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순제 녹취록과 사망원인?

국정농단의 주역, 최순실의 의붓오빠이자 최태민의 의붓아들 조순제, 그는 사망하기 1년 전에 한나라단 경선 과정에서 이명박 MB 캠프에서 자신의 목소리가 담긴 녹취록을 남기게 됩니다. 이를 조순제 녹취록이라고 하는데요. 녹취록의 내용도 궁금하지만 왜 그렇게 급작스럽게 사망했는가 하는 사망원인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하는데, 원래 지병을 앓고 있었다고 합니다.


JTBC의 "이규연의 스포트라이트"라는 프로그램에서는 녹취록의 전문을 입수하여 공개하였습니다.


"우리나라 재벌들이 돈 다 냈어요", "돈은 철저히 최태민이 다 관리"

"10월 26일 후에 뭉텅이 돈이 왔으니까, 최순실도 돈 심부름을 꽤나 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조순제는 박근혜 대통령의 구국선교회(구국봉사단)과 영남대, 육영재단에 깊이 관여했던 인물이었으니, 속사정을 누구보다 잘아는 사람일텐데, 위 몇 마디의 말만으로도 어떻게 최순실, 최태민 일가가 돈을 그렇게 많이 축적할 수 있었는가의 시발점이 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총 19장으로 이뤄진 조순제 녹취록은 존재만으로도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내용은 최순실, 최태민, 조순제, 그리고 박정희 대통령 간의 20년의 관계가 상세하게 서술되어 있다고 하는데요. 이 내용중에는 방송중에 공개하기 힘든 사생활까지도 담겨있다고 합니다.


현재의 최순실 사태와 관련해서 근본을 설명해줄 수 있는 중요한 문건이 될 수 있다고 합니다.

"10.26 사태이후 뭉칫돈이 최태민 일가로 들어가게 되고, 돈 심부름을 여동생들이 했다"라고 구체적으로 서술되어 있는데, 10.26 사태는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에 의해서 살해당했던 날입니다.


<조순제가 2007년 한나라당에 제출되었던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에 대한 위증 진정서>


조순제가 "아버지 최태민의 지시로 박근혜 대통령의 업무 지원을 했는데, 자신의 의존도(조순제)가 컸다. 내가 박대통령이 얘기하면 한자 한획도 달라지지 않고 그대로 됐다."라는 말도 녹취록에 들어 있었는데, 녹취록을 남겼던 2007년도 한나라당 대선 경선과정에서 박근혜 후보가, 자신은 "조순제라는 인물을 알지 못한다"라는 말을 듣고, 배신감이 들었기 때문에 이 녹취록을 남겼다고 합니다.



그리고 몇차례에 걸쳐서 "박근혜 후보는 절대 대통령이 되서는 안되는 사람이다"라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또한 박근혜 대통령은 당시 최태민의 집인 역삼동에 자주 갔었고, 10.26사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죽음 후에는 최순실과 급속도록 가까워졌다는 말을 덧붙임으로써 최태민과 박근혜 대통령의 일명 부적절했던 관계를 폭로하였다고 합니다.


"아이고, 그 전부터도 둘은 아주 불가분의 관계라고 봐야지" "하여튼 자주 왔어요. 사람들 다 피하게 하고 눈에 안 띄게." "온다고 연락이 오면 다 피하고"

"둘이 들어갔다 하면 밥은 문간에 갖다놓으면 영감(최태민)이 갖고 들어가고"

"저 사람(최태민)은 여자라 하는 건 그냥 무사히 통과되는 경우를 본적이 없어. 아 대단하죠, 여자에 대해선."




그리고, 자신의 아버지인 최태민에 대해서는 반감을 드러내는 말도 하였다고 하네요. 즉

"엉망이었던 사람이 본인의 엄마를 만나면서 인간이 되었다는" 


<정두언 회고록>


한편 정두언은 김현정의 뉴스쇼와의 인터뷰에서 19금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며 자신은 박근혜 대통령을 찍지 않았다고까지 하였습니다.

"유신시절 의부 최태민이 국정농단의 실제 인물이었는지를 가려내는 것은 검증위으 몫입니다."라는 그의 글을 보니, 대를 이어 국정농단을 하고 있는 최씨일가, 최순실 씁쓸하네요.


<티비조선 "최순실 의붓오빠 조순제 녹취록 육성 녹음 동영상>


<그것이 알고 싶다 중에서>


그것이 알고싶다에서도 과거 정두언의 19금 이야기가 언급 되었다고 합니다.


조웅 목사의 박근혜 마약 중독, 혼외 정사 의혹이 다시 주목받는 이유

 

어제 주요 일간지와 방송은 박근혜 정부 출범 후 청와대가 구입한 약품 중 사용처가 이해하기 힘든 약품 목록을 공개했다. 미용, 안티 에이징 시술에 사용되는 주사제가 수백 개 있었고 불면증 치료를 위한 다량의 수면제, 국소 마취제, 수술 후 지혈제, 수면 내시경용 수면 마취제 등 피부과와 성형외과라도 차린 듯 구매 약품 목록은 의아함을 느끼게 했다. 이 약품 중 백미는 비아그라와 팔팔정이었는데 이 약품은 대표적인 남성 발기 부전증 치료제다. 청와대는 엉뚱하게도 비아그라와 팔팔정을 해외 순방 시 고산병 예방과 치료를 위해 구입했다고 해명했다. 고산병에 대해 전문의들은 5천미터 이상 지역에서 주로 발생하고 비아그라와 팔팔정이 아니라 전문 고산병 예방 치료약이 있다고 말하고 있다.



어제 청와대에서 구매한 약품 목록을 통해 다시 주목받는 주장이 있다. 조웅 목사라는 사람이 박근혜 대통령 후보 시절부터 박근혜가 대통령이 되면 안되는 이유라며 박근혜의 숨은 비밀을 밝힌 인터뷰다. 그런데 당시에는 조웅 목사의 주장이 너무 황당하고 노골적이고 근거가 없다하여 박근혜 반대파조차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무시했었다. 근본도 알 수 없는 늙은이가 박근혜에 대한 반감이 끓어오르는 시국을 이용해 헛소리하는 것이라 치부했다. 그런데, 조웅 목사의 당시 주장이 다시 주목 받고 있다. 그의 주장 중 일부가 사실로 밝혀지기도 했기 때문이다.


당시 조웅 목사가 주장한 내용을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 인터뷰 주인공: 조웅(80세 ; 개명) 목사→박정희 때 5.16쿠데타를 주도한 장본인이며, 중앙정보부 창설멤버이다. 조 목사는 황태성 간첩 사건을 미 CIA에 제보하였다.
 
* 5.16쿠데타에 대한 제보가 방첩대(CIC)에 두 번 올라왔는데 조웅 목사가 당시 방첩대에 있으면서 박정희 김종필 체포를 막았다.
    
* 조웅 목사는 김종필을 한국 중앙정보부에서 몰아냈다.
  
* 박정희는 전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을 잡아다가 분쇄기에 갈아 죽였다. 그 외에도 장준하 등 많은 사람을 암살하였고 조웅 목사도 신변의 위협을 받았는데 김형욱이 죽이지 말라고 카바해 주었고, 미 CIA의 보호를 받았다. 
 
* 박근혜는 평양에 가서 김정일과 독대했으며 독대시간은 4시간 30분. 만찬 시 마약을 탄 백두산산삼독사주를 마시고 불륜관계를 맺었다. 박근혜는 3박4일동안 김정일을 만났고. 김정일과 마약을 탄 백두산산삼독사주를 마시고 잤다. 
 
*박근혜가 평양에 갈 때 정윤회. 장자크구로아. 수행비서. 요렇게 넷이었다. 장자크구로아는 김정일에게 전화를 걸어 전용기를 보내달라고 요청했고, 김정일이 응하였고 전용기를 타고 넷은 평양에 편하게 도착했다.    
 
* 박근혜는 평양에 갈 때 정부의 허가를 받지 않고 500억원(4,500만불)을 들고 갔다. 김일성 묘에 참배했고, 고려연방제를 창립하기로 했다. (조웅 목사는 2005년 박근혜를 외환관리법,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검찰에 고발했다)
 
* 장 자끄 꾸르와라는 주한 EU상공회의소 소장(EUCCK Secretary General)은 북한에서 7년 살았고, 박근혜의 북한 방문도 주선하였는데 북한 첩보원으로 본다.  
 
* 김정일은 박근혜, 정윤회, 수행비서, 장 자끄 꾸르와 4명을 위해 김정일 전용기를 중국 비행장으로 보냈다.

* 박근혜는 최태민과 15년간 동거하였고, 최태민은 늙어서 정력이 딸려 박근혜와 마약하고 성관계했고, 두 번 낙태했다. 조웅 목사는 박근혜 자궁을 조사하면 알 수 있다고 주장했으나 검찰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최태민은 박근혜 재산 3,000억원을 빼먹었다. 
 
* 최태민 사후 최태민의 의붓딸 최순실의 남편인 정윤회(최태민의 의붓사위)와 16년간 마약하고 성관계했다.   
 
*  박근혜 박지만은 마약하고 불륜을 맺고 있다는 사실을 서로 폭로하여 박지만이 옥고를 치렀다. 박정희, 박근혜, 박근영, 박지만 모두 마약했다.
 
* 최순실과 정윤회는 박근혜 때문에 법률상 이혼하였지만 동거하고 있고, 박근혜가 정윤회를 부르면 정윤회는 또 박근혜에게 가서 자는 관계이니 양다리를 걸치고 있는 것이다.
 
* 대통령직 인수위원회는 허수아비이며 정윤회가 실세로서 장관 등 인사를 정윤회가 전횡하고 있다.
 
* 조웅 목사는 박근혜를 검찰에 고발했는데 검찰에서는 조웅 목사만 조사하고 박근혜를 조사하지 않는다.  


아프리카TV BJ 등은 2013년 2월 23일 조웅 목사를 만나 다시 인터뷰를 한다. 인터뷰는 생방송으로 스트리밍되고 있었는데 현장을 급습한 형사에 의해 조웅 목사는 명예훼손 혐의로 체포된다. 이날 인터뷰는 아프리카 tv 아이디 '안단테사랑'의 강동진씨가 주최했고 미디어오늘도 동행했다. 인터뷰 장소는 사전에 공지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체포 기소된 조웅 목사는 2013년 11월 정보통신망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 위반(명예훼손), 공용서류손상 등의 혐의로 구속 기소된 조웅 목사에게 징역 1년6월을 선고 받았다.

https://youtu.be/3l2MBbDRedg

사건은 대법원으로 올라갔으나, 대법원 제2부(주심 김용덕 대법관)는 박근혜 대통령 등의 명예를 훼손한 혐의 등으로 기소된 조웅 목사에 대해 징역 1년6월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우연히도 대법원의 최종 판결 날짜는 2014년 5월 16일이었다. 



조웅 목사의 주장은 당시 미친 소리로 취급 받았고 조웅 목사를 인터뷰하는 아프리카TV의 BJ조차 조웅 목사의 주장에 어이없는 실소를 터뜨리기도 했다. 조웅 목사가 급습한 형사에 의해 체포된 지 3년 8개월이 지난 2016년 10월, JTBC는 최순실이 박근혜 대통령을 뒤에서 조정하며 국정을 농단했다는 주장과 함께 구체적인 증거인 태블릿PC를 제시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JTBC의 보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대국민 사과 성명을 발표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최순실에게 연설문 수정 등 도움을 받았다고 인정하고 사과했다. 그러나 이것은 시작일 뿐이었다. 박근혜 대통령의 최초 사과 이후 한 달 가까이 매일 새로운 국정 농단의 진실이 밝혀지고 있고 이제 모든 의혹은 사실에 기반한다고 말해도 좋을 정도로 박근혜 대통령과 최순실 일당의 국정농단 행적은 광범위하다. 그리고 박근혜 대통령의 사생활조차 현행법률을 위반하고 더 나아가 보통의 시민들이 상상도 할 수 없는 난잡함이 있는 게 아닌가 의혹을 낳고 있다. 

박근혜가 최순실 이름으로 혈액 조사를 한 것은 마약 성분 검출 여부를 확인하기 위한 게 아닌가라는 의혹을 제기하는 사람이 있고, 청와대가 구입한 주사제 중 "에토미데이트리푸로주"는 프로포폴과 유사한 작용을 하는데 수면내시경을 할 일이 없는 청와대에서 구입한 건 이상한 일이라고 의혹을 제기하는 사람도 있다. 면역제인 "아이비글로불린에스엔주"를 여러 차례 구매한 점도 마약이나 향정신성 의약품 혹은 약물 중독으로 인해 취약해진 면역력 보강을 위한 것이라는 의혹을 제기하는 매체도 있다. 심지어 백옥주사의 성분 중 하나인 "글루타치온"이 항마약 작용을 한다며 의혹을 제기하는 언론도 있다. 


조웅 목사의 말도 안되는 상상이 현실이 되고 있다. 조웅 목사의 목소리가 묻힌 이유는 한 가지다.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할 증거가 없었다. 덕분에 사람들은 조웅 목사의 주장을 무시하거나 우스갯소리로 여겼고 그가 긴급 체포될 때 오히려 박수를 치는 사람도 있었다. 박근혜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당연히 체포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박근혜를 지지하지 않는 사람도 유언비어를 유포하는 조웅 목사와 같은 사람은 구금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사실이었다. 아니, 조웅 목사의 주장 중 일부가 사실로 드러났다. 그리고 다른 주장들도 헛소리가 아니라 합리적 의심의 수준으로 대중들에게 알려지고 있다.

왜 청와대는 그 많은 약품을 구입했는가? 왜 청와대는 남성용 발기 부전 치료제를 구입했는가? 왜 청와대는 수면내시경용 마취제를 구입했는가? 왜 청와대는 수백개의 미용 주사약을 구입했는가? 조웅 목사는 주장을 했으나 제시하지 못했던 근거가 지금 튀어나오고 있다. 좀 더 뒤져보면 더 많은 증거가 나올 것이다. 이런 증거는 모두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청와대는 검찰의 기소 내용에 대해 "상상과 추측의 사상누각"이라고 평했다. 조웅 목사의 주장에 대해 상상과 추측이라고 말하던 것과 비슷하다. 그런데 지금은 그 때와 다르다. 검찰은 99% 입증할 수 있다고 말한다. 박근혜 대통령이 직접 최순실의 이익을 위해 일하라고 지시한 녹취 파일도 있다고 말한다. 지시 문건도 있다고 한다. 주장이 아니라 증거가 있다는 것이다. 천마디의 주장을 뒤집는 게 하나의 증거다. 


조웅 목사가 주장하는 내용을 입증할 수 있는 증거를 누군가 갖고 있을 것이다. 세계일보 전 사장이 말하는 대통령을 날려 버릴 수 있는 8가지 기사도 어쩌면 조웅 목사의 그것과 크게 차이 없을 지 모른다. 어떤 사건에 대해 목격자나 주변 사람의 증언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훨씬 중요한 것은 변할 수 없는 증거다. 지난 10월 이후 박근혜 정부를 붕괴시키고 있는 것은 누군가의 주장이 아니라 그 주장을 확정하는 증거였다. JTBC가 태블릿PC와 같이 확고부동한 증거에 기반하여 고발했을 때 박근혜 대통령이 고개 숙여 사과하고 자신의 과오를 인정할 수 밖에 없었듯 박근혜 대통령이 끝까지 밝히지 않는 세월호 7시간, 혹시 마약이라도 한 게 아니냐는 추측도 이런 증거에 기반해야 한다. 


http://news.tvchosun.com/site/data/html_dir/2015/06/23/2015062390047.html


모든 미디어와 시민과 제보자가 함께 한다면 박근혜 대통령이 세월호 참사 최초 7시간 동안 무엇을 했는지 밝혀낼 수 있다. 모든 의혹에 대해 상식적 의심에 기초하여 추론해야 한다. 다만 박근혜 대통령과 그 주변인, 최순실 일당이 결코 상식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지 않았음을 고려해야 한다. 다시 말해 현재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의혹은 범죄자에 대한 상식 수준에서 의심하고 추론해야 한다. 대통령이 주치의와 청와대 의료진을 두고 외부 약품을 사용한다는 게 이상하지만 범죄자라면 이상할 일 없다. 대통령이 프로포폴이든 마약이든 향정신성 약품을 사용한다면 이상하지만 범죄자라면 이상할 일 없다. 대통령이 국정 관련 자료를 외부인에게 건낸다면 이상하지만 범죄자라면 다 털어 먹기 위함이니 이상할 일 없다. 범죄자의 상식 수준으로 바라봐야지 일반인의 상식으로 바라보면 현재 상황을 이해할 수 없다.

우리가 상대하고 있는 인물은 우리 상식 속의 대통령이 아니다. 검찰이 기소한 내용만 해도 이미 수십가지 범죄를 저질렀고 헌정을 유린하여 국민 대다수가 하야 혹은 탄핵되어야 한다고 불신하는 인물이다. 이런 인물의 범죄 의혹을 따질 때 일반인의 상식 수준에서 바라본다면 결코 증거를 포착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정말 단단히 각오해야 한다. 우리가 상상한 것 그 이상의 범죄가 계속 드러날테니까.




한비자 / 나라가 망하는 10가지 징조


1. 법(法)을 소홀이 하고 음모와 계략에만 힘쓰며 국내정치는 어지럽게 두면서 나라 밖 외세(外勢)만을 의지하다면 그 나라는 망할 것이다.

2. 선비들이 논쟁만 즐기며 상인들은 나라 밖에 재물을 쌓아두고 대신들은 개인적인 이권만을 취택하면 그 나라는 망할 것이다.

3. 군주가 누각이나 연못을 좋아하여 대형 토목공사를 일으켜 국고를 탕진(蕩盡)하면 그 나라는 망할 것이다.

4. 간연(間然)하는 자의 벼슬이 높고 낮은 것에 근거하여 의견(意見)을 듣고 여러 사람 말을 견주어 판단하지 않으며 듣기 좋은 말만하는 사람 의견만을 받아들여 참고(參考)를 삼으면 그 나라는 망할 것이다.

5. 군주가 고집이 센 성격으로 간언은 듣지 않고 승부에 집착하여 제 멋대로 자신이 좋아하는 일만하면 그 나라는 망할 것이다.

6. 다른 나라와의 동맹(同盟)만 믿고 이웃 적을 가볍게 생각하여 행동하면 그 나라는 망할 것이다.

7. 나라 안의 인재(人才)는 쓰지 않고 나라 밖에서 온 사람을 등용(登用)하여 오랫동안 낮은 벼슬을 참고 봉사한 사람 위에 세우면 그 나라는 망할 것이다.

8. 군주가 대범하여 뉘우침이 없고 나라가 혼란해도 자신은 재능(才能)이 많다고 여기며 나라 안 상황에는 어두우면서 이웃적국을 경계하지 않아 반역세력(反逆勢力)이 강성하여 밖으로 적국(敵國)의 힘을 빌려 백성들은 착취하는데도 처벌하지 못하면 그 나라는 망할 것이다.

