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근태 평전/[9장] 짧은 자유, 또 투옥되다

2012/08/22 08:00 김삼웅



김근태는 달라진 변화의 상황에서, 그러나 본질적으로는 변화하지 않는 군부정권의 향방을 주시하면서 새로운 도전을 모색하였다. 그는 어떠한 절망에서도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 끈질긴 투지를 갖고 있었다.

많은 정치인들이 즐겨 쓰는 말 중의 하나지만 김근태는 유난히 ‘희망’이란 단어를 자주 거론하는 정치인이다. 그가 정치에 입문하기 전인 1995년에 출간한 책의 제목도 <희망의 근거>다. 그런데 익숙한 일상의 언어가 시인의 손을 거치면서 새로운 생명력을 얻게 되듯이 김근태의 입을 통해서 전달되는 희망은 전혀 다른 감동으로 다가온다. (주석 1)

이승만에 출산되고, 박정희에 양육되고, 전두환ㆍ노태우로 이어진 정치 군부는, 그리고 이들에 빌붙어 실세가 되고 치부에 성공한 보수세력은 전혀 민주화의 의지를 보이지 않았다. 1989년 1월 노태우 정부는 헝가리와 수교, 동구 공산권 국가와 첫 국교를 수립하는 등 열린 외교정책을 펴는 듯 하였다. 하지만 반공냉전 의식은 전혀 바뀌지 않았다.

김근태는 진정한 민주화만이 통일을 가져오고, 평화통일만이 민중의 생존권이 보장된다는 확고한 신념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노태우 군부정권과 타협적인 보수야당을 견제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재야단체의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 대선과 총선 과정에서 분열 양상을 보였던 민족민주운동단체들을 결속하는 일이었다.

반유신, 반5공 투쟁 과정에서 청년학생운동뿐 아니라 노동자ㆍ농민ㆍ여성 등 기층민중세력의 성장이 있었다. 값진 희생이 따랐지만, 그동안 소수 운동권에 머물렀던 반독재 시민저항운동이 뿌리를 내릴 수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노태우 6공 정권에서는 다양한 시민단체가 결성되고 저항운동도 그만큼 튼실해졌다.

한 평자는 전민련의 창립과 관련, 그 의미를 다음과 같이 썼다.

전민련은 분열과 무기력에 고개를 돌리고 있던 이 땅 민중들에게 희망과 신심을 안겨줄 강력한 단합된 구국운동 조직이고, 불신과 대립을 깨끗이 청산하고 단결과 투쟁의 길에 나선 모든 애국자ㆍ애국단체들의 합일된 의지의 결실체이며, 각계각층에서 비약적으로 성장하고 있는 대중운동발전의 요구에 화답한 조직적 총화이다.

이제 전민련의 건설로 대중운동 속에 확고한 구심이 마련되어 우리 구국운동이 일대 전진을 기하게 되었고, 각계 민중에게는 전민련이라는 민중운동의 견인차, 응원군이 생겨남으로 해서 더욱 날카로운 불패의 투쟁의 무기를 갖추게 되었으며, 미-노태우 독재에게는 자신들의 패퇴와 종말을 앞당길 화약고이자, 저들의 매국적 소행을 가로막을 바위산이 등장한 것이 되었다.
(주석 2)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은 1989년 1월 21일 창립대회를 열고, 상임공동의장에 이부영, 공동의장에 이창복을 선출했다. 민통련의 발전적 해체와 재야ㆍ노동자ㆍ농민 등 8개 전국단위 부문운동 단체와 전국 12개 지역단체 및 200여개의 개별단체가 참여하는 해방 이후 가장 규모가 큰 구국운동조직이라는 거대 협의체였다.

이날 전민련 대의원 총 1,103명 중 726명이 참석하고, 시민ㆍ학생 등 5,000여 명이 참관한 가운데 창립대회가 열렸다. 노동운동 영역 대의원 250명, 농민운동 대의원 230명을 비롯하여 청년ㆍ교육ㆍ종교ㆍ여성ㆍ비판적 지식인 등이 다수 참여했다.

6.29선언 1주기의 ‘정치적 선물공세’의 일환으로 88년 6월 3일, 2년 10개월 만에 가석방으로 출소한 김근태 씨는 대선을 거치면서 민통련이 자중지란을 겪다가 결국 와해되고 말자 다시 운동진영을 결집, 대중투쟁을 펼칠 상시적인 공동투쟁체 건설이 시급하다고 판단, 이부영 씨등 출소한 40대 인사들과 함께 전민련 건설논의를 해나갔다. (주석 3)

전민련은 창립대회의 결성선언문과 사업계획 발표를 통해 대북관계 및 5공청산 등 대내외 정치문제에 대해 제도정치권과는 다른 방향으로 영향력을 적극 행사할 것임을 천명했다.

