트르 1세의 둘째부인 (리투아니아 출신)
• 표트르 2세 (1727-1730) - 표트르 1세의 손자
아버지 알렉세이는 반란군에 가담하였다가 할아버지인 표트르 1세에 의해 처형됨

• 안나 이바노브나 (1730-1740)
- 표트르 1세의의 둘째형인 이반 5세의 네째딸

​• 이반 6세 (1740-1741) 
- 안나 여제의 이질녀인 메클렌부르크의 공녀 안나 레오폴도브나와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 공작 안톤 울리히 사이에 태어난 아들로 이반 5세의 외외증손자. 
1740년 10월 17일 안나의 유언에 따라 러시아의 황제로 선포되었다

​• 옐리자베타 (1741-1762) - 표트르 1세와 예카테리나 1세의 딸이다.
1741년 11월 25일 쿠데타를 일으켜 어린 황제와 그 어머니 레오폴도브나 및 측근들을 체포하고 
32세의 나이로 러시아의 황제가 되는데 이로써 로마노프 왕조의 남자 계보는 끊어졌다.

• 표트르 3세 (1762) - 표트르 1세와 예카테리나 1세의 딸 안나 페트로브나의 아들로 
이모인 러시아 제국의 여제 옐리자베타에 의해 황태자로 책봉되었다.

• 예카테리나 2세 (대제, 예카테리나 알렉세예브나, 1762-1796)
1745년 러시아의 황태자이던 표트르 3세와 결혼했으나 지능이 부족하던 남편을 대신하여 섭정을 했다. 
1762년 정변을 일으켜 남편을 폐위시키고 스스로 제위에 올랐다

​• 파벨 1세 (1796-1801) - 예카테리나 2세의 아들. 전제정치로 살해된다.
• 알렉산드르 1세 (1801-1825) - 파벨 1세의 첫째 아들. 햄릿 같은 성격의 소유자.

• 니콜라이 1세 (1825-1855) - 파벨 1세의 둘째 아들. 결단력의 소유자,
유럽의 헌병. 크리미아 전쟁(영국, 프랑스, 터키, 오스트리아, 독일과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패배

​• 알렉산드르 2세 (1855-1881) - 니콜라이 1세의 아들. 농노제 폐지, 행정 개혁. 암살 당한다.
• 알렉산드르 3세 (1881-1894) - 알렉산드르 2세의 둘째아들. 반동정치
• 니콜라이 2세 (1894-1917) - 알렉산드르 3세의 맏아들. 반동정치 계승. 혁명세력 등장 후 처형당한다.

 

황태자 시절의 어린 표트르

표트르 대제 (Peter I the Great 1672~1725)는 러시아 제국 로마노프 왕조의 황제로
서구화 정책과 영토 확장으로 루스 차르국을 러시아 제국으로 건립했다.
표트르는 1672년 로마노프 왕조의 2대 황제 알렉세이 미하일로비치(Alexey Mikhailovich 1629~1676)와 
그의 두 번째 황후인 나탈리야 키릴로브나 나리시키나 사이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황태자 시절의 어린 표트르

표트르가 4살 때에 알렉세이 황제가 승하하자 

이복형 표도르 3세 (Fyodor Ⅲ)가 황제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이때에 그는 어머니 나탈리야(Nataliya Narshkina)와 함께 왕궁에서 나와 
모스크바의 외국인 거주지 부근에서 살았고 

그리 오래는 아니지만 백해 연안에서 살기도 했다. 
그는 차르가 된 이후에도 한동안 왕궁으로 옮기지 않고 줄곧 일반인들과 함께 생활했다.

표도르 3세는 자식을 남기지 못하고 6년 만에 저승으로 갔다. 
이에 표트르 1세가 차기 황제로 낙점되었으나 이에 반대한 

이복누이 소피아 알렉세예브나가 최정예 근위대라고 할 수 있는 

스트렐치(Streltsy)들을 동원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당시 이복형 이반 5세와 표트르 1세가 공동 황제에 오르고 

소피아가 섭정을 맡는 것으로 문제가 일단락되었다.
표트르는 이복누이 소피야 공주가 주동한 쿠데타로 

표트르를 지지한 귀족들도 숙청된 탓에 실권을 잃었다.

소피아의 눈을 피하기 위해 표트르의 어머니는 

표트르를 시골 마을로 보내서 키우게 했다. 
그런데 이 마을이 마침 러시아에 일하러 온 유럽 상인들과 

기술자들의 정착촌과 가까웠기 때문에, 어린 표트르는 

그들과 가까이 지내며 당시 최신의 기술들을 배울 수 있었다. 
특히 표트르가 흥미있어 한 것은 서구식 군대 전술, 항해술, 조선술, 포술 등이었으며, 
배운 것을 실천해보기 위해 또래의 귀족 자제들을 모아 '놀이 군대'를 만들어 놀면서 
자연스럽게 최신 군사기술을 습득할 수 있었다. 

12살 때에는 석공술과 목수일을 배우는 데 많은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때문에 젊은 나이에 말에 편자를 박는 일, 대포를 주조하는 일 등 

벌써 십여 가지 이상의 전문적이고 특수한 기술을 많이 보유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여러 방면에 관심을 쏟으며 생활하던 그는 1689년 러시아 대귀족의 딸인 

세 살 위의 예브도키야 로푸히나(Eudoxia Lopukhina)와 결혼했다. 
이 결혼은 표트르의 어머니 나탈리야가 실질적인 

권력자인 소피아를 상대로 거둔 정치적인 승리였다. 
이때부터 표트르는 러시아 전통에 따라 

성년의 시기를 맞이했으나 국사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소년병들과 군인놀이를 하거나 기계를 관찰하는 일이 생활의 전부였다.

소피아는 당시 최정예 근위대 스트렐치(Streltsy)의 지지를 받고 있었으나

크림 전쟁에 개입해서 좋은 결과를 내지 못하는 바람에 인기를 잃어 가고 있었다.
권력을 잃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누나 소피아는 

스트렐치를 동원해서 쿠데타를 시도했다. 
소피아는 이미 한 번 쿠데타에 성공해서 병약한 이반을 표트르와 함께 

차르로 세우고 자신이 직접 정권을 장악했던 전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지만 이번에는 스트렐치도 그녀를 전적으로 지지하지 않아 

수백 명 정도가 쿠데타에 가담했을 뿐이었다. 
여기에다 스트렐치 내부에서 표트르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은밀하게 쿠데타 계획을 표트르에게 알렸다.

 

Tsarevna Sophia Alexeevna in the Novodevitchy Convent. 1879. 
by Ilya Repin. oil on canvas. 145 x 202 cm. Tretyakov Gallery Room 29 
노보데비치 수녀원에 감금된 소피아 알렉세예브나 황녀. 
창 밖에 교수형 당한 소피아의 측근들 시신이 보인다.

표트르는 이를 신속하게 진압하고 소피아는 쿠데타의 불발로 실각했다. 
소피아는 노보데비치 수녀원에 갇히게 되었고 그곳에서 신분이 노출되지 않도록 
엄중한 감시를 받으면서 남은 평생을 베일에 갇혀 살게 되었다. 
이는 반란이라기보다는 당시 청나라 및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서 잇따라 패하자 
소피아에 대한 귀족들의 여론이 나빠지고 국면 전환용으로 벌인 사건이 커진 것이다. 
또한 표트르가 소피아의 반란을 쉽게 진압할 수 있었던 데는, 
서유럽 출신자들로 만든 용병대의 대장인 고든과 표트르의 두터운 친분 덕분에 
최정예 부대인 용병대가 표트르 편을 든 것이 결정적이었다. 

그렇지만 이 사건으로 표트르가 권력을 잡지는 못했다. 
열일곱 살의 표트르 대신 권력을 장악한 사람은 어머니인 나탈리야(Nataliya)였다. 
표트르는 여전히 정치에는 무관심한 채 외국인 거주 지역을 들락거리면서 분주한 일과를 보냈다.

표트르가 정치 전면에 나서게 된 시기는 어머니 나탈리야가 사망한 1696년 1월이었다. 
이즈음에 표트르와 로푸키나(Lopukhina)의 결혼도 그리 좋은 결말을 맺지 못하고 끝장났다. 
그들은 결혼 이듬해 후계자인 알렉세이(Alexei Petrovich)를 낳았지만 
두 사람의 개성은 서로 어울리기 힘들었다. 
표트르와 달리 로푸키나는 전형적인 대귀족의 취향을 고수했다. 
표트르는 로푸키나에게 그녀의 직위와 신분을 포기하도록 강요하고 수녀원에 집어넣어 버렸다.

사실 이런 일 때문에 러시아는 네르친스크 조약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다. 
즉 황제가 결정한 것이 아니고 섭정이자 제위 찬탈자인 

소피아의 권한으로 했기 때문에 무효라는 논리였다. 
표트르와 함께 공동 차르였던 이복형 이반 5세는 

표트르와 관계가 우호적이어서 실권은 표트르에게 넘겨주었으나 
쫒겨나지 않고 명목상의 차르 자리를 계속 유지한 채 살다가 곧 병사했다.
이반이 1696년에 죽자 그 때부터 표트르는 명실공히 유일한 절대 통치자가 되었다.

 

표트르 대제가 영국을 방문했을 때 그린 초상화 (Godfrey Kneller 그림) 

1695년 오스만 제국과 재개된 아조프 전쟁을 계기로 

표트르는 실전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는 러시아군이 전쟁 초기에 돈 강 하구의 오스만군 요새 

아조프를 포위할 때 포병의 신분으로 참여했다. 
이 전쟁에서 아조프 포위 작전은 3개월이나 계속되었지만 

쉽사리 요새를 공략할 수가 없었다. 
오스만 제국은 당시 함대를 이용하여 탄약이나 식량 공급은 물론 

보충 병력까지도 바다를 통해 지원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함대를 갖고 있지 않은 루스(Rus) 차르국으로서는 이를 저지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어린 시절부터 바다를 가까이 해 왔고 특히 백해에 있을 때 
영국이나 네덜란드의 선장들로부터 항해술 및 선박에 관한 제반 지식을 습득했던 
표트르는 이러한 난국의 타개책으로 함대 건설을 생각하게 되었다. 
표트르는 아조프에서 철군한 다음 우선 함대 건설 기지를 위한 적정 장소를 물색했다. 
그 결과 보로네시가 선정되었고, 구체적 세부 계획이 완성되자마자 바로 기지 건설에 착수했다. 

표트르는 빠른 속도로 함대를 만들기 시작해 

우격다짐으로 30척의 어설픈 전함을 만들었다. 
한편으로는 해군을 조직하기 위해 수천 명의 젊은이들을 

강제로 끌어들여 훈련에 총력을 기울였다. 
그리고 1696년 봄 해군을 편성해 다시 아조프를 공략해 쉽게 함락시킬 수 있었다. 

표트르는 다시 아조프 요새를 공격하면서 이 전함들을 이용해 튀르크 해군에 대항했다.
러시아 역사상 처음으로 조직된 이 함대는 시대에 한참 뒤떨어진 선박들로 이루어졌지만 
규모 면에서는 만만치 않았기 때문에 일단 아조프 요새를 지원하기 위해서 
올라오는 튀르크의 수송선단을 저지하는 데는 성공했다. 
표트르는 1696년 7월에 아조프 요새를 함락했다.

이렇게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은 일단락되었고 
이 전쟁으로 표트르는 유럽 여러 나라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같은 해 표트르의 형 이반 5세가 죽었다. 
이 때부터 표트르는 루스(Rus) 차르국의 유일한 전제군주가 되었다.

 

네덜란드에서 목수들과 함께 선박 건조 일을 하는 표트르 대제를 묘사한 그림

1698년, 표트르는 서유럽에 오스만을 견제하기 위한 

외교 관계를 구축하기 위해 대규모의 사절단을 파견했다. 
지중해로 진출할 교두보를 확보하기는 했지만 사실 

오스만튀르크 제국은 러시아 혼자 상대하기에는 벅찼다. 
그는 한 세기 전에 오스만튀르크의 서방 진출을 효과적으로 저지했던 
유럽 국가들의 대 튀르크 동맹을 다시 한 번 결성하려고 했다.
그리고 서유럽에서 기술이나 사회정책도 배워 오라는 뜻으로 

젊은 귀족들도 대거 포함시켰는데, 표트르 자신도 황제의 신분을 숨기고 

'표트르 미하일로프(Pyotr Mikhailov)'라는 가명으로 슬쩍 끼어들었다.

수백 명으로 구성된 사절단은 18개월에 걸쳐 인접국 폴란드, 튀르크와 대치 중인

오스트리아와 네덜란드, 영국 등 여러 나라를 순방할 계획으로 출발했다. 
이 대사절단은 스웨덴이 점령하고 있는 발트 해 연안을 따라 네덜란드로 들어갔다.

이들은 각자의 목적에 따라 여러 팀으로 나누어져 활동했는데 
표트르는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조선소였던 암스테르담의 
동인도회사 조선소에서 직접 선박 건조 기술자로 일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신분을 계속 위장하는 데는 아무래도 무리가 있었다. 
일단 그는 키가 2m (203cm)가 넘는 장신인데다 커다란 눈이 
대단히 인상적이었기 때문에 쉽게 눈에 띄고 오래 기억되는 사람이었다.

 

차르 - 목수상. 

 

신분을 숨기고 네덜란드 조선소에서 배를 직접 만들고 있는 표트르 대제.
이 조형물은 네덜란드가 러시아 해군 창설 300주년을 기념하여 선물한 것이다. 
황제는 청년시절 네덜란드 조선소에서 견습공으로 일한 적이 있다.

프로이센에서는 포병 부사관 코스프레를 하고 대포 조작 기술을 배웠고, 
네덜란드의 조선소에서는 목수 코스프레를 하고 손수 배를 만들어 보기도 했고, 
영국에서는 수학, 기하학을 배우고 해군 체험도 하면서 명예 제독의 지위도 얻었다. 
그리니치 천문대도 방문하고 뉴턴의 연구에 대하여 듣기도 하였다. 
심지어는 의학이나 해부학까지 수강했는데, 수강 중 시체를 보고 토한 자들을 
크게 문책하며 시체를 씹으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거기다 시체 해부하는 것까지 참관하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네덜란드 로테르담에는 지금도 표트르 대제의 동상이 서 있다.

그런데 사절단이건 방문한 나라 사람들이건 다들 '표트르' 미하일로프가 
코스프레 중인 표트르 1세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일단 키부터가 장신 수준이 아니라 2m가 넘는 거인이기 때문에 무척 눈에 띄었을 것이다. 
단지 당사자가 열심히 코스프레를 하니 장단을 맞춰줬을 뿐. 
또 아무리 코스프레에 맞춰줘도 일국의 황제를 포병 부사관이나 
목수처럼 굴릴 수는 없으니 일반 귀족의 예로 대우해줬다고 한다. 

그리고 자국을 방문 중인 외국 황제의 신변에 위협이 가거나 스캔들이라도 터지면 
정말 난리가 날 테니 표트르가 방문하는 나라의 군주들은 
다들 노심초사하며 호위를 겹겹이 붙였다고 한다. 
거기에 표트르 또한 가는 곳마다 문제를 일으키기도 하는 악동이라 
각 나라에서는 제발 러시아 황제가 자기 나라에 오지 말아주십사 했다고 한다. 
유학 동안에 표트르 1세는 러시아를 서유럽 수준으로 
끌어올려야 한다는 생각을 다지게 되었고 바다에 집착하게 되었다.

 

Morning of the Strelets’ Execution. 친위대 병사 처형의 날 아침. 1881.  
by Vasili Surikov. oil on canvas. 379 x 218 cm. Tretyakov Gallery Room 28  

유학 중간에 소피아의 잔당들인 스트렐치(Streltsy) 일부가 또 다시 쿠데타를 일으켜 
표트르는 14개월 만에 급히 러시아로 돌아와야 했다. 
이 쿠테타는 그가 없는 사이에 손쉽게 진압되었지만 모스크바로 돌아온 표트르는 
반란에 가담한 1,200명을 모두 처형하고 시체들을 한동안 매달아 두도록 했다. 
스트렐치는 러시아의 최고 정예부대였으나 수십 년 동안 정치 문제에 간섭해 오면서 
러시아 정치의 고질병을 만들어 냈다. 
표트르는 그동안 군권을 움켜쥐고 정사를 농단하던 스트렐치를 해산하는 절차에 들어갔다.
 

남자들이 수염을 깎는 모습

표트르는 아직 몽골의 잔재가 남아 있던 러시아를 서유럽화 하는데 치중했는데
이는 서유럽보다 발전이 늦은 러시아를 근대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표트르는 서유럽 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여성에게는 러시아 전통의상인 
긴 치마를 서유럽식으로 짧게 자르라고 했고, 무도회에 나와 술을 마시게 했다. 

동양의 영향으로 긴 수염을 기르는 사람에게는 수염세를 매기고 수염을 깎도록 했다.
또한 무질서하고 비능률적인 러시아의 전체적인 행정기구를 그 기능상 좀 더 효율적인 
임무 수행이 가능하도록 개혁하기 위해 유럽의 여러 제도를 면밀히 조사하도록 한 뒤, 
프로이센을 모델로 삼아 상설 행정 기구 (12행정원, 군무성, 해군성 등)를 만들고 
관리들의 관등을 정한 관등표를 제정했으며, 성문법전을 만들었다. 

 

외국식 전통복 차림의 표토르

표트르는 또한 서구의 발달된 학문을 러시아에 소개하고 번잡하던 키릴 문자를 

간소하게 개혁해 문자를 쉽게 익힐 수 있게 하는 한편, 학술원을 세워 학문을 장려했다. 
젊은이들은 유럽으로 유학 보내서 서유럽의 학문을 익히게 했고, 
유럽인을 초빙하여 유럽의 문화와 기술의 도입에 힘썼다.
바다로의 교역로를 열기 위해 발트 해로의 진출이 필요했던 표트르는 

1700년  스웨덴의 칼 12세에 대항해 덴마크, 폴란드가 맺은 

동맹에 참가하여 스웨덴과 대 북방전쟁에 돌입했다. 

 

폴타바 전투에서 - 표트르 대제는 전쟁에서 직접 진두지휘하는 걸 좋아했다.

1700년 러시아군은 나르바 전투에서 패하였다. 
스웨덴군은 약 1만~1만 2천명, 러시아군은 약 3만 7천명이었는데, 
스웨덴은 질적으로 크게 우세했고 사령관인 표트르 1세가 자리를 비운 틈을 타 공격했다. 
거기다 눈보라가 스웨덴측에 유리한 방향으로 불자 그를 이용해 기동을 은폐하고, 
러시아군을 세 토막낸 다음 각개격파하고, 패주하던 러시아군이 강가에 몰렸는데 
다리가 무너지는 등의 요소들이 작용해 스웨덴군은 6백여 명이 전사했지만 
러시아군은 9천여 명이 전사하고 2만 명이 포로로 잡히는 대참패를 당했다. 
거기다 대포 2백여 문과 수만 정의 머스킷 등 막대한 양의 장비를 빼앗겼다. 

스웨덴군은 나르바 요새에서 러시아군에 포위당했을 때, 
러시아군이 준비가 미흡하고 포병이 약하고 탄약이 부족한 것을 알아채었기에 
질적 우세를 확신했고 전투 도중에 러시아군에게 고용된 외국인 장교들이 
러시아군 총사령관 드 크로아 공작과 함께 항복까지 해버렸다. 
이후 칼 12세가 폴란드-리투아니아로 군을 돌려 러시아는 간신히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 후, 표트르 대제는 러시아 전역에 있는 교회의 종 1/3을 녹여 대포를 만들고 
교회와 상인들로부터 고율의 세금을 거둬들여 서유럽제 신형 머스켓 
수만 정을 사들이는 등 철저히 복수의 칼을 갈았다.
이후에는 폴란드 연합군과의 작전으로 벌어진 1709년 폴타바 전투에서 
러시아군이 대승을 거두었고, 칼 12세는 스웨덴으로의 퇴로마저 끊겨서 

오스만 제국으로 도주하여 오스만 제국과 동맹을 맺었고, 이에 따라 

1710년 오스만 제국은 루스 차르국에 선전포고를 했다. 

이에 자신감을 얻은 표트르 대제는 1710년 무리하게 몰다비아 원정을 계획하고
1711년 오스만 제국의 도전에 맞서기 위하여 남쪽으로 병력을 이동시켰다. 
이때 표트르는 스웨덴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기분에 몹시 들떠 자신을 과대 평가하고 있었다. 
그는 오스만 제국의 속국인 왈라키아(루마니아), 세르비아, 몰다비아 등이 
자신을 지원해줄 것으로 믿었으나, 그가 병력을 이끌고 다뉴브 강에 도착했을 때 
누구도 지원 병력을 보내주지 않았다. 
마침내 프루트 강변에서 오스만군에게 포위되자 그는 희생을 줄이기 위해 
항복하는 대가로 아조프와 흑해 함대를 넘겨주었다. 
망명 중이던 스웨덴의 칼 12세도 무사히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1696년 아조프 요새를 강습하여 함락하는 러시아 최초의 해군과 표트르 대제

그러나 칼 12세는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피해가 늘어남에도 불구하고 전쟁을 10여 년이나 계속했다. 
본국으로 돌아온 표트르는 새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와 근처의 요새들, 
그리고 크론슈타트의 조선소에 강력하고 현대적인 대규모의 해군을 조직할 것을 명령했다. 
표트르가 새로이 구축한 해군은 1719년 당시 ‘해상의 왕자’라고 불리며 두려워할 정도였다. 

표트르는 이 함대로 항코 해전(1714년)에서 스웨덴 함대를 격파한 뒤 곧바로 
육군을 동원해 핀란드를 강타했고, 여세를 몰아 스웨덴 본국으로 진군해 들어갔다. 
숙적 칼 12세도 1718년 후사가 없는 상태에서 전사했고, 
스웨덴 왕위를 물려받은 칼 12세의 처남 프레드리크 1세는 러시아에 강화를 요청해 
1721년에 대북방전쟁은 러시아의 승리로 일단락되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건설을 위해 명상하는 표트르

만년에 표트르는 새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건설에 몰두하였다.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북방전쟁의 결과로 획득한 발트해의 

바닷가 불모지에 1703년부터 건설되기 시작했다. 
바닷가의 황량한 불모지에 건설되는 도시라 건설이 어려웠으나, 
표트르는 옛 수도 모스크바를 벗어나 서구 유럽 어느 나라에도 뒤지지 않는 
화려한 수도를 건설하기를 원하여 많은 인명과 물자의 손실을 감수하면서 수도 건설을 진행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건설의 착수

이 과정에서 네바강 하구 삼각주에 있는 섬에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를 지었고, 
그 도시를 '성 베드로의 도시'라는 뜻을 가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지정했다. 
1712년 이 도시는 결국 완공되어 러시아 제국의 새로운 수도가 되는데, 
이 도시가 바로 상트페테르부르크다. 

상트페테르부르크 건설 후 러시아의 귀족들과 백성들을 강제로 여기에다 이주시켰다. 
그러나 늪지대 위에 도시를 만드는 일이라 많은 노동자들이 폐렴과 결핵 등 전염병으로 죽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지역은 춥고 습한 지역이라 건설이 어렵다보니 

다들 건설작업 하기를 꺼려서 표트르 대제는 강제노동으로 이를 해결했다. 
매년 3만 명의 농민들이 끌려와서 일해야 했고 추위와 강풍, 물과 진흙탕이 
무릎까지 차오르는 작업환경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갔다. 
혹자는 이를 두고 '뼈 위에 세운 도시'라고 평했다.

토목 공사에 지친 민중들의 마음이 사나워져서 반란이 일어나자, 
표트르는 비밀경찰을 통해 많은 반대자들을 처형했다. 
반란에 가담한 자들 중에는 표트르 황제의 외아들 

알렉세이 페트로비치 황태자도 포함되어 있었다. 

 

제정 러시아(Russian Empire)를 선포하는 표트르

스웨덴을 정복한 결과 고대 노브고로드 공화국의 영토를 회복했고 
발트 해 연안에서는 강대국으로서의 자리를 굳혔다. 
그리고 이것을 발판으로 유럽 여러 나라와의 관계를 더욱 공고히 할 수 있게 되었다. 

1721년 11월 2일 표트르 1세는 스웨덴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것을 

자축하는 의미에서 귀족들로부터 "전 러시아의 황제(Emperor All-Russian)"

칭호를 받았고, 그와 동시에 옛 모스크바 대공국을 중심으로 한 

러시아 제국 (제정 러시아 Russian Empire)을 공식적으로 선포했다.

네덜란드 공화국과 프로이센 왕국이 러시아가 제국을 칭하자마자 

가장 먼저 이를 승인했고, 1723년 스웨덴 왕국이, 1739년에는 오스만 제국이, 

1742년에는 그레이트브리튼 연합왕국과 신성 로마 제국으로부터 

1745년에는 프랑스 왕국과 스페인 왕국이, 마지막으로 1764년에는 
폴란드-리투아니아가 승인을 하면서 러시아는 이로서 완전한 황제국으로 대접받게 되었다.

 

Peter the Great Interrogating the Tsarevich Alexei Petrovich at Peterhof, 1871. 
by Nikolai Ghe.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31 
표트르 1세 대제께서 황제의 궁전 페테르호프에서 황태자 알렉세이 페트로비치를 심문하다. 

하지만 표트르 1세는 후계 문제가 매우 심각했다. 
표트르 1세는 좋은 부모가 아니었는데 황태자 알렉세이 페트로비치는 

아버지 표트르 황제가 러시아의 정신을 서유럽에 팔아넘긴다고 생각해 

그의 개혁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고 불만을 가졌다. 
또 표트르가 귀족의 딸인 어머니 에우도키아를 소박놓고 하녀 출신인 정부 
마르타 헬레나 스코브론스카 (예카테리나 1세)와 놀아난 것도 한 원인이었다.

러시아 국내에서는 아들 알렉세이 황태자가 

쿠데타를 일으킬 것이라는 소문이 계속 흘러나왔다. 
결국 알렉세이는 이 소문 때문에 정부(情婦)와 함께 

오스트리아 빈을 거쳐 나폴리로 망명했다.
이에 표트르 1세는 정부(情婦)를 구슬려서 알렉세이에게 편지를 보내 

돌아오기만 하면 모든 죄를 용서하겠다고 했으나 알렉세이가 

돌아오자마자 체포한 다음 법원에 알렉세이의 처분을 맡겼다. 


이때 실질적인 납치 음모를 꾸민 주인공이 

톨스토이 백작으로, 작가 톨스토이의 직계 조상이다. 
납치 사건의 실질적 가담자인 정부(情婦)는 

다른 귀족과 결혼해서 잘 먹고 잘 살았다고 한다. 
1718년 재판소는 알렉세이에게 사형을 선고했으나 

알렉세이는 사형이 집행되기 전에 감옥에서 사망했다.

