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카테리나 궁전 (Catherine Palace) 구글 지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남쪽으로 25km 떨어진 교외 지역에  푸슈킨이라는 고을이 있다. 
러시아 국민시인 푸슈킨이 이 고을에 있던 고등학교 졸업생이라 하여 
볼셰비키 혁명 후 고을 이름을 그렇게 바꾸었다. 
이곳에 예카테리나 궁전(Catherine Palace)이 있다.

 

예카테리나 궁전 (Catherine Palace) 

궁전의 명칭은 표트르 대제의 황후이며 제2대 러시아 황제이기도 한 
예카테리나 1세(Ekaterina Alekseevna 1684~1727)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역사 지구와 관련 건조물군 중 하나로 
18세기 러시아 건축 예술의 산물이며, 세계 유산에 등록되어 있다.

 

예카테리나 궁전 (Catherine Palace) 

1717년 예카테리나 1세는 독일의 건축가 요한 프리드리히 브라운슈타인
(Johann-Friedrich Braunstein)에게 자신을 위한 여름 궁전을 지을 것을 명령했다.
그후 1743년 4번째 군주 안나 이바노브나(Anna Ioannovna 1693~1740) 치세에 완성되었다.

 

예카테리나 궁전 (Catherine Palace) 

1756년 5월 6번째 군주 옐리자베타 페트로브나(Elizaveta Petrovna 1709~1762) 여제의 

명령에 따라건축가 B. F. 라스트렐리의 감독 아래 옛 구조물을 철거하고

대규모적인 규모로 훨씬 웅장하고 화려한 로코코 양식으로 개축되었다.

 

예카테리나 궁전 (Catherine Palace) 

궁전 길이는 306m이며, 방이 55개가 있다. 
궁전은 프랑스식(式) 정원으로 둘러싸여 있고, 각 방마다 색깔에 따라 
'녹색 기둥의 방', '붉은 기둥의 방', '호박(琥珀 Amber)방' 등의 이름이 붙어 있다. 

 

예카테리나 궁전(Catherine Palace) 입구

궁 안에는 총 2만여 점에 달하는 소장품이 있었는데, 1941년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의 폭격으로 인해 많은 건물이 파괴되고, 호박도 약탈당하였다. 

 

예카테리나 궁전(Catherine Palace) 입구

러시아를 침략한 독일군이 6톤에 달하는 
호박방의 호박을 약탈해 감으로써 이 방은 빈 채로 남아 있었다. 
약탈당하기 전까지 호박방은 정교한 장식과 화려함으로 인해 
세계 8대 불가사의 가운데 하나로 꼽혔다. 

 

예카테리나 궁전(Catherine Palace) 공원 안내판

 

예카테리나 궁전(Catherine Palace) 남쪽 구역

훗날 건물이 복원된 뒤, 소련 정부는 1979년부터 호박방의 복원을 위해 
종적이 묘연해진 호박을 찾았으나 모자이크 일부만을 찾았을 뿐 나머지는 찾지 못하였다. 
그 뒤 800만 달러의 예산과 30명의 전문가를 동원해 11년에 걸친 복원작업을 했으나, 
1991년 소련이 해체되면서 작업은 중단되었다. 

 

예카테리나 궁전(Catherine Palace) 북쪽 구역

1999년부터 다시 복원 작업을 시작해 2003년 6월 호박방이 재현되었는데, 
칼리닌그라드산(産) 호박과 꿀벌색 석재만도 7톤이나 들었다. 
호박방은 사방 14m, 높이 5m의 방으로, 원래 이 방은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가 표트르 1세에게 선물한 것이다.

 

예카테리나 궁전(Catherine Palace) 입구 계단

예카테리나 궁전(Catherine Palace)은 러시아 고유의 양식과 
서유럽식 왕궁 건축 양식이 혼합되어 있어 화려함의 극치를 자랑한다.

 

예카테리나 궁전 무도실

옛날 왕가에선 반드시 무도회를 열어 사람들을 초청해야 했다고 한다. 
표트르 대제에겐 첫번째 본부인 황후 예브도키야 로푸히나가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정복사업을 펼치는 남편에게 적합한 부인이 아니었다. 
심지어 남편의 적과 내통하며 표트르 대제를 배신하기도 했다.

 

1698년에 당시 예카테리나와 사랑에 빠진 표트르 1세는 
황후 예브도키야 로푸히나가 성정이 너그럽지 못하다는 이유로 
황후의 자리에서 폐위시키고 정교회 수녀원으로 강제 추방시켰다.
당시 러시아 정교회에선 이혼을 금지했기에 표트르 대제는 
이혼한 첫 번째 러시아인으로 기록되어 있다.

 

라트비아 출신의 둘째 부인 예카테리나 1세는 호방한 여장부였고 
표트르 대제와 궁합이 잘 맞았다. 
표트르 대제는 적극적으로 그녀에게 구애했다. 

 

표트르 대제의 초상.

예카테리나는 1712년에 정식으로 황후로 책봉되었다. 
1725년 표트르 1세가 요로결석으로 서거했으나, 표트르 1세의 아들인 황태자 
알렉세이 페트로비치 황태자가 1718년에 반란에 가담하여 황태자 직분을 박탈당한 뒤 
고문 후유증으로 죽고, 그 아들인 표트르 2세도 아직 너무 어렸기 때문에 
표트르 1세의 측근들과 황제 근위대가 황후인 예카테리나를 황제로 추대, 제위에 올랐다. 
그러나 2년 간의 짧은 치세로 남편처럼 큰 업적을 이루지 못하고 
1727년 5월 17일 43세의 나이로 서거했다.

 

예카테리나는 표트르 1세와의 사이에서 7명의 자식을 두었으나, 
5명은 모두 유아기에 사망했다. 
살아남은 자식들은 모두 딸들이었는데, 큰딸 안나 페트로브나 황태녀는 
훗날의 표트르 3세를 낳았고, 옐리자베타 페트로브나는 훗날 어머니를 따라 역시 여제가 된다.

 

예카테리나 2세 (Yekaterina II)의 초상. 

예카테리나 2세(Yekaterina II, 1729~1796)는 표트르 대제의 업적을 
계승 · 발전시키면서 러시아를 유럽의 정치 · 문화권에 편입시켰다.
또한 행정과 법률제도를 개선했으며 크림반도와 폴란드의 상당부분을 차지했다.
무능한 남편 표트르 3세를 대신해 섭정을 맡았으며, 화려한 남성 편력으로도 유명했다. 
1762년 남편 표트르 3세를 축출하고 차르가 되었다.

독일 출신에 남편 표트르 3세의 황위를 찬탈하고 제위에 올랐지만 러시아인들, 
심지어 소련인들에게도 찬미의 대상이며 민족 자긍심의 근원으로 간주된다. 
영토를 서쪽과 남쪽으로 20만 평방 마일(258,000㎢) 이상 확장시켰고, 
행정개혁 계획에 따라 29개 주를 재조직했다. 
100개가 넘는 새 도시들을 건설했으며, 옛 도시들은 새롭게 단장시켰다.

이를 통해 무역이 활발하게 행해졌으며 교통의 발달도 이루어졌다. 
문학을 적극 후원해 문학평론을 하나의 영역으로 자리잡게 했고 

러시아의 문화적 발전을 크게 촉진했다. 
또 과학을 장려하고 많은 학교를 건립했다.

 

예카테리나 궁은 표트르 대제가 예카테리나(영국식으로 캐서린)에게 
결혼 선물로 준 땅에 지은 성과 정원으로 구성돼 있다.
정원의 끝에는 에르미타주(Hermitage)가 있다. 
‘에르마타주’란 ‘혼자 있기 좋은 방’이라는 뜻의 건축물이다. 

 

황제가 테이블에 앉아 있으면 농노가 밧줄을 잡아당겨 2층으로 테이블을 올려주었고, 
그러면 황제는 그곳에서 혼자 사색에 잠길 수 있었다. 
필요한 물건이 있으면 황제가 종이에 써서 아래로 내려보냈고 
그러면 농노가 물건을 밧줄로 올려주었다고 한다. 
현재에도 에르미타주엔 밧줄 시설이 보존돼 있다. 
작동은 되긴 하지만 이젠 거의 하지 않는다고 한다.

 

예카테리나 궁전(Catherine Palace)

 

예카테리나 궁전(Catherine Palace)

 

복원된 호박방

호박(琥珀 Amber)이란 고대의 송진이 굳은 것으로
진주, 산호와 함께 정의상 광물은 아니지만 보석으로 취급된다.
보통 송진(수액이라고도 함)이 굳어서 100만년정도 지나면 호박이 되기 때문에
인류의 조상이 생기기 전에 생성된 것으로 자체가 역사라고 봐도 무방하다.
그 안에 모기나 벌레 등이 들어 있는 것은 더욱 귀하게 여겨진다고 한다.

 

호박방

방 전체가 황금 같은 빛을 발하는 호박으로 장식되어서, 
눈부시게 반짝거리는 '호박방'이 예카테리나 궁전에서 가장 유명하다. 
지금의 방은 제2차 세계대전 때 나치 독일군이 상트페테르부르크(당시 레닌그라드)를 
포위했을 때 호박을 싹 긁어가서 나중에 다시 복원한 것이다.

단순히 자연 호박만을 가지고 치장해 방을 만든 게 아니라, 
호박에 열처리 등의 다양한 기법을 써서 의도적으로 색이나 모양을 변형시킨 호박들과 
자연 호박들 및 금과 거울을 같이 써서, 매우 화려한 방을 만들었다.

 

호박방

원래 이 호박방은 독일에 있던 것으로 1701년 프로이센 왕국 국왕 
프리드리히 1세가 아내인 조피 샤를로테 왕비를 위해 지은 것이다. 
샤를로텐부르크 궁전에 설치될 예정이던 이 호박방은 계획과 달리 완공 이전에 
프리드리히 부부 모두 세상을 떠나고 아버지의 사치 행각을 싫어하던 지독한 구두쇠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가 즉위하면서 공사가 중지되었다. 
공사가 중단된 호박방은 베를린 궁전에 임시로 설치되었다가 1716년 러시아로 옮겨갔다. 

 

호박방

표트르 대제는 독일을 방문했을 때 그곳에서 호박방을 보고 반해 

러시아에도 호박방을 짓고 싶어했다. 
이를 알게 된 독일 프리드리히 1세가 러시아를 방문하면서 표트르 대제에게 
선물로 호박방을 떼어다가 보내주었다. 

당시 러시아는 스웨덴과의 대북방전쟁을 치르고 있던 와중으로 
프로이센은 러시아의 편을 들어 이 전쟁에 참전한 상황이었다. 
전쟁 와중 우호 증진을 목적으로 프로이센을 방문한 표트르 대제는 

이 방을 보며 감탄했고 프리드리히 1세의 아들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는 

이 패널들을 표트르에게 외교협정의 대가로 넘겨주었다. 
이렇게 러시아로 옮겨진 호박 패널에 예카테리나 2세 때 
더 많은 양의 호박들이 추가되어 방 전체를 장식하게 변모했다.

 

호박방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 때 나치가 호박을 싹 긁어가며 훼손했고, 
현재 여름궁전에 있는 호박방은 
원래 호박방이 있던 자리를 공들여서 재현해 놓은 것이다. 
나치가 훔쳐간 호박방 원본은 전쟁 와중에 폭격으로 파괴되었다는 설, 
나치의 비밀 벙커에 숨겨 두었다는 설 등이 분분하나 확실한 근거는 없다.

 

[영상] Catherine Palace 

 

예카테리나 궁전(Catherine Palace) 앞에서 인증샷

 

예카테리나 2세의 마노방(Agate Rooms)

캐서린 대제 (예카테리나 2세)는 1780년대에 스코틀랜드 출신의 건축가 
찰스 카메론(Charles Cameron 1745~1812)에게 마노방(Agate Rooms)을 만들도록 했다.
카메론은 이탈리아로 가서 고대 온천의 건축을 연구했다. 
마노방 건물은 2층으로 구성되어 있다. 아래층에는 여러 개의 욕조가 있다. 

건축 공사는 1779 년에 시작되어 1788 년에 완공되었다. 
이 마노가 박힌 인테리어를 포함하는 건물은 콜드 배스 (Cold Bath)라고 불린다. 

 

예카테리나 2세의 마노방(Agate Rooms)

1 층에는 러시아식 목욕탕, 로마식 목욕탕, 수영장, 냉탕, 
마사지 실, 오락실 등 다양한 종류의 황후 목욕탕이 있다. 
산수유, 진품 및 인조 대리석, 청동 장식품과 같은 다른 귀중한 광물이 사용되었다. 
마노방은 인테리어 작업에 벽옥을 사용하는 것이 독특하다. 
이것은 유럽에서 유일한 경우이다.

 

캐머런 회랑(Cameron Gallery)

캐머런 회랑(Cameron Gallery)은 1779년 캐서린 대제(예카테리나 2세)의 명령으로
러시아에 온 스코틀랜드 출신의 건축가이자 인테리어 디자이너 
찰스 카메론(Charles Cameron 1745~1812)의 건축물이다.

 

캐머런 회랑(Cameron Gallery)
북쪽 끝에서 웅장한 계단으로 접근 할 수있는 갤러리는 현재 임시 전시장으로 사용된다.

 

캐머런 회랑(Cameron Gallery)

주변 공원, 특히 큰 연못 (Bol'shoy Prud)과 정원을 향하여 최상의 전망을 갖도록 

설계된 건물의 윗층은 44 개의 가느다란 이온 기둥으로 구성되고 
고대의 위대한 인물의 청동 흉상으로 장식된 열주로 둘러싸여 있다. 

 

큰 연못 (Bol'shoy Prud)
카메론 갤러리 계단 아래에 있는 헤라클레스 동상과 큰 연못 (Bol'shoy Prud)

 

예카테리나 궁전(Catherine Palace) 정원

예카테리나궁 앞에는 대규모 정원이 있다. 
정원은 영국식 정원, 프랑스 베르사유식 정원, 폴란드식 정원 등으로 구분된다. 
영국식 정원은 예카테리나 1세의 취향, 
폴란드식 정원은 표트르 대제의 취향을 반영해 지은 것이라고 한다. 
베르사유식 정원은 당시 러시아 귀족들의 로망이었다고. 

 

작은 연못과 목욕탕 (Upper Bath Pavilion)

 

목욕탕 (Upper Bath Pavilion)

 

목욕탕 (Upper Bath Pavilion)

 

예카테리나 궁전 공원 조감도

 

예카테리나 궁전 공원을 관람하는 우리 일행

 

예카테리나 궁전 공원에서 인증샷

 

궁전 공원

 

궁전 공원에서 신혼 사진을 찍는 장면

 

궁전 공원

 

목욕탕 (Lower bath)

 

목욕탕 (Lower bath)

 

궁전 공원

 

궁전 공원의 그로토 파빌리온(Grotto Pavilion)

 

그로토 파빌리온(Grotto Pavilion)
큰 연못 연안에 위치한 그로토 파빌리온은 전시회를 개최하거나 공연을 하는데 사용된다.

 

궁전 공원의 그로토 파빌리온

 

궁전 공원의 그로토 파빌리온

 

궁전 공원의 그로토 파빌리온

 

궁전 공원의 그로토 파빌리온

우리가 방문했을 때에는 4인조 아카펠라 공연이 있었다.
나는 관람료 대신으로 예카테리나 궁전(Catherine Palace) 내부와
4계절의 공원 풍경이 담긴 USB를 구입했다. 한 6천원 쯤이었던가?

 

그로토 파빌리온 내부

 

그로토 파빌리온 내부

 

인증샷

 

인증샷

 

물고기 다리 (Fish Channel)

 

인증샷

 

물고기 채널 (Fish Channel) 

 

인증샷

 

인증샷

 

키메라 그릇(Bowl with Chimeras)

 

에르미타주 파빌리온 (Hermitage Pavilion)

 

캐서린 공원(Catherine Park)의 아름다운 풍경에 취해서 걷다보면 
공원의 끝에 멋지게 장식된 2 층짜리 건물 에르미타주(Hermitage)가 나온다. 

 

하늘에서 본 에르미타주(Hermitage)

에르미타주(Hermitage)란 ‘혼자 있기 좋은 방’이라는 뜻으로 
"고독의 장소"를 의미하는 프랑스어 단어다. 
에르미타주(Hermitage)의 아이디어는 17세기 후반에 유럽에서 나타났다. 
일반적으로 에르미타주(Hermitage)는 숲 속의 작은 오두막으로 
사냥 오두막을 닮았지만 내부는 아주 멋지게 장식되어 있다. 
구조는 십자가 모양이다. 

 

에르미타주(Hermitage)

에르미타주(Hermitage)의 건설은 미하일 젬초프(Mikhail Zemtsov 1688~1743)에 의해 시작되었다. 
이 건축가는 표트르 대제에 의해 해외 유학생으로 파견된 청년 그룹 최고 엘리트 중 한 사람이었다. 
젬초프는 실제로 차르스코에 셀로(Tsarskoye Selo)에서 많은 프로젝트를 시작했지만 
안타깝게도 건설 초기에 사망했다.

에르미타주는 1756년 이탈리아 건축가 프란체스코 바르톨로메오 라스트렐리
(Francesco Bartolomeo Rastrelli 1700~1771)에 의해 완성되었다. 
라스트렐리는 실제로 러시아에서 바로크 양식을 크게 발전시킨 사람이다. 

 

인증샷

건물은 2 층으로 되어 있다. 
벽은 차르스코에 셀로(Tsarskoye Selo)의 주요 궁전처럼 하늘색으로 채색되어 있다. 
파사드는 벽을 어깨에 메고 있는 아틀라스 조각상으로 장식되어 있다. 
권력을 상징하는 사자 가면도 있다. 
화려한 주철 그릴과 일부 장식품이 도금된 발코니가 여러개 있다. 
전체 건물은 예카테리나 궁전(Catherine Palace)의 작은 버전처럼 보인다.

 

인증샷

 

에르미타주는 체스판의 패턴으로 흑백 대리석 사각형으로 포장된 
패드 위에 세워졌고 해자로 둘러쌓여 있다.
구조는 대리석 조각상과 꽃병으로 가득찬 난간으로 둘러싸여 있다. 
다리는 금박을 입힌 조각으로 장식되었다. 
에르미타주는 돌로 지어졌으며 치장 벽토로 마감되었다. 
해자는 더 이상 물로 채워지지 않는다. 

 

입장을 하기 위해서 덧버선을 신어야 한다.

 

에르미타주(Hermitage) 2층 큰 홀

2층에 큰 홀이 1개 있고 그 주변에 4 개의 작은 방이 있다. 
벽은 금박 조각, 그림 및 많은 거울로 장식되어 있다. 

 

인증샷

 

인증샷

 

에르미타주(Hermitage) 천장 장식

천장 장식은 이탈리아 예술가 발레리아니 (G. Valeriani)와 
페레시노티(A. Peresinotti)의 참여로 그려졌다. 
이들은 Peterhof의 예카테리나 궁전과 여름궁전(Grand Palace) 천장 장식에도 참여했다.

 

창밖으로 아름다운 궁전 공원 풍경이 훤히 보인다.

 

에르미타주(Hermitage) 작은 방

 

에르미타주(Hermitage) 작은 방

 

에르미타주(Hermitage) 자동 홀 테이블

황제가 2층 홀 테이블에 앉아 있으면 하인들이 1층에서 식탁을 깔고 
음식을 준비해서 밧줄을 잡아당겨 2층으로 식탁과 음식을 올려주었다.
필요한 물건이 있으면 황제가 종이에 써서 아래로 내려보내고 
그러면 하인이 필요한 물건을 밧줄로 올려준다. 
현재에도 에르미타주엔 밧줄과 도르레 시설이 잘 보존되어 있다. 
관람객을 위해서 시연을 해 준다.

엘리자베스 1세와 그녀의 후계자인 캐서린 대제는 종종 에르미타주에서 외국 대사를 접대했다. 
캐서린은 여기서 손자를 위해 파티를 열었다.

 

에르미타주(Hermitage) 자동 홀 테이블

가운데 직사각형으로 길게 선이 그어진 부분과 접시가 놓인 부분이 
음식을 싣고 아래층으로 내리락 오르락 한다.

제 2차 세계 대전 동안 에르미타주는 예카테리나 궁전만큼 황폐화되지 않았다. 
복원이 필요했지만 소규모에 지나지 않았다.  
이제 신중하게 개조된 건물은 캐서린 공원의 가장 아름다운 상징 중 하나가 되었다. 
에르미타주(Hermitage) 주변에는 잘 손질된 아름다운 정원이 있다. 

에르미타주의 바로크 양식 인테리어는 18세기 중반 이후로 변하지 않았으며 
현재까지 거의 변하지 않고 있다. 
에르미타주를 관람하면서 테이블에 음식이 올라가고 내려 오는 것을 볼 수 있다. 

 

음식을 실어 올리고 내리는 도르레

 

음식을 실어 올리고 내리는 도르레

 

음식을 실어 올리고 내리는 도르레

 

음식을 실어 올리고 내리는 도르레

 

음식을 실어 올리고 내리는 도르레

 

관람을 마치고 덧버선을 반납한다.

 

[영상] Hermitage Pavilion

 

아드멀티(Admiralty)

 

아드멀티(Admiralty)

 

점심 식사

 

큰 연못과 터키식 목욕탕 (Turkish bath pavilion)
1851년~1852년에 터키식 목욕탕 (Turkish bath pavilion)이 지어졌다.

 

큰 연못과 터키식 목욕탕 (Turkish bath pavilion)

 

큰 연못과 체스미 기둥(Chesme column)

체스미 기둥(Chesme column)은 1768~1774년 러시아 대 터키 전쟁인 
키오스 전투와 체스마 전투에서 세 번에 걸쳐 러시아 해군이 승리한 것을 기념해 세워졌다. 

 

체스미 기둥(Chesme column)

기둥은 회색 대리석 받침대에 있고, 세면은 청동 옅은 부조이다. 
러시아의 승리를 설명하고 네 번째 측면에는 전투에 대한 설명이 새겨져 있다. 
받침대는 계단 모양의 피라미드와 같은 화강암 플랫폼에 놓여 있으며, 
받침대에 접근 할 수 있는 계단으로 이어지는 그릴이 있는 아치형 개구부가 있다. 