9. 세력가의 천거(薦居) 받은 사람은 등용되고, 나라에 공을 세운 지사(志士)는 내 쫓아 국가에 대한 공헌(公憲)은 무시되어 아는 사람만 등용되면 그 나라는 반드시 망할 것이다.

10. 나라의 창고는 텅 비어 빛 더미에 있는데 권세자의 창고는 가득차고 백성들은 가난한데 상공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서로 이득을 얻어 반역(反逆)도가 득세하여 권력을 잡으면 그 나라는 반드시 망할 것이다.


1. 한비자의 생애
한비자는 전국시대 한왕(韓王) 안(安)의 서자로 출생했다. 그의 어머니는 신분이 낮은 출신이었기 때문에 그가 비록 왕족이었지만 왕실에서 대우받지 못하는 불운한 처지였다. 이 같은 불행한 소년기를 가졌기에 일찍부터 학문연구에 눈을 돌렸다 그가 태어난 한나라는 전국7웅(秦, 楚, 燕, 齊, 韓, 魏, 趙) 중의 하나로 가장 문화수준이 낮은 소국이었다. 한비(韓非:한비자의 본명)는 당대의 석학인 순자에게 배우기 위해 제나라의 수도 임치로 그를 찾아갔다. 순자는 조나라 출신으로 이곳에 와서 학자의 우두머리인 제주에 초빙되어 있었다.
한비는 순자에게서 학문을 배우는 동안 후일 진나라의 재상이 된 이사는 물론, 이곳에서 유가, 도가, 명가, 법가, 묵가 등 여러 학파의 학문을 두루 흡수, 비판하면서 부국강병의 설을 체계화했다. 그의 학설을 현실정치에 적용하려면 국왕의 인정을 받아야 하는데, 그는 말재주가 없어 자신의 뛰어난 문장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다. 그의 문장을 모은 저서 [한비자]는 55편이다.
사마천의 [사기]에 의하면 이 한비자의 저서 중 [고분]과 [오두]를 우연히 진시황이 보게 되어 "이 책이야말로 내가 기다리던 것이다. 내가 이 사람을 만날 수만 있다면 죽어도 한이 없다"고 감탄했다 한다. 이때 이사가 진시황에게 "한비를 얻고 싶으면 한나라를 공격하라, 그러면 반드시 한비를 사신으로 보내올 것이다"고 건의하자 예상대로 한나라는 한비를 사신으로 보내 화친을 빌었다. 이때 한비는 진시황을 움직여 위험에 빠진 한나라를 구할 기회를 보고 있었다. 한편 이사는 진시왕이 한비를 중용할 것을 두려워하여 왕에게 모함했으나, 진시황은 그의 인물됨을 아껴 투옥시키는 데 그쳤다. 그러나 옥에 갇힌 한비에게 이사는 독약을 보내 자살할 것을 강요하자, 한비는 그의 결백을 입증하기 위해 진시황을 만나볼 기회를 간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진시황이 자기의 잘못을 깨닫고 그에게 석방명령을 내렸을 때는 이미 그가 자살한 후였다. 이처럼 한비자는 전국시대 말기에 태어나 조국의 멸망을 바로 눈앞에 두고 죽어간 사상가로서, 중앙집권적 봉건 전제정치체제의 확립을 위해 "형명(刑名)"과 "법술(法術"이론을 집대성한 자이다.


2. 사상적 배경
법가사상은 춘추전국시대의 전환기적 사회변혁에 가장 잘 부합되고, 실시할 경우 효과가 바로 나타나는 사상이었기 때문에 각국의 군주로부터 환영을 받았다. 춘추전국시대에 법가사상이 발전한 지역은 주로 제나라와 한 겅 위 겅 조 삼진(三晋)지역이다. 그런데 제나라에서 발전한 법가사상은 주로 경제적 발전을 위한 부국정책에 그 목표를 두고 있는 데 반해 한, 위, 조에서는 법가사상이 중앙집권적 왕권의 강화와 강병정책에 초점을 맞추면서 기존의 사상을 철저히 비판하고 있다는 점이 특색이라 하겠다. 그러므로 제나라 법가학파의 정치사상은 그 중심이 경제에 있었다. 제나라의 관중이 지은 [관자(管子)]에 보면, 군주는 백성을 위해 경제적인 부강을 추구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중농정책을 실시해야 하고, 또 검약한 생활과 물품의 원활한 수송으로 궁핍을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 백성의 도덕심도 경제에 바탕을 두었으므로 의식이 족해야만 예절을 안다고 했다. 공업과 상업은 큰 이익을 가져올 수 있으므로 국영으로 운영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전국시대에 들어와 위나라는 먼저 변법을 시행하여 부강한 나라가 되었다. 법치주의자들이 삼진에 많은 것은 바로 진(晋)의 분가와 분가된 3국의 왕권강화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삼진의 법가사상은 3파로 나뉘어지는데, "법치주의(法治主義)", "술치주의(術治主義)", "세치주의(勢治主義)"가 곧 이것이며, 이는 한비자에 의해 "법술(法術)"이론으로 집대성되었다. "법치주의"를 내세운 자는 이사와 상앙으로, 이들은 법률을 제정하여 이를 근본으로 삼고 엄한 형벌과 큰상을 수단으로 하여 엄격히 백성을 통제하고 군권을 강화하여 부국강병책을 추진했다. 이사는 위나라의 문후(文侯)를 섬겨 변법을 추진했고 상앙은 진나라 효공(孝公)을 도와 2차에 걸친 개혁을 단행하여 진의 통일기반을 마련했다.
"술치주의"는 한나라 신불해(申不害)가 주장한 것으로 권모술수를 이용한 일종의 통치기술이다. 신하를 통솔하고 충신과 간신을 구분하여 상벌을 가하고 임금을 두렵게 여김으로써 잘못을 저지르지 못하게 했다. 그는 한나라의 재상으로 발탁되어 한나라 발전에 공을 세웠다. "세치주의"를 내세운 사람은 조나라 출신 신도(愼到)다. 신도는 군주의 절대적 세력이 곧 군주세력의 원천임을 강조하고, 신하가 군주에 복종하는 것은 군주의 세력이지 결코 군주의 덕행이나 재능 때문이 아님을 주장했다. 이상과 같은 전국시대의 법가주의 사상을 종합하고 이를 사상적으로 체계화한 인물이 바로 한비자다. 한비자가 죽은 지 15년 후에 전한의 사가 사마천은 [사기열전]에서 "한비는 "형명(刑名)", "법술(法術)"을 좋아했는데 그 돌아감은 황로사상(黃老思想)에 근본한다. 이사와 더불어 함께 순자를 섬기었다"고 기록했다.
한비자는 한나라 공자(公子)로 진시황 때 재상이 된 이사와 함께 순자의 제자로서 성악설을 사상적 기반으로 하고 있었다. 한비자는 유가의 "덕치주의"나 "예교주의"를 배척하고 법치주의를 내세우고 있다. 법치의 기본은 "엄형주의(嚴刑主義)"와 철저한 "신상필벌"을 원칙으로 했다. 군왕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부강한 나라이고 이를 위해서는 강한 군대(强兵)가 필요하고 부국을 위한 농업생산의 발전을 내세워 상업과 공업을 말업(末業)으로 억압했다. 한비자는 법치의 운영 방법으로 술치와 제치를 함께 사용해야 함을 강조했다. 즉, 백성을 통치하기 위해서는 '법'이 필요하고 관리를 부리기 위해서는 '술'이 필수적이기 때문에 '法 , 術 , 勢'는 제왕이 나라를 다스리는 기본이라고 했다.
한편 한비자는 "형명동참(刑名同參)"이란 용어를 많이 쓰고 있는데 간단히 말하면 신하들이 하는 말(名)과 실제의 공로(刑)를 비교하여, 서로 부합하면 상을 주고 그렇지 않으면 가차없이 벌을 주어 신하들의 망언이나 악행을 방지하고 그 책임을 분명하고자 하는 것으로 한비자의 "형명론(刑名論)"은 명가(名家)의 실재론(實在論)과 상통한다.


3. [한비자]의 내용
[한비자]는 한비의 저서로 처음 한자(韓子)라 불렀는데 당(唐)의 한유(韓兪도 한자(韓子)라 불렀기 때문에, 혼동을 피하기 위해 송대 이후 한비자라 부르기 시작했다. [한비자]는 총 55편으로 총 10만 어로 엮어져 있으며, 논문체 문답체 문장과 설화, 우화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대부분은 한비가 저술한 것이나 일부는 그의 후학들이 쓴 것도 있다. 55편 중 한비자의 사상을 엿볼 수 있는 몇 편의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한비자의 사상은 "법술론"으로 대표된다. 여기서 '법'이란 법령을 뜻하고, 이 법이야말로 국가통치의 근본이 된다고 강조했다. 법은 백성이 따라야 할 절대적인 기준이 되어야 하며 아무리 평범한 군주라도 법의 운용만 잘 터득하면 훌륭한 정치를 할 수 있다는 것인데, 여기서 '술'이란 법을 운용하는 방법을 말한다. 술은 군주의 가슴에 품고 이것 저것을 비교하여 남 몰래 신하를 제어하는 것으로서, 술은 남에게 절대로 보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신하의 말이 진실인가를 꿰뚫어보는 재주가 있어야 한다. 신하를 실험하기 위해 의심스러운 말을 하여 속여도 보고 알면서도 모르는 체 시험도 해본다. 이렇게 하여서 신하의 본성을 알아볼 수 있으며 간계를 부리지 못하도록 사전에 막는 길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이 책은 한비가 죽은 다음 전한(前漢) 중기(BC 2세기 말) 이전에 지금의 형태로 정리된 것으로 추정된다. 내용은 거의가 법의 지상(至上)을 강조하는데, 55편을 크게 나누면 다음과 같이 성질이 다른 6군(群)으로 나눌 수 있다.


① 한비의 자저(自著)로 추정되는 <오두(五蠹)> <현학(顯學)> <고분(孤憤)> 등이다. 이들 논저는 먼저 인간의 일반적 성질은 타산적이고 악에 기우는 것으로 설혹 친한 사이에 애정이 있다 해도 그것은 무력(無力)한 것이라 하였고, 따라서 정치를 논할 기초가 될 수 없다고 하였다. 또 이 세상은 경제적 원인에 의하여 끊임없이 변화진전하기 때문에 과거에 성립된 정책이 반드시 현세에 적용되지는 않는 것이며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유가(儒家)나 묵가(墨家)의 주장은 인간사회를 너무 좋도록 관찰하여 우연성에만 의존하는 공론(空論)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군주는 그러한 공론에 귀를 기울이지 말고, 끊임없이 시세(時世)에 즉응(卽應)하는 법을 펴고, 관리들의 평소의 근태(勤怠)를 감독하여 상벌을 시행하고 농민과 병사를 아끼고 상공(商工)을 장악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때 군주는 측근·중신·유세가(遊說家)·학자·민중들에게 좌우되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다.
② 한비 일파의 강학(講學) ·토론으로 추정되는 편(編)으로, <난(難)> <난일(難一)∼난사(難四)> <난세(難勢)> <문변(問辨)> <문전(問田)> <정법(定法)> 등이 있다. 사상 내용은 한비의 사상과 거의 같다. 이 중에서 주목할 것은 <난세>와 <정법>으로, 유가의 덕치론(德治論)은 물론 법가(法家)에 속하는 신자(愼子) ·신자(申子) ·상자(商子)의 설까지도 비판하고 수정한다. 이 책을 법가학설의 집대성이라고 일컫는 연유도 여기에 있다.
③ 한비 학파가 전한 설화집 <설림(說林)> <내외저설(內外儲說)> <십과(十過)> 등의 제편(諸編). 상고(上古)로부터의 설화 300가지 정도를 독특한 체계에 의하여 배열하고, 그들 이야기의 흥미를 통하여 법가사상을 선전하였다. 소화(笑話)의 유(類)도 섞여 있으나 고대 단편소설로서의 측면도 지닌다.
④ 전국시대 말기부터 한대(漢代)까지의 한비 후학(後學)들의 정론(政論)으로 추정되는 제편(諸編). 편수(編數)는 가장 많으며 그 중 <유도(有度)> <이병(二柄)> <팔간(八姦)> 등은 오래된 것이고, <심도(心度)> <제분(制分)> 등은 새로운 설이다. 후학들의 주장에서 한비의 사상은 현저하게 조직화되었고, 특히 군신통어(群臣統御:刑名參同)나 법의 운용(運用:法術)에 관한 술책이 세밀하게 고찰되었다. 그러나 군권강화(君權强化)와 엄벌주의를 주장하는 점만이 농후하고, 법의 최고 목적이 분명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⑤ 도가(道家)의 영향을 받은 한비 후학들의 논저인 <주도(主道)> <양각(揚搉)> <해로(解老)> <유로(喩老)> 등의 4편. 유가의 덕치를 부정하고 법치를 제창한 법가는, 덕치와 법치를 모두 부정하는 도가와는 근본적으로 입장을 달리하고 있어, 현실적으로 <육반(六反)> <충효> 등에서는 강력한 반대를 나타낸다. 그러나 군주는 공평무사를 본지(本旨)로 하여 신하(臣下)에 대하여는 인간적 약점을 보이지 않는 심술(心術)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점에서 법가 중에도 도가의 허정(虛靜)의 설을 도입한 일파가 있다. 위의 4편은 이들 일파의 논저로서, 전(前) 편은 정론(政論)이고, 후 2편은 편명 그대로 《노자(老子)》의 주석(注釋) 또는 해설편이다.
⑥ 한비 학파 이외의 논저인 <초견진(初見秦)> <존한(存韓)> 등 2편 모두 한비의 사적(事蹟)에 결부시켜 책 첫머리에 편입되어 있으나 전자는 유세가의 작품이고, 후자는 한비의 작품을 모방한 상주문(上奏文)이 포함된 것으로 그다지 중요하지는 않다. 한비와 그 학파의 사상은 일반적으로 편견적인 인간관 위에 성립된 것으로 지적되며, 특히 유가로부터는 애정을 무시하는 냉혹하고도 잔인한 술책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확실히 급소를 찌르는 적평(適評)이라 하겠으나, 그들이 유가·법가·명가(名家)·도가 등의 설을 집대성하여, 법을 독립된 고찰대상으로 삼고 일종의 유물론과 실증주의에 의하여 독자적인 사상체계를 수립함으로써 진 ·한의 법형제도(法刑制度)에 강력한 영향을 끼친 점, 또 감상(感傷)을 뿌리친 그들의 간결한 산문이나 인간의 이면을 그린 설화가 고대문학의 한 전형을 이룬 점에 있어 커다란 문화적 사명을 다하고 있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여러 가지 간행본이 있으나 절강서국(浙江書局)의 22자본(子本)이 좋은 간본이라고 한다.


[이병(二柄)]편
밝은 임금은 刑과 德 두 대의 손잡이를 잡고 신하를 다스려야 한다. 신하된 자는 벌을 두려워하고 상 타기를 기뻐하는 데 그 원리를 둔다. 여기서 벌이란 刑이요 상이란 德이다. 이 형과 덕의 두 개 손잡이만 있으면 신하를 자유자재로 부릴 수 있다. 만약 군주가 상벌의 권한을 스스로 행사하지 않고 신하에게 맡기게 되면 백성은 그 신하를 두려워하고 군주를 만만히 본다. 이렇게 되면 백성의 인심은 군주에게서 신하에게로 향하게 된다. 그러므로 군주는 이 두 개의 손잡이를 절대로 놓아서는 안 된다.


[비내(備內)]편
군주는 남을 믿어서는 안 된다. 남을 믿으면 자기가 남에게 눌린다. 신하는 위엄있는 기세에 눌려 부득이 명령에 따를 뿐이지 같은 핏줄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신하란 것은 언제나 군주에게 달려들 기회를 노리고 있다. 이 같은 신하 위에 앉아 편안히 생각하기 때문에 군주의 지위가 위태로워지고 죽음을 당하기도 한다. 군주가 아들과 아내를 덮어놓고 믿으면 뱃속 검은 신하는 아들이나 아내를 이용하여 사사로운 욕심을 채우려고 한다. 그러므로 군주는 아들과 아내까지도 믿어서는 아니 되니 세상에 누구를 믿을 것인가. 나라에서 조칙으로 태자를 봉하면 그 태자를 옹립한 자들은 임금이 일찍 죽기를 원할지도 모른다. 아내도 마찬가지다. 왜냐하면 아내란 원래 같은 핏줄이 아니기 때문에 사랑하면 가까워지고 사랑하지 않으면 멀어진다. 재난은 사랑하는 데서 생긴다. 의사가 환자의 상처를 빨아내는 것은 육친의 정에서 나온 것이 아니며 돈이 생기기 때문이다. 수레를 만드는 사람이 모든 사람이 수레를 갖기 원하는데, 이것은 모든 사람이 부자가 되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다.


[고분(孤憤)]편
중신(重臣)이란 군주의 명령 없이 마음대로 하고 법을 무시하고 제 욕심을 채우며 국가의 재산으로 제 배를 채우고 군주를 제 마음대로 움직이는 자다. 그러므로 임금된 자는 중신의 비밀을 꿰뚫을 수 있는 눈을 가져야 한다. 이것이 곧 '術'이다. 한비자는 계속하여 '군주여 눈을 뜨라'고 힘 주어 강조한다. 군주의 눈을 가리는 중신을 제거해야 한다고 [고분]편에서 일깨우고 있다.


[설난(說難)]편
의견을 말하기 힘든 것은 상대의 마음을 꿰뚫어 내 편의 의견에 맞추기 어려운 데 있다. 진언하는 자는 계획을 비밀히 진행시켜야 성공하며 비밀이 새면 실패한다. 그러므로 군주가 비밀히 계획하는 일에 말이 미치면 그 의견을 말한 이는 몸이 위태롭다. 진언할 때는 그 상대의 의견에 맞지 않는 말은 하지 않는 것이 좋다.

[오두], [십과(十過)]편


오두란 다섯 마리의 해충을 말한다. 나라를 좀먹는 다섯 마리의 해충과 같은 부류의 인간을 다음과 같이 들고 있다.

(1) 옛 성현을 칭송하며 인의(仁義)를 빌어 차용해 쓰고 복장과 말을 꾸며하는 자.
(2) 거짓말을 꾸며 외국의 힘을 빌어 제 욕심을 채우려고 하는 유세가.
(3) 사재를 모아 유력자에게 아부하며 전사의 공로를 묵살하는 측근자.
(4) 무리를 모아 의협을 내세우며 그것으로서 이름을 얻으려 하며 국법을 어기는 협객.
(5) 변변치 못한 그릇을 만들어 팔아서 사치품을 사 모았다가 때를 보아 폭리를 얻고 농민이 애써 얻는 것과 같은 이익을 힘들이지 않고 한 순간 얻는 상인들이라고 지적했다.

한편 십과란 임금이 몸을 망치는 열 가지의 잘못을 말한다.

