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도사안기념관(王導謝安記念館)


오의항(烏衣巷)의 중심은 왕도사안기념관(王導謝安記念館)이다.

하지만 그 옛날 왕도와 사안의 고택은 이미 그 흔적조차 없어진지 오래이고 지금은 그 자리에 기념관이 세워져 있다.


기념관에 들어서면 입구에 위진유풍(魏晉遺風)이라 쓰인 현판 밑에

유우석의 시 <오의항(烏衣巷)>이 각종 서체로 판각되어 전시되고 있다.


왕도(王導)와 사안(謝安)은 육조(六朝 : 東吳, 東晉, 宋, 濟, 梁, 陳)시대를 이끈 대표적인 귀족 정치인이다.

유명한 서예가 왕휘지(王羲之)와 시인 사령운(謝靈運)도 그들의 집안이다.


중요한 것은 그들은 경제력과 군사력을 독점했고, 그것을 배경으로 귀족정치를 했다는 것이다.

북방의 전진(前秦) 80만 대군을 불과 8만의 동진 군대로 패퇴시킨 유명한 비수지전(淝水之戰)의 영웅,

사현(謝玄)도 그들 집안이다.


조카 사현의 승전보에도 삼촌인 사안은 놀라거나 기뻐하지 않고,

“어린 녀석들이 적을 격파했군” 하고 조용히 중얼대고, 두던 바둑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계속 열중했다고 한다.

 

그런 냉담과 오만이 귀족정치의 특성이고, 현학인가 보다.

물론 그 직후 손님이 가고 혼자 있자 너무 기뻐서 폴짝폴짝 뛰다가 나막신 굽이 문지방에 걸려 넘어져

이가 부러졌지만 모르고 계속 기뻐했다는 불각극치지절(不覺屐齒之折)이라는 고사성어도 있다.

그래서인지 유명한 곽말약(郭沫若, 궈모러)의 기념사도 문 옆에 세워 놓았다.


왕도(王導, 276년 ~ 339년)


중국의 5호 16국 시대의 정치가. 자는 무홍(茂弘).

서진과 동진을 섬겨 그의 활약에 의해서 낭야 왕씨는 육조 시대의 남조를 대표하는 명문 귀족이 되었다.


아들 왕열(王悦), 왕습(王洽) 등이 있고,

동진의 대장군 왕돈(王敦)은 사촌형, 서가의 왕희지(王羲之)는 종조카에 해당한다.


서진 시대에는 낭야왕 사마예(司馬睿)를 섬겨서 가까운 장래에 진이 멸망할 것을 예측하고,

도읍을 낙양에서 건강(建康, 건업)으로 옮기도록 진언해, 307년에 건강으로 옮겼다.


308년에 5호 16국 시대가 시작되어, 서진은 유연(劉淵)이 세운 한에 의해서 공격을 받는다.

유연의 뒤를 이은 유총은 낙양을 공격해 함락시켰고, 회제(懐帝)는 붙잡혀 진의 황족 대부분이 살해당한다.


313년에 회제가 살해당하자, 무사히 장안으로 탈출한 사마업(司馬鄴)이 즉위하지만

유요에게 공격받아 316년에 붙잡혀 다음 해에 일족과 함께 살해당한다.


그 때 강남으로 피했기에 이런 재난으로부터 피할 수 있었던 유일한 황족인 사마예는,

317년에 왕도의 후견으로 원제로 즉위한다. 이것이 동진의 시작이다.


왕도는 동진의 재상으로서 고영(顧栄)、하순、기첨(紀瞻)、유량(庾亮)、변호(卞壺)、

제갈회(諸葛恢, 제갈탄의 손자, 제갈정의 아들)、간보(干宝)、곽박(郭璞) 등의 인재를 원제에게 추천했다.


백육연(百六掾)이라고 불리는 이들 백여(중국 전토)의 하급 관리들은,

화북으로부터 피해 온 귀족과 강남의 호족으로 구성되어 있어

왕도는 이런 이해관계가 다른 사람들을 부하로 모으는 것으로 그들의 대립을 정리하고

이를 이용해 동진의 정권 기반을 안정시키려고 생각했다.


한편, 사촌의 왕돈에게 군사를 주어 장강 중류 유역을 제압하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원제는 정치·군사의 양면에서, 낭야 왕씨의 존재가 커지는 것을 경계하게 되어,

유외(劉隗) · 조협(刁協) 등을 중용하고, 왕도의 정치력을 배제하려고 했다.