 

Portrait of Peter I on Deathbed, 1725, by Ivan Nikitin. Oil on Canvas,

36.6 x 54.4 cm. The State Russian Museum, St. Petersburg, Russia 
영면하는 표트르. 표트르 대제의 궁정화가였던 이반 니키틴(Ivan Nikitin 1690~1741)의 작품

1725년 2월 8일표트르 1세는 자신이 건설한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최후를 맞았는데, 사인은 요로결석이었다. 
평소에 술을 워낙 좋아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또 다른 이야기에 따르면 도시 건설 공사장을 순시 중 인부들이 

네바 강에 빠진 것을 보고 그를 구하려고 친히 물에 뛰어들었다가 폐렴에 걸린 것에서 

회복하지 못하고 죽었다고 하지만, 이는 일종의 설화일 뿐 신빙성은 희박하다.

제위는 알렉세이의 아들 표트르 (뒷날의 표트르 2세)가 상속받아야 했으나, 
그가 너무 어리다는 이유로 표트르는 두 번째 황후 예카테리나를 제위 계승자로 책봉했다. 
그러나 이는 여성의 제위 계승권을 부인하는 러시아 전통에도 맞지 않았고, 
발트해 지방의 독일계 평민인 예카테리나 황후의 혈통도 

문제가 되었으나 표트르는 강권으로 이를 밀어붙였다. 

 

예카테리나 1세 알렉세예브나

예카테리나는 본명이 '마르타 엘레나 스코브론스카(Martha Elena Scowronska)'로, 
에스토니아 인인데다 러시아 정교도가 아니라 루터파 신교도였다. 
열일곱 살의 나이에 스웨덴 군인과 결혼한 그녀는 결혼 직후 

러시아 군이 스웨덴 점령지 잉그리아를 정복하면서 포로로 잡혔으며 

여러 명의 장군들을 거쳐 최종적으로 표트르에게 보내졌다. 
그녀는 비록 비천한 신분이었고 교육도 충분히 받지 못했지만 
선량한 품성과 진한 모성애를 가지고 있던 여인이었다.

두 사람은 상트 페테르부르크 건설 현장에 그리 크지 않은 

목조 건물을 짓고 일반인들과 함께 어울려 살았다. 
또한 생활 여건도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과 별반 다르지 않게 살았다. 
마르타는 아이를 여러 명 낳았지만 모두 유아기를 넘기지 못했다. 
표트르와 마르타는 이것이 결혼식을 올리지 않고 부부 생활을 한 데 대한 
신의 징벌이라고 생각하고 멘시코프 부부만 증인으로 참석한 비밀 결혼식을 올렸다.

그들은 튀르크와의 전쟁에서 패배한 후 귀환한 이후에야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렸다. 
이때 마르타는 예카테리나로 개명하고 러시아 정교도로 개종했다. 
그녀는 정신적으로 피폐해진 표트르에게 유일한 안식처가 되었다. 
표트르는 모두 열다섯 명의 합법적인 자녀들을 낳았지만 그들 중에서 
아버지보다 오래 산 아이는 예카테리나가 비밀 결혼식 이후에 
연년생으로 낳은 두 딸 안나(Anna Petrova)와 옐리자베타(Yelizaveta)뿐이었다.

1722년에 표트르는 자신에게 닥쳐오는 어두운 그림자를 감지하고, 

왕위 계승을 둘러싼 혼란이 벌어질 것을 염려해 차르가 스스로 

후계자를 결정하도록 하는 왕위 계승법을 제정했다. 
표트르의 건강은 1723년 겨울부터 악화되기 시작했다. 
그는 다음 해 여름 예카테리나를 공동 통치자로 내세우고 자신은 뒤로 물러났다. 
그는 그 시기에 방광에 이상이 생겨서 몹시 고통스러워했으며 

목숨을 건 대수술을 받고 간신히 위기를 넘겼다.

그렇지만 그로부터 불과 여섯 달 후에 닥친 두 번째의 위기는 극복하지 못했다. 
1725년 2월 새벽에 급작스럽게 사망한 표트르는 

후계자를 명확하게 지정하지도 못했다. 
마지막 순간 그는 후계자 문제를 문서로 남기기 위해서 

애를 쓰다 기력이 떨어져 결국 마무리하지 못하고 큰딸 안나를 

불러달라는 부탁을 했으나 그녀가 도착하기 전에 숨을 거두었다.

예카테리나 1세는 차기 황제로 즉위했고 몇 년 뒤 공식 행사에 

속옷 차림으로 오래 서 있는 바람에 고열로 사망했다. 
황태손인 표트르 2세가 그 뒤를 이어 즉위하지만 

표토르 2세마저도 일찍 사망하면서 러시아는 혼란을 겪는다.
그 후 표트르와 예카테리나 1세의 차녀 옐리자베타 여제가 정국을 안정시킨다.

표트르 대제는 분명히 '위대한 지도자'였다. 
어떠한 입장에서 생각하든 러시아 역사에 그가 없었다면 제정 러시아나 
소비에트 연방공화국은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가설은 대단한 설득력을 가지고 있다. 
다만 그 당시 러시아에서는 표트르 단 한 사람만 

러시아의 찬란한 미래를 보고 있었다는 사실이 문제였다.

러시아 인들은 그가 죽고 나서 한참 후에야 그의 업적을 깨달았다. 
표트르 사후, 그리고 예카테리나의 짧은 통치 이후 

러시아는 10년이 넘게 '반동의 시대'를 보냈다. 
그의 작은 딸 옐리자베타가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이후에야 

완만한 개혁이 다시 추진되기 시작했으나 그 개혁마저 

완전하지 못해 심각한 사회적 모순을 내포한 상태로 
한 세기 이상의 시간을 낭비하다 결국 사회주의 혁명을 맞이했다.

 

1717년 프랑스의 화가 장 마르크 나티에르가 그린 표트르 대제의 초상화.

표트르 대제는 러시아에서 서구의 문물을 들여와

국가를 발전시킨 위대한 개혁 군주로 평가받고 있다. 
오늘날 러시아인들의 생활 속에 남아 있는 대부분의 문물들은 

모두 표트르 대제가 도입했던 것이다. 
예를 들어 러시아인들이 제2의 빵이라고 여기는 감자와 커피, 담배는 모두 
표트르 대제가 서구를 여행하면서 발견하고 러시아에 들여왔던 문물이다.

또한 대륙 국가이던 러시아에 해양의 중요성에 대해 눈을 뜨게 한 것도 큰 업적이다. 
1704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아드미랄티 조선소를 건설했는데 

이후 수많은 함선들을 건조하게 되었고 현재까지도 러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조선소로 남아 꾸준히 선박을 건조하고 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바닷가에는 바다를 향해 달리는 모습의 

표트르 1세 기마상이 있고 현재 러시아 해군의 주력함이자 

세계 최대의 수상 전투함인 키로프급 4번함의 함명이 표트르 벨리키다.

표트르 대제 이후 러시아의 가장 큰 변화는 표트르 이전과 이후의 러시아 역사가 
아예 다른 맥락이라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실제로 러시아 역사와 문화에서 '중세'란 표현은 쓰이지 않고, 
표트르 대제 이전의 러시아는 '고대'라고 쓴다. 
이 고대 시기 러시아는 제국을 표방하기는 하지만 '차르'라고 하는   
슬라브족의 왕정일 뿐 다른 국가에 거의 인정을 받지 못한 상태였다. 
또한 류리코비치 왕조 이후 귀족의 권한도 강해진 상태였다. 

그러나 표트르 이후 러시아는 세계사의 정면에 등장하게 된다.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수도로 한 후 이전에 비해 러시아의 교역량은 수십 배로 늘었으며, 
바르샤바에만 있던 대사관도 세계 여러 곳에 존재하게 되었다. 
표트르 대제 당시 쓰인 <차르 표트르 1세 폐하가 1700년 스웨덴 왕 카를 12세에 

대항하여 전쟁을 시작하게 된 정당한 법적 근거에 대한 강론>을 보면

당시까지 국제무대의 구석에 있던 러시아가 유럽의 공식적 외교 용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할 정도로 외교적으로 크게 부상을 했음을 알 수 있다. 
강대한 군대, 세련된 외교, 상트페테르부르크로부터 전해지는 수많은 외국 문물은

표트르 대제 즉위 30년간 러시아를 획기적으로 변화시켰다.

그리고 이때부터 귀족이라도 군공을 세우지 않으면 고위장교로 

올라가기 힘들었기에 귀족들이 러시아를 위해 열심히 일하는 이유가 되었으며, 

이는 조국 방어 전쟁 이후 러시아 최초의 개혁 운동이라 불리는 

데카브리스트의 움직임을 낳는 계기로도 이루어진다.

아울러 표트르 시대 때 러시아의 지도가 처음 만들어지는데, 
이때 우랄 산맥을 경계로 유럽과 아시아를 나누게 되었다. 
이는 러시아에게 그동안 있던 막연한 러시아라는 이미지가 아닌 

유럽인으로의 정체성, 혹은 정체성의 의문을 가지게 만들었으며, 

이는 러시아 사상의 조류 중 큰 줄기인 서구주의를 낳는 계기가 되었다. 
실로 표트르 대제가 남긴 영향력은 러시아의 어떤 군주들보다 컸다.

하지만 표트르 1세의 실책 역시 존재한다. 
표트르의 개혁은 어디까지나 왕권을 제약하는 보야르들을 타도하고 

표트르 1세의 왕권을 강화하는데에 그 목적이 있었지 백성들을 위하지는 않았다. 
개혁을 시행하는 와중에 벌인 상트페테르부르크 건설 사업, 근대화 정책은 
많은 비용이 드는데 이 당시 러시아는 그것을 감당할만한 경제력이 없었다. 


그러다보니 표트르 1세는 귀족과 백성들에게 무거운 세금을 부여해서 

부족한 재정을 충당하려 했는데 이러한 이유로 

귀족과 백성들의 개혁에 대한 불만이 상당했다. 
특히 상트페테르부르크 건설에 백성들을 강제동원하여 

노임도 제대로 안주고 가혹하게 부려먹어 도시 건설을 한 것이 비판받는다. 
강제노역에 백성들을 동원했다가 가혹한 노동과 열악한 대우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자 보다못한 신하들이 도시 건설을

중단해 달라고 간언했는데도 오히려 이를 힘으로 억누르며 강행했고 

도시 건설이 완료될 때까지 죽은 사람들이 셀 수 없었다.

또한 서구화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차후 러시아의 발전에 큰 걸림돌이 되었던 농노제를 

개혁하기보다는 오히려 이를 더 강화하였다. 
급격한 서구화 정책에 거부감을 가지는 귀족들의 반발을 

무마하려면 어쩔 수 없었겠지만 말이다. 


표트르 1세의 통치기 때부터 러시아의 농민 계층은 

사유지 농노, 교회 농노, 국가(국유지) 농노로 분리되었는데, 

이 세 부류의 농민들은 납세자 명부에 등록되어 인두세가 부과되었다. 
결국 농민은 귀족과 교회의 세금과 국가의 인두세에 이중으로 시달리게 되었다. 
게다가 1714년 공포된 칙령을 통해 귀족의 법적 지위를 공고히 하는 한편, 
토지 소유 형태에 대한 법적 통합을 규정하니 이는 귀족의 농노 지배를 

더 강화하여 러시아의 농노제가 공고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예카테리나 2세 때 일어난 푸가초프의 난을 계기로 이런 경향이 심해졌다.

 

Portrait of Empress Anna Ioannovna, 1730. by Louis Caravaque. 

안나 이바노브나 여제의 초상. 


예카테리나 1세 이후 황태손인 표트르 2세가 그 뒤를 이어 3대 황제로

즉위하지만 표토르 2세마저도 일찍 사망하면서 러시아는 혼란을 겪는다.
4대 황제 안나 이바노브나(Anna Ioannovna 1693~1740)의 

통치 기간 동안 그녀의 정치적 역할은 미미했다. 

 

Portrait of the Emperor of Russia Ivan VI Antonovich. 러시아 황제 이반 6세의 초상

1740년 안나가 서거하자 안나의 언니의 딸 레오폴도브나가 

자신의 아들 5대 황제 이반 6세 (Ivan VI 1740~1764)의 섭정을 맡고 

옐리자베타를 수녀원으로 추방하겠다고 위협하자, 
옐리자베타는 러시아에 대한 프로이센 왕국 내정 간섭 배제와

러시아의 친 오스트리아 제국 ·  반 프랑스 왕국 외교 정책 

폐지를 희망하는 귀족들과 뜻을 같이하기로 마음먹었다.

 

옐리자베타 페트로브나(Elizaveta Petrovna)

옐리자베타 페트로브나(Elizaveta Petrovna 1709~1762)는 1741년 11월 25일 밤 
자신의 동지들과 함께 쿠데타를 일으켜 어린 황제와 그 어머니 레오폴도브나 및 
측근들을 체포하고, 26일 아침 8시에 상트페트르부르크 내 관료들과 
주요 고위 성직자들을 소집한 후 자신을 러시아의 6대 황제로 선포하게 했다. 
이때 그녀의 나이 32세였다. 
이 등극과 함께 로마노프 왕조의 남자 계보는 끊어졌다.

그 후 표트르와 예카테리나 1세의 차녀 옐리자베타 여제는 1741년부터 1761년까지 
20년 동안 러시아 제국을 다스리며 정국을 안정시킨다.
옐리자베타 페트로브나는 문화 사업에 그 열정과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베르사이유 궁전을 모방한 러시아 궁정의 서구화를 열심히 진행했고, 

패션에도 관심을 가졌다. 
또한 학예 보호에도 적극적이어서 서구의 학식을 수용하기 위해 

러시아 과학 아카데미를 지원하였다. 


과학자 미하일 로모노소프의 제의를 수용하여 1755년에는 모스크바 대학을 설립했다. 
예술가의 육성에도 노력을 기울였지만, 가장 중요한 사업 분야는 건축이었다. 
궁정의 수석 건축가 라스트렐리에게 명하여 수많은 궁전을 건축하거나 
또는 크게 개축하여 웅장한 러시아 바로크 양식으로 변모시켰다. 
현재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대표하고 있는 여러 궁전의 대부분은 

옐리자베타 페트로브나의 통치기에 세워진 것이다.

옐리자베타 여제는 개인적으로 안나 여제 시절 영향을 받아 

독일계 발트인에 대한 적대감이 강했으며 프로이센 왕국과 

프리드리히 2세를 매우 싫어하여, 스웨덴과 오스만 투르크라는 공동의 적과 
혐오 대상을 공유한 신성 로마제국의 마리아 테레지아와 

성향이 맞았기 때문에 곧 동맹을 맺고 7년 전쟁에 참가했다.
러시아군은 프랑스, 신성 로마 제국과 함께 프로이센을 거의 몰아붙였으나 
승리 직전에 옐리자베타 여제가 사망하고 만다.

 

표트르 3세의 초상화.

이후 로마노프 왕조는 단절되었고, 표트르 1세의 외손자인 
표트르 3세 (Pyotr Fyodorovich Romanov 1728~1762)가 러시아 7대 황제로 즉위하여 
홀슈타인-고토르프-로마노프 왕조를 열었으나 전쟁에서 대승한

프로이센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도, 받지도 않고 무조건 평화 협정을 맺어버린다.
결국 표트르 3세는 6개월 이후에 쿠데타로 실각해 표트르의 아내 예카테리나 2세가 즉위하였다.

 

예카테리나 대제 (Catherine the Great)

러시아 제국 로마노프 왕조의 8번째 황제인 예카테리나는 

러시아의 마지막 여제(女帝)이기도 하다. 
영어로는 캐서린 대제 (Catherine the Great).
동양의 측천무후와 자주 비교되기도 하는데 둘 다 거대한 제국의 여제였고, 
황후의 자리에서 황제를 폐위시키고 스스로 황제로 즉위한 여인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예카테리나는 원래 독일인이었다. 
프로이센군 소장인 크리스티안 아우구스트 폰 안할트-체르프스트 공작과 
홀슈타인-고토르프 가문의 요한나 엘리자베트의 딸로, 
본명은 조피 프레데리케 아우구스테 (Sophie Friederike Auguste von Anhalt-Zerbst). 
세력이 미약한 귀족의 딸이었다. 
다만 시골 생활에 진저리를 내던 어머니의 열성적인 교육열과 
본인의 총명함과 부지런함으로 어린 시절부터 다양한 교육을 받고 자랐다.

그러던 어느 날 외삼촌이 옐리자베타 여제와 약혼했던 인연 덕분에 1744년, 
러시아의 제위 계승권자인 홀슈타인 공작 카를 울리히와 결혼했다. 
이때 이름도 러시아식으로 개명하여 

'예카테리나 알렉세예브나'(Екатерина Алексеевна)라고 불리게 된다.

예카테리나와 표트르 3세는 신혼 무렵엔 같은 독일인이라는 점 때문에 

사이가 그럭저럭 괜찮았지만, 예카테리나가 주변 사람들의 냉대와 옐리자베타 여제의 

경계를 완화시키기 위해 점차 친러시아 노선을 걷자 사이가 나빠진다. 
게다가 남편인 표트르는 장난감 병정이나 기차만 가지고 노는 

머리 나쁜 위인인데다가 심각한 성불구라는 풍문이 있었다. 
그래서 장기간 부부 관계가 없었고 부부 모두 18년간 각자 정부를 두고 살았다. 
이 때문에 예카테리나의 세 아이 모두 각기 다른 정부의 아이였다는 풍문도 돌았다.

러시아군이 프로이센을 거의 막바지로 몰아붙였으나 승리 직전에 

옐리자베타 여제가 사망하고 제위를 물려받은 표트르 3세가 

프로이센의 황제 프리드리히 2세를 추종하여 무조건 평화 협정을 맺어 버리자 

러시아 귀족들은 크게 분노하였고, 예카테리나 역시 남편의 처사에 크게 반발한다.

러시아인들 사이에 평판이 좋을 뿐만 아니라 러시아의 수많은 귀족들의 
지지를 받고 있었던 예카테리나는 결국 1762년 6월 표트르 3세가 
덴마크와의 전쟁 때문에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비운 사이 반란을 일으켜 
자신이 러시아 제국의 황제임을 만천하에 알린다. 
표트르 3세는 체포되어 8일 후에 감옥에서 죽었다. 
이에 대해선 아마도 예카테리나 2세의 지시

혹은 방조가 있었을 것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예카테리나 통치 기간에 농업과 상공업을 진흥시켜 

국력은 크게 향상되었고, 볼테르 등의 문인들을 후원하며 

수학자 레온하르트 오일러를 초청하는 등 문화적인 면에서 업적을 거뒀다. 
예술에도 지대한 관심과 후원을 아끼지 않아서 유럽 각지에 퍼져 있는 
그림, 조각들을 수집, 현재의 에르미타주 박물관을 만들었다. 


에르미타주 박물관은 원래 예카테리나 2세가 휴식을 취하던 일종의 별궁으로 
초대를 받은 사람이 아니면 출입할 수 없는 곳이었으나 현재는 
러시아인들은 물론 전세계인의 사랑을 받는 최고 수준의 미술관이 되었다. 
그녀가 사들인 미술품들도 굉장히 많다. 
현재에는 한 작품당 1분씩만 감상을 해도 8년이 걸린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렇게 향상된 국력을 바탕으로 외치에서 대성과를 거두었다. 
오스만 제국에 강한 압박을 가하여 러시아-튀르크 전쟁(1770~1774)에서 승리하고, 
크리미아와 카프카스를 할양 받아 영토를 넓혔으며, 
1783년에는 크림 반도를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빼앗았다. 
이것으로 오스만 제국의 봉신국이었던 크림 칸국은 멸망했다.

또한 크림 칸국으로부터 해방시킨 우크라이나 동부에 코사크 농부들을 정착시키고, 
볼가 강 남부 유역과 키스피해 연안에 칼미크인들의 영토를 축소시키고 
그 자리에 대규모의 독일계 이민을 이주시켜 밀농사를 짓게 함으로써, 
러시아의 농업 생산량을 크게 끌어올렸다. 
우크라이나 일대에서 인신 매매와 약탈을 일삼던 크림 타타르족이 

토벌되면서 농업이 안정화되고 20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우크라이나산 밀은 러시아의 주력 수출 품목이 되었다.

예카테리나 대제는 남자 애인을 많이 둔 것으로도 유명하다. 
심지어 이미 60세가 넘어서 죽음을 앞에 두던 순간까지도 

수많은 정부들을 두고 있었다고 한다. 
예카테리나 2세는 몇년에 한번씩 정부를 갈아치우는 것으로 악명이 높았지만 
헤어진 정부들에게 막대한 재산과 영지, 관직 등을 하사하여 후히 대접하였다.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러시아 역사가 살아 숨 쉬는 곳.

상트(Sankt)는 라틴어로 성자, 피터(Peter)는 네덜란드어로 베드로, 

부르크(Burg)는 독일어로 도시를 뜻한다.
이 도시 하나로 러시아는 역사 · 문화적 자존심을 드높이고 엄청난 관광객을 끌어 모은다. 
아름답고 웅장한 석조 건물들, 대문호 도스토예프스키의 도시, 

세계 3대 박물관으로 일컷는 에르미타쥐 등 예술적 향기가 넘치지만 

2차 세계대전 때는 독일군의 900일 봉쇄작전을 겪은 ‘죽음의 도시’이기도 했다

세월이 흘러 이곳은 레닌을 중심으로 한 사회주의 혁명의 진원지였다. 
거사 성공 후 ‘레닌의 땅’이란 의미의 레닌그라드로 개명했으나 
1991년 6월 시민투표에 의해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원래 이름을 되찾았다.

해천추범(海天秋帆)은 민영환이 204일간 11개국을 여행하고 쓴 

우리나라 최초의 세계일주 기행문이다. 
그는 1896년 4월, 고종의 특명전권 공사로 임명되어 

윤치호, 이범진, 김도일 등 사절단을 이끌고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참석하기 위해 모스크바를 거쳐 야간열차로 이곳에 왔다. 
120년 전 그들의 눈에 비친 도시의 인상이 어떠했을까.

“피득보(彼得堡, 페테르부르크)는 사방이 100여 리에 

인구가 100만 명이 넘으며 시가지와 집들이 웅장하고 큰데다가 

예와 강(曳瓦 江, Neva river)이 온도시를 껴안았고 황제의 대궐이 강에 임했다.”
며 도시의 규모에 감탄을 표하고 있다. 
이들은 이미 미국, 영국, 독일 등 서구의 대도시를 거쳐 왔는데도 말이다.

러시아와 유럽 양식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풍광은 

러시아 그 어느 도시에서도 볼 수 없는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제정 러시아 당시의 수도이기도 한 이곳은 러시아 역사가 살아 숨 쉬는 곳이다. 
성당, 극장, 박물관 등 아름다운 건축물과 

도스토예프스키, 푸시킨, 레핀, 차이코프스키, 쇼스타코비치 등 
기라성 같은 예술가들이 숨 쉬던 곳, 지금도 그 흔적을 찾아 볼 수 있는 유서 깊은 도시다.

 

상원광장과 표트르 대제의 청동 기마상 

성 이삭 성당에서 네바(Neva) 강 쪽으로 작은 공원을 가로질러 
데카브리스트의 반란이 시작된 상원광장에 이르면 표트르 대제의 기마상이 나타난다. 
예카테리나 2세는 표트르 대제의 위업을 기리기 위해 이런 멋진 청동기마상을 세웠다. 

 

상원광장과 표트르 대제의 청동 기마상

 

벼락 맞은 큰 바위 덩어리 위에서 앞발을 들고 포효하는 준마는  
당장이라도 뛰어내려 광장을 질주할 것 만 같다.  
말위의 표트르는 오른손을 들어 도도히 흐르는 네바 강을 가리키고 있다. 

 

표트르 대제의 청동 기마상.

 

1770년에 시작하여 12년에 걸쳐 1782년에 완성한 프랑스의 조각가  
에티엔 팔코네(Etienne Falconet)의 작품이다.  
상트페테르부르크를 건설한 표트르 대제가  
앞발을 들어 올린 말을 타고 오른손으로 네바 강을 가리키는 모습을 하고 있다.  


이 기마상이 위대한 조각물이라는 것은 무거운 청동 기마상을 
말의 뒷발로만 지탱하고 있다는 것에서 알 수 있다. 
앞발이 들린 높이는 황제의 권위를, 앞발은 전진을 뜻하며, 
뱀을 밟고 있는 뒷발은 악을 물리치는 정의를 상징한다.
그는 이 기마상의 콘셉트를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는 죽어 있는 물질에 살아 있는 정열적인 본성을 주입하고 싶었다. 
그래서 이 상을 위대한 정복자보다는 창조자의 개성으로 표현했다.”

 

[영상] 네바 강변과 데카브리스트 광장

 

표트르 대제의 청동 기마상.

바위에는 ‘PETRO primo CATHERINA secunda’ 라는 글귀가 음각되어 있다. 
“예카테리나 2세가 표트르 1세에게”
원래 이 자리에 대신들의 간청으로, 그녀의 상을 세우려 했다. 
그러나 여제는 표트르 대제의 상을 세움으로 해서 자신이 독일 출신이라는 
태생적 한계를 불식시키고 표트르의 정통 후계임을 강조하고자 했다. 
현명한 군주답게 잘한 처사가 아닐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문란했던 사생활에도 불구하고 표트르와 함께 
‘The Great’의 칭호를 받는 영광을 누리고 있다.

 

표트르 대제의 청동 기마상

1825년 12월 14일 이 광장에서 러시아 장교들의 반란이 일어났다. ‘데카브리스트의 난’이다. 
‘데카브리스트’는 러시아어에서 12월인 ‘제카브르(декабрь)’의 미국식 발음에서 온 말이다. 
이는 20~30대의 젊은 귀족으로 이뤄진 12월의 봉기 가담자들을 말한다.

데카브리스트는 대부분 1812년의 나폴레옹 전쟁에 참전했던 정예 부대 장교들이었다. 
‘위대한 애국 전쟁’이라고도 불리는 나폴레옹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이끌어낸 사람들이다. 
좋은 가문에서 훌륭한 교육을 받은 이들은 퇴각하는 나폴레옹 군대를 뒤쫓아가 
프랑스 파리에 입성하는 벅찬 감동을 맛보았다. 
그들은 그 과정에서 선진화된 유럽의 문물과 
프랑스 혁명으로 야기된 자유의 물결을 몸으로 체득할 수 있었다.

그들은 당시 유럽을 휩쓸고 있던 나폴레옹의 독재와 독선에 대항하여 목숨 바쳐 싸웠다. 
그리고 유럽의 그 어떤 나라도 이루지 못했던 나폴레옹에게 
승리를 이뤘다는 자부심을 안고 조국으로 귀환했다. 
그러나 정작 자신들의 조국 러시아는 여전히 차르라 불리는 
황제의 압제와 전근대적 제도 아래서 시달리고 있었다. 
그때 데카브리스트는 절대 왕정을 폐지하고 입헌군주제나 공화제를 수립하고 
농노를 해방하는 근대화된 러시아를 꿈꾸게 되었다.

 

표트르 대제의 청동 기마상

데카브리스트는 차르에게 러시아의 개혁을 건의했다. 
당시 차르였던 알렉산드르 1세는 귀족 자제들인 데카브리스트와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 친구이기도 했다. 
그런 이유에서 보나 그동안 알렉산드르 1세가 보여줬던 개혁의 의지로 보나 
어느 정도의 낙관적인 답변을 기대할 만했다. 
그러나 차르의 개혁 시도는 귀족들의 극심한 반대에 부딪혔다. 
그 과정에서 차르조차도 개혁 의지를 저버리고 말았다. 
기득권을 가진 귀족들이 농노 해방에 찬성표를 던질 리 없었다. 
결국 데카브리스트의 적(敵)은 황제보다 더 보수적으로 깊이 뿌리박힌, 
기득권을 놓지 않는 귀족들이었던 것이다.