 

공원을 산책하는 예카테리나 2세. Portrait of Catherine II  Walking in the Park

Empress of Russia, 1794. oil on canvas.  94.5 x 66cm. 

Tretyakov Gallery, Russia Moscow

체스미 기둥(Chesme column)을 배경으로 예카테리나 궁전 공원에서 

산책 중인 캐서린 대제(Catherine II)를 그린 러시아 화가 

블라디미르 보로비코프스키(Vladimir Borovikovsky 1757~1825)의 1794년 작품.

트레티야코프 미술관 소장.

 

[영상] Catherine Palace Park

 

 


임경석의 역사극장

총상 입은 뒤 스스로 권총을 겨눴다

빨치산 박종근, 경북 지역 산으로 올라가 유격대를 이끌었으나
군사 경험도 전투력도 장비도 부족… 눈 덮인 겨울산에서 최후를

 

박종근의 20대 초반 시절. 아내 이숙의가 평생 품에 간직한 빛바랜 사진이다. <이 여자, 이숙의> (삼인, 2007)

 

제1346호(‘빨치산 아버지가 남긴 사진 4장’)에서 박종근의 삶을 소개했다. 지리산이나 신불산 지역에 비해 경북 쪽 양상이 덜 알려졌기 때문인지 그의 빨치산 활동이 어떠했는지를 묻는 분들이 있다. 미흡하나마 그에 답할 필요를 느낀다. 미국 국립기록관의 북한 노획 문서함 속에는 빨치산 시절 박종근이 작성한 몇몇 기록이 있다. 그것을 이용하면 국지적이나마 그의 빨치산 활동의 개략을 그려볼 수 있다.

 

실천과 이론 면에서 준비된 간부

 

러시아 유학에서 되돌아온 박종근에게 주어진 보직은 경북도당 위원장이었다. 29살이었다. 젊은 나이였지만 경력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17살부터 반일운동에 참여했으니 혁명운동 경력이 벌써 13년째였다. 사상범으로 투옥된 기간만도 3년7개월이나 됐다. 대중운동 현장 경험도 갖추고 있었다. 농촌지대인 경북 의성군에서 면 인민위원회 부위원장, 군당 선전부장·조직부장을 했다. 해방 직후 합법적 활동이 일시 가능했던 조건 속에 대중을 진두에서 지휘한 경험도 있었다. 중앙당 간부 활동도 했다. 서울 시내에서 비합법 조건 아래 당 중앙 선전부 소속 중간간부로 1년간 일했다. 그뿐이랴. 외국 유학도 다녀왔다. 모스크바 조선당학교 2년간의 유학에서 견문을 넓혔고, 본격적으로 마르크스주의 이론도 배웠다. 실천과 이론, 어느 방면에서 보더라도 잘 준비된 간부였다.

 

발령 시기는 1950년 7월 하순이었다. 평시가 아니었다. 한국전쟁이 일어난 직후였다. 박종근은 즉시 임지로 향했다. 짐작하건대, 8월 초 경북 경계를 넘어 진군하는 북한군을 따라 임지에 도착했을 것이다. 비슷한 사례로 전남도당 위원장 박영발이 생각난다. 그도 박종근과 함께 모스크바 조선당학교를 수료한 간부였다. 그는 북한군 제6사단이 7월23일 전남 광주를 점령한 뒤, 8월 초 임지에 도착했다.1

 

박종근은 그보다는 약간 늦게 경북에 입성했을 것이다. 소백산맥을 경계로 북한군의 남진을 저지하려는 전투가 치열했기 때문이다. 충북 영동과 경북 상주·김천 일대의 방어전은 7월22일부터 30일까지 계속됐고, 예천·안동 일대의 방어전은 7월30일부터 8월1일까지 벌어졌다. 북한군이 경북 북부 지방을 장악한 것은 7월 말~8월 초였다. 북한군은 7월25일 영동을 접수한 뒤, 7월31일에는 상주를 점령했다. 예천·안동 방면도 비슷했다. 영주에는 7월23일, 예천에는 7월30일, 안동에는 8월1일 각각 북한군이 입성했다.

 

박종근의 임무는 여느 도당위원장과 다를 바가 없었다. 도당 집행부를 편제하고 행정단위별로 군당·면당 조직을 구축했다. 군·면 인민위원회 등의 정권 기관도 설립했다. 하지만 범위에 제한이 있었다. 북한군 점령지가 경북 북부 지역에 한정됐기 때문이다. 경북의 중부 지역은 격전지였다. 낙동강 방어선을 둘러싸고 치열한 전투가 계속됐다. 동해안 영덕부터 의성군 낙정리까지 동서 방향으로 180㎞, 낙정리에서 마산까지 낙동강 물길을 따라 남북 방향 160㎞ 전선이 한국전쟁의 운명을 결정하는 최후 방어선이었다.

 

북한군의 우세는 오래가지 않았다. 인천상륙작전으로 전황이 일거에 뒤집혔다. 남한 깊숙이 진공했던 북한군은 서둘러 퇴각해야만 했다. 그해 9월25일 당 중앙에서 특별 지시가 하달됐다. 모든 당 조직을 비합법 지하당 기구로 개편하라는 내용이었다.

 

제3유격지대장이던 박종근의 친필 서명. 임경석 제공

 

미군에 쌀 한 톨도 남기지 말 것

 

경북도당 집행부는 산으로 올라가기로 결정했다. 일월산이었다. 해발고도 1219m에 이르는 이 산은 영양군의 청기면과 일월면, 수비면에 걸쳐 있었다. 소백산을 제외하면 도내에서 가장 고도가 높고, 일찍이 비정규 유격전의 무대로 활용됐다. 대한제국 말기, 신돌석 의병부대가 활동한 곳도 바로 여기였다. 신돌석을 가리켜 ‘일월산의 호랑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이 시기 박종근의 주된 임무는 ‘당 단체들을 지하로 옮기는 것’과 ‘유격대를 조직하는 것’이었다. 좀더 구체적으로 알려 한다면, 그해 10월11일자로 북한군 최고사령관 김일성이 방송에서 하달한 지시 사항을 상기하면 좋으리라. 당 조직을 비합법적 지하당으로 전환·개편할 것, 산간지대에 식량과 시설·설비를 비축·은닉하고 미군에는 쌀 한 톨도 넘기지 말 것, 야산대 경험자와 유격전 참여가 가능한 당원을 모두 입산시켜 유격대를 편성할 것 등의 내용이었다.2

 

경북도당은 일월산에 오래 체류하지는 않았다. 한 달쯤 뒤인 10월31일 북서쪽으로 이동했다. 멈춘 곳은 ‘남대리’였다.3 경북 영주군 부석면 남대리가 도당 집행부의 두 번째 산악 근거지가 됐다. 경북 영주와 강원도 영월을 가르는 소백산맥 능선부의 깊은 산골이었다. 주위를 둘러싼 산악의 해발고도는 1천m가 넘었다. 선달산 1236m, 어래산 1064m 등이었다. 왜 옮겼을까? 아마 안전과 연락 때문일 것이다. 토벌대의 압박을 모면하고 당 중앙과 연락하는 데 좀더 유리한 곳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어떻든 경북 행정구역을 벗어나지 않으려고 노력했음을 읽을 수 있다.

 

남대리 지역으로 거점을 옮긴 뒤에도 당 중앙과의 연락이 쉽지 않았다. 박종근은 “오랫동안 중앙과 연결을 가지지 못한 처지”인 탓에, 정세 분석도 사업 진행도 큰 곤란을 느꼈다고 술회했다.4 귀머거리 같았다고 표현했다. 급변하는 전황을 정확히 파악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 다행히 1951년 1월13일 곤란이 타개됐다. 중국 지원군 참전 이후 재반격에 나선 북한군 제2군단 부대들과 남대리 지구에서 조우하는 데 성공했다. 이어서 1월20일에는 총사령관의 명령서도 접수할 수 있었다. 제3유격지대를 편성해, 곧 있을 북한군과 중국 지원군의 총공격에 호응하는 제2전선을 구축하라는 내용이었다. 지대장으로는 박종근이 임명됐다. 경북도당 위원장과 제3지대 사령관을 겸하게 됐음을 의미했다.

 

즉각 제3지대 편성 사업에 착수했다. 고충이 있었다. 자신에게는 군사활동 경험이 전혀 없었다. 그거야 젊음과 각오, 헌신을 통해 극복하면 될 터였다. 하지만 도당 당원들은 무장부대를 편성하거나 이끌 만한 간부 역량이 적었다. 무기와 장비가 부족한 것도 해결해야 했다. 박종근은 도당 집행부를 이끌고 강원도 방면으로 북상했다. 자기 지역을 벗어나는 것은 허용할 수 없는 일이지만, 제3지대를 속히 편성하려면 북한군 정규군의 인적·물적 원조를 받아야 했다. 제2군단 본부가 주둔한 횡성군 둔내면으로 향했다. 둔내면은 횡성군 동쪽 끝에 있는, 해발고도 500m의 고원지대였다. 산과 언덕이 둘러쌌다. 주봉인 태기산은 해발 1261m였다.

 

미국 국립기록관의 빨치산 노획 수첩에 그려진, 제3유격지대 부대별 분산 투쟁 배치도. 임경석 제공

 

젊은 20대 대원은 35%뿐

 

가장 큰 난관은 시간 부족이었다. 임박한 총공격은 대전과 안동을 잇는 선까지 진출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고 들었다.5 속히 적군의 등 뒤로 움직여 후방 교란 작전을 해야 했다. 1951년 2월14일 박종근은 제3유격지대를 이끌고 서둘러 둔내면을 출발했다. 4월20일까지 보현산(1124m) 지역으로 진출해, 그곳을 근거지로 유격전을 벌일 계획이었다. 경북 영천군 화북면과 청송군 현서면에 걸친 이 산은 대구에 인접한 요충지였다.

 

출발할 때 병력 총수는 356명이었다. 각자 소총 1자루에 탄환 40발이 지급됐고, 수류탄을 평균 1.3개씩 소지했다. 공용화기는 경기관총 2정뿐이었다. 장비도 빈약했고 대원들의 전투력도 문제였다. 70%가 경북 출신인데 후퇴할 때 입산한 사람들이었다. 대중 사업과 군중 정치운동에 종사한 당원으로서 군사 경험이 없는 동무들이었다. 연령도 30살 이상이 60%를 점했고, 젊은 20대는 35%에 지나지 않았다. 박종근은 유격대 대원이 전투 성원으로는 적당치 못한 일꾼이 대부분이었다고 평했다.6 그가 기대한 수준은 훈련된 군사 간부가 지휘하는 1천 명의 병력이었다. 당 중앙과 유기적인 연락을 주고받는 조건 아래 이 정도 병력을 갖는다면, 보현산 지구를 근거지로 제2전선을 구축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두 달이 지났다. 4월20일이 됐을 때, 제3지대는 출범 당시 계획과는 사뭇 다른 상황에 처했다. 가장 큰 곤란은 국군과 북한군이 대치하는 전선을 돌파하는 것이었다. 숫자와 장비, 기동력이 월등히 우세한 정규군이 밀집한 지역을 뚫고서 이동하는 것은 많은 희생을 초래하지 않고는 불가능했다. 전투와 쉴 새 없는 행군을 계속해야만 했다. 그 결과 전사, 낙오, 실종 등으로 대원 257명이 줄었다. 그 대신 낙오된 북한군 편입, 경북 관내 지하당원 편입 등으로 121명이 보충됐다. 전체 대원 수는 220명 선을 유지했다. 하지만 그중 환자가 43명이었다. 사령관인 박종근조차 재귀열에 걸려서 3월 말부터 5월 초까지 한 달 이상 병고에 신음해야 했다. 장비 부족 문제가 심각했다. 대원들이 소지한 탄환 수는 1인당 7~8발이 고작이고, 수류탄을 가진 자는 거의 없었다. 공용화기는 탄환을 전부 소모했기에 무용지물이었다.

 

제2전선 구축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게다가 최전선 형성이 애초의 예상과 달라졌다. 대전~안동 라인은 언감생심이었다. 1951년 5월 접어들면서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일진일퇴를 거듭했다. 제3지대는 국군 토벌대의 포위 속에 갇힌 꼴이 됐다.

 

박종근 사령관은 결심했다. 애초 계획을 폐기하고 ‘부대별 분산 투쟁’ 방침을 세웠다. 역량 보존에 적합한 방침이었다. 대원을 네 부대로 나눴다. 자신이 이끄는 본대는 일월산에 거점을 두고, 다른 세 부대는 경북 관내의 다른 산악지대에 분산 배치했다. 지휘관의 성을 따서 도부대·백부대·강부대라고 부르는 세 예하 부대는 각각 청량산 지구, 금장산-명동산-주왕산 지구, 태백산-소백산 지구에 주둔했다.

 

대규모 토벌 작전의 시련을 넘어서지 못했다

 

박종근이 이끄는 제3지대는 악조건 속에서도 10개월을 더 버텼다. 그러나 1951년 12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전개된 대규모 토벌 작전의 시련을 넘어서지는 못했다. 작전이 거의 막바지에 이른 1952년 2월 어느 날, 박종근 제3지대 사령관은 총상을 입었다. 스스로 움직일 수 없을 정도의 중상이었다. 생존자의 증언에 따르면, 동료들은 들것을 만들어서 사령관을 싣고 다녔다. 그러나 눈 덮인 한겨울 산중에서 쉴 새 없이 추격해오는 토벌대를 피해 다니면서 부상자를 돌보는 일은 불가능했다. 결국 박종근은 권총으로 자신의 운명을 결정하는 길을 택했다. 경북 영양군 석보면 포산리에 있는 포도산(748m)의 한 기슭, 1952년 2월27일의 일이었다.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참고 문헌

1. 정관호, <전남유격투쟁사>, 선인, 35쪽, 2008년.

2. 김광운, ‘한국전쟁기 북한의 게릴라전 조직과 활동’, <군사> 48, 104쪽, 2003년.

3. 박종근 조선로동당경상북도당부 위원장, ‘조선로동당경상북도당부 결정서: 도당단체들의 강화를 위한 당면과업’, 3쪽, 1951년 5월2일.

4. 박종근 경북도당부, ‘조선로동당중앙당본부 허가이 동지 앞’, 2쪽, 1951년 5월3일.

5. 이선아, ‘한국전쟁기 강원·경북 지역 빨치산 활동 연구노트’, <역사연구> 23, 198쪽, 2012년.

6. 박종근 제3유격지대 지대장, ‘제3유격지대 2개월간의 사업보고서(1951년 2월14일부터 1951년 4월20일까지)’, 1951년 5월3일.

 

 

 

 

바실리예프스키(Vasilevsky) 섬과 비르제바야 광장(Birzhevaya Platz) 구글 지도

네바 강은 상트페테르부르크 북동쪽에 있는 러시아 두 번째 호수 라도가 호에서 
서쪽으로 740km를 흘러와 핀란드만으로 들어간다.

 

바실리예프스키(Vasilyevsky) 섬과 궁전다리(Dvortsovyy Most) 상공에서 보기

 

네바 강은 오랜 세월동안 ​오랜 세월 만 연안에 섬 100여 개와 늪지로 이뤄진 
삼각주를 만들었고 상트페테르부르크는 그 기반 위에 세워진 도시이다.
이 도시가 건설되기 전 이곳에 처음 러시아인들이 정착하기 시작한 것은 9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사람이 살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습지대였기에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은 곳이었다고 한다. 


옛 노브고르드공국을 거쳐 15세기 모스코바공국의 일부가 되었지만 
정작 18세기 초에 이르러서야 표트르대제가 스웨덴의 북방전쟁에서 승리를 거두며 
교통 및 군사적 요충지라고 판단, 이곳에 새로운 도시건설의 계획을 세우게 된다. 
1703년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 건설을 시작으로 상트페트르부르크가 탄생되었다. 


하지만 잦은 홍수로 인한 범람과 습지대인 이곳에 도시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어마어마한 양의 돌이 필요했으며 이를 충당하기 위해 
돌로 세금을 부과하는 법령을 만들어 도시의 초석을 세웠다고 한다. 


이러한 척박한 자연환경 속에서 고된 노역으로 수많은 사람이 희생되는 대가를 치러야 했다. 
그 결과 10년 만에 습지였던 이곳에 가적같이 수많은 건물들이 들어서게 됐으며 
급기야 표트르 대제는 수도를 모스크바에서 이곳으로 옮기게 된다.

 

바실리예프스키(Vasilyevsky) 섬과 로스트랄(Lighthouse) 등대 상공에서 보기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수많은 섬과 운하들이 300여 개의 작은 다리로 연결되어 있는 
‘북쪽의 베네치아’로 불리기도 하며 러시아에서 가장 유럽다운 도시로 
러시아와 유럽의 양식이 절묘하게 어우러져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곳이다. 

 

표트르 대제가 이 도시를 건설할 당시 이 바실리 섬을 
암스테르담과 같은 도시 중심지로 건설할 계획을 가졌으나 
강의 범람과 늪지대라는 지리적 취약점 때문에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고 한다. 


동서남북으로 잘 구획된 도로망이 인상적이며 

아직도 18세기 당시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곳들이 많다.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이 지역은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을 비롯해 
과학 아카데미산하 박물관, 상품거래소 등이 자리하면서 

학술 및 예술의 중심지로 변화되었다. 
현재는 2개의 메트로역이 있으며 핀란드만을 통해 

헬싱키를 비롯 발틱 3국 등으로 출발하는 항구가 있다.

 

네바 강변 예르미타주 박물관과 궁전다리

제정 러시아 당시의 오랜 수도이기도 한 이곳은 러시아 역사의 중심지이자 짜르의 도시로 
도시 전체가 박물관이라 불릴 만큼 아름다운 건축물과 도스토예프스키, 푸시킨, 차이코프스키 등 
세계 문학예술가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문화예술의 상징적 도시이기도 하다.

 

네바 강 궁전다리(Dvortsovyy Most)와 로스트랄(Rostral Colums) 등대

 

궁전다리를 지나면 바실리 섬으로 오른쪽에 로스트랄 등대가 보이고

왼쪽의 건물은 동물학 박물관이 보인다.
등대 있는 곳이 비르제바야 광장(Birzhevaya Platz)으로 시민들의 휴식처이고 
강 건너편으로 에르미타주박물관과 페트로피블롭스크 요새가 보이는 삼각점에 있어 
사진 찍기 좋은 곳으로 관광객들이 한번 거쳐가는 곳이다.

 

겨울궁전 상공에서 본 네바 강과 열려 있는 궁전다리

네바강변 겨울궁전 옆에 위치한 궁전다리(Dvortsovyy Most)는 
이곳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가장 큰 섬인 바실리섬과 연결된다. 
이 섬은 동서 6.6km, 남북 4.2km에 달하며 4개의 크고 작은 다리를 통해 
넵스키대로가 있는 중심지역과 뻬뜨로그라드 지역으로 연결되어 있다. 

 

겨울궁전 가든 옆 도로에서 본 열려 있는 궁전다리

 

차르 목수 (Tsar Carpenter) 동상

현재 해군성 제방에 세워진 표트르 대제 "Tsar Carpenter"에 대한 인상적인 기념비는 
특히 매혹적인 역사를 지니고 있다. 
매우 세밀하게 제작된 기념비는 한 손에 말아 올린 소매와 도끼로 
배를 만드는 힘든 작업을 겪고 있는 젊고 단호한 표트르 대왕을 묘사한다. 
300년 전 젊은 표트르 대왕이 러시아 해군 건설을 돕기 위해 
네덜란드 잔담시에서 러시아로 가져갈 선박 건조 기술을 배웠다.

 

차르 목수 (Tsar Carpenter) 동상

1909년, 마지막 러시아 황제 니콜라스 2세는 폴타바에서

러시아 해군의 대승리 200주년을 기념하여 
조각가 레오폴드 번시탐이 완성한 기념비를 상트 페테르부르크시에 선물했다. 
이 기념비의 제목은 "잔담시에서 선박 건조 기술을 배우는 표트르 대제"였다. 
그리고 이듬 해에는 표트르 대제를 기념하는 청동 기념비 사본이 잔담시에도 선물되었다. 

그러나 운명처럼 "차르 카펜터"라는 별명으로 알려진 표트르 대제의 기념비는 
표트르 대제도 장인으로 일했던 해군성 제방의 네바 강 유역에 오래 머물지 못했다. 
1918년 볼셰비키는 집권 직후 기념물을 비극적으로 파괴했다.

 

차르 목수 (Tsar Carpenter) 동상

하지만 원래 "차르 카펜터" 기념비의 청동 사본은 네덜란드 잔담시에 남아 있었다. 
1996년 9월 7일, 네덜란드 정부는 러시아 해군 창설 300 주년과 네덜란드에 있는 
표트르 대제 체류 기념 3세기를 기념하여 이 청동 사본을 상트페테르부르크시에 전달했다. 
이 기념비는 왕실 프리깃에 의해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 왔고 
헬리콥터를 통해 프리깃에서 해군성 제방의 받침대에 있는 현재 위치로 옮겨졌다.

 

네바 강과 궁전다리(Dvortsovyy Most)

 

라이온스(Lions of the Palace Pier)

 

라이온스(Lions of the Palace Pier)

 

로스트랄(Rostral Colums) 등대 방향으로 궁전다리(Dvortsovyy Most)

 

구 해군성 방향으로 궁전다리(Dvortsovyy Most)

 

열리고 닫히는 궁전다리(Dvortsovyy Most)

 

겨울궁전 방향으로 궁전다리(Dvortsovyy Most)

 

바실리예프스키 섬 로스트랄(Lighthouse) 등대 조감도

겨울궁전에서 궁전다리를 건너면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제일 큰 바실리예프스키 섬(Vasilevsky Island)이 나온다. 
섬 입구 네바 강이 두 갈래로 나뉘어져 핀란드 만으로 흐르는 곳에 
붉은 기둥의 등대 2개가 나란히 서 있고, 어린이들을 위한 

동물학 박물관과 해군중앙박물관이 마주보고 서 있다. 
수많은 다리와 운하로 연결된 페테르부르크여서 

이곳이 섬이라는 느낌은 별로 들지 않는다.