전민련은 1988년의 3가지 과제를 목표로 제시했다.
첫째, 5공청산과 광주학살 책임자 처단투쟁을 통해 노정권의 동요의 폭을 극대화한다.
둘째, 대중투쟁에 대한 지원을 강화하고 정치투쟁으로서의 진전을 위한 반민주악법 개폐투쟁을 전개한다.
셋째, 미국과 노태우 일당의 기만적 북방정책의 본질을 폭로하고, 두 개의 한국 정책을 저지한다.
(주석 4)

전민련은 이와 같은 목표 아래 5공청산과 광주학살 원흉처단투쟁, 반민주악법 개폐투쟁, 조국통일 촉진 투쟁 등을 줄기차게 전개하였다. 전민련은 창립 다음날인 1월 21일 15,000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서울 대학로에서 ‘노태우 정권의 민중운동 탄압 및 폭력테러 규탄대회’를 시작으로, 2월 18일에는 ‘광주학살 5공비리 민중생존권탄압 책임자 노태우ㆍ부시 규탄 국민투쟁 기간’을 선포하여 6공정권의 폭압에 정면 저항했다.

전민련은 2월 27일 회원 30여 명이 “부시 방한 결사반대” 등을 요구하며 광화문 교보빌딩 앞에서 미대사관 앞쪽으로 시위를 벌이다가 전원이 연행되었다. 3월 14일 전민련 주최로 8개 단체가 연합하여 ‘노정권 퇴진을 위한 공동투쟁본부’ (공투본부) 결성식을 가진데 이어 3월 19일에는 공투본부 주최로 5,000여 명이 한양대 노천국장에서 ‘노태우정권 불신임투쟁 선포대회’를 열고 가두시위를 전개했다. 또 4월 2일에는 노운련ㆍ서총련 소속 회원 등 1,000여 명과 함께 동국대에서 ‘현대중공업노조에 대한 강제진압 규탄대회’를 열었다.

1989년의 대정부 투쟁의 중심에는 전민련이 있었다. 전민련은 시민조직과 노동운동 단체들과 전두환 체포, 5공청산, 노태우 퇴진, 노동탄압 중지 등 핵심 이슈를 제시하면서 6공정권을 압박했다. 여기에는 김근태의 조직력과 정세분석에 힘 입은 바 적지않았다.

그는 “대선시기의 전술적 차이를 전면에 내세우지 말고 중층적 타협을 통해 신속히 공동체를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그의 이 ‘선 건설 후 내부투쟁’ 논리는 당시 운동의 통합을 요구하는 운동진영 내부의 정세와 결합하면서 강한 설득력을 가져나갔다. 그 후 전국적으로 지역민족민주협의회가 결성되면서 결국 89년 1월 전민련 발족을 가져오게 된다.

그가 출소한 직후인 88년 7월 성남민청련 창립대회에서 ‘80년대 후반 민족민주운동 현황과 과제’ 라는 주제로 연설한 ‘2개의 전선론’은 현재까지 상당한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민족민주연구소의 채만수 소장은 “그동안 추상적인 차원에서 전개되어온 통일전선론을 크게 진전시킨 것”으로 평가했다.

그는 이 강연에서 운동상황을 “민족민주전선, 즉 애국전선의 건설을 둘러싸고 진통을 겪고 있다”고 파악하고, 애국전선의 건설에 관한 문제에서 “민족민주운동 전선의 즉각적인 건설을 주장하는 소시민적 포퓰리즘과 국민운동 수준에서의 연합을 주장하는 영향을 경계해야한다”고 주장하며 다음과 같이 2개의 전선론을 폈다.

“현재 민족민주운동은 기층의 민중운동 역량과 재야운동의 일부로 구성되어 있다. 국민운동은 보수야권으로 불리는 제도정치권 그리고 재야운동의 일부를 포함하고 있다. 이 양자는 민주화 실천목표와 운동방식에도 큰 차이가 존재한다. 우리의 운동에는 명백한 두 개의 전선이 형성되어 있다. 민족민주전선과 국민전선이다. 이 양자의 관계는 민족민주전선이 기본모순, 국민전선이 현시기 주요모순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강연은 향후 전민련의 위상과 발전전망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
(주석 5)

주석
1> 정혜신, <희망의 근거가 됨직한 사람>, <신동아>, 2001년 9월호.
2> 이무명,
<애국민주운동론>, 270쪽, 녹두, 1989.
3> 이재화, 앞의 책, 166쪽.
4>
<민주화운동사연표>, 518쪽.
5> 이재화, 앞의 책, 16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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