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공산당 총서기 장쩌민(江澤民 · 강택민)과 같은 시기 국무원 총리 리펑(李鵬 · 이붕)의 글씨


십리진회(十里秦淮) - 십리(十里)에 걸쳐 진회 물결과 같이 상가들이 늘어서 있다 해서

십리진회(十里秦淮)라고 불린다.


'十'이라는 숫자는 중국 사람들에게 완전과 원만을 가져다주는 행운의 숫자다.

그래서 '십전십미(十全十美)'는 가장 완전하고 무결하고 훌륭하다는 뜻이다.


한약에 '십전대보탕(十全大補湯)이 있는데 보약의 재료가 완벽하고 약효가 뛰어나 건강에 매우 좋다는 의미이다.

또한 북경에 '십리장안(十里長安), 남경에는 '십리진회(十里秦淮)', 상해에 '십리양장(十里洋場)'이라 하여

중국에서 대표적으로 유명한 거리를 일컷는 지명으로 삼고 있다.



모택동(毛澤東 1893~1976)의 글씨  

유우석의 시 <오의항(烏衣巷)>이 모택동의 글씨로 수채구멍 위 벽에 새겨져 있다.


朱雀橋邊野草花  烏衣巷口夕陽斜  舊時王謝堂前燕  飛入尋常百姓家  毛澤東

주작교변야초화  오의항구석양사  구시왕사당전연  비입심상백성가  모택동
주작교 주변에는 들꽃이 피고 / 오의항구에는 석양이 지네
그 옛날 왕도와 사안의 집 앞 제비가 / 지금은 평범한 백성의 집으로 날아든다.





곡수유상(曲水流觴)


곡수유상(曲水流觴)은 강남 갔던 제비가 다시 돌아온다고 하는 삼월 삼일 삼짇날,

정원에서 술잔을 띄우고 자기 앞으로 떠내려 올 때까지 시를 읊던 연회로, 동양의 선비나 귀족들이 즐겼다.


유상곡수(流觴曲水) · 곡수지유(曲水之遊) · 곡수연(曲水宴) · 곡강연(曲江宴)이라고도 한다.

구불구불한 물길에 술잔을 흘려보낸다는 뜻을 가진 말이다.


유상곡수 행사는 이를테면 물길 따라 위에서 술잔을 띄워 아래로 내려 보내서

그 술잔이 물에 따라 내려가면 아래에 있는 사람이 그 술잔을 들어 술을 마시는 일이다.


음력 삼월 첫 사일(巳日:뱀날)을 보통 상사일(上巳日)이라고 한다.

유상곡수를 행하는 날이 원래 상사일이었으나 중국 『형초세시기』에 의하면

조(曹)나라 진(晋)나라 때 와서는 음력 3월 3일(삼월 삼짓날)로 굳어졌다고 한다.


중국 동진시대 유면한 서예가 왕희지가 우군장군 겸 회계 내사 벼슬을 할 당시

353년(영화 9년) 늦봄에 회계 땅에서 유상곡수 연회를 열었던 일이 있었다.

353년 늦봄이라고 하였지만 아마도 삼월 삼짓날이었으리라고 추측할 수 있다.


그 후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일이 행해졌다.

통일신라시대 인공적으로 포석정을 만들어 술잔이 한바퀴 빙 돌아가게 만들어 음주하고 노는 풍류가 있었다. 


또한 통일신라시대 정읍 태인에서 태산태수로 부임하신 고운 최치원 선생께서 칠보 시산리에 유상곡수를 축조하여

이른바 유상대(流觴臺)를 만들어 촌로와 문인들과 더불어 풍류를 즐겼다고 전한다.


대체로 유상곡수를 하는 날은 음력 3월 3일이었다.

이 때가 되면 백성들이 액막이(수계:修禊)라 하여 물가로 모여드는 데,

이 때 유상곡수하여 술을 마시는 일이 행해진다.


유상곡수를 하는 날은 대부분 홀수 날이며 그 중에서도 홀수의 배가 되는 날에 행해진다.

곧, 1월 1일(설날), 3월 3일(삼월 삼짓날), 5월 5일(단오날), 7월 7일(칠석날), 9월 9일(중구일)이 바로 그런 일을 행하는 날이다.


유상곡수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으로 알려진 것은 4세기 경에 쓰인 왕희지의 난정서로,

문인들을 모아 굽이진 물줄기에 줄서 앉아 시를 지으며 즐겼다는 내용이 있다.


이러한 문화는 한국과 일본에도 전파되었는데,

한국의 포석정은 현존하는 유상곡수 유적으로는 한중일 삼국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다.




포석정(鮑石亭)

경주 포석정은 현존하는 유상곡수 유적으로 한중일 삼국에서 그러니까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다.


비수지전(淝水之战)


오호십육국 시대인 서기 383년 북방의 전진(前秦)이 남방의 동진(东晋)을 정벌하기 위해 남하하였다가

지금의 안후이성(安徽省) 서우현(寿县, 수현) 동남방 화이하(淮河) 지류인 비수(淝水)에서

80여만의 전진(前秦)이 동진(东晋)의 사현(謝玄)이 이끈 8만의 군사에 대패한 전투.