표트르 대제는 암스테르담을 매우 좋아했다고 한다. 
그는 새로운 도시를 만들면서 바실리예프스키 섬이 

페테르부르크의 중심이 되기를 원했다. 
그래서 늪지대인 바실리예프스키 섬에 운하망과 

도로망을 만들 때 현재와 같은 직각 구조로 계획하였다. 
즉 동서로 세 개의 대로를 만들고 남북으로 길을 만들어 

서로가 교체하도록 설계한 것이다.


그러나 네바강의 범람으로 인하여 표트르의 계획은 부분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바실리예프스키 섬에는 공공 건물들과 많은 주택들이 남아 있는데 
그 중에는 18세기 당시 분위기를 나타내주는 곳도 많이 있다.

이 등대는 19세기초 건축가 프랑스 건축가 토만(Thomas de Thomon)이 세웠으며, 
당시는 이곳이 상업의 중심지였고, 해군 박물관은 당시 

상공회의소로 쓰여진 건물이기도 하다. 
또한 한 겨울엔 이곳이 말썰매 경주장이기도 하였다.

 

바실리예프스키 섬 로스트랄(Lighthouse) 등대

로스트랄 등대 (Rostral Colums)는 양쪽으로 2개인데 
1810년에 세워졌으며, 빨간색으로 칠해진 기둥에는 여러 개의 뱃머리 장식이 붙어 있다. 
이러한 모양의 건축물은 해전의 승리와 자국 해군의 위대함을 상징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로스트랄 기둥은 독립형 구조로 실제로 기둥 형태로 만들어졌지만 
옅은 부조와 그림으로 장식되지 않고 배의 뱃머리를 묘사한 조각으로 장식되어 있다.
각 기둥의 높이는 32m이고 가스 버너의 화염 높이는 7m다.
남쪽 및 북쪽 열, 총 두 개의 열이 있는데 남쪽 방향은 큰 네바(Bolshaya Neva) 방향이고 
북쪽 방향은 작은 네바(Malaya Neva) 방향이다.

 

8 개의 선로 장식된 등대 기둥

각 기둥의 몸통에는 8개의 뱃부리(rostras)로 장식되어 있다. 
뱃부리는 4줄 대칭으로 배열되고 가장 큰 뱃부리(rostras)는 기둥의 하단에 있다. 
배의 활은 위치에 따라 네바 강이나 증권거래소 건물을 향한다.

 

로스트랄(Lighthouse) 등대 여성 조각

각 기둥의 하단은 남자와 여자의 두 조각으로 장식되어 있는데
각각 상업과 바다의 신을 의인화 한다고 한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그들이 바실리예프스키 섬의 

역사를 상징하는 남편과 아내라고 믿는다. 

 

로스트랄(Lighthouse) 등대 남성 조각

또다른 사람들은 볼가(Volga) 강, 네바(Neva) 강, 드네프르(Dnieper) 강 및 
볼 호프(Volkhv) 강과 같은 러시아 강을 상징한다고 이 인물을 의인화한다.
조각품의 재료로는 야외에서 빠르게 굳어지는 석회암을 사용했다. 

 

로스트랄(Lighthouse) 등대 날개 달린 인어상

뱃머리를 장식한 조각상이 특이하다.
상반신은 벗은 상태고 하반신은 용의 모습이다.
이런 형태의 기둥은 고대의 관습에서 유래한 것으로 고대 그리스와 로마는 
해전에서 승리하면 원주를 세우고 포획한 배의 뱃머리를 잘라 기둥을 장식하였는데 
러시아도 이를 본따서 해전에서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것이라고 한다.


유럽을 오가는 선박들이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마녀 사이렌의 꾐을 피하려고 
비슷한 인어 모양 사이렌을 달고 다녔다고 한다.
등대 꼭대기에는 기름 접시가 있어 축제나 기념일에 불을 밝혔다고 한다.
그러고보면 이것은 등대라기보다는 기념비라고 보아야 될 듯하다.

 

로스트랄 등대

등대에 달려 있는 장식물은 뱃머리로 로스트랄이라는 단어가 가지고 있는 뜻 역시 뱃머리이다. 
기둥의 대에는 러시아의 4대 강인 볼호프, 네바, 드네프르, 볼가 강을 상징하는 조각품들이 있다. 
이 아름다운 등대는 프랑스의 건축가 장 프랑소와 데도몬에 의해 설계되었다.

 

광장 반대편에도 같은 모양의 등대가 하나 더 있다.

 

등대는 지금도 국경일이나 도시의 경축일 전야와 축제 때 불을 밝힌다. 

일부 학자들은 로스트랄 기둥이 바다가 아닌 강둑에 서 있기 때문에 
등대 역할을 할 수 없다는 데 동의한다.
바실리예프스키 섬)의 로스트랄 기둥은 
1995년 50,000 루블, 1997년 50 루블 지폐에 묘사되어 있다.

 

구 상트페테르부르크 증권거래소 항공 사진

구 상트페테르부르크 증권거래소와 로스트랄 등대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위치해 있는 그리스 부흥 건축의 중요한 예시이다. 
프랑스의 건축가 돔 두 토몬(Thomas de Thomon)에 의해 설계된 증권거래소는 
1805년부터 1810년 사이 건조되었다. 
로스트랄 등대는 바실리에프스키 섬의 구 증권거래소 광장에 

위치하고 있으며 높이 32m의 원기둥이다. 
로스트랄은 뱃머리를 의미하며, 기둥의 대에는 소련의 4대강인 
볼호프, 네바, 드네프로, 볼가를 상징하는 조각상이 있다. 
1810년에 돔 두 토몬의 설계로 당시의 상품거래소와 함께 만들어졌다.

두 등대 사이 중앙으로 보이는 건물은 예전에 상품거래소 건물로 
도리스식 건축양식으로 그리스 신전을 많이 닮았다. 
이 건물도 이 건물 또하 프랑스의 건축가 장 프랑수아 또마드 또몽의 작품으로 
현재의 50루불 지폐에도 나와 있는 역사적 건물이다. 현재는 인류학박물관이다.

구 상품거래소 (해군 박물관)

바실리예프스키 섬은 페테르부르크의 대표적인 항구가 위치하고 있었던 지역이므로 
19세기 초에는 화려한 건물들이 많이 있었다. 
구 상품거래소는 도리스식 주랑(柱廊)을 가진 건물로 ‘러시아의 파르테논‘이라 불리기도 한다.
현재는 해군박물관으로 사용되며 내부에는 해군 관련 전시품들이 있다.

 

광장 중앙 쯤에 동판으로 부조를 만들어 놓은 것이 보인다.
이곳의 등대와 건물들 그리고 강가의 선착장까지 자세히 표시해 놓았다.

 

동판 부조

 

로스트랄 등대가 네바 강을 끼고 있는 탓에 네바 강변의 아름다운 풍광을 만끽할 수 있다.

 

잔디와 모래가 없어서인지 해수욕과 태양욕을 즐기는 분들은 없다. ㅎ

 

결혼식을 올린 신랑신부들을 종종 볼 수 있다.

이곳은 겨울궁전, 성 이삭성당, 페트로파블로프스키 요새 등을 네바 강과 함께 
사진 배경으로 하기엔 더할 수 없이 아름다워 관광객들 뿐 아니라 결혼식을 마친 
신랑 신부가 친구들과 함께 와서 샴페인을 터뜨리며 행복한 앞날을 기원하는 곳이기도 하다. 

또한 이미 100년이 넘은 예수의 다리 등 네바 강의 12개 다리들은 
조각품들이 각기 다르고, 얼음이 녹는 초여름부터 새벽에 양쪽으로 들리며 
배들이 발달된 운하를 통해 모스크바까지 다다른다. 
새벽에 부지런하면 교량 관리자와 이야기를 하고, 직접 가운데까지 내려가서 
이 광경을 만끽하는 행운도 누릴 수 있다.

 

오른쪽으로 네바 강 건너 일렬로 늘어선 에르미타주 박물관 풍경이 환상적이다. 

 

왼쪽으로 시선을 돌리면 보이는 페트로파블로프스크 요새이다.​

표트르 대제가 스웨덴 해군의 침공을 막기 위해 네바 강변의 하중도에 처음 건설했다. 
강국 러시아가 왜 스웨덴 해군을 경계했는지 의문일 수도 있는데 

당시 스웨덴은 유럽이 종교개혁과 30년 전쟁으로 내흥을 겪는 동안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이룩해 유럽 최강국으로 부상해 있었다. 


그리고 러시아는 원래 중심지였던 키에프 지방이 몽골에 의해 쑥대밭이 된 이후 
모스크바를 중심으로 국가를 개편한지 오래되지 않은 시절이었고 
인접국 스웨덴으로부터 큰 위협을 받고 있었다. 
표트르 대제가 오기 전 상트페테르부르크는 거의 아무것도 없는 늪지대였는데, 
이 도시가 거의 처음 기반을 닦은 곳이 이 요새 근처다.

지금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관광지 중 하나. 
가운데의 뾰족한 건물은 성당으로, 러시아 제국이 모스크바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천도한 이후의 차르와 황후들의 관이 있다. 
표트르 대제부터 알렉산드르 3세까지는 사후 안장되었고 
마지막 차르 니콜라이 2세는 러시아 혁명 이후 예카테린부르크에서 처형된 후 
암매장되었다가 소련 붕괴 이후 시신을 수습해 1998년 여기에 가족과 함께 안장되었다. 
그 외에도 제정 시대 여러 위인들이 한때 수감되었던 옛 감옥 등 
여러 구역이 다른 테마로 관리되고 있다. 
성벽이 그리 높지는 않지만 위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 시내를 내려다 볼 수도 있다.

성당은 표트르 대제가 상트페테르부르크를 건설할 때 가장 먼저 착공된 곳으로, 
1712년부터 1733년까지 약 21년에 걸쳐 세워졌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주교좌가 있었으나 1859년 성 이사악 대성당으로 

이전되었으며 현재는 카잔 대성당에 있다.

국립 트페테르부르크 대학교 상공에서 본 풍경

국립 트페테르부르크 대학교(St. Petersburg State University)는 

러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이다. 
1724년 1월 28일에 표트르대제가 세운 대학이었다. 
이 대학은 페테르부르크 대학교, 페트로그라드 대학교, 

레닌그라드 대학교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국립 트페테르부르크 대학교 상공에서 본 풍경

러시아에서 국립모스크바 대학교와 함께 일류학교로 쌍벽을 이룬다.

 

네바 강에서 본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교 캠퍼스 전경

 

국립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교

 

국립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교

 

국립 상트페테르부르크대 교정에 세워진 박경리 선생 조각상

국립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교에 2018년 6월 20일 
‘토지’의 작가 박경리 선생(1926~2008)의 동상이 세워졌다. 
대학 본관 뒤 동양학부 건물 옆 현대 조각공원에 세워진 
전신 높이 135cm의 작은 동상 앞면에는 선생의 시 ‘삶’의 마지막 구절인 
‘슬픔도 기쁨도 왜 이리 찬란한가’가 새겨졌다. 


2013년 11월 서울 중구 소공동 롯데호텔 앞 ‘푸슈킨 플라자’에 

러시아 대문호 알렉산드르 푸쉬킨(1799~837)의 동상이 세워진 것에 대한 

답례이자 한러 우호를 높이는 문화 교류의 하나로 추진됐다.

국내 작가의 동상이 해외에 세워지기는 매우 이례적이다. 
더욱이 지난해 상반기 상트페테르부르크대 한국학과에 

선생의 이름이 들어간 강좌가 개설되었다.

박경리 선생의 동상은 2015년 고향 통영과 
‘토지’의 최참판댁이 복원된 경남 하동에 세워진데 이어 
원주 단구동 박경리 문학공원 
그리고 상트페테르부르크대를 합쳐 모두 4개다. 
모두 서울대 조소과 권대훈 교수가 제작했다.

 

푸시킨의 집 박물관


바실리예프스키(Vasilevsky) 섬에 있는 푸시킨의 집 박물관 
(Literary Museum of the Institute of Russian Literature) 외관 보기

 

[영상] 바실리예프스키 섬 비르제바야 광장(Birzhevaya Platz)

 

표트르 1세의 오두막집 구글 지도

트리니티 브리지(Troitskiy Bridge)를 건너서 오른 쪽 네바 강변에 표트르 대제의 오두막 집이 있다. 

 

표트르 대제의 여름 궁전과 표트르 대제 오두막 집

여름 정원(Summer Garden) 내 표트르 대제 여름궁전에서 볼 때
네바 강 바로 건너 편 마주보는 곳에 표트르 대제의 오두막 집이 위치해 있다.

 

표트르 대제 오두막집 앞 표트르 대제 기념비

 

표트르 대제 기념비

 

표트르 대제 오두막집 박물관

 

표트르 대제 오두막집 박물관

 

상트페테르부르그 최초의 건축물인 표트르 대제의 오두막집

 

표트르 대제가 페트로파블로프스크 요새 건축을 감독하기 위해 1703년 5월 말경 
며칠 동안에 만들게 했다는 송판로 지은 오두막이다. 
지금은 박물관으로 표트르 대제가 만들었다는 보트도 전시되어 있다.

 

표트르 대제의 오두막집

표트르 대제의 통나무 오두막 집이다.
벽돌 건물은 이 오두막을 보호하기 위한 보호용 건물이다.

표트르 대제가 요새 건설과 궁전 건설이 끝날 때까지 무려 8년 동안 살았던 오두막집이다.


1918년부터 국가 관리에 들어갔다. 
박물관에는 북방 전쟁(1700-1721) 승리에 관련된 자료와 
상트페테르부르크 건설에 관한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18세기 모습 그대로 재현해 놓고 있으며 당시에 황제가 쓰던 생활용품과 침실 등을 볼 수 있다.

 

표트르 대제의 오두막집 내부

 

표트르 대제의 오두막집 내부

 

표트르 대제의 오두막집 내부

 

표토르 대제가 만들었다는 배
아마도 요새가 섬에 있다보니 섬에 드나들기 위해서 사용했던 배였던거 같다.

 

표트르 대제의 조각상과 배

 

러시아 순양함 오로라(Aurora)

​표트르 대제의 오두막 부근에 러시아 순양함 한 척이 영구 정박해 있다. 
순양함 오로라는 극동에서 러시아 해상 전력의 확장 프로그램 하에 
1897년에 시작하여 1903년에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새 해군본부에서 건조되었다.

1903년 11월 8일, 오로라 함은 파견함대와 함께 크론슈타트, 포클랜드, 알제리, 
스페시아, 비제르타, 페라에우스, 수에즈, 지부티 등을 거쳐 극동으로 배치되었다. 
하지만 그 파견함대는 1904년 2월 8일에 러일전쟁이 시작된 덕에 발트 함대에 배치되었다.

오로라 함은 러일전쟁 기간 동안 참전하였다. 
1905년 5월 27일에서 28일까지 벌어진 쓰시마 해전에서 완패하고 
미국의 식민지였던 필리핀으로 퇴각하였다. 
그리고 전쟁이 끝난 1906년 2월 오로라는 리바우 항으로 돌아갔다.

 

볼세비키 혁명의 시발점이 되었던 순양함 오로라(Aurora)

7000톤급 일반 순양함에 불과했었던 이 함정은 1917년 10월 1일 오전 9시 40분에 
함포 한방을 쏘아 올림으로써 오늘날까지도 많은 방문객들을 맞이하는 관광명소가 되었는데 
바로 그 신호탄 한발로 인해 러시아에서는 레닌을 선두로 한 볼세비키 혁명이 시작된 때문이다.

제2차 세계대전 때에는 육상 전투를 위해 양함의 대포만 떼어 사용하기도 하였다. 
전쟁이 끝난 후 현재 이곳은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배경에 삼성 광고판이 보인다.

 

[영상] Cabin of Peter the Great in St. Petersburg, Russia

 

 

 

 

 

 

 

피터와 폴 대성당 (Saints Peter and Paul Cathedral)

 

페트로파블로프스크 요새 안에 있는 러시아 정교회 건물이다. 
스위스인 건축가 도메니코 트레치니(Domenico Trezzini)에 의해 
1712년부터 건설이 시작되어 1733년에 완성되었으나 그 후 종루에 피뢰침이 없어서 
여러 차례 불타고 1850년에 철골로 된 첨탑이 서게 되었다. 

 

피터와 폴 대성당 (Saints Peter and Paul Cathedral)

피터와 폴 대성당(Peter and Paul Cathedral)은 30 x 60 미터의 
긴 직사각형 형태로 유럽 ​​건축의 전통에 따라 지어졌다.
표트르 대제의 희망에 따라, 모스크바 크렘린 안의 이반 대제의 종루보다 더 높이 지었다. 
이곳에는 표트르 대제에서 알렉산드르 3세까지의 역대 황제가 매장되어 있다.

금으로 도금된 종탑은 높이가 122.5m로 상트페테르부르크 시내 
어디서나 보이는 랜드마크 역할을 하고 있다. 
성당은 이탈리아의 건축가 D. 트레지니에 의해서 서구교회의 건축양식과 
고대 러시아 교회 건축 양식을 결합해 1712~1733에 만들어 졌다. 

 

피터와 폴 대성당 (Saints Peter and Paul Cathedral)

상트페테르부르크가 공식적으로 설립된 지 불과 한 달 만에 현장에 세워진 
최초의 목조 교회 공사가 시작되었고 교회는 1704년 4월 1일에 봉헌되었다. 
이 건물은 완전히 건축하는 데 더 오랜 시간이 걸렸고 
실제로 20년 여가 지난 1733년 6월 29일에 완공되었다.
종탑의 기저 역할을 하는 서쪽 정면은 정문 양쪽에 6개의 기둥으로 장식되어 있다.

 

피터와 폴 대성당 (Saints Peter and Paul Cathedral) 부분

대성당의 직사각형 바닥은 남서쪽에서 북동쪽으로 뻗어 있으며 
벽은 창틀에 천사의 머리가 달린 평평한 기둥으로 장식되어 있다. 

 

피터와 폴 대성당의 시계와 천사상

종탑의 시계는 네덜란드에서 1720년에 배송되어 45,000 루블에 구매되었다.
시계는 교회와 군주제 찬송가를 불렀고 18세기부터 현재까지 2번, 
혁명 기간과 위대한 애국 전쟁 기간에 멈췄다.
혁명 시대에 볼셰비키는 혐오스러운 왕조를 타도하기 위해 
시계에 총을 쐈고 그 총알 자국이 남아 있다. 

 

종탑 안의 편종(Carillon) 

표트르 대제의 요청에 따라 첨탑이 있는 종탑이 처음 세워졌다. 
표트르 대제는 스웨덴 사람들의 침략을 관찰하기 위해 전망대가 필요했다. 
종탑은 네바 땅이 러시아로 귀속된 것을 상징했다. 
표트르 대제는 건설 중인 도시가 자랑스러웠고, 수도의 파노라마를 감상하기 위해 
개인적으로 외국인 손님과 종탑으로 올라가 전망을 보여주곤 했다.

 

편종(Carillon) 

기둥으로 장식된 다층 100미터 종탑은 대성당의 주요 부분이다. 
위쪽을 향한 세 번째 층은 금박을 입힌 8 피치 지붕으로 장식되어 있으며 
거대한 흰색 돌 프레임에 4개의 둥근 창문으로 장식되어 있다.

 

편종(Carillon) 

지붕 위에는 좁은 수직 개구부가 있는 우아한 팔각형 드럼이 있다. 
그 위에는 40m의 첨탑이 설치된 얇은 황금 포탑이 있는 높은 황금 왕관이 있다. 
피터와 폴 대성당의 종탑에는 103개의 종이 있으며, 원래의 종은 31개이다.

 

피터와 폴 대성당 외부

동쪽 정면에는 러시아 예술가 티토프(P. Titov)의 프레스코 화가 있다. 
"그리스도 앞에서 사도 베드로와 바울의 모습". 

 

그리스도 앞에서 사도 베드로와 바울의 모습

 

피터와 폴 대성당의 첨탑에 있는 천사 풍향계

다층 성당 종탑 꼭대기 첨탑에는 네덜란드인 독일인 폰 볼리스 (von Bolis)가 만든 
6.5 미터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날으는 천사의 모습이 구리 도금 시트로 장식되어 있다. 
날개 길이는 3.8 미터, 높이는 3.3m, 구조물의 무게는 250kg이다. 
건물 위쪽에 천사는 운명의 변덕으로부터 새로운 러시아 수도의 수호자이다.

 

첨탑에 있는 천사 풍향계

표트르 대제는 날아 다니는 천사를 보지 못했으며 종탑이 미완성된 1725년 1월에 운명했다. 
1833년 6월 29일, 새로운 황후 안나 이바노브나(Anna Ioannovna)는 

대성당 봉헌식에서 대관식을 열고 축하를 받았다.

 

피터와 폴 대성당의 첨탑에서 바라본 네바 강

 

피터와 폴 대성당 내부

웅장한 기둥으로 세 부분으로 나뉘어 진 내부 공간은 
장엄하고 엄숙한 분위기가 흐르지만 참배자를 위한 사원이 아니다. 
기둥은 대리석, 벽옥, 로도나이트(rhodonite)로 장식되어 있다. 
바닥은 석회암 석판으로 포장되어 있다.

 

피터와 폴 대성당 내부 

성당 내부는 비교적 정교한 프레스코화, 화려한 샹들리에, 
인조대리석 기둥 등이 조화로운 화려함을 보인다. 
초록색과 분홍색의  코린트 양식의 대리석 기둥은 
실제 대리석이 아니라 페인트칠을 한 것이다.

 

피터와 폴 대성당 내부 

내부 장식은 20년이나 걸려서 만든 만큼 아주 훌륭하다. 
러시아 황제의 성당답게 넓은 공간에 충분한 빛을 받아들이며 
지주, 벽기둥, 대리석으로 된 벽과 다양한 색채의 아치, 
그리고 금박을 입힌 석고상과 갖가지 빛깔의 키르시탈 샹들리에 등 
어느 것을 보아도 훌륭하다.