(1) 조그만 업적을 세우는 데 정신을 잃는 것 
(2) 조그만 이익에 얽매이는 것 
(3) 감정이 나는 대로 난폭한 행동을 하는 것 
(4) 음악에 빠지는 것
(5) 지나친 욕심 
(6) 여락(女樂)에 빠지는 것 
(7) 본거지를 비워놓고 놀러 다니는 것 
(8) 충신의 의견을 듣지 않는 것
(9) 외적인 힘에만 의지하는 것 
(10) 힘이 없는 주제에 남에게 무례하게 하는 것. 이상의 열 가지는 임금된 자가 범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4. 의의 및 영향
우리는 앞에서 유가와 도가 그리고 여기서 법가사상을 살펴보았다. 비교적 성격이 온화한 중국 남부지방에서는 노자와 장자의 낭만적 자유주의가 어울리고, 중앙평야의 사람들은 공자와 후학들이 창도한 중용의 인도주의적 교리에 마음이 끌렸으며, 완고한 북방사람들은 법가의 이론과 실천에 집착했다. 법가의 사상가들 중에서도 한비자는 다른 사람들보다 결코 독창적이지 못했지만, 그는 부지런한 학자기질과 날카로운 사색가의 자질을 겸유했고 역사의 진보를 믿었다.
한비자의 사상은 관료제도를 통한 절대군주 정치와 신상필벌을 통한 엄격한 법의 시행, 그리고 속국의 경제적 자족 등의 특색을 지닌다. 크고 작은 모든 사회적 갈등의 궁극적 해소를 위해 한비자는 '절대국가의 공권력'의 창출을 요청했다. 그는 현명한 군주는 고대사회를 모범 삼아서는 안되며 현실상황을 직시하여 봉건제를 타파하고 관료제를 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분명히 법제와 폭정을 구분하고 형벌로써 형벌을 없애자는 그의 주장은 뛰어난 점이 있다. 부역의 경감을 제창한 것도 빈민들에게는 유리했다.
그러나 상벌만능을 고취시켜 윤리도덕의 역할을 과소평가한 것은 오류였다. 그리고 통일된 법령에 의해 학술의 발전을 저해하고 인심을 억압한 것은 반문명적이었다. 군주는 최고 입법자이자 또한 법률에 구속받지 않는다는 "공법(公法)"은 사실상 가장 큰 사법(私法)이었다. 그것은 결코 평등이 아니었으며 심각한 불평등을 포함하고 있었다. 군주 전제제도에 대한 한비의 구상은 민중의 희망에 유리한 점도 있었지만, 그 주된 목적은 군주의 통치를 보호하고 유지하며 강화하는 데 있었다. 따라서 민중의 목숨은 완전히 군주에게 달려 있는 것이다.
한비자의 이러한 학설은 중국의 군주 전제제도의 기본형식을 구축했으며 또한 역대 제왕들에게 행위의 기준을 제공했다. 진나라의 정치가 법가사상에 기초를 두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한나라 때에는 유가와 법가를 개조하여 양유음법(陽儒陰法)의 통치정책을 실시했다. 그리하여 유가로서 교화를 장악하고 법가로서 관리들을 다스렸으며, 이데올로기적으로는 유가의 사상을 제창했으나 현실정치에는 법가의 제도를 실행했다.
이후로도 역대왕조는 기본적으로 이를 계승하고 바꾸지 않았다. 비록 한비자의 이름은 아주 적게 취급되었고, 취급되었을 때도 계속 비판받았으나, 제왕통치와 강화에는 한비자의 사상이 오랫동안 막강하게 존재해왔음을 느끼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전제제도가 중국역사에 있어 반드시 지나가야만 되었던 길이었다면 이 멀고 긴 길을 가는데 한비자의 정치설계는 커다란 생명력과 재생력을 부여했다고.
생각해보면 전국시대에 있어 제자백가가 나와 제각기 천하평정을 외쳤지만 결국은 한비자의 '형명법술(刑名法術)' 정치가 주효하여 진시황이 6국을 병합하여 천하통일을 일단 달성하게 된 것은 또한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고 본다.




난징 대학살 사건


일본군은 난징 주변과 시내로 도망친 중국 국민당군 잔당을 수색한다는 명분으로

6주 동안 포로들과 민간인들을 도륙했다.


학살의 정확한 규모는 불명확하지만,

전후에 일부 유골 매립지를 근거로 든 연구 결과가 수만 명 단위 이하로 내려가는 경우는 적다.


극동국제재판 판결에 따르면 최소가 12만 명이며 최대 추정숫자는 약 35만 정도이다.

일본 학계에선 10-20만명 정도가 중론이며 프랑스에선 약 9만명정도가 학자의 의견이다.


다만 여기서 9-20만명은 난징과 주변 변두리 정도에 한정한 것이며

주변 도시까지 포함한 것은 아니다.


당연하지만 20~30만 명은 난징 시내 학살 숫자가 아닌 난징 근교와 진격 도중 숫자도 포함한 것이며

당연히 난징 한곳에서 저렇게 나오기는 힘들다고 본다.


중국에서는 난징 대도살, 영어로는 Nanking Massacre.

일본에서는 '학살'이라는 명칭을 붙이지 않고 '난징 사건'으로 불렸었다.


물론 축소, 은폐하려는 의도였다.

치치지마섬 식인 사건을 '오가사와라 사건'으로 부르는 것과 마찬가지.


하지만 근래에는 일본의 교과서에서도 '대학살'이라는 명칭으로 바뀌어가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야마가와 출판사의 상세일본사(詳説日本史)와 도쿄서적에서는 여전히 난징 사건(南京事件)이라고 부르지만,

데이코쿠서원은 난징 대학살, 기요미즈서원은 난징대학살사건, 야마가와 출판사에서는

상세세계사(詳説世界史)와 일본문화출판에서는 난징학살사건 이라고 부르는 등이다.


또한, 2006년의 중일수뇌회담의 결과로 진행된 '일중역사공통연구' 논문의 일어판에서도

'난징학살사건' 이라는 표현이 사용되었다.


당연하겠지만, 일본 내에서도 정직한 인간들이 있다.

사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을지도 모른다.


1937년 일본이 중일전쟁을 일으킬 때는 베이징과 상하이에서 시작해

빠른 시일 안에 주요 대도시를 점령하고 중국 국민당의 항복을 받아낸다는 속전속결이 기본방침이었다.


그러나 상하이 전투가 국민당군의 거센 저항으로 예상보다 길어지고 결국 오송 전투에서 큰 피해를 입고서야

승리를 거두게 되자 눈이 뒤집힐 대로 뒤집힌 일본군은 당시 중화민국의 수도 난징으로 진군했다.


1937년 10월 9일 상하이가 함락된 후 국민당 수뇌 멤버들은

난징을 전략, 전술적으로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판단하고 이동하기로 결정한다.


이 때 유일하게 탕성즈 한 사람만이 "난징을 필사적으로 지켜 생사를 함께 하겠다"고

방어전을 주장하면서 난징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어 남는다.


11월 15일 장제스는 수도를 충칭으로 옮겨 철퇴하고,

12월 10일 난징에 남아있는 중화민국군은 일본군의 최후통첩을 무시하자 일본군은 난징 점령작전을 개시했다.


결사항전을 주장하던 난징 방어군 사령관 탕성즈는 전투 개시 직전에 더럭 겁을 먹고 장제스에게

퇴각하게 해달라고 요청했지만 장제스는 당연히 거절했고 이에 탕성즈는 울며 겨자먹기로 전투에 임해야 했다.


12월 12일까지 중국군은 난징을 그런대로 잘 방어했지만 탕성즈가 처음부터 난징 외곽에서 일본군의 진격을

방어할 수 있는 여러 요충지역들을 스스로 포기하는 등 방어 전략을 잘못 수립했는데다가

화력과 병력의 질적 측면에서 압도적으로 불리했기 때문에 장기적인 사수는 처음부터 불가능했다.


결국 12월 12일 일본군은 독가스를 뿌려 중국군 방어선을 무력화시켰고

탕성즈는 그날 오후 8시 전군에 퇴각명령을 내린 다음에 참모들과 함께 우한으로 달아났다.


사령관이 사라진 난징의 중국군은 일본군에게 포로로 잡히거나,

난징에 남아 계속 싸우거나, 난징을 어떻게든 벗어나는 등 완전히 와해된다.


양쯔강에는 수십만 난징 시민들과 중국군이 살기 위해 아수라장을 이루었고

일본군은 그곳을 집중 공격함으로 무수한 인명을 살상했다.


12월 13일 오전 4시에 난징의 정부 청사가 함락됨으로 난징은 일본군의 수중에 완전히 떨어졌다.

그리고 난징에는 아직 50~60만에 달하는 패잔병들과 시민들이 남아 있었다.


손쉽게 난징을 손에 넣은 일본군은 백기를 들고 항복한 국민당군은 물론, 패잔병을 처리한다는 명목으로

'모자를 오래 쓴 흔적이 있거나 손에 굳은 살이 박힌 젊은 남자' 모두를 닥치는 대로 끌어모아

기관총으로 양쯔강에 쓸어넣었다.


이들 중 과연 몇이나 패잔병이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애시당초 그 시대에 손에 굳은살이 안 박힌 남자가 많기나 할까 싶다.


물론 패잔병이 맞다고 쳐도 전투의지를 잃은 사람을 학살하는 것도 크나큰 전쟁범죄임은 말할 것도 없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야만적이나, 나중에는 총알이 아까워서 칼로 난도질하거나 생매장까지 했다고 한다.


전후에 학살에 참가한 한 군인의 일기가 발굴되었는데,

"심심하던 중 중국인을 죽이는 것으로 무료함을 달랜다."면서

"산채로 묻어버리거나 장작불로 태워 죽이고 몽둥이로 때려 죽이기도 했다."라는 문구가 등장한다.


난징 대학살에 단일 규모로 가장 큰 학살은 무푸산 근처에서 일어났다.

난징의 북쪽, 곧 난징과 양쯔강의 남쪽 둑 사이에 있는 이 산에서는

5만 7,000명의 민간인과 중국의 전직 군인들이 살해되었다.


수많은 중국군의 시체를 처리하는 것은 일본군에게 또 다른 문제였다.

난징과 그 주변에서 학살당한 전체 중국군 가운데 일부만이 무푸 산에서 처형되었는데,

이 일부 시체 처리에만 며칠이 걸렸다.


시체를 매장하는 방법을 사용하기도 했지만 7천에서 8천구의 시체를 묻을 수 있는

커다란 구덩이를 팔 수 있는 곳을 찾기가 매우 힘들었다,


시체를 소각하는 방법도 있었지만 일본군에게는 그럴만한 충분한 양의 연료가 없었다.

예를 들어 무푸산 학살 후, 일본군은 시체에 휘발유를 드럼통으로 부어 시체를 태우려고 했지만

불길이 시체를 재로 만들기 전에 연료가 바닥나는 일까지 있을 정도였다.


결국 대부분의 시체는 양쯔 강에 내던져졌다.

애초에 학살을 안했으면 이런 걸로 고생하지도, 연료를 낭비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조난자 명단

실명이 확인되지 않은 분들은 그냥 김씨, 이씨 등으로 성씨만 씌여 있기도 하다.



조난자 300,000 만 명





조난자 한명한명의 신상정보를 정리해둔 자료





도서관처럼 조난자의 이름을 검색해서 열람할 수도 있다.












공중에서 본 난징대학살기념관 전경


난징대학살


1928년 남경에 국민정부가 성립되었다.

이에 일본에서는 동북 지역의 주도권 확보에 대한 위기감을 느껴 중국의 동북 지역을

무력으로 점령하려는 시도를 계속했고, 1931년 만주국이라는 괴뢰정부를 수립해 만주지역을 점령한다.


장제스는 국제연맹에 만주 문제를 제소했으나 국제 연맹의 권고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물러서지 않았고,

이에 공산당과 국민당은 항일 전쟁을 위해 손을 잡고 국공합작을 행했다.


그러나 끝내 해소되지 않았던 공산당과 국민당의 갈등으로 인해

결국은 다시 갈라져 각각 항일 전쟁을 진행하게 된다.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일본군은 1937년 11월에 상하이를 점령하였고

같은 해 12월, 중화민국의 수도 남경을 점령했다.


그리고 일본군은 상하이에서의 격렬한 저항으로 인해 입은 피해에 적개심을 불태우며

12월 13일부터 이듬해까지 약 두 달에 걸쳐 남경 시내 민간인들 및 포로들

수십만을 무차별적으로 살해하는 대학살을 자행했다.


그 시기 일본군은 오늘날 중국에서 三光 作戰이라고 부르는, 무차별한 학살을 계속했다.

三光은 殺光, 燒光, 搶光으로, 당시 일본군이 닥치는 대로 죽이고, 불태우고, 빼앗았다고 해서 붙여진 명칭이다.


난징대학살 기념관 건립 배경


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열린 전범 재판에서는 난징대학살의 총 책임자였던 마쓰이 이와네(松井石根)와

당시 외무대신이었던 이와타 고키가 그 책임을 지고 처형되었으나 대다수의 난징대학살 관련자들이 처벌을 받지 않았고,

처형된 이들도 일본 제국주의의 상징인 야스쿠니 신사에 합장되는 등 전범에 대한 처벌이 제대로 이루어 지지 않았다.


심지어 일본은 아직까지도 난징대학살이 본국의 소행임을 시인하지 않은 채

미온적인 태도만을 고수하고 있으며 일부 극우주의자들은 중국 공산당의 자작극이라는 주장까지 펼치고 있다.


난징대학살에 대한 논픽션 책《난징의 강간: 제2차 세계대전의 잊혀진 홀로코스트》

(The Rape of Nanking: The Forgotten Holocaust of World War II)의 저자 아이리스 장도

일본 극우주의자들의 협박에 못 이겨 정신이상을 앓던 끝에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이에 중국은 비극적인 역사를 잊지 않고자 난징대학살 기념관을 설립하였고

2014년에는 난징대학살 77주년을 맞이하여 12월 13일을 국가추모일(国际公祭日)로 지정하였다.


중국의 많은 유적들은 적지 않은 관람료를 받고 있는데 반해

이 곳 난징대학살 기념관은 예외적으로 입장이 무료이다.


최대한 많은 자국민들이 난징대학살이라는 사건을

생생히 기억하게 할 수 있도록 하려는 중국 정부의 노력을 엿볼 수 있다.


난징대학살 기념관 전시 구조


기념관은 1985년, 학살이 실제로 행해져 수많은 유골이 발견된 구덩이

만인갱이라는 곳에 건립되어 움푹 팬 형태를 띠며, 1995년 보수 및 증축 작업을 시행했다.


기념관은 야외와 실내로 나뉘어있는데 입장 후 가장 먼저 볼 수 있는 실외전시관에는

그대로 보존된 희생자들의 유골과 당시의 상황을 재현한 동상들이 전시되어있다.


또한 희생자들을 위한 기념비와 그들의 이름이 새겨진 통곡의 벽,

그리고 생존자들의 발자국을 그대로 본뜬 부조가 자리하고 있다.


실내전시장에는 다양한 기법을 활용한 전시물들이 자리하고 있는데,

우선 일본군들의 잔혹한 행위를 그대로 담아낸 사진자료들과 영상이 방대한 양을 자랑한다.


또한 알파벳 순서로 정렬된 희생자들의 명단 및 그들의 신상정보를 기록한 파일,

난징대학살에 대한 자료, 현장복원모형, 영상, 유화, 학살에 사용된 무기 등이 전시되어있으며

다소 독특한 형태의 낙숫물 소리 전시장이라는 것도 있다.


낙숫물 소리 전시장의 이름은 12秒, 12초라는 뜻으로 어두컴컴한 홀 내부에서

12초마다 물방울이 똑똑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전시장이다.


이는 약 6주에 걸쳐 12초에 한명 꼴로 희생자들이 죽어나갔음을 의미하는 장치로

얼마나 많은 생명이 죽어나갔는지 실감하기 위한 전시이다.


대학살의 참상과 희생자들의 삶, 유족들의 인터뷰 등 난징의 과거를 생생하게 재현해놓은 이 전시의 끝은

현재의 중국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고 있는 몇 마디의 글이다.


"历史可以宽恕 但不可以忘却. 용서할 수는 있지만 잊어서는 안 된다.

前事不忘 后是之師. '과거를 기억해 미래의 스승으로 삼아야 한다."


등으로 결코 남경의 참상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해

두 번 다시 이런 비극이 일어나지 않도록 평화를 지켜 나가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또한 전시관 출구 부근에는 분향소를 마련해 희생자들의 넋을 기릴 수 있도록 했다.

일본의 침략과 식민지배라는 공통적인 근현대사를 지나온 우리로서도 한번쯤 꼭 방문해 과거를 돌아보고

앞으로 일본과의 관계를 어떻게 형성해나가야 할지에 대해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으면 좋을 것 같다.


학살당한 아이를 들고 절규하는 엄마의 동상
























학살 후 집단으로 매장된 현장


난징의 지앙동먼은 1만명의 사람들이 학살당해 매장된 장소다.

1998년 첫 발견시 208개의 해골이 발굴되었다.

발견된 뼈들에는 상당한 고문흔적과 총상 등이 발견되었다.








중국고대최대과거고시장 강남공원(江南貢院)의 명원루(明遠樓)


부자묘(夫子庙) ㅡ 진회(秦淮) 풍경구에 중국 고대 최대 과거고시장이었던 강남공원(江南貢院)이 있다.

중국을 지배해온 과거 시스템의 역사는 질기고 길다.

수나라 때부터 시작되어 청나라 광서 31년(1905)에 폐지령이 내려지기까지 무려 1300여 년,


그동안 얼마나 많은 인생이 과거에 웃고 울었을까.

그들 중 상당수가 거쳐 갔을 과거시험장이 바로 난징에 있다.


난징의 ‘강남공원(江南貢院)’은 최대 규모의 과거시험장이었다.

무려 2만 명이 동시에 시험을 치를 수 있었던 규모다.


강남공원이 세워진 송 건도(乾道) 4년(1168)부터 과거제가 폐지되기까지,

800여 명의 장원과 10만여 명의 진사가 이곳에서 배출되었다.


명·청 시기에는 중국 전역에서 절반이 넘는 관리가 강남공원에서 나왔다.

명실상부한 ‘중국 관리의 요람’이었던 것이다.


대부분의 과거 수험생은 거지에서 비둘기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되풀이해야 했다.

강남공원의 수험생 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았던 이는 103세였다고 한다.

믿기 힘들긴 하지만, 아무튼 과거의 개방성을 대변하는 동시에 그 소모성의 끝을 보여주는 사례다.



과거시험에 응시하는 학생들의 복장에 대한 설명


중국역대장원명록

이태백, 소동파 3부자, 두보, 백거이, 원목, 이홍장, 증국번, 문천상, 오경신 등의 이름이 보인다.


과거시험과 합격자에 대한 급수와 명칭이 나와 있다. 성적이 가장 우수한 일등이 장원(狀元)이다.


청대 지역별 합격자 통계표


호사(號舍)  과거시험장  칸막이가 있고 한 사람씩 이 공간 안에서 시험을 본다.