322년, 대장군이 되었던 왕돈은 원제의 이러한 움직임에 불만을 가져,

유외·조협의 타도를 명목으로 무창에서 거병했다(왕돈의 난).


이 때 수도 건강에 있던 왕도는, 유외에 의해 반란자의 일족으로 처형될 뻔 하지만,

주의(周顗)의 중재에 의해 무사할 수 있었다.


동년, 원제는 사망하여 명제가 즉위했고, 324년, 소준(蘇峻) 등에 의해 왕돈의 반란은 진압되지만,

왕도는 실각하는 일 없이 정치를 계속 맡았다.


325년, 명제가 사망하고 성제가 즉위하자, 왕도는 사도로서 중서령 유량(庾亮)과 함께 정치를 맡게 되었다.

성제의 외척이었던 유량은, 당시 왕도를 능가하는 권세를 자랑해,

북쪽 이래의 귀족과 강남 토착의 호족 사이의 균형을 중시하는 왕도의 정치 방침을 바꿔,

엄격한 법치주의에 의해서 황제의 권위를 강화하려고 생각하지만,

327년, 소준이 유량 타도를 명목으로 반란을 일으키는 사태를 낳았다(소준의 난).

329년에도 도간(陶侃), 치감(郗鑒) 등에 의해서 반란이 진압되자,

유량은 중서령을 물러나 지방에 진주했으므로, 다시 왕도가 단독으로 정치를 맡게 되었다.


후에 유량은 왕도의 시정이 너무 관대하다고 하여, 거병해 왕도를 저지하려고 생각했지만,

치감의 찬동을 얻지 못하고 거병을 단념했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왕도에게 전했지만, 왕도는

"자신과 유량은, 국가를 위해서 기쁨과 슬픔을 함께 하고 있다.

그러니까 만약 그가 자신을 불의불충한 사람으로서 공격해 온다면,

나는 깨끗히 관직을 물러나 은거하겠다.

아무것도 무서워할 것은 없다" 라고 말했다고 한다.

339년에 64세로 사망해, 승상이 추증되었다.


사안(謝安 320 ~ 385)


동진(東晉)의 문인, 저명한 정치가, 자는 안석(安石).

명문가에서 태어난 데다가 인격이 고매하고 기품이 청아하며

아량(雅量: 담대한 기질을 가리켰는데 당시엔 매우 높게 평가되던 덕목이었음)까지 있어서 젊어서부터 명성이 자자했다.


그러나 벼슬에는 별로 뜻이 없어 강주자사인 유빙(庾빙)이 여러 차례 출사를 권고했는데도

병을 핑계대고 번번히 사양하여 나가지 않았다.

한번은 더 사양하기 어려워 마지못해 부임했으나 한 달여 만에 핑계를 대고 집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그 뒤에도 여러 번 출사를 명하는 조칙이 있었지만 듣지 않고 동산(東山)에 은거하여

서예가인 왕희지 · 승려인 지도림(支道林: 석지둔(釋支遁)) · 문인인 손작(孫綽) · 허순(許詢) 이충(李充) 등과

시를 짓거나 글씨를 쓰고 바둑을 두며 기생들과 노닐기만 할 뿐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뒤에 결국 출사하여 사마를 거쳐 이부상서에 오르고 제위를 빼앗으려는 환온의 야망을 저지,

또 전진왕 부견이 백 만 대군을 이끌고 진을 침공하자 정토대도독이 되어 소수의 병력으로 이들을 격파, 국난을 면케했다.


중국역사상 가장 풍류적인 재상(宰相)


중국역사상 유명한 재상들은 각자 독특한 점들이 있다.

모두 그 나름대로의 독특한 트레이드마크가 있다.


"국궁진췌(鞠躬盡瘁)"라면 누가 제갈량(諸葛亮)을 따라올 것인가?;

"예의개혁(銳意改革)"이라면 왕안석(王安石)만한 사람이 없다.

"좌우봉원(左右逢源)"이라면 왕도(王導)를 꼽아야 할 것이고

"돈적거기(囤積居奇)"라면 여불위(呂不韋)를 말해야 하며

"구밀복검(口蜜腹劍)"은 이임보(李林甫)를 따를 자가 없다....


트레이드마크는 각양각색이고, 그 중 아무나 한 사람을 고르더라도,

그 인생의 오묘함을 연구하려면 몇 년은 최소한 걸릴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혹은 IQ가 아주 뛰어나고, 혹은 흉금이 남달리 넓은 엘리트들 중에서

유일하게 한 명상(名相)은 트레이드마크가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다.