 

돔 아래 로얄 문(Royal Door) 메인 이코노스타시스(Iconostasis)

떡갈나무를 조각하고 금박을 입혀 장엄함을 강조하고 있다.           
'이코노스타시스'는 원래 그리스어로 ‘이콘(icon)을 거는 장소’의 뜻으로 사용하였다. 
동방교회의 성당에서 신도들을 위하여 만든 신랑부(nave)와 
성직자를 위하여 만든 내진 (內陣) 사이에 ‘이콘’을 걸어 
칸막이를 한 장벽이란 의미로 '성장(聖障)'이라고도 한다.

비잔틴과 러시아 정교 교회에서 성당 전체 건물과 성당 내 가장 신성한 장소를 
분리시키는 경계막으로 보통은 규율에 따라 성화상을 장식한다.

 

피터와 폴 대성당 내부 

실내장식만 약 20년이 소요된 만큼 황제의 성당에 걸맞게 내부 공간이 넓고 햇볕이 잘 든다. 
지주, 벽기둥, 대리석 벽, 다양한 색채의 아치, 금박의 석고상, 그리고 다양한 빛깔의 샹들리에 등 
모든 것이 훌륭한데, 특히 이코노스타스(성막)는 떡갈나무를 조각하여 금박을 붙여 장엄함 그 자체다.

 

황제의 궁륭 (Tsar's Canopy)

황제를 비롯한 황실 가족이라 할지라도 성당에서는 선채로 예배를 드려야했다.
다만 일반 신자들과 다른 점은 지정된 자리(사진)에서 예배를 보았다.

 

피터와 폴 대성당 천장 

 

피터와 폴 대성당 내부

 

피터와 폴 대성당 내부 무덤

피터와 폴 대성당을 제국의 무덤으로 바꾸겠다는 생각은 표트르 대제의 뜻이었다. 
나무로 된 피터와 폴 교회의 첫 번째 무덤은 캐서린 황제의 두 살된 딸이 죽었을 때 설치되었다.

 

표트르 대제 묘

1725년 1월에 갑작스럽게 사망한 표트르 대제의 시신은 네바 강의 얼음 위에서 
종소리와 대포가 울리면서 미완성 된 피터와 폴 교회로 옮겨졌다. 

 

표트르 대제와 아내 아내 캐서린 1세의 묘

표트르 대제의 무덤에는 왕의 흉상, 꽃 및 세인트 앤드류의 해군 깃발이 표시되어 있다. 
그 옆에는 아내 캐서린 1 세와 딸 옐리자베타 페트로브나(Elizaveta Petrovna)가 묻혀 있다. 

 

알렉산드르 2세와 Dagmar de Danemark 공주 묘

 

보석이 박혀 있는 황제 니콜라이 2세(Tsar Nicholas II)와 부인의 묘

성당의 한쪽에는 우랄(Ural)산맥 부근에 묻혀 있다가 1998년 이곳으로 옮겨진 
니콜라스 2세와 그의 가족묘(Maria와 Alexei 제외)가 안치되어 있다. 
이들의 시신은 DNA 분석을 통해 확인되었다.

니콜라이 2세[Aleksandrovich Nikolai II, 1868~1918] 는 알렉산드르 3세의 아들로 
러시아의 마지막 황제(재위 1894~1917)였다. 
적극적인 극동 진출로 러일전쟁을 초래하여 국내에서는 혁명이 일어났으며 
2월혁명(1917)으로 제정이 붕괴되었다.

 

니콜라이 2세(Tsar Nicholas II) 황제 부인인 카트리나 예배실

 

카트리나 2세 묘

이곳에는 표트르 대제부터 알렉산드르 3세(1894년 사망)까지, 역대 황제가 잠들어 있다. 
또한 1998년 7월 17일에 예카테린부르크에서 발굴되어 이곳에 다시 매장된 
니콜라이 2세와 그 가족의 묘지도 있다.

 

로마노프 왕조의 계보 

 

스테인드글래스의 성 베드로와 바울

 

스테인드글래스의 성 유다와 성 바르바나 

 

부활하는 예수 스테인드글래스

 

대공 무덤(Grand Ducal Tomb)

그랜드 듀칼 무덤은 피터와 폴 대성당 옆에 있는 작은 돔형 구조의 건물이다.
황제가 되지 못한 왕족들의 묘로 사용하기 위해서 1896년 러시아 건축가 
다비드 그림(David Ivanovich Grimm)의 설계로 지어졌다.

 

대공 무덤(Grand Ducal Tomb)

영묘는 최대 60개의 무덤을 수용할 것으로 예상되었지만 

러시아 혁명 당시에는 13개에 불과했다. 
소련은 건물을 도시 역사 박물관으로 개조하기 위해 무덤을 파괴했다. 
무덤은 나중에 복원되었다. 

 

대공 무덤(Grand Ducal Tomb) 내부

내부는 대리석, 모자이크 및 오르몰루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다. 
러시아의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 대공은 1908년에 처음으로 영묘에 안치되었다. 
다른 8명의 왕족의 시신은 대성당에서 이곳으로 옮겨졌다. 

 

[영상] 피터와 폴 대성당 (Saints Peter and Paul Cathedral)

 

피터와 폴 대성당 (Saints Peter and Paul Cathedral) 조감도
피터와 폴 대성당 앞에 상트페테르부르크 조폐국 (Saint Petersburg Mint 1716~1824)이 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조폐국 (Saint Petersburg Mint)  조감도

상트페테르부르크 조폐국은 러시아에서 유일하게 금속주화를 만들었던 곳이다.
생산량은 세계적으로 높은 편이며 현재도 특별한 기념주화나 메달, 배지 등을 만들고 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조폐국 (Saint Petersburg Mint)

 

1899년 조폐국에서 만든 5루불 주화

 

트루베츠코이 바스티온 감옥(Prison of Trubetskoy Bastion)

상트페테르부르그 조폐국 건물 뒤 네바강 벽 쪽으로 
트루베츠코이 바스티온 감옥(Prison of Trubetskoy Bastion)이 있다.

 

트루베츠코이 바스티온 감옥(Prison of Trubetskoy Bastion)

 

트루베츠코이 바스티온 감옥(Prison of Trubetskoy Bastion)

 

트루베츠코이 바스티온 감옥(Prison of Trubetskoy Bastion) 정문

 

네바 강에서 본 트루베츠코이 바스티온 감옥 성벽

 

트루베츠코이 바스티온 감옥(Prison of Trubetskoy Bastion) 내부

 

표트르 대제와 그의 아들 비운의 알렉세이 (그림) 

러시아의 가장 위대한 황제였던 표트르 대제는 인물 그 자체만으로도 압도적 존재였다. 
그는 키 2m에 가까운 거구에, 지치지 않는 에너지를 지녔다. 
그가 노여워 고함을 칠 때면,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궁전 전체에 울려 퍼졌다. 
개혁왕 표트르 대제는 그 목소리로 러시아를 중세의 긴 잠에서 깨웠다. 
유럽 진출의 교두보를 마련하고자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수도를 옮겼다. 
평생을 '전사 군주(Royal Warrior)'로 자처하며 끊임없이 영토를 확장해, 
러시아를 새로운 강국으로 부상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그의 급격한 개혁은 잘 이해받지 못했고 반대에 부딪혔으며, 
크고 작은 반란이 이어졌다.

니콜라이 게(Ge·1831~1894)는 그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페트로고프에서 황태자 알렉세이 페트로비치를 문책하는 표트르 대제'(1871)에서 
개혁을 둘러싸고 벌어진 갈등 현장으로 우리를 데려간다. 
표트르 대제는 노여운 표정으로 아들을 쏘아본다. 
바닥에 떨어져 있는 문서는 그들 사이에 격렬한 논쟁이 있었음을 말한다. 
창백하고 무기력하게 서 있는 황태자는 러시아 정교회의 지지를 받는 보수적 인물이었다. 
아버지와 겪는 갈등 속에서 스스로 왕위를 포기했던 황태자는 
반란죄로 체포돼 투옥 중 의문의 죽음을 당한다. 
아버지인 표트르 대제가 벌인 일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이 부자(父子)의 유명한 대립은 후에 러시아 문화의 근간을 이루는 
서구주의자와 슬라브주의자 간의 대립으로 발전한다. 
서구주의자들은 러시아는 서유럽 일원이라고 생각하는 반면 
슬라브주의자들은 러시아 정교회가 러시아의 정신적 핵심이며 
서유럽과는 다른 국가라고 생각한다. 

표트르 대제의 개혁에 대한 평가를 둘러싼 사상적 대립은 
결코 소모적인 것만이 아니어서 오늘날의 러시아를 있게 한 힘이기도 하다. 
도스토예프스키, 톨스토이 등 러시아가 배출한 세계적 문호들도 
이 대립적 사유 속에서 인간과 세계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에 도달했다. 
최근 러시아가 유럽연합에 대항하여 유라시아 연합을 주장하고, 
유라시아 연합 내부에서는 카이사르 같은 패권을 주장하는 
이중적 태도를 보이는 것 역시 이런 전통과 관련이 있다.

 

중세 고문 도구 전시관 (Torture instruments of the Middle Ages)

 

[영상] 트루베츠코이 바스티온 감옥(Prison of Trubetskoy Bastion) 

 

 

 

페트로파블로프스크 요새(Petropavlovskaya Fortress) 위치 구글 지도

 

상트페테르부르크 약도

 

하늘에서 본 네바강과 페트로파블로프스키 요새 토끼섬(vasilievsky island) 전경
 
페트로파블로프스크 요새(Petropavlovskaya Fortress)는 네바강(江)의 강폭이 가장 
넓어지는 하구의 삼각주 지대에 있는 토끼섬(Zayachy island) 에 축조한 요새이다. 
이 요새는 표트르 대제가 스웨덴군으로부터 러시아를 지키기 위해 건설했다.
요새를 짓기 전까지는 일대가 습지여서 사람이 별로 살지 않았으므로, 
이 요새는 상트 페테르부르크 탄생의 계기가 되는 곳이다. 

뒤쪽 네바 강을 가로지르는 긴 다리는 트리니티 브리지(Trinity Bridge)이고
앞에 보이는 크론베르크스키(Kronverksky) 해협을 가로지르는 작은 다리는 
요아노프스키 브리지(Ioannovsky Bridge)이다.

크론베르크스키(Kronverksky) 해협은 페트로그라드스키(Petrogradsky) 섬과 
토끼섬(Zayachy island) 사이를 흐르는 길이 약 1km, 폭 약 50m, 
깊이 4m (13ft) 정도의 작은 해협이다. 
 
동쪽으로는 크론베르크스키(Kronverksky) 다리, 
서쪽으로는 요아노프스키(Ioannovsky) 다리에 걸쳐 있다.

요아노프스키(Ioannovsky) 다리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 건설된 첫 번째 다리였다. 
원래는 1703년에 떠 다니는 목조 다리로 지어졌지만 수년에 걸쳐 더 튼튼한 재료로 보강 및 재건되었다.

 

페트로파블로프스키 요새 조감도

페트로파블로프스키 요새는 네바 강(江)의 강폭이 가장 넓어지는 
하구의 삼각주 지대에 있는 토끼 섬에 축조한 요새로 
상트페테르부르크 탄생의 계기가 되는 곳이다. 

요새를 짓기 전까지는 일대가 습지여서 사람이 별로 살지 않았기 때문에 
표트르 대제가 스웨덴 군으로부터 러시아를 지키기 위하여 
1703년 스웨덴에게 정복당했던 땅에 상트페테르부르크 시를 세워 
러시아의 새로운 수도로 삼고자 했다.

​그 당시 러시아는 스웨덴과 대(大)북방 전쟁(1700~1721)을 치르던 중이었는데 
페트로파블로프스크 요새는 이 도시에 세워진 최초의 건축물로 
요새를 둘러싼 두꺼운 화강암 성벽은 이것은 1706년부터 약 35년이 걸려 완성된 것이다.

1720년경 이후로 요새는 군사 주둔지이자 정치범들을 수용하는 감옥으로 사용되었다. 
나중에는 감옥과 대성당 하나를 포함할 정도로 확장되었으며, 
러시아를 근대 국가로 만들려는 표트르 대제의 결심을 보여 주는 기념물 중 하나라 할 수 있다

페트로파블로프스키 요새 안내도

1. The St. Peter and Paul Cathedal  2. The Yawl House   3. The Commandant's House
4. The Mint   5. The Engineers House   6. The St. Johns Bridge   7. The St. John's Gate
8. The Peter's Gate   9. Artillery Arsenal   10. The Guard-house  11. The Nevskie Gate
12. The Commandant's Pier   13. The Naryshkin Bastion   14. The Nikolskie Gate
15. The Zotov Bastion   16. The Vasilyevskie Gate   17. The Trubetskoi Bastion
18. The Alexeevsky Ravelin   19. The Museum of Artillery

 

네바 강 겨울궁전 방향으로 본 페트로파블로프스키 요새 조감도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사실상 표트르 대제의 의지에 의해 창조되었다. 
도시가 건설되는 동안, 그는 이따금 1703년 페트로파블로프스크 요새 북쪽에 
단 3일 만에 지은 간소한 통나무집에 머무르곤 했다. 
스웨덴 군대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 한 번도 닿지 못했으므로, 

사실 전쟁 중에 요새가 필요했던 일은 없었다.  

1733년에는 요새의 중앙에 예수의 제자인 베드로(페트로)와 바울(파울로)을 기념하는 
목조 건물의 러시아 정교회가 세워졌는데, 여기서 페트로파블로프스크라는 이름이 생겨났다.

​페트로파블로프스키 교회는 스위스인 건축가 도메니코 토레지니에 의해 
1712년부터 건설이 시작되어 1733년에 완성되었으나 그 후 종루에 피뢰침이 없어서 
여러 차례 불타고 1850년에 철골로 된 첨탑이 서게 되었다. 
표트르 대제의 희망에 따라, 크렘린 안의 이반 대제의 종루보다 더 높이 지었다. 
이곳에는 표트르 대제부터 처형당한 니콜라이 2세까지 
러시아의 모든 차르들이 안장된 최후의 휴식처가 되었다.  

한편 페트로파블로프스크 요새는 1917년 10월 혁명 기간 동안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처음에는 분노한 대중들로부터 황제 측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 사용되었으며, 
결국에는 볼셰비키 파의 손에 점령당했다. 
1924년 요새는 박물관으로 개조되었다.

페트로파블로프스크 요새는 혁명이 도래하기 전까지 
러시아의 차르들이 누렸던 절대적인 권력을 상징하는 기념물이다. 
이 요새는 1990년 유네스코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군사 역사박물관(Military Historical Museum) 방향으로 본 페트로파블로프스키 요새

 

'페트로-파블로프스키'는 성경의 '베드로- 바울(Peter and Paul)'이라는 이름의 
러시아어 표현으로 바로 이 요새 안에 있는 두개의 성당을 일컫는다. 
요새는 처음에는 나무로 지어졌으나 나중에 부분부분 단계별로 돌로 재건축되었다.

 

네바 강을 가로 질러 본 페트로파블로프스키 요새

상트페테르부르크는 강어귀에 면적 45.6㎢에 이르는 커다란 삼각주상에 발달된 항구로, 
예로부터 발트해(海) 제일의 무역항을 이루었다. 
네바 강은 전유로(全流路)가 항행이 가능할 뿐 아니라 백해(白海)와 발트해를 연결하고, 
모스크바~볼가강 유역의 도시, 카스피해∼흑해를 잇는 중요한 수상교통로 구실을 한다.

 

네바 강을 가로 질러 본 페트로파블로프스키 요새 

요새를 둘러싼 두꺼운 화강암 성벽은 1706년부터 약 35년이 걸려 완성된 것이다. 
1733년에는 요새의 중앙에 예수의 제자인 베드로(페트로)와 바울(파울로)을 
기념하는 목조교회가 세워졌는데, 여기서 페트로파블로프스크라는 이름이 생겨났다.

 

페트로파블로프스키 요새 성벽

화강암 성벽의 두께는 8m에서 12m로서 견고하기 이를 데 없으며 
적에게 완전히 포위되더라도 요새 내에서의 모든 생활을 
정상적으로 운영하면서 적에 대항할 수 있도록 수도와 무기 제조창, 
식량창고, 성당 등 기본 생활 시설들을 완벽하게 갖추고 있었다.

 

페트로파블로프스키 요새 성벽

페트로파블로프스키 요새는 적의 급습으로부터 도시를 지키기 위해 
1703년 세워진 요새로 18세기 중반부터는 형무소를 겸하였다. 

이 복합구조물은 또한 대성당을 포함하고 있다. 
이 대성당의 디자인은 D. Trezzini가 하였다. 
이 대성당은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가장 높은 121.8m에 이르는 첨탑을 가지고 있다. 

요새에는 대성당 이외도 러시아 해군의 아버지로 불리는 사람의 집과 
표토르 1세의 작은 보트의 사본을 보관하고 있는 곳 그리고 그 이외에도 
조폐국 등 중요한 곳을 많이 품고 있다.

 

요새로 가는 최초의 다리, 요아노프스키 브리지(Ioannovsky Bridge)

 

요아노프스키 브리지(Ioannovsky Bridge) 조감도

 

요아노프스키 브리지(Ioannovsky Bridge)

 

요아노프스키 브리지(Ioannovsky Bridge)

 

요아노프스키 브리지(Ioannovsky Bridge) 야생 토끼 조각상

들어가는 길 곳곳에서 이 섬이 토끼섬이라는 징표를 보여 준다.
야생 토끼 조각상은 도시의 기념일인 2003년 5월 17일 설치되었다.

홍수를 피하려고 한 토끼가 그 순간 섬으로 배에서 내리고 있던 
피터 대왕의 장화에 뛰어 올랐다는 전설이 있다. 
이 행사를 기념하기 위해 섬에 이 이름이 주어졌고 
바로 여기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설립이 시작되었다.
조각품은 또한 상트페테르부르크 홍수에 헌정된 특별한 기념물이 되었다.

 

다리 위에서 동전으로 토끼를 맞추면 행운이 따른다고 한다.

 

1740년에 건립된 페트로파블로프스키 요새 입구

 

입구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귀여운 토끼 조각상이 반겨준다.

 

두 번째 문을 향하여

 

성 표트르 문 (St. Peter's Gate)

성 표트르 문 (St. Peter's Gate)은 요새로 들어가는 메인문으로 
1717년 스위스 출신 건축가 도메니코 트레치니(Domenico Trezzini)가 만들었다. 
요새의 건축물 중에서 거의 유일하게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도메니코 트레치니는 표트르 대제가 새로운 러시아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건물을 설계하도록 제안받았다.
도시가 설립된 1703년 이래로 그는 가장 대표적인 건물에 실질적으로 기여했다. 

 

성 표트르 문 (St. Peter's Gate) 부분.

표트르 문 입구 위에는 러시아 황실을 상징하는 쌍두 독수리상이 걸려 있고 
그 위로 성서에 나오는 바울의 이야기가 묘사된 조각이 있다.

 

성 표트르 문 (St. Peter's Gate)을 들어서서

 

표토르 대제의 동상 (Statue of Peter the Great), by Mikhail Chemiakin

러시아 조각가 미하일 케미아킨(Mikhail Chemiakin) 작품으로
높이 0.36m (1ft 2in)인 화강암 바닥에 기념비 높이 1.90m (6ft 3in)로 설치되었다.
1991년 6월 6~7일에 설치되었다.

케미아킨은 표트르 대제가 죽기 6년 전인 1719년 라스트렐리가 찍은 
표트르의 얼굴 마스크를 사용하여 동상의 머리를 만들었는데, 
이 사실이 동상의 바닥에 언급되어 있다. 
그러나 그는 다른 신체 부위를 확대하여 피터를 기괴한 방식으로 표현했다. 


따라서 이 조각상은 처음에는 지역 주민들에 의해 비판을 받았으며 
기물 파손을 방지하기 위해 보호해야 했다. 
나중에 케미아킨의 견해를 많은 사람들이 점차 이해하게 되었다. 

 

표토르 대제의 동상 (Statue of Peter the Great), by Mikhail Chemiakin

케미아킨은 8년 동안 조각상 작업을 했고 세 가지 버전을 만들었는데, 
나머지 두 개는 프랑스 노르망디와 케미아킨이 당시 살았던 뉴욕의 클레버 락에 있다. 

동상을 손으로 만지면 표트르 대제의 기운이 따른다고 해서

사람마다 손으로 만지다보니 손 부분이 반질반질하다.

 

네바(Neva) 게이트 

 

네바(Neva) 게이트의 높이는 12 미터, 너비는 12.2 미터이다. 
네바(Neva) 게이트는 사형 선고를 받은 죄수들이 처형되기 위해서 
마지막으로 끌려 갔던 곳이라서 "죽음의 문"이라고도 불린다. 

어두컴컴한 감옥에 있다가 마지막 순간이나마 아름다운 도시와 바다와 하늘이 
탁 트인 풍경을 바라보는 심정이 어땠을까 잠시 헤아려 본다.

 

1787년에 건립된 네바(Neva) 게이트 

 

네바 강이 범람했을 때 수면의 높이를 기록해 두었던 표지 동판

 

네바(Neva) 게이트

 

네바 게이트의 아치(arch) 왼쪽과 오른쪽에는 삼각형 모양의 돌출부를 지탱하는 이중 기둥이 있다. 
기둥과 지하실은 은백색 광택의 화강암으로 만들어져 있다. 

 

컴맨던트 부두(Commandant's pier)

 

컴맨던트 부두(Commandant's pier)

 

컴맨던트 부두(Commandant's pier)에서 인증샷

 

컴맨던트 부두(Commandant's pier)에서

 

컴맨던트 부두(Commandant's pier)에서

 

따뜻한 햇볕이 내리쬐는 날이면 해수욕과 태양욕을 즐기려는 사람들로 붐빈다.

 

컴맨던트 부두(Commandant's pier)에서 본 네바 강 풍경

 

컴맨던트 부두(Commandant's pier)와 네바 강

 

네바 강에서 본 페트로파블로프스키 요새 성벽과 컴맨던트 부두 풍경

 

[영상] 걸어서 페트로파블로프스키 요새 (Peter and Paul Fortress)

 

앙증맞은 토끼 조각상

전망대 (Nevskaya Panorama)로 오르는 길에 토끼 네 마리가 한 마리를 끌어 올리는 
앙증맞은 조각상이 미소를 머금게 한다.

 

힘내라 토끼야 ~ !!