1825년 11월 19일 알렉산드르 1세가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그에게는 뒤를 이을 아들이 없었고 후계 구도가 확실치 않아 
러시아는 더욱 심한 혼란에 빠져들었다. 
결국, 동생 니콜라스 1세가 차르로 결정되었지만 데카브리스트에게는 
그 혼란이 반란을 일으킬 절호의 기회로 받아들여졌다.

 

The Transportation of the Thunder-stone in the Presence of Catherine II; 
Engraving by I. F. Schley of the drawing by Yury Felten, 1770.  
캐서린 2세 시대 선더 스톤의 이동 장면 ; 1770년 유리 펠튼의 I. F. 쉴리에 의한 그림 작성

 

동상을 받치고 있는 벼락 맞은 바위는 400명이 넘는 장정들이  
네바 강변까지 옮겨오는 데만도 약 4개월이 걸렸다고 전해진다. 

한 달 후 12월 14일 운명의 날이 밝았다. 
그 날은 군대가 새로운 차르 니콜라스 1세에게 충성을 서약하기로 한 날이었다. 
데카브리스트는 세르게이 트루베츠코이를 선봉에 세웠다. 
만일 그날의 거사가 성공하면 왕정을 폐지하고 다섯 명의 지도자를 앞세운 
민주공화국의 임시정부를 수립할 계획도 세웠다. 


민주공화국의 헌법은 농노 해방은 물론 모든 사람이 
평등하고 자유롭게 살 수 있는 새로운 러시아를 지향하고 있었다. 
거사 당일의 구호는 “콘스치투치야(конституция)!”였다. 

러시아어로 ‘헌법’이라는 뜻이다. 
이들이 헌법 제정을 얼마나 갈망했는지 이 구호만으로도 확실히 알 수 있다.

그날 아침 3천여 명의 군인이 페테르부르크의 상원광장에 집결했다. 
그곳은 러시아 근대화의 아버지 표트르 대제의 기마상이 서 있는 도시의 심장부였다. 
12월 중순의 혹독한 날씨에 군인들은 모였는데 
지휘관인 세르게이 트루베츠코이는 나타나지 않았다. 
반군들은 지휘관이 없는 상태에서 구호만 외치고 서 있었다.

곧이어 1만여 명의 정부군이 나타났다. 이들은 몇 시간 동안 서로 대치하며 서 있었다. 
지휘관이 나타나지 않아 이미 동요가 일어난 데카브리스트 중에는 
앞장서서 반란군을 이끄는 사람이 없었다. 
대치와 투항 설득에도 불구하고 상황은 종료되지 않았다. 그러다 해가 지기 시작했다. 
12월 초의 러시아는 오후 네 시면 해가 져서 컴컴해진다. 

 

Inauguration of the Monument to Peter the Great. 피터 대제의 기념탑 개막식.
Engraving by A. K. Melnikov of the drawing by A. P. Davydov, 1782

결국 차르는 최후의 수단으로 대포 발사를 명령했다. 
난장판이 된 상원광장을 밤 동안 원상 복귀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왕실의 명령을 받은 경찰과 군인은 ‘정리’를 위해 
시체는 물론 부상자들까지 차디찬 네바 강에 던져 넣었다. 
이렇게 해서 이날 사망자가 1천3백여 명에 이르렀다.

차르 니콜라이 1세는 겨울궁전에서 주동자급의 데카브리스트와 만났다. 
차르는 그들에게 몇 차례나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수사에 최대한 협조하면 너의 목숨을 살려줄 수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장교는 다음과 같이 당당하게 말했다.
“당신이 그렇게 말하는 것을 보고 우리가 옳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달았습니다. 
당신이 한 말은 당신이 법 위에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가 원한 것은 우리의 운명이 법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지 당신의 기분에 따라 달라지는 미래가 아니었습니다.”

결국 121명의 데카브리스트가 재판을 받았고 그 가운데 다섯 명은 교수형을 당했다. 
나머지는 카토르가형이라는 시베리아에서의 중노동형에 처해졌다. 
차르가 그들에게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두고두고 당하게 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데카브리스트는 쇠사슬에 묶여 시베리아로 끌려갔다. 
이들은 형기를 마친 후에도 페테르부르크나 모스크바로 돌아올 수 없었다. 
어떤 사람들은 이르쿠츠크나 치타보다 훨씬 동쪽에 있는 네르친스크까지, 
혹은 북극 가까운 곳까지 추방되어 광산 등에서 중노동을 했다. 
1856년 알렉산드르 2세는 시베리아 유형에서 살아남은 사람 모두에게 완전 사면령을 내렸다.

 

Camouflaged from German aircraft during WWII 
세계 제2차 대전 중 독일 항공기로부터 공격을 피하기 위해 표트르 대제 기마상을 위장하고 있다.

"그곳, 황량한 파도 옆에,
그가 서 있었네, 강인한 사고를 북돋우면서.

그리고 응시했네, 오로지 먼 곳으로만
넓은 강 하구에 초라한 돛단배 한 척
네바 강을 표류하며 바다로 갔네, 저 혼자서.

진흙투성이의 강둑에는 이끼만 자라고 서너 개
낡은 헛간만이 여기저기에 서 있었다네.

가여운 핀 족의 거처는 사람들로 그득한데
속삭이는 숲에는 햇빛이 닿지 않아
언제나 안개 속에 묻혀 있었다네.

그래서 그는 깊은 상념에 빠졌다네.
"여기서부터, 정말로 우리가 스웨덴을 공포에 떨게 할 수 있을까?"

 위의 시는 러시아의 대문호 알렉산드르 푸슈킨 (Aleksandre Sergeievich Pushkin)이 
1833년에 쓴 낭송시 <청동의 기수(Bronze Horseman)> 도입부이다. 
<청동의 기수>는 러시아 상트 페테르부르크에 세워진 표트르 대제의 동상을 가리키는 고유명사로, 
1782년 그의 손자 며느리인 예카테리나 2세(Yekaterina Ⅱ)에 의해 봉헌되었으며, 
푸슈킨은 그를 위하며 3장 476행으로 구성된 서사시를 썼다.

표트르 대제는 세계에서 가장 넓은 영토를 가진 근대 러시아를 설계한 사람이었다. 
또한 표트르 대제는 우리에게 과연 '목표가 수단을 정당화할 수 있는가' 

하는 까다로운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다. 
종종 어떠한 숭고한 목표를 이루려고 노력하는 경우, 

그 목표에 도달하는 유일한 수단으로 목표와 정반대되는 

가혹하거나 비열한 방식을 사용해야 하는 경우가 있다. 
이러한 경우 그 숭고한 목표가 비열한 수단을 정당화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결론을 내기가 무척 어렵다.

 

[영상] 표트르 대제 청동 기마상

 

 

임경석의 역사극장

105일 단식투쟁으로 옥사한 청년

일제의 ‘예방구금’에 저항하며 처절하게 죽어간 혁명가 이한빈

 

1937년 9월29일, 32살 때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찍은 ‘범죄자 식별용’ 사진.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105일간의 단식 끝에 자기 목숨을 공동체에 바친 사람이 있다. 처절한 단식투쟁으로 철벽같이 강고한 지배체제에 맞선 사람이다. 이렇게 운을 떼면 저 유명한 아일랜드 단식투쟁을 떠올리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1981년 보비 샌즈를 비롯한 아일랜드 민족주의자 10명이 영국의 북아일랜드 지배에 맞서서 46∼73일간의 옥중 단식 끝에 사망한 사건 말이다. 온 세계 사람들의 심금을 울린 이 비극적인 사건은 지금도 단식투쟁의 상징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필자가 염두에 둔 이는 아일랜드가 아니라 한국 사람이다. 일제강점기에 피억압 민족의 해방운동에 헌신하다가 일본 관헌의 손에 희생된 조선 청년 이한빈(李翰彬)이다.

 

‘재범 우려 있다’며 출감 불허

 

이한빈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된 것은 역사학자 박준성의 글을 통해서였다.1 박준성은 일본 경찰의 취조 기록과 제3자의 회고담을 토대로 이한빈의 기막힌 삶을 재구성했다. 박준성은 해방 뒤 처음 맞이하는 5월1일 노동절 기념식장에서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위원장 허성택의 연설을 듣고서 깜짝 놀랐다고 한다. 무려 105일 동안 처절한 단식투쟁을 감행한 선진노동자가 있음을 비로소 알게 된 까닭이었다. 어떻게 인간이 그런 살인적인 단식투쟁을 할 수 있었을까? 그가 겪었을 참혹한 고통을 상상하니, 이한빈이란 이름을 잊을 수 없었다.

 

이한빈은 사회주의자였다. 그중에서도 러시아 모스크바 유학까지 다녀온, 장래가 촉망되는 간부급 인물이었다. 30살 되던 해 동방노력자공산대학을 졸업했고, 그 뒤 국내에 잠입해 비밀결사운동에 종사했다. 하지만 그는 불운하게도 일본 경찰에 체포돼, 조선총독부 경성복심법원에서 5년 징역형을 언도받았다. 출감 예정일은 1942년 9월20일이었다.2

 

일본의 대외 침략전쟁이 갈수록 확대되던 극단의 시기였다. 만기를 채웠는데도 이한빈은 감옥 문을 나서지 못했다. 이른바 ‘예방구금’에 걸려든 탓이었다. 예방구금이란 재범 우려가 있다는 관헌의 심증만으로 치안유지법 위반 전력을 가진 사람을 수감하는 행정처분이었다. 아무런 범죄행위도 저지르지 않았는데, 사람을 감옥에 가두는 터무니없는 악법이었다.

 

이한빈은 항의에 나섰다. 1943년 3월1일 시작된 단식은 6월13일까지 계속됐다. 단식이 길어지면 체내 근육과 지방이 신진대사의 에너지원으로 대체되기 때문에, 장기간 단식은 인간의 신체 조직을 파괴하기 마련이다. 이한빈은 피골이 상접한 채 숨을 거뒀다.

 

이한빈을 다시 만난 건 신문지면에서였다. 언론매체 전산화가 확충돼 예전에는 보기 어려웠던 신문기사를 쉽사리 활용할 수 있게 된 덕분이었다. 이한빈에 관한 신문기사는 주로 1926~29년 4년 동안 분포돼 있었다. 그의 나이 22~25살에 해당하는 시기다. 이한빈의 동정을 다룬 신문기사는 9편이었다. 많은 양은 아니지만 20대 전반기 청년 이한빈이 어떤 일에 몰입했는지를 살피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이한빈은 고향인 함경남도 신흥군의 청년단체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928년 2월 현재 신흥군의 면단위 청년단체인 가평청년회 간부였다. 집행위원장 후보 겸 교양부 위원의 일을 맡아보고 있었다. 위원장 주장순에 뒤이어 제2의 지위에 있었다. 군단위 연맹체인 신흥청년동맹에서도 비중 있는 역할을 맡았다. 보기를 들면 1928년 4월 조직 변경 총회에 참석했고, 회관 건립을 위한 의연금 기부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이듬해 9월에는 군내 9개 면 지부를 훑는 순회강연단에 참여했다. 저명한 사회주의자 임충석을 포함한 9명의 연사 명단에 그의 이름도 올라 있다.3

 

1932년 10월 초 공산대학 입학을 위해 직접 쓴 이력서. 임경석 제공

 

항일운동가이자 교사이자 언론인

 

그는 농촌야학 활동가였다. 1926년 12월 당시 가평면에는 노동야학 14곳이 설립됐는데, 대체로 1개 리에 하나꼴이었다. 이한빈이 관계한 야학은 그중 풍상리에 있는 풍상야학당이었다. 주무와 강사를 합해 교사 3명이 있었고, 학생은 35명이었다. 이한빈은 교사였다.

 

이한빈은 중앙일간지 군단위 지국에 소속된 언론인이기도 했다. 1928년 11월 <조선일보> 함흥지국 풍상분국 기자가 됐다. 가평청년회 집행위원장이던 주장순과 함께 이한빈이 나란히 분국 기자에 이름을 올렸다. 현지 청년운동 지도부가 지방 언론계의 주역을 겸했음을 알 수 있다. 이한빈은 지국 기자들을 망라해 군단위 기자단을 결성하는 데도 참여했다. 1929년 12월 신흥기자단을 결성했는데 거기에는 세 중앙일간지(<동아일보> <조선일보> <중외일보>)의 지국 기자 17명이 있었다.4

 

공통성이 엿보인다. 이한빈은 가평청년회 교양부 위원이었고, 순회강연 연사였다. 또 농촌야학 교사였고, 지국 신문기자였다. 글을 쓰고 강의하는 일을 주로 담당했음을 알 수 있다. 문필력이 있고 달변의 인물이었던 것 같다. 중등교육까지 이수한 그의 경력과 관련지을 만하다. 그는 고향에서 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경성으로 유학했다. 경성 중동학교에 진학한 때는 1923년께였다. 한창 마르크스주의의 영향력이 고조되던 시절이었다. 바로 이때 사회주의에 사상적 감화를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1926년 학업을 마치지 못한 채 귀향했다. 필시 학자금 부족이 한 원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귀향과 동시에 사회운동에 뛰어든 것을 보면 말이다.

 

이한빈을 다시 만난 것은 러시아 발굴 자료를 통해서였다. 최근 수년 동안 코민테른 조선 관련 자료가 잇따라 학계에 소개되고 있다. 동국대, 외국어대, 독립기념관 등과 같은 연구기관들이 다투어 성과를 냈다. 그중에 이한빈의 신상 기록이 포함됐다. 특히 동방노력자공산대학 재학 시기에 작성된 기록이 그의 개인적 풍모를 살피는 데 유용하다. 자필 이력서를 비롯해 학적부 개인카드, 추천서, 평가서, 각급 회의록 등이 있다.

 

러시아 모스크바의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보관된 이한빈 학생 개인카드. 위 가운데에 ‘1926년 고려공청에 입회했다’는 펜글씨가 쓰여 있다. 임경석 제공

 

자필 이력서엔 ‘이호연’

 

모스크바 유학생들이 통상 그러하듯이, 이한빈도 러시아식 이름이 있었다. 일찍이 일본 경찰도 취조해서 그 이름을 밝혔다. 일본어로 표기된 바에 따르면 ‘호엔’이었다.5 하지만 의미가 통하지 않는다. 정확히 어떤 뜻으로 사용된 것인지 알 수 없다. 다행히 러시아어 문서를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최근 출간된 자료집에 따르면, 이한빈이 공산대학 재학 중에 사용한 성명은 ‘Хо-Ен’이었다. <러시아문서보관소 문서번역집>에선 러시아어 소릿값을 고려해 ‘호영’이라고 옮겼다.6 음가를 잘 반영했지만, 뜻이 통하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자필 이력서는 이런 의문을 한번에 해결해준다. 이한빈은 성명란에 ‘이호연(李浩然)’이라 쓰고 그 곁에 ‘이한빈’이라고 덧붙였다. 러시아 이름으로 ‘호연’을 사용하겠다고 자임했던 것이다. ‘넓을 호, 그럴 연’이라는 한자어였다. <맹자>에 나오는 ‘호연지기’(浩然之氣) 구절에서 따왔다. 정의에 기초해 형성되는 내면의 큰 기운을 뜻하는 말이므로, 그는 아마 조선혁명에 헌신하려는 결심을 그렇게 표현했으리라고 생각된다.

 

유학 고전에서 자신의 가명을 이끌어낸 데서 짐작할 수 있듯이, 이한빈에겐 한학 소양이 있었던 것 같다. 이 추론은 가정환경과 교육 경력에 관한 기록과도 부합한다. 공산대학 시절에 작성된 한 문서에는, 이한빈의 “아버지는 농업에 종사하며 시골에 약국을 갖고 있다. 직접 약을 제조한다”고 쓰여 있다.7 농사짓는 한편으로 한약방을 겸업했음을 알 수 있다. 한의학 처방이 한문으로 기록됐음을 고려하면, 그의 아버지는 한학 소양을 갖고 있었음이 틀림없다. 이한빈은 부모의 사회적 성분을 ‘중농’이라고 적었다. 빈농이라고 기재하는 것이 유리했을 터인데,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을 보면 그의 가족은 농촌 사회에서 다소 유족한 생활수준을 누렸던 것 같다.

 

공산대학 개인카드에 기재된 바에 따르면, 이한빈은 1926년부터 고려공산청년회에 입회했다. 사회주의 비밀결사에 가담한 것이다. 중동학교를 그만두고 고향 신흥군으로 돌아간 그해였다. 공산당이나 공청과 같은 사회주의 비밀결사에 참여하는 일은 높은 수준의 각오를 요했다. 그것은 1925년 치안유지법 시행 이후 유죄판결의 대상이 됐고, 1928년 치안유지법 개정 이후로는 최대 사형과 무기징역까지 각오해야 하는 범죄로 간주됐다.

 

이한빈은 비밀활동 동료 가운데 특별히 한 이름을 언급했다. 그의 ‘지도’가 있었다고 한다. 방치규(方致規)였다. 1902년생으로 이한빈보다 3살 많은 선배였다. 그는 일본 유학생 출신으로 메이지(명치)대학 경제과를 졸업했다. 방치규는 합법·비합법 두 영역에서 이한빈과 활동 반경을 공유했음을 본다. 1928년 이한빈이 신흥청년동맹 간부로 일할 때, 방치규는 신흥군에 잇닿은 함흥청년동맹 집행위원장을 했다. 두 사람은 함흥 지역 비밀결사 동료였다. 어쩌면 방치규는 공청 도위원회 간부, 이한빈은 신흥군 세포단체 소속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죽기 사흘 전 남긴 말

 

이제까지 이한빈을 세 번 만났다. 만남의 횟수가 늘어날 때마다 그에 대한 이해가 심화하는 것 같다. 하지만 만족스럽지 않다. 이한빈 삶의 궤적과 내면의식을 살피기에는 아직도 부족함을 느낀다. 그가 죽기 사흘 전에 수감 중인 동료에게 남겼다는 유언이 떠오른다. “나는 더 살 수 없으니 나의 뒷일을 동무들이 계승하여 조선 독립을 완성하기를 바라며, 만일 동무가 살아 나가거든 동무들에게 일제가 이같이 나를 죽인 것을 전하여달라!”

 

이한빈을 기억하고, 그의 죽음을 사람들에게 알리는 일은 살아남은 자가 수행해야 할 의무인 것만 같다. 다시 또 미래의 어느 굽이에선가 그의 족적을 만나기를 기대한다.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참고 문헌

1. 박준성, ‘이한빈, 105일 단식투쟁 끝에 옥사한 선진노동자’, <시대를 앞서간 사람들> 선인, 2014.

2.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 ‘李翰彬’,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http://db.history.go.kr)

3. ‘加平청년회 정기총회’, <조선일보> 1928년 3월8일치. ‘신흥청맹위원회’, <조선일보> 1929년 9월14일치.

4. ‘社告’, <조선일보> 1928년 11월27일치. ‘신흥기자단 창립대회 개최’, <조선일보> 1929년 12월30일치.

5. 朝鮮軍參謀長 久納誠一, ‘朝參密第32號, 共産大學卒業者ノ軍事スパイ事件檢擧ニ關スル件’, 452쪽, 1937년 1월22일. 공훈전자사료관(https://e-gonghun.mpva.go.kr)

6. ‘A학부 제5분과(한인분과) 학생 명부’, 1932년 11월20일. 이재훈·배은경 등 옮김, <러시아문서보관소 자료집 1 - 문서 번역집>, 한울아카데미, 136~137쪽, 2020년.

7. Записка. Хо-Ен: К проток М.К. от 8.Ⅹ-32г.(이호연에 관한 메모: 1932년 10월8일치 М.К.회의록 첨부) РГАСПИ ф.495 оп.288 д.180 л.11

 

 

 

지하철 콤소몰스카야 역 (Komsomol'skaya) 플렛홈

우리 일행은 기차 편으로 상트 페테르부르크를 향해 출발하기 위해서 
지하철을 타고 콤소몰스카야 역 (Komsomol'skaya)에서 내렸다.

 

지하철 콤소몰스카야 역 (Komsomol'skaya) 

 

지하철 콤소몰스카야 역 (Komsomol'skaya) 
1935년 모스크바 지하철이 개통될 때 최초로 개장한 역 중 하나다.

 

지하철 콤소몰스카야 역 (Komsomol'skaya) 

콤소몰스카야 지하철역 건물은 웬만한 기차역보다도 더욱 고풍스럽다.
러시아의 지하철역은 출입구만 뚫려 있는 다른 나라 지하철들과는 달리, 
이렇게 지상에 역 건물이 만들어져 있는 경우가 많은데
이 건출물 또한 제각기 특색이 있고 아름다워서 또다른 볼거리가 되기도 한다.

 

지하철 콤소몰스카야 역 (Komsomol'skaya) 야경

 

모스크바의 기차역

 

모스크바에는 기차역으로 모스크바 역이 없다.

우리나라는 서울에 서울역, 부산에는 부산역이 있다. 
당연하고 익숙한 기차역 이름 짓는 방식이 러시아와는 정반대이다.

러시아의 기차 역명은 출발지가 아닌 종착역 기준이다.
예를 들면 모스크바에서 상트 페테르부르크로 가는 기차역 명은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구 소련 시절 지명인 레닌그라츠키 역이고,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모스크바로 향하는 기차역 명은 모스코프스키 역이다.

러시아 기차역은 보통 행선지 방향의 도시 이름을 붙인다.
모스크바에서 상트 페테르부르크로 가는 방향의 기차들이 출발하는 경우 
'레닌그라츠키 역'에서 탑승해야 한다.

 

모스크바에는 아홉 개의 큰 기차역이 있다. 

1. 레닌그라드 역(Leningradsky Station) - 레닌그라스키 바그잘(Ленинградский вокзал‎) 
북쪽 방면의 발착역이다. 
헬싱키, 상트 페테르부르크, 트베리, 노브고로드, 무르만스크, 
페트로자보츠크, 프스코프, 탈린 방면과 연결되는 발착역이다.

톨스토이호, 레닌호, 붉은 화살호가 이곳에서 발착하며, 
상트 페테르부르크까지는 약 8시간이 소요된다. 
지하철역은 콤소몰스카야 역에 내리면 된다.

2. 리가 역(Rizhsky Station) - 리쉬스끼 바그잘 (Рижский вокзал‎)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등 발틱 3국 방면의 기점이다. 
가까운 지하철역은 리쉬스까야 역이다.

3. 벨라루시 역(Belorussky Station) - 벨라루스끼 바그잘 (Белорусский вокзал‎)
모스크바에서 서쪽 방면으로 가는 기차역이며, 칼리닌그라드, 빈, 베를린, 
바르샤바, 스몰렌스크, 민스크, 브레스트, 빌니우스 방면과 연결되는 열차가 발착한다.
모스크바 익스프레스, 벨라루시호, 쇼팽호, 오스트 웨스트 익스프레스, 
프라하 익스프레스, 폴로네이츠호 등의 국제 열차가 이곳에서 출발한다.
지하철역 벨라루스카야 역에서 내려 기차역으로 가면 된다.

4. 사볼로프 역(Savyolovsky Station) - 사볼로브스끼 바그잘 (Савеловский вокзал)
상트 페테르부르크, 우글리시 방면으로 가는 지방 열차의 발착역이다. 
가까운 지하철역은 노보스로보트카야 역이다.

5. 야로슬라블 역(Yaroslavsky Station) - 야로슬랍스끼 바그잘 (Ярославский вокзал‎)
시베리아, 중앙아시아 방향으로 가는 열차의 발착역으로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하는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는 곳이 바로 이 야로슬라블 역이다.
지하철  콤소몰스카야 역에서 내려 가면 된다.

6. 카잔 역 (Казанский вокзал‎, Kazansky Station) 
중앙아시아, 시베리아 방면의 발착역으로 로스토프, 카잔, 
볼고그라드, 중앙아시아, 시베리아 방면과 연결되는 열차가 발착한다.
지하철역은 콤소몰스카야 역에서 내리면 된다.

7. 쿠르스크 역- 쿠르스끼 바그잘 (Курский вокзал, Kursk Station)‎
우크라이나, 코카서스, 흑해 연안 지역으로 연결되는 열차가 발착한다. 
가까운 지하철은 꾸르스까야 역이다.

8. 키예프 역(Kievsky Station) - 키옙스끼 바그잘 (Киевский вокзал‎)
우크라이나, 몰도바, 동유럽 방면의 발착역으로 포프, 벨고라드, 부쿠레슈티, 
부다페스트, 프라하, 소피아, 키예프, 오데사 방면과 연결되는 열차가 발착한다.
다크라 익스프레스, 푸쉬킨호, 스로바키아 익스프레스, 
부다페스트 익스프레스 등이 여기에서 출발한다. 
지하철역은 키예프스카야 역에서 내리면 된다.

9. 파벨레츠 역(Paveletsky Station) - 빠벨레쯔끼 바그잘 (Павелецкий вокзал) 
파벨레츠, 볼고그라드, 아스트라한 방면과 연결되는 열차가 발착한다. 
가까운 지하철역은 파벨레츠카야 역이다.

 

모스크바 기차역 약도.

이 많은 역들 중 일반적으로 가장 많이 이용하는 기차역은 레닌그라드 역과 야로슬라블 역이다.
우선 지하철을 타고 콤소몰스카야(Komsomolseukaya) 역에 내리면 
이 역 주변에만 레닌그라드와 야로슬라블, 카잔역 이렇게 3개의 기차역이 있다.
상트 페테르부르크로 가려면 레닌그라드역 - 레닌그라스키 바그잘 (Ленинградский вокзал)‎에서,
이르쿠츠크, 블라디보스토크로 가는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려면 
야로슬라블역 - 야로슬라브스키 바그잘 (Ярославский вокзал‎)로 간다.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기차역

도착지인 상트 페테르부르크엔 총 6개의 주요 기차역이 있다. 

1. 모스크바역(Moskovsky vokzal) - 모스코프스키 바그잘 (Московский вокзал)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가장 중심이 되는 기차역으로 수도인 모스크바와 
러시아 북쪽의 무르만스크 방향, 코카서스, 그루지아 같은 중앙아시아로 가는 노선과 
러시아 남동지역의 도시들로 출발하는 열차가 발착한다.

2. 라도가역(Ladozhsky Station) - 라도쥐스키 바그잘 (Ладожский вокзал‎)
2003년 개통한 최신 기차역으로 핀란드와 모스크바에서 오는 열차를 통과시키는 것 같다. 
키지섬(끼쥐섬)이 있는 페트로자보츠크를 갈 때 이 역을 이용한다. 
지하철 라도쥐스카야 역 (Ладожская‎)에서 내린다.

3. 바르샤바 익스프레스 (Варшавский Экспресс, Warsaw Express)
발틱 3국과 폴란드의 바르샤바로 향하는 열차가 발착한다. 
지하철 체흐날라기치스키 인스치둣 역(Технологический Институт)이 그나마 가까운 편이다.