그리고 사람들의 부러움을 많이 사는데,

그는 바로 "풍류(風流)"라는 두 글자로 역사에 이름을 남긴 동진(東晋)의 재상 사안(謝安)이다.


"풍류"라는 단어는 고대에는 보통 단어가 아니었다.

풍우란(馮友蘭) 선생의 해석에 따르면: "풍류라 함은 인격의 지극한 아름다움(至美)이고,

그것은 일종의 지고(至高)한 인생의 경지이다.


사안에 있어서 그것은 바로 커다란 공명을 당대에 거두면서도

자신의 진실한 성정(性情)을 잃지 않은 것이다.


이는 중국의 수천 년 동안 문인들의 마음 속에서 가장 완벽한 이상향이었다.

단지 이런 인생을 몇 사람이나 살았는가? 바로 사안은 그들의 꿈을 이룩한 사람이다.


과연, 이태백이 사안이라면 바로 고개를 숙이고, 일생동안 그를 우상으로 삼았다는 것도 이해가 된다.

소동파, 육우, 왕안석 등등도 그들의 시사에서 사안에 대한 존경을 드러내는 것을 잊지 않았다.


얼마전에는 이중천(易中天) 선생이 삼국지를 감상한 후 글을 써서

"오로지 사안만이 진짜 천인(天人)이로다"라고 감탄한 바 있다.


의심의 여지없이, 사안은 동진왕조의 거목이다.

앞에는 "좌우봉원"의 왕도가 있고, 뒤에는 "풍류소쇄(風流瀟灑)"의 사안이 있다.

그리하여 백년왕조가 지탱하였던 것이다.


"소쇄"라는 두 글 자는 왕희지의 아들 왕헌지가 사안에 대하여 한 찬사에 나오는 말이다.

'당신은 원래 가장 소쇄로운 사람이다.' 아마도 소쇄라는 말의 어원이 여기가 아닐까?


사안의 일생에서 가장 휘황한 두 번의 시기가 있다.

환온(桓溫)의 반역음모를 담담하게 저지한 것과, 진나라의 백만대군을 웃으면서 격퇴한 것이다.

이것들은 이미 역사서에 기록되어서 후세인들이 서로 앞다투어 칭송하는 것이 되었다.


373년, 동진천하를 빼앗으려고 마음먹은 대사마 환온은 병력을 이끌고 조정에 들어와서 성밖에 홍문연을 벌였다.

그리고 그는 이번에 온 것은 바로 "왕사(王謝)를 주살하고, 진정(晋鼎)을 옮기"기 위한 것이라고 공언했다.


바로 사안과 또 다른 중신 왕탄지(王坦之)를 죽여버리고, 진나라로부터 나라를 빼앗겠다는 말이다.

그를 영접하러 갔던 대신들을 혼내서 쫓아보내니, 모두 얼굴이 흙색이 되었다.


왕탄지도 등에 식은 땀을 줄줄 흘렸고,

내용을 기록하기 위하여 손에 들고 있던 수판(手版)을 거꾸로 들기까지 하였다.


오로지 사안만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앞으로 걸어나가서, 낭랑한 목소리로 환온에게 물었다.

"환공! 내가 듣기로 도리를 아는 제후라면 마땅히 나라를 위하여 사방을 지켜야 하는데,

그대는 어찌하여 병사를 장막의 뒤에 두었는가?"


환온은 졸지에 멍해졌다.

원래 조정의 모든 사람들을 놀라게 해서 제압했다고 생각했고,

황제가 최소한 그를 섭정왕에 봉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사안이 이렇게 나오자 그의 원래 속셈을 이루기 어렵게 되었기 때문이다.


사안의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죽는 것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태도를 보자,

그는 한참을 어떻게 대응해야할지 모르게 되었다.


마침내, 환온은 웃음띤 얼굴을 하고는 사안의 손을 끌어당기면서, 그와 얘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조정의 모든 대신들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동진의 한바탕 위기는 이렇게 넘어갔다.

만일 이번에 사안이 통상적인 문인의 담량과 풍류로 동진을 구했다고 말한다면,

10년후의 비수지전(淝水之戰)은 그가 구해낸 것은 단순한 동진왕조가 아니라 전체 천하였다.

심지어 수천년의 중국문화라고 할 수 있다.


383년, 전진의 천왕 부견이 친히 90만 대군을 이끌고, 몇 개 방향으로 나누어 장강으로 밀고 내려왔다.

동진에서는 위로는 황제에서, 아래로는 문무대신에 이르기까지, 졸지에 어떻게 해야할지를 모르게 되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아예 투항하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했다.