공원, 즉 과거시험장에서 가장 흥미로운 공간은 일종의 개인 시험방이라고 할 수 있는 호사(號舍)다.

사방을 감시할 수 있는 명원루(明遠樓) 양쪽으로 1인 1칸의 호사가 마치 마구간이 늘어서 있듯 연이어 있었다.


폭이 1.5m도 되지 않는 호사는 수험생이 아흐레 동안 숙식하며 시험을 치르는 곳이었다.

물론 방의 문은 없었다.


양쪽 벽을 가로지르는 나무판 두 개 가운데 위판은 책상, 아래판은 걸상의 용도였다.

밤이면 위판을 꺼내고 아래판에서 잤다.


당연히 다리를 펴고 자는 건 불가능했다.

이런 공간에서 과거를 치른다는 것은 불편함 그 이상이었다.

심지어는 상한 음식을 먹고 죽거나 독사에 물려서 죽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시험감독관 임칙서(林則徐)


감독관이 답안 작성하는 유생들을 지켜보고 있다.

임칙서는 청말 아편거래를 근절시키기 위해서 흑차대신의 자격으로 광주로 내려가

불법거래로 적발된 아편을 모아서 불을 질러버렸는데 이것이 빌미가 되어 영국과 아편전쟁을 치루게된다.

이 일로 임칙서는 우루무치로 좌천되었다.



협대(夾帶)  과거시험에 등장했던 각종 컨닝페이퍼. 깨알같은 글씨가 빼곡하게 적혀 있다.


컨닝에 사용하던 기이한 서적 확대본


과거시험에서 컨닝하는데 쓰였던 기이한 서적


공원방벽도. 과거시험 합격자 명단 발표


과거시험 합격자 명단


오의(烏衣)


중국 관복 중에는 검은색이 있는데 오의(烏衣)라고 한다.

부자묘의 거리를 걷다보면 검은 관복을 입은 관리들이 많이 모여 살았던 골목을 만날 수도 있는데

오의항(烏衣巷)이라고 한다.


일품 무관(一品 武官)의 홍모(紅帽)


일품 무관(一品 武官)의 복장


장원급제하면 거리에 말을 타고 나가서 행사를 치루었다.

우리나라에선 장원에 급제하면 모자에다 어사화를 꼽고 말을 타고서  거리를 돌았다.


문천상(文天祥) 장원급제자 중 이름을 떨친 이들을 소개하고 있다.


이홍장(李鴻章)을 소개하고 있다.


증국번(曾國藩)


임칙서(林则徐)


과거제도를 폐기한 인물


청 광서제 1905년 7월 과거제도가 전국적으로 동시에 폐지되다.

이로써 1300여 년의 역사를 가지고 시행해 왔던 과거제도가 중국에서 영원히 사라진다.


오경재(吳敬梓) 기념관


 오경재(吳敬梓, 1701~1754)는 서른셋에 고향 안후이 취안자오(全椒)를 떠나 난징으로 왔다.

그는 일찍이 열셋에 어머니를 여의고 스물셋에는 아버지를 여의었다.


유산을 둘러싸고 친척들과 다툼까지 있었던 고향에 더 이상 미련이 없었을 것이다.

난징으로 이사한 몇 년 뒤(1736) 추천을 받아 박학홍사과(博學鴻詞科)에 응시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그런데 당뇨병이 심해져서 결국 시험을 보지 않았다고 한다.

그가 형식적인 팔고문 중심의 과거제도를 혐오했기에 자발적으로 시험을 거부한 것이라는 설도 있다.


유가 지식인 사회에서 부귀공명의 루트는 ‘과거’였다.

하지만  수백 년 동안 지속되어온 절대제도에 부작용이 없을 수 없다.


오경재는  부귀와 공명을 얻기 위해 몸부림치는 지식인, 그렇게 일그러진 괴물을 양산해내는 과거제도,

 ‘유림’의 심장부를 풍자소설 <유림외사(儒林外史)>를 통해 거침없이 희화화한다.


유림외사란 ‘유가 지식인 사회의 야사’라는 의미다.

부귀공명을 얻고자 한다면 과거제도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시대,

당시 지식인은 과거의 노예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이 책은 부귀공명을 골간으로 한다.

부귀공명을 흠모하는 마음에 비열한 작자에게도 알랑거리는 이가 있고, 부귀공명에 의지해 거드름을 피우는 이가 있고,

부귀공명에 뜻이 없는 듯 고결하게 굴다가 남에게 간파되어 비웃음거리가 되는 이도 있다.

부귀공명을 끝까지 마다하며 최상의 품격에 도달한 이는 황허의 세찬 물살 속에서도 굳건한 기둥 같은 존재가 된다.”


부귀공명을 뼈대로 삼았노라고 서문에서 말하면서

<유림외사>는 그렇게 예속화된 지식인의 속물근성을 신랄하게 보여준다.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과연 오경재는 박학홍사과에 응시했을까?

분명한 사실은, 그랬다면 <유림외사>는 결코 세상에 나올 수 없었다는 것이다.


부조리한 시스템의 공모자가 아니었기에 그 부조리를 가차없이 비판할 수 있었다.

절대다수의 지식인이 그 시스템의 공모자였다는 게 시대의 비극이다.


오경재는 청나라가 번영을 구가하던 강희·옹정·건륭 시기에 살았다.

소위 강건성세(康乾盛世)라는 당시에 아이러니하게도 문자옥(文字獄)이 자행되었다.


문자옥은 한족 지식인을 옭아매는 수단이었다.

말과 글로 인해 죄를 입지 않기 위해서, 지식인은 감히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지극히 형식적인 팔고문을 익혀 과거에 합격해 관리가 되는 것, 이것이 바로 지식인에게 정해진 루트였다.

‘권력-지식’을 구현한 이 루트에서 벗어나는 것은 소외와 배고픔을 의미했다.


<유림외사>에서 긍정적으로 묘사되는 두소경(杜少卿)이 바로 오경재 자신을 비유한 인물이라고 하는데,

그들은 조상의 뜻을 따르지 않은 ‘불초(不肖)’한 자손이었다.


두 사람 모두 과거의 길을 걷지 않았다.

명망 있는 집안의 후손인 두소경은 돈을 하찮게 여기고 남을 돕기를 즐겼으며 세도가를 경시했다.


가산을 탕진한 그는 고향을 떠났지만 늘 즐겁게 살았다.

오경재의 삶은 바로 두소경과 같았다.


마음 가는 대로 유유자적한 삶을 살았던 오경재의 만년은 매우 빈곤했다.

글을 팔아 살면서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겨울날 저녁이면 그는 친구와 함께 성밖을 돌면서 노래했다.

오경재는 이를 난족(暖足), 즉 ‘발을 덥힌다’고 했는데, 난방을 해결할 수 없을 정도로 가난했던 것이다.


거지 · 죄인 · 벌 · 새 · 원숭이 · 파리 · 비둘기, 다름 아닌 과거 수험생의 7가지 모습을 빗댄 표현이다.

이 재미난 비유는 <요재지이(聊齋志異)>에 나온다.


포송령(蒲松齡, 1640~1715)은 여러 번 낙방한 뒤 과거에 마음을 접고 <요재지이> 창작에 몰두했다.

과거가 사람을 어떻게 쥐락펴락했는지, 앞의 7가지 비유를 통해 알아보자.


과거시험장에 들어갈 때는 맨발에 대바구니를 든 ‘거지꼴’이다.

부정행위를 방지하기 위해서 모든 지참물은 대바구니에 넣은 채 신발까지 벗고 검사를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관리들이 호통 치면서 이름을 부를 때면 마치 ‘죄수’ 같다.

문이 없는 호사에 들어가 시험을 치를 때면 얼굴과 발이 드러나니, 늦가을 추위에 떠는 ‘벌’과 같다.


시험을 끝내고 나오면 정신이 어지럽고 하늘과 땅의 색깔마저 달리 보이니, 마치 새장에서 나온 병든 ‘새’와 같다.

시험이 끝났다고 끝이 아니다. 결과가 발표될 때까지 합격과 불합격의 길몽과 악몽에서 헤맨다.


고대광실이 바로 눈앞에 있는 듯하다가도 홀연 백골로 변한 느낌이 든다.

좌불안석 어쩔 줄 모르는 모습이 마치 줄에 묶인 ‘원숭이’ 같다.


드디어 발표일, 합격자 명단에 자신의 이름이 빠진 걸 알게 되는 순간 얼굴이 샛노래지고

죽은 사람처럼 멍해져서는 독약을 먹은 ‘파리’처럼 건드려도 감각이 없다.


처음엔 실망과 분노에 차서 과거 따위는 다시는 안중에도 두지 않을 기세다.

그러다 시간이 흐르면 마음도 가라앉고 다시 과거를 치르고 싶어 근질근질해진다.


마치 알을 깨버린 ‘비둘기’가 나뭇가지를 물어다 둥지를 틀고 다시 알을 품으려는 것과 같다.

이런 상황을 두고 포송령은 이렇게 말한다.

“당사자는 목메어 울면서 죽고 싶겠지만 곁에서 지켜보는 사람은 이보다 더 우스운 게 없다.”


과거제 폐지와 더불어 강남공원 역시 용도 폐기된다.

민국 7년(1918)에 강남공원 대부분이 철거되고 명원루 · 지공당 · 형감당 및 호사(號舍) 일부만 남겨졌다.


난징국민정부가 수립(1927)된 뒤 명원루는 시정부 대문의 역할을 했고,

강남공원의 옛 건물들은 정부 각국(各局)의 사무실로 사용되었다.


항일전쟁 시기에는 왕징웨이 정권의 행정원과 최고법원이 이곳에 들어섰다.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이후에는 난징시 중의원(中醫院)이 이곳을 사용했다.


강남공원이 유적지로서 보호된 것은 1980년대에 들어와서다.

2014년 8월 11에 개관한 ‘중국과거박물관’은 바로 강남공원에 자리하고 있다.





강남공원(江南貢院) 옆으로는 진회하(秦淮河)가 흐르고 있다.


강남공원(江南貢院) 출구로 나오면 바로 진회하



강남공원 옆 진회하 위에 있는 이 다리는 급제한 유생들만이 다시 건너올 수 있었고 낙방한 고시생들은 다시 건너오지 못했다.




이향군(李香君)과 도화선(桃花扇) 


명말, 위충현(魏忠賢)의 전횡에 불만을 품은

뜻있는 관료와 선비들이 결성한 동림당(東林黨)이라고 있었다.


위충현을 탄핵한 동림당은 그 후유증으로 수 많은 뜻있는 관료와 선비들이 목숨을 잃거나

폄직 및 귀양을 가서 큰 타격을 받았다. 


그 후 만주에서 흥기한 청나라가 북경을 점령하자

명나라의 잔존세력은 남쪽으로 도망쳐 금릉 즉 남경에 망명정부를 수립했다.


역사상 이를 남명왕조라라고 한다.

금릉에 남명왕조가 세워지자 장강 이남에 거주하던 동림당에 속했던 인사들이 모여들어

당을 만들었는데 이를 복사당(復社黨)이라고 했다.


후방역(侯方域)은 동림당 소속의 저명한 인사였던 조부와 부친의 후광으로 복사당의 영수가 되었다.

그때 남명정권의 실세는 위충현(魏忠賢)이 이끌던 엄당(閹黨)의 잔당인 완대성(阮大鋮)과 그 일당이었다.


당연히 엄당의 잔당들과 복사당은 대립했다.

복사당의 영수였던 후방역(侯方域)은 진회(秦淮)의 가기(歌妓) 이향군(李香君)과 우연히 만나

두 사람은 사랑에 빠졌다.


후방역은 서력 1618년에 태어나서 1655년에 죽은 명말청초의 3대 산문(散文)의 대가이다.

자는 조종(朝宗)이고 명조의 귀덕부(歸德府:今河南商丘) 출신이다.


후방역은 명조의 호부상서를 지낸 후순(侯恂)의 아들이고 조부 역시 북경의 명나라 조정에서

명망있었던 동림당의 일원이었다가 모두 환관일당을 지창하는 엄당에 의해 조정에서 축출되었다. 


후방역은 이향군에게 부채에 시를 한 수 써서 비녀 한 개와 함께 보냈다.

다른 한편 완대성도 역시 이름을 감추고 다른 사람을 시켜 많은 혼수를 보내

이향군을 농락하려고 했으나 이향군이 알고 단호히 거절하고 돌려보냈다.


이로 인해 완대성이 마음속에 깊은 한을 품게 되었다.

남명의 황제로 새로 즉위한 홍광(弘光) 황제에 의해 기용된 완대성은 자기의 권력을 이용하여 후방역을 모함했다.


후방역이 화를 피해 사가법(史可法)이란 사람에게 몸을 의탁하기 위해 달아나자

완대성은 이향군을 다른 사람에게 강제로 결혼을 시키려고 했다.


이향군이 결연히 완대성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머리를 기둥에 부딪쳐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했으나

미수에 그치고 머리에서 난 피가 후방역에게서 정표로 받은 부채를 적셨다.


이때 후방역의 친구 양용우(楊龍友)란 사람이 재빨리 부채에 떨어진 피를 이용하여

꽃이 핀 복숭아나무를 그렸다.


이윽고 남명이 멸망하자 이향군은 산으로 들어가 출가하여 여승이 되었다.

계속해서 청나라에 의해 양주(揚州)가 함락되자 후방역은 도망쳐 이향군을 찾았으나

그도 결국 출가하여 도사가 되었다. 


공상임(孔尚任)의 도화선(桃花扇)이라는 희곡은 청왕조 시대 때의 최고의 걸작이다.

공상임은 도화선이라는 작품을 쓰는데 10여 년이라는 세월을 보내야만 했다.


공자의 64대 손인 그가 도화선을 출간하자 북경천지를 뒤흔들었다.

사람들은 서로가 관람을 먼저 보기 위해 다투었으며 낙양의 지가를 폭등시켰다.


도화선이라는 희곡의 내용은 바로 이향군과 후방역의 사랑 이야기다.

공상임은 작품 속 여기저기에 춘추필법을 발휘하여 세태를 풍자했는데

‘ 연인들의 헤어지고 다시 만나는 일을 빌려 나라의 흥망에 대한 감상을 그려냈다. ’고 했다.

도화선을 출간한 공상임은 강희제(康熙帝)에 의해 관직에서 파면되었다. 


이향군은 명나라 말 남경의 진회(秦淮) 구역 출신의 이름난 기생이었다.

그녀는 남명정권이 멸망하는 과정에서 낭만성을 지닌 비극적인 여주인공이다.


이향군의 종적에서 축소된 남명의 비극적인 운명이 조명된다.

이향군은 어려서부터 예인(藝人)들을 따라다니며

기예, 음률, 시사, 죽사(竹絲) 및 비파 등의 악기를 배워 모두 정통했다.


특히 남곡(南曲)에 정통하여 그 목소리가 감미롭기 그지없어

천하 사방의 선비들이 사모하여 찾아왔다.


후방역은 원래 하남(河南) 출신으로 강남의 풍물에 대한 소문을 듣고

금릉(金陵)으로 들어와 직업을 구했다.


풍류남아의 신분으로 가슴에 큰 뜻을 품고 기개가 높은 후방역은

재주가 넘쳐 이내 복사당(復社黨)의 명사로 이름을 떨쳤다.


그는 금릉의 진회(秦淮) 강변에 살고 있던 모벽강(冒辟疆)、진정혜(陳貞慧)、방이지(方以智) 등과 교유하여

사람들은 그들을 사공자(四公子)라고 칭했다.


그들은 온 종일 진회의 기루에 앉아서 시사(詩詞)를 논하고

기녀들을 희롱하며 노래를 즐겼다.


오경재(吳敬梓)는 일찍이 자신이 진회지간의 기루에서 방탕한 생활에 대한 심경을

다음과 같이 시를 지어 노래한 바가 있다.


迩来愤激恣豪侈(이래분격자호치)  
얼마 전 격한 마음으로 달려와 맘껏 호사를 부리며  
千金一擲買醉回(천금일척매취회)  
천금을 던져 마신 술에 정신을 잃었다.  


老伶小蠻共臥起(노령소만공와기)  
자령과 소만을 옆에 끼고 딩굴다가  
放達不羈如癡憨(방달불기여의감)  
세속에 구애받지 않고 살기를 미친사람과 같았다.  


싯귀만으로도 그들의 생활이 얼마나 방탕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사공자는 당시 진희의 홍등가에서 거의 광란에 가까운 생활을 하고 있었다.


와중에 후방역을 한 번 보게 된 이향군은 그 즉시 마음이 끌렸고,

후방역 역시 이향군의 재주와 미모에 반하게 되었다.


그러나 후방역의 집은 가난해서 많은 돈을 몸에 지니고 다니지 못했다.

그런 후방역을 향해 이향군은 오히려 위로하며 말했다.


“ 도포가 없어도, 가난해도 저는 개의치 않습니다.

비록 포의를 걸쳤지만 이름에 향기가 있는 사람이면 됩니다.”

이것은 이향군이 고매한 인격과 절개를 갖춘 여인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공상임의 도화선은 이향군을 일개 기녀로 대한 당시의 남명 학사들이나 문인들을

오히려 비속한 영혼을 갖고 있는 부류로 묘사했다. 


대명강산에 비바람이 몰아쳐올 때, 후방역은 반청운동에 투신하여 투쟁하고 있었다.

그때 봉양(鳳陽) 독무(督撫) 마사영(馬士英)은 복사당과의 원한으로 인하여

후방역에게 죄를 뒤집어씌워 체포하려고 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양용우(楊龍友)가 달려와 소식을 전해 후방역에게 몸을 피하라고 권하자

이향군은 눈물을 흘리며 금릉을 떠나는 후방역을 전송했다.


후방역은 그때 자신의 시를 쓴 부채를 맹세의 징표로 주었다.

부채에 쓰여진 후방역의 시는 다음과 같았다. 


夾道朱樓一径斜(겹도주로일경사) 
좁은 골목 경사길 옆 붉은 누각을 향해 
王孫初禦富平車(왕손초어부평거) 
부평거(富平車)를 타고 나타난 왕손을 처음 보았다. 


春溪盡是莘夷樹(춘계진시신이수) 
봄날 개울물은 모두 신이수(莘夷樹)에 빨리고 
不及東風桃李花(불급동풍도리화) 
동쪽에서 부는 바람은 도리화에 이르지 못했네 


공상임의 도화선은 바로 이렇게 해서 탄생했다.

그러나 공상임은 도화선에서 차용하여 전조(前朝) 즉 명나라의 일을 말하려고 했다.


도화선을 집필하던 공상임은 몇 번이나 양주(揚州)를 들려 양주의 매화령(梅花嶺)에서

남명정권의 항청명장 사가법(史可法)의 묘 주위를 배회하며 도화선의 혼백을 찾으려고 했다.


도화선은 원래 명나라의 낭만적인 일을 그리려고 한 것이나

공상임의 필력으로 부채를 강조하다보니 명나라가 다소 쓸쓸하게 묘사되고 말았다.