4. 발트역(Baltiysky Station) -발차스키 바그잘 (Балтийский вокзал)
발틱 3국의 국가들과 동유럽으로 가는 열차가 발착한다. 
지하철 발치스카야 역(Baltiyskaya)에서 내린다.‎

5. 비테프역(Vitebsk Station) - 비채프스키 바그잘 (Витебский вокзал)
중부 유럽 및 발틱 3국, 벨로루시의 민스크, 우크라이나의 키예프와 
러시아의 남부도시 스몰렌스크, 푸쉬킨, 파브블로프스크 등으로 출발하는 열차가 발착한다.
지하철은 푸쉬킨스카야 역(Пушкинская)이다.

6. 핀란드역- 필란스키 바그잘 (Финляндский вокзал, Finlyandsky vokzal)
핀란드의 헬싱키 같은 북유럽이나 러시아 북쪽 도시들로 운행하는 열차가 발착한다. 
지하철은 플로샤지 레니나 역(Площадь Ленина‎)에서 내린다.

 

상트 페테르부르크 기차역과 연결되는 지하철 역

모스크바역은 넵스키대로 끝의 보스타니아 광장에 있다.
걸어서 예르미타쥐 있는 곳까지도 충분하니 굳이 지하철 이용할 필요 없을 듯.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자 러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축을 볼 수 있는 
키지섬(끼쥐섬)이 있는 페트로자보츠크로 가는 기차역은 새로 생긴 
라조스키역(Ладожский вокзал)에서 타면 되는데 약간 외곽 쪽이라 지하철로 이동해야 한다.
가까운 지하철역은 라도쥐스까야 역 (Ладожская‎).

 

모스크바 레닌그라츠키 역(Ленинградский вокзал)을 향하여

 

길 건너편으로 보이는 건물은 카잔 역이다.

카잔역은 근대적인 레닌드라드역과 달리 무슨 성채나 교회처럼 지어놓았다.
역이 처음 문을 연 것은 1864년이지만 지금의 네오 러시안 양식으로 다시 지은 공사는 
1913년에 시작했다가 1차대전을 거치면서 중단돼 1940년에야 끝났다고 한다.

제정 러시아와 소비에트 시대 건축양식에 다리를 놓았다고 평가받는 건축가 
알렉세이 시추세프(Shchusev/ 1873~1949)가​ 옛 타타르 양식과 모스크바 크렘린 타워에 
아르누보 스타일을 뒤섞어 복고적이면서도 매우 분방한 설계를 구사해서
레닌그라드역 오른쪽에 있는 콤소몰 지하철역과 함께 그의 대표작으로 남았다.​

2013년 영국 BBC가 뽑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역, 톱텐에 꼽혔다고 한다.​
모스크바와 동남쪽 타타르스탄 자치공화국 수도 카잔을 잇는 역이다.
볼가강 유역과 카자흐스탄을 비롯한 중앙아시아로 나가는 관문이어서
중앙아시아 여러 나라 사람들이 많이 이용한다.​​
역사 오른쪽에 솟은 첨탑은 옛 카잔왕국의 왕궁 타워를 본떴다고 한다.

 

모스크바 레닌그라츠키 역(Ленинградский вокзал)

레닌그라츠키 역(Ленинградский вокзал)은 러시아 모스크바에 있는 9개의 철도역 중 
가장 오래된 기차역이고 모스크바 북서쪽 지역으로 발착하는 철도역이다. 
콤소몰스카야 광장에 위치한 이 역은 동서 방향, 

특히 상트 페테르부르크 방면으로 운행하는 열차가 많다. 
또한, 이 역에서는 탈린, 에스토니아, 핀란드 헬싱키 등지로 가는 

국제 열차가 거의 대부분 출발한다. 
인근에는 야로슬랍스키 역과 카잔스키 역이 위치한다. 
모스크바 지하철 1호선과 5호선의 환승역인 콤소몰스카야 역이 위치하고 있다.

 

모스크바 레닌그라츠키 역(Ленинградский вокзал)

 

모스크바 레닌그라츠키 역(Ленинградский вокзал) 야경

 

모스크바 레닌그라츠키 역(Ленинградский вокзал) 대합실

 

모스크바 레닌그라츠키 역(Ленинградский вокзал) 대합실

 

열차 시간표

 

탑승 게이트

 

캐리어 가방을 끌고 붉은 화살호(Красная стрела)를 타러 가는 우리 일행

 

붉은 화살호(Красная стрела)

'붉은 화살호'는 옛 소련 시절 공산당 간부들이 이용했다는 고급 열차이다.
지금은 모스크바 - 상트 페테르부르크 구간 705.6 km을 오가는 야간 기차이다. 
모스크바 레닌그라스키 바그잘에서 23시 55분에 출발하여 상트 페테르부르크 
모스코프스키 바그잘 (Московский вокзал)에 다음날 오전 07:55분에 도착
8시간이 소요된다. 

 

붉은 화살호(Красная стрела) 외부
보통 30량 이상의 객차가 연결되어 있어 정해진 위치에 서 있어야 제시간에 탑승할 수 있다.

 

붉은 화살호(Красная стрела) 내부

 

 

 

[영상] 모스크바 레닌그라츠키 역(Ленинградский вокзал)

 

내가 머무를 침대칸
정갈하게 준비된 간식 - 간식은 빵과 초콜릿 과자 등이 작은 박스에 담겨 있다.

 

의자를 접으면 이렇게 침대가 된다. 

누워보니 푹신하고 안락하다.

 

침대 옆 벽면에는 이렇게 콘센트가 있어 스마트폰, IT기기를 충전할 수 있다.

 

4인용 침대칸

 

통로 

침대 기차라 통로가 좁다.
객실 양 끝에 화장실이 있고, 간단하게 씻을 수 있는 세면대가 있다.

 

화장실
비행기 안에 있는 화장실 같다. 

 

화장실 옆에도 휴대폰을 충전을 할 수 있는 콘센트가 있다.

 

출발하고 얼마 후 열차 승무원이 아침 식사 메뉴를 미리 주문 받으면서 
여권과 기차표를 일일히 검사하고 가져간다.

 

멀리서 새벽 동이 터오르고...

도착 1시간 전 쯤에 이렇게 카스테라가 제공된다. 
커피는 100루블 정도를 내고 따로 요청해야 한다. 
식사와 주문한 커피를 받으며 전날 출발 때 거둬간 여권과 기차표를 이때 다시 돌려받는다.

 

인증샷

 

상트 페테르부르크 모스코프스키 바그잘(Moskovsky vokzal) 플렛홈
밤새 달려 마침내 상트 페테르부르크 모스크바 역에 도착한다.

철도 승무원은 대부분 여성이다.

 

상트 페테르부르크 모스코프스키 바그잘(Moskovsky vokzal) 플렛홈

 

상트 페테르부르크 모스코프스키 바그잘(Moskovsky vokzal) 대합실

 

상트 페테르부르크 모스코프스키 바그잘(Moskovsky vokzal) 대합실

오른쪽에 상트 페테르부르크를 건설한 표트르 대제의 흉상이 있고 
벽에는 상트 페테르부르크라 씌여 있다.

 

상트 페테르부르크 모스코프스키 바그잘(Moskovsky vokzal) 대합실

유럽과 아시아 대륙 곳곳으로 연결된 열차 노선도

(부러우면 지는 거라지만 참으로 부러움을 금치 못하겠다. ㅎ)

 

상트 페테르부르크 모스코프스키 바그잘 대합실

 

상트 페테르부르크 모스코프스키 바그잘(Moskovsky vokzal) 전경

모스코프스키 역은 1851년 개통된 상트 페테르부르크 - 모스크바 철도의 터미널 역으로서 
모스크바 쪽 터미널인 레닌그라츠키 역과 맞춰 지어졌다. 
똑같이 콘스탄친 톤의 설계 하에 건설되었으며, 현재는 모스크바 쪽 역이 2층 위로 
편의시설이 확장되어 다소 바뀌었지만 외관과 실내가 판박이로 똑같이 생겼다. 
이렇게 의도적으로 기/종점 역의 건축을 맞추는 것은 이후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종점인 
블라디보스토크 역을 기점 야로슬라브스키 역에 맞춰 건설하는 것으로 반복되었다.

 

모스코프스키 바그잘 야경

 

상트 페테르부르크 모스코프스키 바그잘 전경

이 역은 상트페테르부르크 최고의 번화가이자 관광의 거점인 넵스키 대로의 끝지점에 있다. 
지하철이나 시내버스, 노면전차로의 환승 연계도 괜찮은 편. 
상트페테르부르크 지하철 1호선 키롭스코비보르스카야선의 플로샤지 보스타니야 역과 바로 연결된다. 
이 지하철역은 세계 최초로 스크린도어가 설치된 역이기도 하다. 
대한민국의 흔한 유리 스크린도어와는 달리 반백 년 전 초창기의 스크린도어답게 
투박하고 육중한 철문으로 되어 있다. 
쾅 하고 닫히는 철문 스크린도어의 굉음과 압박이 대단하다.

 

[영상] Moskovsky Railway Station in St Petersburg, Russia (Since 1847)

자동번역기를 설정하여 생성할 수 있다.

 

베덴하(VDNKh) 역 플렛홈

 

아름답고 우람한 베덴하역 정문

 

우리 일행이 도착했을 때의 베덴하 전철역

 

국민 경제 달성 박람회 (베덴하 VDNKh ВДНХ) 조감 사진

국민 경제 달성 박람회(Выставка достижений народного хозяйства)는 
러시아 모스크바에 있는 상설 박람회장이다. 
약칭인 베덴하(러시아어: ВДНХ)로 불리기도 한다.

소비에트 공화국 시절 대외적으로 소련의 경제와

과학기술의 위상을 홍보하기 위해 지은 전시장이다.
현재는 문화행사장으로 사용되고 있고, 놀이공원도 조성되어 
모스크바 시민들의 나들이 장소로 인기 있는 곳이다.

모스크바 북동쪽에 위치한 베덴하는 
과거 소련 시절에 시작된 러시아 최대 박람회장이자 무역 전시장이다. 
소비에트 공화국은 경제적인 업적에 대한 대외 선전수단과 농업, 상업적인 교류를 위해 
이 박람회를 영구적으로 진행했었다.

현재는 경제관련 박람회장이라기 보다는 관광지의 개념이 조금 더 강하겠다. 
이 박람회장은 모스크바 중심가에서 지하철로 20분 정도 거리에 위치해 있다.
전체 2,375㎢의 대지에 조성되어 있다.

1989년까지 박람회장에는 82개의 파빌리온(Pavilion)이 건설되었다. 
이것은 소련의 각 공화국과 국가 기관의 명성 유지를 위해 
막대한 건설 예산이 늘어난 것도 영향을 미쳤다. 
각 공화국의 파빌리온으로는 우크라이나 파빌리온, 우즈베키스탄 파빌리온 등 
각 민족의 전통 양식을 담은 것도 많다.

소련 시절 베덴하는 매년 300개 이상의 국가 및 국제 박람회 및 다수의 연구자, 
기업인 등의 세미나와 회의가 열렸다. 
또한 다양한 이벤트가 진행되며 매년 약 1,100만 명의 국내 이용객과 
60만 명의 외국인이 베덴하를 찾았다.

소련 붕괴를 거쳐 1992년 전러시아 박람회장(ВВЦ)으로 명칭을 변경했으나 
2014년에 다시 국민 경제 달성 박람회로 개명되었다. 
베덴하(ВДНХ)라는 약어는 현재에도 사용되고 있다. 
현재는 기존의 전시회 외에도 놀이공원과 쇼핑센터도 있어서, 
모스크바 시민의 휴식, 쇼핑의 장이 되고 있다.

 

베덴하 정문 인증샷

 

베덴하 정문 인증샷

 

베덴하 정문

분수들, 조각들, 총면적 136헥타르의 공원들, 250개 전시관들 하나하나가 
건축의 보물이거나 참신하고 독창적인 시설물이다. 
현재 베덴하는 거의 도시 한가운데에 위치하고 있다. 
모스크바가 그사이 급속히 커졌기 때문이다. 

사실 1930년대 말 이 지역은 시외곽으로 집시들이 모여 살고 있었다. 
건축부지를 준비하는 데 5년이 걸렸다. 
건축자들은 서서히 집시들을 지역 밖으로 몰아냈다. 
숲을 없애고 그 자리를 콘크리트로 덮어버렸다. 
심지어 전시회를 앞두고 전시품을 실어나르기 위해 모스크바 지하철에 
별도의 노선을 증설했다는 전설이 있었을 정도다.

베덴하 개장 후 첫 두달 반 동안 300만 명이 이곳을 방문했다. 
다음 해에도 또 수백 만의 관람객이 방문했다. 이곳은 운명이 바뀌는 곳이었다. 
사람들은 평범한 노동자로 전시회장에 왔다가, 
경연대회에서 수상하고 훈장을 받고 고향으로 돌아가 출세가도를 달리곤 했다. 

1941년 2차 대전이 발발하자 전시회장은 문을 닫았고 
많은 전시품들은 모스크바에서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 
그런데 인상적인 점은 독일의 폭격 기간 내내 전시회장 구역에는 
폭탄이 하나도 떨어지지 않았고, 단 하나의 시설물도 피해를 입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베덴하 정문 지붕 조각 작품

 

소비에트 시대 사회주의의 상징이었던 밀단을 남녀가 치켜든 조각상이다.

사회주의 체제가 붕괴한 지 근 30년이 지났는데 아직

모스크바엔 여기저기 소비에트의 흔적이 남아 있다.

 

국가는 베덴하에 들어가는 돈을 전혀 아끼지 않았다. 
대규모 건설은 물론이고 전국에서 온 대표단들의 여행 경비며 숙박비, 식사비까지 말이다. 
메달과 상장에 대해서도 그러했다. 정부는 상을 주는 데 인색하지 않았다. 
수천 장의 인증서와 상장이 발급됐다. 이러한 시스템은 어떤 선전보다도 효과적이었다. 
수십만, 수백만 명이 자신이 사는 도시와 농촌으로 돌아가 모스크바의 부유함과 웅장함, 
그들을 따뜻하게 맞아준 일에 대해 이야기했고, 이뤄야 할 목표가 있다는 것, 
그저 열심히 일하기만 된다는 사실을 모두가 알게 됐기 때문이다. 
전국이 공업과 농업부문의 기록 경연대회로 탈바꿈했다.

 

첫 번째 중앙 분수

베덴하 정문 아치에 들어서면 양쪽에 각 7개씩 14개의 분수가 있다. 
각 분수는 빨간색 광택 화강암으로 정팔면체 테두리에 담긴 물 속에 있다. 
분수에는 중앙 부분에서 부채꼴로 뻗어나가는 12개의 수직 및 12개의 방사형 제트가 있다.

 

첫 번째 중앙 분수

 

첫 번째 중앙 분수

 

첫 번째 중앙 분수

 

레닌 기념비


베덴하에 관한 전설은 매우 많다. 게다가 그 중 몇 가지는 뜻밖에도 사실이다. 
한 때 베덴하에 전쟁에 대비해 물과 식량을 비축해 둔 벙커가 있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이 벙커에서는 300명이 이틀 동안 편안히 지낼 수 있다고 했다. 
이는 진실로 밝혀졌다. 레닌 조각상 아래에 있는 비밀 통로가 벙커로 이어진다. 
그리고 소련 붕괴 이후 전국에서 레닌 동상이 철거됐을 때도, 이곳의 레닌상은 건들지 않았다.

 

레닌 기념비

 

레닌 기념비 인증샷

 

레닌 기념비

 

레닌 기념비

 

파빌리온 no. 1. 트레티야코프 갤러리 박람회

Pavilion No. 1 "Central"은 전시회 건물에서 가장 중요하고 기념비적인 구조물이다. 
첨탑을 포함한 파빌리온의 총 높이는 97m에 달하고 총 면적은 9,378.2㎡ 이다. 

 

파빌리온 no. 1. 트레 티야코프 갤러리 박람회

 

소련 붕괴 이후 베덴하는 식물 상태에 빠졌다. 
새로운 이데올로기는 이미 베덴하라는 노동 기념물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전시관들은 다양한 상점과 시장에 대여되기 시작했다. 
이곳에서는 온갖 물건을 다 팔았다. 
꿀, 모피, 집적회로, 인도산 향, 벨라루스산 니트의류 등... 
전시회장 내 공원 산책로에는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났고, 

시설물들은 망가지지 시작했다.

 

파빌리온 no. 1. 트레 티야코프 갤러리 박람회

최근 몇 년 동안 모스크바 공원들의 대대적 재건이 이루어졌으나, 
베덴하는 여전히 아무도 작업을 맡지 않았다. 
이러한 현상은 베덴하는 연방정부 관할이고, 
일반 공원들은 모스크바시 관할이기 때문에 빚어진다. 
그런데 얼마 전 베덴하가 시청 관할로 이양됐다. 
이는 조만간 베덴하의 전시관들이 새단장을 하고, 새로운 건물이 세워지고, 
환경 미화작업이 펼쳐질 것이며, 썪어가는 연못들을 깨끗이 치우고 
신성한 노동의 이 '사원', 공원 건축의 명물로부터 

장삿꾼들을 내쫓을 것이라는 희망을 심어준다.

 

파빌리온 no. 1. 트레 티야코프 갤러리 박람회

 

"민족의 우정" 분수

민족의 우정 분수대는 베덴하뿐만 아니라 모스크바의 상징 중 하나이다. 
분수의 타원형 그릇에는 황금 덩어리의 밀, 

산업용 대마 및 해바라기가 큰 덩어리로 짜여져 있다.

뭉치 주위에는 소비에트 공화국을 상징하는 16명의 금박을 입힌 소녀의 동상이 있다. 
문화 유산이 생성될 당시 소련에 속해 있던 행정 영토 단위의 수에 따라 그 수는 16 개이다. 
소녀들은 손에 농업용 식물을 들고 있는데, 

이는 그녀들의 고향 공화국에서 생산되는 특산물이다. 

 

분수 "민족의 우정"

 

분수 "민족의 우정"

 

분수 "민족의 우정"

 

분수 "민족의 우정"

 

분수 "민족의 우정"

 

분수 "민족의 우정" 야경

 

분수 "민족의 우정" 야경

 

모스크바의 메인 스케이트장 야경

베덴하에서 겨울철의 주요 주제는 남극 대륙 발견 ​​200 주년이었다. 
대형 스케이트장과 어린이용 아이스링크가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민족의 우정" 분수와 "Stone Flower(돌꽃)" 분수를 얼음길로 둘러싸고 있다. 
인공 얼음 덮개의 면적은 20,000 평방미터 이상이다. 

 

모스크바의 메인 스케이트장 야경

 

중앙 정원

 

Stone Flower (돌꽃) 분수

돌꽃 (Stone Flower) 분수는 베덴하에서 유명한 4대 분수 중 하나이다. 
우랄(Ural) 지방에서 전해 내려오는 동화의 생생한 이미지에서 영감을 얻은 분수는 
수많은 세부 조각품으로 가득 차 있다. 
구성의 중심은 보석 사이에 피는 꽃 모양의 그릇다. 
주철 볼류트로 장식된 화강암 받침대에는 

연방 공화국 자연의 선물이 담긴 16개의 청동 정물 작품이 있다.

 

Stone Flower (돌꽃) 분수

 

Stone Flower (돌꽃) 분수

 

Stone Flower (돌꽃) 분수

 

Stone Flower (돌꽃) 분수

 

Stone Flower (돌꽃) 분수

 

Stone Flower (돌꽃) 분수 야경

 

Stone Flower (돌꽃) 분수 야경

 

글쓰기를 위한 슬로보센터

 

글쓰기를 위한 슬로보센터

슬라브 글쓰기를 위한 슬로보센터는 러시아에 아날로그가 없는 어린이와 

성인을 위한 박물관이자 교육 단지로, 러시아 언어 애호가와 건축, 문화 및 

역사 전문가 모두에게 일종의 매력 포인트이다. 
여기에서 러시아와 세계에서 글쓰기가 어떻게 발전하고 있는지, 
다른 민족의 삶에서 어떤 역할을하는지, 

수세기 동안 구두 연설과 어떻게 접촉해 왔는지 확인할 수 있다.

첫 번째 부분은 고대부터 현재까지 글쓰기의 기원과 발전에 대해 설명한다.
두 번째는 텍스트가 사회의 영적, 문화적 생활과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지에 관한 것이다.
세 번째 부분은 글쓰기의 주요 상징인 편지의 역사와 미래에 대해서 설명한다.
마지막 부분인 "논문 문화"는 구두 연설의 운명에 관한 것이다. 
민속, 언어적 특징, 비언어적 의사 소통에 대해 알려준다. 
방분객은 특별한 느낌의 고치에서 자장가와 서사시를 듣고 비디오를 볼 수 있다

 

Stone Flower (돌꽃) 분수와 글쓰기를 위한 슬로보센터

 

글쓰기를 위한 슬로보센터

 

글쓰기를 위한 슬로보센터

 

글쓰기를 위한 슬로보센터 야경

 

글쓰기를 위한 슬로보센터

 

보스토크 발사체

1950년대에 '우주(Космос)' 전시관 옆에는 

높이 25m에 이르는 거대한 스탈린 동상이 서 있었다. 
그런데 이 커다란 스탈린 동상 안에 

작은 스탈린 동상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마트료시카 인형 같은 구조였다. 

 

사연은 이렇다. 
먼저 동상의 축소 모형을 만들어 세우면 담당자가 와서 승인했다. 
그런데 큰 스탈린 동상을 세우기 시작하자 

축소 모형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가 문제가 됐다. 
누구도 그것을 부수라는 지시를 내릴 용기가 없었다. 
당시의 '개인 숭배' 분위기 속에서 이러한 일은 

감옥에 갇힐 수도 있는 사항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축소 모형을 큰 동상으로 잘 덮기로 했다.

스탈린은 모순된 면이 있는 사람이었다. 
불복종을 이유로 감옥에 가둘 수도 있고, 상을 줄 수도 있었다. 
어느 날 스탈린은 '그루지야' 전시관(그는 그루지야 출신이다) 건설 현장을 보러 
베덴하에 왔고, 파이프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 
한 경비원이 그에게 다가와 두려움에 떨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스탈린 동지, 이곳에서는 흡연이 금지돼 있습니다." 
스탈린은 파이프를 거뒀다. 경비원은 체포될 준비를 했다. 
그러나 며칠 후 크렘린에서 사환이 와서 이 경비원에게 
주의 깊은 경계심을 보여준 것에 대한 상장과 상금을 수여했다.

 

보스토크 발사체

보스토크 발사체는 1961년 4월 12일 유리 가가린이 지구 역사상 최초의 
유인 비행을 한 우주 궤도에 보스토크 -1을 발사한 것이 이 장치였기 때문에 
러시아 우주 프로그램 역사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보스토크 발사체 모형은 10월 사회주의 혁명 50주년을 기념하여 
1967년 7 월 8일 베덴하에 설치했다.

 

Golden Spike Fountain (황금 귀) 분수

황금 귀 분수 (Golden Spike Fountain)는 베덴하에서 세 번째로 큰 분수이다. 
전시 조경 공원의 카멘스키(Kamensky) 연못 3번 중앙에 위치해 있다.

"황금 귀"는 납작한 바닥에 솟아 있고 그 아래에는 
양배추, 호박, 옥수수, 토마토, 사과, 포도 등 3개의 야채와 과일이 들어 있다. 
고대부터 옥수수의 귀는 재생, 생명, 수확 및 

다산을 의미했기 때문에 분수의 상징성은 분명하다. 
황금귀 분수는 베덴하에서 가장 멋진 분수로 평가된다. 

 

Golden Spike Fountain (황금 귀) 분수

 

Golden Spike Fountain (황금 귀) 분수 야경

 

[영상] 베덴하(VDNKh) 방문 기념

 

 

박람회장에는 82개의 파빌리온(Pavilion)이 건설되었는데 각각의 파빌리온은

하나하나가 건축의 보물이거나 참신하고 독창적인 시설물이다. 
이것은 소련의 각 공화국과 국가 기관의 명성 유지를 위해 
막대한 건설 예산이 늘어난 것도 영향을 미쳤다. 
각 공화국의 파빌리온으로는 우크라이나 파빌리온, 우즈베키스탄 파빌리온 등 
각 민족의 전통 양식을 담은 것도 많다.

이제 각각의 파빌리온을 하나하나 살펴본다.

 

파빌리온 no. 18. 벨로루시 공화국 전시 및 무역 센터


파빌리온에는 벨로루시 공화국의 전시 및 무역 센터가 있다. 
1954년에 지어진 건물의 표현적인 건축 구성은 
금색 얼룩에 직면한 집단 농부의 모습인 조각 "모더랜드"로 장식되어 있다.

 

파빌리온 no. 68. 아르메니아 공화국 전시 및 무역 센터


2003년부터 아르메니아 공화국의 전시 및 상업 센터가 
이 파빌리온과 레스토랑 "Ararat" 에서 운영되고  있다.

 

파빌리온 no. 14. 아제르바이잔 공화국 전시 및 무역 센터

파빌리온 no. 14. 는 1939년에 지어졌다. 
2019년 11월 23일, 베덴하는 전시회 기념일에 복원된 파빌리온을 
아제르바이잔 공화국의 무역 및 전시 센터로 공식 개막하는 중요한 행사를 주최했다. 
센터의 활동은 러시아에서 아제르바이잔의 문화 및 비즈니스를 대표하고
국가 간의 협력과 개발을 목표로 할 것이다.

 

파빌리온 no. 10. 몰도바 공화국 전시 및 무역 센터

이 파빌리온에서는 국가 디자이너의 옷 부티크, 전통 몰도바 요리 레스토랑, 
몰듀 벨리르프롬의 보석 전시 및 판매, 건강 제품이 판매된다.

 

파빌리온 no. 4. 키르기즈 공화국 전시 및 무역 센터

이 파빌리온은 원래 산업, 농업 및 문화 분야에서 에스토니아 공화국의 
업적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 
현재 복원을 위해 폐쇄되었는데 복원이 완료되면 
키르기즈 공화국의 무역 및 전시 센터로 운영될 예정이다.

 

파빌리온 no. 6. 압하지야 공화국 전시 및 무역 센터

전후 전시 재건 과정에서 리투아니아 SSR을 포함한 
3개의 발트 공화국 모두를 위한 별도의 파빌리온을 건설하기로 결정했다.
Pavilion No. 6은 리투아니아 민속 동기를 바탕으로 
스탈린주의 제국 스타일로 장식되어 있다.
복원 작업이 끝나면 압하지야 공화국의 무역 및 전시 센터가 이곳에 열린다.

 

 파빌리온 no. 66. 우즈베키스탄 공화국 전시, 문화 및 박람회 센터
우즈벡 민족 건축을 모티브로 한 스탈린 제국 스타일의 파빌리온.

 

결혼 궁전. 421동


VDNKh Wedding Palace에서 제공하는 서비스 :
결혼 등록, 결혼식, 테마 행사, 음악 반주 조직, 뷔페 또는 결혼식 연회 장소,
사진 및 비디오 세션을 위한 아름다운 장소 

(예 : 결혼식 궁전 자체가 맨션으로 양식화 됨)

 

파빌리온 no. 57. "러시아는 나의 역사"

역사 공원 "러시아-나의 역사"는 러시아의 국가와 문화의 형성과 수립의 
중요한 시기를 알려주는 멀티미디어 교육 및 전시 단지이다.