이때의 사안은 바로 대권을 손에 움켜쥐고 있던 재상이었다.


모든 사람의 눈이 그를 향했다.

그가 도대체 어떻게 이 난국을 수습할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사안은 이전처럼 담담했다.

뭐 무서울 것이 있는가? 그는 바로 응전하기로 결정한다.


"나는 국가의 역량을 집중하여 여기에서 끝장내버리겠다"

그 후에 다시는 어찌할 바를 모르는 대신들은 신경쓰지도 않고,

친구들을 이끌고 함께 별장으로 가서 바둑을 둔다.


사람들이 모두 안정되자, 사안은 다시 집으로 돌아와서 장수를 지명하고, 전략적인 배치를 한다.

비수지전이 진행되는 1달 여 동안 사안은 "진지이정(鎭之以靜)"의 책략하에

전체 동진은 보통 때와 마찬가지로 평안했고, 백성들도 모두 안심하고 지냈다.

전혀 큰 전쟁을 치르는 나라같지 않았다.


금방 비수대첩의 소식이 전해진다.

사안의 조카인 사현(謝玄)이 동진의 가장 용감하고 전투를 잘하는 "북부병(北府兵)"을 이끌고

회하전선에서 적은 병력으로 많은 적을 물리친 것이다.


일거에 부견의 대군은 궤멸한다.

이때의 사안은 여전히 집안에서 손님들과 바둑을 두고 있었다.


그는 승리했다는 보고를 받아보고는 가볍게 한켠에 밀어놓고, 다시 바둑에 집중한다.

마치 아무 일도 발생하지 않았던 것처럼.


오히려 손님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물었다.

"전선의 소식입니까?" 사안은 그제서야 담담하게 대답했다.


"아이들이 이미 적군을 대파했다는군요..."

어쨌든 사안도 신선은 아니니까, 이때의 심정은 아마도 기뻐서 죽을 지경이었을 것이다.


그래도 그러한 마음 속의 기쁨을 누르고, 방으로 돌아갔다.

발에 신고있던 나막신이 문턱에 부딛쳐서 부서졌는데도, 그는 전혀 깨닫지 못했다.


이 두 번의 역사적인 휘황함은 사안의 일생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들이다.

다만, 역사상 유일한 "풍류재상"인 사안에 대하여 후세인들이 가장 감탄하는 점은

이같은 불세출의 공적을 세웠다는 것이 아니라, 그의 초연물외(超然物外)한 심정과 성정이

바로 후세에 1쳔여 년 간이나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는 것이다.


사안은 일찌감치 소쇄한 풍도로 이름을 날렸다.

그러나 그는 근 20년이나 은거한 후에 관직에 나섰다.


이 이십년동안, 관료사회가 어떻게 억지로 그를 끌어들이려 하거나 유혹하더라도

그는 못들은 것처럼 살았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의 인생목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중에 가족의 책임을 부담하기 위하여, 어쩔 수 없이 관직에 나서게 된다.

사안이 관직을 맡은 것은 어쩔 수 없이 떠맡았다고 할 수 있다.


그의 불세출의 공적은 원래 그가 필요로 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는 정말 동진천하를 떠받쳤고, 그는 관직에서도

시원시원하게 있으면서 아주 허약한 나라를 잘 버티게 해왔던 것이다.


마지막에는 그가 개세의 공적을 세우고, 사마씨 왕실이 불안해하고 있을 때

그는 대권을 손에쥐고, 병력을 움켜쥔 상황 하에서, 아무런 미련도 없이 모든 대권을 버려버린다.


황제가 바라보는 가운데, 그는 시원스럽게 경성을 떠난다.
이렇게 태산보다 큰 권력을 그는 왜 버릴 수 있었을까?

왜냐하면 그의 심경은 원래 훨씬 더 크고 넓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렇게 하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자연"이 무엇인지를 진정으로 아는 인물에게는 모든 외물은 작게 보인다.


그래서 가족이든 국가이든 이런 중대한 책임이 항상 사안의 머리를 짓눌렀지만,

사람들은 그가 비분강개하거나 놀라고 당황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그들이 본 것은 항상 시원스럽고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
사안은 항상 자아중심적인 사람이었다.


은거하고 있을 때, 그는 하고싶은대로 나날을 보냈다.

아마도 은거라면 다른 사람에게는 청빈의 대명사이겠지만,

사안에게 있어서는 "은(隱)"이라는 것이 소쇄한 것이다.