화베이의 패권을 장악했던 후조(後趙)가 멸망한 후 저족이 중심이 되어 건국한 전진(前秦)이 점차 성장하여

화베이의 패권을 차지하였으며 부견(苻坚)은 357년 제위를 탈취하여 3대 황제가 되어 한인 왕맹(王猛)을 중용하고

국력이 강대해져 단기간에 동쪽의 전연(前燕), 남쪽의 양(梁)과 익(益) 2개 주(州)를 획득하였으며

북쪽으로 선비(鲜卑) 탁발씨(拔拓氏)의 대(代), 서쪽으로 전량(前凉)을 점령하고

서역(西域)까지 정벌하며 376년 화베이의 통일을 이루었다.


왕맹(王猛)은 죽기직전 부견의 남진정책을 반대하였으나 부견은 조기에 중국을 통일하고자 하는 욕심으로

왕맹의 권고를 무시하고 그의 사후 바로 동진(东晋)의 공격에 나섰다.


동진은 전진의 남침에 대비하여 376년 태원(太元) 원년 효무제(孝武帝) 사마요(司马矅)가 친정(亲政)을 시작하고

사안(谢安)을 중서감(中书监), 록상서사(录尚书事)로 승진시켜 조정을 총괄하게 하였으며

사안은 조카 사현(謝玄)을 연주자사(兖州刺史)로 임명하여 광릉(广陵)에 배치하며

사안이 관할하던 양주(扬州), 예주(豫州), 서주(徐州), 연주(兖州), 청주(青州)의 5개 주(州)의 군을 통솔하며

창강(长江, 장강)하류 강북일선의 방위를 총괄토록 하였다.


사현은 광릉(广陵)에 머물며 훌륭한 장수와 정예병을 양성하여

당시 최강의 전투력을 지닌 군대를 양성하였고 이들은 북부병(北府兵)으로 칭해졌다.


378년 4월 전진은 정남대장군(征南大将军) 부비(苻丕)로 하여금 보병과 기병 7만을 이끌고

양양(襄阳)을 공격하게 하였고 부견은 별도로 10만여 군대를 3개로 나누어 함께 양양을 포위하여

총 17만 병력으로 공격하여 1년여 만인 태원(太元) 4년(379) 2월 이를 함락시켰다.


부견은 이어 팽성(彭城)을 공격하였고 양측 간의 회남지전(淮南之战)에서 사안(谢安)은 건강(建康)에서 수비하며

사현에게 5만의 북부병을 광릉에서 출병토록 하여 사현이 4전4승을 거두었다.

이 공으로 사안은 건창현공(建昌县公), 사현은 동흥현후(东兴县侯)에 봉해졌다.


태원 8년(383) 5월 동진은 먼저 한충경(桓冲倾)에게 10만의 형주(荆州) 병력을 동원하여 진(秦)을 공격하여

진군(秦军)을 견제토록 하자 부견은 부예(苻睿), 모용수(慕容垂), 요장(姚苌) 및 모용위(慕容暐) 등으로 전투에 임하게 하고

자신이 친히 60만 병력을 인솔하여 기병 27만을 동생 부융(苻融)으로 선봉을 삼아 8월 대거 남침을 시도하였다.


이에 사안은 사석(谢石)을 전선대도독(前线大都督)으로 삼고 사현을 선봉으로 하여

8만 병마를 3개로 나누어 진군(秦军)을 맞아 출병시켰다.


11월 사현은 유뇌지(刘牢之)로 하여금 5천의 정병으로 기습하여

진군(秦军) 10여 장수를 죽이고 5만 주력을 격파시켰다.


12월 쌍방은 비수에서 결전하기에 이르렀다.

사현, 사담(谢琰) 및 환이(桓伊)는 진군(晋军) 7만을 이끌고

부견과 부융이 통솔하는 전진의 15만 대군에 전승하며 부융을 죽이는 전과를 올렸다.


부견은 혈혈단신으로 도망쳐 모용수에 의해 보호받으며 12월에 장안으로 귀환하였다.
이 전투로 중국의 남북 분립의 국면이 오랫동안 지속되게 되었다.


동진은 이 전투의 승리를 호기로 삼아 북벌을 감행하여 황하(黄河) 이남의 옛 영토를 되찾았으나

사안의 사망과 사현의 은퇴 후에는 수세로 일관하였으며, 전진은 이 전투의 패배로 국가의 통제력을 상실하였고

부견은 385년 치앙족(羌族, 강족) 요장(姚苌)에게 붙잡혀 선양을 강요받았으나 거절하며 살해되었고

이 소식을 듣고 부비가 뒤를 계승했으나 서연에게 대패 후 도망 중 동진군에게 죽었다.

이후에도 일족이 저항을 계속했으나 394년에 완전히 멸망하였다.


모용수(慕容垂)는 도중 부견과 헤어진 후 업에서 384년 자립하여 후연(後燕)을 건국하였다.

모용홍은 동생 모용충과 합세하여 전진의 요장을 격파하고 장안의 함락을 도모하였으나

부하에게 살해당하고 그 뒤를 모용충이 계승하여 서연(西燕)을 건국하였다.


모용홍에게 패한 요장은 치앙족(羌族, 강족)을 규합하여 후진(後秦)을 세웠다.

전진의 장군 여광(呂光)은 서역 원정후 복귀 중에 비수의 패전을 듣고 간쑤에서 자립하여 후량(後凉)을 건국하였다.


이와 같이 화베이는은 혼란 속에 빠져들어 전후 10개국이 성립되었고 이러한 혼란은 386년 탁발규에 의해

부활한 대국(代國)이 북위로 이름을 바꾼 뒤에 세력을 확장해 최종적으로 화베이를 통일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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