 

전망대 (Nevskaya Panorama)

 

전망대 (Nevskaya Panorama)

 

전망대 (Nevskaya Panorama)

 

전망대 (Nevskaya Panorama)

 

전망대 (Nevskaya Panorama)에서 인증샷

 

나리시킨스키 요새(Naryshkin Bastion)

성벽에는 총 5개의 문과 6개의 망루가 있다.
요새 건설이 완료된 것은 1703년으로 이날은 상트 페테르부르크가 탄생된 날이기도 하다.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높고 두터운 벽은 과거에 정치범의 감옥으로도 
사용된 일이 있어서 역사의 어두운 그림자가 엿보인다. 

 

나리시킨스키 요새(Naryshkin Bastion)

 

나리시킨스키 요새(Naryshkin Bastion)

 

페트로파블로스키 요새 전경

페트로파블로스키 요새 전경에서 볼 때 하단 중앙에 보이는 화살표 모양의 부분이
나리시킨스키 요새(Naryshkin Bastion)이다. 
그 옆에 컴맨던트 부두(Commandant's pier)가 있어서 기동력을 갖추고 있다.

 

나리시킨스키 요새(Naryshkin Bastion) 상공에서 본 페트로파블로프스크 요새 전경

 

나리시킨스키 요새(Naryshkin Bastion)의 대포

습지대의 섬에 요새를 만드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침입해 오는 스웨덴 군대로부터 러시아를 지키려면 건설을 서둘러야만 했다. 
마침내 표트르 대제 스스로 선두에 서서 지휘한 결과 가을에는 대포의 설치가 끝났다.
6개의 성채 가운데 네바 강을 향한 나리시킨스키 요새에서는 매일 정오를 알리는 공포를 쏜다.

 

전망대 (Nevskaya Panorama)에서 본 첨탑들

 

전망대 (Nevskaya Panorama)에서 바라본 네바 강

 

전망대 (Nevskaya Panorama)에서 바라본 네바 강

 

전망대 (Nevskaya Panorama)

 

전망대 고수다레프(Gosudaryev) 망루

 

전망대 고수다레프(Gosudaryev) 망루

요새를 둘러싼 두꺼운 벽(높이 12m,폭 4m)에는 5개의 문이 만들어져 있는데, 
이것은 1706년부터 약 35년이 걸려 완성된 것이다.

 

전망대 (Nevskaya Panorama)에서 내려가는 길

 

[영상] 전망대 (Nevskaya Panorama)

 

 

 

 

[영상] 네바 강과 Trinity Bridge

 

마르스 광장(Mars Field, 화성 필드)

마르스 광장(Mars Field, 화성 필드)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중심부에 위치한 9헥타르 규모의 공원이다. 
광장의 이름에 마르스(Mars)가 들어간 이유는, 이 장소가 오랜 세월동안 
군사 행진과 훈련의 장소로 쓰였기 때문이다.

원래 이 장소는 "큰 풀밭"(Big meadow)이라고 불렸으나, 대북방 전쟁에서 승리한 이후 
"즐거운 풀밭"(Funny field)으로 불리다가 18세기 후반에 
"차르의 풀밭"(Tsaritsyn Meadow)으로 부르게 되었다. 

표트르 1세의 통치 시기에 비로소 이곳이 군사 행진과 훈련을 위한 

장소로 사용되기 시작했고 1805년경부터 고대 전쟁의 신인 

화성(Mars)을 기리기 위해서 "마르스 광장(Mars Field)" 또는 

"화성 필드(Mars Field)"라는 현재의 이름이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1917년의 2월 혁명이 진행 중일 때 이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학살당했고, 
이후 볼셰비키가 이곳에 그들을 기리기 위해 꺼지지 않는 불을 설치하였으며  
이 광장의 이름을 "혁명 희생자의 광장"이라 명명하였다.

 

화성 필드(Mars Field)와 네바 강 트리니티 브리지(Troitskiy Bridge)

 

화성 필드(Mars Field) 꺼지지 않는 불꽃 후방 상공에서

네바 강을 가로지르는 트리니티 브리지(Troitskiy Bridge)를 내려다 본 모습

 

네바 강과 트리니티 브리지(Troitskiy Bridge)

트리니티 브리지(Trinity Bridge)는 파리의 에펠탑을 건설한 프랑스 토목 기술자 
구스타브 에펠(1832~1923) 등이 참여한 프랑스 회사에 의해 1897~1903년 사이에 지어졌다.
네바 강을 가로 지르는 세 번째 영구적인 다리이다. 
길이는 582m (1,909 피트), 너비는 23.6m (77 피트)이다.

다리는 북쪽 끝에 서 있던 올드 트리니티(Trinity - Petrovsky, 올드 삼위일체) 대성당에서 
이름을 따 왔는데 이 대성당은 표트르 대제가 1721년 북방 전쟁의 승리를 기념하여
러시아의 첫 번째 황제로 선포하고 취임한 곳으로 소비에트 정권이 
1933년에 파괴 명령을 내릴 때까지 도시에서 가장 소중한 기념물 중 하나였다. 

 

트리니티 브리지(Trinity Bridge)는 아르누보 디자인의 랜드 마크다.

다리는 예술적 주물로된 주철 격자, 랜턴이 달린 화강암 철탑, 
아르누보 스타일의 금속 3색 랜턴으로 장식되어 있다.

 

트리니티 브리지의 로스트랄 오벨리스크(Rostral Сolumns)

트리니티 다리는 웅장한 플로어 램프와 

오벨리스크를 자랑하는 가장 인상적인 다리 중 하나다. 
다리에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칸델라 브라의 상징으로 장식된

화려한 난간, 서로 다른 두 종류의 화강암으로 만든 두 개의 

인상적인 피라미드 모양의 오벨리스크가 있으며 둥근 램프의 

틀을 지지하는 4면 플랫폼으로 기초에 장식되어 있다.

수보로프 광장(Suvorov Square)에서 다리 입구 양쪽 

옆에 있는 오벨리스크는 1955년에 리모델링되었다. 
길이는 43미터 (141 피트)로 확장되었고 다른 금속 스팬을 모델로 한 모습이다. 
화강암 아치 경사면이 왼쪽 제방에 설치되었다. 

 

트리니티 브리지 인증샷

 

트리니티 브리지 인증샷

 

네바 강과 트리니티 브리지

 

네바 강과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

 

트리니티 브리지에서 인증샷

 

트리니티 브리지에서 인증샷

 

트리니티 브리지의 로스트랄 오벨리스크(Rostral Сolumns)

 

열리고 닫히는 트리니티 브리지(Trinity Bridge)

 

열리고 닫히는 트리니티 브리지(Trinity Bridge)


대형 선박들이 드나들게 하기 위해서 다리를 서서히 

들었다 내렸다 하는 흥미로운 장면을 연출하고 있다.

 

[영상] Trinity Bridge Opening 

 

네바 강 상공에서 본 트리니티 브리지

 

수보로프 광장 (Suvorovskaya Square)

수보로프 광장은 트리니티 브리지와 화성 필드(Mars Field) 사이에 있으며 
살티코프 맨션 (Saltykov`s House, 왼쪽)과 마블 팰리스(Marble Palace) 가운데에 있다.

 

수보로프 기념비(A. V. Suvorov statue)

수보로프 기념비(A. V. Suvorov statue)는 계몽주의 시대에 활동한 러시아 신고전주의 조각가
미하일 코즐로프스키(Mikhail Ivanovich Kozlovsky)가 제작한 청동 조각품으로
수보로프 광장(Suvorovskaya Square) 중앙에 있다.

알렉산더 수보로프(Alexander Vasilyevich Suvorov 1729~1800)는 러시아 장군이자 백작이었다. 
수보로프는 러시아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군 사령관 중 한 명이다. 
그는 러시아뿐만 아니라 다른 국가에서도 수많은 메달, 타이틀 및 영예를 수상했다. 


수보로프는 러시아의 국경을 확장하고 전쟁에 관한 이론을 유산으로 남겼다. 
그는 여러 군사 매뉴얼의 저자였고, 그가 명령한 모든 전투에서 패한 적이 없다.
러시아의 여러 군사 아카데미, 기념물, 마을, 박물관 등이 그에게 헌정되었다. 

 

마블 팰리스(Marble Palace)

마블 팰리스(Marble Palace)는 신고전주의 대리석 궁전으로 

여름 정원과 수보로프 광장 사이에 있다.
이 궁전은 캐서린 대제(Catherine the Great 1729~1796)가 가장 좋아했던 
그리고리 올로브(Grigory Grigoryevich Orlov 1734~1783) 백작을 위한 선물로 지어졌다.

그리고리 올로브는 캐서린의 남편인 러시아의 표트르 3세를 전복시킨 

쿠데타를 이끌었고 캐서린이 황후가 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몇 년 동안 그는 사실상 캐서린과 공동 통치자 였지만, 
캐서린과의 반복되는 불신과 다른 고문들과의 적대감으로 인해 권력에서 밀려났다.

 

 화성 필드(Mars Field)에서 본 마블 팰리스

 

마블 팰리스(Marble Palace)와 알렉산드르 3세의 승마 동상.

알렉산드르 3세(Alexander Alexandrovich Romanov)는  로마노프 왕조의 13번째 군주다.
그는 1845년 3월 10일 당시 황태자였던 알렉산드르 2세와 

마리아 황후 사이에서 차남으로 출생했다. 
애칭은 사샤. 원래 사샤는 러시아 황제라는 자리에 관심이 없었고 
형 닉사와는 대조적으로 단순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러나 형 닉사가 결핵으로 세상을 떠나자 그를 이어 황태자로 책봉된다. 

형 닉사는 "내가 죽으면, 다그마르는 내 동생 사샤와 결혼해 주기를 바란다"는 

유언을 남겼는데 다그마르 공주는 덴마크 크리스티안 9세의 차녀로 

처음에는 사샤와 결혼하고 싶지 않았고 
사샤 또한 좋아하는 여자가 따로 있었다. 
하지만 닉사의 유언에 따라 서로의 마음을 열고 1866년 결혼했다. 

사샤는 원래 차르가 되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고, 
주변 사람들 전부 "그는 차르가 될 위인이 아니다." 라고 생각했다. 
주변 사람들이나 아버지가 생각한 인물은 맏형 니콜라이였으며 

알렉산드르 자신도 이를 받아들였고, 아예 똑똑한 형 덕에 자기가 정치를 하지 않고 

좋아하는 군대에만 집중해도 된다는 사실에 기뻐했다고 한다.

알렉산드르 3세는 러시아 황제들 중에서 표트르 1세 다음가는 거구로 키가 190cm에 달했다. 
유년기부터 그는 남다른 힘을 자랑했는데, 손가락으로 동전을 구부릴 정도였다. 
운동도 잘했고 사격 실력도 수준급이었다. 
솔로비요프는 그런 그를 ‘로마노프 가문의 헤라클레스’라고 부르며 놀라워했다. 


그의 완력을 잘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1888년에 알렉산드르 3세는 가족과 함께 크림 반도를 방문했다가 
기차를 타고 다시 수도로 가는 중이었는데, 
과속으로 인해 기차가 전복되어 황제가 탄 객차가 완전히 부서졌다. 
그런데 그 상황에서 알렉산드르 3세는 무너진 기차의 지붕을 
들어올리는 괴력을 발휘해서 가족들을 탈출시켰다. 
황실 일가는 황제의 힘 덕분에 무사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사고로 인해 알렉산드르 3세는 허리를 다치게 되었고 
급성 신장염에도 걸리게 되면서 건강이 갈수록 악화된다. 
그래서 그를 검진한 독일인 의사 에른스트 라이덴의 조언에 따라 
1894년 크림 반도의 리바디야에서 요양을 하였으나 요양생활 한달만에 사망했다.

 

알렉산드르 3세의 승마 동상

이미 황태자 시절부터 반동세력에 가담하여 자유주의에 대항하였던 그는 
아버지 알렉산드르 2세가 인민의 의지파에게 잔혹하게 폭탄 테러로 암살당하자 
국민들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을 갖게 되어 태도가 더욱 확고해졌다. 

그는 테러 주동자들과 관련자들을 모아 목을 매달았고 
자신의 아버지를 애도하기 위해 그리스도 부활 성당을 지었다. 
그리고 그는 차르로 즉위해 자신의 아버지가 폈던 정책들과는 전혀 반대로 나라를 돌린다.

상당히 전제주의적인 정치를 폈는데 자신의 아버지의 즉위 기간에 생겼었던 
개혁들 중에 사실상 농노해방을 제외하고 모두 철회했고 더욱 더 강한 차르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아버지를 급진파에게서 잃고 나서 
안 그래도 싫어하던 급진파를 증오까지 하게 되어 여러 급진파들을 잡아 
대대적으로 주요 지도자들의 모가지를 날려버렸다.

 
그런데 알렉산드르에 의해 목이 달아난 사람들 중 하나가 
알렉산드르 일리치 울리야노프, 즉 블라디미르 일리치 울리야노프, 
즉 레닌의 형이었다. 혁명가 형제들이라 불러도 되겠다.

그는 전제군주제를 강화하고 수호하는 데 노력을 아끼지 않았으며, 
이를 저해하는 것은 무엇이든간에 용납하지 않았다. 
즉위 초기에는 선제가 만들어 놓은 개혁의 분위기가 지속되었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본격적인 반동정치로 일관하였다. 
또한 후계자인 아들 니콜라이에게도 자신의 사상을 주입시키게 했고, 
니콜라이 2세 80여년 간 (1830년대~1910년대 후반 ) 계속된 
반동정치와 전제정치는 러시아 혁명이라는 참극을 만들었다.

 

알렉산드르 3세

종교회의 의장인 콘스탄틴 파베도노스체프를 비롯한 알렉산드르 3세 정부는 
의회민주주의와 언론의 자유, 보통교육 등과 같은 기본적인 것들마저 용납하지 않았다. 
오직 전제정치와 러시아 정교회, 그리고 국가를 우선시하는 국가주의만이 
러시아를 보전할 수 있다고 굳게 믿었다. 
이 때문에 한동안 혁명분자들의 활동은 물론 

온건한 자유주의자들까지도 억압받고 투옥되었다. 

이러한 정책은 여러 곳에서 마찰을 일으켰다. 
검열제도가 강화되고 교육의 자유는 축소되었다. 
젬스트보에는 점차 귀족층의 비중이 늘어났고 중앙 정부의 통제 또한 강화되었다. 
1889년에는 지방관리관이라는 새로운 직책을 만들어 

각 지방의 행정권과 사법권을 부여하였다. 
또한 반란에 실패했던 폴란드인과 유대인에게는 교육의 차별은 물론 
제한 구역을 두어 거주 이전의 자유도 빼앗았다.

그는 독일의 비스마르크와 사이가 나빠, 1894년 프랑스와 동맹을 맺었으며, 
프랑스의 자본을 끌어들여 시베리아 철도를 놓기 시작하였다. 
알렉산드르 3세는 부황(알렉산드르 2세)처럼 암살 위기를 여러 차례 겪었다. 
알렉산드르 3세의 암살을 시도하다 실패하여 처형당한 인물 가운데는 
훗날 러시아 혁명을 일으키게 되는 블라디미르 레닌의 큰형이 있었다.

이러한 정치적 상황 속에 이런저런 일에 신경을 쓰느라 바쁜 알렉산드르 3세는 
1894년 건강이 나빠졌고 1894년 11월 1일 아내 다그마르와 자녀들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이후에 즉위한 그의 장남 니콜라이 2세는 아버지 알렉산드르 3세와 마찬가지로 
전제정치를 하다가 러시아 혁명으로 폐위되면서 1918년 7월 17일 
그의 가족들(알렉산드라, OTMA, 알렉세이)과 함께 처형당했다.

 

마블 팰리스(Marble Palace) 외관

 

마블 팰리스(Marble Palace) 외관

 

마블 팰리스(Marble Palace) 내부

 

마블 팰리스(Marble Palace) 내부

 

 

 

[영상] Marble Palace in St. Petersburg, Russia

 

마르스 광장(Mars Field, 화성 필드) 전경

 

네바 강에서 폰탄 강을 가로지르는 프라체크니(Prachechny) 다리를 건너면

표트르 대제의 여름 정원이 있고 그 옆에 러시아에서 처음으로 

영원한 불꽃이 점화된 화성 필드(Mars Field)가 있다.

18세기 초 화성 필드 부지에 늪지대가 있었다. 
그 후, 이곳은 군사 리뷰의 장소로 바뀌었고 "볼쇼이 러그(Bolshoi Lug)"라고 불렸다. 
북부 전쟁의 승리를 기리기 위해 이곳에서 축하연와 축제가 열렸다. 
 
표트로 대제의 아내인 캐서린 1세의 궁전이 화성 필드(Mars Field) 근처에 세워졌고 
그에 인접한 영토는 "차리신(Tsaritsyn Lug)"로 알려지게 되었다.
1805년에야 화성을 상징하는 고대 전쟁의 신, 화성(Mars)를 
기리기 위해 마르스 필드(Mars Field)라 명명되었다.

 

1801년 화가 벤자민 페테르센이 그린 마르스 광장.

오른쪽에는 알렉산더 수보로프 기념비(A. V. Suvorov statue)가 있다. 
전경에서 마르스 광장(Mars Field) 왼쪽에는 마블 팰리스(Marble Palace)가 있다. 
근처에는 니콜라이 루미안체프(Rumiantsev) 백작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오벨리스크가 있다. 
배경 오른쪽에는 여름 정원이 있다.

모스크바 주립대학 본관 건물을 지은 건축가로 잘 알려진 
레프 루드네프(Lev Vladimirovich Rudnev 1885~1956)는 마르스 광장을 건축하면서
1917~19년에 아나톨리 루나차르스키(Anatoly Vasilyevich Lunacharsky 1875~1933)의 
비문으로 혁명의 희생자를 위한 기념비를 세웠다. 

 

2월 혁명 이후 마르스 광장(Mars Field)의 대규모 무덤

1917년의 2월 혁명이 진행 중일 때 이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학살당했고, 
혁명의 희생자들은 화성 필드 중앙에 엄숙하게 안장되었다.
나중에 남북 전쟁의 희생자들도 이곳에 묻혔다.
1918년에서 1920년 사이에 핀란드 공산주의자들이 마르스 광장에 묻혔다. 
이후 볼셰비키가 이곳에 그들을 기리기 위해 

이 광장의 이름을 "혁명 희생자의 광장"이라 명명하였다.

 

마르스 광장에 설치되어 있는 꺼지지 않는 불길.

1920년대에는 기념관 주변에 광장이 배치되었다. 
1957년, 화성 필드(Mars Field)는 러시아에서 처음으로 
영원한 불꽃이 점화되어 켜진 첫 번째 장소가 되었다.

 

혁명의 희생자를 위한 기념비
1917~19년 혁명의 희생자들을 위한 기념비가 세워졌다.

 

혁명의 희생자를 위한 기념비

 

고대 러시아어로 즐거움의 들판이라 불렸던 이곳은 
1710년에 와서는 전쟁의 들판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엘리자베스 여왕 때 현재 엔지니어 성이 있는 자리에 

궁전이 들어서고 나서 이 들판은 황후의 초원(Tsarina's Meadow)으로 불리게 되었다.

군사조직 형성에 있어서 굉장한 정열을 쏟았던 파울 1세는 
군사들의 퍼레이드와 훈련에 있어 이 광장을 활용하였다. 
그때부터 이 광장의 이름은 마르스 광장(Field of Mars)으로 굳어졌다.
그 후 1917년에 있었던 2월 혁명을 기념하기 위해 이 광장에는 "꺼지지 않는 불"이 세워졌다. 
이 꺼지지 않는 불은 2월 혁명 당시 이름 없이 살해된 수 많은 사람들을 기리는 것이다.

 

혁명의 희생자를 위한 기념비

 

혁명의 희생자를 위한 기념비

 

혁명의 희생자를 위한 기념비

 

혁명의 희생자를 위한 기념비

 

화성 필드(Mars Field)

 

화성 필드(Mars Field)

 

화성 필드(Mars Field)

 

화성 필드(Mars Field)

 

화성 필드(Mars Field)

 

화성 필드(Mars Field)

 

화성 필드(Mars Field)

 

화성 필드(Mars Field)에서 본 성혈성당 (피의 구원성당)

 

화성 필드(Mars Field) 옆 스완 그루브(Swan Groove) 운하에서 본 
로워 스완 브리지(Lower Swan Bridge)와 미하일롭스키(Mikhailovsky) 성 

 

여름 정원 카르피예브(Karpiev) 연못에서 본 미하일롭스키(Mikhailovsky) 성 (북쪽)

1990년대 초부터 미하일롭스키 성은 러시아 미술관의 분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현재는 초상화 갤러리로 러시아 제국의 황제, 황후의 공식 초상화 등이 전시되고 있다.
엔지니어링 성(Engineering castle)이라는 애칭이 있다.

 

화성 필드(Mars Field)에서 바라본 미하일롭스키(Mikhailovsky) 성 

 

여름 정원과 화성 필드를 향한 중앙의 북쪽 외관은 

세르도볼(Serdobol) 화강암으로 만든 넓은 계단이 있는 테라스로 장식되어 있다. 

 

북쪽 상공에서 본 미하일롭스키(Mikhailovsky) 성

18-19 세기에 미하일롭스키 성(Mikhailovsky Castle)은 
표트르 1세(Paul I)의 주요 거주지로 지어져야 했다. 
폰탄카(Fontanka) 강과 모이카(Moika) 강이 합류하는 곳에 성을 건설하기로 한 것은
이곳이 표트르 대제 가족들과 관련이 있었기 때문이다. 
18세기 초, 모이카 강 유역을 따라 차르의 여름 정원이 뻗어 있고, 
여기에는 표트르 1세의  여름 궁전과 캐서린 1세의 황금 저택이 있었다.

1745년 이 지역에 엘리자베스 페트로브나 황후의 제 3의 여름 궁전이 지어졌고, 
그곳에서 미래의 황제인 파벨 페트로비치가 1754년에 태어났다. 
미하일롭스키 성(Mikhailovsky Castle)은 뛰어난 러시아 건축가 
바실리 바제노프(Vasily Ivanovich Bazhenov)에 의해 12년에 걸쳐 만들어졌지만 
표트르 대제가 직접 자신이 거주할 궁전 건설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궁전 건설은 표트르 대제가 왕좌에 오른 후에야 시작되었다. 
표트르 대제는 이곳을 미하일롭스키 궁전(Mikhailovsky Palace)이라고 명명했다.