 

파빌리온 번호 64. 러시아 철도 전시장
현재 이 파빌리온은 복원 중이며 앞으로는 여기에 러시아 철도 통합 전시장을 열 계획이다.

 

파빌리온 no. 11. 카자흐스탄 공화국 전시 및 무역 센터

카자흐스탄 공화국 파빌리온 (구 카자흐스탄 SSR 인 "Metallurgy") 의 건축적 외관은 
카자흐스탄 국가 건축의 동기를 반영한다. 
주요 외관은 3경간 아치 형태로 설계되었으며 집단 농부와 철강 노동자의 조각품과 
시인 챰블 차바예프(Dzhambul Dzhabayev 1894-1979)와 
농업 노동자인 치그낵 버시프 (Chiganak Bersiev 1881-1944)의 기념비로 장식되어 있다.

 

파빌리온 no. 17. 박물관 "4 요소"

스탈린주의 제국 스타일로 디자인 된 목재 산업 전용 파빌리온. 
처음에 박람회에서는 식재와 재조림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주제가 확장되었고, 
전시회는 목재 사용 및 가공 방법도 시연하기 시작했다. 
그 후, 이 주제가 주요 주제가 되었다.

 

파빌리온 no. 71. 공공 서비스 궁전 (mfc)

공공 서비스 궁전은 방문객에게 열려 있다.
2018년 12 월 18 일, Pavilion No. 71에 공공 서비스 궁전이 문을 열었다. 
수도에서 공공 서비스 제공을 위한 130번째 센터가 되었으며 
러시아 전역에 위치한 부동산 개체의 소유권을 등록할 수 있는 최초의 센터가 되었다.

 

파빌리온 no. 71. 공공 서비스 궁전 (mfc)

또한 베덴하의 공공 서비스 궁전에는 공공 서비스 역사 박물관 및 전시 단지가 있다. 
전시회는 홀로그램 팬 및 VR 게임, 오래된 문서 및 유물 사본, 
미니어처 역사적 인테리어 모델, 실제 타자기, 기계, 주판 및 전신 추가와 같은 
최신 기술을 조화롭게 결합하여 누구나 실제로 시도할 수 있다.

 

파빌리온 no. 71. 공공 서비스 궁전 (mfc)

피터 대제(Peter the Great) 시대의 공무원 의상을 입어보고, 
개인 기념품 문서를 만들고, 회계사, 전신 기사 및 비서의 역할에 자신을 느끼고, 
과거, 미래로 나아가고 심지어 화성에서 자신을 찾는 모든 것이 
박물관 및 전시 단지에서 가능하다. 

 

파빌리온 no. 8. 젊은 자연 주의자
이 파빌리온은 복원을 위해 폐쇄되었다. 
작업이 완료되면 미래의 공원 내에 가족 및 레저 센터가 열린다.

 

[영상] 파빌리온 no. 2. 로보스테이션(Robostation)

 

이 파빌리온은 2021년 1월 15일까지 일시적으로 중단된다.
이 파빌리온에는 한국, 일본, 중국, 미국, 유럽, 러시아의 

독특한 로봇을 볼 수 있는 인터랙티브 전시 "로보 스테이션"이 있으며 

로봇의 발전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알아볼 수 있다.

"Robostation"에서 로봇 초상화를 그리고, 거대한 로봇 물고기를 처음으로 보고, 
로봇의 미래 예측을 얻고, 스마트 로봇에게 까다로운 질문을하고, 
조커 로봇과 함께 새로운 로봇 농담을 배우고, 농구와 테이블 축구를 하고, 
로봇 슈트를 되살려 로봇의 목표를 달성 할 수 있다. 

 

파빌리온 "책". 건물 516

북 파빌리온은 방문객에게 열려 있다.
여기에서 독서하는 동안 휴식을 취하고 토론 및 교육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커피 한 잔으로 아이디어를 공유하고 새로운 책을 얻을 수 있다.

여기에서 고대 사원의 건축학적 엄격함과 현대적인 공간의 내적 안락함이 결합되어 있다. 
파빌리온에는 아늑한 카페, 다양한 문화 프로그램 및 
좋은 책이 물론 많이 있기 때문에 여기에 있는 것이 즐겁다. 
거의 모든 책을 편안하게 읽거나 안락 의자에 앉아 휴식을 취할 수 있다. 
책을 사서 집에 가져갈 수도 있다.

 

건조 분수

물이 채워진 전통적인 물 그릇이 없다는 것이 분수의 주요 특징이며, 
이는 베덴하의 청년 및 성인 손님에게 매력 포인트가 되었다.
394 평방 피트에 34 개의 분수 모듈이 있다. 
폼 랜스와 LED 조명이 있고 분수대는 빛이 역동적이다. 

 

파빌리온 no. 26. 모스크바 교통 박물관
이 파빌리온은 1937년에 지어졌으며 1954년에 재건되었다. 

 

기억에 남는 사인 

"1941-1945년 위대한 애국 전쟁의 전선에서 죽은 전 연합 농민 노동자들에게."
조각 구성은 평화와 전쟁을 분리하는 상징적인 벽의 형태로 만들어졌다.
동상의 한 부분에서 우리는 애국 전쟁의 전통적인 
겉옷 (모자와 재킷)과 작업용 수공구를 볼 수 있다. 

 

파빌리온 no. 31. 박물관

이 파빌리온은 현재 복원을 위해 폐쇄되었다. 
역사적으로 인피부와 모직물, 그리고 린넨 및 모직 산업의 성과가 여기에 있었다.

 

파빌리온 no. 51 . 육류 산업

이 파빌리온은 복원을 위해 폐쇄되었습니다. 
앞으로 이곳에서 박물관 및 전시 활동을 조직할 계획이다.

 

파빌리온 no. 35. 글라브타바크(glavtabak)

이 파빌리온은 1954 전후 전시회의 개막을 위해 예술가 V.S. Kondratyev에 의해 지어졌다. 
현재 복잡한 복원을 위해 문을 닫고 있으며, 작업 완료 후 이곳에 카페를 오픈할 예정이다. 

 

파빌리온 no. 40. 베이커스 학교

Horse Breeding 박람회의 3 개 파빌리온 중 하나가 현재 대대적인 정비를 진행하고 있으며 
완공되면 School of Bakers가 이곳에 위치하게 된다.

 

파빌리온 no. 41. 국립 승마 전통 센터

처음에 이 파빌리온은 18-19 세기 러시아의 
승마 단지 전통에 따라 지어진 "말 사육" 단지의 일부였다. 
총 4개의 파빌리온 (42번)이 포함된 이 복합 단지에는 동물의 공개 검사, 
강의 및 보고서 전달을 위한 경기장이 있다.

 

파빌리온 no. 44. Expert Methodological Center "Special Childhood"

이 파빌리온에는 창조적 클러스터 프로젝트가 있다. 
파빌리온의 복잡한 복원도 진행 중이며 이후 현대적 사용에 적응한다.

 

파빌리온 no. 47 . 공예의 집 (House of Crafts)

이 파빌리온은 베덴하의 공개 워크샵을 위한 공간인 Crafts Park의 주력 프로젝트로, 
해당 지역의 장인, 예술가 및 산업 디자이너가 한자리에 모인다.
예술 그림, 꽃다발 만들기 또는 스튜디오 조명의 기초와 같은 어린이와 
성인을 위한 창의적인 워크샵이 매일 이곳에서 열린다.

 

파빌리온 no. 62 . 국제 발레센터

이 파빌리온은 방문객에게 개방되어 있다.
국제 발레 센터는 발레의 역사에 대한 마스터 클래스와 강의가 열리는 교육 플랫폼이지만, 
무엇보다 어린이와 어른 모두가 꿈을 이루고 춤을 배우는 발레 학교이다. 

 

모스크바 레이아웃

이 파빌리온은 방문객에게 개방되어 있다.
2019년 11월 1일, 모스크바 모델 파빌리온이 재건축 후 문을 열었다. 
업데이트 된 레이아웃은 이전보다 거의 1/3 더 크다. 
이제 미니어처의 기존 수도 개체 외에도 "우크라이나" 호텔, 
돈스코이 수도원, 캐서린 궁전 등을 볼 수 있다.

수도 레이아웃의 주요 특징은 건물의 놀라운 디테일과 조경 요소의 가장 내부이다. 
1 : 400 규모의 429 평방 미터에 23,000 개의가 표시된다.

그중에는 호텔 "우크라이나", 키예프스키 기차역, 안드레브스키 다리, 

돈스코이 수도원, 캐서린 궁전 등의 상징적인 장소가 있다. 
재구성은 조명 구성 요소에도 영향을 미쳤다. 
레이아웃의 새로운 사각형이 설치되고 일반 조명 시스템에 연결되었으며 
기존 조명 쇼가 새로운 형식에 맞게 조정되었다.

 

파빌리온 no. 461. "스마트 시티" 

이 파빌리온은 방문객에게 개방되어 있다.
시민의 삶을 편하게하고, 시간을 자유롭게하고, 편안함을 주는 
새로운 기술이 모스크바에서 발전하고 있다. 
10년 전만 해도 무료 도시 Wi-Fi, 리셉션에서 킬로미터 길이의 줄이 없는 의사와의 온라인 약속 

또는 한 번의 클릭으로 얻을 수 있는 정부 서비스를 상상하기 어려웠다.
이 모든 것이 이미 모스크바에 있다.
모스크바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Smart City 파빌리온에서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지능형 전송"  
이 구역에서는 특수 터치 스크린을 통해 
도시의 선택한 지역의 교통 상황을 실시간으로 평가할 수 있다. 
중복 또는 교통 제한이 있는지, 수리가 진행 중인지, 주문을 기다리고 있는 택시 차량 수이다. 
투어 참가자는 전기 버스, 카 셰어 링, 무인 택시와 같은 진보적 인 교통 수단에 대해 알려준다. 
후자에서는 존재감 효과로 가상 여행을 할 수 있습니다.

"도시 관리 센터". 
이 영역에는 리소스 소비를 추적하는 레이아웃이 포함되어 있다. 
화면에서 파이프에 충분한 압력이 있는지, 충분한 수압이 있는지 여부에 관계없이 
주택에 전기와 물이 어떻게 공급되는지 확인할 수 있다. 
이 모든 것은 자원 공급을 신속하게 모니터링하고 문제가 발생하면 
단시간에 제거하기 위해 필요하다. 
또한 특수 모델에서는 모든 사람이 구급차 디스패처로 시도할 수 있다. 
손님은 테스트 모드에서 의사 팀을 위한 신청서를 작성하도록 제안되며, 
작성하는 데 2 ​분이 주어진다. 이것이 디스패처의 표준이다.

"디지털 의학" 
이 전시회는 모스크바 의료 분야에서 가장 큰 IT 프로젝트인 
통합 의료 정보 및 분석 시스템 (UMIAS)에 전념한다. 
정보 키오스크에서 예약 시간을 선택하고, 의사 방문을 연기하거나 취소하고,

전문의 예약 일정을 숙지하고, 특정 의료 기관에 대한 환자의 할당에 대해 알아볼 수 있다. 
UMIAS Connect 응용 프로그램과 체중계, 혈압 모니터, 혈당 측정기, 
심박수 모니터, 피트니스 팔찌 및 기타 장치의 통합과 데이터를 
전자 의료 기록으로 전송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안내해 준다.

"모스크바 전자 학교" 
전시회는 대도시 교육 시스템의 발전에 대해 알려준다. 
센터의 가이드는 "Moskvenok", "Electronic Journal" 및 
"Electronic Diary"서비스의 기능을 보여준다. 
대화형 패널을 사용하여 학생들은 미래의 직업을 선택할 수 있으며 
공학, 의료, 학업 및 IT 수업이이를 도울 것이다. 
전자 도서관 기금은 손님을 위해 열려 있으며 강의 스크립트, 튜토리얼 및 
가상 실험실에 액세스 할 수 있다.

"개선 및 편안함" 
이 영역에서는 말 그대로 돋보기 아래에서 공공 시설의 작업을 볼 수 있다. 
이렇게 하려면 대화형 패널의 다양한 개체 (깨진 랜턴, 버려진 쓰레기, 부서진 벤치)에서
돋보기를 가리켜야 한다. 
이에 대응하여 시스템은 도시가 그러한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는지 보여줄 것이다.

"활성 모스크바" 
이곳에서 관광객들은 도시의 꽃에 물을 주고 수도의 녹화가 
어떻게 이루어지는 지 배울 수 있다. 
이렇게 하려면 잔디와 화단이 있는 대화형 벽으로 이동하여 
특수 금속 물 뿌리개로 화면을 터치해야 한다. 
그 후 화단에 꽃이 피고 공원의 나무가 피어난다. 
인터랙티브 벽 "Know Moscow"에서는 수도의 상징적인 물건을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에 대한 정보도 읽을 수 있다.

 

파빌리온 no. 64. 러시아 철도 전시장
현재 파빌리온은 복원 중이며 앞으로는 여기에 러시아 철도 통합 전시장을 열 계획dl다.

 

체스 클럽


체스 클럽은 관리 건물 no. 206 바로 뒤에 있다 . 
지적 게임의 팬들은 프로 및 아마추어 토너먼트를 위해 여기에 모일 수 있다.
베덴하 손님은 400평의 사계절 목조 건물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다. 
보편적인 놀이방은 편안한 벤치가 있는 12개의 나무 테이블이 있다. 
여기서 완전 무료로 플레이 할 수 있다.

체스 클럽에는 게임 룸, 모자 실, 창고, 게임 장비 보관실 및 
위생 시설 등 여러 건물이 있다. 
건물은 거동이 불편한 사람들도 편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지어졌다. 

 

[영상] 공중에서 보는 베덴하 (VDNKh from the air, Moscow)

 

[영상] 베덴하 공원 구석구석 (VDNH park in Moscow)

 

 

Portrait of Leo Tolstoy. 레오 톨스토이 초상화. 1887. by Ilia Repin. 
oil on canvas. 88 x 124 cm.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레오 톨스토이 초상화를 그린 일리야 레핀 (Ilya Yefimovich Repin)은 
러시아를 명실공히 대표하는 국민화가이다.
그는 1880년대부터 수많은 러시아 문화 엘리트들의 초상을 그리기 시작했다. 
톨스토이, 이반 투르게네프(Ivan Turgenev), 고골(Nikolai Gogol) 등을 비롯한 문학가, 
무소륵스키, 림스키코르사코프(Rimskii-Korsakov) 등의 음악가, 

스타소프(Vladimir Stasov) 같은 예술 비평가, 
그밖에 왕족과 귀족, 우아한 상류사회 여성 등 

문화계의 거의 모든 유명 인사들이 레핀의 모델이 되었다. 

레핀은 모델의 특징적인 포즈와 몸동작, 행동 등을 통해 

각각의 인물이 지닌 독특한 개성을 표현하는 데 중점을 두었으며,

리한 사색과 관조에 의거한 인물 내면의 심리 묘사에 탁월했다.
1894년 레핀은 상트페테르부르크 미술 아카데미의 교수로 임명되어 
1907년 교수직에서 은퇴할 때까지 학생지도에 전념했다. 

일리야 레핀은 톨스토이와 가까이 살며 30여 년 간 우정을 나눈 친구였다.  
종종 만나 한적한 모스크바의 골목길을 산책하며 뜨거운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는 두 사람은 여름 휴가를 함께 보내기도 하였는데, 
이 그림도 톨스토이의 영지에 같이 머물며 그린 초상화 중 한 점이다.

 

Leo Tolstoy Barefoot. 맨발의 톨스토이. 1901. by Ilia Repin. 
oil on canvas. 207 × 73 cm. The Russian Museum. St. Petersbrg.

톨스토이는 카잔 대학교 법학과에 다니다가 중퇴했는데 

그 이유는  인간의 자유롭고 창의적인 생각을 억압하는 

대학교 교육 방식에 실망을 느껴서라고 한다. 
그는 부모의 유산 가운데 자신의 몫이 된 야스나야 폴랴나로 돌아간다. 
영지에서 농노들을 대상으로 일종의 계몽 실험을 벌이던 톨스토이는 

1848년에 다시 고향을 떠난다.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그는 방탕한 생활에 빠져 빚을 많이 졌다. 
급기야 1855년에는 도박 빚 때문에 야스야냐 폴랴나의 저택을 매각하고 말았다.

젊은 시절의 톨스토이는 이상주의자인 동시에 쾌락주의자였다.
표도르 도스토옙스키와 함께 19세기 러시아 문학을 대표하는 대문호이다. 
톨스토이의 주요 작품으로는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니나>, <부활> 등의 장편 소설과 
<이반 일리치의 죽음>, <바보 이반> 등의 중편 소설이 잘 알려져 있다.

톨스토이의 작품에는 ‘삶을 사랑하는 톨스토이’와 
‘청교도적 설교자로서의 톨스토이’라는 ‘두 얼굴의 톨스토이’가 있다. 
톨스토이의 세계에서는 두 얼굴을 가진 분열된 자아가 계속해서 서로 싸운다. 
후기로 갈수록 톨스토이는 ‘삶을 사랑하는 시인’에서 ‘인생의 교사’이자 
‘삶의 재판관’이 되기를 갈망했다. 

하지만 그에게는 두 얼굴을 가진 분열된 자아가 계속해서 서로 싸우는 그의 세계를 
이원론적으로만 볼 수도 있지만, 주제적으로 긴밀하게 얽혀 있는 
전일성이 드러난 세계로도 파악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작가 · 사상가로서 톨스토이를 이분법적 사고로 나누지 말고, 
영적인 탐구심에 기초한 도덕적 태도의 통일성에 기초해서 그를 전체적으로 조망하고, 
그의 창작 세계의 전일성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Yasnaya Polyana Fleece Blanket에서 아내와 Leo Tolstoy. by Ilia Repin. 

톨스토이는 삶과 죽음, 육체와 정신, 사랑과 진리에 대한 관념들을 
일반적 · 보편적 형상으로 표현하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그는 예술가이자 인생의 교사로서 
이런 관념들에 대한 해답을 인류에게 제시하고자 노력했다. 
이러한 톨스토이의 예술 세계에서는 자족적 관념이 만들어내는 
자기 완결적 순환 구조를 어렵지 않게 읽어낼 수 있다. 
톨스토이는 자신의 관념을 통하여 그리고 그 관념의 실천을 통하여 
절대적 자각자로서의 자기완성에 이르고자 하고, 

자기 구원과 인간 구원에 도달하고자 했다.

그 자신은 백작의 지위를 가진 귀족이었으나, <바보이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등의 집필을 통해 러시아 귀족들이 

너무 많은 재산을 갖고 있기 때문에 대다수의 민중들이 

가난하게 살고 있음을 비판하는 문학 활동을 하여, 러시아 귀족들의 압력으로 

<참회록>과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의 출판 금지를 당했다. 

하지만 독자들은 필사본이나 등사본으로 책을 만들어서 몰래 읽었고, 
유럽, 미국, 아시아에 있는 출판사들이 그의 작품을 출판하여 
외국에서는 그의 작품이 유명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민중들에게 무관심한 교회 (러시아 정교회)를 비판하여 교회로부터 미움을 받고 
1901년 러시아 정교회의 교리감독기관인 종무원으로부터 파문을 당했을 정도로 
톨스토이는 교회와 사회에 대해 비판적인 지식인으로 활약하였다.

 

Portrait of Leo Tolstoy in peasant dress. shoeless. 1901. by Ilia Repin. 
oil on canvas. 207 X 73 cm. The Russian Museum. St. Petersbrg.

톨스토이는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내용은 몸으로 실천하는 지식인이어서, 
귀족들의 방해로 폐교되기는 했지만 1860년 고향 툴라에서 농민학교를 운영하여, 
부모의 강요로 아동 노동을 하는 게 전부였던 농민의 자녀들이 
학교에서 공부도 하고 재미있게 놀기도 하게 해주었다. 
당시 부모들은 처음에는 일할 사람이 없어질 것을 걱정하여 

자녀들이 학교에 가는 것을 싫어했지만, 톨스토이가 진심으로 농민들을 

사랑한다는 것을 알고는 아이들을 기꺼이 학교에 보냈다. 

농민학교는 자유로웠는데, 이는 자유로운 교육을 통해서 

진짜 교육이 진행된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1871년에는 직접 교과서를 쓰기도 했는데, 농민과 귀족이 

평등하게 교육받도록 한 내용 때문에 자기들보다 가난하고 배우지 못한

농민을 멸시하는 귀족들은 농민들과 평등한 교육을 받을 수 없다며 

거센 반발을 일으켰지만, 자신들도 배울 수 있다는 사실에 

감동한 농민들에게는 칭찬을 들었다.

톨스토이가 1894년에 저술한 <하나님 나라는 당신 안에 있다> 에서 그는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것을 돕는 일이다. 
그리고 이는 우리 개개인의 진실에 대한 깨달음과 선포에 의해 이루어질 수 있다." 고 했다. 
이처럼 기독교 신앙은 그의 삶에 있어서 중요한 핵심이었다. 

또한 그는 죽기 며칠 전인 1910년 11월 1일 자신의 딸 사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하나님은 한계가 없으시다. 모든 사람들은 그를 부분적으로 이해할 뿐이다. 
진리는 오직 하나님께만 존재한다..."고 말했다. 
“God is the limitless All of which man realises himself to be a limited part. 
The truth exists only in God…” 

또한 그는 기독교의 영성은 하나님을 공경하고, 가난한 사람과 죄인들까지 모두 사랑하며, 
폭력을 사용하지 말라는 복음서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라고 이해하였다. 
실제로 그의 단편소설인 <사랑이 있는 곳에는 하나님도 있다>는 
가난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이라는 마태복음서 25장 설은 
폭력은 문제를 더 심하게 만들 뿐,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또한 기독교 평화주의의 대표적 인물이기도 하다.

톨스토이는 1850년대에 이미 이반 투르게네프나 

알렉산드르 오스트롭스키의 영향을 받아 극작을 했다. 
그러나 그의 이름을 근대 연극사에서 유명하게 한 것은 주로 <어둠의 힘>(1886), 
<교육의 열매>(1891), <산송장>(1911) 등의 작품이라 하겠다. 
<어둠의 힘>은 실화에 의거해 러시아 농민의 음산한 생활을 그린 것으로 
자연주의 희곡으로 뛰어난 작품이며 러시아에서는 상연이 금지되어 프랑스에서 초연했다. 
<교육의 열매>는 시골 귀족의 무의미한 생활을 풍자한 것. 
<산송장>은 기독교적 자기 희생과 결혼법의 문제를 다룬 희곡으로 유럽에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그리고 소설 <안나 카레니나>와 <부활>은 '모스크바 예술극단'이 각색, 상연한 바 있다.

 

Trait of Leo Tolstoy as a Ploughman on a Field. 쟁기로 밭을 가는 레오 톨스토이. 1887. 
by Ilia Repin. oil on canvas. 40 x 28 cm.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대문호 톨스토이의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

선 그의 파란만장한 인생부터 알아볼 필요가 있다. 
야스나야 폴랴나는 톨스토이의 외할아버지인 

니콜라이 세르게예비치 볼콘스키(1753~1821) 공작의 소유였다. 
외할아버지는 예카테리나 2세 시절 고관을 지냈다가 좌천되어 이 영지에 정착했다. 

니콜라이 볼콘스키는 이곳에서 마리야 니콜라예브나 (Maria Nikolaevna, 1790~1830)를 낳았다. 
그러나 딸  마리야가 두 살 되던 해에 볼콘스키의 아내가 사망했고 
볼콘스키 공작은 평생 재혼하지 않고 딸 마리야만을 열심히 길렀다. 
딸 마리야는 볼콘스키 공작이 죽은 후 이 영지를 물려 받았다. 

1년 후, 마리야는 니콜라이 일리치 톨스토이(1794~1837) 백작과 결혼하게 된다. 
니콜라이 톨스토이는 집안의 파산을 막기 위해 4살 연상인 마리야와 일종의 정략결혼을 한 것. 
이 영지는 마리야의 결혼 지참금이었다. 
니콜라이 톨스토이와 마리야는 결혼 후 이 곳에서 다섯 남매 (4남1녀)를 낳았다. 

레프 톨스토이(Lev Nicolayevich Tolstoy, 1828~1910)는 
야스나야 폴랴나에서 니콜라이 톨스토이와 마리야 사이 

4남 1녀 가운데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러나 레프 톨스토이가 두 살 때 어머니 마리야는 

막내 여동생이 태어난 지 몇 달 후 죽게 된다. 
두 살 때 어머니를 여읜 까닭에 톨스토이에게 

어머니에 대한 기억은 남아 있지 않았다. 


아홉 살 때 아버지마저 세상을 뜨자 고모 또는 숙모로 불린

척집을 전전하며 성장기를 보내게 된다. 
후견인 ‘숙모’ 요르골스카야는 어머니를 대신해 어린 톨스토이를 기르다시피 했으나, 
어머니의 부재는 그에게 불우한 기억의 그늘을 드리우며 여성상을 형성하는 데 
어두운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보인다.

친척집이 있는 카잔으로 이주한 후 톨스토이는 카잔대학에 들어가 
동양어학과 법학을 공부했으나 중도에 자퇴를 한다. 
당시 교수는 그를 ‘공부할 능력도 의사도 없는’ 불량 학생으로 평가했다.
톨스토이는 독학으로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는 물론 그리스어, 라틴어, 터키어 등 
여러 외국어를 능숙하게 구사했다고 하니 실제로는 어학에 꽤 소질이 있었던 모양이다. 

젊은 백작은 학업과 관련 없는 분야의 책을 읽기 좋아했고 
도박, 사냥, 음주, 집시 여자 등 다른 데 관심이 많았다. 
열아홉 나이에 성병에 걸려 대학병원에 누워 있는 동안 그는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그 뒤 일기를 남기는 습관은 강박적일 만큼 평생토록 이어진다. 
야스나야 폴랴나의 영지로 돌아온 톨스토이는 농노들을 교육하고 그들 생활을 
개선하려는 계몽 활동을 벌이지만 농노들의 냉담한 반응으로 실패를 맛본다. 
그는 모스크바와 툴라, 페테르부르크를 돌며 

한량 생활을 하다가 엄청난 노름빚까지 지게 된다. 


톨스토이의 모순된 성격은 이렇듯 이미 젊은 시절에 드러났다. 
그는 수줍은 듯하면서도 거만했고 내성적인가 하면 

자기를 드러내길 좋아했으며, 감상적이면서도 격정적이었다. 

이상주의자이면서 쾌락주의자였다. 
성욕과 도박의 유혹에 빠진 자신에 대해

독한 환멸과 자책을 느끼면서도 거기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1851년에 형 니콜라이를 따라 캅카스 지역으로 내려간 레프 톨스토이는 
군에 입대해 체첸 전투에 참전한다. 
크림 전쟁 때는 세바스토폴 공방전에서 공을 세워 중위로 진급하기도 했다. 
그는 전투를 치르며 수많은 목숨이 죽어나가는 끔찍한 상황을 목도했다. 
이즈음에 가명으로 데뷔작인 <유년 시절 (1852)>을 발표하고 
크림 전쟁에 참전한 경험을 살려 <세바스토폴 이야기>를 쓴다. 