소쇄할 뿐아니라, 화려하기도 하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음률을 좋아하고, 어른이 되어서도 이를 떠나지 못했다.


그는 약간의 가기(歌妓)들을 길렀고, 자주 그녀들과 손을 잡고 숲으로 샘으로 놀러가거나,

노래하고 악기를 연주했다.


조정에 관직을 맡은 후에도 집안에는 여전히 노래와 춤이 끊이지 않았다.

국가와 집안에 상을 당했을 때도 그는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관리들의 의론이 분분했다. 모두 그가 예법에 어긋난다고 손가락질했다.

사안은 그들과 다투지 않았고, 아예 그들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심지어 그가 커다란 공을 세우자 사방에서 유언비어가 난무했다.

어떤 사람들은 그를 왕망에 비유하기도 했다.


그래도 그는 전혀 마음에 두지 않았고, 매일 여전히 성대한 연회를 집안에서 베풀었다.

매번 바깥나들이할 때면, 가마는 화려하고 헌앙했다.


그가 보기에 조건이 허락하는 하에서 그는 최대한 자신의 심령의 자유와 만족을 누리고자 한 것이다.

원래 이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일이다. 원래 자신의 성격대로 생활한 것이다.


민녀 축영태가 회계 양산백을 위하여 목숨을 바쳤다는 이야기를 듣자, 사안은 감동했다.

그는 즉시 황제에게 글을 올려, 축영태에게 "의부(義婦)"라는 칭호를 내리게 하고,

그후에 친히 글을 써서 그녀의 묘를 "의부총(義婦塚)"이라고 하였다.


그녀를 천하 여자의 모범이 되도록 했다.

양산백,축영태의 이야기는 이리하여 천고에 전해지게 된 것이다.


사안의 마음 속에 있는 이 "의부"를 보자.

딸이었을 때 남장을 하고 돌아다녔고, 부모가 그녀에게 짝지어준 혼인을 마다하고 그녀는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


그후 사랑하는 낭군이 죽자, 그녀는 명분도 버리고 신분도 버리고, 함께 한 곳에 묻힌다...

이것이 고대에 떠받들던 "정결열녀(貞潔烈女)"인가?


오히려, 완전히 봉건적인 예교에 반항하는 전형적인 인물이다.

그러나 사안은 이런 여인을 마음에 들어했다.


사실 그것은 결국 하나로 귀결된다.

"진(眞)". 사안의 마음 속에 이것이야말로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다.


당시 사람들은 사안과 왕도를 나란히 놓고 얘기하기를 즐겼다.

그들은 강좌의 두 "풍류재상"이다.


그러나, 남조에 이르러, 왕도승상의 후대인 상서복야 왕검(王儉)은 이렇게 말한다.

"강좌의 풍류재상은 오로지 사안 한 사람뿐이다."


사실 전체 중국역사에서 재상에게 "풍류"를 얘기하자면 사안을 따를 사람이 없다.

그는 "풍류"를 마음 속으로 가져간 사람이다.

그의 "풍류"는 바깥의 외물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글 : 유아여(劉雅茹)


내연당(來燕堂)  왕도사안기념관(王導謝安記念館)의 주 건물


내연당의 유래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사안(謝安)은 평소 산수 간에 유람하기를 즐겼는데 하루는 배를 타고 바다를 항해하다가 풍랑을 만나 배가 뒤집혔다.


사연이 간신히 나뭇조각에 의지해서 육지에 다다르니

검은 옷[烏衣]을 입은 노인이 그를 맞아 자기 집으로 안내했다.


알고 보니 그곳은 의식이 풍족한 오의국(烏衣國)이었다.

그곳에서 한동안 지내면서 노인의 딸과 정분을 맺어 혼인을 했다.


그러나 세월이 흐름에 따라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여

노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러던 어느날 집안 대들보 위에 한 쌍의 제비가 집을 지은 것을 보고 불렀더니

그의 어깨 위에 날아와 앉았다.


두고 온 오의국의 부인에게 간절한 사연을 적은 편지를 제비 발에 매어 보냈더니

이듬해 봄에 제비가 답신을 가지고 날아왔다.


그래서 사안은 해마다 제비가 답신을 가지고 날아오기를 기원한다는 뜻을 담아서

거처하는 집에 내연(來燕, 제비가 돌아오다)이라는 편액을 달았다고 한다.


유우석의 시 <오의항>은 이 전설과 무관하게 읽어도 충분한 설득력을 가지지만

내연당의 제비 전설과 교묘하게 엮여서 더욱 재미있게 다가온다. (송재소, 중국인문기행, p 418~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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