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징 대학살 사건


일본군은 난징 주변과 시내로 도망친 중국 국민당군 잔당을 수색한다는 명분으로

6주 동안 포로들과 민간인들을 도륙했다.


학살의 정확한 규모는 불명확하지만,

전후에 일부 유골 매립지를 근거로 든 연구 결과가 수만 명 단위 이하로 내려가는 경우는 적다.


극동국제재판 판결에 따르면 최소가 12만 명이며 최대 추정숫자는 약 35만 정도이다.

일본 학계에선 10-20만명 정도가 중론이며 프랑스에선 약 9만명정도가 학자의 의견이다.


다만 여기서 9-20만명은 난징과 주변 변두리 정도에 한정한 것이며

주변 도시까지 포함한 것은 아니다.


당연하지만 20~30만 명은 난징 시내 학살 숫자가 아닌 난징 근교와 진격 도중 숫자도 포함한 것이며

당연히 난징 한곳에서 저렇게 나오기는 힘들다고 본다.


중국에서는 난징 대도살, 영어로는 Nanking Massacre.

일본에서는 '학살'이라는 명칭을 붙이지 않고 '난징 사건'으로 불렸었다.


물론 축소, 은폐하려는 의도였다.

치치지마섬 식인 사건을 '오가사와라 사건'으로 부르는 것과 마찬가지.


하지만 근래에는 일본의 교과서에서도 '대학살'이라는 명칭으로 바뀌어가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야마가와 출판사의 상세일본사(詳説日本史)와 도쿄서적에서는 여전히 난징 사건(南京事件)이라고 부르지만,

데이코쿠서원은 난징 대학살, 기요미즈서원은 난징대학살사건, 야마가와 출판사에서는

상세세계사(詳説世界史)와 일본문화출판에서는 난징학살사건 이라고 부르는 등이다.


또한, 2006년의 중일수뇌회담의 결과로 진행된 '일중역사공통연구' 논문의 일어판에서도

'난징학살사건' 이라는 표현이 사용되었다.


당연하겠지만, 일본 내에서도 정직한 인간들이 있다.

사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을지도 모른다.


1937년 일본이 중일전쟁을 일으킬 때는 베이징과 상하이에서 시작해

빠른 시일 안에 주요 대도시를 점령하고 중국 국민당의 항복을 받아낸다는 속전속결이 기본방침이었다.


그러나 상하이 전투가 국민당군의 거센 저항으로 예상보다 길어지고 결국 오송 전투에서 큰 피해를 입고서야

승리를 거두게 되자 눈이 뒤집힐 대로 뒤집힌 일본군은 당시 중화민국의 수도 난징으로 진군했다.


1937년 10월 9일 상하이가 함락된 후 국민당 수뇌 멤버들은

난징을 전략, 전술적으로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판단하고 이동하기로 결정한다.


이 때 유일하게 탕성즈 한 사람만이 "난징을 필사적으로 지켜 생사를 함께 하겠다"고

방어전을 주장하면서 난징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어 남는다.


11월 15일 장제스는 수도를 충칭으로 옮겨 철퇴하고,

12월 10일 난징에 남아있는 중화민국군은 일본군의 최후통첩을 무시하자 일본군은 난징 점령작전을 개시했다.


결사항전을 주장하던 난징 방어군 사령관 탕성즈는 전투 개시 직전에 더럭 겁을 먹고 장제스에게

퇴각하게 해달라고 요청했지만 장제스는 당연히 거절했고 이에 탕성즈는 울며 겨자먹기로 전투에 임해야 했다.


12월 12일까지 중국군은 난징을 그런대로 잘 방어했지만 탕성즈가 처음부터 난징 외곽에서 일본군의 진격을

방어할 수 있는 여러 요충지역들을 스스로 포기하는 등 방어 전략을 잘못 수립했는데다가

화력과 병력의 질적 측면에서 압도적으로 불리했기 때문에 장기적인 사수는 처음부터 불가능했다.


결국 12월 12일 일본군은 독가스를 뿌려 중국군 방어선을 무력화시켰고

탕성즈는 그날 오후 8시 전군에 퇴각명령을 내린 다음에 참모들과 함께 우한으로 달아났다.


사령관이 사라진 난징의 중국군은 일본군에게 포로로 잡히거나,

난징에 남아 계속 싸우거나, 난징을 어떻게든 벗어나는 등 완전히 와해된다.


양쯔강에는 수십만 난징 시민들과 중국군이 살기 위해 아수라장을 이루었고

일본군은 그곳을 집중 공격함으로 무수한 인명을 살상했다.


12월 13일 오전 4시에 난징의 정부 청사가 함락됨으로 난징은 일본군의 수중에 완전히 떨어졌다.

그리고 난징에는 아직 50~60만에 달하는 패잔병들과 시민들이 남아 있었다.


손쉽게 난징을 손에 넣은 일본군은 백기를 들고 항복한 국민당군은 물론, 패잔병을 처리한다는 명목으로

'모자를 오래 쓴 흔적이 있거나 손에 굳은 살이 박힌 젊은 남자' 모두를 닥치는 대로 끌어모아

기관총으로 양쯔강에 쓸어넣었다.


이들 중 과연 몇이나 패잔병이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애시당초 그 시대에 손에 굳은살이 안 박힌 남자가 많기나 할까 싶다.


물론 패잔병이 맞다고 쳐도 전투의지를 잃은 사람을 학살하는 것도 크나큰 전쟁범죄임은 말할 것도 없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야만적이나, 나중에는 총알이 아까워서 칼로 난도질하거나 생매장까지 했다고 한다.


전후에 학살에 참가한 한 군인의 일기가 발굴되었는데,

"심심하던 중 중국인을 죽이는 것으로 무료함을 달랜다."면서

"산채로 묻어버리거나 장작불로 태워 죽이고 몽둥이로 때려 죽이기도 했다."라는 문구가 등장한다.


난징 대학살에 단일 규모로 가장 큰 학살은 무푸산 근처에서 일어났다.

난징의 북쪽, 곧 난징과 양쯔강의 남쪽 둑 사이에 있는 이 산에서는

5만 7,000명의 민간인과 중국의 전직 군인들이 살해되었다.


수많은 중국군의 시체를 처리하는 것은 일본군에게 또 다른 문제였다.

난징과 그 주변에서 학살당한 전체 중국군 가운데 일부만이 무푸 산에서 처형되었는데,

이 일부 시체 처리에만 며칠이 걸렸다.


시체를 매장하는 방법을 사용하기도 했지만 7천에서 8천구의 시체를 묻을 수 있는

커다란 구덩이를 팔 수 있는 곳을 찾기가 매우 힘들었다,


시체를 소각하는 방법도 있었지만 일본군에게는 그럴만한 충분한 양의 연료가 없었다.

예를 들어 무푸산 학살 후, 일본군은 시체에 휘발유를 드럼통으로 부어 시체를 태우려고 했지만

불길이 시체를 재로 만들기 전에 연료가 바닥나는 일까지 있을 정도였다.


결국 대부분의 시체는 양쯔 강에 내던져졌다.

애초에 학살을 안했으면 이런 걸로 고생하지도, 연료를 낭비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조난자 명단

실명이 확인되지 않은 분들은 그냥 김씨, 이씨 등으로 성씨만 씌여 있기도 하다.



조난자 300,000 만 명





조난자 한명한명의 신상정보를 정리해둔 자료





도서관처럼 조난자의 이름을 검색해서 열람할 수도 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