 

헤라클레스(Hercules) 동상

미하일롭스키(Mikhailovsky) 성 북쪽 외관 입구에는 번영과 권력의 상징인 화강암 받침대에 
헤라클레스(Hercules)와 꽃의 여신이 된 클로리스(Chloris)의 동상이 있다.

 

꽃의 여신이 된 클로리스(Chloris)의 동상

 

미하일롭스키(Mikhailovsky) 성 (남쪽)

1797년 2월 26일에 새 저택의 기초가 세워졌다. 
표트르 대제는 4년 동안 건설 작업의 진행 상황을 직접 모니터링했다. 
새로운 거주지 "미하일롭스키 성(Mikhailovsky Castle)"의 이름은 

표트르 대제의 애착 때문이었다. 
중세 시대 성의 건축물이 그를 매료시켰다. 

미하일롭스키(Mikhailovsky) 성의 남쪽 주요 정면은 광장을 향하고 있다. 
궁전은 사방이 물로 둘러싸여 있었다. 
모이카 강에 의해 씻겨진 섬의 북쪽 해안은 화강암으로 옷을 입었고 
대포가 설치된 두 개의 세미바스티언이 있었다. 
대포는 폰탄카 강변에도 설치되었다. 
운하는 서쪽과 남쪽에 만들어졌다. 

궁전의 계획은 둥근 모서리가 있는 정사각형이며 

그 중앙에는 팔면체 폐쇄 안뜰이 있다. 
주요 정면 측면에서 안뜰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3중 돌다리가 있는 부활의 문이 표시되어 있다. 
황실 가족과 외국 대사만이 다리의 중앙 경간을 통과 할 수 있었다.

 

남동쪽 상공에서 본 미하일롭스키(Mikhailovsky) 성 

오른쪽으로 폰탄카 강이 흐르고 뒷쪽에 여름 정원과 화성 필드(Mars Field), 
왼쪽으로 미하일로프스키 정원(Mikhaylovskiy Garden)이 있다.

표트르 대제의 법령에 의해 "성(Castle)"이라는 단어는 

도시와 교외의 다른 거주지 이름에도 사용되었다. 
예를 들어, 겨울 궁전(Winter Palace)은 겨울 성(Winter Castle)이 되었다.
하늘 군대의 지도자인 대천사 미하일(Mikhail)의 이미지도 표트르 대제가 애용했고
표트르 대제는 미하일을 하늘의 후원자로 받아 들였다. 
대천사 마이클의 이름으로 성의 이름이 정해졌다. 


그러나 거주지의 이름 만이 중세 성을 연상시키는 것은 아니다. 
오늘날 우리가 "Mikhailovsky Castle"이라고 할 때 

일반적으로 붉은 벽돌로 된 건물 하나만을 의미한다. 
표트르 대제 당시 이 문구는 웅장한 궁전과 

여름 공원 앙상블이었던 황실 거주지를 의미했다. 
그것은 네바 강에서 넵스키 대로 방향으로 폰탄카 강을 따라 
광대한 영토에 위치하고 있으며 이전 여름 정원을 포함하고 있었다.

 

 Mikhailovsky 성 및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Connetable 광장의 전망. 
F. Alekseev. 1800. 주립 러시아 박물관 소장.

광장 중앙에는 1799년 3월 3일 표트르 1세의 법령에 따라 조각가 
프란체스코 바르톨로메오 라스트렐리 (Francosco Bartolomeo Rastrelli)의 

모델에 따라 만들어진 로마 황제의 형상에 표트르 1세의 승마 기념비가 세워졌다.

 

미하일롭스키(Mikhailovsky) 성 (서쪽)

서쪽 정면은 중앙 돌출부로 장식된 교회 건물이고 교회 종탑에는 첨탑이 있다. 
한때 꽃병과 조각품으로 장식된 반원형 계단은 교회 입구로 이어진다. 
문은 황제와 황후의 개인 거주 구역으로 올라갈 수 있는 작은 안뜰로 이어진다.

 

서쪽 상공에서 본 미하일롭스키(Mikhailovsky) 성

 

표트르 1세(Peter I) 기념비

이탈리아 출신의 조각가 바르톨로메오 카를로 라스트렐리(Bartolomeo Carlo Rastrelli)는 
1716년에 표트르 1세의 승마 동상 작업을 하기 위해 러시아에 왔다. 
고대 로마 조각품을 모델로 한 승마 기념비는 러시아 황제의 첫 주문이었다. 

1720년에 라스트렐리는 다른 버전의 승마 동상을 만들었다. 
동시에 그는 실물 크기로 표트르 대제의 입상을 작업했다. 
1724년에 라스트렐리는 표트르 대제의 유명한 

초상화 흉상을 두 가지 버전으로 만들었다. 
그 중 하나는 에르미타주 박물관에서 볼 수 있다.

그러나 표트르 대제는 동상을 청동으로 주조하기 전

1725년 1월 28일에 사망했다. 
라스트렐리는 1734년 안나 이바노브나 (Anna Ivanovna)로부터 

모델 작업에 대한 대가를 받았지만 동상을 청동으로 주조하라는 명령은 

1743년 엘리자베스 페트로브나(Elizabeth Petrovna) 황후에 의해 이루어졌다. 
1744년 ​​10월부터 11월까지 라스트렐리는 거대한 모델을 만들 수 있었다. 

그 후 조각상의 작업은 라스트렐리의 아들인 건축가 
프란체스코 라스트렐리(Bartolomeo Francesco Rastrelli)가 관리했다. 
조각상은 1747년 11월 알레산드로 마르텔리(Alessandro Martelli)에 의해 

주조되었으며 1755년까지 뛰어난 정밀도를 자랑하는 작품을 제작했다.

 

표트르 1세(Peter I) 기념비

라스트렐리의 표현에 의하면 황제는 새로운 수도를 둘러보고 있다고 한다. 
표트르 대제의 모습은 놀랍도록 강력하다. 
그는 발에 로마 샌들을 신고 무릎 아래에 사자 반 마스크를 착용한 군용 갑옷을 입고 있다. 
그의 가슴과 어깨에는 구호의 외투가 달린 로브가 드리워져 있다. 
왼손에는 강한 말의 고삐를 잡고 오른손에는 사령관 막대가 있다.
조각품의 높이는 4.6m, 받침대 높이는 6.2m이다. 

 

미하일롭스키(Mikhailovsky) 성 안뜰에 있는 표트르 1세(Peter I) 기념비

 

미하일롭스키(Mikhailovsky) 성 안뜰

 

미하일롭스키(Mikhailovsky) 성 내부

 

미하일롭스키(Mikhailovsky) 성 내부

 

[영상] 미하일롭스키 성(Mikhailovsky castle) 둘러보기

 

[참고영화] "Poor, Poor Pavel"의 스틸 
(V. Melnikov 감독, V. Sukhorukov 주연. 2003)

한글 자막 제공

 

 

 

[영상] 숙소 돔 부티크 호텔과 전쟁 박물관

 

돔 부티크 호텔(Dom Boutique Hotel) 위치 구글 사진

 

돔 부티크 호텔(Dom Boutique Hotel)
폰탄카(Fontanka) 강 입구 여름정원 건너편 간구츠카야(Gangutskaya) 거리에 있다.

 

돔 부티크 호텔(Dom Boutique Hotel) 룸

 

돔 부티크 호텔(Dom Boutique Hotel) 룸

 

돔 부티크 호텔(Dom Boutique Hotel) 욕실

 

돔 부티크 호텔(Dom Boutique Hotel) 로비 카운터

 

돔 부티크 호텔(Dom Boutique Hotel) 식당

 

간구츠카야(Gangutskaya) 거리 돔 부티크 호텔

폰탄카(Fontanka) 강 입구 여름 정원 건너편 간구츠카야(Gangutskaya) 

거리에 위치한 돔 부티크 호텔 건너편은 전쟁 박물관 건물이다.

 

전쟁 박물관 (Gosudarstvennyy Memorial'nyy Muzey Oborony I Blokady Leningrada)

 

간구츠카야(Gangutskaya) 거리 돔 부티크 호텔과 건너편 전쟁 박물관

 

돔 부티크 호텔 입구 폰탄카 강과 화강암 제방에서 인증샷

 

폰탄카 강과 여름 정원 Coffee House

 

돔 부티크 호텔 입구 폰탄카 강과 화강암 제방에서 인증샷

 

폰탄카 강변 지방법원 (Leningradskiy Oblastnoy Sud) 건물

 

폰탄카 강 제방을 따라 늘어선 건물들

 

네바(Neva) 강에서 본 프라체크니(Prachechny) 다리와 지방법원 건물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아름다운 돌다리 중 하나인 
프라체크니(Prachechny 세탁) 다리는 네바 강에서 폰탄카 강으로 흐르는 입구에 있다. 
이 지점은 표트르 대제(Peter the Great)의 여름 궁전 옆에 바로 붙어 있다. 


1769년에 지어진 이 다리는 폰탄카(Fontanka) 강의 화강암 제방과 함께 지어졌다. 
화강암으로 지어진 이 다리는 아름다운 곡선 난간이 있는 3단 혹 등받이 구조로 되어 있다. 
"세탁(Prachechny) 다리"를 의미하는 이 이름은 한때 근처에 있던 궁전 세탁소를 의미하기도 한다.

 

프라체크니(Prachechny) 다리 Most

 

프라체크니(Prachechny) 다리에서 본 폰탄카(Fontanka) 강

 

폰탄카(Fontanka) 강과 여름 정원

 

프라체크니(Prachechny) 다리에서 낚시를 하고 있다.

 

프라체크니(Prachechny) 다리 위에서 인증샷

 

프라체크니(Prachechny) 다리 위에서 인증샷

 

폰탄카 강과 표트르 대제 여름 궁전(Summer Palace of Peter the Great)

 

네바 강변 여름 정원(Summer Garden)의 연철 울타리

 

네바 강과 트리니티 브리지(Trinity Bridge), 페트로파블롭스크 성당(Peter and Paul Cathedral)

 

네바 강에서 낚시하는 사람을 종종 볼 수 있다.

 

네바 강을 배경으로 인증샷

 

네바 강에서 낚시하는 사람

 

네바 강

 

여름 정원과 세인트 마이클 성 및 화성 필드를 포함한 주변 랜드 마크의 파노라마

 

여름 정원과 화성(Mars) 필드

네바 강에서 폰탄 강을 가로지르는 프라체크니(Prachechny) 다리를 건너면 여름 정원이 있고
그 옆에 러시아에서 처음으로 영원한 불꽃이 점화된 화성(Mars) 필드가 있다.

18세기 초 화성 필드 부지에 늪지대가 있었다. 
그 후, 이곳은 군사 리뷰의 장소로 바뀌었고 "볼쇼이 러그(Bolshoi Lug)"라고 불렸다. 
북부 전쟁의 승리를 기리기 위해 이곳에서 축제가 열렸다. 
 
표트르 대제의 아내인 캐서린 1세의 궁전이 화성(Mars) 필드 근처에 세워졌고 
그에 인접한 영토는 "차리신(Tsaritsyn Lug)"로 알려지게 되었다.
1805년에야 화성을 상징하는 고대 전쟁의 신, 

마르스를 기리기 위해 화성(Mars)필드라 명명되었다.

1917년 2월 혁명의 희생자들은 화성 필드 중앙에 엄숙하게 묻혔고, 
나중에 남북 전쟁의 희생자들도 이곳에 묻혔다. 
1917~19년 혁명의 희생자를 위해 기념비가 세워졌고 
1920년대에는 기념관 주변에 광장이 배치되었다. 


1957년, 기념관은 건축가 SG Mayofis의 지시에 따라 재건되었으며, 
그 결과 화성(Mars) 필드는 러시아에서 영원한 불꽃이 켜진 첫 번째 장소가 되었다.
1918년에서 1920년 사이에 핀란드 공산주의자들이 이곳에 묻혔다. 

 

스완 그루브(Swan Groove, Lebyazhiya Kanavka) 

여름 정원 경계선을 따라 네바(Neva) 강에서 모이카(Moyka) 강 사이를 흐르는 작은 습지 운하다.
1711~1719년에 여름 정원의 운하로 개조되었으며, 잠시 후 인공 연못의 백조가 이곳에 정착했고 
운하 이름은 백조 운하(Swan groove, Lebyazhiya kanavka)로 변경되었다.

 

스완 그루브(Swan Groove, Lebyazhiya Kanavka) 

1733년까지 4 개의 나무 다리가 건설되었고 둑은 나무 판자로 강화되었다. 
1799년에 건축가 필니 코프 (Pilnikov)는 여름 정원의 측면에서 

운하 오른쪽 둑에 석조 테라스를 지었다. 
1953~1956년에는 운하 바닥이 깊어지고 

화강암으로 장식되었으며 경사면은 잔디로 덮여 있었다.

 

[영상] 폰탄카(Fontanka) 강과 네바(Neva) 강

 

여름 정원(Summer Garden) 입구

여름 정원(Summer Garden)은 폰탄카(Fontanka) 섬과 모이카(Moika) 섬, 
백조 운하(Swan Groove) 사이에 자리 잡고 있는 섬이며, 

옆에는 표트르 대제의 여름 궁전이 있다. 


여름 정원은 1704년 표트르 대제가 네덜란드의 정원사이며 

의사인 니콜라스 비들루(Nicolaas Bidloo)의 도움을 받아 

네덜란드풍의 바로크 양식으로 설계하였고, 
1712년에 정원 조성공사를 시작하여 거의 대부분이 1719 년에 완성되었다.

 

여름 정원(Summer Garden)의 연철 울타리 


네바(Neva) 강변에 있는 여름 정원(Summer Garden)의 연철 울타리는 

1773~1786년 건축가 유리 펠텐(Yury Felten)이 설계하고 

건설한 걸작으로 유명한 주철 난간 울타리이다. 

 

여름 정원 (Summer Garden) 

여름 정원은 기하학적 원리에 충실하게 디자인되어

희귀한 꽃과 식물들을 식재하였을 뿐만 아니라,  
특히 유럽에서 들여온 새로운 대리석으로 분수와 조각을 만든 원조다. 

 

여름 정원 (Summer Garden) 입구에서 인증샷

 

여름 정원 (Summer Garden) 입구에서 인증샷

 

여름 정원 (Summer Garden)  

 

정원은 아름다운 분수와 가로수길, 작은 궁전 등을 배치하여 

조각 정원 같은 분위기의 장소가 있고, 오래된 고목의 숲과 작은 폭포가 있는 개울, 

작은 호수가 어우러져 있는 매우 아름다운 정원이다.

 

표트르 대제의 여름 궁전 (Summer Palace of Peter the Great) 

표트르 대제의 여름 궁전 (Summer Palace of Peter the Great)은 

상트 페테르부르크에 지어진 최초의 궁전이자 수도관이 있는 도시 최초의 건물이었다.

 

표트르 대제의 여름 궁전 내부

 

표트르 대제의 여름 궁전 내부

 

표트르 대제의 여름 궁전 내부

 

표트르 대제의 여름 궁전 내부

 

표트르 대제의 여름 궁전 내부

 

[영상] 표트르 대제의 여름 궁전 (Summer Palace of Peter the Great) 

 

이반 크릴로프(I. A. Krylovu) 기념비

이반 크릴로프(Ivan Andreevich Krylov 1769~1844)는 

러시아에서 가장 잘 알려진 우화 작가다.
극작가이자 언론인이었던 그는 40세에 

자신의 진정한 장르를 발견하고 우화 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이반 크릴 로프(I. A. Krylovu) 기념비 기단 부분

기념비는 러시아의 조각가 피터 클로트 폰 위르겐스부르크
(Peter Clodt von Jürgensburg 1805~1867)의 작품이다.

 

이반 크릴 로프(I. A. Krylovu) 기념비 기단 부분 

 

문장(紋章) 분수 (Heraldic fountain)

 

문장(紋章) 분수 (Heraldic fountain)

 

여름 정원 역사 박물관

 

Tea House

 

Tea House

 

여름 정원

여름 정원은 표트르 시대의 분위기를 온전하게 느낄 수 있는 곳 중 하나다.
조각 모음이 있는 정원과 황제의 집이었던 이 화원은 하나의 박물관 단지를 구성한다. 

 

여름 정원

 

여름 정원의 아름다운 조각 작품들

 

여름 정원의 아름다운 조각과 분수와 숲

 

여름 정원의 아름다운 조각과 분수와 숲

 

여름 정원은 기하학적 원리에 충실하게 디자인되었고 

희귀한 꽃과 식물들이 많이 식재되어 있다.

 

여름 정원 숲 터널

 

아기자기하게 꾸며 놓은 여름 정원

 

여름 정원 카르피예브(Karpiev) 연못

 

여름 정원 카르피예브(Karpiev) 연못과 미하일롭스키(Mikhailovsky) 성

 

여름 정원 풍경

 

여름 정원 반암 꽃병(Porphyry Vase)

 

[영상] 여름 정원 둘러보기

 

 

 


임경석의 역사극장

빨치산 아버지가 남긴 사진 4장

경북 의성 출신 자생적 사회주의 운동가 박종근, 한국전쟁에서 전사하다

 

 

아내 이숙의가 평생 품에 간직한 빛바랜 사진,

박종근의 20대 초반 시절. <이 여자, 이숙의> (삼인, 2007)

 

빨치산의 딸 ‘박소은’은 평생 아버지 품에 안긴 적이 없었다. 세상에 태어난 1948년 4월21일, 아버지는 집에 있지 않았다. 집은커녕 38도선 이남에도 없었다. 엄마 뱃속에 회임 중일 때, 그러니까 미처 태어나기도 전인 1947년 12월에 아버지는 38도선 이북으로 올라갔다. 결혼한 지 6개월 만이었다. 야속하게도 왜 그때 가족을 버리고 떠났을까? 탄압을 피하려고 그랬겠거니 짐작하지만, 그 이유를 몰랐고 그 이후로도 똑바로 알 기회가 없었다.

 

아버지 박종근은 한국전쟁이 발발한 뒤 월남했으나, 집에는 들르지도 않은 채 산으로 올라갔다. 경북도당 위원장이자 제3유격지대 사령관으로서 산악지대의 빨치산 활동을 이끌기 위해서였다. 결국 그는 집에 돌아오지 못했다. 1952년 3월엔가 ‘태백산 총사령관 박종근 사살’이라는 대서특필된 신문 기사를 통해 아버지의 최후를 알았다. 딸의 나이 네 살 때였다. 요컨대 소은이는 태어난 이후 단 한 번도 아빠의 체취를 느끼지 못했고, 전적으로 어머니의 보살핌 속에서만 자라야 했다.

 

1941년 3월14일, 20살 때 ‘독립청년회’ 사건으로 인천소년형무소에

수감 중 촬영한 ‘범죄자’ 식별용 사진. <빨치산자료집 1>(한림대, 1996)

 

증명사진으로 처음 만난 20대 때 아버지

 

어머니는 76살 평생 빛바랜 증명사진 한 장을 소중히 간직했다. 딸이 아버지 존재를 어렴풋하나마 느낄 수 있는 유일한 유산이었다. 거기에는 한 청년이 물끄러미 앞을 바라보고 있다. 머리를 짧게 깎은 20대 초반의 젊은이다. 하지만 혈육이라는 실감이 들지는 않았다. 아버지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딸 소은이 미처 본 적이 없는, 좀더 젊었을 적의 아버지 사진이 있다. 소화16년(1941년) 3월14일, 인천소년형무소에서 찍은 것이다. 형무소에 수감된 범죄자를 식별하기 위해 강제로 찍은 것이었다.1 소년형무소는 만 18살 미만 범죄자를 수용하기 위한 시설이었다. 사진 속 인물은 검정 학생복을 입고 있다. 소년형무소 수감자들의 평상시 복장이었을 것이다. 가슴에는 식별용 이름표가 붙어 있다. 한자로 ‘신정종근(新井宗根)’이라고 쓰여 있다. ‘아라이 소네’라고 읽는다. 일본식 창씨명이었다. 식민지 조선의 모든 이가 강제로 일본식 씨명으로 바꿔 불리던 때였다.

 

도대체 왜 소년형무소에 갇혔을까? 일본 형무소 당국은 모든 수감자의 개인별 카드를 작성했는데, 거기에 그의 죄명이 적혀 있다. ‘치안유지법과 육군형법 위반’이었다. 치안유지법이란 천황제 국가체제의 변혁과 사유재산제도 반대를 목적으로 단체를 조직하거나 그에 가입한 자를 처벌하는 악법이었다. 반체제 비밀결사를 탄압하기 위한 법이었다. 주로 사회주의운동과 독립운동 참가자를 체포·투옥하는 데 쓰였다. 육군형법은 1941년쯤 민간인에게도 곧잘 적용됐는데, 이른바 군사 스파이 혐의자를 처벌하는 용도였다. 산업시설과 공장 등을 염탐해, 가상 적국인 소련에 넘길 우려가 있다는 명목을 씌우곤 했다. 요컨대 수감자인 소년 박종근은 사상범이었던 것이다.

 

뒷날 박종근이 작성한 <이력서>와 <자서전>에 따르면, 그는 고향인 경북 의성군 안계면의 보통학교를 6년간 마친 뒤, 부산과 황해도 신천 등지를 전전하며 상점 점원과 정미소 급사 등으로 일했다. 그때 일터에서 만난 몇몇 종업원에게서 사상적 감화를 받았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피억압 민족의 일원이라는 정치적 각성을 얻을 수 있었다고 한다.

 

러시아 모스크바 유학 시절의 박종근.