'적막한 옛 릉 앞에서 이름 없는 신하는 눈물을 흘리고,

가을바람은 까닭 없이 옥하(玉河)의 강물을 출렁이게 하누나!'

라고 읊은 시구는 한족의 입장에서 명나라 왕조에 대한 아픈 마음을 표현했다. 


후방역이 금릉(金陵)을 떠난 후,

이향군은 두문불출하여 일편단심으로 후병역이 다시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이때 양용우(楊龍友)는 마사영(馬士英)의 천거로 남명왕조에서 예부주사(禮部主事)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마사영은 오히려 양용우를 박해하고 마씨들의 친척인 전앙(田仰)을 앞세워

이향군과 연분을 맺으려고 했다.


이향군이 한사코 거절하자 이향군을 직접 찾아간 마사영은

자신의 권력에 의지하여 이향군을 위협하여 굴복시키려고 했다.


이에 이향군은 돌기둥에 머리를 부딪쳐 스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하자

새빨간 핏방울이 후방역이 주고 간 부채 위에 방울져 떨어졌다.


마치 낭군에게 바치는 한 곡의 순결을 위해 부르는 노래와 같았다.

이향군의 강고한 절개에 감동한 양용우가 갑자기 영감을 얻어 붓을 들고

부채위의 핏방울을 이용하여 의연한 복숭아나무로 만들고 싯귀를 적어 넣었다. 


濺血點作桃花扇(천혈점작도화선) 

흩뿌려진 핏방울로 도화선을 만드니

比作枝頭分外鮮(비작지두분외선) 

나뭇가지와 사람머리가 구분되어 밖으로 선명하게 드러나는 구나


그러나 후방역은 후에 남명왕조를 배반하고 청나라가 실시하는 과거에 응시하여 조정의 관리가 되었다.

이에 대단히 실망한 이향군은 강산은 이미 청나라 세상으로 바뀌어 나라가 이미 없어진 세태를 비관하여

후방역과는 다시 만나지 않겠다고 맹세하면서 도화선을 찢어버리고 출가하여 여승이 되었다.


그러나 공상임은 그의 회곡 작품에서 후방역의 배신행위를 언급하지 않고

희극과 비극의 교차를 강렬하게 묘사하지 않았으며 이향군 역할 역시

그녀의 개성이나 인격을 제고시켜 예술적 경지로까지 승화시키지 못했다. 


지금도 남경의 진회(秦淮) 강변의 미향루(媚香樓)가 다시 지어졌고

금릉(金陵)의 서하산 꼭대기에는 도화선정(桃花扇亭)이 있어 매년 사람들이 그곳에 모여

도화꽃이 찬란하게 휘날리는 봄날 바람에 머금은 이향군의 미소를 기리고 있다. 



진회하로 연결되는 지하 통로


진회하 강변과 바로 연결되어 있다.






<桃花扇>  西园刻本,康熙、雍正年间据康熙重刻本再刻,另有多种覆刻本


작가 공상임(孔尙任·1648~1718)


공상임(1648-1718)은 청초(淸初)의 시인이자 희곡작가다.

자는 빙지(聘之) 또는 계중(季重), 호는 동당(東塘)․ 안당(岸堂) 또는 운정산인(雲亭山人)으로

곡부(曲阜 오늘의 산동성에 속함) 사람이다.


공자의 64대손이다.

아버지 공정번(孔貞璠)은 숭정 6년(1633)에 거인이 되었는데 박학하고 다재다능했지만

절개를 중시하여 평생 관직에는 나아가지 않았다.


1.생애와 문학
 

공상임은 공자의 후예로서 유가의 사상적 전통과 학문을 계승하여

어릴 때부터 예‧악‧병‧농(禮樂兵農) 등 학문에 관심을 가졌고, 또한 악률(樂律)을 연구하여

나중에 희곡을 창작할 때 필요했던 기본적인 음악 지식을 갖추었다.


 20살을 전후하여 현부학(縣府學)의 생원이 되고

뒤에 세고(歲考)에 참가했지만 녹취(錄取)는 없었다.


그러나 그는 관리가 되려는 생각을 포기할 수 없었기 때문에

집안의 전답을 팔아서 예감(例監, 국자생 國子生)이 되었다.


31살 때 그는 현 북쪽에 있는 석문산(石門山)에 가서 독서와 저술로 소일하면서 고금의 득실을 논하였다.

소년 시절과 석문산 독서 시절 때부터 그는 이미 남송이 멸망한 사실에 주목하였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친구들로부터 이런 저런 소문을 수집하고 여러 사람들의 저작을 읽어

사실을 검증하면서 남송의 흥망을 배경으로 한 한 편의 전기(傳奇)를 쓸 준비를 하였다.

이 때가 바로 도화선(桃花扇)의 창작이 온축되던 시기였다.


 강희 21년(1682) 그의 나이 35살 때 연성공(衍聖公) 공소기(孔毓圻)의 권유에 응해서 산을 나와

가보(家譜)와 궐리지(闕里志)를 편찬하고 자제들에게 예악을 가르치면서 악사(樂師)를 방문하고

제기 제조를 감독하면서 강희제(康熙帝)의 제1차 남순제공(南巡祭孔)을 준비했다.


다음 해 강희제는 몸소 곡부에 가서 공자에게 제사를 올렸다.

이것은 청나라가 중국을 제패한 뒤 최초로 세인의 큰 주목을 받으면서 열었던 존공대례(尊孔大禮)였다.


공상임은 어전강경인원(御前講經人員)으로 선출되어 유가 경전을 정리하는 한편

강희제에게 대학을 강독하면서 강희제를 공림(孔林)의 성적(聖跡)으로 이끌고자 하였다.


강경과 도람(導覽)에서 남다른 능력을 발휘한 결과

강희제는 그를 파격적으로 국자감박사(國子監博士)로 승진시켰다.


뜻밖의 은총에 감격한 그는 청나라 통치자들의 은혜에 감사를 표시하고,

일면 크나큰 은혜에 몸둘 바를 몰라 하면서 견마(犬馬)의 충성을 다할 것을 맹세하였다.


이는 위치의 부침(浮沈)과 지우(知遇) 여부에 따라

통치자들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던 유생(儒生)들의 한계를 보여준 것이기도 하다.


 강희 24년(1685) 초 공상임은 북경에 와서 정식으로 관료로서 활동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유학적 경륜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을 때인 7월 초에 그는 칙명을 받아

공부시랑(工部侍郞) 손재풍(孫在豊)과 함께 회양(淮揚)에 가서

황하가 바다와 대면하는 지역의 준설 작업을 도왔다.


그의 본래 목적은 조정의 관리가 되어 “지체 높은 요직에 있고자(淸華要津 청화요진)”하였지만

한적한 바닷가에서 격에 맞지 않은 일을 하게 되자 크게 실망하였다.


회양에서 머문 4년 동안 그는 객지를 떠돌면서

처량한 신세가 된 자신에 대해 울적한 감정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직접 하정(河政)의 험난함과 관리들의 부정부패를 목격하고

민중들이 고통을 이기지 못해 신음하는 소리를 들으면서 이를 시로 작품화하였다.


이 기간에 쓰여진 630여 편의 작품은 호해집(湖海集)으로 편집되었다.

이들 작품은 초기 궁사(宮詞)나 응수(應酬)․송성(頌聖)을 일삼았던 문학적 경향에서 탈피하여

당시의 사회적 현실에 대한 자신의 달라진 인식을 비교적 심각하게 보여준 것이었다.


회양 일대는 명청 교체기에 정치․군사적 투쟁에 있어서 중요한 지역이었다.

이 시기에 그는 남명(南明)의 강북 하방(河防) 땅에 머물고 있었다.


양주(揚州)의 매화령(梅花嶺)에 올라 사가법의관총(史可法衣冠塚)에 참배(拜禮)하고,

남경에서는 명나라 고궁을 지나면서 명효릉(明孝陵)을 참배한 뒤

진회하(秦淮河)를 노닐다가 연자기(燕子磯)에 올랐다.


그는 특별히 서하산(栖霞山) 백운암(白雲庵)에 가서

나중에 도화선을 지어 선사했던 장요성(張瑤星) 도사를 방문했다.


이를 통해 우리는 공상임이 도화선의 창작을 위해

실지 지형에 대한 고찰을 적극적이고 엄밀하게 진행시켰음을 알 수 있다.


이 때 그는 이 지방에 모여 살던 명나라 유민들과 사귀었는데,

그들 중에는 명말의 정치 투쟁과 밀접한 관련을 가졌던 인물이나 청나라 정부에 비협조적이었던

모양(冒襄), 황운(黃雲), 등한의(鄧漢儀), 허승흠(許承欽), 공현(龔賢), 석도(石濤) 등과

옛 일을 이야기하고 현재를 토론하면서 긴밀한 친분을 유지하였다.


그는 때로 “이야기한 내용을 아침에 모두 바꾸거나(所話朝皆換)”

비밀로 삼아 “외부인에게 말하지(門外人道)” 않았다.


회양에서의 4년간은 공상임이 현실에 대한 인식을 심화시킨 시기일 뿐만 아니라

도화선을 창작하는데 있어 중요한 사상과 소재를 준비한 시기이기도 하다.


 강희 29년(1690) 공상임은 북경으로 돌아와 10년간 경관(京官)으로 생애를 보내기 시작했다.

5년 동안은 국자감박사를 지냈고, 강희 34년(1695) 가을에 승진해서

호부주사(戶部主事)로 있으면서 보천국(寶泉局)에서 동전 만드는 일을 감독했다.


강희 39년(1700) 3월 호부광동사원외랑(戶部廣東司員外郞)이 되자 같은 달 벼슬을 그만 두었다.

이 시기는 비록 호기에 찬 삶을 보내긴 했지만 시종 냉대를 받아

그가 자부했던 관리로서의 능력을 발휘할 기회를 갖지 못했다.


10년 동안 그는 안당고(岸堂稿)와 장류집(長留集, 유정기 劉廷璣와의 공저) 등의 시문집을 썼는데,

때로 영락한 자신을 보며 느꼈던 근심과 아무런 성과도 없는 현실에 대한 탄식을 담았다.


“꼽아보니 십년 동안 관직은 초라하여, 짚신 신고 거리를 오가고 있구나 (彈指十年官尙冷 踏穿門巷是芒鞋)”

라고 한 시구는 바로 그가 10년을 관리로 있으면서 가졌던 생각을 정리한 것이다.


그의 이런 고민은 의심할 바 없이 한 개인이 벼슬길에 나서서 겪는 부침은

피할 수 없는 것이라는 느낌에서 오는 것이었지만, 그러나 몇몇 시편에서는 사상적 깊이를 더하기도 했다.


군왕의 조명(造命)을 부정한다든가 관료들 사이의 알력을 폭로하고

성세(盛世)를 탁세(濁世)로 지적하는 등과 같은 행동을 통해,

강희제에게 입은 은덕에 대한 고마움과 험악하고 풍파 많은 관료 생활,

어둡고 혼탁한 현실 등 여러 방면에 대한 청신하고 각성된 인식을 표현하였다.


이 때문에 그는 자신을 동로광생(東魯狂生)이라 부르면서

“서울 시장거리에서 칼을 두드리고(齊나라 풍환:馮驩의 고사),

홀로 노래하여 쫓으며 개처럼 짖지는 않는다(彈鋏燕市中 獨歌不逐吠)”

고 하여 억제할 수 없는 격분을 표출하였던 것이다.


공상임은 유가의 정통적 입장과 사상적 경향을 갖춘 사인(士人)이었다.

그는 통치 계급에 의지해야 할 필요와 강희제에게 한 차례 강렬한 감격의 정을 느끼긴 했지만,

관료로서 뜻을 얻지 못하자 그는 청나라 조정에서 권력을 쥔 일파들에 대한 불만과 함께

강희제의 지우(知遇)에 대해서도 조금씩 회의를 느끼기 시작했다.


그는 세상에 쓰여져 자신의 재능을 발휘할 수 있기를 기대하고

관료로서 경제를 논하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지도 않았지만,

혼탁한 관료 사회에서도 자신의 정조(情操)를 지키면서 역사와 현실에 대해 나름의 견해를 가졌다.


그는 때로 새 왕조를 찬양하다가도 고국 명 왕조를 추억했으며,

때로 권력가들에게 아부하다가도 명의 유민과 고로(古老)들과도 막역한 친분을 유지했다.


청초의 복잡한 민족적 모순과 계급간의 갈등, 통치 계급 사이의 모순은

그를 복잡하게 변화된 사상적 입장에 서도록 만들었다.

이것이 바로 공상임이 희곡을 창작하는 일에 몰두하게 된 사상적 배경이라고 할 수 있다.


강희 30년(1691) 공상임은 당대(唐代) 궁정에서 유명했던 악기인 소홀뢰(小忽雷)를 구입하였다.

33년(1694)에는 고채(顧彩)와 함께 그의 첫번째 전기(傳奇)인 「소홀뢰」를 완성했다.


작품은 양후본(梁厚本)이 소홀뢰를 구입하자 정영영(鄭盈盈)이 이를 연주하면서 마침내 두 사람이

부부의 인연을 맺게 된다는 내용으로 짜여져 있는데, 문인의 불평(不平)한 심정을 표현하고

정영영이 부귀를 추종하지 않고 폭력에도 굽히지 않으면서 정절을 굳게 지킨 반항 정신을 노래한 것이다.


작품은 제왕의 어리석음, 번진(藩鎭) 세력의 발호와 권신, 환관들의 전횡과 알력을 거듭 묘사해서

당대 원화(元和 806-820)에서 개성(開成 836-840) 연간까지의 조정의 부패상을 반영하였다.


사료의 취사에 있어서도 극본은 역사적 사건들의 진실성을 중시해서,

수많은 인물들과 사건들을 “철저하게 고증(斑斑可考)”하고 있다.


그러나 구체적인 인물(양후본과 정영영 등)들의 관계나

이야기의 전개에 있어서는 대담하게 허구를 삽입하기도 하였다.


이 작품은 그가 도화선을 창작하기 이전의 탐색적인 시도로서 이루어진 성과다.

이 작품을 쓰면서 그는 도화선을 창작하는 데 긴요한 예술적 경험을 얻을 수 있었다.


10여 년의 고심과 세 번에 걸친 수정을 거쳐 강희 38년(1699) 6월

공상임은 그의 전기 소설의 최대 걸작인 도화선을 완성하였다.


한 때 이 작품은 “이름난 지식인이면 누구나 빌려 베꼈고(王公薦神 莫不借鈔)”

무대에서 연출되어 “하루도 거른 날이 없을(歲無虛日)”정도로 호응을 받았다.


이 작품의 출현은 탕현조(湯顯祖 1550-1616) 이후 중국 희곡 문학의 발전에 일대 새로운 영역을 형성하였다.

그와 홍승(洪昇 1645-1704)은 모두 청대에 있어서 가장 명성을 떨친 희곡 작가가 되었다.


2. 도화선의 내용 및 사상적 의의 


도화선은 명말(明末) 복사(復社)의 문인인 후방역(侯方域)이 난리를 피해 남경으로 갔다가

진회(秦淮)의 유명한 기생인 이향군(李香君)과 알게 된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다.


두 사람은 첫눈에 반해 다음날 사랑을 확인한 뒤,

이향군은 결혼 비용 일체를 위충현(魏忠賢)과 완대성(阮大鋮)에게서 나오게 했는데,

그것은 후방역을 받아들여 악명에서 벗어나게 하려는 의도였다.


이향군은 교태를 잔뜩 부리고는 목적을 이루자 화장기를 씻어내고는 돌아와 버렸다.

이에 원한을 품은 완대성은 좌량옥(左良玉)이 남경으로 병력을 이동하는 때를 타서

방역이 좌량옥과 내통한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위험을 피하기 위해 방역은 회남(淮南)으로 달아나

사가법(史可法 1602-1645)에게 투항해서 참찬군무(參贊軍務)가 되었다.


갑신년 3월 이자성(李自成)이 입성하자 숭정제(崇禎帝)는 자결하고,

간신 마사영(馬士英)과 완대성은 곧 남경에서 복왕(福王)을 세워 남명(南明) 조정을 세웠다.


어리석은 왕과 간신들은 조정은 돌보지 않고 노래와 춤으로 환락의 극을 달렸다.

마사영과 완대성은 이향군(李香君)을 위협했지만 그녀가 끝내 굴복하지 않자 궁궐로 데려와 연금시켰다.


후방역은 남경으로 돌아와 복사의 문인들과 함께 완대성을 체포하려다가 오히려 잡혀 옥에 갇혔다.

얼마 후 청나라 군대가 남하하자 홍광(弘光)과 마‧완은 감옥을 탈출해 달아났다.


방역도 옥에서 나와 장요성(張瑤星)을 따라 서하산(栖霞山)으로 갔다.

이향군 역시 와중에 궁궐을 빠져 나와 사람들을 따라 산으로 들어갔다.


나중에 두 사람은 제단에서 상봉하고 장도사가 국한(國恨)․가한(家恨)의 이야기로

그들을 설득하자, 두 사람은 함께 입도(入道)하게 된다.

작품은 한 줄기 비가 소리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결말을 맺는다.


도화선의 사상적 의의는 다음과 같이 살필 수 있다.

명나라가 멸망한 뒤, 공상임은 희곡의 형식으로 명말의 복잡한 사회적 모순과

민족간의 갈등을 표현하고 남명의 역사를 평가했는데, 일단의 역사적 교훈을 예술적으로 총괄한 것이다.


그러나 공상임은 자신의 계급적 입장과 청나라 정부의 전제 통치에 이끌려

농민 혁명과 명 왕조의 모순을 왜곡시켰고, 청나라 군사들이 침입하면서 자행한 만행은 외면했으며,

때로는 청나라 통치자들을 미화하여 작품의 정확성과 심각성에 손해를 끼쳤다.


그러나 작품은 남명 조정의 부패와 어리석음을 폭로하고,

상층 통치 집단과 병권을 쥔 장군들간의 첨예한 모순을 보여 주었다.


또한 마사영․완대성 일파들이 청의파(淸議派)와 무고한 백성들을 수탈한 죄악상을 고발하면서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적에게 투항해 버리는 기회주의적 본질에 대해 매서운 채찍을 가하고 있다.


주요 인물들을 표현할 때에도 공상임은 민족 영웅인 사가법의 항전의 결심을 묘사해서,

그가 “천하의 주인이 바뀌었을 때(江山換主)” 강물에 몸을 던져 순국한 영웅적 기개를 부각시켰다.


작자는 이향군이 국가의 운명을 염려하고 사악한 권력자들을 거부한 지조를 찬양했으며,

민간의 예인(藝人)들인 유경정(柳敬亭), 소곤생(蘇昆生) 등이 국가의 위기를 구하기 위해

몸을 돌보지 않고 힘쓴 사실과 기타 가기(歌妓)․ 예인․ 서상(書商) 등 하층 민중들이

권신들을 반대하고 국가를 걱정하며 적군에 순종하지 않는 정의감과 민족 정신을 높이 평가하였다.