<유년 시절>은 <소년 시절>, <청년 시절>로 이어져 자전소설 삼부작을 이룬다. 
사실, 그의 저작 대부분을 ‘자전적’이라 불러도 무리가 없다. 
소설 속 주인공은 어머니를 저 세상으로 보내며 유년에서 소년 시절로 건너간다. 
이들 초기작에 담긴 예술, 사랑, 죽음 그리고 인생의 문제는 
이후 발표하는 작품들에 계속 따라다니는 주제가 된다. 

군을 제대하고 그는 두 차례 서유럽으로 여행을 떠난다. 
파리 여행 중에 생전 처음 단두대 처형 장면을 목격하고 크나큰 충격에 빠진다. 
두 번째 여행에서 빅토르 위고, 아나키스트인 푸르동 등을 만나기도 한다. 
전쟁과 여행을 통해 체험한 일들은 나중에 

비폭력 평화주의 사상을 세우는 데 영향을 미쳤다. 


그는 고향 야스나야 폴랴나에 돌아와서 농부 자녀들을 위한 학교를 열고 
‘초등 독본’이라는 교재를 펴낸다. 
유렵을 여행한 목적 중 하나도 학교에 필요한 교과서를 만들 자료를 수집하는 데 있었다. 
또한 훗날 미국 경제학자 헨리 조지의 토지공유제 사상에 심취한 톨스토이는 
농민들이 토지를 공유하는 농장을 만들고, 소설 <부활>에서 
주인공 네흘류도프를 통해 그의 사상을 드러내기도 한다.

 

Leo Tolstoy in the forest. 숲에서 휴식을 취하는 톨스토이. 1890. 
by Ilia Repin. oil on canvas. 50 X 60 cm.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나무 그늘 아래 편안하게 누워 책을 읽는 톨스토이의 모습은 
지금까지 우리가 상상했던 엄격한 작가의 모습이 아닌 

옆집 할아버지 같은 친근함을 보여준다.  
러시아 국민화가 레핀이 프랑스와 이탈리아 체류 시절 경험했던 

야외의 빛을 화폭에 담아내는 기법이 살짝 보이는 이 작품에는 

러시아 미술계의 톨스토이로 불렸던 
일리야 레핀의 대문호에 대한 존경심과 친분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이 그림의 색채는 다분히 안상주의의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톨스토이와 레핀이 친교를 맺은 것은 1880년 모스크바에 있는 레핀의 아틀리에서이다.
레핀과 톨스토이는 서로 멀지 않은 곳에 살았으므로 종종 만나서
한적한 모스크바의 골목길을 산책하며 뜨거운 논쟁을 벌이곤 했다.
레핀은 여러차례 톨스토이의 영지 야스나야 폴라야에 머물렀으며
그때마다 레핀은 이 위대한 작가나 그 가족을 그리는 데 몰두했다.
이들의 우정은 톨스토이가 사망할 때까지 30년 간이나 계속되었다.

 

Portrait of Leo Tolstoy. 레오 톨스토이 초상화. by Ilia Repin. oil on canvas.

서른넷 노총각 레프 톨스토이는 1862년 궁정 의사의 딸인 
소피야 안드레예브나 베르스(Sophia Andreevna Behrs)와 결혼한다. 
청혼한 지 일주일 만이었고 신부 나이는 열여덟 살에 불과했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남녀 간의 결혼은 당시 러시아 사회에서 흔한 일이었다. 
<죄와 벌>의 작가 도스토옙스키만 하더라도, 그가 안나 그리고리예브나와 

재혼했을 때 둘은 나이 차이가 무려 스물다섯이나 났다. 
여담이지만, 동시대에 활동했던 도스토옙스키와 톨스토이 두 문호가 
한 번도 만남을 가진 적이 없다는 사실은 놀랍다. 

청혼 전 베르스 집안의 영지를 방문했을 때, 톨스토이는 

소설 <안나 카레니나>에 나오듯이 소냐 (소피야)와 카드 상자를 앞에 두고

낱말 첫소리 잇기 놀이를 했다고 한다. 
두 사람은 순간적인 끌림이 있었을지언정 서로를 알아가고 
사랑이라는 감정이 싹틀 겨를도 없이 결혼에 골인한 셈이었다. 
톨스토이에게 결혼은 어지러운 생활을 마감하는 구원의 수단이기도 했다. 

그는 결혼 전날 자신의 일기장을 신부에게 공개하는 무모한 짓을 벌인다. 
신랑의 일기를 읽고서 어린 새댁은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는 도박에 빠져 빚을 진 일을 포함하여, 열네 살 때 창녀와 가진 첫 성 경험, 
영지에 사는 농부 아낙과의 육체 관계를 비롯한 여성 편력 등 
과거 성적 방탕과 온갖 치부가 낱낱이 기록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톨스토이는 일기에서 젊은 유부녀에게 성적으로 계속 끌리는 자신을 ‘짐승’으로 
그녀를 ‘악마’로 표현했다(이때 이야기는 〈악마〉라는 미발표 단편에 실린다). 
소피야는 남편의 옛 정부(情婦)인 아낙이 자기 집에서 

하녀로 일하는 명랑하고 뚱뚱한 여자이고 심지어 그녀가 

남편의 아이까지 가졌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부적절한’ 관계로 태어난 서자(庶子)는 나중에 
적자(嫡子)들의 마부로 일하며 집안에 남아 있게 된다. 
표도르 도스토옙스키의 장편소설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에 나오는 사생아 
스메르쟈코프가 카라마조프 가(家)의 하인 겸 요리사로 살았듯이 말이다.

일기 공개가 톨스토이 자신에게는 지난날 잘못을 청산하고 
안정된 삶을 새로이 꾸리며 거듭나려는 대단한 결심이었을지 모르지만, 

부인 소피야에게는 의심과 다툼으로 점철되는 악몽 같은 

결혼 생활의 개시를 알리는 신호탄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톨스토이 부부는, 그중 다섯이 아주 어릴 때 죽기는 했으나 

자녀를 열셋이나 낳아 길렀고, 톨스토이가 외딴 역에서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결혼 생활을 48년 동안이나 지속했다. 
남편보다 열여섯 살 어린 아내로서는 복잡하고 까탈스러운 성격을 지닌 
톨스토이가 이해할 수 없는 사람으로 보였을 터이다. 
이상주의자인 작가 남편을 뒷바라지하려다 보니 

그녀는 어쩔 수 없이 현실주의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남편과 자주 싸우기는 했으나 소피야는 차라리 평범하고 헌신적인 아내에 속했다.

두 사람은 결혼 후 20년 가까이는 그런대로 온전하고 원만해 보이는 가정을 이루었다. 
소피야는 이곳에서 남편을 대신해 영지를 관리하고 

원고를 정리하는 등 내조에 힘을 쏟았다. 
둘 사이에서 13명(9남 4녀)의 자녀들이 탄생한다. 
다섯 명 (4남 1녀)은 어린 시절에 사망했고 총 8명 (5남 3녀)이 생존했다. 

레프는 1881년 (53세)에 아이들 교육을 위해 모스크바에 집을 사 들여 겨울을 보냈다. 
겨울만 보내고 그는 빨리 이곳으로 돌아왔다. 
그러니 그는 거의 평생 이곳에서 살았다고 해야 한다. 
레프는 영지 개발에 심혈을 기울였다. 

당시 이 영지는 약 5백만 평(1,600헥타르)에 이르렀다. 
영지 윗 부분에는 고밀도의 원시림과 4개 연못, 
약 350명의 소작농이 살았으며 농민의 집이 네 군데 있었다. 
할아버지의 사과 과수원을 넓혔다. 
원래 정원의 면적은 4배나 늘어났고 총 5개의 정원이 있었다. 
레프는 오전 7시에 기상 후 공원을 걷는 등 운동을 했고 이 후 시간에 글쓰기를 했다. 
곡물 수확기에는 농부들과 함께 밭에서 일했다. 
그는 농부 자녀를 위한 학교를 만들어 아이들을 가르쳤다. 

 

<안나 카레니나>를 발표한 1878년을 전후로 해서 흔히 톨스토이의 작품 세계를 전기와 후기로 나누는데, 
부부 사이 역시 <안나 카레니나>를 쓰던 무렵부터 톨스토이가 ‘중년의 위기’를 겪으며 크게 변화한다. 
그때까지만 해도 소피야는 자식들을 돌보고 집안일을 챙기면서 
작가 남편의 비서와 편집자 역할을 마다하지 않았다. 

결혼 이듬해인 1863년부터 집필을 시작해 1869년 발표한 <전쟁과 평화>만 해도, 
톨스토이가 악필로 갈겨쓴 방대한 분량의 원고를 아내 소피야가 여러 번 읽고 
정서해서 옮겨 쓰는 과정을 거쳐 완성되었다. 
그녀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전쟁과 평화>나 <안나 카레니나> 같은 대작이 
제때 나오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도박벽과 간질병에 시달리던 도스토옙스키를 구원한 아내 안나처럼. 
적어도 결혼 초기에 소피야는 ‘내조의 여왕’이었던 셈이다.

 

Leo Tolstoy reading. 1891. by Ilia Repin. pencil. 24 X 33 cm.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

 젊은 시절부터 톨스토이는 외모 콤플렉스에 시달렸고 허위로 가득한 사교계를 싫어했다. 
톨스토이에게 남녀의 사랑은 육체적 욕망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육체에 탐닉하면서도 육체를 경멸했고 여자를 좋아하면서 여자를 증오했다. 
그의 소설 속에서도 외적인 매력에 홀려 빠져든 사랑은 결국 비극으로 끝나는 것으로 그려진다. 
사교계에서 잘나가는 훤칠한 사내들은 몰락하고, 
육체적인 아름다움을 지닌 여자들은 대체로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전쟁과 평화>의 엘렌, <안나 카레니나>의 안나, 

〈크로이체르 소나타〉의 포즈드니셰프의 아내처럼, 사고사나 자살 혹은 타살로

반면, 어쩌면 당연하게도, 톨스토이 자신의 경험과 이념을 반영한 

주인공은 긍정적인 인물로 표현된다. 
<전쟁과 평화>의 피에르 베주호프, <안나 카레니나>의 레빈, 
(‘레빈’은 톨스토이 자신의 이름 ‘레프’에서 따왔다), 

<부활>의 네흘류도프 등과 같이.

사랑과 결혼에 관한 톨스토이의 생각은 세월이 흐를수록 비관적으로 바뀐다. 
<안나 카레니나>에서는 네 가지 유형의 커플과 가정을 보여준다. 
돌리와 스티바(스치바)​ 오블론스키 커플은 흔히 볼 수 있는 현실적인 유형의 부부이다. 
바람피운 남편이 밉지만 커가는 아이들을 생각해서 적당히 타협해서 살아간다. 

카레닌과 안나는 진작 갈라서고도 남을 법한데도 사회적 체면과 

아들 양육권 때문에 이혼하지 못하는 ‘쇼윈도 부부’에 불과하다. 
카레닌은 ‘오쟁이진’ 늙은 남편일 뿐 악인은 아니다. 
그는 안나가 낳은 브론스키의 딸을 자기 딸로 받아들인다. 

안나와 브론스키는 달려오는 기차처럼 본능에 충실한 열정적인 커플이다. 
안나의 육체에 충만한 활기와 솔직함은 브론스키를 매혹하지만 

또한 그것은 집착으로 바뀌어 브론스키의 마음을 떠나게 한다. 
진정 어린 사랑도 언젠가는 변하기 마련이다. 
백작 부인 안나는 사회로부터 지탄을 받지만 

청년 장교 브론스키는 오히려 상탄을 누린다. 
둘의 사랑은 운명적으로 시작해 비극적으로 끝나는 사랑이다. 

안나와 브론스키의 사랑이 육체적 사랑이라면 

키티(키치)와 레빈의 사랑은 정신적 사랑에 가깝다. 
키티와 콘스탄친 레빈은 어찌 보면 차선책으로 맺어진 짝이다. 
처음에 레빈은 키티에게 청혼했다가 거절당하고, 키티는 브론스키가 안나에게 
빠져 있다는 걸 알고 나서야 레빈의 두 번째 청혼을 받아들이니 말이다. 
레빈은 톨스토이의 분신으로서 작가의 이상을 실현하는 인물이다. 
그는 상류층 사교계를 멀리한 채 농지 경영에 전념하며 육체노동을 즐긴다. 
키티는 그런 레빈에게 의지하며 검소하게 생활한다. 
하지만 이들을 이상적인 커플이라 부르기에는 뭔가 석연치 않은 면이 느껴진다.

톨스토이가 결혼 전에 쓴 〈가정의 행복〉(1859)에는 가정에 대한 환상과 기대가 남아 있다. 
그러나 그는 30년 뒤 〈크로이체르 소나타〉(1889)라는 중편 소설에서 질투에 눈먼 나머지 
아내를 살해하는 남자를 등장시켜 결혼 생활의 완전한 파탄을 선언한다. 
살인자의 인생 고백이라는 형식을 빌어, 육체적인 욕망만 있을 뿐 
낭만적 사랑이란 없으며 결혼은 구속이라 말한다.

“얼마나 지속되느냐고요? 아주 오랫동안이죠. 어떨 때는 평생이 되기도 하고요.” 
어깨를 으쓱하며 부인이 대답했다.

“그건 소설에나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현실에선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현실에서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특별하게 좋아하는 시간은 아주 드물지만 일 년 정도고, 
보통은 몇 달, 몇 주, 며칠, 또는 몇 시간이죠.” 

그는 자신의 의견에 모두가 놀랐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 같았지만 만족스럽게 말했다.

“그건 완두콩 깍지 속에 훌륭한 완두콩 두 알이 

나란히 들어 있을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게다가 이것은 믿어지지 않는다는 문제만이 아니라 권태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평생을 한 여자 또는 한 남자만 사랑한다는 것은 

양초 하나가 평생 탄다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Leo Tolstoy working at the round table. 1891. by Ilia Repin. Private collection

나는 언제가 죽는다. 그렇다면 삶은 무의미한 것인가? 
5년의 각고 끝에 탈고한 <안나 카레니나>는 톨스토이를 

명실공히 러시아 최고 작가 자리에 올려놓았다. 
그런데 드넓은 영지에서 나오는 부와 위대한 문학가라는 명예를 함께 누리며 
남부러울 것 없는 가족을 꾸린 지주 귀족에게 어느 날 깊은 회의와 의혹이 찾아든다. 

나는 누구고 왜 여기에 있는가, 

삶이란 무엇이고 죽음이란 또 무엇인가, 
행복이란 무엇인가, 

왜 살아가야 하며 어떻게 사는 것이 옳은 삶인가 

따위 물음이 그를 괴롭힌다. 


이런 의문에 답을 얻으려고 그리스도교는 물론이고 

이슬람교, 불교, 동양 사상 등을 포함한 
종교, 철학, 과학, 문학, 역사 저작들을 두루 탐독한다. 
자신의 삶을 철저히 돌아보고 반성한다. 

이른바 ‘회심(回心)’으로 불리는 정신적 위기, 

내면적 방황의 시기가 찾아온 것이다. 
사실 이러한 고민과 의문은 그가 젊었을 때부터 품어왔던 생각이었으나, 
1881년 겨울 모스크바 주민조사 작업에 참여해 빈민굴을 구석구석 둘러보고 
그곳 사람들의 비참한 생활상과 마주친 일이 회심의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참회록>을 완성한 1882년을 기점으로 톨스토이는 예술가, 소설가에서 
사상가, 설교가, 도덕가로 변모한다.

이후 그는 인생과 종교, 철학을 논하는 저술을 집필하는 데 전념한다. 
소설을 쓰더라도 장편 대작보다는 교훈을 담은 중단편이나 우화 위주였다. 
후기 작품으로는 〈사람은 무엇을 사는가〉, 〈이반 일리치의 죽음〉, 〈하지 무라트〉, 
〈크로이체르 소나타〉, 〈신부(神父) 세르게이〉, 희곡인 〈산송장〉 등을 꼽을 수 있다. 

1887년에 나온 <인생론>은 ‘신의 말이 없고 인간의 이성 만을 강조하여 교회와 교의에

불신을 일으킨다’는 이유로 검열 당국으로부터 판매 금지 처분을 받았다. 

말년 역작인 <부활(1889)>은 당시 탄압을 받던 두호보르교도의 
캐나다 이주 비용을 대주기 위해 잡지에 연재한 작품이다. 
<부활>에서 교회와 사법제도를 비판한 톨스토이는 1901년 
러시아정교회 종무원으로부터 ‘사이비 교주’로 찍혀 파문을 당했다.

‘회심’ 또는 ‘변심’ 이후 톨스토이는 자신의 이전 삶을 통째로 거짓이라 선언한다. 
타락한 그리스도교를 비판하고 원시 그리스도교로 돌아갈 것을 주장한다. 
또한 예술을 부정하고 가족을 기만의 산물로 여겼다. 
<예술이란 무엇인가 (1898)>에서 그는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니나>를 비롯하여 
자신에게 명성을 안겨준 모든 소설을 거부하고, 우리가 불후의 명작으로 알고 있는 
거의 모든 예술 작품과 예술가를 싸잡아 비난하기에 이른다. 


예를 들면, 셰익스피어의 희곡, 미켈란젤로의 미술, 보들레르의 상징주의 시, 
바그너의 악극, 베토벤의 후기 음악 등을 나쁜 예술로 규정했다. 
대부분의 예술은 선한 감정을 불러일으키지 못하고 사람들을 타락시킨다고 여겼다. 
농부들이 일하며 어울려 부르는 노래가 
아무런 감정도 감염시키지 못하는 베토벤 소나타 연주보다 낫다고 주장했다.

그는 술 담배를 끊고 채식을 고집했고, 시골에서 소박하고 검소하게 살기를 바랐다. 
문명을 멀리하고 자연, 도덕, 영혼에서 인생의 의미를 찾고자 했다. 
급기야 재산과 저작권을 포기하고 농부로 살겠노라고 

폭탄선언을 하는 바람에 부인 소피야를 분노케 했다. 
‘인류의 위대한 스승’을 만나려고 그의 제자를 자처하는 사람들이 
러시아와 세계 각지에서 야스나야 폴랴나로 몰려든 탓에 부부의 불화는 더욱 심해졌다.

 

Portraits Study, by Ilia Repin. 

톨스토이는 생애 후반기 들어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힌다. 
기실 그는 살아오며 주변에서 많은 죽음과 마주했고 

평생토록 삶과 죽음에 관한 사유에 몰두했다. 
앞서 이야기했다시피, 어머니는 어린 레프를 남겨두고 일찍 세상을 떠났고 
아버지는 여행 중에 갑작스레 사망했다. 
톨스토이는 아버지의 죽음을 인정하지 못하고 

아버지를 찾는다며 모스크바 거리를 돌아다녔다고 한다. 
또한 그는 자기 자녀 가운데 다섯 아이를 잃었다. 
특히 막내아들 이반이 일곱 살로 죽었을 때는 너무나 슬퍼했다고 한다. 

크림 전쟁에 참전해 살육의 현장을 뛰어다녀야 했다. 
파리 여행 때 기요틴에 목이 잘린 남자를 눈앞에서 보고 끔찍함에 치를 떨었다. 
그는 1856년에 셋째 형 드미트리, 1860년에는 맏형 니콜라이를 병으로 잃었다. 
그는 형 니콜라이의 병세가 날로 악화되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봐야 했다. 
톨스토이가 느지막한 나이에 결혼을 서두른 것은 
우애가 남달랐던 형 니콜라이의 죽음으로 말미암은 충격 탓도 있었다.

<유년 시절>, <전쟁과 평화>부터 <안나 카레니나>, 〈세 죽음〉, 〈광인의 수기〉, 
〈이반 일리치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톨스토이는 여러 소설에서 죽음을 다루었다. 
〈세 죽음〉에서 귀부인(여지주)과 마부와 나무의 죽음. 
<안나 카레니나>에서 레빈의 형 니콜라이의 죽음과 불륜녀 안나의 자살, 
〈이반 일리치의 죽음〉에서 잘나가던 판사의 죽음…. 

그 가운데 중편 〈이반 일리치의 죽음〉(1886)은 인간의 삶과 죽음에 관한 탐구서라 할 만하다. 
톨스토이가 <안나 카레니나>에서 여성 심리 표현의 대가였다면 
〈이반 일리치의 죽음〉에서는 죽음 분석의 달인이었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중점적으로 들여다보기 전에 
다른 작품에 나타난 죽음이라는 사건을 살펴보자.

지주 톨스토이는 1869년 8월 말, 매물로 나온 영지를 보러 여행을 떠났다. 
결혼으로 생활에 안정을 찾았고 그해 발표한 <전쟁과 평화>가 
큰 성공을 거두어 명성까지 얻은 시절이었다. 
도중에 피곤함을 느낀 그는 아르자마스라는 마을에서 하룻밤 쉬어가기로 했다. 
어느 여관방에 여장을 풀고 몸을 누였으나 잠을 이루지 못했다.

 ‘온통 흰색으로 칠해진 사각형의 작은 방’에 홀로 누워 있자니 
느닷없이 알 수 없는 두려움이 밀려왔다. 
그건 으스스함, 낯선 친밀함, 낯익은 두려움으로 번역되는, 프로이트가 말한 
‘운하임리히(unheimlich)’한 감정이었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죽음이 속삭이는 소리였다. 

톨스토이는 이때 엄습한 우울과 공포의 감정을 
15년 후에 〈광인의 수기〉라는 미완성 단편에 남겼다. 
〈광인의 수기〉에서 ‘광인’이 여관방에서 느낀 서늘한 공포는 
훗날 눈 덮인 숲속으로 사냥 나갔다가 길을 잃으면서 증폭되어 다시 나타난다.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을 덮어버리는 흰색은 죽음을 암시하는 듯하다. 
〈광인의 수기〉는 〈이반 일리치의 죽음〉의 예고편이라 할 수 있다. 

톨스토이는 〈광인의 수기〉에서 죽음의 공포가 유발한 우울증을 이렇게 묘사했다.
"나는 왜 여기에 왔을까.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뭐가 그토록 두려워 도망치려 하는 걸까. 
도대체 어디로 도망치려 하는 걸까. 
무언가 끔찍한 것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은데, 도망칠 수가 없다. 
나는 언제나 나다. 그런데 나를 괴롭히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이다."

"삶에는 아무것도 없고 오로지 죽음만이 있을 뿐이다. 
하지만 절대로 그래서는 안 된다. 
나는 내 관심사, 즉 구입하려는 영지나 아내에 대해 생각해보려 했지만 
그 어떤 생각도 즐겁기는커녕 그저 무의미하기만 했다. 
내가 점점 죽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너무나 끔찍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 죽음이 끔찍한 것인 줄 알았는데, 삶을 떠올리며 생각해보니 끔찍한 것은 죽어가는 삶이었다. 
어쩐 일인지 삶과 죽음이 하나로 뒤엉켰다."

<안나 카레니나>의 주인공 레빈은 톨스토이를 대신해서 
죽음이라는 난제를 두고 답을 구하려 애쓰는 인물이다. 
총 8부로 구성된 <안나 카레니나>에서 유일하게 

표제가 붙은 장(章)이 하나 있는데 그 제목이 ‘죽음’이다. 
톨스토이가 형의 죽음으로 괴로워했듯이, 레빈은 형의 임종을 지키며 
이해할 수 없고 그렇다고 피할 수도 없는 죽음 앞에 고뇌한다. 
그는 유한한 삶에 허무를 느끼며, 심지어 죽음 자체에 혐오를 드러낸다. 
죽음 탓에 행복할 수 없고, 죽음은 그동안 쌓아온 

모든 업적과 열망을 무(無)로 돌려버리기 때문이다.

형의 모습과 죽음의 접근은 레빈의 영혼 속에 

형이 찾아온 그 가을밤에 자기를 사로잡았던 불가해함에 대한 공포, 

죽음의 접근과 불가피함에 대한 공포를 다시 불러일으켰다. 
지금 그 감정은 예전보다 더욱 강렬해졌다. 
그는 자신이 예전보다 죽음의 의미를 더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죽음의 불가피함이 더욱 두렵게 보였다. 
하지만 지금은 아내가 옆에 있어 준 덕분에 그러한 감정도 그를 절망으로 이끌지는 못했다. 
그는 죽음이 존재한다 할지라도 살고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사랑이 그를 절망으로부터 구원했다는 것, 
그 사랑이 절망의 위협 아래서 더욱 강해지고 순수해졌다는 것을 느꼈다.

<안나 카레니나>의 레빈은 자신이 
"무한한 시간과 공간 속에서 잠시 버티다가 터져버리는 거품 같은 유기체"
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자살 욕구에 시달린다. 
죽음에 대한 생각이 불러온 삶에 대한 회의 때문이었을까, 
톨스토이는 가출만큼이나 자주 자살을 생각했다. 
그래서 충동적으로 자살을 시도하지 않도록 밧줄이나 노끈 따위를 치워버리고 
좋아하던 사냥도 그만두었다. 
삶을 제대로 정리하지 않고서는 죽을 수 없다는 생각에 자살을 미루었다. 
이것은 <참회록>(고백록)​에서 묘사한 톨스토이의 모습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은 거짓일 뿐 아니라, 어떤 사악한 힘, 사악하고 협오스럽고 
절대 굴복해서는 안 되는 힘의 잔인한 조롱이었다.
그 힘에서 벗어나야 했다. 그리고 그것은 각자의 손에 달려 있었다. 
악에 대한 그런 종속을 끊어야 했다. 그리고 한 가지 방법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죽음이었다.

그래서 행복한 가정을 가진 건강한 인간 레빈은 자신의 목숨을 매지 않도록 끈을 숨기고 
자신에게 총을 쏠까 봐 총을 들고 다니는 것조차 두려워할 만큼 수차례 거의 자살 직전까지 갔다.
하지만 레빈은 총으로 자살하지도 않고, 스스로 목을 매지도 않고 여전히 살아가고 있었다.

"내가 서둘러 자살하기를 원치 않았던 까닭은 일단 먼저 최선을 다해 
이 모든 현상의 원인을 규명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만약 그것을 밝히지 못한다면, 그때 자살해도 늦지 않으리라 스스로를 다독였던 것이다. 
그 당시 그야말로 행복한 사람이었던 나는 매일 밤 혼자 남게 되는 방 안에서 

옷을 갈아입다가 선반과 선반 사이의 횡목에서 목을 매는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방에 있는 끈들을 모두 치워버려야 했다. 
그리고 너무나도 순식간에 나의 생명을 제거하고픈 유혹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총기를 들고 사냥에 나가는 것도 그만 두었다. 
나 자신도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몰랐다. 
나는 삶을 두려워하고 삶에서 벗어나려고 애를 쓰면서도 
여전히 삶 속에서 무언가를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내 소피아와 가족들

아내 소피아와의 사이에서 13명의 아이들을 두었고 그 중 다섯은 어린 시절에 죽었다.
하지만 사실 톨스토이에겐 또 다른 아이가 있었다.
자신의 하녀였던 아크시니야 바지키나가 낳은 사생아 아들이었지만,
어쨌든 자식은 자식이었다.

티모페란 이름의 이 아이는 마구간 지기, 산지기로 평생을 살았다.
이 사실은 톨스토이가 부부 사이에 비밀은 없어야 한다며
자신의 옛 여자관계를 비롯한 자신의 15년 간의 과거를 적은 일기를
아내에게 보여줘서 아내도 알고 있었다고 한다.