1948년 27살 때 찍은 사진이다. 독립기념관

 

소년 사상범 박종근의 비밀결사 활동

 

행동에 처음 나선 것은 열일곱 살 되던 1938년이었다. 그해 3월 고향으로 되돌아온 그는 ‘독립청년회’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했다. 공개단체인 야학과 농촌진흥조합 등을 무대로 삼아 활동한 결과 약 40명의 회원을 모았다고 한다. 회원은 주로 향리에서 고락을 나누며 성장한 친구들과 그의 모교인 안계보통학교 동창생들이었다. 이 단체의 비밀운동은 미성숙했다. 자신의 표현에 따르면, “그 어느 지도자도 없었으며, 어떠한 조직적 계열 또는 연락도 없는 순전히 내 독자적인 아주 의식성이 어린 운동이었다”고 한다.2

 

그래서일까, 결성 1년 남짓 만에 비밀이 노출되고 말았다. 1939년 4월 이 결사의 구성원들은 일망타진됐다. 박종근이 체포된 곳은 해외였다. 만주국 수도 신경(오늘날 창춘)에 가서 해방운동과 삶의 새 진로를 모색하려던 참이었다. 신경에서 붙잡힌 그는 조선으로 압송됐다. 그의 자서전을 보면 1년 가까이 경찰서에서 취조받았고, 대구지방재판소 안동지청에서 1940년 10월31일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았으며, 인천소년형무소에서 복역 뒤 만기로 석방됐다고 한다. 입소 연월일은 소화 15년(1940년) 11월8일이고, 출소 연월일은 소화 17년(1942년) 11월7일이었다.

 

출옥한 뒤에도 박종근은 ‘반성’하지 않았다. 출옥 뒤 해방에 이르기까지 그는 고향에서 농사짓는 한편, 정미소와 미곡창고 사무원으로 일했다. 이 기간에 그는 사회주의 사상을 수용했다고 뒷날 술회했다. 현실 생활과 비밀결사 운동 경험에 더해 몰래 읽은 사회주의 서적의 영향력이 그렇게 이끌었다고 한다. 급기야 해방 전야인 1944년 12월 사회주의 비밀서클을 조직했다. 4명으로 이뤄진 소규모였다. 박종근은 나중에 스스로 평하기를, “의식성과 이론의 부족에다가 아무런 지도자도 없고 다른 조직과 연결 없는 고립적인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 경험이 해방 뒤 그를 투철한 사회주의자로 나아가게 하는 전환점이 됐다.

 

딸 소은이 미처 보지 못한, 또 하나의 아버지 사진이 있다. 짙은 색 양복에 화려한 넥타이를 맨 정장 차림이다. 와이셔츠가 눈부시게 희다. 20대 후반이나 30대 초반의 연령층에 속한 건강한 남성상이다. 엷은 미소를 띠고서 앞을 바라보고 있다. 이마에 두 줄 주름살이 있고 광대뼈가 약간 솟은 터라 질박하면서도 신뢰감을 준다. 높지 않은 콧대에 두꺼운 입술이 더욱 그런 느낌을 준다.

 

러시아 모스크바 당학교에서 작성한 개인 파일에 보관된 사진이다. 러시아로 출국하기 전 평양에서 찍었거나, 아니면 모스크바에서 증명용으로 찍은 사진이었다. 1948년 8월께 박종근 모습이었다.

 

박종근이 젊은 아내와 유복자를 남겨두고, 38도선 이북으로 올라간 이유는 ‘당의 명령’이 있었기 때문이다. 남조선 노동당 중앙부는 그를 모스크바에 유학시키기로 결정했다. 해방 뒤 박종근은 민중운동의 지도자로서 두각을 나타냈다.

 

박종근은 1945년 8월부터 두 달 동안 의성군 안계면의 면인민위원회 결성에 참가해 부위원장에 선임됐다. 그해 10월부터는 의성 읍내로 진출해 조선공산당 의성군당 선전부장으로서 일했다. 의성군 내에서 말 잘하고 글 잘 쓰는 사람으로 소문이 자자했다. 1946년 10월 민중항쟁 때는 의성군당 조직부장으로서 의성군 투쟁의 총책임자 역할을 했다. 11월에는 그에 대한 책임으로 경찰 수배를 받았다. 탄압을 피해 서울로 올라온 박종근은 1946년 11월부터 월북하던 이듬해 12월까지 당 중앙위원회 선전부의 선전선동과장으로 일했다.

 

제3유격지대 사령관 박종근의 최후.

<빨치산자료집 1>(한림대, 1996) 국사편찬위원회

 

박헌영 “열성적 투쟁” 높은 평가

 

박종근의 헌신성과 업무능력의 탁월함은 당 지도부의 눈에 띄었다. 당시 남로당 부위원장으로 재임 중이던 박헌영은 그를 가리켜, “박종근 동무는 당 사업에 정력적으로 참여했고 당 업무와 민주조선 건설을 위하여 열성적으로 투쟁하고 있다”고 높이 평가했다.3

 

박종근의 러시아 유학 기간은 2년간이었다. 모스크바의 당학교 내부 기록에는 그가 “1948년 9월15일부터 1950년 7월1일까지 조선당학교에서 수학”했다고 적혀 있다. 한국전쟁이 일어났을 때 모스크바에 체류 중이었음이 눈에 띈다. 아마 최초 계획으로는 4년 이상 유학이 예정됐겠지만 전쟁 발발로 단축됐던 것 같다. 서둘러 유학을 종료하고 풍전등화에 놓인 조선 혁명을 구하기 위해 하루속히 귀국해야만 했다.

 

성적표가 남아 있다. 그에 따르면 2년간 모두 14개 과목을 수강했다. 그중에는 자본주의 정치경제학, 변증법적 유물론, 역사적 유물론, 소련공산당사, 소련 국제관계와 대외정책의 역사, 법과 소비에트 건설, 세계의 정치·경제 지리, 당건설론, 러시아문학, 러시아어 등이 포함됐다. 마르크스레닌주의 이론과 사회주의 건설의 정책 문제를 중시했음을 엿볼 수 있다. 시험 점수가 명시된 과목은 12개였는데, 모두 5점 만점에 5점을 받았다. 오늘날 한국 대학 제도에 비하면 ‘올 A+’를 받은 셈이다.

 

2000년 9월 초, 6·15 공동선언 이행 사업의 하나로 ‘비전향 장기수 송환’이라는 역사적 사건이 일어난 며칠 뒤였다. 벌써 53살 중년 부인이 된 딸 소은은 장기수 선생들이 함께 모이는, 서울 종로구 인사동에 있는 ‘통일광장’이란 곳을 찾았다. 그곳에 가면 장기수들이 구해놓은 자료 속에 아버지에 관한 기록이 있다는 소식을 접했기 때문이다.

 

딸 소은은 그 자리에서 또 하나의 아버지 사진을 대면했다. 아무런 마음의 준비도 없이 갑자기 아버지의 최후 사진을 맞닥뜨린 것이다. 거기에 한 남자가 누워 있었다. 주검이었다. 몇 번의 복사를 거쳤는지 윤곽선이 흐려진 흑백사진이었다. 허리와 허벅지 두 군데에 밧줄이 꽁꽁 묶여 있었고, 잘린 머리가 목 위에 부자연스레 얹힌 상태였다. 영문 설명이 쓰여 있었다. 게릴라 지도자 박종근, 제3유격지대 사령관. 1952년 2월17일 한국 쪽 군경 합동작전 때 203410 지점 근처에서 사살됐다고 적혀 있었다.4

 

 

흑백사진 속 숨진 아버지 모습에 전율

 

딸 소은은 아버지 모습을 보는 순간, “가슴에 직접 총알이 박히는 것 같은” 충격을 느꼈다고 술회했다. “등을 타고 흐르는 피가 굳어서 조여들듯이 온몸이 경직되어”왔으며, 책상을 꽉 붙잡아야만 했다.5 소은은 생애 처음으로 아버지 존재를 뚜렷이 실감했던 것 같다.

 

아! 그랬구나. 자신의 삶에서 아버지가 왜 부재했는지, 그 부재의 의미가 우리 역사와 관련됐음을 똑똑히 보았다. 이제야 아버지의 삶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버지 없이 자랐던 어린 시절, 6개월의 짧은 신혼 생활 뒤 50여 년의 긴 세월을 홀로 견뎌야 했던 어머니의 인생이 한꺼번에 뇌리에 떠올랐다.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참고 문헌

1. <일제 감시대상 인물카드: 新井宗根(朴宗根)>, 1941년 3월14일 촬영, 국사편찬위 한국사데이터베이스(http://db.history.go.kr)

2. 박문우(박종근), <자서전>, 2쪽, 1948년 8월10일. РГАСПИ ф.495 оп.228 д.799 л.14-16.

3. Зам.Председатель ЦК Трудовой партии Южной Корея Пак Хенен(남로당 부위원장 박헌영), Характеристика на заместителя заведующего отделом пропаганды ЦК Трудовой Паприи Южной Кореи, Пак Чен-гын (남조선노동당 중앙위 선전차장 박종근에 대한 평정서), 1948년 7월31일. РГАСПИ ф.495 оп.228 д.799 л.9.

4. ‘사진: Guerrilla leader Pak Chong Kun’, <빨치산자료집 1>(문건편 1), 한림대학교 아시아문화연구소, 486쪽, 1996년.

5. 박소은, ‘느닷없는 사모곡: 남북 해외로 조각난 나의 가족사’, <이 여자, 이숙의>, 삼인, 423쪽, 2007.

 

 

 

상트페테르부르크 넵스키 대로

넵스키 대로는 서쪽 네바 강변 알렉산드르 넵스키 수도원(Aleksander Nevsky Monastery)에서 시작해 
동쪽 네바 강변 러시아 구 해군성 (舊海軍省 Building of the Main Admiralty)에서 끝나는데, 
관광객이 많이 다니는 상징적인 구간은 구 해군성이 있는 서쪽 끝에서부터 
보스타니야 광장 모스콥스키 역까지다.  

이 대로 근처에 운하들, 에르미타주 박물관, 러시아 박물관, 카잔 대성당, 피의 성당 등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주요 관광지가 도보 이동권에 모두 모여 있어서  
관광객들도 이 대로를 중심으로 다니게 된다.

 

네바 강변 구(舊) 해군성과 알렉산드로프스키 정원

 

구(舊) 해군성과 알렉산드로프스키 정원 앞에서부터 직선으로 뻗어 있는 넵스키 대로

 

구(舊) 해군성과 알렉산드로프스키 정원, 궁전 광장 구글 Earth 사진

 

공중에서 본 구 해군성과 네바 강

 

러시아 구 해군성과 알렉산드로프스키 정원

러시아 구(舊) 해군성 (Building of the Main Admiralty)은 

러시아 제국 해군 본부의 옛 사령부다.  
건축가인 안드레얀 자하로프(Andreyan Zakharov)가 설계를 맡았으며 

1806년부터 1823년까지 건설되었다.

 

알렉산드로프스키 정원 (Alexander Garden)은 1805년 티치노 출신의 
신고전주의 건축가 루이지 루스카(Luigi Rusca 1762~1818)에 의해 설계되었다.
정원은 남쪽과 서쪽 외관을 따라 해군성과 궁전광장, 
네바 강으로 이어지고 동쪽에 성 이삭 성당이 있다. 

 

러시아 구 해군성 (舊海軍省 Building of the Main Admiralty)

 

러시아 구 해군성 (舊海軍省 Building of the Main Admiralty)

 

해군본부는 표트르 대제의 해군 창설에 의해 1704년 11월 5일 건설되었다. 
1706년의 큰 홍수로 목조 건물이었던 이곳은 유실되고, 
지금의 석조 건물로 지워진 것은 1732~1738년 건축가 카로보프에 의해 만들어 졌다.

네프스키대로 쪽의 정문은 넓은 공원의 분수를 지나 서 있다. 
이 문의 높이는 72m로 위에는 망루와 뾰족한 모양의 황금탑으로 설계되었다. 
황금탑 밑부분에는 불, 물, 땅, 대기, 4계절, 4방향의 우주의 조화, 
그리스 신화의 문예, 예술을 관장하는 여신 뮤즈 등을 비유한 

28개 조각품들이 4방향으로 서있다.

정면의 긴 건물은 1806~1823년 건축가 자하로프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길이가 407m에 이른다. 
또한 이곳 네바 강 쪽의 후문은 궁전 다리와 길을 사이에 두고 

동궁의 측면과 맞대고, 앞에는 큰 닻이 놓여져 있다.

 

러시아 구 해군성 (舊海軍省 Building of the Main Admiralty)

 

러시아 구 해군성 (舊海軍省 Building of the Main Admiralty)

 

러시아 구 해군성 (Building of the Main Admiralty) 네바 강 쪽 입구

 

러시아 구 해군성 건물 앞에 알렉산드롭스키 정원이 있고 
정원 내에 고골 기념비 등이 세워져 있다.

 

극작가 고골 기념비(Monument Gogol)

 

시인 주코브스코무 (V. A. Zhukovskomu) 기념비

 

정치가 고르차코부(A. m. gorchakovu) 기념비

 

시인 레몬토브 (Mikhail Lermontov) 기념비

 

작곡가 글린카 (Michail Glinka) 기념비

 

탐험가 프르체벌스키 (Nikolay Przhevalsky) 기념비

 

궁전 광장에서 본 구 해군성

 

알렉산드르 네프스키 수도원(Aleksander Nevsky Monastery) 위치 구글 지도

 

넵스키 대로는 서쪽 네바 강변 12번 알렉산드르 네프스키 수도원에서 시작해서 
동쪽 네바 강변 4번 구 해군성까지 4.5km에 이르는 거리를 말한다. 

 

알렉산드르 네프스키 수도원(Aleksander Nevsky Monastery)

 

알렉산드르 네브스키 라브라(Alexander Nevsky Lavra)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수도원으로 표트르 대제의 명령에 따라 1710∼1716년에 건립되었다. 
알렉산드르 네프스키는 1240년 북서 러시아에 침입한 스웨덴군(軍)을 격파한 
노브고로트 공 알렉산드르 야로슬라비치를 말한다. 
지금은 수도원으로 사용되지 않고 있으나 내부에는 지금도 활동 중인 트로이츠키 교회가 있다. 

알렉산드르 네프스키 수도원(Aleksander Nevsky Monastery)

 

수도원 내에는 11개의 교회가 있고 4개의 묘지 구역에는

러시아 문화를 꽃피게 했던 음악가 차이콥스키(Tchaikovsky), 

림스키코르사코프(Rimskii-Korsakov), 무소르크스키(Mussorgsky),  
보로딘(Borodin)과 문학가 도스토옙스키(Dostoevsky) 등 

위대한 인물들이 잠들어 있는 무덤이 있다.

 

알렉산드르 네프스키 수도원(Aleksander Nevsky Monastery)

 

1800년대 초의 알렉산드르 네프스키 수도원

상트페테르부르크에는 수없이 많은 성당과 러시아 정교회의 교회들이 있으나, 
그중에서 알렉산드르 네프스키 수도원이 가장 크다. 
사실 알렉산드르 네프스키 수도원은 넵스키 대로 북쪽 끝에 있어 

우리나라 여행자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은 곳이다.

 
'알렉산드르 넵스키'는 1240년 러시아를 침공한 스웨덴군을 소수의 병력으로 
네바강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노브고로드의 대공  '알렉산드르 야로슬라비치'를 말한다. 
표트르 대제 명에 의해 1710~1716년 '알렉산드르 야로슬라비치'가 
네바강 전투에서 대승한 그 자리에 수도원이 건립되었다

표트르 대제는 '알렉산드르 야로슬라비치'를 성인으로 추대하고 
상트페테르부르크 도시 건립에 따른 성인과 신의 가호를 구했던 곳이다.

 

알렉산드르 네프스키 동상

알렉산드르 네프스키 수도원 가는 길은 지하철 4호선을 타고 
"프로사지 알렉산드라 넵스카바" 역에 내린면 된다.
알렉산드르 넵스카바 역을 나오면 <알렉산드르 넵스키 광장>이 나오고 
광장 중앙에 알렉산드르 넵스키 동상이 보인다.

알렉산드르 야로슬라비치 넵스키(Alexander Yaroslavich Nevsky 1220~1263)는 

류리크 왕조 출신으로 국민적 영웅이다. 
1220년 블라디미르에서 블라디미르 대공국의 

야로슬라프 2세 프세볼로도비치 대공의 아들로 태어났다. 
귀족들과의 분쟁으로 잠시 노브고로드 공화국을 떠났지만, 

리보니아 독일 기사단의 침입을 걱정한 시민들의 요청으로 

1241년에 노브고로드 공화국으로 다시 귀환한 후 
1242년 페이푸스 호 전투에서 튜튼기사단에게 승리했다. 

이후 그는 침체기 루스의 국민적인 영웅으로 숭배받기 시작했으며 
킵차크 한국의 칸에게서 공식적으로 노브고로드공의 지위를 받았고 
1252년부터 훗날 전 루스의 대공이라 불리게 되는 블라디미르 대공으로 

취임하게 되면서 루스 공국들과 킵차크 한국 사이를 중재하였으며, 
1259년에는 농민 반란을 진압하고 1263년에 사망하였다.

그는 일생동안 반카톨릭에 친몽골적인 정책을 펼쳤으며, 
국내의 정적들을 견제하는 데 몽골의 권위를 이용하기도 했다. 
또한 1240년 네바 강 전투에서 적은 병력으로 스웨덴군을 격파했다는 전설이 유명하다.

그가 죽은 뒤에도 그가 남긴 업적은 루스의 국민적 영웅으로 높이 평가받는다. 
특히 국토를 잘 지켰다는 높은 공적 때문에 루스 민요에는 

그를 찬양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이 많다. 
또 동방 정교회에서는 그를 성인으로 받아들었다.

표트르 1세는 네바 강의 옛 전쟁터 부근에 수도원을 세우고 그의 유골을 안장했다. 
러시아 제국 정부는 넵스키 훈장을 제정하였다. 
1942년 소련 정부도 러시아 제국 정부의 전례에 따랐다.

 

알렉산더 네프스키 수도원(Alexander Nevsky Lavra) 외벽을 예쁜 수로가 둘러싸고 있다.

 

알렉산더 네프스키 수도원(Alexander Nevsky Lavra) 입구 삼위일체 교회

 

알렉산드르 네프스키 수도원은 1710~16년에 건립되었으며 
내부에는 11개의 러시아 정교회의 교회와 4개의 공동묘지가 있다.

 

알렉산더 넵스키 수도원(Alexander Nevsky Lavra) 입구

 

알렉산더 넵스키 수도원(Alexander Nevsky Lavra) 입구에 들어서서 돌아 본 모습

 

알렉산더 넵스키 수도원 내부 삼위일체 교회

 

알렉산더 넵스키 수도원 내부 삼위일체 교회

 

알렉산더 넵스키 수도원 축복교회
수도원 내부에는 크고 작은 교회가 11개 있다.

 

알렉산더 넵스키 수도원 축복교회

 

알렉산더 넵스키 수도원 축복교회

 

알렉산더 넵스키 수도원 축복교회 내부

 

알렉산더 넵스키 수도원 축복교회 내부

 

레닌의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난 후 1918년 폐쇄되었고

교회 재산은 국가에 헌납되기도 했다고 한다. 

 

수도원 한곳에 11개의 교회가 있지만 각각 특성이 있고 건립 연대도 조금씩 다르다.

 

레닌과 스탈린 정권 시절엔 무신론자들 박물관으로 이용되기도 했고
2차 대전 독일군 침공시는 병원으로 이용되었다.

 

<티 흐빈> 공동묘지

 

<티 흐빈> 공동묘지 

공동묘지는 모두 4곳이 설치되어 있으며 라사레브스코이 묘지(18~19세기),  
티 흐빈 공동 묘지(유명 예술, 문학가), 니콜스키 공동묘지, 코사크 묘지(공산주의자)등이 있는데  
그중에서<티 흐빈> 헤크로폴에는 차이코프스키, 도스토옙스키 유명한 예술가들의 묘지가 있다. 

 

유명 인사 묘지 위치도

 

표도르 도스토옙스키(F.M. Dostoevsky) 묘지

알렉산드르 네프스키 수도원 묘지에 있는 표도르 도스토옙스키의 묘지.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fyodor mikhailovich dostoevskii, 1821 - 1881)는 모스크바 출생. 
톨스토이와 함께 19세기 러시아 문학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문호이다.
‘넋의 리얼리즘’이라 불리는 독자적인 방법으로 인간의 내면을 추구하여 

근대소설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놓았다. 


농노제적(農奴制的) 구질서가 무너지고 자본주의적 제관계(諸關係)가 대신 들어서려는 
과도기의 러시아에서 시대의 모순에 고민하면서, 그 고민하는 자신의 모습을 
전적으로 작품세계에 투영한 그의 문학세계는 현대성을 두드러지게 지니고 있으며, 
20세기의 사상과 문학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표도르 도스토옙스키(F.M. Dostoevsky) 묘지

 

표트르 차이콥스키(Pyotr Ilyich Tchaikovsky)  묘지


페테르 일리치 차이코프스키 (Pyotr Ilyich Tchaikovsky,1840 - 1893)는 러시아의 작곡가로 
모스크바음악원의 교수를 지내다가 40년간 창작에 전념하여 
러시아 고전주의 음악의 완성을 가져왔다. 
교향곡, 오페라, 발레곡 이외에 다수의 실내악곡, 협주곡 등을 남겼으며 
특히 발레곡 <백조의 호수>, 교향시 <만프레드 교향곡> 등이 유명하다.

 

표트르 차이콥스키(Pyotr Ilyich Tchaikovsky) 묘지

 

표트르 차이콥스키(Pyotr Ilyich Tchaikovsky) 묘지

 

모데스트 무소르그스키(Modest Mussorgsky) 묘지

모데스트 무소르그스키 (Modest Mussorgsky, 1861 - 1918)는 러시아의 작곡가. 
여러 편의 피아노곡 ·교향곡 ·오페라 ·가곡 등을 작곡했고 러시아 고유의 선법과 대담한 화성, 
변칙적인 리듬 등을 구사해 근대 인상파음악의 선구자가 되었다.

 

알렉산더 보르딘(Alexander Borodin) 묘지


알렉산더 보르딘 (Alexander Borodin,1833 ~1887)은 러시아의 음악가이며,
19세기 러시아 국민악파 작곡가 중에서도 가장 뛰어났다.

 

알렉산더 아칸젤스키( Alexander Arkhangelsky) 묘지


알렉산더 아칸젤스키(Alexander Arkhangelsky,1846 - 1924)는 러시아의 음악가이며 
교회음악작곡가 겸 지휘자이다.

