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8/21 08:00 김삼웅
김근태는 1986년 6월 30일 2년 10개월의 옥고를 치르고 경주교도소에서 출소하였다.
가석방이었다. 그가 출소하게 된 데는 정치적 지형변동에 따른 조처였다. 정부는 6ㆍ29선언 2주년의 은사라고 생색을 냈다.
4월 26일 실시된 제13대 총선은 노태우의 민자당이 과반수 의석 확보에 실패하면서 여소야대 정국으로 바뀌었다. 김대중의 평화민주당(평민당), 김영삼의 통일민주당(민주당), 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공화당)의 순위로 3야당이 일정한 의석을 갖고 포진하였다.
정국은 모처럼 야당이 주도하는 가운데 5공 청산과 민주화 추진이 진행되었다.
야당들은 사안에 따라 연대 혹은 합종을 택해가면서 경쟁적으로 정치개혁에 나섰다. 하지만 9월 17일부터 10월 2일까지 열린 제24회 서울 올림픽으로 정치 현안은 스포츠 제전에 빨려들어가고 말았다.
김근태는 세월의 변조 속에서 모진 고문과 3년여의 옥고로 망가진 건강을 추스르는 한편 다시 행동에 나섰다. 첫 발언은 10월 22일 서울대 민추위위원장 문용식 사건이 고문에 의한 조작이었다는 사실을 폭로하는 기자회견이었다.
문용식과 박문식 등은 1984년 10월 7일 민주화추진위원회(일명 깃발 그룹)를 결성, 문용식이 위원장으로 선출되엇다. 민추위는 하부조직의 건설에 나서 서울대ㆍ연세대ㆍ성균관대ㆍ고려대 등의 민주화투쟁위원회가 주축이 되어 전국민주화투쟁학생연합(민주학련)을 결성하기에 이른다.
민주학련 소속 대학생들은 11월 14일 민정당 중앙당사를 점거, 농성을 시작하면서 민중생존권 보장과 14개 항의 민주화 조치를 요구했다. 학생들은 또 민정당재집권저지투쟁을 비롯하여 격렬한 반독재투쟁을 벌였다. 공안 당국은 1985년 5월 23일 민족통일ㆍ민주쟁취ㆍ민중해방투쟁위원회 소속 대학생들의 미문화원 점거농성 사건 등을 민추위가 배후 조종한 것으로 판단하고, 문용식 등을 체포하여 모진 고문을 자행하였다. 김근태가 이 사건이 고문에 의해 날조되었음을 폭로한 것이다.
김근태가 석방되었을 때에는 민청련은 정치상황의 변화와 주요 간부들의 장기 구속 등으로 거의 활동이 정지된 상태였다. 김근태로서는 안타까운 노릇이었으나 시대 상황의 변화에는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5ㆍ3 인천항쟁 이후 주요 간부 구속과 수배로 민청련의 역량은 이전보다 상대적으로 낮아졌다.
반면에 6ㆍ29선언으로 독재정권의 폭압적 성격이 약화됨으로써 열려진 공간은 엄청난 대중의 정치적 진출을 가져왔다.
이런 상황에서 민청련은 탄압시기에 보여왔던 민주화운동진영에서의 선도적ㆍ지도적 역할을 유지할 수 없었다.(…) 내부적으로는, 86년 초에 회원들이 대거 탈퇴한데다가 김근태 전의장, 김병곤 전상임위원장을 비롯한 지도부 간부가 장기간 구속상태에 있었고, 외부적으로는 5ㆍ3인천항쟁을 빌미로 한 민통련을 비롯한 민주화운동단체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과 11월의 건국대 항쟁의 대학생 대량 구속 사태 등 탄압국면 속에서 공개정치투쟁을 표방하는 민청련의 활동 입지가 협소할 수밖에 없었다. (주석 9)
김근태는 민청련의 쇄락에 실망하면서도 절망하진 않았다.