도박으로 수많은 재산을 날렸고 온갖 여자들, 집시, 창녀,
어머니 친구들의 농노들과 관계한 사실은 물론
사생아까지 있다는 사실들이 낱낱이 적혀 있었다.

톨스토이는 이런 자신의 모습을 안나 카레니나 속 레빈이란 인물에 투영한다.
레빈이란 인물 역시 자신의 더럽고 방탕한 과거와 무신앙을 고백한 일기장을
키티에게 건네고 용서받는다.

그외에 톨스토이는 자신의 젊은 시절의 방탕과 무신앙에 대해
처절하게 회개한 참회록을 남겼고 그의 참회록은
성 어거스틴, 루소의 참회록과 더불어 세계 3대 참회록으로 꼽힌다.

이런 독특한 남편 때문에 소피아는 대단히 힘든 삶을 이어가야 했다.
유모도 없이 혼자서 13명의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것은 물론
톨스토이의 글을 일일이 읽고 필체를 교정하는 작업을 맡아야 했다.

게다가 노년에 겨우 대문호의 아내로서 편안하게 사는가 했더니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갑자기 남편이 모든 재산을 버리고
뛰쳐나가려 하니 분통이 터질 만도 하다.

또한 톨스토이가 지나치게 대문호로 추앙받은 나머지
소피아는 소크라테스의 아내인 크산티페처럼
'위대한 남편을 이해하지 못한 악처' 취급을 받기도 했다.

그의 목가적 정신이 담긴 소설 작품들이나 소설책 표지나 속표지에서 볼 수 있는
수염이 성성한 푸근하면서도 카리스마 넘치는 할아버지와도 같은 인상과는 달리, 
청장년기는 매우 개인주의적이며 강한 성욕으로 유명했다.

그의 부인은 결혼 초기 10여 년간 임신 상태가 아닌 기간이 거의 없었다.
이와 같은 그의 정신적 사상과 행동간의 괴리는 톨스토이를 연구할 때
관심있게 보는 주제 중 하나이다. 간단하게 말하면 성경의 돌아온 탕자.

그러나 노년기에 처절한 참회를 거쳐 올바르고 깨끗하게 살아온 것도
위선적이라는 이야기와 그의 극단적인 기독교적 아나키즘 사상 때문에
인격파탄자라는 비난도 들었다.
그리고 그의 철저한 성차별적인 사상도 아울러 비판받고 있다.

슬하에 13명의 자녀를 두었던 톨스토이 부부 

톨스토이는 <참회록>에서 동양에 전해지는 우화라며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다.  
그것은 불설(佛說) 비유경(比喩經)에 나오는 안수정등(岸樹井藤) 이야기이다.  
안수(岸樹)는 강기슭의 나무 즉 절벽의 나무, 

정등(井藤)은 우물 속의 등나무 덩굴을 말한다.  
조금 길지만 여기서는 안수정등을 원문에 가깝게 인용해 본다. 

"한 나그네가 넓은 들판에서 놀고 있는데 난데없이 불길이 일어나 

에워싸는가 싶더니 코끼리 한 마리가 나타나 미친듯이 쫓아왔다.  
코끼리를 피해 달아나다 보니 등나무가 덩굴을 늘어뜨린 우물에 이르렀다.  
그는 덩굴을 붙들고 우물 아래로 내려갔다.  
그런데 우물 밑에는 독룡(毒龍) 세 마리가 커다란 입을 벌리고 기다리고 있었고  
위를 올려다보니 독사 네 마리가 혀를 날름거리고 있었다.  
내려가지도 올라가지도 못하고 등덩굴을 생명줄 삼아 중간에 매달려 있자니,  
설상가상으로 흰 쥐와 검은 쥐가 번갈아 가며 덩굴을 쏠아대는 것이 아닌가.  
만일 쥐가 갉아먹어 넝쿨이 끊어지거나, 팔 힘이 빠져서 아래로 떨어지면  
독룡들에게 잡아먹히는 수밖에 없는 신세다.  
그때 등나무에 매달린 벌집에서 꿀물이 떨어져 입 안으로 흘러들었다.  
그렇게 한 방울, 두 방울, 다섯 방울, 꿀을 받아먹는 동안 

그는 위태로운 처지도 잊고 황홀경에 빠졌다.  
나그네는 달콤한 꿀맛에 취해서 그만 자신이 우물 절벽에 매달려서  
코끼리를 피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리고, 흰 쥐와 검은 쥐가  
덩굴을 갉아먹어 언젠가는 떨어져 용의 밥이 되리라는 것도 잊어버리고,  
오히려 조금이라도 더 많은 꿀을 먹으려고 덩굴에 연결된 벌집을 

흔들어 보기도 하지만 그럴수록 벌집에 있던 벌들만이 날아들면서 쏘아대곤 하였다." 

슬하에 13명의 자녀를 두었던 톨스토이 부부 

불교식으로 보면, 불길은 ‘욕망’, 코끼리는 ‘죽음의 운명’, 

등나무 덩굴은 ‘목숨’, 흰 쥐와 검은 쥐는 ‘낮과 밤’ 즉 세월, 

독룡 세 마리는 ‘탐 · 진 · 치의 삼독(三毒)’ 즉 번뇌,  
독사 네 마리는 ‘지 · 수 · 화 · 풍의 사대(四大)’,  
다섯 방울의 꿀은 ‘재물욕, 성욕, 식욕, 명예욕, 수면욕의 오욕락(五欲樂)’을 가리킨다.  
한마디로, 안수정등 설화는 다가오는 죽음 앞에서도 욕망에 목을 매는  
어리석은 인간을 비유한 이야기이다.  
<참회록>에서 톨스토이는 자신의 인생을 이 설화에 나오는 나그네의 처지에 비유했다. 

"나 역시 나를 갈기갈기 찢으려고 기다리고 있는 죽음이란 뱀으로부터  
도저히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 인생이란 가지를 붙잡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내가 왜 이런 고통 속에 빠지게 되었는지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 채  
나는 지난날 나에게 위안을 준 꿀을 핥아먹으려고 애쓰고 있었다.  
하지만 그 꿀도 이제 더 이상 기쁨을 주지 못하고, 하얀 생쥐와 검은 생쥐가  
밤낮을 가리지 않고 내가 매달려 있는 가지를 갉아먹고 있는 것이다.  
내 눈에는 뱀이 뚜렷이 보이고, 꿀은 이미 단맛을 잃었다.  
내 눈에 보이는 건 오직 피할 길 없는 뱀과 생쥐들뿐이고, 

그것들로부터 도저히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이것은 단순한 우화가 아니다.  
이것은 반박의 여지가 없는, 누구나 수긍할 수밖에 없는 참된 진실인 것이다." 

 

톨스토이와 아내 소피아

 

이 사진을 보면 아내 소피아와의 갈등으로 인해

야스나야 폴라냐의 집에서 가출했다가 시골 간이역 아스타포 보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톨스토이의 최후가 떠오른다.
톨스토이는 엄청난 영지를 가진 부유한 귀족(백작)이었으나 

말년에 토지사유제도의 폐지를 주장하면서 자신의 땅을 비롯한 전 재산을 

농민 등에게 나눠주려고 했고 소피아는 극력 반대했다. 
“재산을 모두 다 나눠주면 남은 가족은 어떻게 사느냐”는 거였다. 

하지만 소피아를 비난할 수는 없는 일이다.
소피아는 여자로서 아내로서 또 자녀들의 어머니로서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러한 갈등 상황 속에서 톨스토이가 몰래 집을 나왔다가 며칠만에 죽었기 때문에 
소피아는 종종 악처로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소피아는 톨스토이와의 사이에 13명의 아이를 낳았고(이중 8명만 성장함), 
톨스토이가 <전쟁과 평화>를 쓸 때 7번이나 정서를 하는 등 
평생 톨스토이의 작품 활동을 헌신적으로 도왔다. 
그러나 톨스토이가 말년에 요구했던 전 재산의 포기는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톨스토이의 무덤은 저택에서 10분 남짓 걸리는 영지 안의 숲 속에 있다. 
가는 길에는 중간 중 간 화 살 표지가 서 있었으나 정작 무덤 앞에는 
손가락 굵기 정도의 나뭇가지를 휘어 공원의 꽃 밭에서 흔히 보는 반원형의 
낮은 울타리를 쳐 놓았을 뿐 비석이고 뭐고 아무 표시도 없었다. 
파란 잔디에 덮인 길다란 관모양의 직육면체 흙 더미가 무덤임을 말해주고 있을 뿐이었다.

톨스토이 사망 초기에는 무덤 주위에 나지막한 나무 울타리가 쳐져있었다고 하는데 
언제부터 인가 지금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부인 소피아의 무덤은 영지 인근 코차코프스 키의 톨스토이 가족 묘지에 따로 있다고 한다.

 


<참회록>에는 자살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고 여겼던 톨스토이의 내적 고뇌가 담겨 있다. 
그는 <참회록>을 쓰며 자신의 지난 인생을 되새기고,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고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해답을 탐구했다. 
톨스토이는 <참회록>을 출간하고 4년 후에 <참회록>의 소설적 표현이라 할 수 있는 
〈이반 일리치의 죽음 Смерть Ивана Ильича〉을 발표한다. 
삶과 죽음에 관한 성찰을 담은 〈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톨스토이의 중단편 가운데 
가장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는 작품이다.

소설은 이반 일리치의 부고(訃告)를 접한 지인들 반응을 보여주며 시작한다. 
동료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서 사람들이 먼저 떠올린 것은 애도의 감정이 아니라 
그가 자리를 비움으로써 가능해진 인사 이동이나 승진에 대한 기대이다. 
그들은 마치 죽음이란 자신들에게는 일어나지 않을 재난이라는 듯 행동한다. 
오히려 죽음이 자신은 피해 갔다는 데서 ‘모종의 기쁨’마저 느낀다.

상갓집 문상은 어쩔 수 없이 치러야 하는 체면치레에 지나지 않는다. 
이반 일리치의 부인은 울음을 터뜨리는 와중에도 조문객을 불러 물어볼 정도로 
남편 사망 시 나오는 국가 지원금을 더 받을 낼 방법이 없을까 궁금해 하고, 
이반 일리치의 가장 친한 친구라는 조문객은 이날 저녁 

동료들과 벌일 카드놀이에 늦을까 봐 그게 걱정이다. 
이반 일리치의 친구들이 보인 행태는 이반 일리치의 예전 모습일지도 모른다. 
직장 동료의 불행이 자신에겐 다행으로 다가오고, 
가족 친지의 죽음에서 재산 상속이나 보험금을 떠올리며, 
장례식장조차 친교의 장소로 활용하는 것은 오늘날 우리 세태이기는 마찬가지다.

동료의 죽음이 사람들의 머릿속에 불러일으킨 것은 그로 인해 가능해진 
자리 이동이나 직위 변경에 대한 생각만은 아니었다. 
그들은 가까운 지인의 사망 소식을 접하면 으레 그렇듯이 
죽은 것은 자기가 아닌 그 사람이라는 데에서 모종의 기쁨을 느꼈다.

“어쩌겠어, 죽은 걸. 어쨌든 나는 아니잖아.” 
모두들 이렇게 생각하거나 느꼈다.

 필립 로스의 소설 <에브리맨>에서도 위 구절과 비슷한 대목이 나온다. 
<에브리맨>은 보석상 아들로 태어나 화가가 되고 싶었으나 
광고 회사 아트디렉터로 살았던 한 이름 없는 남자의 ‘늙고 병들어 죽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가장 가슴 아린 것, 모든 것을 압도하는 죽음이라는 현실을 
한 번 더 각인시킨 것은 바로 그것이 그렇게 흔해빠졌다는 점이었다. 
몇 분이 안 되어 모두 가버렸다. 
지친 표정으로 눈물을 흘리며 우리 종(種)이 가장 좋아하지 않는 활동으로부터 떠나가 버렸다. 
그리고 그는 뒤에 남았다. 
물론 다른 누가 죽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많은 사람들이 비통해했지만, 
어떤 사람들은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거나 자기도 모르게 안도했다. 
또는 좋은 이유든 나쁜 이유든 진정으로 기뻐하기도 했다.

“이반 일리치의 삶은 지극히 단순하고 평범했으며, 그래서 대단히 끔찍한 것이었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 2장 서두를 장식하는 이 한마디로 
작가는 이반 일리치의 지난 삶을 요약해서 제시한다. 

<안나 카레니나>의 첫 문장, 
“행복한 가정은 모두 모습이 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제각각의 불행을 안고 있다”
만큼이나 인상적인 명문장이다.

단순하고 평범한 삶이었는데 왜 그게 끔찍한 것이었을까? 
이반 일리치 골로빈은 마흔다섯 나이로 사망했을 때 고등법원 판사로 재직하던 중이었다. 
지금으로 치면, 대기업 부장이나 임원, 정부 기관 고위 공무원 쯤 되는 지위에 오른 셈이다. 
마흔 다섯이면 19세기 말 당시 기준으로도 죽기에 이른, 
죽기에는 뭔가 억울할 법한 중년의 나이이다. 

그의 인생은 대체로 ‘유쾌하게’ 만사형통으로 흘러왔다. 
원인 모를 병으로 덜컥 몸져눕기 전에는 말이다. 
그는 노는 것을 좋아했지만 일할 때는 신중했고 

사교적인 자리에서는 예의 바르게 행동했다. 
자신에게 주어진 작은 권력을 누리면서도, 
자신이 약자들을 배려할 줄 안다는 사실 자체를 즐겼다. 
점차 높은 자리에 오르고 새로운 인맥을 확보하면서 그에 맞게 처신했고 
적당히 개화된 의식을 내비치며 이미지를 포장할 줄도 알았다. 
결혼에 대해 뚜렷한 생각은 없었지만 좋은 귀족 가문에 
외모도 괜찮은 아가씨를 만나 결혼했다.

이반 일리치가 이 아가씨를 사랑했고 또 인생관에 공감대가 있어서 

결혼했다고 하는 것은, 그가 속한 상류 사회가 인정해 주었기 때문에 

결혼했다고 하는 것만큼이나 편파적인 말이다. 
그는 이 두 가지 이유 모두를 고려해서 결혼했다. 
그런 아가씨를 아내로 맞이하면 자기 자신에게 이득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동시에 최상류층 사람이 바람직하다고 여겨주는 일을 한다는 뿌듯한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이반 일리치는 결혼했다.

단란한 신혼은 아내가 임신을 하면서 끝이 난다. 
아내의 짜증과 잔소리가 늘어날수록 이반 일리치는 

그것을 피해 자신의 직무로 파고들었다. 
이 소설을 쓸 무렵, 아내와의 불화에서 달아나 글을 쓰고 

이상을 실현하는 데 골몰했을 톨스토이 자신의 모습을 반영하는 듯하다. 
그가 결혼 생활에서 원하는 것은 집밥과 집안 살림과 잠자리 뿐이었다. 
그는 오로지 일 속에서 삶의 재미를 느꼈다. 
누구든 마음만 먹으면 짓밟을 수 있다는 권력 의식, 부하 직원들에게 받는 존경심, 
스스로 뛰어나다고 느끼는 업무 수행 능력과 더불어 동료들과의 수다, 
카드 게임 따위에서 즐거움을 찾았다.

그렇게 결혼 후 17년이라는 세월이 지나갔다. 
이반 일리치는 고참 검사가 되었으나 노리고 있던 

더 좋은 자리를 다른 사람에게 빼앗기고 만다. 
그는 ‘연봉 5천 루블짜리 자리’를 찾아 페테르부르크로 청탁 여행을 떠나는데, 
마침 운 좋게 인사 이동이 생기면서 높은 자리로 승진하게 된다. 
그 덕에 부부 사이에 일시적인 평화까지 찾아든다. 

이렇듯 이반 일리치에게 인생의 행복은 번듯한 자리와 두둑한 월급봉투, 
남들처럼 품위 있는 생활 같은 ‘평범한’ 것들에 있었다. 
그러던 차에, 이사를 해서 새로 구한 멋진 집에서 들뜬 기분으로 
손수 집 단장에 나선 그에게 사소한 사고가 일어난다. 
하지만 사다리에서 미끄러져 옆구리를 다친 일은 곧 잊힌다. 
시시한 친구나 친척 따위는 떼어내 버리고, 고위층 인사들을 집에 초대하고 
상류층 사교계와 교류하며 남부러울 것 없이 사노라 바빴기 때문이다.

집 단장에 완전히 사로잡힌 그는 직접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서 
가구를 이리저리 옮겨 보기도 하고 커튼을 이쪽저쪽에 고쳐 걸어보기까지 했다. 
한번은 영 말귀를 못 알아듣는 도배장이에게 커튼 다는 법을 직접 보여줘야겠다 싶어서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다가 발을 헛디뎌 미끄러진 적이 있었다. 
워낙 건강하고 민첩한 그는 다행히 균형을 잡아 많이 다치지는 않고 
튀어나온 창틀 손잡이에 옆구리를 부딪히기만 했다. 
부딪힌 곳이 욱신거렸지만 금세 나아졌다.

공무를 수행하며 느끼는 기쁨은 자존심이 충족되는 데서 오는 기쁨이었고 
사교 활동을 하며 느끼는 기쁨은 허영심이 충족되는 데서 오는 기쁨이었다. 
그러나 이반 일리치의 진짜 기쁨은 빈트 게임이었다. 

"… 그렇게 그들은 살았다. 
모든 것은 변함없이 흘러갔고, 모든 것이 매우 좋았다."

나중에야 이반 일리치는 건강이 나빠졌다는 걸 느낀다. 
몸이 아파 병원을 찾지만 의사는 타성에 젖어 
뻔한 질문만 던지고 형식적인 진단을 내릴 뿐이다. 
병원에서 환자를 대하는 의사의 태도는 
법정에서 그가 피고를 심문할 때 드러낸 방식과 놀랍도록 비슷하다. 
여기에는 교회, 병원, 법원, 정부 등 모든 제도와 

문명을 비판했던 톨스토이의 시각이 드러난다. 
이반 일리치는 여기저기 의사들을 찾아다니고 
이런저런 치료법에 관심을 기울이건만 뾰족한 해결책은 나타나지 않는다.

죽음에 관한 강의를 정리한 책 <DEATH 죽음이란 무엇인가>에서 
셸리 케이건 교수는 ‘나는 결코 죽지 않는다’라는 믿음을 논하는 장(障)에서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사례로 들고 있다. 
소설 속 이반 일리치처럼 우리는 언제가 죽을 거라고 쉽게 말하면서도 
실은 그 말을 믿으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셸리 케이건은 ‘믿음’을 의식적 믿음과 무의식적 믿음으로 구분하면서, 
의식적 차원에서 이반 일리치는 자신이 죽을 운명이라고 믿고 있지만 
무의식적 차원에서는 자신의 불멸성을 믿고 있다고 설명한다. 
그러면서 톨스토이는 이반 일리치가 아주 보편적인 인간이라는 점을 

우리에게 보여주려 했으며 대다수 우리는 그런 인간형에 속할 것이라고 밝힌다. 

이러한 논의에 들어맞는 내용이 〈이반 일리치의 죽음〉에서 
이반이 정언 삼단논법의 논리를 거부하는 대목에서 나온다. 
이반 일리치는 ‘사람은 죽는다, 카이사르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카이사르도 죽는다’라는 
삼단논법은 카이사르 같은 ‘일반적인 인간’에게나 적용되는 것이지 
자신처럼 특별한 존재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고 여긴다. 

카이사르는 필멸의 인간이라 죽는 게 당연하지만, 수많은 감정과 생각을 가진 
‘나’는 절대 죽을 턱이 없을 거라 믿고 싶어 한다. 
마치 보편타당한 진리와 개별적인 사실 간의 차이를 주장하는 듯하다. 
이반 일리치는 죽음에 대한 생각을 떨쳐버리려 법원으로 출근해 
재판 업무에 매달려보지만 예전처럼 직장 일이 그를 구해주지는 못한다. 
통증은 심해지고 짜증이 늘어 가족과 불화만 깊어진다. 
자신은 혼자 고통에 시달리는데 그를 이해해주는 사람 하나 없고 
세상은 전과 다름없이 흘러갈 뿐이다. 
‘나’라는 존재가 소멸하면 어떻게 될지 상상하니 소름이 끼칠 지경이다.

그 순간 그는 방어벽들 사이로 어슴푸레 모습을 드러낸 죽음을 보고야 말았다. 
어슴푸레 나타난 것뿐이니 곧 사라지려니 생각하면서도 
그는 무의식중에 옆구리에 신경을 집중했다. 
모든 것이 그대로였고, 옆구리가 다시 쑤시듯 아파왔다. 
그는 다시금 죽음의 존재를 잊어버릴 수가 없게 되었다. 
죽음은 꽃나무 너머로 그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이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참회록>에는 톨스토이가 소설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쓰게 된 동기를 짐작할 만한 구절이 나온다. 
‘그저 약간 거북한 느낌’이거나 ‘삶이 정지해버린 듯한 느낌’이던 것이 
‘세상에서 가장 중대한 일’ 즉 ‘죽음’으로 바뀌는 현상에 관해 적고 있다.

그렇게 삶을 살다가 오 년 전에 뭔가 몹시 이상한 일이 내게 일어나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 어떻게 살아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과 함께 

삶이 정지해버린 것 같은 느낌이 나를 덮친 것이다. 
나는 혼란에 빠졌고 우울해졌다. 
하지만 그런 상태는 곧 지나갔고, 나는 예전과 같은 생활을 계속했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이런 무력감의 순간이 

동일한 형태로 점점 더 자주 반복되는 것이었다. 
삶이 정지해버린 듯한 이 느낌은 언제나 

다음과 같은 동일한 질문을 통해 표출되고 하였다. 

“왜?”, 
“그래, 그렇다면 그다음은?”

"… 치명적인 속병에 걸린 모든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처음에는 별거 아닌 그저 약간 거북한 느낌만 증세를 보여 환자는 별반 신경을 쓰지 않다가 
이후 증세가 점점 더 반복되면서 급기야 떨쳐버릴 수 없는 고통이 된다. 
고통은 점점 커지고 어느 순간 환자는 그저 약간 거북한 느낌으로만 치부했던 것이 
세상에서 가장 중대한 일, 바로 죽음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이런 울적한 상황에서도 이반에게 위안을 주는 존재가 있다. 
바로 병든 주인의 용변을 치우는 일을 도맡아 하는, 농부 출신 하인 게라심이다. 
그는 순박하고 쾌활한 성격을 지닌 건강한 젊은이다. 
이상하게도 이반 일리치는 게라심과 함께 있으면 

통증이 누그러지고 마음이 편안해진다. 


이반 일리치가 게라심을 좋아하는 것은 그의 거짓 없음, 
남의 처지를 이해하고 가엾게 여길 줄 아는 마음 때문이다. 
가족이나 동료가 보이는 동정은 꾸며진 예절에 불과하지만 
게라심이 전하는 연민은 선량한 심성에서 우러난 것이다. 
병든 육신을 집에 남겨둔 채 화려하게 차려입고 싱싱한 몸뚱이를 뽐내며 
오페라 공연을 보러 외출하는 아내와 딸, 예비 사위보다야, 
어깨에 다리를 걸쳐 놓게 해달라는 주인의 부탁을 

흔쾌히 들어주는 하인이 더 좋을 수밖에 없으리라. 

“우리는 언젠가 다 죽습니다요. 

그러니 수고 좀 못 할 이유가 없지 않겠습니까?”라는 
게라심의 말에는 죽음을 이해하고 죽음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소박한 태도가 드러난다. 
하인이 보여주는 어찌 보면 대수롭지 않은 따뜻한 말과 행동에 주인은 감화된다.

이반 일리치에게 몸의 통증보다 더 고통스러운 것은 

주변 사람들이 던지는 뻔한 거짓말이다. 
그들은 그가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치료만 받으며 괜찮아질 거라는 식으로 빈말을 늘어놓는다. 
그는 사람들이 자신을 진심으로 동정해주길 바라면서도, 

그러한 본심을 표출하지 못한다. 
아직 자신에게조차 솔직하지 못한 상태인 것이다. 

죽음학자 퀴블러 로스의 ‘죽음의 5단계설’에 따르면 
인간의 죽음을 일생 동안 연구한 그녀는 인간이 죽음을 앞두고 
부정, 분노, 타협, 우울, 수용이라는 다섯 단계를 거쳐 임종에 이른다고 보았다. 
이반 일리치는 분노와 우울에 빠져 있고 아직 ‘수용’의 단계에 이르지 못한 것이다.

이반 일리치는 꺼이꺼이 울고 싶었고 그런 자신을 

누군가 달래주고 같이 울어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법원 동료인 셰베끄가 찾아오자, 이반 일리치는 소리 내어 울거나 
다독임을 구하는 대신 진지하고 근엄하고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기계적으로 상소심 판결의 의미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말해주고는 끝까지 그 의견을 고집했다. 
바로 이 거짓, 주변 사람들과 그 자신의 거짓이 
이반 일리치의 마지막 나날들을 해치는 가장 무서운 독이었다.

 

이반 일리치는 지난 삶을 되짚어 본다. 
어린 시절에는 좋았던 순간이 분명 있었다. 
하지만 어린 시절에서 멀어지고 현재에 가까워질수록 
기쁨은 미심쩍은 것으로 바뀌었다. 
당시엔 기쁨으로 여겨지던 많은 것들이 
이젠 모두 부질없고 추악한 것으로 변해버렸다.

삶이란 얼마나 허약한 것인가. 
쌓아온 모든 것들이 일순간 무너질 수 있는 게 삶이다. 
이반 일리치는 지금까지 삶이 잘못된 삶은 아니었는지 의심하기 시작한다. 
‘나는 뭐든지 다 제대로 했는데 어떻게 잘못 살았을 수가 있었어?’라고 반문하지만, 
(소설에서는 나오지 않으나) 그가 관료주의 매너리즘에 빠져 내린 잘못된 판결로 
어떤 사람은 억울하게 옥살이를 하거나 유형에 처해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반 일리치의 직업이 판사라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법정에서 판결을 내리던 입장에서 그는 이제 
자신이 저지른 죄에 대해 재판을 받아야 할 처지에 놓였다. 
그가 사다리에서 굴러떨어진 불상사는 가장 높이 오른 순간 맞닥뜨린 
지위의 추락과 삶의 전락을 의미하는 듯하다. 
죽음의 판결이 내려질 시점이 다가올수록 
그는 점점 어린 시절 기억 속으로, 고독 속으로 숨어든다.

"결혼…. 뜻하지 않게 했던 것. 
환멸, 아내의 입 냄새, 애욕, 위선! 이 생명력 없는 업무, 그리고 돈 걱정, 
그렇게 보낸 1년, 2년, 그리고 10년, 20년. 언제나 똑같은 삶. 
살면 살수록 생명은 사라져가는 삶. 
그래, 나는 산에 올라가고 있다고 상상했지. 
하지만 일정한 속도로 내려오고 있었던 거야. 
그래, 그랬었던 거야. 
분명 사람들 눈에 나는 올라가고 있었어. 
하지만 정확하게 그만큼씩 삶은 내 발아래서 멀어져가고 있었던 거야…. 
그래, 다 끝났어. 
죽는 것만 남았어!"