 

알렉산더 다르고미시스키(Alexander Dargomyzhsky) 묘지


알렉산더 다르고미시스키 (Alexander Dargomyzhsky,1813~1869)는 
러시아의 음악가이며 전통을 이어받아 유럽 음악이 아닌 
러시아 고유의 음악을 확립, 발전시키기 위해 활동했다 .

 

알렉산드르 마르티노프(Alexander Yevstafyevich Martynov) 묘지


알렉산드르 마르티노프 (Alexander Yevstafyevich Martynov,1816–1860)는 

러시아의 배우이다.

 

아나톨리 리아도프( Anatoly Lyadov) 묘지

아나톨리 리야도브 (Anatoly Lyadov,1855 - 1914)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저명한 러시아의 음악가 집안에서 출생한 작곡가, 지휘자, 음악교육자이다.

 

안톤 루빈시테인(Anton Rubinstein) 묘지

안톤 루빈시테인 (Anton Rubinstein,1829 - 1894)는 

러시아의 피아노 연주자이자 작곡가이며 음악교육가, 궁정악장을 지내고 

왕실 러시아 악우협회(樂友協會)를 설립하였다. .

 

미하일 글링카(Mikhail Glinka) 묘지

미하일 글링카 (Mikhail Glinka,1804 - 1857)는

러시아의 작곡가이고 국민 음악의 시조이다. 
스몰렌스크 현(縣)의 귀족 지주의 아들로 출생하여  
1817년 페테르스부르크에 옮긴 후, 사범학교에서 6년간 수학했다.

  그동안 영국인으로서 유명한 작곡가 및 피아니스트인 필드에게 

피아노를 배우고, 1822년부터 작곡했다. 


1830년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를 순례하고 이탈리아 성악 작곡법을 연구, 
1834년 베를린에서 덴(1799~1858)에게 사사한 후, 특히 가극 작곡가가 될 사명을 깨달아, 
러시아 국민 가극 <황제에게 드린 목숨(1836)>을 페테르스부르크에서 상연, 
다시 푸시킨에 의한 제2의 가극 <루슬란과 류드밀라(1842)>에 성공했다. 
1844년 파리, 1845~47년 에스파냐의 마드리드와 세빌랴에 체재, 

색채적인 관현악곡 외에 피아노곡ㆍ실내악곡ㆍ성악곡 등을 작곡했다.

 

밀리 발라키레프(Mily Balakirev) 묘지

밀리 발라키레프 (Mily Balakirev,1837 - 1910)는 러시아의 작곡가 · 피아니스트 · 지휘자다. 
작풍은 동양적 요소와 슬라브 지방색이 강한 낭만적인 개성적 경향을 띠고 있다. 
러시아 민요의 화성화(和聲化)도 중요한 공적으로 차이콥스키 등의 창작에 영향을 끼쳤다.

 

니콜라이 림스키 코르사코프(Nikolai Rimsky-Korsakov) 묘지

니콜라이 림스키코르사코프(Nikolai Rimsky-Korsakov,1848 - 1919)는 

러시아의 작곡가이자 음악학자이다.

 

바살리 바실리에비치 안드레이예프(Vasily Vasilievich Andreyev) 묘지
바실리 안드레예프(Vasily Vasilievich Andreyev,1861 - 1918)는 러시아의 음악가이다.

 

유리 유르예프(Yuri Yuryev) 묘지
유리 유르예프(Yuri Yuryev ,1872-1948)는 러시아의 배우이다.

 

티흐빈 18세기 인물들의 묘지. 

티흐빈 묘지(Tikhvin Cemetery)는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가장 오래된 건축물 중 일부를 포함하고 있는 알렉산더 네브스키 수도원에 있다. 
알렉산더 네브스키 수도원의 가장 인기 있는 장소는 묘지로 

러시아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들의 유해가 이 곳에 있기 때문이다. 


티흐빈 묘지 (Tikhvin Cemetery)에는 차이코프스키와 루빈슈타인, 무조르그스키, 
림스키-코르사코프, 도스토예프스키, 글린카 등의 묘지가 있다. 
라자로 묘지(Lazarus Cemetery)에는 스타로이, 쿠아렝히, 로시, 이외에 
상트 페테르부르크를 형성한 유명한 건축가들의 묘지가 있다.

 

키모프(Keimov) 묘지

 

더르(Dur) 묘지

 

탈하노바(Tarhanova) 묘지

 

밥킨(Botkin) 묘지

 

쿠인지(Kuindzy) 묘지

 

이바노프 묘지

 

코미사르체프스키(Kommissarzhevsky) 묘지

빅토르 코미사르제프스키(Viktor Grigorievich Komissarzhevsky 1912~1981)는 
러시아의 배우이자 연출가다.
1934년부터 배우로 프메료프 연구극장에 속하였고, 
1941년부터는 연출가로서 활동했다. 
엘모로바 극장 수석 연출가였으며 연극 평론가로서도 알려져 있다.

 

사모일로바-미쉐리나(samoilova-micherina), 사모일로바-막쉬바(samoilova-maksheeva) 묘지

 

키모프(Keimov) 묘지

 

리야도프 스키페트로프(Lyadov Skipetrov) 묘지

 

안드레프 레오노바(Andreev Leonova) 묘지

 

알렉산드르 코피로브( Alexander Kopylov)의 묘지

 

알렉산드르 네프스키 수도원 묘지

 

알렉산드르 네프스키 수도원 묘지

 

알렉산드르 네프스키 수도원 묘지

 

알렉산드르 네프스키 수도원 묘지

 

알렉산드르 네프스키 수도원 묘지

 

알렉산드르 네프스키 수도원 묘지

 

알렉산드르 네프스키 수도원 묘지

 

알렉산드르 네프스키 수도원 묘지

 

알렉산드르 네프스키 수도원 묘지

 

알렉산드르 네프스키 수도원 묘지

 

알렉산드르 네프스키 수도원 묘지

 

알렉산드르 네프스키 수도원 묘지

 

[영상] 알렉산드르 네프스키 수도원(Aleksander Nevsky Monastery) 

 

 

 

[영상] 걸어서 넵스키 대로 / 카잔 대성당 - 모이카(Moyka) 강

 

젤로니 모스트(Zelonyy Most, Green Bridge)

상트 페테르부르크 넵스키 대로에서 모이카(Moika)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로
이 도시에서 최초의 주철 다리였다.
1716년 원래는 목조 다리로 건설되었다. 
1730년에는 녹색으로 칠 해져서 그린 브리지(Green Bridge)라는 이름을 얻었다. 

모이카(Moyka) 강은 길이 5km (3 마일), 폭 40미터 (130 피트)로 작은 강이다.
원래 Mya로 알려진 강은 "진창" 또는 "수렁"을 뜻하는 Ingrian 단어에서 그 이름을 따 왔다.
모이카(Moyka) 강은 여름정원 근처의 폰탄카 강에서 흘러 네바 강 삼각주로 흘러 간다. 
2019년 현재 15개의 다리가 모이카(Moyka)를 건너고 있다. 
이들 중 대부분은 역사적, 예술적으로 가치를 지니고 있다. 

 

1830년 경찰다리(Police Bridge) 풍경

1768년에 이 다리는 상트 페테르부르크 경찰총장의 집 근처라고 해서 
'경찰다리(Police Bridge)'로 이름이 변경되었다 .
1806년 기존 다리 대신 건축가 윌리엄 헤스테(William Heste)가 새로운 주철 다리를 건설했다. 
주철의 강도는 특히 무거운 화강암 교량에 비해 더욱 우아하고 가벼운 디자인을 가능하게 했다. 
이 설계는 매우 성공적인 것으로 간주되어 모이카(Moika)를 

가로지르는 교량의 표준 설계로 승인되었다.

1842년 넵스키 대로의 증가하는 교통량을 수용하기 위해 

경찰다리(Police Bridge)가 확장되었다. 
1844년에는 러시아에서 아스팔트로 포장된 최초의 다리였다. 
1904 ~ 1907년에 트렘웨이 트랙 (Tram way track, 전차)이 넵스키 대로에 건설 되었을 때 
다리가 다시 넓어졌고 건축가 레브 일린(Lev Ilyin)이 가로등을 추가했다.

1918년 이 다리는 인민다리(People Bridge, Народный мост , Narodniy Most)로 이름이 바뀌었고 
1998년에 다시 원래 명칭인 그린 브리지(Green Bridge)로 이름이 변경되었다.

 

모이카 강과 그린 브리지(Green Bridge)

 

모이카 강과 그린 브리지(Green Bridge)

 

스트로가노프 궁전(Stroganov Palace)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가장 오래 되고 최고의 귀족 거주지 중 하나인 
스트로가노프 궁전(Stroganov Palace)은 넵스키 대로와 

모이카(Moika) 강이 만나는 교차점 모퉁이에 있다.
지금은 러시아 국립 박물관 컬렉션의 일부를 소장하고 있다.

스트로가노프(Stroganov) 가문은 15세기부터 저명한 상인이었지만, 
대북 전에서 차르의 군대에 상당한 재정적 지원을 한 덕분에

페트로 대왕 통치 때에 귀족 계급으로 올라갔다. 
이 가문은 엘리자베스 황후 통치 당시 세르게이 그리고리예비치 스트로가노프 남작과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주요 행정관이었던 그의 아들

알렉산더 세르게예비치 스트로가노프 백작에 의해 전국적으로 유명해졌다. 

그러나 궁전의 가장 인상적인 인테리어는 1790년대와 1800년대에 
알렉산더 세르게예비치 백작이 신고전주의 스타일로 인테리어 장식을 

개조하기 위해 고용한 카잔 대성당의 건축가 안드레이 보로니킨이 만든 것이다 

스트로가노프 궁전은 1918년에 국유화되었으며 원래 귀족 생활박물관으로 운영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1929년에 문을 닫았고 전시 유물들은 

에르미타주 박물관(Hermitage)에 넘겨졌다. 
그 이후로 궁전은 식물연구소와 선박건조 연구 시설을 포함한

다양한 소련 기업의 사무실로 사용되었다.

 

넵스키 대로 건너편에서 본 스트로가노프 궁전

 

모이카 강 파사드

 

모이카 강 건너편에서 본 궁전보기

 

스트로가노프 궁전 야경

 

스트로가노프 궁전 내부
처음에 이 홀은 현관으로 사용되었고 대리석 바닥은 당시부터 지금까지 보존되고 있다. 
1840년대에 인테리어가 재장식되었고 1995년에 복원되었다.

 

스트로가노프 궁전 내부

이 건물은 1988년 정부에 의해 러시아 박물관으로 넘어 갔고 
그 이후로 스트로가노프 궁전은 집중적인 복원 작업의 대상이 되었다. 
2003년 외부 복원이 완료되었고 내부 작업 결과가 점차 공개되고 있다.

 

블루 브리지(Blue Bridge)

그린 브리지(Green Bridge)에서 하류 쪽으로 두 블럭 가량 내려가면
마린스키 궁전(Mariinsky Palace) 근처에서 모이카 강을 가로지는
폭 99 미터 (325 피트)의 블루 브리지(Blue Bridge)를 만난다.

 

블루 브리지(Blue Bridge) 

블루 브리지(Blue Bridge)는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가장 넓은 다리이며  
때로는 세계에서 가장 넓은 다리라고 주장되기도 한다.  
하지만 기네스 세계 기록과 같은 국제 참고 문헌에서는 인정되지 않은 주장이다 . 

블루 브리지는 모이카 강을 가로 지르며 도시의 역사적인 중심지에 있는

성 이삭 광장의 마린스키 궁전 앞에 위치해 있다.  
다리의 이름은 모이카 강을 건너는 다리를 색으로 구분하는 19세기 전통에서 유래되었다.  
다른 색깔의 다리와 마찬가지로 Blue Bridge는 

강을 향한 측면의 색상에서 그 이름을 얻었다.  
현재는 4개의 유색 다리만 살아 남아 있으며 나머지 다리는 

각각 빨간색 다리, 녹색 다리 및 노란색 다리다.  

 

1830년대 블루 브리지 (Blue Bridge)를 대신한 최초의 주철 다리

 

[영상] 걸어서 넵스키 대로 / 모이카(Moika) 강 - 궁전광장(Palace Square)

 

참모 건물의 개선문

정면에 개선문 아치(Arka Glavnogo Shtaba)가 보인다.
이 개선문 아치는 넵스키 대로와 궁전광장을 연결하는 문인 셈이다.
이 아치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참모 건물 중앙 부분의 두 날개를 연결하는
19세기의 건축 기념물이며 국가의 보호를 받고 있다.

개선문은 건축가 카를로 로시(Carlo di Giovanni Ross)가 

1812년 애국 전쟁에 헌정된 마지막 기념물로 지어졌다. 
얕은 부조로 장식된 세 개의 상호 연결된 아치로 구성되어 있으며 
넵스키 대로 측면에서 궁전광장(Palace Square)으로 들어가는 입구 역할을 한다.
건물은 육군 참모, 재무 및 외무부 장관을 위해 지어졌고 
모든 장식은 1812년 전쟁에서 러시아의 승리를 위해 헌정되었다.

 

참모 건물의 개선문 아치 (Arka Glavnogo Shtaba)

 

참모 건물의 개선문 아치 (Arka Glavnogo Shtaba)

 

궁전광장(Palace Square)

광장을 에워싸는 참모본부 건물에는 개선문이 있다.
두 개의 건물을 이어주는 개선문에는 승리의 여신이 마차를 끄는 모습으로 전승을 기념한다.

1905년 노동자들의 근로조건 개선 요구에 무차별 총격을 가한 피의 일요일의 현장이자
볼셰비키 10월 혁명의 장소이기도 했던 궁전광장, 

이제는 역사의 뒤안길에서 관광 명소로 남아 있다.

 

인증샷

 

인증샷

 

인증샷

 

궁전 광장에서 본 참모 건물의 개선문 아치

넵스키 대로를 걷는 보행자들을 궁전 광장으로 안내하는 중앙 개선문 아치로 유명한 
이 초승달 모양의 신고전주의 장엄한 건물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유명한 건축가 
카를로 로시가 설계했으며 1829년에 완공되었다. 


동관에는 참모 사무소만 있고 서관에는 외무부와 재무부도 있었다. 
이제는 에르미타주 박물관에서 가장 유명하고 인기 있는 부분 중 하나인 
인상파와 후기 인상파의 예술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개선문 아치 (Arka Glavnogo Shtaba) 영광의 전차

참모 건물의 개선문 아치 (Arka Glavnogo Shtaba) 위에는 

여섯 마리의 말이 이끄는 "영광의 전차" 조각물이 세워져 있다. 

1819년에서 1829년 사이에 지어진 참모 건물(General Staff Building)은 
러시아 제국 스타일 건축의 가장 좋은 예 중 하나로 인정받고 있다. 
건물의 구부러진 정면은 거의 600 미터에 달하고 높이는 4층이다. 
서쪽 건물과 동쪽 건물은 영광의 여신, 
승리의 전차 조각으로 장식된 개선문과 함께 세 부분으로 연결된다. 

 

참모관 내부 에르미타주 박물관의 새로운 전시 공간

에르미타주 박물관(Hermitage)은 1993년 참모관 동쪽 건물에 
19세기 및 20세기 예술 작품을 소장하기로 결정했다. 
목적에 맞게 건물을 개조하는 작업은 2014년에 완료되었다. 

박물관의 2층에는 상설 전시물인 아르누보 시대 예술품과 황제에게 제공된 

희귀한 선물 컬렉션, 한때 러시아 제국 재무부 건물에 있던 예술품 등이 전시되어 있다.

3층에는 프랑스와 러시아의 장식 예술과 의상들, 

19세기 프랑스 회화와 조각, 19세기 독일, 네덜란드, 벨기에 등 

서유럽 미술 및 18세기 러시아 근위대 박물관이 전시되어 있다.
또한 참모 건물에 거주하던 러시아 제국 외교부의 역사를 보여주는 전시물이 있다.

참모관 4층은 인상파와 후기 인상파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이 컬렉션은 그 기원에 대해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대부분의 작품은 제 2차 세계 대전 중과 
그 이후에 적군에게 점령한 영토에서 압수되었으며 에르미타주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던 작품들은 1995년에야 공식적으로 인정되었다. 
칸딘스키(Vasiliy Kandinskiy)와 카지미르 말레비치(Kazimir Malevich)의 작품을 포함하여 
혁명 이전 러시아 미술 컬렉션도 있다.

 

[영상] 궁전 광장 참모본부의 건물 및 아치에 대한 해설
한글 자막 제공

 

궁전광장과 알렉산더 원주 (Alexander Column)

나폴레옹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기념하여 세워진 

알렉산더 원주(Alexander Column) 기둥이 우뚝 솓아 있다. 
원통으로 된 기둥은 무게 600톤이 넘는 것으로 이것을 다듬고 

운반하는데만 2년에 걸쳐 2,400명이 넘는 인력이 동원되었다고 한다.

알렉산더 원주는 프랑스 태생의 건축가 오귀스트 드 몽페랑

(Auguste de Montferrand)에 의해 설계되었고, 1830년에서 1834년 사이 

스위스 태생의 건축가 안토니오 아다미니(Antonio Adamini)와 함께 지어졌다. 

1834년 8월 30일 (St. Alexander of Constantinople 's Day)에 공개되었다. 
붉은 화강암의 높이는 25.6m, 직경이 약 3.5m (11 피트 5 인치), 

무게는 661톤, 총 높이는 47.5m이다.

 

"비계의 알렉산더 원주 (Alexander Column)" 1832-1834, by Grigory Grigorievich Gagarin.

 

알렉산더 원주 (Alexander Column) 

알렉산더 원주의 기초를 준비할 때 1250개의 소나무 더미가 

화강암 블록이 깔린 굴착 바닥에 놓여졌다. 
400톤 무게의 모놀리스가 받침대 위에 세워져 받침대의 베이스가 되었다.

 

십자가를 들고 있는 천사의 동상

천사의 동상은 러시아 조각가 보리스 오를로프스키(Boris Orlovsky)가 디자인했다.
천사의 시선은 아래쪽으로 향하고 있는데 이는 러시아 땅의 수호자의 시선이다. 
천사의 모습은 나폴레옹 군대의 패배 이후 국가의 평화를 상징한다.
천사의 얼굴은 알렉산드로 1세 황제와 매우 유사하다고 한다.

 

겨울 궁전(Winter Palace)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는 천사의 동상 

 

알렉산더 기둥의 받침대 장식

알렉산더 기둥의 받침대는 조반니 스코티(Giovanni Battista Scotti)가 조각한 
군사적 영광의 상징으로 장식되어 있다.
겨울 궁전을 향한 받침대의 측면에는 알렉산더 1세에게 감사하는 문구가 새겨진 
플라크를 들고 있는 날개 달린 인물을 묘사한 옅은 부조가 있다. 
나머지 세면은 지혜와 풍요, 정의와 자비, 평화와 승리의

우화적 인물을 특징으로 하는 옅은 장식으로 장식되어 있으며, 

마지막으로 1812년, 1813년 및 1814년 날짜가 새겨진 방패를 들고 있다. 

 

알렉산더 기둥의 받침대 장식

 

알렉산더 기둥과 겨울 궁전(Winter Palace)

 

넵스키 대로와 궁전 광장

 

궁전광장이야 말로 페테르부르크가 "공개되어 있는 박물관"이라고 
불리는 이유를 확연히 보여주는 곳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광장의 북쪽으로는 러시아 바로크 예술의 진수라고 알려져 있는 겨울궁전이 서 있고, 
그 반대편으로는 카를로 로씨(Carlo Rossi)에 의해 고전주의 양식으로 지어진 
반원형의 개선아치를 갖춘 구 참모본부가 위치하고 있을 뿐 아니라 광장의 중앙에는 1834년, 
나폴레옹과의 조국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여 세워진 47.5m 높이의 알렉산더 원기둥이 서 있다.

궁전광장은 수많은 정치적인 사건이 일어난 곳으로 잘 알려져 있다. 
1905년의 제1차 러시아 혁명의 발단이 되었던 "피의 일요일"날 시위가 있었던 곳이며, 
볼세비키 통치기간 중 "단결된 평화시위"와 군사 행진을 위해 사용되어진 장소도 바로 이곳이다. 
민주화된 오늘날에도 갖가지 종류의 정치적 집회-민주주의자, 공산주의자, 무정보주의자, 
군주제 옹호자, 반시온니스트 등의- 및 문화공연이 이곳에서 행해지고 있다.

 

네바 강과 겨울 궁전(Winter Palace)

 

상공에서 본 모이카(Moyka) 강과 궁전 광장

 

상공에서 본 네바 강과 궁전 광장

 

대한항공에서 제공하는 에르미타주 박물관(State Hermitage Museum) 안내문

 

네바강과 겨울 궁전(Winter Palace)

 

네바강과 겨울 궁전(Winter Palace), 궁전 광장

 

네바강에서 바라본 에르미타주 박물관(State Hermitage Museum)


사진의 왼쪽부터 에르미타주 극장 - 구(舊)에르미타주 - 소(小) 에르미타주 - 겨울궁전 
신 에르미타주는 구 에르미타주의 뒷편에 위치해 있다.
에르미타주 박물관(State Hermitage Museum)은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거대한 박물관이다. 
과거 러시아 제국의 겨울궁전을 그대로 박물관의 일부로 사용하고 있다. 
그것도 세계의 웬만한 다른 박물관과 달리 겨울궁전은 황제가 주로 거주하던 정궁(正宮)이었다. 
따라서 소장 문화재뿐 아니라 건물과 수많은 전시실 자체가 대단한 볼거리이다.

처음에는 소(小)에르미타주만 미술관으로 쓰였으나, 차츰 컬렉션이 많아지면서 확장하여 
지금은 겨울궁전을 본관으로 쓰고 구(舊) 에르미타주 등 4개의 건물을 박물관으로 쓰고 있다. 
전시된 작품들의 규모가 매우 방대한데, 그 중에서도 특히 관람할만한 것은 
125개의 홀을 차지하고 있는 서유럽의 전시실로, 이곳에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 
라파엘로, 미켈란젤로, 루벤스와 렘브란트 등 유명화가의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네바 강과 에르미타주 박물관(State Hermitage Museum)

 

[영상] 상트페테르부르크 궁전광장

 

[영상] 알렉산더 기둥과 겨울궁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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