부정적인 인물들과의 대비를 통해, 독자가 명나라 왕조

“삼백년의 기틀이 누구에 의해 무너졌으며 어떤 일로 붕괴했고 어느 해에 사라졌으며 어느 곳에서 끝났는지

(三百年之基業 墮于何人 敗于何事 消于何年 歇于何地)” (「도화선소인 桃花扇小引」) 알 수 있게 하였다.


이 한 편의 역사 비극은 당시 사람들에게 고국에 대한 그리움을 일깨우고

잠재적인 민족 의식을 환기시켰던 것이다.


3. 도화선의 예술적 성과 


도화선은 여러 방면에서 예술적 성과를 거두었다.

희곡 구성상에 있어서, 공상임은 인생을 개괄하는 뛰어난 예술적 재능과 독창성으로

후방역․이향군 두 사람의 애정의 우여곡절을 통해, 또한 그들의 애정 운명을 부채로 상징함으로써

남명 흥망사라는 방대한 내용을 담은 희곡의 구성을 성공적으로 포괄하고 유기적으로 결합시켰다.


부채를 주어 애정의 징표로 삼는 것을 시작으로, 그들의 애정은 명말의

청의당과 엄당(閹黨) 사이에 전개되었던 치열한 정치 투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된다.


투쟁이 격화됨에 따라 두 사람은 결국 헤어지게 되고,

따라서 이야기는 후방역과 이향군 두 사람과 연관된 두 가지 이야기로 전개된다.


방역이 소속된 조종(朝宗) 네 군데의 부산한 상황이 한 단락으로 전개되면서,

남명 초창기와 사진(四鎭)의 내분과 같은 중대한 사건과 모순이 묘사된다.


이향군이 온갖 기만과 능멸을 감수하는 상황이 이어지는 한 단락에서는,

홍광과 마사영․완대성의 무리들이 반역을 자행하고 안락에 탐닉한 부패한 모습이 묘사된다.


이 두 방향의 이야기 전개는

“다툼을 벌이면 조종(후방역)이 그 근심을 나누게 되고, 쾌락에 빠지면 향군이 그 고통을 받게 되는데,

한 생애든 하루 아침이든 전체적인 강령이 되는 것은 남조의 정치가 보여주는 잘잘못과 연관이 있다

(爭鬪則朝宗分其憂 宴遊則香君罹其苦 一生一旦 爲全體綱領 而南朝之治亂系焉)”

는 것이다. 이는 곧 남명 조정의 넓고 다양한 역사적 국면들을 반영하는 것이다.


끝으로 작자는 이전의 문학에서 대단원을 맺으면서 쓰는 구투에서 벗어나, 장도사가 부채를 꺾고

두 사람은 입도하게 되는 애정상의 비극으로서 끝막음하여 나라는 무너지고 가정은 파괴된 엄연한 현실을 제시하였다.


작자는 “이별과 재회의 정을 빌려 흥망의 감정을 묘사한(借離合之情 寫興亡之感)”독특한 방식으로

명대 이후 꾸준히 발전한 애정극과 시사극(時事劇)의 흐름에 새로운 방향을 개척했다.


또한 애정 묘사와 정치 투쟁 사이의 관련을 성공적으로 긴밀하게 결합시켜, 희곡의 구성을 세밀하고 웅장하며

독창성이 풍부한 특징을 갖추게 만들어 전통적인 애정극과 시사극의 수준을 모두 새롭게 향상시켰다.


공상임은 인물 형상을 창출하는 데에도 뛰어난 희곡가였다.

그는 중대한 현실적 모순 속에서 전제되는 인물의 성격을 잘 묘사했고,

자그마한 움직임이나 얼굴 표정 같은 구체적인 정황 속에서 개성을 표현하는 데에도 뛰어났다.


그는 또 동일한 사물을 대하는 인물의 다른 태도를 통해 그들의 내면 세계의 미세한 변화까지 표현했으며,

붓끝에서 옮겨지는 묘사의 다양함으로도 예술 형상을 훌륭하게 구현하기도 했다.


도화선에 등장하는 인물 형상은 모두 독특한 개성을 지니고 있는데, 특히 절개를 중시하고

민첩한 정치적 안목을 가진 이향군이나 국가를 염려하고 의협심이 굉장한 유경정,

비분강개한 기상으로 몸을 던진 사가법, 초연히 풍류를 즐기고 연약한 성격에 타협적인 후방역,

붙임성이 좋고 세상사에 능란한 양용우(楊龍友) 등, 그들은 각기 다른 내면 세계와 외모를 가진 인물들이었다.


특히 독자들의 주목을 끄는 것은 작자는 단지 각기 다른 유형의 인물 성격을 창조해 냈을 뿐 아니라,

동일한 유형의 다른 인물일지라도 분위기에 걸맞는 독특한 개성과 복잡한 성격도 잘 묘사하였다.


같은 기생이지만 이향군은 이정려(李貞麗)나 변옥경(卞玉京)과는 다르며,

같은 예인이라 해도 유경정은 소곤생이나 정계지(丁繼之)와는 다르다.


같은 무장(武將)일지라도 좌량옥은 고걸(高杰)이나 공득공(貢得功)과 다르고,

같은 간신이지만 완대성은 마사영과는 다르다.


작자는 후방역․양룡우 등과 같은 복잡한 인물 형상을 지닌 인물을 성공적으로 창조해서 인물의 개성을 정확하게 파악했고,

복잡한 역사적 상황 속에서 다양하게 전개될 수밖에 없었던 그들의 성격을 표현하는 데 뛰어난 재능을 보여 주었다.


인물을 묘사할 때에도 공상임은 그 인물의 역사적 의의와 자신의 가치 평가를 일관성 있게 추적하였다.

등장 인물들의 각기 다른 태도를 통해 작자는 자신의 진보적인 역사 인식을 표현했던 것이다.


이같은 선명한 경향성(傾向性)과 표현 수법의 다양성, 그 위치에 어울리는 적절한 묘사는

도화선에서 그려진 인물 형상의 현저한 특색을 형성하였다.


도화선은 일종의 역사극으로서 작자는 오랜 기간 동안의 꾸준한 모색을 통해 역사 속의 진실을 찾아

“조정의 득실과 문인들의 이합집산에 대해 모두 분명하게 때와 장소를 고찰해서

남의 의견이나 판단을 빌리지 않았을 (朝廷得失 文人聚散 皆確考時地 全無假借)” 정도에 이르러,

당시의 역사적 상황에 대한 한 편의 “믿을 만한 자료(信史)”라는 평가를 얻었다.


그는 역사극은 우선 역사적 사실에 충실해야 한다는 전통을 계승하였다.

그러나 도화선은 단순한 역사 교과서는 아니며, 참된 가치는 작자가 희곡 예술이 요구하는 원칙을 바탕으로

역사적 진실성과 예술적 진실성을 훌륭하게 통일했다는 사실에 있다.


사실(史實)은 예술적 욕구를 실현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골격이며,

적절한 예술적 가공은 역사의 본질을 심각하고 분명하게 반영해야 하는 것이다.


예컨대 이향군의 형상을 만들기 위해 작자는 천선(濺扇)․염선(染扇)․매연(罵筵)․입궁(入宮) 등과 같은

중요한 부분은 허구화시켜 인물의 형상을 풍만하게 확장하고 아울러 민중들의 희망을 반영하였다.


국가가 무너지고 가정이 파괴된 비극을 보여주기 위해 공상임은 후방역으로 하여금

양조(兩朝)의 과거에 응시하도록 한 뒤 결국 출가해서 입산하게 꾸몄는데, 비록 후방역의 행동에는

가식된 부분도 적진 않지만 명말청초 때의 일부 지식인들이 밟았던 보편적인 행적을 재현한 것이기도 하다.


작자는 사실의 가공과 허구화에 있어 대개는 그 내용에 맞는 적절한 변개를 가했고,

인물들도 전형성(典型性)을 가지게 되어 희극의 특성이 더욱 선명하게 부각되었던 것이다.


도화선의 언어도 희곡이 공연물이라는 성격에 맞게

풍부한 문체적 수식을 도모해서 희극성과 문학성의 통일을 달성하였다.


작자는 곳곳에 강렬한 서정과 개성적인 곡사(曲辭)를 구사하고 대사 또한 엄숙하고 적절하게 수용했는데,

이는 고대의 전기(傳奇)에서도 보기 드문 일이었다.

이런 여러 가지 사실들이 도화선을 명청대 전기 희곡의 최고 걸작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도화선이 탈고된 지 9개월 뒤인 강희 39년(1700) 3월

공상임은 의안(疑案)에 걸려 파직되었는데 정확한 이유는 미상이다.


작자가 「방가증유우봉(放歌贈劉雨峰)」에서

“운명이 박복해서 문자의 미움을 받아, 입다물고 쇠사람처럼 비방을 듣는다(命薄忽遭文字憎 緘口金人受謗誹)”

고 한 시구와 친구들이 보낸 시로 추측컨대 파직된 이유가 도화선의 내용과 어떤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같은 추론은 비교적 광범위하게 인정받고 있다.

그러나 도화선의 공연이 중단되지도 않았고 출간이 금지되지도 않은 사실을 들어

이 주장에 회의를 가져 의안과 도화선과는 무관하다는 입장을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좀더 확실한 증거가 나올 때 이 의문은 해결될 것이다.


강희 41년(1702) 말 공상임은 비분한 심정을 가슴에 품고 고향으로 돌아와 적막하고 청고(淸苦)한 생활을 하였다.

그동안 그는 산서성 평양(平陽)과 하남성 대량(大梁), 호북성 무창(武昌) 등지를

잠시 유람하거나 막료로 있다가 곡부(曲阜)에서 별세했다.


​4.저작의 판본과 주석본 


  공상임의 저서 가운데 궁사(宮詞)와 노언(魯諺) ‧ 율려관견(律呂管見) ‧ 전당집(鱣堂集) ‧

개안당집(介安堂集) ‧ 안당문집(岸堂文集) ‧ 작약사(綽約詞) ‧ 절서동풍록(節序同風錄) ‧ 조정신기(祖庭新記)

등이 있지만 모두 없어지고, 안당시집(岸堂詩集)만이 부분적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현전하는 시문집에는 석문산집(石門山集)과 호해집(湖海集) ‧ 장류집(長留集 ‧ 향금부(享金簿) ‧

인서록(人瑞錄) 등이 있는데, 근래에 공상임시문집(孔尙任詩文集)으로 묶여 출간되었다.


희곡 작품은 모두 남아 있어, 도화선은 강희각본(康熙刻本)과 난설당본(蘭雪堂本), 서원본(西園本),

난홍실본(暖紅室本), 양계초주본(梁啓超注本) 등이 있다.

근래에 인민문학출판사에서 왕계사(王季思)와 소환중(蘇寰中)이 합주본(合注本)을 냈다.

<이상 중국인명대사전에서>





이향군고거진열관((李香君故居陳列館)


이향군(李香君 1624년 ~ 1653 추정)


소주(蘇州) 창문(閶門) 풍교(楓橋) 사람으로 본래 성은 오(吳)씨이다.

명말청초(明末淸初) 시기의 명기(名妓)로, 부친은 본래 무관(武官)인데

동림당(東林黨) 성원으로 위충현(魏忠賢) 일파에 의해서 모함을 받아 몰락되었다.


이향군은 8세에 양모(養母) 이정려(李貞麗)를 따라 성을 이씨(李氏)로 바꾸고,

남경(南京) 말릉교방(秣陵教坊)의 명기로 활동했고다.


뒤에 난징의 문학결사 복사(複社) 운동의 우두머리였던 후방역(侯方域)의 첩(妾)이 되었다.

그녀는 유여시(柳如是), 마상란(馬湘蘭), 변옥경(卞玉京), 동소완(董小宛), 고횡파(顧橫波),

구백문(寇白門), 진원원(陳圓圓) 등과 더불어 명말청초 남경 진회 일대를 풍미했던 8명의 기녀와 함께

진회팔염(秦淮八豔)으로 일컬어진다.


진회팔염(秦淮八艳)


진회팔염(秦淮八艳)이란 명말 청초(明末 清初) 남경 진회하(南京 秦淮河)에 살던 

여덟 명의 이름난 명기(名妓)를 말한다.

또 다른 이름으로 금릉팔염(金陵八艳)이라고도 한다.


명나라 유신 여담심재의 "판교잡기(板桥杂记)"라는 기록에 따르면

처음 기록에는 고횡파(顾横波)、마상란(马湘兰)、구백문(寇白门)、변옥경(卞玉京)、이향군(李香君)、동소완(董小宛) 등

여섯 명이었는데 후인들이 유여시(柳如是), 진원원(陈圆圆)을 새로 추가하여 팔염이 되었다고 한다.


일흔 생일을 맞은 남자가 있다.

그의 생일잔치를 차려준 이는 한때 난징에서 이름을 날린 명기 마상란(馬湘蘭, 1548~1604).


마상란은 스물넷에 왕치등을 만난 뒤 삼십여 년을 그만 바라봤다.

난초를 누구보다 사랑했으며 ‘고결함’을 꿈꾸었던 마상란은 왕치등이

자신을 아내로 맞아주길 바라고 바랐지만 세월은 덧없이 지나갔다.


왕치등의 일흔 생일잔치를 치러주고 몇 달 뒤 마상란은 쉰일곱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 당시 예교와 명분과 명리의 벽을 뛰어넘는다는 건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마상란보다 70년 늦게 태어난 유여시(柳如是, 1618~1664),

그녀는 스물이 갓 지났을 때 문단의 거두 전겸익을 만났고 삼년 뒤(1641) 그에게 시집갔다.


본부인의 반대, 36살의 나이 차,

뭇사람들의 조롱에도 불구하고 전겸익은 정식으로 혼례를 치러 유여시를 맞이했다.


누가 알았으랴. 전겸익이 명성을 훼손하면서까지 맞이했던 기생 유여시의 덕을 보게 될 줄이야.

1644년, 이자성의 농민군이 베이징으로 쳐들어오고 숭정제는 목을 매 죽는다.


청나라가 들어서자, 명나라 유신들은 난징에서 주유숭을 황제로 옹립하고 남명(南明)을 세운다.

홍광제 주유숭이 제위에 오른 이듬해(1645), 청나라 군대가 난징으로 쳐들어온다.


이때 유여시는 전겸익에게 순국하자고 했다.

호수로 간 두 사람, 몸을 던지기 직전 전겸익은 망설인다.


“물이 너무 차구려. 들어갈 수가 없소.”

유여시는 끝까지 몸을 던지려 했지만 전겸익이 저지했다.


당시 전겸익의 벗들은 청나라를 섬기지 않기 위해 곡기를 끊고 죽기까지 했다.

그런데 천하에 명성을 떨치던 전겸익은 청나라 조정의 예부시랑이 된다.


유여시는 그를 따라 베이징으로 가지 않고 난징에 남는다.

전겸익은 반년 만에 병을 핑계로 조정에서 물러나지만 곧 감옥에 갇힌다.


유여시가 백방으로 노력한 덕에 그는 감옥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이후 전겸익은 명나라를 되살리려는 이들에게 힘을 보태지만 실패로 돌아간다.


강희 3년(1664), 여든셋의 전겸익이 세상을 떠나고 뒤이어 유여시도 자결한다.

유여시는 전겸익을 감옥에서 빼냈을 뿐만 아니라 그가 반청 세력과 연합하도록 고무했다.


유여시가 아니었다면 전겸익은 변절자의 낙인을 조금도 지우지 못했을 것이다.

역사학자 천인커(陳寅恪)가 무려 10여 년이라는 시간을 들여서 마지막으로 남긴 저서가 바로 <유여시 별전(別傳)>이다.


천인커는 유여시를 이렇게 평가했다.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 사는 사람들은 그 시대의 운명을 공유하게 마련이다.


명나라 말 청나라 초, ‘십리진회’ 양쪽 기슭으로 펼쳐진 난징의 번화가에서 지냈던 여인들의 삶은 많이 닮아 있다.

마상란과 유여시, 그리고 다음의 여섯 여인(고미생·변옥경·진원원·동소완·구백문·이향군)은

소위 ‘진회팔염(秦淮八艶)’으로 통칭된다.

진회팔염, 진회하 일대의 여덟 미인은 모두 기생이었다.


유여시보다 한 해 늦게 태어난 고미생(顧眉生, 1619~1664),

그녀 역시 당시 문단에 이름을 날리던 공정자에게 시집갔다.


불과 몇 년 뒤 이자성이 베이징을 함락한다.

이때 두 사람은 우물에 빠져 죽으려 했지만 결국 죽지 않았다.


진실은 알 수 없다.

고미생은 공정자와 죽으려 했으나 공정자가 죽으려 하지 않았다는 기록도 있고,

우물로 뛰어들었지만 구조되었다는 기록도 있다.


그런가 하면 공정자가 이렇게 변명했다는 기록도 있다.

“나는 죽으려 했지만 소첩이 싫다고 하니 어찌하오?”


그가 정말 소첩 즉 고미생 때문에 죽지 못한 것일까?

아무튼 공정자는 이자성에게 귀순했고, 뒤이어 청나라의 품안에 들어갔다.


훗날 고미생은 일품부인(一品夫人)에 봉해진다.

기녀 출신으로, 조정으로부터 정식 봉호까지 받았으니 성공한 인생일까.


고미생은 마흔이 넘어 겨우 딸을 낳지만 몇 달 만에 딸이 죽고 만다.

이에 병이 깊어진 그녀는 시름시름 앓다가 몇 년 뒤 세상을 떠난다.


전겸익·공정자와 더불어 ‘강좌(江左) 삼대가’로 불리는 오위업 역시 진회의 명기와 사랑에 빠진다.

그녀의 이름은 변옥경(卞玉京, 1623~1665).


변옥경은 오위업에게 시집가길 바랐지만 오위업은 모른 척 외면했다.

시기도 좋지 않았다.


두 사람이 만난 때는 명나라가 망하기 직전이었다.

명나라가 망한 뒤 오위업은 남명 왕조에 잠시 몸담지만 곧 실망하고 조정을 떠난다.


황제는 무능하고 조정은 부패하고 당쟁은 끊이지 않았던 것이다.

홍광제의 남명 정권이 청나라에 멸망당하자 오위업은 고향으로 돌아간다.


‘생(生)’과 ‘의(義)’의 양자택일을 회피하는 방법이었다.

살고 싶었다. 그렇다고 불의를 저지르고 싶진 않았다.


만약 난징에 남았더라면 유약한 그의 성격상 전겸익처럼 청나라의 품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을 터.

몇 년이 지난 뒤 오위업은 변옥경과 재회한다.


황색 도포를 걸친 변옥경은 스스로를 ‘옥경 도인’이라고 칭했다.

그녀 역시 난세에서 ‘생’과 ‘의’ 사이에서 고통스러웠던 것이리라.


이것이 두 사람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이후 변옥경이 속세와 인연을 끊고 살아가는 동안, 오위업은 청 조정의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삼 년 남짓 벼슬을 지낸다.


오위업이 자신의 생애 가운데 가장 통탄스럽게 여긴 시간이다.

어느덧 세월이 흘러 변옥경은 세상을 떠난다.