"처음 인생이 시작되던 바로 그 지점에 밝게 빛나던 한 점의 빛이 있었다. 
그러나 빛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어두워져갔고, 
어두워지는 속도 역시 점점 빨라져만 갔다. 
‘죽음과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속도는 점점 빨라져 가는구나.’ 
이반 일리치는 생각했다. 
그러자 점점 더 빠른 속도로 추락하던 이 생각은 
영혼 깊은 곳으로 돌덩이처럼 굴러떨어졌다. 
삶도, 기승을 부리던 고통도 점점 더 빠른 속도로 끝을 향해, 
가장 끔찍한 고통을 향해 떨어지고 있었다. 
‘...그래도 최소한 이유는 알아야 할 거 아냐? 
그런데 그게 불가능해. 
내가 인생을 잘못 살았다고 한다면 설명이 가능하겠지. 
그렇지만 그건 인정할 수가 없어.’ 
그토록 반듯하고 올바르고 품위 있게 살아온 자신의 삶을 떠올리며 그는 고개를 흔들었다."

죽음은 끝났어, 더 이상 죽음은 없어 
어느덧 육체적 고통이 정신적 고통으로 전이된다. 
그는 무심한 타인들의 처세에서 자신이 여태껏 해온 삶의 방식을 발견한다. 
자기 삶을 스스로 합리화시켜보려 하지만, 자신의 인생 전부가 
거대한 허위에 지나지 않았다는 의심을 떨쳐내지 못한다. 
다른 사람들이 내보이는 거짓됨을 혐오했으나 알고 보니 
자기 안의 양심 자체가 거짓이었음을 깨닫는다. 

어디서부터 뭐가 잘못된 것일까. 
그를 죽음에 몰리게 한 것은 낙상 사고나 맹장, 신장의 이상이 아니었다. 
이반의 삶은 무난했으나 무의미한 삶이었다. 
그에게 죄가 있다면 삶에 의심을 품지 않은 죄, 타인에게 삶의 기준을 맞춘 죄, 
인생의 의미에 관해 묻지 않은 죄, 자기반성과 성찰을 게을리한 죄가 있을 터이다.

단말마의 비명이 방을 울린다. 
그는 검은 자루 속에서 몸부림치는 신세다. 
죽음 앞에 눈을 가린 사형수 꼴이다. 
죽음으로부터 벗어나려 필사적으로 발버둥치다가 
알 수 없는 힘에 떠밀려 구렁텅이 속으로 떨어진다. 
나락 끝에서 무언가 환하게 빛을 발하는 것을 본다. 
그게 삶과 죽음의 고통을 끝낼 탈출구일까.

임종의 순간을 이토록 치밀하게 묘사한 작가가 또 있을까.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마무리하는 두세 페이지에서 
독자는 톨스토이가 파놓은 심연 속으로 서서히 빨려드는 느낌을 가지게 된다.

"바로 이 순간 이반 일리치는 나락으로 굴러떨어져 빛을 보았다. 
그는 지금까지 자신이 살아온 인생이 그래서는 안 되는 삶이었지만 
아직 그것을 바로잡을 수 있으며 바로잡아야만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것’이 도대체 뭐지? 
그는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고는 조용히 입을 다문 채 귀를 기울였다. 
그때 누군가가 자신의 손에 입을 맞추는 것이 느껴졌다. 
눈을 뜨자 아들이 보였다. 
아들이 불쌍했다. 
아내가 곁으로 다가왔다. 
그는 아내를 바라보았다. 
아내는 입을 헤벌린 채 절망적인 표정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 
눈물이 그녀의 코와 뺨을 타고 주룩주룩 흘러내렸다. 
아내도 안쓰러웠다."

후회는 언제나 뒤늦게 오고 각성의 순간은 늘 짧다. 
가족이 임종을 지키는 짧은 시간 동안 이반 일리치는 
내적 변화를 겪으며 어떤 깨달음의 경지에 이른다. 
자기 삶을 모두 부정하니 죽음에 대한 공포가 사라진다. 
죽음을 받아들이자 고통에서 해방되어 마음이 편안해진다. 
부정의 과정을 통과해 긍정의 끝에 다다른 것이다.

울먹이며 바라보는 아내와 아들에게서 애절한 눈길과 손길을 느낀다. 
그들에게서 진심 어린 연민이 전해지고 
그의 내면에서도 연민과 동정의 감정이 스며 나온다. 
그는 욕망을 버리고 용서를 구한다. 

‘그래, 내가 이들을 힘들게 하고 있어. 
다들 불쌍해. 
하지만 내가 죽으면 좀 편해질 테지.’
라고 속삭이는 자신 안의 목소리를 듣는다. 

공감은 용서를 낳고 용서는 화해로 이어진다. 
비로소 이반 일리치는 자신과 화해하고 또한 타인과 세상과도 화해한다. 
농부 게라심이 보여준 이타적인 선과 더불어, 어린 아들이 죽어가는 아버지를 대하는 
거짓 없는 연민의 몸짓에서 그는 빛을 보았는지 모른다.

그러자 갑자기 모든 것이 명확해졌다. 
이제까지 그를 괴롭히면서 마음 속에 갇혀 있던 것들이 
일순간 두 방향, 열 방향, 모든 방향에서 쏟아져 나왔다. 

저들이 불쌍해. 저들이 더 고통받지 않게 해주어야 해. 
저들을 해방시켜주고 나 자신도 이 고통에서 해방되어야 해. 
‘얼마나 좋아. 얼마나 단순해.’ 그는 이렇게 생각했다.

"… 그는 그동안 익숙해진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찾아보았지만 찾지 못했다. 
죽음은 어디 있지? 무슨 죽음? 두려움은 이제 없었다. 
죽음이란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죽음이 있던 자리에 빛이 있었다.
“그래, 이거야!” 
그는 갑자기 큰 소리로 외쳤다. 
“이렇게 기쁠 수가!”
이 모든 것들은 한순간에 일어났고 그 순간의 의미는 이후 결코 바뀌지 않았다. 
그를 지켜보던 사람들에게 그는 두 시간이나 더 사경을 헤매는 것으로 보였다.

…" '끝났습니다!' 
누군가 그를 굽어보며 말했다.
이 말을 들은 이반 일리치는 마음 속으로 되뇌었다. 
‘죽음은 끝났어.’ 
그는 스스로에게 말했다. 
‘더 이상 죽음은 없어.’
그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다가 도중에 멈추더니 온몸을 쭉 뻗었다. 
그렇게 그는 죽었다."

이반 일리치가 고통에 벗어나 ‘얼마나 좋아, 얼마나 단순해’라고 생각할 때 느끼는 ‘단순함’은 
소설 앞 부분에서 그의 삶을 규정지으며 ‘지극히 단순하고 평범해서 끔찍했다’고 할 때의 
단순함과는 구별되는 단순함이며, 이반 일리치가 ‘이렇게 기쁠 수가’라고 외칠 때 ‘기쁨’은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동료들이 느끼는 ‘모종의 기쁨’과는 차원이 다른 기쁨이다.

이반 일리치가 ‘그것을 하면 되는 거야’라고 했을 때 ‘그것’은 무얼 가리킬까? 
죽음이 있던 자리에 나타난 ‘빛’은 무엇일까? 
선한 마음, 타인과의 교감, 용서와 사랑, 참된 삶, 올바른 삶, 
어쩌면 행복이나 자유, 영혼 같은 것일까?

 

육체적 죽음 뒤에도 육체를 초월하여 영혼이 영원히 살아남으리라 여긴다면 
죽음이 두려울 까닭이 없을 터이다. 
플라톤이 주장한 영혼불멸설을 따르자면

(플라톤은 이성을 영혼으로 연결시키는 무리수를 두기는 했다), 
죽음은 육체의 종말이지만 영혼 입장에서는 자유의 획득이다. 
영혼은 죽음을 통해 오히려 육체의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를 받아들인다면 죽음은 나쁜 것이 아니라 차라리 좋은 것이 된다.

말년에 톨스토이는 종교와 교회를 부정하면서도 종교와 신학을 깊이 연구했다. 
그런 그가 영혼불멸설까지 믿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아마도 영혼의 존재는 믿은 듯하다. 
위 단락에서, “끝났습니다!”라고 의사로 짐작되는 누군가가 선고를 내린 후 
이반 일리치가 사지를 뻗고 죽기까지는 시간의 틈새가 놓여 있는데, 
이를 혼이 몸에서 흘러나오는 찰나로 여겨도 되지 않을까. 
그러면 죽음으로 영혼은 ‘잠시’ 자유를 얻은 셈이다.

‘죽음이 있던 자리에 빛이 있었다’에서 ‘빛’을 

‘영혼의 빛’이나 ‘영적 부활’로 해석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부활이나 구원, 영생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톨스토이의 소설 <부활>에서 ‘부활’은 내세에서의 부활이 아니라 
‘삶의 도덕적 갱생’을 의미한다​. 
톨스토이가 ‘육체는 사라지지만 영혼은 남는다’는 식으로 
죽음이라는 문제를 대충 봉합하려 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하루하루 죽음을 향해 다가가는 존재다. 
내일 당장 죽을지도 모르는데 영원히 살 것처럼 살아가는 존재이다. 
죽음이 두려운 건 죽음이 무언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죽음을 경험하지 않고서야 죽음을 이해할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죽음이란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는 숙명이다. 
그런 까닭에 죽음은 누구에게나 평등하다. 
죽음 없는 삶은 없고, 삶 없는 죽음도 없다. 
죽음은 삶의 일부이기에 삶이 끝나면 죽음도 끝이 난다. 
우리는 언제가 반드시 죽는다. 
그렇다면 문제는 죽음이 아니라 ‘어떻게 살아야 하나?’ 하는 것이다.

게라심의 말을 소환해 본다. 
“우리는 언젠가 다 죽습니다요. 
그러니 수고 좀 못 할 이유가 없지 않겠습니까?”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 죽음을 기억하라!” 
내 삶이 유일하고 고유하며 유한하다는 사실을 늘 의식한다면, 
관성의 고리에서 빠져나와 어찌 삶을 제대로 살아보려 하지 않겠는가.

 

톨스토이의 '세 가지 질문'이라는 작품에서 소년 니콜라이는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한 세 가지 질문의 답을 알아내기 위해 현자를 찾아 나선다. 
첫째,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시간은 언제인가? 
둘째,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누구인가? 
셋째,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인가? 

현자의 입을 통해 톨스토이는 이렇게 말한다.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시간은 현재이고,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지금 내가 마주하고 있는 그 사람이며,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지금 내 곁에 있는 사람에게 선을 행하는 일이다.” 

톨스토이는 삶에 대한 사랑을 기조로 한 예술에서 출발하여 종교에 몰입한 작가이다.  
그래서 그는 대문호임과 동시에 위대한 사상가이자  
구도자적(求道者的)인 삶을 산 기독교 신앙인이었다.  
그는 항상 인생에 대하여 절박하게 고민하고

자신의 사상을 현실에서 실현하고자 노력했다.  
그래서 그는 문학에만 머물러 있지 않고 교육 · 난민구제에도 힘을 기울였다.  
러시아의 부조리, 지배층이 저지른 가난하고 힘없는 농민에 대한  
폭압과 착취에 대한 속죄를 위해 구체적인 행동을 실천해 나갔던 것이다. 

톨스토이 작품에 있어 또 하나의 커다란 특징은  
자전적인 요소를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철저한 사실주의자였던 톨스토이는 주로 자기 자신의 삶에서 일어났던  
실제의 사건을 작품에 담았다.  
예를 들어 '전쟁과 평화'에서는 자기 자신을 삐에르에,  
그리고 마지막 작품인 '부활'에서는 네플류도프에 투영하고 있다.  
이점에서 또 다른 러시아의 문학가인 도스토예프스키가 주로 현실과  
공상을 결합시킨 타인들을 통해 자신의 사상을 표현한 것과 차별화되고 있다. 

톨스토이는 도스토예프스키와 함께 19세기 러시아 문학을 대표하는 대문호이다.  
그러나 둘은 태어난 배경뿐만 아니라 문학정신까지도 판이하게 다르다.  
톨스토이는 귀족 출신이고 부유했다.  
반면, 도스토예프스키는 당시 러시아에서 중인 계급 신분이었던  
가난한 의사 집안에서 태어나 평생 가난과 배고픔 그리고 병마에 시달렸다.  
그래서 그의 문학세계도 어둡다.  
도스토예프스키에게 인간의 삶이란 논리로는 도저히 풀지 못할  
수수께끼로 가득 찬 암울한 여행이었다. 

이에 비해 톨스토이는 자신의 삶은 물론 자신의 예술 위에  
논리 정연한 건축물을 지으려 한 현실주의자였다.  
인간심리에 대한 분석과 개인과 역사 사이의 모순을 분석함으로써  
최상의 리얼리즘을 추구하고자 하였다.  
톨스토이에게 있어 삶이란 그가 논리로 풀어내고자 했던 하나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톨스토이만큼 온 세계의 지식인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친 작가는 아마 찾아보기가 어려울 것이다.  
그는 살아 있을 때부터 이미 신화적인 존재여서  
모든 사람들이 그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오랜 동안 광활한 대륙에서 살아가는 러시아인들의 정신적 지주였고,  
지금까지도 수많은 독자들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다.  
확실히 그는 지금도 우리 가슴 속에 살아 있다.  
그는 이렇게 우리를 위로한다.  
“여러분은 왜 나를 스승이라 부르는가? 나는 스승이 아니다.  
죄(罪)에 있어서나 부활(復活)에 있어서나 나는 여러분의 형제다.” 

 

톨스토이 생가 박물관 내부

 

톨스토이 생가 박물관 내부

 

톨스토이 생가 박물관 내부

 

톨스토이 생가 박물관 내부

 

톨스토이 생가 박물관 내부

 

톨스토이 생가 박물관 내부

 

톨스토이 생가 박물관 내부

 

톨스토이 생가 박물관 내부

 

톨스토이 생가 박물관 내부

 

톨스토이 집필실 서재.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니나> 등 대작이 탄생한 요람이다.    
보존을 위해 책상 위를 유리로 덮어 놓았다. 

 

톨스토이 집필실 서재

 

톨스토이 친필 원고

 

톨스토이 친필 원고

 

톨스토이 생가 내부

 

톨스토이 생가 내부

박물관 안에는 실제 톨스토이의 개인 물건들과 
22,000여 권의 책이 소장되어 있는 그의 서재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 
톨스토이 박물관 안의 가구들도 1910년대에 사용되었던 것 그대로 
그 자리에서 관광객들을 맞이하고 있다.  
현재는 톨스토이의 고손자인 블라디미르 톨스토이가 박물관을 관리하고 있다.

 

톨스토이 생가 내부


오늘날 야스나야 빨랴나는 해외의 여러 나라들과도 많은 교류를 하고 있다. 
박물관에서는 톨스토이의 문학에 관련된 주제들에 대한 
여러 가지 국제 컨퍼런스, 학술회의, 세미나 등이 열리고 있다.

 

톨스토이 생가 내부

 

톨스토이 생가 내부
2만 2000여 권에 달하는 톨스토이의 서재

 

톨스토이 생가 내부

 

톨스토이 생가 내부

 

[영상] SBS ‘톨스토이 생가’ 내부 모습 大공개

 

[영상] Yasnaya Polyana 톨스토이 생가

 

온실 출입구

 

온실 단지

 

온실

톨스토이의 할아버지인 N. S. 볼콘스키 (Volkonsky)가 윗쪽 연못 위 
공터에 지은 온실은 야스나야 팔랴나에서 없어서는 안 될 귀한 재산이었고
할아버지의 자부심이기도 했다.

 

온실

볼콘스키(Volkonsky)와 톨스토이(Tolstoy )가족의 3 세대는 
자유 시간의 대부분을 온실에서 원예 수업과 재배로 바쳤다. 
톨스토이의 할아버지뿐만 아니라 그의 어머니 M. N. 볼콘스카야(Volkonskaya)와
톨스토이 자신과 그의 아내에게도 원예와 재배는 관심의 대상이었다.
 
1867년에 온실이 화재로 파괴되었다. 
레오 톨스토이는 같은 장소에 새로 온실을 지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온실 

 

온실 

 

온실 

 

온실 

온실 단지

 

온실 단지

 

가든 파빌리온

1888 년에 지어졌다. 
여름에는 러시아 국민화가 일리야 레핀 (Ilya Yefimovich Repin) 및 
니콜라이 게(Nikolai Nikolaevich Ge)를 포함하여 
야스나야 폴랴나의 손님이 파빌리온에 살았다.

 

가든 파빌리온 

 

Leo Tolstoy's favorite bench 레오 톨스토이가 가장 좋아했던 벤치

톨스토이는 이곳을 특별한 느낌으로 대했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벤치가 여기에 있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나는 항상 이 나무들을 존경합니다. 
이곳이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곳입니다. 
그리고 아침에 이곳으로 산책합니다. 
가끔 여기 앉아서 글도 씁니다 .” 
라고 톨스토이는 러시아의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 겸 교수였던 
알렉산더 골든바이저(Alexander Borisovich Goldenweiser)에게 말했다.

 

레오 톨스토이가 가장 좋아했던 벤치

 

깔때기 목욕탕

보론카 강에 있는 목욕탕
톨스토이 생전에는 사유지에서 강으로 이어지는 길을 "쿠팔나야"라고 불렀다. 
강을 건너는 교차로 근처에 수영장이 있었다. 
톨스토이는 거의 매일 목욕을 했다. 
종종 아들이나 방문 손님과 동행하기도 했다.

 

전망대. 로어 파크의 전망대 타워

 

이정표

 

낮은 연못 (Lower Pond) 길

 

낮은 연못 (Lower Pond)

야스나야 폴랴나의 이 아름다운 장소는 톨스토이 가슴에 

거룩한 이상으로 남아 있는 어머니를 생각나게 했다. 
하부 공원은 어머니(Maria)가 산책하기 가장 좋아하는 장소였다. 
여기에 그녀는 장미덤불, 개암나무, 화살나무(euonymus) 등을 심었다. 
그 덤불은 여름에는 눈에 띄지 않으나 가을에는 밝은 분홍색-빨강 "모닥불"로 타오르며 
공원 전체에 그림처럼 흩어져 있다. 
그리고 윗쪽 연못 근처에는 그녀가 한때 심었던 은빛 포플러가 여전히 살고 있다. 
가족의 전설에 따르면 공원 깊은 곳에 위치한 전망대에서 그녀는 종종 
부동산 사업에 열중한 남편의 귀환을 기다리고 있었다고 한다.

 

하부 공원, 낮은 연못 자작 나무 다리

야스나야 팔랴나 영지에 영국식 조경 공원을 만들 때 공원을 지나던 계곡이 
두 개의 댐으로 막혀서 세 개의 연못이 형성되었는데 이를 상부, 중간 및 하부라 이름한다.
하부 공원 낮은 연못(Lower Pond)에 우아한 자작 나무 다리가 가로 질러 지어졌다. 

옛날 연못 위에서는 활어를 잡어서 요리를 해 먹었다. 
가운데 하나는 야스나야 팔랴나 연못 중 가장 깨끗하고 깊은 곳이다. 
샘물을 먹고 여름에도 따뜻해 지지 않고 물이 아주 시원했다. 
1890년대에 스레드니(Sredniy Pond)에 목욕탕이 지어졌다. 
톨스토이 시대에 사람들은 이곳에서 목욕을 했을 뿐만 아니라 빨래도 했다.
스레드니 연못의 수위가 상승하면 그 물이 계곡의 가장 깊은 부분에 위치한 
나무 홈통을 따라 아래 쪽으로 흘러간다.

“오늘 나는 정원을 돌아 다니며 늘 그렇듯이 전혀 기억하지 못하지만 
나에게 거룩한 이상으로 남아 있는 어머니를 기억합니다.” 
(레오 톨스토이. 일기).

 

톨스토이 묘지 가는 길

 

톨스토이 묘지 가는 길

 

톨스토이 묘지

톨스토이 묘지가 있는 곳은 톨스토이가 어린 시절 형제들과 함께 
자주 가서 놀았던 스타리 자카스 (Старый Заказ Old Order) 숲이다. 
톨스토이는 그의 사랑하는 형제 니콜라이(Nikolai)로부터 

어린 시절 녹색 막대기에 대한 전설을 들었다. 
계곡 가장자리에 묻힌 녹색 막대기를 찾으면 아무도 죽지 않을 것이고 

전쟁과 질병도 없을 것이며 사람들은 "개미 형제"가 될 것이다. 

톨스토이와 형제들은 머리에 스카프를 달고 안락 의자 아래에 앉아 있었다. 
그들은 서로를 사랑하기 때문에 가까운 곳에서 함께 앉아 

“한 지붕 아래” 함께 기분이 좋다고 느꼈다. 
그리고 그들은 모든 사람들을 위한 "개미 형제애"를 꿈꿨다.
이제 계곡 가장자리에 묻힌 녹색 막대기를 찾는 일만 남아 있다. 

아이들은 이 녹색 지팡이가 발견되면 세상에 더 이상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굳게 믿었으며 오랫동안 그것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철학적인 레오 톨스토이는 그의 죽음 직전에 전 세계에 행복을 가져다주는 

녹색 막대기에 대한 그의 사랑하는 형제의 비유를 회상했다. 

톨스토이는 생애 말년에 자신을 야스나야 폴랴나에 묻어달라고 반복해서 요청했다. 
“내 몸을 땅에 묻을 때 어떤 의식도 행하지 말라.
나무 관, 그리고 원하는 사람은 녹색 막대기 대신 계곡 맞은 편에 있는 
스타리 자카스(Old Order)를 숲으로 운반하거나 운반할 것이다."

톨스토이의 무덤은 매우 이례적이며 너무 단순해 보인다. 
계곡 가장자리에 있는 녹색 마운드, 묘비도 없고 십자가도 없다. 
그러나 톨스토이의 삶과 죽음에 대한 이해에 대해 많은 것을 말할 수있는 것은 
이 무덤, 평화롭고 조용한 오래된 숲이다. 
이것은 삶을 매우 사랑하는 사람의 마지막 피난처이다.

 

톨스토이 묘지

 

톨스토이의 무덤은 모르고 지나치면 무덤인 줄도 모를 정도로 단출하다. 
그 흔한 묘석이나 묘비도 없이 땅과 풀과 하늘과 맞대어져 있다.  
톨스토이는 영지 내에서도 이곳, "스타르이 자카즈"에 묻히고자 하였다.  
그가 사랑했던 형 니콜라이가 톨스토이에게 "이곳 스타르이 자카즈" 골짜기 끝에 
아무도 죽지 않고 전쟁과 질병이 없어지게 하는 초록색 지팡이를 숨겼다"고 말한다. 
평생 그 소망을 품고 살던 톨스토이는 
죽어서도 초록색 지팡이가 숨겨져 있는 이곳에 묻히고자 하였다.

육면체 관 크기 그대로, 흙과 풀로 덮인 작은 무덤이다.  
유언대로 그의 무덤임을 알리는 표식도 없고 묘석이나 묘비, 십자가도 없다. 
잘 모르고 찾아간다면 무덤 있는 데를 놓치기 쉽다. 
유언을 모르고 찾아간다면 실망하기 쉽다.

'아무도 죽지 않고 전쟁과 질병이 없어지게 하는 초록 지팡이'를 숨긴 곳, 
스타리 자카스 (Старый Заказ Old Order) 숲에 그는 묻혔다,  
스타리 자카스(Старый Заказ)는 직역하면 '오랜 금지'란 뜻으로, 
톨스토이 할아버지 대부터 이곳 나무들을 베지 못하도록 한 데서 유래한 말이다. 

〈사람에겐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은 

사람이 묻힐 묘 크기만큼이었던가. 

 

야스나야 폴랴나의 풀무덤 

〈이반 일리치의 죽음〉의 이반(Иван)은 ‘성(聖) 요한’(영어로는 ‘존’)에서 유래한 이름으로, 
우리나라 ‘영수’나 ‘지훈’처럼 러시아에서 가장 흔한 남자 이름이다. 
‘이반’은 보통 사람의 대명사로, 이를테면 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보통 사람의 죽음’이자 익명의 흔한 죽음이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한 남자의 죽음을 통해 우리의 삶을 이야기하는 소설이다.

레프 톨스토이가 82세 나이로 가출했다가 아스타포보 간이역에서 객사했을 때 
그는 이미 유언장을 남겨둔 상태였다. 
저작권을 포기할 뿐 아니라, 추모행사 없이 비석도 세우지 말고 
흙무덤에 자신을 묻어달라는 유언이었다. 
그는 그저 평범한 한 농민의 죽음처럼 소박하게 장례를 치러주길 원했다. 
그의 가출 사건이 언론에 대대적으로 생중계되었듯이, 톨스토이의 바람과는 달리, 
그의 장례에는 지인들뿐만 아니라 농민, 노동자, 학생 등 엄청난 추모 인파가 몰려들었고 
국민적인 행사로 장례식이 치러졌다. 
48년 간 고락을 함께했으나 남편의 임종을 지키지 못한 아내 소피야는 
9년 후 그의 무덤에서 수 킬로미터 떨어진 묘지에 따로 묻혔다.

톨스토이는 평생토록 삶의 도덕적 완성을 추구했고, 
높은 이상과 실제 삶 사이에 놓인 간극에 괴로워했다. 
그는 위대한 작가, 지혜로운 현자였고 모순덩어리 인간이었다.

어린 시절 톨스토이는 형들과 함께 우애와 선의 삶을 살자고 맹세하며, 
세상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는 주문을 적은 '마법의 초록 지팡이'를 
야스나야 폴랴나의 숲 어딘가에 심어놓은 적이 있었다. 
톨스토이가 묻히길 바란 데가 그 지팡이가 있던 자리였다. 

“진리를 … 나는 … 사랑한다.”, 
“그러나 농부들은… 농부들은 어떻게 죽는가?” 
톨스토이가 마지막으로 남겼다는 말이다. 

이반 일리치처럼 톨스토이는 죽음을 맞이하며 ‘빛’을 보았을까. 
어린 톨스토이가 생각한 삶의 행복은 무엇이었을까. 
2019년 8월, 백야(白夜)가 다가온 어느 날, 
나는 야스나야 폴랴나 숲 그늘 아래, 묘비 없는 풀 무덤을 바라보며 한참을 서성였다.

 

톨스토이 묘지 인증샷

 

톨스토이 묘지 인증샷

 

톨스토이 묘지 인증샷

 

톨스토이 묘지에서 나가는 길

 

[영상] Cemetry 톨스토이 묘지

 

[영상] Going to Moscow 모스크바를 향하여

 

[영화] The Last Station (마지막 역) 2009 full - 톨스토이의 마지막 인생

 

The Last Station 은 마이클 호프만(Michael Hoffman)이 각본 및 감독을 맡은 
2009년 영어 독일어 전기 드라마 영화로, Leo Tolstoy 의 생애 마지막 달을 기록한 
제이 파리니(Jay Parini) 의 1990년 전기 소설을 기반으로 한다. 
이 영화는 크리스토퍼 플러머가 톨스토이로, 헬렌 미렌이 아내 소피아 톨스테이아로 출연한다. 
이 영화는 소피아와 그의 제자 블라디미르 체르트코프가 
톨스토이의 유산과 작품의 저작권에 대한 싸움에 관한 것이다. 
2009 텔루라이드 영화제에서 초연되었다.
(자동번역 생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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