새로운 희망을 걸었다. 먼저 더 이상 자신과 같은 고문 피해자가 생기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고문 경찰을 찾아내 세상에 알리는 일이 시급했다. 12월 15일 서울 고법의 제정신청이 받아들여졌다. 그리고 이근안 전 경감이 수배되기에 이르렀다. 역시 정치지형의 변화때문이었다.
올림픽이 끝나고 정국은 일해재단 청문회를 시작으로 5공비리 청문회로 이어졌다.
노량진 수산시장 비리 사건으로 전두환의 형 전기환과 사촌동생 그리고 전두환의 처남 이창석이 공금 횡령 혐의로 각각 구속되었다. 11월 23일 전두환ㆍ이순자 부부는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한 뒤 강원도 인제군 백담사로 유배되었다.
새로운 정치질서가 잡혀가고 전두환이 몰락하면서, 세상의 관심은 전두환의 후계자 노태우와 김대중ㆍ김영삼ㆍ김종필의 이른바 ‘3김’에 쏠렸다. 그리고 반독재 투쟁을 ‘적당히’ 했던 운동권 출신들이 야당에 들어가 ‘투사’가 되었다. 이 무렵 김근태의 심경은 할프단 라스무센의 다음의 싯구대로가 아니었을까 싶다.
나를 두렵게 하는 것은
나를 두렵게 하는 것은 고문가해자도
다시 일어설 수 없는 몸도 아니다
죽음을 가져오는 라이플의 총신도
벽에 드리운 그림자도
땅거미 지는 저녁도 아니다
희미하게 빛나는
고통의 별들이 무수히 달려들 때
나를 두렵게 하는 것은
무자비하고 무감각한 세상 사람들의
눈 먼 냉담함이다. (주석 10)
김근태는 이 해 9월 말 도서출판 중원문화를 통해 고문과 옥중기록을 묶어 <남영동>을 간행하였다. 독재정권의 야만적인 고문실상, 옥중 편지와 민청련 기관지 <민주화의 길>에 썼던 주요 논설 등을 실었다. 한국민주화운동사와 고문의 야만성을 폭로한 5공시대의 대표적 고발문학으로 꼽히는 책이 되었다.
이 책은 문익환의 <근태가 살던 방이란다>의 서시에 이어,
제1부 : 무릎을 꿇고 살기보다 서서 죽기 원한다 ① 예고되고 계획된 구속 ② 인간 도살장 남영동, 그곳에서 있었던 한 맺힌 내력 ③ 서울 구치소 ④ 지식인이여, 법관들이여 ⑤ 나는 처벌받을 수 없다.
제2부:민주화여, 민주화여, 민주화여! ⑥ 이제 나는 다시 일어나 ⑦ 민주주의를 향한 진군
발문 : 김근태 동지를 알자 / 문익환으로 구성되었다.
이 책은 원래 1987년 9월 김근태가 아직 경주교도소에 수감돼 있을 즈음 민청련에서 <김근태 고문 및 옥중기록 - 이제 다시 일어나>란 제목으로 중원문화원에서 출판한 것을 제목을 바꾸어 재간한 것이다. 민청련은 서문에서 “고문이 남긴 육체적ㆍ정신적 폐허상태를 추스르며 다시 깨어 일어나는 한 인간의 희생과 재기의 처절한 과정을 그의 기록을 통해 밝혀내고자” 간행했다고 밝혔다. 서문은 이어진다.
민청련 전의장 김근태 동지는 다른 어떤 점보다 인격적으로 고결한 사람이다. 한 단체의 대표로서, 남편으로서, 두 자녀의 아버지로서 그의 절실한 모습을 이 책을 통해 찾아볼 수 있다. 우리는 김근태 동지의 이러한 진실성을 통하여 참 용기가 무엇인가를 깨닫게 된다. (주석 11)
주석
9> <6월항쟁을 기록하다(1)>, 247쪽.
10> 할프단 라스무센, <나를 두렵게 하는
것은>, 박원순 <야만시대의 기록 2>, 21쪽, 역사비평사, 2007.
11> <이제 다시 일어나>,
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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