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근태 평전/[9장] 짧은 자유, 또 투옥되다

2012/08/23 08:00 김삼웅

 

늦봄 문익환 목사의 생전모습. 살아생전 그는 통일운동과 민주화운동의 현장에 항상 있었다.ⓒ 김민수

 

김근태는 이론가이면서 전략가였다. 반군사정권, 반외세투쟁에 있어서는 명료한 이론과 함께 치밀한 조직과 연대를 통한 전략이 필요하다는 인식의 소산이었다. 과거의 재야ㆍ청년운동이 거칠게 조직되어 단발적으로 투쟁하다가 와해되곤 했던 경험에서 치열한 전략이 요구되었다. 그는 정책기획실장으로서 전민련의 이념과 조직을 총괄하면서 90년대초 노태우 정권과 치열하게 싸웠다.

위기에 몰린 노태우 정권은 예의 공안정국을 조성하여 다시 파쇼적인 통치로 본색을 드러냈다. 전민련 고문인 문익환 목사가 3월 25일 정경모ㆍ유원호와 함께 베이징을 경유하여 평양에 도착하고, 이에 앞서 3월 20일 작가 황석영의 방북사건 등을 공안정국의 빌미로 삼았다. 문익환은 평양공항에서 입북성명을 발표하여 “일찍부터 평양을 방문하여 김일성 주석과 만나 마음을 열고 민족의 장래를 기탄없이 이야기하고 싶은 희망을 갖고 있었다”고 말했다. 문 목사는 김일성과 회담을 하는 등 10일간의 방북 일정을 마친 뒤 귀국했다.

정부는 문 목사 일행이 귀국하자마자 미리 발부받아 둔 사전 구속영장을 집행하여 김포공항에서 구속ㆍ수감했다. 이 사건은 공안정국의 신호탄이 되었다. 4월 12일 이부영ㆍ조성우ㆍ권형택ㆍ이재오ㆍ이창복ㆍ배종렬ㆍ지선 스님 등 전민련 간부들을 국보법 위반혐의로 구속했다.

14일에는 <한겨레> 논설고문인 리영희 교수를 북한 취재 계획과 관련하여 역시 국보법 위반혐의로 구속하고, 5월 1일에는 김대중 평민당 총재를 문익환 방북사건과 관련 혐의로 소환했다. 노태우 정권은 제1야당 총재까지 소환하는 등 공포분위기를 조성하면서 위기 국면을 역전시키려 들었다.

4월 12일 전민련 의장단 등 간부들이 구속될 때 김근태는 빠져있었다.
외형상 고위 간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전민련 창설 당시 그는 정책실장이었다. 김근태는 의장단과 간부들이 구속되면서 조직이 흔들리자 1990년 3월 전민련 집행위원장으로 선임되었다. 조직을 유지하고 폭압적인 공안통치를 일삼는 노태우 정권과 맞장뜨기 위해서는 김근태가 다시 전면에 나서야 한다는 회원들의 요구가 빗발쳤다. 하지만 이것은 다시 십자가를 지게 되는 고난의 길이었다.

김근태의 능력과 역량, 전민련과 민주화운동 진영에서의 위상을 꿰고 있는 공안당국이 그를 방치할 리 없었다. 그들은 쇠덫을 놓고 기다리고 있었고, 외부 환경은 다시 5공 시대를 방불케 하는 상황이 되었다.

89년 대학생으로 정부의 허락 없이 평양에 갔던 임수경 씨가 판문점을 넘어 남쪽으로 내려와야 할 때,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은 문규현 신부가 임수경 씨와 동행해 내려오도록 파송했다. 물론 신부는 자신이 보호하던 학생과 함께 옥에 갇혀야 했다.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자료사진

 

1989년 5월 3일 부산동의대 사태로 경찰관 7명이 사망하고, 6월 27일 평민당 소속 서경원 의원이 방북한데 이어, 6월 30일에는 전대협 대표 임수경이 제3국을 통해 평양 청년학생 축전에 참가했다. 7월 7일에는 남한의 전대협과 북한의 조선학생위원회가 남북통일을 위한 공동투쟁 등 ‘남북학생 공동선언문’을 발표했다. 임수경은 8월 15일 문규현 신부와 함께 판문점을 통해 귀환하다가 체포되었다.

 


02.jpg
0.06MB
01.jpg
0.1MB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