삼 년 뒤 변옥경의 무덤을 찾은 예순의 오위업은 그녀를 기리는 시(過錦村林玉京道人墓竝序)를 바친다.


오위업은 진원원(陳圓圓, 1623~1695)의 사연을 노래한

‘원원곡(圓圓曲)’이라는 장편 서사시를 짓기도 했다.


“머리털이 관을 찌를 듯 격노한 것은 홍안 때문이라네(衝冠一怒, 爲紅顔)”라는 구절에서,

미녀를 의미하는 홍안은 진원원을 가리킨다.


진원원은 오삼계 때문에 진회팔염 가운데 가장 유명하다.

오삼계가 진원원을 알게 된 건 이자성이 베이징을 점령하기 바로 전해였다.


어쩌면 진원원은 숭정제의 여인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황제와 인연이 닿지 않은 그녀는 결국 황제가 총애하던 전귀비의 아버지 전홍우의 가기(家妓)가 되고,

전홍우는 그녀를 오삼계에게 넘긴다.


진원원과 오삼계는 만나자마자 헤어져야 했다.

오삼계가 명나라 최후의 보루인 산하이관(山海關)을 지키러 떠났기 때문이다.


곧이어 이자성이 베이징을 점령하고 숭정제는 자결한다.

오삼계는 선택의 기로에 섰다.


청나라 군대를 막아야 하는가, 이자성의 군대를 무찔러야 하는가?

외적과 역적을 동시에 상대할 힘이 없는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


결국 그는 역적을 무찌른다는 명분으로 외적에게 도움을 청한다.

청나라 군대는 산하이관을 넘어와 이자성 군대를 무찌르고 자금성을 접수했다.


오삼계는 다른 선택을 할 수도 있었다.

그가 만약 이자성의 편에 섰더라면 또 다른 역사가 전개되었으리라.


오삼계가 이자성을 향해 창끝을 겨누게 된 결정적 이유가 바로 진원원 때문이라고 한다.

이자성의 부하 유종민이 진원원을 차지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오삼계가 격분한 나머지

결국 청나라 군대를 끌어들였다는 것이다.


아무튼 오삼계는 진원원을 되찾는다.

역사를 뒤흔든 뜨거운 사랑도 세월 앞에서는 무상하다.


청나라의 공신이 된 오삼계에게 부족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진원원을 향한 그의 사랑은 이내 식었다. 진원원은 결국 오삼계를 떠나 부처에 귀의한다.


사실 진원원은 마음에 두고 있던 남자가 있었다.

숭정 14년(1641) 봄날, 진원원은 모벽강을 만나 사랑에 빠졌다. 혼인까지 약속했다.

그런데 이듬해 봄, 진원원이 강제로 베이징 궁전으로 가게 되면서 두 사람의 인연은 끝이 난다.


바로 이때 모벽강의 삶 속으로 들어온 여인이 있으니 동소완(董小宛, 1624~1651)이다.

동소완은 진회팔염 가운데 가장 적극적으로 애정을 추구한 여인이다.


요샛말로 스토커라고 할 정도로, 동소완은 모벽강을 끈질기게 쫓아다녔다.

그리고 결국 그와 함께하게 된다. 동소완은 모벽강을 많이도 좋아했나 보다.


모벽강이 등에 종기가 나서 똑바로 누울 수 없을 때,

동소완은 그가 편히 기대어 잘 수 있게 해주려고 자신은 꼬박 100일을 앉은 채 잤다고 한다.


동소완은 진회팔염 중에서 가장 짧은 생을 살았다.

원래 몸도 약한 데다 모벽강의 병시중을 자주 들어야 했고 생활까지 궁핍했던 게 그녀의 수명을 재촉했다.


동소완은 모벽강과 9년을 함께하고 스물여덟에 세상을 떠났다.

임종 직전 그녀가 손에 쥐고 있던 것은 ‘비익(比翼)’과 ‘연리(連理)’라는 글자가 새겨진 한 쌍의 팔찌.


어느 칠석날, 모벽강이 새겨준 것이다.

날개가 하나씩이라서 암수가 함께해야만 날 수 있는 비익조,


두 나무의 가지가 결이 통해서 하나의 가지가 된 연리지,

동소완은 그렇게 비익조와 연리지의 삶을 살고자 했다.


언제 버려질지 모르는 기녀의 운명
동소완 같은 여자라면 절대 견딜 수 없는 남자, 가장 혐오할 남자가 바로 주국필일 것이다.


주국필과 인연을 맺은 비운의 여인은 구백문(寇白門, 1624~?).

그녀가 시집간 지 3년이 지났을 때 청나라 군대가 쳐들어왔다.


주국필은 명나라 공신의 집안 출신임에도 바로 청나라에 투항했다.

베이징으로 잡혀간 주국필은 집안의 모든 여인을 팔아서 자신의 몸값을 마련하려 했다.


구백문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을 팔아버리는 대신 다시 진회하의 기루로 돌아가게 해달라고 했다.

대신 한 달 안에 그의 몸값을 마련해주겠노라고 약속했다.


결국 구백문은 다시 기녀가 되고 그렇게 모은 돈으로 주국필의 몸값을 치러주었다.

일찍이 난징이 떠나가라 호화로웠던 혼인날은 아득한 꿈이었던 듯, 구백문은 주국필을 마음에서 떠나보냈다.


주국필은 다시 구백문을 찾지만 그녀는 단호히 인연을 끊는다.

“당신이 돈을 써서 나를 기루에서 빼냈고 나는 당신의 몸값을 치러줬으니, 이제 서로 빚진 게 없지요.”

이후 구백문이 진정한 사랑을 만났는지는 기록이 없으니 알 길이 없다.


누군가의 아내가 된다 해도 그저 여러 첩들 중 하나일 뿐이고 여의치 않으면 내쳐질 수도 있는 존재,

그게 바로 기녀의 운명이었다.


공상임(孔尙任)의 <도화선(桃花扇)>의 주인공 이향군(李香君, 1624~1653) 역시 그랬다.

이팔청춘 열여섯의 이향군이 첫사랑에 빠진 사람은 ‘복사(復社) 4공자(公子)’ 중 한 명인 후방역이다.


복사는 명나라 말 강남 지역에서 결성된 문학단체로, 비판적 정치성향이 강했다.

후방역이 이향군을 처음 만나는 데는 돈이 많이 들었다. 후방역의 벗 양용우가 그 돈을 지원해줬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돈의 출처가 후방역이 그토록 경멸하는 엄당의 완대성이 아닌가!

이 사실을 안 이향군은 돈을 마련해 후방역에게 주면서 완대성에게 돌려주게 한다.


이 일로 후방역은 앙심을 품게 된다.

명나라가 멸망하고 남명이 세워진 뒤 완대성이 실권을 갖게 되자, 후방역은 난징을 떠나 피신한다.


완대성은 남명 왕조의 실력자 전앙을 부추겨서 이향군을 첩으로 들이게 한다.

이향군은 이를 거부하며 난간에 머리를 부딪친다.


이때 튄 피가 부채를 물들인다.

후방역이 정표로 주었던 부채다.

후방역의 벗 양용우가 부채에 그림을 그려 그 핏자국을 복숭아꽃으로 만들어주었다고 한다.


이향군의 시련은 이게 끝이 아니었다.

이향군의 상처가 낫자 완대성은 그녀를 입궁하게 한다.


이번에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이향군이 입궁한 지 얼마 뒤, 청나라 군대가 난징을 공격하고 그 틈에 그녀는 도망친다.


이후 이향군과 후방역은 어떻게 되었을까?

이향군이 후방역을 다시 만나 함께 지내게 되지만 시댁에서 그녀의 기생 신분을 알게 되어 쫓겨났다는 설도 있고,

이향군이 비구니가 되었다는 설도 있다.


후방역은 복사 4공자의 나머지 셋과는 다른 선택을 했다.

진정혜와 모벽강은 끝까지 청나라에서 벼슬하지 않았고, 방이지는 출가해서 승려가 되었지만,

후방역은 과거에 응시해 청나라 조정에 몸담는다.


훗날 그는 젊은 날을 후회하며 자신의 서재를 ‘장회당(壯悔堂)’이라고 명명했다.

‘장년의 후회’를 담은 이름이다.


일설에 의하면, 이향군이 죽기 전 후방역에게 당부하길

 “절개를 지키고 이민족을 섬기지 말라” 했다고 한다.


‘진회팔염’이라는 여덟 명의 여인,

그리고 그녀들과 사랑했던 여덟 명의 남자.


진회하는 이들 만남의 증인이다.

진회하를 사이에 두고 강남공원(貢院)과 이향군 고거(故居)가 마주하고 있다.


강남공원의 수많은 과거 응시자들, 진회하에 늘어선 기루의 여인들,

얼마나 많은 이들 남녀가 만나서 사랑에 빠졌으랴.


기녀지만 사랑에 진실했던 여인도 있었을 터이고,

그런 여인을 그저 전리품이나 노리개로 생각했던 남자도 있었을 터.


당나라 시인 두목(杜牧)은 진회하의 술집을 보며 박진회(泊秦淮 진회에 묵으면서)에서

“술파는 여인은 망국의 한을 모른 채 강 건너 편에서 아직도 ‘후정화(後庭花)’를 부르네” 라고 한탄했다.


‘후정화(後庭花)’는 남조 진(陳)나라의 마지막 황제 후주(後主)가 지었다는 노래다.

두목은 진회하의 술집에서 흘러나오는 노랫소리를 들으며,

환락에 빠져 지내다가 수나라에 멸망당한 진나라의 전철을 당나라가 밟게 될까 저어한 것이리라.


하지만 두목이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그 노랫가락의 주인공인 ‘그녀’가 ‘그’와 ‘조국’에 대한 의리를 지키고자 피눈물을 흘릴 수도 있다는 것을.

<글 : 이유진 연세대 인문학연구원 연구원>




미향루(媚香樓)








▲ 이곳은 이향군과 복사문인들이 자주 만나던 곳이며 이향군이 손님을 접대하던 곳이다.



이향군의 침실

이향군과 후방역(侯方域 1618 ~ 1654년)은 이곳에서 신혼의 밤을 지냈고

후방역이 피난하여 떠나기 전에 이향군이 <비파>곡을 부르면서 부두까지 보내주었다.





중국공산당 총서기 장쩌민(江澤民 · 강택민)과 같은 시기 국무원 총리 리펑(李鵬 · 이붕)의 글씨


십리진회(十里秦淮) - 십리(十里)에 걸쳐 진회 물결과 같이 상가들이 늘어서 있다 해서

십리진회(十里秦淮)라고 불린다.


'十'이라는 숫자는 중국 사람들에게 완전과 원만을 가져다주는 행운의 숫자다.

그래서 '십전십미(十全十美)'는 가장 완전하고 무결하고 훌륭하다는 뜻이다.


한약에 '십전대보탕(十全大補湯)이 있는데 보약의 재료가 완벽하고 약효가 뛰어나 건강에 매우 좋다는 의미이다.

또한 북경에 '십리장안(十里長安), 남경에는 '십리진회(十里秦淮)', 상해에 '십리양장(十里洋場)'이라 하여

중국에서 대표적으로 유명한 거리를 일컷는 지명으로 삼고 있다.



모택동(毛澤東 1893~1976)의 글씨  

유우석의 시 <오의항(烏衣巷)>이 모택동의 글씨로 수채구멍 위 벽에 새겨져 있다.


朱雀橋邊野草花  烏衣巷口夕陽斜  舊時王謝堂前燕  飛入尋常百姓家  毛澤東

주작교변야초화  오의항구석양사  구시왕사당전연  비입심상백성가  모택동
주작교 주변에는 들꽃이 피고 / 오의항구에는 석양이 지네
그 옛날 왕도와 사안의 집 앞 제비가 / 지금은 평범한 백성의 집으로 날아든다.





곡수유상(曲水流觴)


곡수유상(曲水流觴)은 강남 갔던 제비가 다시 돌아온다고 하는 삼월 삼일 삼짇날,

정원에서 술잔을 띄우고 자기 앞으로 떠내려 올 때까지 시를 읊던 연회로, 동양의 선비나 귀족들이 즐겼다.


유상곡수(流觴曲水) · 곡수지유(曲水之遊) · 곡수연(曲水宴) · 곡강연(曲江宴)이라고도 한다.

구불구불한 물길에 술잔을 흘려보낸다는 뜻을 가진 말이다.


유상곡수 행사는 이를테면 물길 따라 위에서 술잔을 띄워 아래로 내려 보내서

그 술잔이 물에 따라 내려가면 아래에 있는 사람이 그 술잔을 들어 술을 마시는 일이다.


음력 삼월 첫 사일(巳日:뱀날)을 보통 상사일(上巳日)이라고 한다.

유상곡수를 행하는 날이 원래 상사일이었으나 중국 『형초세시기』에 의하면

조(曹)나라 진(晋)나라 때 와서는 음력 3월 3일(삼월 삼짓날)로 굳어졌다고 한다.


중국 동진시대 유면한 서예가 왕희지가 우군장군 겸 회계 내사 벼슬을 할 당시

353년(영화 9년) 늦봄에 회계 땅에서 유상곡수 연회를 열었던 일이 있었다.

353년 늦봄이라고 하였지만 아마도 삼월 삼짓날이었으리라고 추측할 수 있다.


그 후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일이 행해졌다.

통일신라시대 인공적으로 포석정을 만들어 술잔이 한바퀴 빙 돌아가게 만들어 음주하고 노는 풍류가 있었다. 


또한 통일신라시대 정읍 태인에서 태산태수로 부임하신 고운 최치원 선생께서 칠보 시산리에 유상곡수를 축조하여

이른바 유상대(流觴臺)를 만들어 촌로와 문인들과 더불어 풍류를 즐겼다고 전한다.


대체로 유상곡수를 하는 날은 음력 3월 3일이었다.

이 때가 되면 백성들이 액막이(수계:修禊)라 하여 물가로 모여드는 데,

이 때 유상곡수하여 술을 마시는 일이 행해진다.


유상곡수를 하는 날은 대부분 홀수 날이며 그 중에서도 홀수의 배가 되는 날에 행해진다.

곧, 1월 1일(설날), 3월 3일(삼월 삼짓날), 5월 5일(단오날), 7월 7일(칠석날), 9월 9일(중구일)이 바로 그런 일을 행하는 날이다.


유상곡수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으로 알려진 것은 4세기 경에 쓰인 왕희지의 난정서로,

문인들을 모아 굽이진 물줄기에 줄서 앉아 시를 지으며 즐겼다는 내용이 있다.


이러한 문화는 한국과 일본에도 전파되었는데,

한국의 포석정은 현존하는 유상곡수 유적으로는 한중일 삼국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다.




포석정(鮑石亭)

경주 포석정은 현존하는 유상곡수 유적으로 한중일 삼국에서 그러니까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다.


비수지전(淝水之战)


오호십육국 시대인 서기 383년 북방의 전진(前秦)이 남방의 동진(东晋)을 정벌하기 위해 남하하였다가

지금의 안후이성(安徽省) 서우현(寿县, 수현) 동남방 화이하(淮河) 지류인 비수(淝水)에서

80여만의 전진(前秦)이 동진(东晋)의 사현(謝玄)이 이끈 8만의 군사에 대패한 전투.


화베이의 패권을 장악했던 후조(後趙)가 멸망한 후 저족이 중심이 되어 건국한 전진(前秦)이 점차 성장하여

화베이의 패권을 차지하였으며 부견(苻坚)은 357년 제위를 탈취하여 3대 황제가 되어 한인 왕맹(王猛)을 중용하고

국력이 강대해져 단기간에 동쪽의 전연(前燕), 남쪽의 양(梁)과 익(益) 2개 주(州)를 획득하였으며

북쪽으로 선비(鲜卑) 탁발씨(拔拓氏)의 대(代), 서쪽으로 전량(前凉)을 점령하고

서역(西域)까지 정벌하며 376년 화베이의 통일을 이루었다.


왕맹(王猛)은 죽기직전 부견의 남진정책을 반대하였으나 부견은 조기에 중국을 통일하고자 하는 욕심으로

왕맹의 권고를 무시하고 그의 사후 바로 동진(东晋)의 공격에 나섰다.


동진은 전진의 남침에 대비하여 376년 태원(太元) 원년 효무제(孝武帝) 사마요(司马矅)가 친정(亲政)을 시작하고

사안(谢安)을 중서감(中书监), 록상서사(录尚书事)로 승진시켜 조정을 총괄하게 하였으며

사안은 조카 사현(謝玄)을 연주자사(兖州刺史)로 임명하여 광릉(广陵)에 배치하며

사안이 관할하던 양주(扬州), 예주(豫州), 서주(徐州), 연주(兖州), 청주(青州)의 5개 주(州)의 군을 통솔하며

창강(长江, 장강)하류 강북일선의 방위를 총괄토록 하였다.


사현은 광릉(广陵)에 머물며 훌륭한 장수와 정예병을 양성하여

당시 최강의 전투력을 지닌 군대를 양성하였고 이들은 북부병(北府兵)으로 칭해졌다.


378년 4월 전진은 정남대장군(征南大将军) 부비(苻丕)로 하여금 보병과 기병 7만을 이끌고

양양(襄阳)을 공격하게 하였고 부견은 별도로 10만여 군대를 3개로 나누어 함께 양양을 포위하여

총 17만 병력으로 공격하여 1년여 만인 태원(太元) 4년(379) 2월 이를 함락시켰다.


부견은 이어 팽성(彭城)을 공격하였고 양측 간의 회남지전(淮南之战)에서 사안(谢安)은 건강(建康)에서 수비하며

사현에게 5만의 북부병을 광릉에서 출병토록 하여 사현이 4전4승을 거두었다.

이 공으로 사안은 건창현공(建昌县公), 사현은 동흥현후(东兴县侯)에 봉해졌다.


태원 8년(383) 5월 동진은 먼저 한충경(桓冲倾)에게 10만의 형주(荆州) 병력을 동원하여 진(秦)을 공격하여

진군(秦军)을 견제토록 하자 부견은 부예(苻睿), 모용수(慕容垂), 요장(姚苌) 및 모용위(慕容暐) 등으로 전투에 임하게 하고

자신이 친히 60만 병력을 인솔하여 기병 27만을 동생 부융(苻融)으로 선봉을 삼아 8월 대거 남침을 시도하였다.


이에 사안은 사석(谢石)을 전선대도독(前线大都督)으로 삼고 사현을 선봉으로 하여

8만 병마를 3개로 나누어 진군(秦军)을 맞아 출병시켰다.


11월 사현은 유뇌지(刘牢之)로 하여금 5천의 정병으로 기습하여

진군(秦军) 10여 장수를 죽이고 5만 주력을 격파시켰다.


12월 쌍방은 비수에서 결전하기에 이르렀다.

사현, 사담(谢琰) 및 환이(桓伊)는 진군(晋军) 7만을 이끌고

부견과 부융이 통솔하는 전진의 15만 대군에 전승하며 부융을 죽이는 전과를 올렸다.


부견은 혈혈단신으로 도망쳐 모용수에 의해 보호받으며 12월에 장안으로 귀환하였다.
이 전투로 중국의 남북 분립의 국면이 오랫동안 지속되게 되었다.


동진은 이 전투의 승리를 호기로 삼아 북벌을 감행하여 황하(黄河) 이남의 옛 영토를 되찾았으나

사안의 사망과 사현의 은퇴 후에는 수세로 일관하였으며, 전진은 이 전투의 패배로 국가의 통제력을 상실하였고

부견은 385년 치앙족(羌族, 강족) 요장(姚苌)에게 붙잡혀 선양을 강요받았으나 거절하며 살해되었고

이 소식을 듣고 부비가 뒤를 계승했으나 서연에게 대패 후 도망 중 동진군에게 죽었다.

이후에도 일족이 저항을 계속했으나 394년에 완전히 멸망하였다.


모용수(慕容垂)는 도중 부견과 헤어진 후 업에서 384년 자립하여 후연(後燕)을 건국하였다.

모용홍은 동생 모용충과 합세하여 전진의 요장을 격파하고 장안의 함락을 도모하였으나

부하에게 살해당하고 그 뒤를 모용충이 계승하여 서연(西燕)을 건국하였다.


모용홍에게 패한 요장은 치앙족(羌族, 강족)을 규합하여 후진(後秦)을 세웠다.

전진의 장군 여광(呂光)은 서역 원정후 복귀 중에 비수의 패전을 듣고 간쑤에서 자립하여 후량(後凉)을 건국하였다.


이와 같이 화베이는은 혼란 속에 빠져들어 전후 10개국이 성립되었고 이러한 혼란은 386년 탁발규에 의해

부활한 대국(代國)이 북위로 이름을 바꾼 뒤에 세력을 확장해 최종적으로 화베이를 통일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왕희지(王羲之, 321~379)


자는 일소(逸少), 낭야(瑯邪).

지금의 산동성(山東省) 임기현(臨沂縣) 태생인데 강남으로 이주해서 살았다.


아버지 왕광(王曠)은 동진 건국에 공을 세운 왕도(王導)의 사촌동생이다.

왕희지는 선인들이 이룩한 성과를 바탕으로 독특한 서법을 연구 · 창조함으로써

서예에 새바람을 불러일으켜 ‘서성(書聖)’이라 불리고 있다.


글씨를 처음 배울 때 그의 글씨는 또래들과 비교하여 다소 뒤떨어지는 편이었다 한다. 

하지만 글씨에 열중하는 각고면려(刻苦勉勵)하는 태도는 누구도 따를 수가 없었다고 한다.


왕희지가 글씨에 열중할 때는 그야말로 삼매경에 흠뻑 빠져들어갔다.

다른 학문을 공부할 때, 식사할 때, 길을 거닐 때, 하루 24시간 내내

글씨체의 대소, 구조, 운필(運筆)에 대하여 머리 속으로 생각하고 또 생각하면서

손으로 옷이나 방바닥에 쓰는 시늉을 하는 바람에 옷이란 옷은 모두 달아서 너덜너덜해졌다고 한다.


어느 날 식사하는 것마저 잊고 글씨에 몰두하고 있어 가족이 밥상을 차려들고 서재로 가 보았다.

그런데 서재에서는 희한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왕희지는 글씨에 정신이 팔렸음인지 자신의 옷자락을 먹에 묻혀 먹으면서

“맛있다, 맛있다.”는 말을 되풀이하면서 기뻐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 모양을 바라보던 가족도 한동안 멍하니 정신을 잃고 있다가 밥상을 가지고 왔음을 의식했을 무렵

왕희지의 입안은 온통 먹투성이가 된채로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왕희지는 곧잘 연못 가에서 글씨를 쓰고 연못의 물로 벼루를 씻었는데

얼마 후에는 그 연못의 물이 온통 검게 흐려져 그 연못을 ‘묵지(墨池)’라 부르게 되었다.


왕희지는 이러한 끈질기고 꾸준한 정신으로 수십 년 간의 노고 끝에

마침내 서예의 오묘한 도를 터득하여 서예계의 정상에 올랐다.


조야의 모든 사람들은 왕희지의 글씨를 ‘묵보(墨寶)’라 하여 소중히 여겼다.
왕희지는 비서랑(秘書郞 : 궁중의 전적을 관장하던 관직)을 시작으로

회계왕우(會稽王友) · 임천대수(臨川大守) · 강주자사(江州刺史) · 호군장군(護軍將軍) 등을 역임했다.


명문 출신이었으나 중앙정부의 관직을 구하지 않아,

351년(永和 7)에는 우군장군(右軍將軍)·회계내사(會稽內史)에 임명되어 회계군(會稽郡) 산음현(山陰縣)으로 부임했다.


이 관직 이름에 의해 왕우군(王右軍)으로도 불린다.

그는 한대에 싹이 튼 해(楷) · 행(行) · 초(草)의 실용서체를 예술적인 서체로까지 승화시켰다.


수대(隋代)를 거쳐 당대에 이르러서는 서예에 뛰어났던 황제 태종이 왕희지를 존중하여

그의 글씨를 널리 수집했기 때문에 왕희지의 서법이 크게 성행했다.


왕희지의 몇몇 필체와 서명은 그의 생존 당시에조차 값을 매길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하며,

시대가 지나면서 중국에서 가장 기본적이고도 품격높은 예술인 서예를 배우는 사람들에게 동경의 대상이 되었다.


오늘날 그의 진적(眞跡)은 전해지지 않으나 〈난정서 蘭亭序〉·〈십칠첩 十七帖〉·

〈집왕성교서 集王聖敎序〉 등의 탁본이 전하여 진열되어 있다.


이중 가장 이름 높은 서첩은 〈난정서>로, 여기에는 353년 3월 삼짇날,

물가에 가서 흐르는 물에 몸을 깨끗이 씻고 신에게 복을 기원하는 계제사(禊祭祀 )가 열리는 기간에

42명의 문사들이 모여 시를 짓고 술을 즐겼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행서로 씌어진 왕희지의 비문은 독특한 서체인 행서의 본보기가 되었다.

위의 〈난정서>는 후대 특히 고전에 대한 관심이 높았던 명대(1368~1644)에 그림의 주제로 많이 채택되었다.


그의 후손 가운데 가장 이름을 떨친 서예가는 그의 막내아들인 왕헌지(王獻之)이다.

그의 동산첩(東山帖)도 진열되어 있다.


왕희지에 얽힌 일화들


왕희지는 어느 날 회계 산음서 부채를 파는 노파를 만났다.

대나무로 만든 부채가 너무 허술하였기 때문에 부채를 사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


노파를 가엾게 여긴 왕희지는 그 부채에 각각 6자씩 써넣었다.

그러자 노파는 부채를 망쳐놓았다고 투덜거리는 것이었다.


왕희지는 그 노파에게 "왕희지 글씨 부채"라 외치라고 하였다.
“이 부채에는 왕희지의 친필이 씌어져 있어서 1백 전(錢) 이하로는 절대 팔지 않겠노라고 말씀하시오.”


당시 부채값의 몇 십갑절에 해당하는 금액이었으나

왕희지의 친필이 담겨진 부채라는 사실이 알려지자 순식간에 다 팔려버렸다.


며칠 후 노파는 또 왕희지에게 글씨를 부탁하였다.

그러나 왕희지는 빙그레 웃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왕희지는 이미 장강 이남에서는 명사로 알려졌을 뿐 아니라

그의 글씨 또한 당대에서조차 구하기가 어렵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왕희지의 친구 중 한 사람이 양고기를 좋아했는데, 형편이 가난하여 마음껏 먹을 수 없었다.

그는 양고기가 먹고 싶어지면 왕희지에게 편지를 썼고, 답장이 오면 내용을 읽은 후

그 편지를 <왕희지 글씨>라고 수집가에게 팔아서 그 돈으로 양고기를 사 먹었다.


왕희지는 친구가 그러는 것을 알면서도 웃으며 받아 주었다는 것인데,

때로는 이런 황새를 흉내내려는 풍류가가 등장한다.


동파 소식의 문명이 한창 드높던 어느 날 친구로부터 편지가 왔는데,

편지를 가져온 하인의 말인즉  <친필로> 답장을 써 달라는 것이었다.


왕희지의 양고기 좋아하는 친구 일화를 떠올린 소동파는 하인에게 농담삼아 일렀다.

"너희 주인 어른에게 가서, 오늘은 푸줏간이 문을 닫았다고 말씀드려라."


물론 이런 고상한(?) 농담이 하인에게 통할 리 없으니,

그의 생뚱맞은 말에 하인은 "오늘 푸줏간 영업합니다, 나으리." 하고 진지하게 반박했다는 것이다.

일찍이 회계 땅에 의지할 곳 없는 어느 노파가 흰 거위를 기르고 있었는데

그 거위의 울음 소리가 얼마나 좋았던지 소문이 자자하였다.


왕희지가 제자로 하여금 그 거위를 사려 하였으나 노파는 팔지 않겠다며 거절하였다.

왕희지는 그 거위를 가지지는 못할망정 한번 구경이라도 해야 직성이 풀릴 것만 같았다.


그는 친척과 벗들을 데리고 부랴부랴 노파의 집을 찾아갔다.
노파는 왕희지가 친히 찾아왔다는 말을 듣고 크게 당황하였다.


자기 집을 찾아온 명사를 어떻게 대접해야 할지 몰라 쩔쩔매었다.

집안을 샅샅이 뒤졌으나 아무것도 대접할 것이 없었으므로 할 수 없이 거위를 잡아 대접하기로 하였다.


왕희지는 한번 구경삼아 찾아왔을 뿐인데 문제의 거위가 냄비 속에서 요리로 둔갑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크게 실망하여 며칠을 두고 애석해했다고 한다.


산음 땅의 어떤 도사는 왕희지의 글씨를 좋아하는 열렬한 애호가였으나

그 글씨를 손에 넣기가 어떻게나 어려웠던지 우선 한 쌍의 흰 거위를 기르기 시작하였다.


왕희지가 흰 거위를 몹시 좋아한다는 소문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도사가 기르는 거위는 그 색깔이 희고 살집도 좋았다.


이 소문을 들은 왕희지는 배를 타고 도사의 집을 찾아가 그 거위를 흥정하였다.

도사가 말하였다.


“이 거위는 내게 너무 소중하고 귀한 것이어서 팔 생각이 추호도 없습니다.

하지만 꼭 필요하시다면 그냥 선물로 드리겠으니 경전 한편을 베껴 주시겠는지요...”


거위를 몹시 좋아했던 왕희지는 대뜸 승낙하고 흔연히 붓을 들어 즉석에서

도교의 경전인 황정경(黃庭經)을 써 주고, 답례로 거위 한 쌍을 받았다.


여기에서 환아(換鵝)라는 말이 생겼다.

청나라 궐람(闕嵐, 1758~1844)이 그린 작품 화제(畵題)를 보면 뚜렷해진다.

이런 일이 있은 후부터 왕희지의 글씨를 ‘거위와 바꾼 글씨다.’라는 이야기가 생겼다.


書錄黃庭墨生彩(서록황정묵생채) 잘 쓴 황정경의 먹빛은 광채가 나고
逸少妙筆換白鵝(일소묘필환백아) 일소의 신묘한 운필은 흰 거위와 바꿨느니라


왕희지의 글씨는 수없이 남아 후세에 전하고 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것은 <난정서(蘭亭序)>다.

난정은 회계 산음에 있는 유서 깊은 명소로 산수가 아름답고 대나무 숲이 유명하였다.


특히 난정 부근에는 거울 같은 시냇물이 흘러 예로부터 시인 묵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구력 3월 3일은 이 지방 고유의 명절이었다.


353년 3월 3일 왕희지는 사안(謝安) 등 41명의 명사들을 난정에 초대하여

술잔을 주고 받으며 시를 짓는 향연을 벌였다.


술잔에 술을 가득 부어 시냇물 상류에서 술잔을 띄워 내려 보내면 각기 냇가의 돌 위에 걸터앉아

술잔이 흘러내려오기를 기다리다가 술잔이 자기 앞에 닿으면 즉흥시 한 수를 짓고

만약 시를 짓지 못하면 벌주로 세 잔의 술을 연거푸 마시기로 하였다.


그날 따라 시냇물은 더욱 맑아 보였다.

술잔이 하나 둘 띄워져 시냇물을 따라 내려왔다.


술잔이 와 닿기를 기다리던 명사들은 술잔이 자기 앞에 이르자

그 술을 단숨에 들이키곤 이내 시 한 수를 지어 일필휘지(一筆揮之)하였다.


모두가 당세의 명사들이었기 때문에 벌주를 마신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40여 편의 시가 한꺼번에 완성되었다.


이 40여 편의 시를 한 책에 모으고 왕희지가 서문을 썼기 때문에 이것을 <난정서>

또는 <난정집서(蘭亭集序)>, <임하서(臨河序)>, <계서(禊序)>라고도 한다.


이 서문은 28행 324자로 이루어져 있는데 산뜻하고 매끈한 흘림체로 되어 있고

자체가 유려하여 중국 행서(行書)의 절품(絶品)으로 꼽히고 있다.


후세에 이르러 당태종 이세민(李世民)이 왕희지의 글씨에 매료되어 왕희지의 후손으로부터

<난정서>의 필첩(筆帖)을 얻고는 크게 기뻐하여 소중히 간직하였다.


또 서예가 조모(趙模), 풍승소(馮承素) 등으로 하여금

난정서를 여러 책 베끼게 하여 친족과 측근들에게 하사하였다.


태종은 일생동안 <난정서>를 매우 소중히 여겨 여러 차례 제사(題詞)를 쓰고,

또 사후에는 부장품으로 무덤까지 가지고 갔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 후 태종의 능이 도굴되는 바람에 <난정서> 진필은 유실되고 말았다.

왕희지의 행서의 대표적 작품은 이렇게 유실되었지만,

태종의 생존시에 왕희지의 글씨를 베끼는 일이 활발히 추진되었다.


그 결과 장강 이남에서 이름을 떨치던 왕희지의 글씨는 전국적으로 유명해졌다.

그 후 1천여 년에 걸쳐 왕희지의 글씨는 서체(書體)의 정통(正統)으로서 중국 서예계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고대의 글씨는 주로 종이와 비단에 씌어졌기 때문에 천 수백 년 동안 보존하기가 어려웠으나

청나라 건륭(乾隆, 1662~ 1795) 시대에 이르러 동진 때의 왕희지,

그의 아들 왕헌지(王獻之), 왕순(王恂)의 필첩이 발견되었다.


왕희지의 필첩은 〈쾌설시청첩(快雪時晴帖)〉, 왕헌지의 필첩은 〈중추접(中秋帖)〉,

왕순의 필첩은 〈백원첩(伯遠帖)〉이라 불렸다.


이 세 필첩은 희대의 진품으로 지정되어 내부(內府)에 특별 전시실을 설치하고 보존하였으며,

그 전시실을 ‘삼희당(三希堂)’이라 명명하였다.


현재 절강성 소흥현에 있는 난정은 관광의 명소로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으며,

난정 곁을 흐르는 시냇물과 묵지 연못의 물에는 지금도 그 옛날의 서성 왕희지의 체취가 담겨 있는 듯

관광객들의 발길을 멈추게 하고 있다.





기념관의 규모는 그다지 크지 않고, 당시의 실제 유물은 거의 없었다.

다만 당시의 토기 몇 점과 남경박물관에 있다는 죽림칠현(竹林七賢)을 새긴 벽돌 모사품,

그리고 북경박물관에 있는 고개지(顧愷之)의 낙신부도(洛神賦圖) 모사품이 눈에 띄었다.


죽림칠현은 잘 알려져 있다시피, 완적(210년~263년), 혜강(223년~262년), 산도(205년~283년),

유영(연대미상), 완함(연대미상), 상수(연대미상), 왕융(234년~305년) 등 일곱 사람이다.


그들이 살았던 시대는 3세기 중반, 조씨의 위에서 사마씨의 진으로 왕조가 교체되는 격동의 전환기였다.

이 위험한 시대에 죽림칠현은, 새로이 등장한 정권의 반대파를 색출하는 데 혈안이 된 사마씨의 첩보망을 피하기 위해

노장사상의 '무위자연' 이념에 기반한 독특한 생활방식을 창조했다.


그들은 쓸모없는 존재가 되기를 자처하여 그 생을 마치고자 했다.
죽림칠현의 일원인 왕융이 명문귀족 '낭사 왕씨'의 일족인 데서도 알 수 있듯이 모두 귀족층이었다.


육조시대를 거치면서 귀족층과 사대부층은 거의 일치하였다.

이 점이 근세 이후의 사대부층과는 크게 다른 점이다.


또한 죽림칠현이 후세에 알려진 모습처럼, 정치적 세계에서 떨어져 나가 죽림에 모여

다 함께 술에 취하고 음악을 즐기는 식으로, 하나의 그룹을 형성하고 있었는지도 확실치 않다.


그러나 죽림칠현 전설이, 기성 정치체제 속에서 살기를 강요하는 유교적 가치관을 배척하고,

자유롭고 다양한 삶의 방식을 추구하는 후세의 사대부에게 선망하는 대상이 된 것은 틀림없다.



낙신부도(洛神賦圖)


낙신부(洛神賦)는 위(魏)나라 조조(曹操)의 아들이며 건안칠자(建安七子)라는 그 시대 대표적인 문인이었던

조식(曹植)이 낙양(洛陽)의 낙수(洛水)에서 신녀의 환영을 보고 읊은 장시를 말한다.


그런데 이 시는 형인 문제 조비(文帝 曹丕)의 견황후(甄皇后),

즉 형수에 대한 이룰 수 없는 사랑을 노래한 것이다.


그녀는 원래 조조에게 패한 원소(袁紹)의 며느리로 당대의 절색미인이라서

조씨 삼부자가 일종의 전리품으로 강탈하여 마지막에는 맏아들인 조비가 차지했다.

그러고보면 조식의 시가 아름답다고 말하긴 좀 껄끄럽다.


낙신부도(洛神賦圖)는 위진남북조 시대의 동진(東晉)의 화가 고개지(顧愷之, 344년 ~ 406년 경)가 그린 그림이다. 

자(字)는 장강(長康), 호두(虎頭)이다.


강남 명문호족 출신으로 그림뿐만 아니라 시부(詩賦)와 서법(書法)에도 능했으며 박학 다식했다.

성격이 솔직하고 소탈하여 당시 사람들은 그를 일러 화절(畵絶), 재절(才絶), 치절(癡絶)을 갖춘 삼절(三絶)이라 칭했다.


특히, 인물화, 산수화에 뛰어났는데 인물을 그리면서 몇년이고 눈동자를 그리지 않았다.

사람들이 그 까닭을 물으면 "정신을 비추어 내는 곳이 바로 눈동자이다." 라고 했다.


그는 기존의 형사(形似) 위주의 화풍과는 달리 신사(神似)를 중시하여 인물화에서 눈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원본은 복경박물관에 있고 여기에 있는 그림은 모사품이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